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혼식에서 일부러 파혼 선언을 하고 주씨 일가에 시켜서 재미도 없는 신문 기사를 내더니 이제 와서 구연준 꼬시면서 경매에서 그렇게 도발을 해? 너 이거 다 내 주의를 끌려고 그런 거잖아. 좋아, 이제 드디어 소원성취했어.”이수호는 그녀의 턱을 잡고 당장이라도 몸을 기울일 것만 같았다.그때 도아영이 뜬금없이 웃음을 터트렸다.“대표님 이러는 거 강이나 씨한테는 떳떳해요?”강이나라는 이름 석 자에 이수호는 순간 온몸이 경직되었다.이때다 싶어 도아영이 재빨리 손을 빼내고 그의 목을 껴안더니 한결 매혹적인 눈길로 넌지시 말을 이었다.“대표님 말이 맞았어요. 내가 이렇게 한 거 대표님께 관심받고 싶어서예요. 그래도 소파는 영 비좁을 것 같은데 우리 이참에... 내 방으로 갈까요?”그녀가 드디어 본모습을 드러내자 이수호는 짜증 섞인 표정으로 가차 없이 밀쳐내고 차갑게 쏘아붙였다.“이런 저질스러운 수작은 나한테 안 통해. 그러니까 적당히 해, 도아영!”“에이 왜요? 대표님 아주 좋아하시잖아요. 나의 이런 저질스러운 수작...”도아영은 아무렇지 않은 듯 소파에 등을 기댔다.“내빼는 척하지 말아요. 남자들은 진짜 사랑하는 여자랑 하룻밤 즐기는 여자가 따로 있잖아요. 충분히 이해하고 전혀 충돌될 것 없다고요.”그녀가 몸을 배배 꼬면서 이수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걱정 마세요. 오늘 밤 일은 강이나 씨한테 무조건 비밀로 할게요.”“꺼져!”이수호는 드디어 그녀를 밀쳐내고 혐오에 찬 눈길로 째려보며 경고장을 날렸다.“내 앞에서 이런 수작 그만 부려! 너 같은 여자 수없이 봐왔어. 할머니만 아니었다면 난 절대 너랑 결혼할 일 없다고!”한편 도아영은 증오에 찬 그의 눈빛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일부러 홀가분한 척하며 말했다.“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대표님, 이만 가보시죠.”위층에서 줄곧 엿듣던 유정연은 대화가 이렇게 흘러가자 당황하기 시작했다.이수호가 그들의 돈줄인데, 이경 그룹의 뒷받침이 없다면 도원 그룹은 이제 어떡하란 말인가?유정연은 부랴부랴 아래층
“그게 아니라요...”도아영이 어두운 얼굴로 설명하려던 그때 유정연이 다급하게 가로챘다.“수호야, 아영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마음이 변할 리가 있겠어? 무슨 오해가 있는 게 분명해.”“많이 좋아하긴 하나 봐요.”이수호는 비아냥거리면서 바닥에 널브러진 물건을 주웠다. 사진은 물론이고 이수호에 관한 물건이 가득했다.“우리 아영이도 널 진심으로 좋아하고 어르신도 아영이를 예뻐하는 걸 봐서 파혼은...”“아줌마, 파혼은 이미 결정된 일이에요. 대표님이랑 좋게 끝내기로 했고 대표님도 옛정을 생각해서 우리 도원 그룹을 더는 공격하지 않기로 했어요. 맞죠? 대표님?”도아영은 이수호에게 물러날 기회를 주었다. 이수호가 쿠션을 들고 물었다.“내가 언제 파혼하겠다고 했어?”“대표님...”“그리고 누가 너한테 파혼이 이미 결정된 일이라고 했어?”이수호가 차갑게 웃었다.“도아영, 자극 요법으로 나한테 파혼을 강요한 다음에 구연준이랑 만나려고? 꿈은 참 야무지게 꾼단 말이지.”“대표님, 아까 분명히...”“내가 널 좋아하진 않지만 약혼하지 않겠다고 한 적도 없어. 며칠 후에 기자회견을 열어서 파혼에 관한 걸 전부 해명할 거야.”“대표님...”“사모님, 나머지 준비할 건 사모님께 맡길게요.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 다신 보고 싶지 않습니다.”“걱정 마, 수호야. 파혼 얘기 다신 꺼내지 않게 할게.”도아영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전생에 내가 매달릴 때는 나랑 약혼하기 그렇게 싫어하더니 이번 생에는 왜 약혼하지 못해서 안달인 거지?’이수호가 떠난 후 유정연의 입이 귀에 걸렸다.“잘됐어. 너무 잘됐어. 이씨 일가 사모님 자리 드디어 지켰어.”도아영은 굳은 얼굴로 박스 앞으로 다가가 물건을 전부 정리한 다음 문밖에 던졌다. 그 모습에 유정연이 화들짝 놀랐다.“도아영, 또 왜 이래?”뒷마당에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 도아영이 박스 안의 물건을 다 태우는 것이었다.“도아영, 미쳤어?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수호가 따지지 않겠다고 했으면 고마운
이튿날, 도원 그룹 산하의 모든 기업이 작업을 중지했다. 도원 그룹의 주주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댔다. 작업을 중지했다는 건 도원 그룹의 자금에 큰 문제가 생겼다는 걸 뜻했다.만약 이대로 가만히 내버려 둔다면 계약을 위반하여 부도가 날지도 모른다.회의실 안, 사람들은 유정연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쨌거나 그동안 유정연이 회사를 경영했으니까.잠시 후 안용준과 유정연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은 두 사람을 보자마자 다급하게 말했다.“사모님, 프로젝트가 모두 멈췄는데 이제 어떡합니까?”“그러게 말이에요. 이대로 갔다간 회사가 부도나게 생겼어요.”조급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유정연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도아영이 장부를 조사할까 봐 겁이 나서 증거들을 없앴을 뿐인데 이튿날에 바로 회사에 일이 터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다 도아영 때문이야. 이수호를 건드린 바람에 도원 그룹의 자금에 문제가 생겼어. 이수호가 투자만 철회하지 않았어도 벼랑 끝으로 내몰리지 않았을 거라고.’그 생각에 유정연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겉으로는 미소를 유지하면서 사람들을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세요. 이 집안의 철이 없는 아가씨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거예요. 전에 이수호 대표를 건드린 바람에 이 대표가 투자를 철회했거든요. 지금 당장 아영이를 데리고 이 대표한테 가서 사과할게요. 이 대표가 다시 투자한다면 우리 프로젝트도 다시 정상적으로 가동할 수 있어요.”“아영 씨가 배운 것도 없고 재주도 없다고 했잖아요. 요 며칠 회사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은 것도 모자라 장부도 볼 줄 모르는 사람한테 어떻게 회사를 맡겨요? 회사를 이끌어갈 수 있는 분은 역시 사모님밖에 없어요.”“사모님, 최대한 빨리 아영 씨를 설득하세요. 이 대표님은 우리가 건드릴 수 있는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맞아요. 자금이 없으면 회사는 무조건 망해요.”...주주들의 원망이 끊이질 않았다. 유정연은 겉으로는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마음속으로는 뾰족한 수가 없어 불안하기만 했다
이수호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걔가 저지른 일이니까 알아서 수습해야지, 뭐. 도원 그룹이 없으면 걔는 아무것도 아니야.”그때 사무실 전화가 울렸다. 이수호가 전화를 받자 프런트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도씨 일가에서 어떤 여성분이 찾아왔는데 대표님을 만나겠답니다.”이수호는 도아영이 온 줄 알고 소파에 기대면서 코웃음을 쳤다.“올라오라고 해.”“네, 대표님.”프런트 직원이 전화를 끊었다.임규리는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 오늘 강이나와 비슷한 스타일의 흰 치마를 입었다. 대표이사실의 문을 연 그때 이수호는 고개를 숙인 채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이수호는 고개도 들지 않고 그녀를 비웃었다.“왜? 나한테 빌려고 왔어?”“대표님... 저예요, 임규리.”도아영의 목소리가 아닌 걸 알게 된 이수호가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임규리였다.임규리는 살짝 겁을 먹었는지 고개를 숙였다.“대표님, 저...”“여긴 어쩐 일로 왔어?”이수호의 말투가 차갑기 그지없었다. 임규리는 어젯밤과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 이수호를 보고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대표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려고 왔어요. 한성대에 들어갈 수 있게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임규리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러자 이수호가 슬슬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얘기 끝났어?”“네... 끝났어요.”임규리가 강이나와 같은 옷을 입은 걸 본 이수호의 눈빛이 더욱 싸늘해졌다.“끝났으면 그만 꺼져.”아무리 눈치가 없는 임규리라도 지금 이수호의 기분이 매우 좋지 않다는 건 알 수 있었다.옆에 있던 안지원이 말했다.“임규리 씨, 그만 나가주시죠.”임규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도아영의 얼굴이 강이나와 비슷한 덕에 이수호의 관심을 조금이나마 얻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도아영이 할 수 있는 건 나도 할 수 있어.’“대표님, 커피가 다 식은 것 같은데 제가 새로 한잔 내려드릴게요.”그러고는 책상 앞에 놓인 커피를 들고 이수호가 뭐라 얘기하기도 전에 밖으로
유정연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도씨 일가의 안주인 자리는 그리 쉬운 자리가 아니에요. 자금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면 하루빨리 도망치는 게 좋을 겁니다. 난 분명 귀띔해줬어요.”유정연은 이젠 억지로 웃지도 못했다.‘내가 도씨 일가에서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 겨우 남편이 죽을 때까지 버텼는데 이익은커녕 나더러 빚을 갚으라고? 절대 안 되지!’“아영아, 넌 사리에 밝은 애라서 절대 아줌마한테 빚을 갚으라고 하지 않을 거라는 거 알아. 아줌마가 이렇게 빌게. 수호한테 가서 잘못했다고 빌어. 수호가 용서해 준다면 우리 회사 문제도 쉽게 해결할 수 있어.”비굴하게 부탁하는 유정연의 모습에 도아영이 피식 웃었다.“아줌마, 내가 가서 사과할 수는 있어요.”“그럴 줄 알았어. 우리 아영이가 얼마나 철이 들었는데. 절대 회사를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지.”“말을 끝까지 들으셔야죠. 아직 조건을 얘기하지 않았어요.”유정연은 순간 멍해졌다.“조건? 조건이 있다고?”“그럼 제가 아무 조건 없이 부탁을 들어줄 줄 알았어요?”여유롭게 소파에 기대어 있는 도아영을 보고 있자니 유정연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화를 낼 수가 없었다.“아영아, 수호한테 고개를 숙이고 사과만 하면 되는데 이렇게까지 따져야겠어? 예전에는 이익을 따지는 사람이 아니었잖아.”“아빠는 저한테 여자는 온순하고 현명해야 한다는 것만 가르쳤어요. 이익을 따지는 건 다 아줌마한테서 배운 거예요.”도아영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천천히 말했다.“대표님을 찾아가서 설득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대표님이 도원 그룹을 공격하지 않을 거란 보장은 못 해요.”유정연이 입을 열기 전에 도아영이 계속하여 말했다.“그리고 제가 대표님을 찾아간다면 회사 일은 더는 아줌마와 아무런 연관이 없게 됩니다. 나중에 도원 그룹이 빚을 지든 발전하든 아줌마와 아무런 상관이 없을 거란 말이에요.”“너...”“동의하기 전에는 절대 안 가요.”도아영은 거의 자포자기했다.“대표님이 도원 그룹을 무너뜨리게
도아영의 환한 웃음을 본 유정연은 소름이 다 끼쳤다.한 시간 후, 도아영은 깔끔한 청바지에 흰색 민소매를 입었고 그 위에 청재킷을 매치했다.이경 그룹 문밖에 있던 직원들은 도아영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도아영은 선글라스를 낀 채 프런트로 다가갔다.“이 대표님 만나러 왔어요.”프런트 직원은 예쁜 얼굴에 몸매도 예술인 그녀를 보고는 말했다.“죄송한데 혹시 예약하셨나요?”프런트 직원이 알아보지 못하자 도아영은 선글라스를 벗었다.“도아영입니다.”그러자 프런트 직원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도... 도아영 씨?”“올라가도 될까요?”“그... 그럼요.”프런트 직원은 도아영이 올라갈 수 있게 엘리베이터를 눌러주었다.“봤어요? 아까 그 여자 도아영 씨였어요.”“아영 씨 웬일로 옷을 저렇게 입었대요?”“너무 예뻐요. 전에는 저렇게 예쁜 줄 몰랐었는데.”“이유를 꼭 말해야 알아요? 당연히 대표님께 잘 보이려고 그런 거죠. 도아영 씨가 평소에 강이나 씨의 스타일을 따라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이번에도 또 따라 한 게 분명해요.”...이경 그룹 대표이사실.임규리는 이수호에게 커피도 가져다주고 서류도 옮겨주었다. 안지원은 원망 한마디 없이 바삐 움직이는 임규리를 보면서 존경심이 다 들 정도였다.이 정도까지 할 수 있었던 사람은 도아영 말고 그녀가 두 번째였다.“도아영 씨, 대표님 사무실 바로 앞에 있어요. 따라오세요.”“네.”도아영의 시선이 이수호의 사무실로 향했다. 반투명 유리문이라 사무실 안의 상황이 정확히 보였다.임규리가 조심스럽게 이수호의 책상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두 눈에 그에 대한 사랑이 가득 담겨있었다.너무도 익숙한 장면에 예전의 자신이 떠올랐다. 도아영의 눈빛이 순식간에 서늘해졌다.슬슬 짜증이 난 이수호가 임규리를 내보내려던 그때 사무실 밖에 서 있는 도아영을 발견했다.전과 확연히 다른 도아영의 옷차림에 이수호는 잠깐 넋을 놓았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코웃음을 쳤다.이수호는 임규리의 아래턱을
“언... 언니.”임규리는 도아영을 보자마자 겁에 질려 벌떡 일어났다. 뒤로 물러나려던 그때 이수호가 손목을 덥석 잡더니 느긋하게 말했다.“아직 채 닦지도 못했는데 왜 도망가?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계속 무릎 꿇고 닦아.”“네... 대표님.”임규리는 다시 무릎을 꿇고 이수호의 신발을 닦아주었다. 이수호는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도아영에게 말했다.“도아영, 어떤 일은 네가 아니어도 충분히 대신할 사람이 있어. 게다가 너보다 더 잘해.”“대표님, 이런 꼴 보려고 여기 온 게 아닙니다.”도아영이 싸늘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수호는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이나한테 무릎 꿇고 사과만 하면 전에 있었던 일은 없던 거로 해주고 이틀 뒤 약혼식도 원래대로 진행할 거야. 그리고 도원 그룹에 거액의 투자도 할게.”그녀가 아무 말이 없자 이수호가 피식 웃었다.“무릎 꿇고 사과만 하면 되는데 그렇게 어려워? 전에는 잘만 꿇더니 왜? 이젠 못하겠어?”이수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도아영의 옆으로 다가갔다.“비위를 맞추겠으면 제대로 맞춰야지. 전에는 말 잘 들었잖아.”이수호가 점점 다가오자 도아영은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아 뒷걸음질 치며 거리를 멀리했다. 그러다가 손님들이 앉는 소파에 앉아 말했다.“대표님, 오늘 아줌마가 부탁하지 않았더라면 여기 오지도 않았어요.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거예요. 대표님이 투자를 철회하든 일부러 도원 그룹을 무너뜨리든 나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리고 강이나 씨한테 사과하라고 한 건...”도아영은 고개를 들고 이수호를 올려다보면서 웃었다.“내가 강이나 씨 목에 칼을 대고 손목을 그으라고 협박한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사과해야 하는데요?”그녀의 말에 이수호의 얼굴에 나타났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도아영의 개의치 않는 듯한 태도를 보고 있자니 이수호는 가슴속에 분노가 끓어올라 답답하기만 했다. 그가 냉랭하게 말했다.“도아영, 말하기 전에 생각 좀 해.”“제대로 생각하고 말하는 거예요. 사과는 절대 불가능합니다.”도아영
도아영의 말을 듣던 이수호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가 나간 후 임규리는 대놓고 도아영을 비난했다.“언니는 참 은혜도 모른단 말이죠. 제가 언니 대신 사과할게요...”“꺼져!”이수호의 갑작스러운 호통에 임규리는 겁에 질려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더 있었다간 이수호의 심기만 건드릴 것 같아 울면서 뛰쳐나갔다.사무실 밖에 있던 안지원이 들어와 굳은 얼굴로 말했다.“대표님, 도아영 씨 그냥 갔어요.”이수호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여 안지원도 더는 뭐라 하지 못했다. 사무실에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르고 나서야 이수호가 말했다.“내가 예전에 도아영을 많이 못살게 굴었어?”“사실을 듣고 싶으세요?”이수호의 날카로운 눈빛에 안지원은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누가 그렇게 하라고 했어? 자기가 기꺼이 원해서 하고서는.”“네... 대표님 말씀이 다 옳아요.”“자발적으로 그런 거면서 이제 와서 뭐가 억울하다고 저래?”“그러게요... 다 도아영 씨가 원해서 한 건데.”안지원이 맞장구를 치자 이수호도 그제야 기분이 조금 나아진 듯했다.그때 심정우가 사무실로 들어오더니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방금 누굴 봤는지 알아? 피부도 하얗고 몸매도 죽여주는 선글라스 여인을 봤어.”심정우는 이수호에게 다가가 툭 쳤다.“이수호, 난 널 친구라고 생각하는데 어쩜 회사에 이렇게 예쁜 여자를 두고도 나한테 얘기하지 않을 수가 있어?”이수호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옆에 있던 안지원이 가볍게 기침하며 귀띔했다.“도련님, 그분... 도아영 씨예요.”“뭐? 도아영?”심정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였다.‘엄청 얌전하고 조신하던 여자 아니었어? 저런 섹시한 옷을 입은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기분이 좋지 않았던 이수호가 얼굴을 찌푸리고 물었다.“여긴 왜 왔어?”심정우가 의아해하며 말했다.“왜 왔냐고? 오늘 강이나 생일인 거 잊었어? 나인 클럽에서 생일 축하해주겠다고 했잖아.”
장내에 있는 사람들도 이 광경을 지켜봤다.그는 전에 도아영이라면 치를 떠는 사람인데 오늘은 이토록 긴장한 모습으로 그녀를 부축하다니.도아영은 진작 사람들의 반응을 예상한 듯 손을 빼냈다.“고마워요.”그제야 이수호는 방금 그녀에게 이용당했다는 걸 알아챘다.전에 이경 그룹에서 도원 그룹을 대하는 태도를 볼 때 다들 이 두 집안이 사이가 안 좋은 거로 여기며 선뜻 도원 그룹과 협력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이제 이수호와 도아영의 사이가 조금은 나아졌으니 도원 그룹에 손 내밀 협력사도 슬슬 많아질 것이다.“감히 날 이용해?”예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이렇게까지 계략이 많은 줄은 몰랐다.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부잣집 딸로만 여겼는데 알고 보니 본인만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대표님이 그러셨잖아요? 서로 이용하는 게 우리 모두에게 좋은 거라면서요?”도아영은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들썩거렸다.전에 이수호가 바로 이런 식으로 그녀를 이용했고 이제 와서 전세가 역전됐을 뿐이다.“오늘 파티에 왜 날 초대했는지 모를까 봐요? 도원 그룹을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수작이잖아요. 썩 쉽지만은 않을걸요.”도아영이 완전히 오해하자 이수호의 안색이 확 돌변했다.“뭐라고? 집어삼켜?”생각도 참 야무진 그녀였다.할머니는 확실히 그런 생각을 지녔지만 이수호는 절대 아니다.옆에 있던 안지원이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그건 정말 오해예요, 아영 씨. 대표님은...”“대표님은 뭐요? 도원 그룹을 넘본 게 아니라고요? 말도 안 돼!”오늘 이경 그룹에서 초대한 사람들은 죄다 강주의 유명 인사들이다. 게다가 언론사까지 불러왔는데 도아영과 이수호의 관계를 널리 떠벌릴 목적이 아니라면 과연 누가 믿을까?도아영은 그저 헛웃음만 새어 나왔다.이수호까지 남현숙과 같은 생각일 줄이야.“잘 들어! 난 절대 너희 집안까지 통째로 집어삼킬 생각 따위 없어!”이수호가 그녀에게 바짝 다가섰다.요즘 그는 줄곧 도아영을 향한 솔직한 감정을 마주했다. 그가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자 도아영이 뒤로
도아영도 거절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다니는 모습을 외부인들에게 보여주는 것도 도원 그룹에 유리한 일이니까.“의외네요, 대표님. 할머니 말 한마디에 선뜻 저를 만나주시네요?”도아영이 야유 조로 쏘아붙였다.그녀는 이수호가 마냥 귀찮을 따름이었다.꼭 마치 이전에 이수호가 그녀를 대했던 것처럼 말이다.이제 둘의 입장이 완전히 바뀌었다.“할머니가 널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게 좋은 일인 것 같아?”다들 눈치챈 상황을 도아영이 모를 리가 있을까?그는 도아영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오늘 그녀는 금빛 롱드레스를 입고 풀메이크업을 장착하여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옆모습을 본 순간 이수호가 미간을 찌푸렸다.지금 그녀의 모습과 전에 봤던 제니의 모습이 완전히 똑같으니까.그의 따가운 시선에 도아영이 미간을 구겼다.“다들 지켜보는데 뭐 하는 거예요?”“조용히 해.”이수호는 그녀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봤다.한시라도 빨리 본인의 추측을 인증받고 싶은 모양이다.제니는 차갑고 도도한 미인상이라 섣불리 다가설 수 없는 매력을 내뿜는다.외모도 강주에서 손꼽히는 수준이다.어여쁜 도화안은 강주에서 흔히 찾아볼 수 없는 비쥬얼이었다.제니를 처음 볼 때부터 도아영과 너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제니의 모든 제스처가 도아영과 달랐으니까.이수호도 딱히 의심하지 않았지만 한성대 졸업시험에서 도아영의 성적 때문에 또다시 수상한 느낌이 들었다.반년 가까이 휴학한 학생이 기말고사에서 이토록 높은 성적을 따낼 수 있을까?그녀가 적은 답안은 명확한 사고와 충분한 이론을 지녔다. 이건 비즈니스 베테랑만이 작성할 수 있는 답안이었다.제니의 학력까지 떠올리자 이수호는 눈앞의 도아영을 더더욱 의심하게 됐다. 그녀가 바로 명성이 자자한 위너 그룹 CEO 제니가 아닐까?“다 봤어요?”도아영이 두 눈을 깜빡거렸다.반짝이는 눈동자는 차갑고 도도한 제니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내가 괜한 생각을 했나?’이수호는 미간을 구겼다.“왜 그렇게 봐요
...주위에 온통 쉬쉬거리는 소리뿐이었다.도아영이 오늘 왜 이 파티에 참석했는지 다들 너무 궁금했다.로열 호텔 안, 안지원이 2층 휴식실 문을 두드렸다.“대표님, 손님들 다 도착하셨습니다. 이제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아요.”“알았어.”이수호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눈만 감으면 어제 도아영이 했던 말만 떠올랐으니까.할머니가 이 파티를 열지만 않았어도 두 번 다시 도아영을 마주 하고 싶지 않았다.아래층.도아영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화려한 드레스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이제 도원 그룹의 유일한 상속자가 됐기 때문이다. 도아영과 결혼할 사람은 자연스럽게 도원 그룹도 차지하게 된다.그녀에게 불의의 사고라도 생기면 도씨 일가의 전 재산이 남편에게 돌아갈 것이다.장내에 있는 남성들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아영아, 얼른 할미 곁으로 와.”남현숙이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혐오에 찬 표정이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었다.도아영도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남현숙에게 다가갔다.남현숙은 그녀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우리 아영이 점점 이뻐지네. 수호랑 오랜만이지? 금방 내려올 테니 함께 얘기도 나누고 오붓한 시간 보내. 젊은 사람들끼리 춤도 추고 와인도 마시고 얼마나 좋아?”남현숙은 지금 사람들에게 보여주기식으로 연기하고 있었다.도아영은 이씨 일가 사람이란 걸 이 자리에서 선포하는 거나 다름없다.아무도 감히 도아영을 넘보지 말라는 의도였다.이에 도아영이 가볍게 웃었다.“아니요, 대표님을 어제도 만난 걸요. 왠지 나랑 함께하기 싫은 눈치였어요.”마침 위층에서 내려오던 이수호가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어제 일을 되새기자 그는 또다시 사색이 되었다.“허튼소리! 수호는 내가 제일 잘 알아. 전에 파혼하려던 건 홧김에 그랬어. 젊은 애들이 그렇지 뭐. 누가 뭐래도 수호는 널 아주 많이 좋아해. 오늘도 너한테 사과하려고 하던데?”남현숙은 웃으면서 이수호를 불러왔다.뭇사람들은 이 광경을 빤히 지켜봤
이수호는 할머니의 말뜻을 너무 잘 이해한다.전에는 단지 도아영의 신분이 적합해서 그녀와 약혼하려던 거라면 지금은 도씨 일가 전체를 거머쥘 기회가 생겼다.그는 또다시 오늘 낮에 도아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고 자존심에 큰 타격을 입었다.“할머니는 이번 일에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린 이미 파혼했으니 절대 결혼할 리 없어요.”말을 마친 이수호가 위층으로 올라갔다.남현숙은 손주 녀석의 성격을 잘 알기에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래, 네가 굽히지 못하겠다면 이 할미가 직접 나서야지 어쩌겠어.’다음날, 유정연이 감방에 갇히고 도지호가 집에서 쫓겨난 소식이 이 바닥에 쫙 퍼졌다.도아영은 도씨 일가의 유일한 상속자로서 이번에 매우 순조롭게 도원 그룹을 이어받았다.학교에 관한 일도 일단락되었으니 그녀는 한창 도원 그룹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아영 씨, 아침에 이씨 일가에서 찾아왔습니다. 오늘 저녁에 아영 씨더러 로열 호텔 파티에 참석하라고 하시네요.”“이씨 일가에서요?”‘이수호가 또 찾아온 거야?’도아영은 잠시 의심했지만 곧이어 남현숙임을 알아챘다.그 어르신은 능구렁이와도 같은 분이니까.도아영이 도원 그룹을 상속받자마자 파티에 초대하다니, 이건 절대 호의일 리가 없다.“아영 씨는 이제 도원 그룹 오너가 됐으니 이번 파티에 당연히 참석하셔야 해요. 게다가 앞서 이씨 일가와 도씨 일가가 사이가 나쁘다는 소문이 떠돌다 보니 많은 협력사에서 감히 우리와 협력하지 못하고 있어요. 이경 그룹 눈 밖에 날까 봐 두려운 거죠. 이번에 이씨 일가에서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하면 많은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을 수 있을 테고 도원 그룹 상황도 훨씬 나아질 겁니다.”주연우가 하는 말을 도아영도 물론 잘 알고 있다.다만 이경 그룹의 파티에 참석하기에 앞서 그녀는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남현숙에게 득이 돼선 안 되고, 이씨 일가와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게 아니라고 외부에 알려야 하니까.하지만...오늘 밤에 이수호를 만날 걸 생각하면 그녀는 머리가 지끈거렸다.“드레스 한 벌
“가시죠, 규리 씨.”“아니요! 대표님 좋은 사람인 거 알아요. 예전에 쌓아온 정을 봐서 우리 이모 한 번만 구해주세요!”“더는 우리 집에 나타나지 말라고 분명 말했을 텐데?”이수호가 싸늘한 눈길로 쳐다보자 임규리는 등골이 오싹했다.며칠 전에 강이나가 찾아와서 그와 임규리에 관한 스캔들을 일러바쳤는데 고작 여자들의 수작인지라 이수호는 딱히 간섭하지 않았다.어차피 임규리와 아무 사이도 아니니 똑똑한 사람이라면 둘이 불가능하단 걸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이수호와 임규리는 신분 격차가 너무 크니까.그 소문들은 임규리가 지어낸 거로밖에 결론이 나지 않는다.이수호는 이렇게 꼼수가 많은 여자가 딱 질색이다.한편 임규리는 아직 본인이 한 일을 이수호에게 들킨 줄 모르고 계속 유정연을 위해 사정했다.“이모도 도씨 일가 사람인데 대표님 정말 안 도와주실 거예요?”“안 비서! 내 말 안 들려?”“알겠습니다, 대표님.”안지원이 또다시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임규리 씨, 계속 이러시면 끌어내는 수밖에 없어요.”그녀는 사색이 되었다.유정연이 감방에 간 일이 한성대에 소문이라도 퍼지면 그녀의 인생도 끝장이다.한성대에 들어온 지 1년밖에 안 됐는데 모든 거짓말이 들통나고 더 이상 뒷배가 없다는 게 알려지면 남은 3년은 어떻게 버텨내란 말인가?아마 학자금도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이다.“대표님, 제발요! 저희 이모 한 번만 도와주세요. 할머니, 제가 요 며칠 시중만 잘 들어줬잖아요. 그러니까 제발요! 우리 이모 구해주세요.”임규리는 눈물범벅이 되었다.한편 남현숙은 이수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그녀가 한심할 따름이었다.“네 이모가 그런 짓을 저질렀으니 우리도 할 수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도씨 일가의 일이니 정 도움을 구하고 싶다면 아영이 찾아가 보거라.”도아영을 언급한 순간 이수호의 두 눈이 반짝였다.그녀가 도와줄 리 있을까?왠지 유정연이 감방에 들어간 것도 도아영과 연관이 있을 듯싶었다.다만 아직도 그녀 생각 중인 자신을 되돌아보며 이수호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넌 도씨 일가의 상속자도 아니고 우리 아빠 아들도 아니야. 법적으로 볼 때 오늘부로 너희 두 모자는 우리 집안과 아무 관련이 없어. 정신 좀 차려, 지호야!”도아영은 야유 조로 쏘아붙였다.전생에 아빠가 그녀에게 회사를 물려주셨는데 마음 약한 도아영이 유정연 모자에게 고스란히 건넸다. 결국 아빠의 회사는 3년도 안 돼서 부도났고 유정연은 도지호를 데리고 안용준과 함께 도망치려 했다.그러니 이번 생은 무슨 일이 있어도 유정연 모자와 도원 그룹을 떼어놓아야 한다.“이 자식 끌어내.”도아영이 차갑게 분부하자 도씨 일가의 경호원들이 곧장 도지호를 이 집에서 끌어냈다.그는 슬리퍼를 신은 채 반항할 여지도 없이 처참하게 집에서 쫓겨났다.“도지호랑 유정연 물건들 싹 다 정리해서 밖에 내다 버려요!”“네, 아영 씨.”주연우는 곧바로 위층에 사람을 보내서 도지호와 유정연의 물건을 싹 다 처리했다.도아영은 다 정리한 물건들을 도지호에게 내던졌다.옷과 신발, 책까지 버려진 걸 보더니 도지호는 안색이 잔뜩 일그러졌다.“다들 여기서 잘 지켜. 도지호는 이제 우리 집안과 아무 관련이 없어. 만약 얘가 우리 집에 찾아와서 소란 피우면 그 즉시 경찰에 신고해.”“네, 알겠습니다.”도아영은 그가 소란을 피울 걸 염두에 두고 일부러 경비소를 차렸다.뒤늦게 정신을 차린 도지호는 미친 듯이 철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도아영! 난 네 동생이야! 나한테 이러면 안 돼! 당장 문 열어! 나야말로 도씨 집안 아들이잖아!”도아영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게 집으로 들어갔다.유정연 모자의 흔적이 없는 이 집안은 그제야 온화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선사했다.“아영 씨, 다음 계획은?”“유정연 전 재산을 회사 계좌로 입금했어요. 그동안 모자랐던 금액을 채운 셈이죠. 이제 드디어 도원 그룹 협력 프로젝트를 운행하게 됐으니 당분간은 위기를 벗어났다고 보면 돼요.”‘이수호만 잠자코 있다면...’도아영은 이렇게 생각했다.그녀는 오늘 이수호를 가
저녁 무렵, 도지호는 집에서 줄곧 도아영의 연락만 기다렸다.도원 그룹의 차가 집 앞에 도착하자 그는 부리나케 달려나갔다.차에서 내리는 도아영을 보더니 도지호가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었다.“너 뭐야? 왜 전화를 안 받아? 집에 무슨 일 생긴 줄 알아? 당장 나랑 경찰서 가서 엄마 모셔와야지!”도지호가 명령 조로 쏘아붙이며 도아영의 손목을 붙잡고 경찰서로 갈 기세였다.이에 도아영이 그를 힘껏 내팽개쳤다.도지호는 못 믿겠다는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너 미쳤어? 감히 날 밀쳐?”이 집에서 줄곧 거만을 떨던 도지호였기에 그녀가 매정하게 밀쳐버릴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이제 막 그녀에게 손을 대려고 할 때 주연우가 덥석 막아서더니 가볍게 도지호를 제압했다.“너도 미친 거야? 우리 집안 따까리 주제에! 확 잘리고 싶어?”도지호는 힘으로 안 되니 고래고래 소리만 질렀다.이에 도아영이 차분하게 말했다.“잘 들어. 넌 이제 우리 집안 사람이 아니야. 회사에서도 아무런 직급이 없으니 주 비서는 제쳐두고 이 집안 가정부도 네 멋대로 자를 순 없어.”“이년이 지금 뭐라는 거야? 나 도지호야! 왜 이 집안 사람이 아닌 건데? 엄마가 잡혀간 틈에 내 자리를 빼앗으려고? 꿈 깨! 미친X아!”그는 기세등등한 눈빛으로 도아영을 째려봤다.하지만 도아영은 시큰둥하게 쓴웃음만 지었다.“네가 우리 아빠 아들이야? 쥐뿔도 아닌 게 무슨 자리까지 빼앗는다고 그래? 너희 엄마 안용준이랑 바람피운 건 알지? 안용준은 내가 직접 처리했고 너희 엄만 너그럽게 용서했어. 그런데 여태껏 회사 공금을 횡령하고 끊임없이 회사 자산에 손댔더라? 대체 언제까지 우리 집안 재산을 노릴 건데? 너희 두 모자 좀 너무하단 생각은 안 들어?”“개소리 치지 마! 우리 엄마가 어떻게 딴 남자랑 바람을 피워?”도지호의 안색이 확 일그러졌다.“네가 아직 어리니 그동안 나한테 무례하게 굴었던 건 그냥 눈감아줄게. 하지만 너희 엄마는 우리 아빠랑 도원 그룹에 미안한 짓을 너무 많이 저질렀어. 그건
사채업자들은 꽤 모아진 자산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드디어 도씨 저택을 떠났다.유정연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채에 딱 한 번 손을 댔더니 아들과 함께 전 재산을 털릴 줄이야.한편 도아영은 도원 그룹에서 사채업자의 전화를 받았다.“아영 씨, 분부하신 일은 다 해결했습니다. 모든 물건을 현금화해서 이체해드리겠습니다.”“알겠어요. 오늘 다들 수고 많으셨어요.”“별말씀을요. 서 대표님 분부대로 했을 뿐입니다.”도아영은 가볍게 웃었다. 이 모든 건 서현우의 공로이니까.그의 조언대로 유정연 모자의 전 재산을 손쉽게 챙겼고 이 또한 아빠 도석진이 받아야 할 몫이다.전화를 끊은 후 도아영은 주연우에게 분부했다.“이제 다 됐어요. 시작해볼까요?”“네, 알겠습니다.”주연우는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도씨 저택에서 유정연 모자가 멍하니 넋 놓고 있을 때 문밖에서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유정연은 화들짝 놀랐고 도지호도 어안이 벙벙했다.‘오늘 무슨 날이야? 경찰차는 또 뭔데?’유정연이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경찰이 집안으로 들어와서 다짜고짜 그녀에게 수갑을 채웠다.“신고받고 왔습니다. 유정연 씨, 당신은 금융범죄 혐의로 체포되었으니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습니다...”“네? 뭐라고요? 금융범죄라니? 그게 대체 뭔 말인데요?”유정연은 몹시 당황했지만 경찰은 그녀의 변명 따위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서로 가서 조사받으시죠! 당장 끌고 가!”“당신들 뭐야? 왜 우리 엄마를 잡아가는 건데?”도지호가 쫓아가려 했지만 경찰은 아예 무시한 채 유정연을 차에 태우고 떠나가 버렸다.오늘 발생한 모든 일이 괴이할 따름이었다.도지호는 곧바로 도아영에게 연락했다.평상시에는 그렇게 연락이 잘 되던 도아영인데 오늘은 도통 받지를 않았다.“전화 좀 받아!”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유정연이 경찰에 잡혀가니 그는 가장 먼저 도아영이 떠올랐다.그녀 말곤 엄마를 구해줄 사람이 없으니까.도원 그룹에서 도아영은 쉴 새 없이
“왜 그래요 갑자기? 무슨 일 있어요?”유정연은 사채에 손을 댄 일을 죽어도 도아영에게 고백할 순 없었다.도씨 일가의 가훈이 바로 사채에 손을 대지 않는 거니까.소문이라도 나면 체면이 바닥나고 도아영에게 쫓겨날지도 모른다.한편 도아영은 그녀가 사채를 빌린 걸 진작 알고 있어 입꼬리를 씩 올렸다.“지금 바로 연락해 계약서 보낼 테니까 거기 사인만 하면 효력이 발생할 거예요. 아줌마랑 지호가 우리 아빠 재산을 포기한다는 조건으로 계좌이체 해드릴게요. 사인만 하면 재무팀에 바로 연락해서 돈 보낼게요.”기세등등한 남자들을 보고 있자니 유정연은 더 이상 망설일 겨를이 없었다.“알았어! 사인할게. 바로 할게!”도아영이 곧장 휴대폰으로 계약서를 보내왔다.유정연은 꼼꼼히 읽어볼 새도 없이 바로 사인했고 계좌에 거액이 들어왔지만 모든 걸 사채업자에게 털렸다. 20초도 안 되는 사이에 이 모든 일이 벌어졌다.다만 겁에 질린 유정연은 이 과정의 수상한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이봐! 아직도 돈 있잖아! 바로 내놓으면 될 것이지 왜 이렇게 질질 끌었어? 돈 될만한 액세서리들 당장 내놔!”유정연은 허겁지겁 위층에 올라가 보물처럼 아끼던 액세서리를 모조리 꺼냈다.이것들은 전부 도석진이 생전에 그녀에게 선물한 값비싼 액세서리들이다.수년간 아까워서 제대로 착용하지도 못했고 그저 도지호의 생일날 딱 한 번 치장하고 나갔었다.“여기 있어요. 이거면 되나요?”그녀는 액세서리를 사채업자에게 건넸다.“이년이 감히 내 앞에서 꼼수를 부려? 분명 더 있을 거야! 다 내놔! 이까짓 거로 누구 입에 풀칠하겠어?”앞장선 남자가 그녀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유정연은 화들짝 놀라서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숨긴 건 맞지만 이 사람들이 대체 그것까지 어떻게 알아낸 건지 더는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그녀는 마지못해 여태껏 보관한 모든 액세서리와 명품 가방, 옷들까지 꺼냈다.“이 새끼도 있잖아! 얘 것도 싹 다 꺼내!”도지호는 평상시에 손이 커서 가격도 안 보고 물건을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