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게. 강주 사람들이라면 다 알다시피 도씨 일가랑 이씨 일가의 혼약은 도아영이 애타게 쟁취한 거잖아. 진짜 본인이 뭐라도 된 줄 아나 봐! 이수호는 파혼해도 곧장 새 여자를 찾을 수 있는데 도아영은 뭐야? 강주에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걸?”...경매장 밖에서 몇몇 부잣집 사모님들이 대놓고 도아영의 흉을 봤다.그 시각 그녀는 이미 경매장에 도착한 지 7, 8분이 넘었다. 이수호와 강이나보다도 좀 더 빨리 온 듯싶었다.지금쯤 경매장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빌어먹을 구연준이 한사코 밖에서 기다리라고 하니 사모님들의 험담까지 들어야만 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렇게 사서 고생이냐고?’‘구연준도 이수호보다 더 나을 건 없네. 두 인간 피차일반이야.’‘이러니까 전생이나 현생이나 너 죽고 나 죽고 티격태격하는 거지.’“아영 씨, 이 대표님은 이제 그만 미련 접으셔야겠네요. 대표님 곁에 강이나 씨가 있잖아요. 이렇게 쫓아온다고 무슨 소용이겠어요?”“그러게 말이에요. 엊그제까지만 해도 대표님과 파혼하겠다고 호통치더니 왜 또 여기까지 쫓아오는 거예요? 아쉽지만 대체품은 어디까지나 대체품이에요. 대표님은 이제 진짜 운명의 반쪽을 만났으니 아영 씨한테 돌아올 일은 없어요.”“자업자득이죠 뭐. 어떻게 기어오른 대표 사모님 자리인데 막상 내주려 하니까 달갑지 않겠죠. 근데 사람은 제 분수를 알아야 해요. 설마 본인이 강이나 씨랑 비교가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줄곧 이수호 와이프 자리를 탐내던 여자들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도아영을 헐뜯었다.그도 그럴 것이 도아영이 이수호를 위해서 얼마나 비굴해지고 자존심을 다 내려놨는지 모르는 이가 없으니까. 남자들 눈에만 하찮게 보이는 게 아니라 여자들까지 그녀를 경멸하고 무시하는 수준이었다.이때 나서기 좋아하는 한 여자가 도아영에게 다가와 이상야릇하게 말했다.“아영 씨는 예쁘장하게 생겼으니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남자 마음을 사로잡는 법이나 배우세요. 안 그러면 강주에서 누가 감히 아영 씨를 만나주
강이나는 애써 도아영을 위해 변명하는 것 같지만 정작 듣고 있는 이수호에겐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었다.‘나를 좋아한다고? 걔는 그저 더 높은 자리로 기어오르는 게 목적이야!’이전에는 이수호를 넘봤고 지금은 또 구연준을 타깃으로 삼고 있다.어쩐지 요즘 그를 향한 태도가 조금 식었더라니...여기까지 생각한 이수호는 두 눈에 싸늘한 한기가 감돌았다.‘도아영, 너 진짜 대단한 여자구나!’“가자 이만.”이수호는 두 사람한테서 시선을 떼고 강이나와 함께 경매장으로 들어섰다.한편 구연준도 자연스럽게 도아영에게 팔짱을 거는 제스처를 취하고 차분하게 말했다.“오늘 밤엔 네가 내 파트너야. 지금부턴 쭉 내 말만 들어야 해. 알겠지?”“대표님, 우리 다 비즈니스 하는 사람들인데 내가 파트너 해주면 오늘 밤 나한테 실컷 돈을 써주시는 거죠?”“넌 내 파트너야, 여자친구가 아니라.”도아영은 일부러 난감한 척했다.“하지만 수호 씨는 전에 선뜻 내게 돈을 써줬어요. 인간적인 매력으로 따져도 대표님 설마 수호 씨한테 밀리고 싶은 건 아니겠죠?”“지금 날 자극해?”“제가 어찌 감히요...”“네가 이겼어.”“...”경매장 안에서 뭇사람들은 이미 자리에 착석했다.오늘 경매는 대부분 비서가 대신 나와 줬고 오직 이수호와 구연준 두 명의 빅 보스만 직접 참석했다. 다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고 있을 때 장내가 전과 달리 싸늘한 정적에 잠겼다.아무도 감히 이 두 명의 빅 보스와 가격을 경쟁할 엄두가 안 났다.“수호 씨, 아영 씨랑 구 대표님 사이가 심상치 않아 보여요...”강이나는 이수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주최 측에서 일부러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구연준과 도아영이 마침 그들 맞은편에 앉게 되었다.양측은 머리만 들면 눈이 마주칠 지경이었다.이수호는 웃고 떠드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차갑게 쏘아붙였다.“도아영, 아주 좋아...”처음엔 강이나를 따라 하며 그에게 접근했고 뒤이어서 할머니 앞에서 얌전한 이미지를 보여준 그녀였다. 말끝마다 파혼을 언급
그중에서도 이수호가 가장 한심하다는 듯 피식 웃었다.이런 방식으로 그의 관심을 받으려는 건 너무 저속한 표현이니까.“400억 할게요.”이수호가 천천히 가격을 외쳤다.‘도아영, 내가 널 다스리지 못할까 봐?’“500억이요.”“600억 할게요!”점점 치솟는 가격에 강이나가 미간을 찌푸렸다.“수호 씨, 저 땅은 그 정도 가치가 안 돼요.”이수호도 표정이 일그러지긴 마찬가지였다.옆에 있던 안 비서가 나지막이 말했다.“대표님, 이미 우리의 예산을 초과했습니다.”이수호는 문득 쓴웃음을 지었다.도아영이 돈도 없으면서 이렇게 가격을 부르는 건 그와 맞서려는 게 분명했다.‘좋아, 오늘은 손해 보더라도 반드시 널 따끔하게 혼내줄 거야.”결국 이수호가 차갑게 쏘아붙였다.“640억 할게요!”그 시각 구연준은 아주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기고만장한 이수호의 태도가 제법 마음에 드나 보다.데이터 분석에 따르면 현재 이수호는 벌써 100억을 손해 본 상태이다.도아영에게 이런 실력이 있을 줄은 몰랐다. 이수호를 자극해서 손해를 보게 하다니.예전에는 그녀를 너무 만만하게 본 듯싶었다.구연준이 이쯤에서 멈추라고 말하려 할 때 옆에 있던 도아영이 또다시 팻말을 들었다.“천억이요!”순간 장내가 술렁거렸다.대체 뭐가 그렇게 대단해서 천억이나 부른 걸까?어떻게 천억까지 치솟은 걸까?그녀의 행동에 경매사까지 어안이 벙벙해졌다.경매사는 혹시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제 귀를 의심했다. 남원 외곽의 천 평짜리 땅은 시가가 고작 200억이다.아까 분명 640억까지 올라갔는데 어떻게 천억으로 뛰어오를 수 있단 말인가?“도아영 미친 거 아니야?”이수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도시 외곽의 부질없는 땅을 무려 천억까지 부르다니...그녀가 뭘 믿고 이토록 담대해진 걸까?“대표님, 더는 안 되십니다. 더 부르면 손해가 너무 커요!”안지원도 바짝 긴장했다.도아영은 지금 눈에 뵈는 것 없이 미쳐 날뛰는 중이다.그동안 도시 외곽의 천 평짜리 땅은 단 한 번
“도아영, 당장 거기 서!”잠깐 휴식 시간을 가질 때 도아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몸을 일으켰는데 뜻밖에도 뒤에서 이수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무슨 일이시죠?”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낯선 이를 대하듯 이수호에게 말했다.“너 진짜 대단해. 우리 이경 그룹에서 봐둔 땅을 두 배로 손해 보더라도 기어코 낙찰받은 거야? 왜? 일부러 날 겨냥하려는 거야 아니면 내 관심을 받고 싶어서 그래?”“오해하셨어요, 대표님. 저는 단지 그 땅이 마음에 들어서 낙찰한 거예요. 대표님이랑 전혀 상관없어요.”도아영이 진지하게 말했지만 이수호는 전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그 시각 강이나가 이수호를 쫓아왔다.“아영 씨, 오늘 경매에서 너무 충동적으로 나오신 거 아니에요? 그 땅은 아영 씨가 엄청 손해 볼 거예요.”강이나는 말하면서 옆에 서 있는 이수호를 힐긋 살펴봤다.“수호 씨가 오늘 나랑 함께 와서 입장이 난감해진 거 알아요. 아무리 수호 씨랑 맞서 싸우려고 해도 막무가내로 나오면 안 되죠. 나중에 손해 보면 또 수호 씨한테 도와달라고 손 벌릴 거잖아요. 내 말 틀렸어요?”이에 이수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네가 낙찰한 땅이야. 너 스스로 알아서 해.”“대표님은 농담도 참. 당연히 나 스스로 알아서 하죠. 우린 이미 파혼한 거 아닌가요? 내가 왜 대표님께 손 벌리겠어요? 이제 우리 남남이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마세요.”“너...”이수호는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그때 구연준이 경매장에서 나왔고 이를 본 도아영이 일부러 목청을 높이며 다정하게 그를 불렀다.“연준 씨!”‘연준 씨’라는 호칭이 입밖에 떨어진 순간 이수호의 표정이 더 심하게 일그러졌다.도아영은 구연준의 옆으로 다가가 자연스럽게 팔짱을 꼈다.“이제 곧 2부가 시작할 테니 나랑 연준 씨는 얼른 들어가 봐야겠어요. 골든하임을 오랫동안 눈여겨봐 왔거든요. 그럼 우린 이만.”도아영은 이수호와 강이나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자리를 떠났다.그 광경을 바라보는 이수호는 온몸에 음침한 기운을 내뿜었고 옆
“약혼자에 대해 꽤 아는 게 많네?”어디 그뿐일까?전생의 처참했던 3년을 돌이켜보면 그녀는 거의 이수호의 노예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이수호가 힐끔 째려보면 혹여나 자신에게 불만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고, 그의 말 한마디에 드디어 자신이 이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착각할 지경이었다.외조라면 이수호의 회사를 위해 대폭으로 후원해주고 내조라면 남현숙을 보살펴주는 것, 이수호를 위해 직접 도시락까지 싸주는 것 등등 헤아릴 수가 없다.그의 취미를 장악하고 있는 건 제쳐두고 그가 샤워를 몇 분에 하는지, 하루에 화장실은 몇 번 다녀오는지, 화장실에서 매번 휴지를 몇 칸 쓰는지... 마음 같아선 그의 모든 걸 장악하고 싶었다.“대표님, 두고 보세요. 오늘은 곧 대표님이 완승하는 날일 겁니다.”도아영은 테이블 위의 샴페인을 한 잔 쭉 들이켰다.경매가 곧 시작되었고 마침내 골든하임 순서가 왔다.“이번엔 도시 외곽의 골든하임입니다. 경매가 600억에 시작하겠습니다!”600억이란 경매가에 구연준은 미간을 구겼다.전에 도아영이 했던 말과 똑같았으니까.여기 경매는 전부 현장에서 가격이 공개되는 거라 사전에 비밀이 유출될 일은 없다.하여 도아영은 이 땅의 경매가가 얼마인지 절대 미리 알 수가 없다.그렇다면 골든하임이 진짜 이수호의 트릭이었단 말인가?“천억이요!”“1600억이요.”“2천억 합니다.”경매가 시작되자마자 장내에 뜨거운 열기가 차올랐다. 다들 앞다투어 골든하임을 경쟁하고 있었다.그도 그럴 것이 이 땅은 앞서 상승 가능성이 커서 미래에 분명 1조 원의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고 소문이 자자했다.도아영은 줄곧 지켜만 보는 구연준을 흘기더니 곧장 그의 팻말을 들었다.“4천억이요!”구연준은 그런 그녀를 쳐다보며 구시렁댔다.“제 돈이 아니라고 진짜 겁 없이 부르네.”“그럼요.”아니나 다를까 맞은편의 이수호가 팻말을 들었다.“6천억 할게요.”갑자기 2천억이나 뛰어오르자 다른 사람들은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이때 이수호가 가까운
“축하해요, 수호 씨. 골든하임을 얻게 됐으니 이경 그룹도 이번엔 엄청난 수익을 창출할 거예요.”옆에 있는 강이나는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음침하게 변해버린 이수호의 안색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싶었다.맞은 편에서 도아영은 그 누구도 눈치 볼 것 없이 입꼬리를 씩 올리고 구연준과 나란히 샴페인을 들었다.이 광경이 이수호에겐 왜 이토록 눈꼴사납게 느껴지는 걸까?“대표님, 이제 어떡합니까?”안지원은 구연준이 여기서 멈출 줄은 몰랐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 땅을 무조건 손에 넣겠다고 큰소리치던 사람인데 왜 갑자기 양보한 걸까?“어떡하긴 뭘 어떡해?”이경 그룹에서 하는 수 없이 손해를 당하는 수밖에.이수호는 웃음기를 거두고 싸늘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이번 일은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분명 도아영 저 여자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수호 씨!”강이나가 그를 따라가려고 성급한 마음에 손목을 잡았는데 이수호가 망설임 없이 손을 홱 뿌리치는 것이었다.“먼저 돌아가 있어.”강이나는 멍하니 넋을 놓았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이수호는 이미 멀리 떠나가 버린 상태였다.그는 단 한 번도 강이나를 내버려 둔 적이 없는데...경매장 밖에서 이수호가 음침한 얼굴로 차갑게 쏘아붙였다.“유정연 이 인간 당장 내 앞에 데려와!”“네, 알겠습니다.”1시간 후, 이경 그룹 사무실 안.유정연이 두 명의 경호원에게 끌려서 사무실로 들어왔다. 이수호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는 사색이 되었다.“수... 수호야,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야? 아영이가 또 네 심기를 건드렸니?”“연기 그만 해요!”이수호는 차가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아영이랑 구연준 대체 무슨 사이에요?”“뭐?”도아영과 구연준이 무슨 사이라니?그 두 사람이 왜 한데 엮인 걸까?유정연은 황급히 대답했다.“수호야, 우리 아영이가 또 사고를 친 모양이네. 내가 돌아가서 따끔하게 혼낼게. 그러니까 얼른 화 풀어. 우리랑 너희 집안에서 협력하기로 한 건 변함없잖아!”“시끄럽고! 골든하임이 함
“아니요, 틀리셨어요. 이 돈은 도원 그룹 자금이 아니에요.”구연준이 미간을 살짝 구겼다.“아니라고?”“아빠가 남겨주신 혼수거든요.”전생에 유정연은 그녀의 혼수에 눈독을 들이고 어떻게든 이 집안의 주인 행세를 하려고 했다. 일단 도아영을 이씨 일가에 시집 보내면 천억의 혼수까지 본인이 챙기게 될 테니까.남현숙은 도아영을 며느릿감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유정연은 몰래 남현숙을 찾아가 혼수를 없애기로 논의하고 심지어 그 돈으로 회사 위기를 해결하겠다고 사정했다.하지만 정작 회사 위기는 해결하지 못한 채 유정연만 돈을 챙겨서 도망쳤다.이번 생에 유정연이 또다시 이런 반란을 일으킨다면 혼수가 아니라 도씨 일가의 재산을 일 전 한 푼 못 챙길 것이다.“대표님, 요즘은 당분간 투자 안 하시는 게 좋겠어요.”“도원 그룹이 거의 몰락 상태인데 내가 투자까지 안 하면 진짜 부도낼 생각이야?”도아영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대답이 없었다.유정연이 줄곧 제 아들에게 회사를 맡기고 싶어 했으니 요 며칠 난장판이 된 회사 장부도 전부 도지호 그 멍청이에게 맡기면 그만이다.주주들이 과연 회사가 부도나는 걸 지켜보면서까지 유정연 모자를 용납해줄 수 있을까? 도아영은 문득 궁금해졌다.저녁 무렵, 구연준이 그녀를 도씨 저택으로 데려다줬다.도씨 저택 안.문을 열고 들어서니 거실 불이 환히 비치고 누군가가 불쑥 그녀를 방안으로 끌어들였다. 도아영은 살려달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상대가 그녀의 목덜미를 잡고 벽에 밀어붙였다.“아영아, 너 한 번 만나기 참 어렵네?”이수호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아찔한 기운이 스쳤다.도아영은 질식할 것만 같아 힘껏 몸부림쳤다.“이거, 놔!”이수호도 방금 너무 세게 밀어붙인 걸 알아챘는지 손을 놓아주었다. 도아영은 벽을 짚고 격하게 기침을 해댔다. 이에 이수호가 미간을 찌푸리고 야유 조로 쏘아붙였다.“솜씨 좋아 도아영! 한편으론 우리 집안 며느리가 되길 넘보고 또 한 편으론 구연준을 유혹하고 있어? 어느 쪽 이익
“약혼식에서 일부러 파혼 선언을 하고 주씨 일가에 시켜서 재미도 없는 신문 기사를 내더니 이제 와서 구연준 꼬시면서 경매에서 그렇게 도발을 해? 너 이거 다 내 주의를 끌려고 그런 거잖아. 좋아, 이제 드디어 소원성취했어.”이수호는 그녀의 턱을 잡고 당장이라도 몸을 기울일 것만 같았다.그때 도아영이 뜬금없이 웃음을 터트렸다.“대표님 이러는 거 강이나 씨한테는 떳떳해요?”강이나라는 이름 석 자에 이수호는 순간 온몸이 경직되었다.이때다 싶어 도아영이 재빨리 손을 빼내고 그의 목을 껴안더니 한결 매혹적인 눈길로 넌지시 말을 이었다.“대표님 말이 맞았어요. 내가 이렇게 한 거 대표님께 관심받고 싶어서예요. 그래도 소파는 영 비좁을 것 같은데 우리 이참에... 내 방으로 갈까요?”그녀가 드디어 본모습을 드러내자 이수호는 짜증 섞인 표정으로 가차 없이 밀쳐내고 차갑게 쏘아붙였다.“이런 저질스러운 수작은 나한테 안 통해. 그러니까 적당히 해, 도아영!”“에이 왜요? 대표님 아주 좋아하시잖아요. 나의 이런 저질스러운 수작...”도아영은 아무렇지 않은 듯 소파에 등을 기댔다.“내빼는 척하지 말아요. 남자들은 진짜 사랑하는 여자랑 하룻밤 즐기는 여자가 따로 있잖아요. 충분히 이해하고 전혀 충돌될 것 없다고요.”그녀가 몸을 배배 꼬면서 이수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걱정 마세요. 오늘 밤 일은 강이나 씨한테 무조건 비밀로 할게요.”“꺼져!”이수호는 드디어 그녀를 밀쳐내고 혐오에 찬 눈길로 째려보며 경고장을 날렸다.“내 앞에서 이런 수작 그만 부려! 너 같은 여자 수없이 봐왔어. 할머니만 아니었다면 난 절대 너랑 결혼할 일 없다고!”한편 도아영은 증오에 찬 그의 눈빛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일부러 홀가분한 척하며 말했다.“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대표님, 이만 가보시죠.”위층에서 줄곧 엿듣던 유정연은 대화가 이렇게 흘러가자 당황하기 시작했다.이수호가 그들의 돈줄인데, 이경 그룹의 뒷받침이 없다면 도원 그룹은 이제 어떡하란 말인가?유정연은 부랴부랴 아래층
“웃기는 사람이네.”도아영이 말했다.“수호 씨가 날 집으로 데려온 지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 CCTV 영상을 지울 이유가 뭐 있지? 설령 3개월 동안 살았더라도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영상 자료의 위치까지 어떻게 알겠어? 따지고 보면 오늘 온종일 집에 혼자 있었던 미소 씨가 더 의심스럽지 않아? 더욱이 도씨 일가 아가씨로서 고작 도우미에게 누명을 씌울 명분도 없잖아.”“저 아니에요. 진짜 오해예요.”김미소는 초조한 얼굴로 이수호를 향해 설명했다.“대표님, 전 억울해요.”“그만!”이수호가 눈살을 찌푸렸다.그동안 집안 도우미들이 몰래 도아영을 괴롭힌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단지 매번 나서서 시비를 따지기 귀찮았을 뿐이었다.게다가 도아영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하지만 이번에 김미소는 선을 넘었다.이수호가 싸늘하게 말했다.“우리 집에 너처럼 행실이 나쁜 도우미는 필요 없으니까 이번 달 월급 받고 돌아가. 내일부터 출근 안 해도 돼.”갑작스러운 불호령에 김미소는 사색이 되었다.“대표님! 진짜 저 아니에요. 정말 억울해요.”이수호는 이런 사소한 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김미소는 안지원에게 끌려 밖으로 나갔다.도아영은 몸에 걸친 타월을 정리하며 말했다.“이제 올라가서 옷 갈아입어도 될까요?”팔다리를 훤히 드러낸 그녀를 발견한 이수호는 외투를 벗어 던져주며 싸늘하게 말했다.“옷 입고 내려와. 물어볼 게 있어.”도아영은 손에 든 외투를 힐긋 내려다보더니 다시 이수호를 향해 휙 던졌다.“마음만 받을게요.”얼떨결에 외투를 붙잡은 이수호는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간덩이가 부었군!’도아영은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이내 소파에 앉아 그녀를 잠자코 기다리는 이수호를 발견했다.그러다 문득 전생에 멀리서 묵묵히 지켜보기만 하던 자기 모습이 떠올랐다.워낙 그녀에 대한 적대감이 강해서 차마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항상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사랑하는 감
“그게 무슨 헛소리에요?”도아영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눈앞의 이수호를 바라보았다.“한창 샤워 중인데 본인이 갑자기 들이닥치고 왜 제 탓하는 거죠?”“이...!”이수호의 시선이 도아영한테서 떠나지 않았다.타월로 몸을 아슬아슬하게 가린 그녀는 매끈하고 하얀 다리를 고스란히 드러냈고, 촉촉하게 젖은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쓸어 넘겼다. 게다가 쇄골에 맺힌 물방울까지 더해 유난히 매혹적으로 느껴졌다.적나라한 이수호의 눈빛에 도아영은 타월을 위로 끌어올렸다.“그래서 제 방에는 왜 왔어요?”“누가 너 보고 유니폼을 자르래?”그녀는 이수호의 추궁에도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제가요? 언제요? 당최 무슨 말인지...”“어디서 발뺌이야!”이수호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옷을 잘라버린 의도가 뭐지? 나한테 반항하는 건가? 아니면 일부러 관심이라도 끌려는 거야?”“수호 씨, 무슨 얘기인지 도통 이해가 안 가네요.”도아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유니폼을 본 적이 없는데 설령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해도 그럴싸한 핑계를 대야지 않겠어요?”끝까지 오리발을 내미는 그녀를 보자 이수호는 코웃음을 쳤다.“그래? 따라 와.”이내 저벅저벅 걸어가 도아영의 팔을 붙잡고 아래층으로 끌고 갔다.손목에서 전해지는 통증에 도아영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1층에 도착하자 김미소는 아직도 바닥에 널브러진 천 쪼가리를 치우고 있었다.유니폼은 이미 갈기갈기 찢어진 상태였다. 도아영은 옷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가 자른 거 아니에요.”“거짓말! 분명 아영 씨가 잘랐잖아요.”시치미를 떼는 도아영을 보자 김미소는 이수호를 향해 말했다.“아영 씨가 제 앞에서 가위로 옷을 싹둑싹둑 잘랐죠. 증언해드릴 수도 있어요!”“증언이라니? 날 고발한 사람이 미소 씨인데 어떻게 믿음이 가겠어?”도아영이 느긋하게 받아쳤다.“설령 범인이 나라는 걸 증명하고 싶어도 다른 증인이 한 명 더 있어야 하지 않을까?”“그건...”김미소는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짝!우렁찬 따귀 소리와 함께 도우미는 별안간 뺨을 얻어맞았다.이내 볼을 감쌌고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도아영은 싸늘한 시선으로 눈앞의 젊고 아리따운 여자를 쳐다보았다.“미소 씨 맞지? 내가 누군지 알고 있으니까 그동안 존칭을 썼을 텐데 함부로 반말하면 되겠어?”“이...!”김미소는 이씨 저택에서 일을 오래 하고 얼굴이 예쁘장하다는 이유로 도아영이 늘 안중에도 없었다.또한, 전생에 그녀가 이 집안에서 얼마나 비굴했는지 똑똑히 지켜봐 온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했다.심지어 엉뚱한 조언을 해준 탓에 이수호 앞에서 망신당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닌 거로 기억했다.따라서 이번 생에는 얼굴만 믿고 건방지게 구는 김미소를 절대로 봐줄 생각이 없었다.“아영 씨, 한낱 도우미라고 해도 엄연히 이씨 일가의 직원이거든요? 저한테 손찌검하는 건 대표님의 체면을 깎아내리는 셈이죠. 지금 당장 보고할 테니까 대표님이 준비한 유니폼을 잘라버린 이상 이 집에서 쫓겨나도 뭐라 하지 마세요.”김미소는 도아영을 노려보더니 너덜너덜해진 옷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저녁 무렵, 이수호는 유태범이 돌연 구연준과 손을 잡게 된 일 때문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이내 집에 도착하자 홀로 책상 앞에 앉아 울고 있는 김미소를 발견했다.이수호는 눈살을 찌푸렸고, 옆에 있던 안지원이 다가가서 물었다.“저녁 준비는 끝났어요? 왜 울어요?”“대표님, 아영 씨가 글쎄 대표님이 준비한 유니폼을 가위로 잘라버렸어요.”말을 마치고 나서 너덜너덜해진 옷을 내밀었다.눈앞에 펼쳐진 참상에 이수호는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낮에 도아영이 강이나와 그를 두고 홀연히 떠나가는 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생생했는데 엉망이 된 옷을 보자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지금 어디 있어?”이수호의 화를 돋우는 데 성공하자 김미소는 속으로 의기양양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말했다.“2층이요! 옷을 자르자마자 올라가서 잠을 자더라고요. 대표님이 안중에 없는 게 분명해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수호는 굳은 얼굴로 2
남자가 바람 피우는 건 지극히 정상이고, 여자는 욕심이 과하면 안 된다니?이런 막무가내가 어디 있는가?“오늘 일은 못 본 척해줄 테니까 알아서 잘 처리해.”말을 마치고 나서 무언가를 떠올린 듯 한 마디 보탰다.“참, 전에 휴학했다고 하지 않았어?”“네.”“그렇다면 학교는 굳이 안 나가도 돼.”남현숙이 말을 이어갔다.“우리 집 손자며느리로 들어온 이상 설령 학교에 다니지 않아도 졸업증은 받을 거야.”“할머니...”“이만 가 봐. 지금은 오로지 수호의 마음을 어떻게 사로잡을지 고민하고 나머지는 신경 쓰지 마. 게다가 곧 결혼할 새댁이 아직도 학교에 다니면 남들이 비웃을지도 몰라.”남현숙은 명령조로 말했다.도아영은 못마땅했지만 당장 거절할 입장이 안 되었다.만약 남현숙과 등을 돌리는 순간 도원 그룹이 이수호의 공격이라도 받게 된다면 그녀는 끌려다니기 마련이다.결국 아무 말 없이 묵인했다.그제야 고분고분해진 도아영을 보자 남현숙이 흡족하게 말했다.“우리 아영이 착하네. 내가 널 좋아하는 이유도 말을 잘 듣기 때문이지. 수호가 한 집에서 같이 살기로 했다던데 아주 긍정적인 신호야.”남현숙은 도아영의 손을 토닥였다.“남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입맛부터 공략해야 해. 너의 가장 큰 장점이 바로 요리 솜씨잖아. 수호는 다른 사람이 만든 음식은 입에 대지도 않으니까 제대로 만족만 시켜준다면 널 떠날 걱정은 안 해도 돼.”의미심장한 말투에 도아영은 그녀가 언급한 ‘만족’이 무엇을 뜻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보아하니 이수호와 이미 관계를 가졌기에 같이 살게 된 거로 단단히 오해한 듯싶었다.도아영이 피식 웃었다.“알겠어요. 할머니.”“알면 다행이고.”남현숙은 작은 병 하나를 그녀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앞으로 자기 전에 한 방울씩 떨어뜨려. 무슨 효능이 있는지는 차차 알게 될 거야.”도아영은 갈색 병을 흘긋 내려다보았다.남현숙이 자리를 뜨고 나서야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았는데 달콤한 향이 코를 찔렀다.지난번 이수호의 방에서
“어르신!”장서남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그동안 남현숙을 모시면서 말실수한 적이 처음은 아니지만 해고를 운운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이 주둥이가 방정이네요. 전 단지...”“끌고 가.”남현숙은 장서남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곧이어 경호원이 다가와 그를 바닥에서 일으켜 세우더니 자리를 떠났다.도아영은 남현숙의 친숙한 면만 봐왔던 지라 이렇게 무자비하게 누군가를 내치는 모습이 너무 낯설었다.어쩌면 이게 바로 그녀의 본모습일지 모른다. 아마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만 너그러운 척 선의를 베풀었을 수도 있다.심성이 원래 착하신 분이라면 고작 말실수를 한 번 했다고 몇 년 동안 따라다니던 직원을 가차 없이 자르지는 않을 테니까.“아영아, 혹시 기사 내용에 대해 알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어서 오늘 널 불렀어.”“무슨 기사요?”도아영은 모르는 척 남현숙을 바라보았다.남현숙이 휴대폰을 꺼내자 화면에 그녀가 도원 그룹의 후계자로서 구호 그룹과 손을 잡았다는 내용이 떡하니 나타났다.“구연준이 4천억을 빌려준 거야?”남현숙은 못마땅한 말투로 물었다.언젠간 물어볼 거로 예상했지만 이렇게 빨리 그녀의 귀에 흘러 들어갈 줄은 몰랐다.“할머니, 소문이 와전된 것 같은데 구호 그룹과 도원 그룹은 평범한 비즈니스 파트너일 뿐이에요.”“평범하든 말든 둘째치고, 적어도 수호의 약혼녀로서 구연준과 너무 친하게 지내는 건 아니라고 봐.”남현숙의 말투가 어느새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게다가 이미 임자도 있는 사람이 무슨 회사를 운영한다고 그래? 이참에 남동생에게 넘겨줘. 서남의 말에 많이 불쾌하겠지만 일부는 맞다고 생각해. 어쨌거나 자기 약혼자한테 신경을 써야지 회사 일은 너무 깊게 관여하지 마. 여자는 기가 너무 세도 남자가 싫어해.”남현숙의 말에 도아영은 헛웃음이 났다.“할머니, 회사는 아빠가 물려준 유산이라 남한테 넘길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수호 씨의 마음은 애초에 딴 데 있는지라 제가 아무리 애를 써도 되돌리기는 힘들걸요? 저를 설득하는 것보다 차라리
장서남은 도아영을 쫓아가기 위해 얼른 차에 올라탔다.부리나케 뒤따라오는 장서남을 보자 도아영은 냉소를 지었다.성격이 물러터진 고용주 때문에 일개 직원 따위가 감히 건방지게 구는 것이다.엄연히 도씨 일가 아가씨로서 어떻게 보면 손님인 셈인데 고작 운전기사가 주인 행세를 하며 무례하게 행동하는 건 납득이 불가했다.예전에는 화가 나도 참았지만 이제는 절대 봐주지 않을 것이다.잠시 후 택시는 이씨 별장 앞에 멈추어 섰다.남현숙은 본가에서 이사한 이후로 별장에서 지냈다.창문 너머로 택시에서 내리는 도아영을 보자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뭐지? 서남한테 데리러 가라고 하지 않았어? 왜 혼자 왔대?”“글쎄요...”옆에 있던 도우미도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분명 장서남이 픽업 간다고 하지 않았는가?“지금 장난해? 동네방네 웃음거리로 전락하게 할 작정이야?”남현숙은 씩씩거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리고 거실로 들어선 도아영을 발견하고 재빨리 다가가 물었다.“아영아, 왜 혼자 왔어? 서남이가 데리러 안 갔어?”“아니요. 픽업하러 오셨던데 저보다 강이나 씨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서 그냥 택시 타고 왔어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장서남이 현관문을 열고 허둥지둥 뛰어왔다.남현숙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아영을 픽업하러 보냈더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어, 어르신...”장서남은 진땀을 흘리며 말했다.“그냥 잡담을 몇 마디 했을 뿐인데 아영 씨가 화를 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게다가 어르신의 체면이 구겨지게 택시를 타다니! 이게 다 제 탓입니다. 괜히 허튼소리를 해서 말이에요. 단지 대표님에게 신경을 좀 더 쓰면 좋을 것 같다고 했는데 정색하며 차에서 내릴 줄이야... 만약 다른 사람의 귀에 흘러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을 텐데 정말 큰 일이네요.”남현숙을 오랫동안 모셔 온 사람으로서 성격 또한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체면을 가장 중요시했다.손님이 택시를 타고 집에 오는 일은 여태껏 단 한 번도 없었다.따라서 도아영이
그제야 장서남은 도아영의 눈에 웃음기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이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도씨 일가 아가씨라고 해도 두려울 게 뭐 있나 싶었다. 그래봤자 이수호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는 신세이지 않은가?그리고 말을 이어갔다.“아영 씨, 어르신에게 잘 보이면 장땡이라고 생각하는 건 큰 오산이에요. 대표님께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바로 성질이 고약한 여자이죠. 그에 비해 강이나 씨는 여성스러움과 착함의 대명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대로 손 놓고 있다가는 사모님의 자리를 양보해야 할지도 몰라요.”장서남은 도아영에게 이수호의 아내, 더욱이 강이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아니면 애초에 강이나를 따라 하며 환심을 사려고 애를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도아영의 콧대를 꺾었다는 생각에 장서남은 의기양양했다. 곧이어 싸늘한 호통 소리가 울려 퍼졌다.“차 세워요!”갑작스러운 명령에 깜짝 놀란 나머지 브레이크를 밟았다.“아영 씨...”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아영은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이를 본 장서남은 겁에 질려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그리고 운전석을 허둥지둥 벗어나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아영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이씨 일가에 어떻게 이런 무례한 직원이 다 있죠? 방금 그런 말은 대체 누가 해도 된다고 했는지 궁금하네요.”진지한 모습은 절대로 농담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장서남의 안색이 순식간에 돌변했다.도아영은 워낙 성격이 순하고 소심한 탓에 방금 내뱉은 말은커녕 설령 수위가 훨씬 더 높아도 여태껏 화를 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그런데 오늘은 갑자기 무슨 상황이란 말이지?“이게 다 아영 씨를 위해서 하는 말인데 은혜도 모르고 뭐 하는 짓이죠? 만약 강이나 씨였더라면 고참 직원을 이렇게 함부로 대하지 않았을 거예요.”그는 일부러 ‘고참’이라는 단어를 강조해서 말했다.도아영은 장서남이 남현숙의 최측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한 지 벌써 10년이 넘었는지라 신뢰가 두둑했다.따라서
도아영의 편을 들어주는 이수호 때문에 강이나는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동안 원수를 대하는 듯 냉정한 모습만 지켜봐 왔기에 모욕은 일상이며, 더욱이 감싸주는 건 상상조차 못 했다.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되었단 말이지?설마 도아영과 정말 결혼할 생각인가?한편, 주민서는 따라오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다행히 따돌렸나 봐. 이수호 장난 아닌데? 설마 경호원을 총동원한 거야? 영문을 모르는 사람은 영화라도 찍는 줄 알겠어.”그러고 나서 도아영을 돌아보며 툴툴거렸다.“너도 참, 쓸데없이 이수호는 왜 도와줘? 그냥 둘이 지지고 볶게 놔두지. 결국 너만 남의 흉내를 내서 남자나 꼬시러 다니는 여우 년이 되어버렸잖아. 본전도 못 찾았네.”“이수호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였거든?”전생에 이미 교훈을 얻은 만큼 다시는 이수호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는 게 답이었다.게다가 강이나라면 죽고 못 사는 남자이니 이번 생에는 흔쾌히 자리를 양보해서 비운의 커플을 이뤄줄 생각이었다.이때, 도아영의 휴대폰이 울렸다.발신자를 확인하는 순간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이번에는 또 무슨 일로 전화한 걸까?곧이어 통화 버튼을 누르자 휴대폰 너머로 남현숙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영아, 이따가 기사님을 보낼게. 물어볼 게 있어.”왠지 모르게 딱딱한 말투에 도아영이 재빨리 대답했다.“할머니, 저 아직 학교라서 당장은 어려울 것 같아요.”“교장 선생님께 이미 말씀드렸으니 그냥 가도 돼. 기사님이 곧 도착할 거야.”말을 마치고 나서 전화를 뚝 끊었다.끊임없이 이어지는 통화 종료음을 들으면서 도아영은 조소를 머금었다.그리고 속으로 바보 같은 자신을 비웃었다.그동안 이수호가 무슨 짓을 하든 남현숙만큼은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다시 태어나고 나서야 이씨 가문 사람은 한통속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미래의 시할머니에게 진심을 바라는 자체가 사치였다.결국 모든 건 이익으로 귀결되었다.곧이어 도아영
그러고 나서 유하영과 조나린에게 둘러싸인 채 강의실로 걸어갔다.내부는 이경 그룹의 경호원들로 가득했다.유하영은 이수호를 보자마자 손을 흔들었다.“대표님!”이수호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고 멀지 않은 곳에서 강이나의 모습을 발견했다.한편, 강이나는 이수호의 맞은편에 있는 도아영을 바라보았다.게다가 도아영의 팔을 잡은 이수호 때문에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아영 씨가 여긴 왜...”유하영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고 조나린과 시선을 주고받았다.이수호가 강이나를 찾으러 왔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도아영한테 볼 일이 있을 줄이야.결국 분위기는 일촉즉발의 상태까지 이르렀다.“수호 씨, 이게 무슨 상황이죠?”강이나는 불만을 애써 참으며 물었다.도아영이 이수호의 손을 뿌리치며 불쑥 끼어들었다.“이나 씨를 찾으러 왔다고 하지 않았나요? 이제 만나게 되었으니까 전 이만 가볼게요.”말을 마치고 나서 혼란스러운 틈을 타 주민서를 데리고 도망쳤다.이수호는 굳은 얼굴로 따라가려고 했지만 강이나가 그를 불렀다.“수호 씨!”이내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유하영이 불쑥 끼어들었다.“내가 뭐랬어? 대표님은 널 보러 왔다고 했지? 이게 다 뻔뻔스러운 도아영 탓이야. 예전부터 너만 따라 하기 급급하더니 어쩌면 지금도 변함이 없을까? 누가 봐도 대표님을 유혹하려고 수작을 부리는 거잖아. 흥! 제 주제도 모르고 말이야.”유하영의 말을 듣고 있던 이수호는 표정이 싸늘하게 식어갔다.강이나는 이수호에게 다가가 물었다.“수호 씨, 하영 말이 맞아요?”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강주에서 이수호가 강이나를 사랑한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반면, 도아영은 예전부터 강이나의 스타일을 따라 하며 흡사한 외모를 무기 삼아 이수호의 환심을 사려고 애를 썼다.“당연하지 않겠어? 대표님은 사람을 잘못 본 게 확실해.”조나린이 맞장구를 쳤다.죽이 척척 맞는 두 여자 때문에 도아영은 본의 아니게 이수호를 유혹하기 위해 갖은 꿍꿍이를 꾸미는 여자가 되어버렸다.“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