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은진이 디스틸 바에 도착하고 여석진이 있는 룸으로 갔을 때, 룸 안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여석진은 술에 취해 인사불성 상태였고 술병과 유리조각들로 가득한 바닥에 누워 있었다.술집 웨이터는 여석진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몇 번을 시도해서 겨우 소파에 앉혀도 결국 다시 바닥에 넘어졌다고 한다.여석진은 술에 취해 잠이 들어서 겨우 조용해졌다.“석진아.”여은진은 다가와 쪼그려 앉아 여석진의 이름을 불렀다.“여은진 씨 맞으시죠?”웨이터는 여은진에게 신상을 물으면서 말했다.“대표님께서 방금 술을 또 몇 병 더 마셔서 많이 취하셨습니다. 그래서 깨우시긴 힘드실 거예요. 아니면 제가 사람 불러올까요? 저희가 대표님을 부축하여 차에 태워드리겠습니다.”여은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웨이터의 도움으로 여석진을 차에 태우고는 차를 몰고 인사불성이 된 그를 여씨 가문 저택으로 데려갔다.차를 멈춰 세우고 여은진은 내렸다. 그리고 여석진이 탄 좌석의 문을 열고 그를 부축하여 차에서 내리면서 집사를 불렀다.“문복 아저씨!”해변 별장으로 이사를 간 후 여은진은 본가에 별로 오지 않았다.여석진도 한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았었다.그래서 본가에는 집사와 도우미들, 그리고 경호원들만 있었다.“어휴.”집사는 아직 잠이 들지 않았다.여은진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는 바로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그는 서둘러 뛰어나와 여은진이 힘겹게 여석진을 부축하는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재촉했다. 곧바로 다가가 여석진을 부축하는 걸 도왔다.“아가씨,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도련님께서 어쩌다 이렇게까지 취하신 거예요?”여은진도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그녀가 말했다.“일단 석진이를 부축해서 방으로 데려가죠. 그리고 아저씨는 주치의를 불러주세요.”“네, 알겠어요.”두 사람은 여석진을 부축하여 위층으로 올라가 침대에 눕혔다.집사는 바로 돌아서서 주치의를 부르러 갔고 여은진은 여석진의 옆에서 그를 지켰다.큰 침대 위에 누운 여석진은 눈썹을 잔뜩 찡그렸다. 그
“배씨 가문 아가씨가 비열한 수법으로 도련님을 꾀어서 임신했다고 들었어요. 제가 이런 걸 물을 자격이 없는 건 알지만...”문복 아저씨의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는 딸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녀를 꾸짖었다.“물을 자격이 없는 걸 알면 묻지 마!”문복 아저씨의 딸은 포기하지 않았다.“하지만...”“하지만 뭐!”문복 아저씨는 다시 한번 딸의 말을 끊고 여은진에게 사과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그러고는 바로 딸을 끌고 방에서 나갔다.아래층으로 내려온 뒤 문복 아저씨는 딸을 훈계했다.“너도 알다시피 우리는 이 집 하인이야. 주인의 일은 우리가 묻거나 간섭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런 쓸데없는 생각들은 멈춰. 주제를 알아야지!”하지만 문복 아저씨의 딸 문혜인은 여전히 고집을 부렸다.“아빠는 몰라요. 난 내 주제를 잘 알고 있어요. 내 외모와 수준으로는 저런 훌륭한 도련님에게 어울리지 않은 거 알아요. 한 번도 그런 거 바란 적 없어요. 난 그저 도련님이 마음 아파서 이러는 거예요. 도련님의 처지가 불쌍해서... 아가씨를 그렇게 좋아하시는데, 두 분이 함께 있으면 무조건 행복하실 거예요...”문복 아저씨는 딸의 쓸데없는 말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그는 짙은 눈동자로 딸을 바라보며 말했다.“감정 문제에서 맞고 틀린 건 없어. 절대적인 것도 없지. 안 좋아하는 건 어쩔 수가 없다고. 도련님과 아가씨가 아무리 잘 어울려도 아가씨가 좋아하시지 않으면 어쩔 수가 없는 거야.”그러자 문혜인이 말했다.“모든 건 노력에 달려 있어요!”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아버지에게 말했다.“아빠도 엄마랑 만나시기 전에 마음이 없었잖아요? 두 분은 선 자리에서 만나 천천히 감정이 생기신 건데 지금도 사이가 아주 좋잖아요. 도련님도 배씨 가문 아가씨를 좋아하시진 않지만 결혼하려고 하시잖아요?”문복 아저씨는 딸을 설득할 수 없어 어두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당부했다.“내 말 잘 들어. 항상 네 주제를 알아야 해. 앞으로 절대 아가씨 앞에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알겠어
여은진은 가슴이 시큰해났다.“석진아.”붉어진 눈으로 여석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정말 좋은 사람이야. 어릴 때부터 엄마, 아빠에게도 훌륭한 아이였고, 가장 예쁨 받고 안심되는 그런 아이였어. 내가 좋아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동생이기도 하고. 미안해...”여은진은 그에게 사과했다.그리고 말했다.“감정은 어쩔 수가 없어. 난 내 동생인 네가 정말 뛰어난 사람인 거 아는데, 나한테 넌 그저 동생일 뿐이야. 미안해, 너한테 거짓말할 수도 없고 날 속일 수도 없어. 석진아, 난 너에게 가족 간의 사랑 외에 다른 감정이 생길 수 없어. 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외부인이란 말이 아니야!”여은진은 여전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넌 내 동생인데 어떻게 외부인이라고 할 수 있어? 이제 엄마, 아빠도 안 계시니까 넌 내 유일한 가족이야.”여은진은 많은 말을 쏟아내고 마지막으로 덧붙였다.“난 너만 있으면 걱정 안 해. 나에게 훌륭한 동생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 나와 요한이는 다른 사람에게 괴롭힘당할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어. 너도 그래. 넌 내 동생이자 요한이의 삼촌이야. 석진아, 난 네 누나로서 널 지켜줄 거야.”사실 여은진은 어렸을 때부터 걱정을 끼치는 딸이라 항상 부모님과 여석진이 그녀가 마음껏 자유로울 수 있도록 지켜주어야 했다. 이제 부모님 두 분은 안 계시고 그녀와 여석진 두 사람만 남았다.많은 일을 겪고 난 후 그녀는 더 이상 예전의 여은진이 아니다. 여석진의 마음을 받아줄 수는 없지만 누나로서 책임지고 동생을 잘 지켜줄 것이다.“너랑 희주 씨는...”여은진도 지금 여석진이 배희주에게 감정이 없다는 것도 알고 배희주가 여석진의 아이를 가지려고 일부러 그를 속인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배희주 배 속의 아이는 아무 잘못도 없고 여석진의 핏줄이기 때문에 여은진은 여석진이 책임지기를 바랐다.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면 동생을 힘들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그래서 여은진은 계속해서 말했다.“석진아, 만약 정말 좋은 감정
하지만 지금은...아가씨가 이렇게 가서 도련님에게서 아가씨를 빼앗은 남자 좋은 꼴만 됐다고 생각하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도련님을 돕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방해하다니.문혜인은 생각할수록 더 화가 났다.그녀는 문복을 바라보며 말했다.“아빠, 이건 다 아빠 때문이에요!”문복은 말문이 막혔다.“...”이게 왜 자신의 잘못이란 말인가?문혜인은 자신이 저지른 일을 문복에게 알려주려고 입을 뻐금거렸지만, 아버지가 알고 나면 자신의 다리를 부러뜨릴까 봐 다시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편.여은진은 차를 몰고 해변 별장으로 돌아왔다.오는 길에서 그녀는 덥고 답답함을 느꼈다. 그래서 그녀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답답함이 사라지도록 차창을 열고 시원한 밤바람이 몸에 닿게 했다. 하지만 여전히 덥고 답답했다.그녀는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몰랐다.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온 여은진은 차를 주차했다.차에서 내렸을 때 그녀의 작은 얼굴은 이미 주홍빛이었고 몸이 뜨겁고 답답했을 뿐만 아니라 마음도 막연하게 불안해 났다.“돌아왔어?”원이림은 여은진을 기다리고 있었다.별장으로 들어오는 차 소리를 듣고 그는 즉시 밖으로 걸어 나왔다. 이때 그는 계단에 서서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밟으며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여자를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네.”여은진이 대답했다.그러고는 큰 소리로 물었다.“요한이 울지 않았죠?”“안 울었어.”원이림이 말했다.“방금 네가 오기 전에 요한이가 한 번 깨어났었지만 금방 다시 잠들었어.”여은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원이림을 쳐다보며 물었다.“약은 발랐어요?”원이림은 당연히 약을 바르지 않았다.등에 상처가 있어 직접 손을 뻗을 수도 없었고, 다른 사람이 약을 발라주는 것도 싫어서 여은진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여은진은 이미 전에 그에게 약속했었다.두 사람은 원이림이 머물고 있는 옆방으로 함께 왔다.여은진이 물었다.“약은 어딨어요?”원이림은 뒤돌아서서 병원에서 처방받은
만약 그것이 저질적인 무언가였다면 여은진은 결코 지금처럼 이렇지만은 않았을 것이다.지금 그녀는 너무 덥고 답답했고 속이 텅 빈 것처럼 공허해서 무언가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특히 원이림 앞에서 그녀는 점점 더 주체할 수 없었다.하지만 절대 이성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었다.무언가를 원했지만 찬물로 샤워를 하면 금방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원이림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도우미가 왜 그런 짓을 한 거야?”여은진이 대답했다.“그 애는 내가 석진이와 만나야 한다고 생각해서 아마도 석진이를 돕기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었을 거예요.”“제기랄!”원이림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사람은 절대 집에 둬서는 안 돼. 당장 해고해야 한다고.”문혜인의 행동은 확실히 선을 넘은 것이었고 바람직하지 않았다. 허락 없이 그런 짓을 했다면 해고하고 여씨 가문 저택에서 나가게 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었다.하지만 여은진은 그렇게 할 생각이 없었다.문복 아저씨는 충성스럽고 수십 년 동안 여씨 가문에서 일해 왔기 때문에 여은진은 문복 아저씨의 얼굴을 봐서라도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그리고 문복 아저씨의 딸 문혜인은 여석진과 함께 자랐고, 이번에도 사실 여석진을 도우려는 의도가 부적절하게 사용되었을 뿐이다. 잘못을 하면 처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그러나 그녀를 해고할 필요는 없다.그래서 여은진이 말했다.“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게요.”때가 되면 이 문제에 대해 문복 아저씨와 문혜인과 이야기하고 적절한 처벌을 내릴 것이다.여은진의 손목은 여전히 원이림의 손에 잡혀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원이림을 바라보며 말했다.“방으로 돌아가고 싶으니까 이제 놔줘요.”원이림이 물었다.“방으로 돌아가서 뭐 하려고?”여은진은 그의 물음에 말문이 막혔다.“...”방에 돌아가서 뭐 하겠는가? 당연히 찬물로 샤워하려고 했다.하지만 여은진은 원이림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그녀는 침을 흘리게 만드는 남자의 잘생긴 얼굴을 바
원이림은 행복해하며 웃었다.검고 짙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했다.“예전에 네가 10년 동안 나를 좋아하면서 나한테 못된 짓도 당하고 상처도 많이 받았으니 나를 쉽게 용서할 수 없는 건 이해해. 하지만 은진아, 용서하지 않는다고 해서 다시 만날 수 없는 건 아니야. 나한테 기회를 줘. 내가 너와 요한이 곁에서 잘 돌봐줄게. 내가 잘 못하면 언제든지 쫓아내도 돼. 그때 가서 후회하는 사람을 나일 거니까.”원이림은 사업가였다. 협상의 달인이자 비즈니스에 능한 사람이었다.그런데 그가 침대 위에서도 사람을 설득하는 데 능숙하다는 사실은 미처 알지 못했다.그는 한 마디 한 마디 설득력 있게 말했다.마지막에 원이림은 큰 손을 들어 여은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이제 넌 조금 더 자도 돼. 내가 요한이를 안고 가서 아침을 차려줄게.”그렇게 말한 후 그는 가까이 다가가 여은진의 입술에 키스했다.그리고 나서야 그는 그녀를 놓아주었다.큰 키에 건장한 원이림은 일어나 아기침대 옆으로 걸어가 이미 눈을 떴지만 울지도 않고 소란을 피우지도 않는 요한이를 바라보며 기분이 좋은 듯 말했다.“요한아, 너 왜 이렇게 얌전하니? 아빠가 안아줄게, 알았지?”원이림은 먼저 요한이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옷을 입혔다. 그러고는 요한이를 안고 여은진의 침실에서 떳떳하게 걸어 나갔다.때마침 도우미 아주머니가 왔다. 원래는 이 시간에 요한이가 깨어나면 아주머니가 와서 요한이를 안고 나간다. 그런데 그녀는 원이림이 잠옷을 입고 여은진의 방에서 걸어 나오는 것을 보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아주머니의 눈은 날카로웠고, 곧바로 원이림의 목에 있는 붉은 키스 마크를 한눈에 알아챘다.“아주머니, 좋은 아침입니다.”원이림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평소에도 온화한 성격이었던 그는 이 순간 마치 날개를 활짝 편 수컷 공작새처럼 더욱 상냥한 모습이었다.“요한이를 먼저 안고 있어 주세요. 저는 방으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고 올게요.”“알았어요.”아주머니는 멍한 표
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여은진을 바라보았고 깊은 눈빛에서 애틋함이 드러났다.“내가 보기에 넌 어젯밤에 우리가 함께 보냈던 시간을 떠올리고 내가 키스했을 때...”여은진은 발꿈치를 들고 손을 뻗어 원이림의 얇은 입술을 가렸다. 빨갛게 달아오른 아름다운 얼굴은 수줍어 보였다.원이림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고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손을 뻗어 여은진의 작은 손을 치웠다. 그녀를 위험하게 바라보는 그의 검은 눈동자는 이미 불꽃으로 물들어 있었다.그는 쉰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은진아, 나 어젯밤에 또 샤워했어.”여은진은 당황했다.‘그래서 뭐?’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데, 저건 무슨 뜻일까?그러나 그녀는 이내 원이림의 말뜻을 알아차렸다.원이림이 손을 뻗어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쌌고 힘을 주자 그녀는 그의 튼튼한 가슴에 부딪혔다.그는 여전히 짙은 눈빛으로 조금 더 쉰 목소리로 말했다.“혼자 샤워를 하는데 관리를 제대로 못 해서 상처에 물이 묻었을 텐데, 또 감염된 건 아닌지 모르겠어.”그 말을 듣자 여은진은 즉시 눈살을 찌푸리면서 차갑게 말했다.“이거 놓고 상처 좀 봐봐요.”“그래.”원이림은 순순히 대답했다.그는 여은진을 놓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협조하여 즉시 웃옷을 벗었다.원이림의 건장한 등을 보자 화상을 입은 상처는 물에 닿아서 전보다 더욱 붉어지고 부어올랐다. 심지우 일부분에서는 이미 고름이 흘러나왔다.여은진은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원이림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를 꾸짖었다.“샤워 안 하면 안 돼요?”“안 돼.”원이림은 가여운 표정으로 여은진을 바라보면서 말했다.“어젯밤에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샤워를 하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았어.”여은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어젯밤 원이림이 땀을 흘린 것을 생각하자 갑자기 귀가 뜨거워지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어젯밤은 할 수 없었다.여은진은 눈을 부릅뜨고 남자를 쳐다보며 말했다.“오늘 밤엔 씻지 마요.”그러나 원이림은 여전히 안 된다고
한편.별장 거실에서 여은진과 배희주 두 사람은 마당에 서 있는 두 남자를 지켜보고 있었다.갑자기 배희주가 입을 열었다.“은진 씨는 정말 행복하겠네요.”배씨 가문에 변화가 생기고 아버지가 감옥에 들어갔으며 자신은 하마터면 살해당할 뻔했으니 배희주는 더 이상 예전의 거만한 아가씨가 아니었다.그녀의 눈빛은 걱정이 있는 듯 깊어 보였다. 여은진에게 말했다.“은진 씨가 믿을지 모르겠지만 향수 사건은 내가 은진 씨를 속이려고 한 게 아니에요.”여은진도 배희주가 한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얘기를 나누면서 여은진은 여석진을 바라보며 배희주에게 말했다.“석진이는 어렸을 때부터 훌륭한 아이였어요. 성격도 차분하고 인내심이 강했죠. 그래서 석진이는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될 거예요. 희주 씨는 안목이 좋아요.”그러자 배희주는 쓴웃음을 지었다.“그러게요.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있죠.”다만 자신에게 마음이 없는 남자를 사랑하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다. 아직 버티고 있긴 하지만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여은진은 배희주의 미소에 담긴 씁쓸함을 보아냈다.그녀도 많은 것을 겪었던 사람이라 짙은 눈동자로 배희주를 바라보며 말했다.“석진이 지금은 희주 씨에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지만 그건 아직 희주 씨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몰라서 그래요. 시간이 지나면 변할 거예요. 두 사람 사이에 진심이 필요해요. 어쨌든 처음부터 희주 씨가 석진이를 속인 건 사실이니까 석진이는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죠. 하지만 석진이가 결혼을 동의했다는 건 희주 씨와 아이를 지키겠다는 거니까 오직 책임감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린 건 아닐 거예요. 아마 석진이도 자신이 희주 씨를 좋아하는 걸 모르고 있을 수도 있죠.”순간 배희주의 눈빛이 밝아졌다가 곧 다시 어두워졌다.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여석진이 사실 자신을 좋아한다니, 가능한 일일까?여은진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했다.“지금 석진이가 희주 씨를 안 좋아할지 몰라도 절대 싫어하는 건 아닐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