태경은 베란다로 나가 전화를 걸었다.사랑은 키가 크고 훤칠한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이 생각보다 훨씬 냉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태경이 전화 너머의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전화할 때 그의 표정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차가웠던 미간이 점차 풀리면서 입가에는 담담한 미소가 떠오르고, 모처럼 부드러운 기색이 비쳤다.말없이 시선을 돌린 사랑은 침대 시트를 힘껏 쥐었다. 심장은 마치 갈기갈기 찢어진 것만 같았다.몇 분 후, 태경이 전화를 끊고 돌아왔다. 사랑은 자신이 참을성이 많다고 생각했지만, 오늘 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그녀는 작은 얼굴을 들어 태경을 바라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강세영 씨 귀국했어요?”사랑은 이미 남에게서 세영이 귀국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세영은 어릴 때부터 사람들에게 떠받드는 공주로 살았는데,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다.세영이 공항에 도착하자, 동창들은 이미 SNS에 사진을 올리며 그녀를 환영했다.태경은 가슴을 드러내는 짙은 색의 가운을 입고 있었고, 자신을 바라보는 사랑의 눈빛에 은근히 숨이 막혔다.“응.”사랑은 침묵했다.‘나도 묻지 말았어야 했는데.’태경은 화가 났든 안 났든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영원히 냉담한 표정을 지은 채, 그의 마음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방의 불을 끄고 침대 머리맡의 작은 등을 남겨두었다.사랑은 자신을 이불 속으로 숨기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코를 훌쩍거리며 눈물을 삼키려 애썼다.침대에 누운 태경은 사랑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뜨겁고 단단한 그의 몸이 그녀를 품에 가두었다. 둘의 몸은 서로 닿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친밀했다.남자는 코끝으로 사랑의 어깨를 가볍게 문질렀고,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덜미에 닿았다. 태경의 손은 그녀의 배를 어루만졌고, 그 뜨거운 온도는 끊임없이 전해져 왔다.그는 낮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좀 괜찮아졌어?”사랑은 태경이 자신을 부드럽게
사랑은 조용히 자신에게 말했다. ‘커피 한 잔 타는 것뿐이니, 아무 일도 없을 거야.’사랑은 아메리카노 두 잔을 준비해 대표님 사무실로 가져갔다.태경은 냉정하게 책상 앞에 앉아 있었고,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셔츠의 소매는 위로 말아 올려져 있었고, 드러난 하얀 손목조차도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심심한 듯 손가락으로 펜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사랑의 시선은 소파에 앉아 있는 세영으로 향했다. 세영은 오늘도 눈에 띄는 빨간 벨벳 탱크톱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곱슬머리 덕분에 매력이 한층 더 강조된 모습이었다.세영의 미모는 화려한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그녀의 이목구비는 정교했고, 눈매에는 요염한 빛이 서려 있었다.지금 세영은 나른하게 태경의 사무실 소파에 엎드려 있었고, 다리를 꼬고 앉아 그의 책과 서류들을 이리저리 뒤적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심심했던 것인지, 힐끗 한 번 쳐다보곤 바로 옆으로 던져버렸다.“태경아, 네 사무실은 왜 이렇게 검은색 아니면 하얀색뿐인 거야? 너무 밋밋하지 않아?” 사랑은 세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세영이 당당하게 태경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으며, 사랑은 뜻밖에도 조금 부러움을 느꼈다.태경은 결벽증과 강박증이 있는 사람이었다. 사무실 안의 서류는 덕훈조차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지만, 세영은 오히려 마음대로 던져버릴 수 있었다.마치 누군가의 시선을 알아차린 듯, 세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사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썹을 들어올리며 붉은 입술을 의미심장하게 구부리며 미소를 지었다.사랑을 훑어보는 세영의 눈빛은 무척 차가웠다. 그녀는 자신의 불만을 감추며 일부러 모르는 척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태경에게 물었다.“이 사람이 네 비서야?”대답을 듣기도 전에, 세영은 천천히 일어서서 머리를 뒤로 넘기더니 태경의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왜 이렇게 예쁜 비서를 쓰는 건데?”세영의 비아냥에 익숙해진 태경은 사랑을 보더니 먼저 나가라고 했다.태경은 자신의 사생활이 들키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설령 그 사람
사랑은 세영과 화장실에서 다툴 생각이 없었다. 그 말을 끝으로 바로 돌아섰다. 그러나 세영은 그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두 팔을 끼고 비웃는 표정으로 말했다.“태경이 널 사랑하기라도 하니?”사랑은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태경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침대 위에서도 그에게는 그저 욕구를 발산하는 도구일 뿐이었다.태경은 아마 예진 같은 여자들에게는 약간의 감정이라도 있을지 모른다. 그들의 얼굴이 마음에 들었거나, 성격이 마음에 들었거나. 오래 사귀지 않았어도, 태경은 그 여자들을 어느 정도는 아낀 적이 있었다.하지만 사랑을 대할 때만큼은 달랐다. 그녀는 그저 계약을 이행하는 동료에 불과했고, 부부로 가장해야 할 배우일 뿐이었다. 태경은 사랑에게만큼은 유독 감정이 없었다.학교 다닐 때부터 태경은 세영과 사귀기 전에도 여자친구가 많았다. 모두가 눈에 띄게 아름답거나 몸매가 뛰어난 미녀들이었다. 태경은 얌전하고 줏대 없는 여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붉은 장미처럼 열정적이고 화려한 사람들에게 끌렸다.사랑은 차갑게 고개를 들었다.“날 사랑하든 말든, 전혀 중요하지 않아. 난 상관이 없으니까.”세영은 웃기 시작했다.“그래?”말하면서 세영은 앞으로 걸어갔고, 하이힐을 신고 있어 사랑보다 키가 더 컸다. 그녀는 허리를 살짝 굽히며 웃으며 사랑에게 귓속말을 했다.“고등학교 때, 칠판에 붙인 그 연애편지, 네가 쓴 거지?”사랑은 주먹을 꽉 쥐고서야 진정을 할 수 있었다.이 일은 오래전의 일이라서 그녀는 거의 잊어버렸다.졸업하기 전, 사랑은 용기를 내 고백의 편지를 썼고,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서 태경의 책상에 집어넣었다.그들은 귀족 학교를 다녔기에 교실에는 CCTV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나중에 태경은 그 편지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데다, 그의 책상에 연애편지를 넣는 여자도 셀 수 없이 많았다.그러나 누가 사랑이 쓴 편지를 주웠는지, 그녀의 이름을 찢은 다음
눈물은 쓸모없는 것이 아니었지만, 사랑의 눈물이 태경에게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사랑은 자신이 이미 이런 일로 상처받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이런 말을 들으니, 그녀의 마음은 많이 아팠다.심하게 아픈 게 아니라, 마치 바늘이 천천히 찌르는 것처럼 괴로웠다. 그 바람에 사랑은 제대로 설 수가 없었다.사랑은 깊이 숨을 쉬더니, 자신의 감정을 잘 조절했다. 그녀는 조용히 사무실 문을 닫고, 비서실로 돌아왔다.그녀는 사인할 서류를 책상 위에 놓은 다음 새로 입사한 인턴을 불렀다.“대표님에게 서류 좀 보내줘. 내일 쓰실 거야.”인턴은 태경을 유난히 두려워했다. 평소에 회의를 할 때도, 뒤에 숨어있다가 가끔 태경을 훔쳐보곤 했다.동료들의 말을 빌리자면, 태경은 카리스마가 넘쳐서, 화를 내지 않고 웃어도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강 비서님, 저 정말 너무 무서워요.”인턴은 평소에 잡일을 하면서, 입사한 이래 대표님 사무실에도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사랑이 가장 대단하다고 느꼈다. 못 하는 것이 없고, 또 무엇이든 잘할 수 있었다. 회사 일을 잘 처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태경의 사생활까지 해결할 수 있다니.사랑은 어쩔 수 없었다. “진 비서는?”인턴은 무거운 짐을 벗은 듯 얼른 대답했다.“진 비서님은 이 비서님과 같이 나가셨어요. 곧 돌아오실 거예요.”“그럼 진 비서 기다리자.”“네.”...점심, 태경과 세영은 밥을 먹으러 나갔는데, 오후 두세 시가 되어도 태경은 사무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마침내 조마조마할 필요가 없었고, 일을 끝낸 후, 핸드폰을 놀며 수다를 떨었다.사랑은 오후에 할 일이 별로 없어서 자리에 앉아 멍하니 있다가, 사무실에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컴퓨터로 임신 중 주의해야 할 사항을 검색했다.밑에 수많은 건의가 튀어나왔다.사랑은 열심히 핸드폰으로 빽빽이 적었는데, 한순간 또 힘이 빠졌다.‘이 아이를 남겨둘 생각이 없는데, 이렇게 많은 것을 주의할 필요가 있을까?’사랑의 머릿속
사랑은 금세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마음속으로만 몰래 태경의 이름을 부르곤 했다.태경의 부모님 앞에서 이름을 부를 때를 제외하면, 사랑에게는 그를 다정하게 ‘남편’이라 부를 기회가 없었다.심지어 밤에 그런 일을 할 때조차도, 그저 감정이 북받친 순간에만 작은 목소리로 태경의 이름을 부르며 살살 해달라고 애원할 뿐이었다.사랑은 침대 위에서 그야말로 엄청난 고생을 겪어야 했다. 태경은 힘이 너무 셌고, 소유욕도 지나치게 강했다. 심지어 그녀의 감정마저 통제하고 싶어 했다.사랑도 점차 깨달았다. 태경이 자신에게 말을 하지 못하고, 불쌍하게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을 좋아한다는 것을...‘섬뜩한 괴벽이 있는 사람이야.’사랑은 마음을 진정시켰다. “알았어요.”전화를 끊고 사랑은 일찍 퇴근해 집으로 돌아왔다.옷장에는 비싼 치마가 많이 걸려 있었는데, 분기마다 신상품을 보내오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회사에서 입을 수 있는 옷은 하나도 없어서, 사랑은 거의 입지 않았다.그녀는 빨간색 치마 두 벌을 골랐지만, 색깔이 너무 화려한 것 같아 다시 내려놓았다.결국 사랑은 벨벳 핑크색의 긴 치마를 선택했다. 진주 끈으로 허리를 감싸니 무척 우아하고 아름다워 보였다.치마는 몸에 잘 맞았지만, 등이 다소 노출되어 있었다. 사랑은 이렇게 노출이 심한 옷을 거의 입지 않았는데, 태경 역시 그녀가 이런 옷을 입고 정식 자리에 참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골라준 치마는 언제나 보수적이고 차분한 스타일이었다. 눈에 띄지도 않고, 예의에 어긋나지도 않는...사랑은 주의사항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임산부는 화장도 하지 말아야 하고, 하이힐도 신으면 안 된다는 것.그녀는 거울 속 화장기 없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래도 아름답다고 느꼈다.저녁 7시 30분, 사랑은 플랫슈즈로 갈아신고, 집안 기사에게 클럽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차에서 내리자, 차가운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사랑은 코트로 자신을 꼭 감싸며, 차가운 손을 꺼내 태경에
사랑은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 룸 안의 빛이 어두워서 다행이지, 다른 사람은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발견하지 못했다. 지금 사랑은 저도 모르게 몸을 가볍게 떨었다.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어 보였지만, 엄지손가락은 지푸라기라도 쥐듯이 태경의 손을 힘껏 쥐었다.‘태경은 전혀 신경을 안 쓰는 거야?’사랑은 갑자기 춥다고 느꼈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에 그녀는 이까지 떨렸다.현장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누가 태경의 마음을 맞힐 수 있겠는가? 그의 말은 진심 같기도 또 농담 같기도 했다.태경은 어둡고 그윽한 눈빛을 하며 은근히 웃고 있었다. 그는 사랑이 자신의 손을 꼭 잡도록 내버려두며 그녀를 힐끗 바라보았다.“계속 내 곁에 있을 거야? 좋아하는 사람 하나도 없어?”사랑이 억지로 소리를 냈다.“네.”사랑은 고개를 숙였고, 긴 머리카락은 그녀의 표정을 가렸다.정헌은 조용히 사랑을 바라보았는데, 그녀가 확실히 예쁘게 생겼단 것을 발견했다. 미간에서는 은근히 아름다운 정취가 스며들었다. 봄기운이 물씬 풍겨, 사람을 매료시킬 정도로 매력적이었다.정헌은 사랑의 이런 모습이 좀 불쌍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도 무정한 남자였다. 심지어 고의로 그녀를 놀리고 싶었다.“다시 생각해 보지 그래?”사랑은 온몸에 추위가 몰려왔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기에 이 순간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몰랐다.정헌은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담담하게 말했다.“내가 대신 나설 수 있는데.”그는 줄곧 불 난 집에 부채질 하는 사람이었다. 태경과 오랫동안 알고 지내면서, 정헌도 나름 잘 알고 있었다.태경 마음속에 없는 사람이라면, 태경의 앞에서 죽어도 그는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이건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았다.사랑은 정신을 차리고 냉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그럴 필요 없어요.”정헌은 점잖게 보이고, 말도 잘하며, 부드럽고 매너 있어 보이지만, 사랑은 그와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편견은 어떻게도 숨길 수 없으니까. 사실 정헌
정헌은 말을 한 다음, 자신이 정말 짐승 같다고 느꼈다. 하지만 태경은 생각보다 차분했다.그는 눈을 들며 담담하게 평가했다.“그럼 네 안목도 좋은 편이네.”‘강 비서는 얼굴도 예쁘지, 몸매도 나쁘지 않지, 거기에 학력도 있고 성격도 좋지. 아주 많은 장점이 있는 사람이야, 요리 솜씨도 괜찮고.’태경은 남자가 사랑과 같은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 정상이라고 느꼈다.그는 여전히 태연했다.“그럼 난 기사에게 강 비서를 부탁할게.”정헌은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태경은 정말 감정이 없나 봐.’예전에 학교 다닐 때, 태경은 그야말로 무정한 사람이었다. 연애편지는 받지도 보지도 않고, 여자들이 자신을 위해 질투하고 싸워도, 그는 아무렇지 않았다.오직 태경이 신경 쓰는 사람만이 그의 관심을 조금 얻을 수 있었다.정헌도 심심해서 물었다.“너희 둘 도대체 왜 결혼했니? 넌 강 비서를 좋아하지 않잖아.”태경은 침착하게 대답했다.“감정 때문에 결혼할 필요 없으니까.”그들과 같은 사람들에게 있어, 사랑하는 것 자체가 사치였다. 감정이 없으면 번거로움도 없으니까.정헌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으며 말했다.“그건 그래.”...집에 돌아온 사랑은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깊이 잠들지 못했다. 수많은 악몽에 시달려 한밤중에 놀라 깨어났다.스탠드를 켜고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4시. 날이 밝기 직전이었다.‘태경은 병원에 갔겠지. 강세영이 또 입원했으니까. 며칠 전 내 앞에서 거들먹거리며 비아냥대던 사람이 그렇게 허약하다니, 정말 말도 안 돼.’사랑은 예전에 아내가 복수하는 드라마를 본 적이 있었다. 드라마 속 여주인공처럼 자신도 복수를 배워, 자신을 지킬 수 있기를 바랐다. 언젠가 자신도 여주인공처럼, 세상 물정을 모르던 소녀에서 점차 무정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여신으로 변신하길 꿈꾸곤 했다.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잔혹했다.무엇이든 알아볼 수 있지만, 유독 사람의 마음만은 도저히 알 수 없었다.고등학교 3학년 때, 학교에서는
사랑은 농담을 할 기분이 아니었는데, 매사에 무척 진지한 그녀는 자존심 때문에 태경 앞에서만큼은 이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난 다른 사람을 꼬시지 않았어요.”그녀는 한 글자 한 글자 진지하게 해석했다.태경은 눈썹을 들더니, 사랑의 부드러운 피부를 매만졌다. 조금만 힘을 주자, 하얀 피부에 붉은 자국을 남겼다. “정헌이가 널 좋아한다고 말했어.”태경은 아주 차분하게 말했다. 사랑은 그의 얼굴에서 불쾌 또는 관심을 찾아보려 했다.유감스럽게도 그런 건 없었다. 태경은 마치 이 일에 개의치 않은 것 같았다.사랑은 고개를 떨구며 대답했다.“난 구 대표님과 잘 아는 사이가 아니에요.”그녀는 불편함을 참으며 계속 말했다.“하물며 구 대표님에 곁에 미인이 그렇게 많으시니, 좋아하는 사람도 엄청 많으시겠죠.”태경의 엄지손가락은 여전히 사랑의 턱을 쥐고 있었다. 의미심장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눈 밑에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숨어 있었다.“꼭 그렇지는 않아.”사랑은 말을 하지 않았다.‘구정헌이 오늘 저녁에 데리고 온 그 모델은 지난번 연회에 데리고 간 여자가 아니잖아. 여자를 물 마시듯이 바꾸는 사람인데.’태경은 눈앞의 사랑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화려하지 않지만 확실히 눈길을 끄는 미모였다.그는 엄지손가락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사랑의 피부에 남긴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미안. 나도 모르게 그만.”태경은 사랑보다 더 얌전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대해도 화가 나지 않는 것처럼.“강 비서, 만약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거나, 적합한 남자가 나타났다면, 먼저 눈여겨봐도 돼.”태경은 자신이 이미 충분히 사랑을 너그럽게 대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녀 앞으로의 계획을 방해하지 않았다.사랑은 억지로 소리를 냈다. “고마워요.”태경은 또 주의를 주었다.“그러나 우리의 결혼이 지속되는 동안, 그 어떤 진도도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알아요.”태경은 말을 마치자마자 욕실에 가서 샤워를 했다. 사랑은 미처 치우지 못한 약병을 얼
사랑은 순간 멍해졌다. 웃을 수도, 그렇다고 웃지 않을 수도 없었다. 주변이 고요해지고, 어쩐지 분위기가 묘하게 아슬아슬해졌다. 다행히 간호사가 와서 그녀의 링거를 빼주어 그 어색함이 조금이나마 덜어졌다. 태경은 차를 몰고 나와 그녀의 허리를 자연스럽게 감싸며 걸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냉랭한 기운과 은은한 압박감에 사랑은 걸음걸이가 조금씩 느려졌다. 태경은 품 안의 그녀가 며칠 새에 더 야위어 버린 것을 증명하는 가느다란 허리를 느끼며,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인상을 찌푸렸다.이러니 이렇게 자주 아프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며, 말없이 그녀의 어깨에 자신의 외투를 걸쳐주고 옷자락을 정성스럽게 감싸 주었다. 그는 사랑의 차가운 손을 잡았는데, 누가 봐도 연인 같은 모습이었다. 태경의 손은 따뜻했고, 사랑의 차가운 엄지손가락은 그의 온기 덕분에 조금씩 녹아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남자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차갑기만 하던 그의 표정에 어딘가 부드러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태경은 그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문득 입을 열었다. “요즘 밥 잘 안 먹었어?” 사랑은 그의 질문에 잠시 당황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에요, 먹었어요.” 그녀는 지난 며칠 동안 일정이 불규칙했기에 가끔 식사를 거르기도 했다. “살 빠졌어.” “정말요?” 사랑은 거울을 볼 때마다 비슷한 얼굴이어서 전혀 느끼지 못했다. 태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좀 더 먹고 면역력을 길러. 자꾸 아프지 않게.” 사랑은 입을 열어 자신이 자주 아픈 사람이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말하려다 멈췄다. “네.”결국 그저 짧게 답했지만, 그녀의 속으로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태경 씨가 지금 나를 걱정하는 건가?’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어 태경의 표정을 슬쩍 살펴보다가 말했다. “앞으로는 더 조심할게요.” 사랑도 자신이 병에 걸려 태경에게 번거로움을 주고 싶지 않았다. 사실 아픈 상태에서 누군가가 곁에 있어
사랑은 집에서 고열로 정신이 혼미해져 땀을 흘렸지만, 상태가 나아지지 않았다. 몸이 너무 뜨거워서 침대에서 간신히 일어나 욕실로 가서 샤워를 한 후, 잠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침대에 몸을 던졌다. 이불을 푹 덮고 있으면 좀 나아질 거라 생각했지만, 힘이 없어서 병원에 갈 여력도 없었다. 잠에서 깨어나서도 상태가 나아지지 않으면, 그때 119에 연락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랑은 언제나 이렇게 혼자서 버텨왔다. 아프면 참고, 또 참고, 정말 못 참을 때만 도움을 요청했다. 병에 걸리는 건 물론 괴롭지만, 사랑에게는 이미 익숙한 감각이었다. 과거, 학비를 벌기 위해 고열에도 불구하고 아르바이트를 나갔던 시절이 있었다. 깊은 밤, 편의점에서 잠깐 엎드려 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N시는 C시처럼 큰 눈이 자주 내리지 않아서, 겨울에는 늘 음습하고 차가운 비가 내렸다. 차가운 공기는 사랑의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후반부에 잠에서 깬 사랑은 기침을 하며 의식이 혼미한 상태로 119를 눌러 구급차를 불렀다. 구급차는 빠르게 도착했고, 사랑은 혼자 병원으로 가서 응급실에서 진료를 받으며 링거를 맞았다. ...태경은 가능한 가장 빠른 비행기를 타고 출발했다. 급히 나서느라 짐도 챙기지 않았다. 두 시간 후, 그는 N시의 공항에 도착했다. 비서는 이미 사람을 보내 준비해 두었다. “대표님, 오늘 밤 호텔에서 머무르실 건가요, 아니면 저택으로 가실 건가요?” 태경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차 키를 줘.” 비서는 질문을 더 하지 않고 키를 건넸다. 태경은 사랑이 살고 있는 작은 집의 주소를 기억하고 있었다. 차를 몰고 가는 동안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사랑이 일부러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병원에서 링거를 맞으며 잠시 잠들었고, 핸드폰은 무음으로 되어 있어 벨소리를 듣지 못했다. 태경은 차를 골목 입구에 세우고 기억을 더듬으며 그녀의 집으로 걸어갔다.
쓸쓸히 내리는 눈과 바람이 도시 전체를 덮고 있었다. 가로등이 하얗게 쌓인 눈 위를 밝히며, 바깥세상이 조금은 덜 허전해 보이게 했다. 태경은 얇은 캐시미어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허리는 잘록하고 어깨는 넓으며 다리도 길어, 빛 아래 서 있는 태경의 모습은 특히나 더 돋보였다. 핸드폰 벨소리가 몇 번 울리더니 마지막 몇 초가 지나 통화가 연결되었다. 사랑은 소파에서 거의 잠이 들 뻔했는데, 벨소리를 듣고는 정신없이 베개 밑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누구의 전화인지 확인할 새도 없이, 코맹맹이 소리로 답했다. [여보세요, 누구시죠?] 그녀의 목소리는 나른하고 부드러웠다. 태경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이상하게도 그의 마음속 짜증이 점차 사라졌다. 그는 입을 열었다. “나야.” 사랑은 그제야 화면 속 이름을 확인했다. 태경은 다시 말했다. “아까 나한테 전화한 이유가 뭐야?” 사랑은 태경이가 왜 갑자기 전화를 걸어온 건지 알 수 없었다. 보통 그가 먼저 자신에게 연락을 할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TV에서는 여전히 새해 특집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랑은 하품을 하며, 대충 핑계를 지어 말했다. [대표님께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요.] 그녀는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사실 태경이가 사랑의 전화를 끊기 전, 그녀가 원한 것은 그저 그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었으니 말이다.지금의 사랑은 가벼운 잠을 한 번 자고 나니, 조금은 덜 외로웠다. 태경은 핸드폰을 꽉 쥐었다. 그의 손목에 선명하게 드러난 혈관이 더욱 돋보일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가슴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그럼 며칠에 돌아올 생각이야?” 사랑은 아직 항공권을 예매하지 않았다. N시에 며칠 더 머물고 싶었고, 태경의 차갑고 쓸쓸한 별장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곳에 있고 싶었다. [잘 모르겠어요.] “3일에 돌아와.” 태경이 그녀 대신 결정을
태경의 아버지 심지환은 평소 바쁜 사람으로, 높은 직책과 권한을 가지고 있어 쉽게 얼굴을 보기 어려웠다. 설날이 되어서야 겨우 저녁 8시쯤 집에 돌아왔다. 심씨 가문은 설날이 되면 가족들이 모여 늘 북적였다. 어린 자녀들도 장로들의 뜻을 거스를 수 없으니, 반드시 집으로 와 명절을 보냈다. 집 안은 새로 장식한 창문지와 함께, 아이들이 저녁을 먹고 후원에서 불꽃놀이를 즐기는 소리로 가득했다. 오랜만에 아들을 본 심지환은 저녁 식사 후 태경을 서재로 불렀다. “네 작은아버지가 그러더군. 요즘 네가 일 처리를 너무 가혹하게 한다고.” “작은아버지가 또 뭐라고 하셨습니까?” “네가 일을 할 때 어느 정도 여지를 남기라고 하더군.” 태경은 집안 어른들이 늘 이런 방식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든 일에 한 치의 여지를 남기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뽑지 않는 이상 다시 자라날 풀이라면, 태경은 철저히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가혹하고 단호한 것이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태경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걱정 마십시오, 아버지께 폐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심지환은 아들이 자신에게 폐를 끼칠까 걱정하지 않았다.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심지환도 쉽게 무너질 리 없었다. 다만 심지환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좋은 인연을 쌓고 싶어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분명히 자기 아들은 그런 충고를 들을 사람이 아니었다. 아들 태경은 성격이 고집스럽고,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일에 간섭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심지환 보기엔, 태경의 결혼 또한 그랬다. 회사 일도 그렇듯이, 결혼마저도 자신의 방식대로 처리했다. 심지환은 며느리에 대해 별다른 인상이 없었다. 자주 만나지도 못했기에 그저 조용한 아가씨라는 것 정도만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며느리는 가정 형편은 다소 아쉽지만, 다른 면에서는 나쁘지 않아 보였다. “올해는 왜 새아가가 안 보이는 거지?” “N시로 내려갔습니다.” “둘이
사랑은 태경이가 더는 답장을 보내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침대에서 일어나, 잠이 오지 않자 베란다로 나가 바람을 쐬었다. 맞은편 이웃집은 이미 새로운 ‘입춘첩’을 붙여두었고, 문 앞에는 새로 장만한 복조리가 걸려 있었다. 사랑은 내일 자신도 명절을 맞아 필요한 물건들을 좀 사러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창문 장식 스티커와 입춘첩 같은 것들 말이다. 그녀는 날이 밝아올 무렵에야 겨우 잠들었고, 늦게 잠든 데 비해 일찍 눈이 떠졌다. 오랜만의 한가로운 시간에 사랑은 근처 시장에 가서 여러 가지 창문 장식과 입춘첩을 사 왔다. 찹쌀풀을 만들어 대문과 창문에 하나하나 붙여 두었다. 붉은 색으로 분위기가 한층 밝아지면서 조금은 명절다운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바로 섣달이었다. 사랑은 또 슈퍼마켓에 가서 식재료와 자신이 좋아하는 달콤한 꿀떡을 사 왔다. 비록 혼자 맞는 명절이지만, 최소한 스스로 초라해 보이지는 않게 하고 싶었다. 슈퍼마켓에서 돌아온 사랑은 택시를 타고 묘지로 향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묘지는 교외의 한적한 곳에 있었다. 사랑은 매년 찾지 못했다. 학창 시절에는 겨우 방학 때만 와서 성묘를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생전에 좋아하셨던 음식 몇 가지를 준비해 묘비 앞에 올려두었다. 두 노인의 흑백 사진을 바라보며, 사랑은 손을 들어 그 사진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어머니를 제외하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사랑을 가장 아끼고 사랑해 주었던 분들이었다. 사랑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만약 우리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아직 살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만약 강남복이라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차라리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은데...’ ‘내가 없었으면,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나를 아껴주었던 가족이 큰 고통을 겪게 되는 일이 없었을 텐데...’ 성묘를 마친 사랑은 눈이
송년회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회사는 긴 연휴에 들어갔다. 법정 휴가보다 3일을 더 쉬게 되어, 10일까지 출근할 필요가 없었다. 사랑은 간단히 짐을 꾸리고 N시로 돌아갈 비행기 표를 미리 예매해 두었다. 설 연휴라 비행기 표가 평소보다 구하기 어려웠고, 가격도 성수기 요금 수준으로 올라갔다. 출발 날짜가 임박해지자 사랑은 병원에 들렀다. 매주 주말이면 병실에 들러 여전히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비록 어머니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사랑은 가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말없는 위로를 전했다. 사랑은 호흡기에 의지해 생명을 이어가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이렇게 강제로 어머니의 생명을 붙들고 있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생각하곤 했다. 그녀는 어머니가 언젠가 깨어날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모르지만, 자신은 기다릴 수 있었다. 설령 의사선생님은 포기하라고 해도 사랑도 그럴 수 없었다. 설령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그녀는 놓지 않고 싶었다. 오늘 사랑도 어머니의 담당 의사를 만났다. 의사는 조심스레 말했다. “희망이 전혀 없진 않지만, 그렇다고 크지도 않습니다.” 환자가 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나는 것은 하늘의 뜻에 달려 있었다. 환자의 생에 대한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에 따라 깨어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사랑의 어머니 남청연은 한때 발코니에서 뛰어내리기로 결심한 사람이라 이미 생의 의지를 버렸을지도 몰랐다. 사랑은 이러한 마음의 고통을 견뎌내며 약간 창백한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깨어나실 거라고 믿어요.” ‘엄마는 절대 나를 두고 떠나지 않을 거야!’ ‘아직 아버지의 죗값을 지켜보지 못하니까.’ ‘엄마가 이렇게 잠든 채로 나를 놓고 떠날 리 없을 거야!’ 사랑은 항상 상상했다. 어머니가 깨어나고, 모든 일이 끝나면 어머니를 모시고 N시의 마을로 가서 조용히 살아가는 모습을. 의사는
사랑은 아주 작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더 강하게 말하면 태경의 인내심을 자극하게 될까 염려되었다. 태경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굳이 그럴 필요 없어.”사랑은 실망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평온함을 유지했다. 원하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체면을 지켰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혼이 나간 듯이 있다가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이 ‘특별한 서프라이즈’는 어디까지나 회사 여직원들의 투표로 정해진 것이었다. 태경이 거절해도 아무도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 그는 회사의 절대적 권한을 쥔 사람이니까. 사랑은 당첨된 쪽지를 손에 쥐고서 유럽 여행에는 큰 관심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의 삶은 엉망이었고, 이국적인 풍경을 감상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그녀는 태경을 바라보며 물었다. “대표님, 이걸 현금으로 바꿀 수 있나요?” 사랑은 얼마의 금액이 될 수 있는지 더 관심이 갔다. 태경은 미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실망인 듯 아닌 듯, 이런 식으로 돈을 좋아하는 여자는 처음이라는 눈빛이었다. “업무일에 인사팀에 가서 문의해봐.” 그는 오늘 사랑의 옷차림을 한 번 더 살펴보며 눈빛을 잠시 멈추고 말했다. “꽤 쏠쏠한 금액일 거야. 강 비서는 운이 좋네.” 사랑은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었다. 방금 태경의 거절로 인해 느꼈던 실망이 금세 사라졌다. “오늘 밤 운이 좋은 것 같네요.” 사실 그녀는 태경과 한 곡 추고 싶었다. 오늘이 지나면 앞으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비록 사랑은 춤을 잘 추지도 못했지만, 예전에 몰래 배운 적도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파티에서 태경이 세영의 허리를 감싸 안고 춤을 추던 그날 밤, 둘은 세상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연인처럼 보였다. 태경은 차갑고, 세영은 따뜻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완하며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사랑은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두 사람의 춤을 흉내 내며 서투르게 따라 해보았다. 그러나 그 춤은
사랑은 캐시미어 숄로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노출된 피부를 잘 가렸기에 주변에서 그녀가 누구인지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호텔의 긴 복도에는 붉은 카펫이 깔려 있었다. 밖에는 여전히 많은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대기 중이었다. 조금이라도 독점 기사를 얻어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ZP그룹의 대표 심태경은 연예계 인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인기는 웬만한 연예인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네티즌들은 태경의 연애 문제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사랑은 복도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기자들의 카메라를 피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그들이 모여 있는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차를 불렀지만, 주말 저녁의 도심은 언제나처럼 교통 체증으로 꽉 막혀 있었다. 사랑은 호텔 로비에서 차를 기다리며 조용히 인내심을 다지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녀는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과 마주치고 말았다. 성지호는 사랑에게 있어 마치 곤란하고 위험한 독사와 같았다. 지호의 날카로운 존재감은 그 순간 사랑의 혈관을 찢어버릴 듯 강렬하게 다가왔다. 지호는 검은 정장에 긴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감춰진 날카로움이 여전히 사람을 압도했고, 그 곁에는 위압감 넘치는 보디가드들이 항상 지호를 둘러싸고 있었다. 지호가 풍기는 극도의 위압감은 누구도 지호에게 쉽게 다가설 수 없게 만들었다. 사랑은 지호에게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두 사람이 원래부터 엮일 필요가 없는 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성지호도 나를 몹시 싫어했고, 나도 굳이 성지호에게 다가가서 불쾌함을 자초할 필요는 없지.’ 하지만 지호는 사랑을 괴롭히는 것을 즐겼다. 설령 본인이 싫어하면서도 사랑에게 다가와 느긋하게 담배를 꺼내 물고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태도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마치 쓰레기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사랑은 종종 궁금해졌다. ‘성지호에게 정말 감정이라는 것이 있을까?’‘이 미친놈은 언제나 이런 감정 없는 냉담한 모습을 하고 있어.’ “강사랑, 여기서 뭐하고 있어?”
강세영은 자신이 꼭 참석하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태경도 그녀를 막을 생각이 없었다. 태경은 세영의 성격을 잘 알았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개의치 않는 편이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스러움을 발산하는 여자였다. 오늘 세영은 평소보다 더 아름답게 꾸미고 나타났다. 섬세하게 화장을 하고, 순수해 보이는 이목구비 덕에 미소를 지으면 해사하고 무해한 느낌을 주었다. 그녀는 눈에 띄는 빨간색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태경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조금의 어색함도 없이 자연스럽게 태경에게 질문했다.“오늘 밤 나랑 회사 여자 연예인들 중 누가 더 예쁜 것 같아?” 태경은 그녀를 슬쩍 보며 미소 지었다. 그의 눈빛은 부드러웠고, 그 미소에서는 진심과 농담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듣고 싶은 대답을 원해, 아니면 진짜 의견을 묻는 거야?” 세영은 그와 눈을 맞추며 대답했다. “당연히 네 의견이지.” 태경은 혀를 차며 웃었다. “네가 기분 나쁠까 봐.” 세영은 태경 앞에서 투정을 부리는 데 익숙해져서 적당한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그 말은 내가 걔들보다 예쁘지 않다는 거야?” 태경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건 네 입으로 한 말이잖아.” 세영은 태경과 친밀함을 유지하기 위해 늘 약간 비음과 혀짧은 발음을 섞어서 말했다. 그녀는 태경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빛에는 순수함과 진지함이 가득했다. “심 대표님, 오늘 밤 나는 당신의 파트너야. 내가 예쁘지 않으면 당신 체면이 떨어질 거라고.” 태경은 담담하게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럼 네가 여기 있는 여자 연예인들보다 예쁜 걸로 하면 돼?” “심태경, 정말 성의 없어.” “네가 오고 싶다고 했잖아.” “그렇긴 하지. 세상을 좀 더 보고 싶기도 했고.” 세영은 태경의 옆에 서 있을 때마다 여러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에 익숙했다. 그녀는 당당하게 태경의 팔짱을 끼고 있었고, 일말의 긴장감도 없이 태연하게 물었다. “내가 오늘 안 왔으면, 누가 네 파트너로 왔을까?” 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