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혼식에서 일부러 파혼 선언을 하고 주씨 일가에 시켜서 재미도 없는 신문 기사를 내더니 이제 와서 구연준 꼬시면서 경매에서 그렇게 도발을 해? 너 이거 다 내 주의를 끌려고 그런 거잖아. 좋아, 이제 드디어 소원성취했어.”이수호는 그녀의 턱을 잡고 당장이라도 몸을 기울일 것만 같았다.그때 도아영이 뜬금없이 웃음을 터트렸다.“대표님 이러는 거 강이나 씨한테는 떳떳해요?”강이나라는 이름 석 자에 이수호는 순간 온몸이 경직되었다.이때다 싶어 도아영이 재빨리 손을 빼내고 그의 목을 껴안더니 한결 매혹적인 눈길로 넌지시 말을 이었다.“대표님 말이 맞았어요. 내가 이렇게 한 거 대표님께 관심받고 싶어서예요. 그래도 소파는 영 비좁을 것 같은데 우리 이참에... 내 방으로 갈까요?”그녀가 드디어 본모습을 드러내자 이수호는 짜증 섞인 표정으로 가차 없이 밀쳐내고 차갑게 쏘아붙였다.“이런 저질스러운 수작은 나한테 안 통해. 그러니까 적당히 해, 도아영!”“에이 왜요? 대표님 아주 좋아하시잖아요. 나의 이런 저질스러운 수작...”도아영은 아무렇지 않은 듯 소파에 등을 기댔다.“내빼는 척하지 말아요. 남자들은 진짜 사랑하는 여자랑 하룻밤 즐기는 여자가 따로 있잖아요. 충분히 이해하고 전혀 충돌될 것 없다고요.”그녀가 몸을 배배 꼬면서 이수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걱정 마세요. 오늘 밤 일은 강이나 씨한테 무조건 비밀로 할게요.”“꺼져!”이수호는 드디어 그녀를 밀쳐내고 혐오에 찬 눈길로 째려보며 경고장을 날렸다.“내 앞에서 이런 수작 그만 부려! 너 같은 여자 수없이 봐왔어. 할머니만 아니었다면 난 절대 너랑 결혼할 일 없다고!”한편 도아영은 증오에 찬 그의 눈빛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일부러 홀가분한 척하며 말했다.“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대표님, 이만 가보시죠.”위층에서 줄곧 엿듣던 유정연은 대화가 이렇게 흘러가자 당황하기 시작했다.이수호가 그들의 돈줄인데, 이경 그룹의 뒷받침이 없다면 도원 그룹은 이제 어떡하란 말인가?유정연은 부랴부랴 아래층
“그게 아니라요...”도아영이 어두운 얼굴로 설명하려던 그때 유정연이 다급하게 가로챘다.“수호야, 아영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마음이 변할 리가 있겠어? 무슨 오해가 있는 게 분명해.”“많이 좋아하긴 하나 봐요.”이수호는 비아냥거리면서 바닥에 널브러진 물건을 주웠다. 사진은 물론이고 이수호에 관한 물건이 가득했다.“우리 아영이도 널 진심으로 좋아하고 어르신도 아영이를 예뻐하는 걸 봐서 파혼은...”“아줌마, 파혼은 이미 결정된 일이에요. 대표님이랑 좋게 끝내기로 했고 대표님도 옛정을 생각해서 우리 도원 그룹을 더는 공격하지 않기로 했어요. 맞죠? 대표님?”도아영은 이수호에게 물러날 기회를 주었다. 이수호가 쿠션을 들고 물었다.“내가 언제 파혼하겠다고 했어?”“대표님...”“그리고 누가 너한테 파혼이 이미 결정된 일이라고 했어?”이수호가 차갑게 웃었다.“도아영, 자극 요법으로 나한테 파혼을 강요한 다음에 구연준이랑 만나려고? 꿈은 참 야무지게 꾼단 말이지.”“대표님, 아까 분명히...”“내가 널 좋아하진 않지만 약혼하지 않겠다고 한 적도 없어. 며칠 후에 기자회견을 열어서 파혼에 관한 걸 전부 해명할 거야.”“대표님...”“사모님, 나머지 준비할 건 사모님께 맡길게요.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 다신 보고 싶지 않습니다.”“걱정 마, 수호야. 파혼 얘기 다신 꺼내지 않게 할게.”도아영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전생에 내가 매달릴 때는 나랑 약혼하기 그렇게 싫어하더니 이번 생에는 왜 약혼하지 못해서 안달인 거지?’이수호가 떠난 후 유정연의 입이 귀에 걸렸다.“잘됐어. 너무 잘됐어. 이씨 일가 사모님 자리 드디어 지켰어.”도아영은 굳은 얼굴로 박스 앞으로 다가가 물건을 전부 정리한 다음 문밖에 던졌다. 그 모습에 유정연이 화들짝 놀랐다.“도아영, 또 왜 이래?”뒷마당에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 도아영이 박스 안의 물건을 다 태우는 것이었다.“도아영, 미쳤어?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수호가 따지지 않겠다고 했으면 고마운
이튿날, 도원 그룹 산하의 모든 기업이 작업을 중지했다. 도원 그룹의 주주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댔다. 작업을 중지했다는 건 도원 그룹의 자금에 큰 문제가 생겼다는 걸 뜻했다.만약 이대로 가만히 내버려 둔다면 계약을 위반하여 부도가 날지도 모른다.회의실 안, 사람들은 유정연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쨌거나 그동안 유정연이 회사를 경영했으니까.잠시 후 안용준과 유정연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은 두 사람을 보자마자 다급하게 말했다.“사모님, 프로젝트가 모두 멈췄는데 이제 어떡합니까?”“그러게 말이에요. 이대로 갔다간 회사가 부도나게 생겼어요.”조급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유정연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도아영이 장부를 조사할까 봐 겁이 나서 증거들을 없앴을 뿐인데 이튿날에 바로 회사에 일이 터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다 도아영 때문이야. 이수호를 건드린 바람에 도원 그룹의 자금에 문제가 생겼어. 이수호가 투자만 철회하지 않았어도 벼랑 끝으로 내몰리지 않았을 거라고.’그 생각에 유정연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겉으로는 미소를 유지하면서 사람들을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세요. 이 집안의 철이 없는 아가씨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거예요. 전에 이수호 대표를 건드린 바람에 이 대표가 투자를 철회했거든요. 지금 당장 아영이를 데리고 이 대표한테 가서 사과할게요. 이 대표가 다시 투자한다면 우리 프로젝트도 다시 정상적으로 가동할 수 있어요.”“아영 씨가 배운 것도 없고 재주도 없다고 했잖아요. 요 며칠 회사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은 것도 모자라 장부도 볼 줄 모르는 사람한테 어떻게 회사를 맡겨요? 회사를 이끌어갈 수 있는 분은 역시 사모님밖에 없어요.”“사모님, 최대한 빨리 아영 씨를 설득하세요. 이 대표님은 우리가 건드릴 수 있는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맞아요. 자금이 없으면 회사는 무조건 망해요.”...주주들의 원망이 끊이질 않았다. 유정연은 겉으로는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마음속으로는 뾰족한 수가 없어 불안하기만 했다
이수호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걔가 저지른 일이니까 알아서 수습해야지, 뭐. 도원 그룹이 없으면 걔는 아무것도 아니야.”그때 사무실 전화가 울렸다. 이수호가 전화를 받자 프런트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도씨 일가에서 어떤 여성분이 찾아왔는데 대표님을 만나겠답니다.”이수호는 도아영이 온 줄 알고 소파에 기대면서 코웃음을 쳤다.“올라오라고 해.”“네, 대표님.”프런트 직원이 전화를 끊었다.임규리는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 오늘 강이나와 비슷한 스타일의 흰 치마를 입었다. 대표이사실의 문을 연 그때 이수호는 고개를 숙인 채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이수호는 고개도 들지 않고 그녀를 비웃었다.“왜? 나한테 빌려고 왔어?”“대표님... 저예요, 임규리.”도아영의 목소리가 아닌 걸 알게 된 이수호가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임규리였다.임규리는 살짝 겁을 먹었는지 고개를 숙였다.“대표님, 저...”“여긴 어쩐 일로 왔어?”이수호의 말투가 차갑기 그지없었다. 임규리는 어젯밤과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 이수호를 보고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대표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려고 왔어요. 한성대에 들어갈 수 있게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임규리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러자 이수호가 슬슬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얘기 끝났어?”“네... 끝났어요.”임규리가 강이나와 같은 옷을 입은 걸 본 이수호의 눈빛이 더욱 싸늘해졌다.“끝났으면 그만 꺼져.”아무리 눈치가 없는 임규리라도 지금 이수호의 기분이 매우 좋지 않다는 건 알 수 있었다.옆에 있던 안지원이 말했다.“임규리 씨, 그만 나가주시죠.”임규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도아영의 얼굴이 강이나와 비슷한 덕에 이수호의 관심을 조금이나마 얻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도아영이 할 수 있는 건 나도 할 수 있어.’“대표님, 커피가 다 식은 것 같은데 제가 새로 한잔 내려드릴게요.”그러고는 책상 앞에 놓인 커피를 들고 이수호가 뭐라 얘기하기도 전에 밖으로
유정연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도씨 일가의 안주인 자리는 그리 쉬운 자리가 아니에요. 자금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면 하루빨리 도망치는 게 좋을 겁니다. 난 분명 귀띔해줬어요.”유정연은 이젠 억지로 웃지도 못했다.‘내가 도씨 일가에서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 겨우 남편이 죽을 때까지 버텼는데 이익은커녕 나더러 빚을 갚으라고? 절대 안 되지!’“아영아, 넌 사리에 밝은 애라서 절대 아줌마한테 빚을 갚으라고 하지 않을 거라는 거 알아. 아줌마가 이렇게 빌게. 수호한테 가서 잘못했다고 빌어. 수호가 용서해 준다면 우리 회사 문제도 쉽게 해결할 수 있어.”비굴하게 부탁하는 유정연의 모습에 도아영이 피식 웃었다.“아줌마, 내가 가서 사과할 수는 있어요.”“그럴 줄 알았어. 우리 아영이가 얼마나 철이 들었는데. 절대 회사를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지.”“말을 끝까지 들으셔야죠. 아직 조건을 얘기하지 않았어요.”유정연은 순간 멍해졌다.“조건? 조건이 있다고?”“그럼 제가 아무 조건 없이 부탁을 들어줄 줄 알았어요?”여유롭게 소파에 기대어 있는 도아영을 보고 있자니 유정연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화를 낼 수가 없었다.“아영아, 수호한테 고개를 숙이고 사과만 하면 되는데 이렇게까지 따져야겠어? 예전에는 이익을 따지는 사람이 아니었잖아.”“아빠는 저한테 여자는 온순하고 현명해야 한다는 것만 가르쳤어요. 이익을 따지는 건 다 아줌마한테서 배운 거예요.”도아영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천천히 말했다.“대표님을 찾아가서 설득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대표님이 도원 그룹을 공격하지 않을 거란 보장은 못 해요.”유정연이 입을 열기 전에 도아영이 계속하여 말했다.“그리고 제가 대표님을 찾아간다면 회사 일은 더는 아줌마와 아무런 연관이 없게 됩니다. 나중에 도원 그룹이 빚을 지든 발전하든 아줌마와 아무런 상관이 없을 거란 말이에요.”“너...”“동의하기 전에는 절대 안 가요.”도아영은 거의 자포자기했다.“대표님이 도원 그룹을 무너뜨리게
도아영의 환한 웃음을 본 유정연은 소름이 다 끼쳤다.한 시간 후, 도아영은 깔끔한 청바지에 흰색 민소매를 입었고 그 위에 청재킷을 매치했다.이경 그룹 문밖에 있던 직원들은 도아영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도아영은 선글라스를 낀 채 프런트로 다가갔다.“이 대표님 만나러 왔어요.”프런트 직원은 예쁜 얼굴에 몸매도 예술인 그녀를 보고는 말했다.“죄송한데 혹시 예약하셨나요?”프런트 직원이 알아보지 못하자 도아영은 선글라스를 벗었다.“도아영입니다.”그러자 프런트 직원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도... 도아영 씨?”“올라가도 될까요?”“그... 그럼요.”프런트 직원은 도아영이 올라갈 수 있게 엘리베이터를 눌러주었다.“봤어요? 아까 그 여자 도아영 씨였어요.”“아영 씨 웬일로 옷을 저렇게 입었대요?”“너무 예뻐요. 전에는 저렇게 예쁜 줄 몰랐었는데.”“이유를 꼭 말해야 알아요? 당연히 대표님께 잘 보이려고 그런 거죠. 도아영 씨가 평소에 강이나 씨의 스타일을 따라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이번에도 또 따라 한 게 분명해요.”...이경 그룹 대표이사실.임규리는 이수호에게 커피도 가져다주고 서류도 옮겨주었다. 안지원은 원망 한마디 없이 바삐 움직이는 임규리를 보면서 존경심이 다 들 정도였다.이 정도까지 할 수 있었던 사람은 도아영 말고 그녀가 두 번째였다.“도아영 씨, 대표님 사무실 바로 앞에 있어요. 따라오세요.”“네.”도아영의 시선이 이수호의 사무실로 향했다. 반투명 유리문이라 사무실 안의 상황이 정확히 보였다.임규리가 조심스럽게 이수호의 책상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두 눈에 그에 대한 사랑이 가득 담겨있었다.너무도 익숙한 장면에 예전의 자신이 떠올랐다. 도아영의 눈빛이 순식간에 서늘해졌다.슬슬 짜증이 난 이수호가 임규리를 내보내려던 그때 사무실 밖에 서 있는 도아영을 발견했다.전과 확연히 다른 도아영의 옷차림에 이수호는 잠깐 넋을 놓았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코웃음을 쳤다.이수호는 임규리의 아래턱을
“언... 언니.”임규리는 도아영을 보자마자 겁에 질려 벌떡 일어났다. 뒤로 물러나려던 그때 이수호가 손목을 덥석 잡더니 느긋하게 말했다.“아직 채 닦지도 못했는데 왜 도망가?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계속 무릎 꿇고 닦아.”“네... 대표님.”임규리는 다시 무릎을 꿇고 이수호의 신발을 닦아주었다. 이수호는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도아영에게 말했다.“도아영, 어떤 일은 네가 아니어도 충분히 대신할 사람이 있어. 게다가 너보다 더 잘해.”“대표님, 이런 꼴 보려고 여기 온 게 아닙니다.”도아영이 싸늘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수호는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이나한테 무릎 꿇고 사과만 하면 전에 있었던 일은 없던 거로 해주고 이틀 뒤 약혼식도 원래대로 진행할 거야. 그리고 도원 그룹에 거액의 투자도 할게.”그녀가 아무 말이 없자 이수호가 피식 웃었다.“무릎 꿇고 사과만 하면 되는데 그렇게 어려워? 전에는 잘만 꿇더니 왜? 이젠 못하겠어?”이수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도아영의 옆으로 다가갔다.“비위를 맞추겠으면 제대로 맞춰야지. 전에는 말 잘 들었잖아.”이수호가 점점 다가오자 도아영은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아 뒷걸음질 치며 거리를 멀리했다. 그러다가 손님들이 앉는 소파에 앉아 말했다.“대표님, 오늘 아줌마가 부탁하지 않았더라면 여기 오지도 않았어요.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거예요. 대표님이 투자를 철회하든 일부러 도원 그룹을 무너뜨리든 나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리고 강이나 씨한테 사과하라고 한 건...”도아영은 고개를 들고 이수호를 올려다보면서 웃었다.“내가 강이나 씨 목에 칼을 대고 손목을 그으라고 협박한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사과해야 하는데요?”그녀의 말에 이수호의 얼굴에 나타났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도아영의 개의치 않는 듯한 태도를 보고 있자니 이수호는 가슴속에 분노가 끓어올라 답답하기만 했다. 그가 냉랭하게 말했다.“도아영, 말하기 전에 생각 좀 해.”“제대로 생각하고 말하는 거예요. 사과는 절대 불가능합니다.”도아영
도아영의 말을 듣던 이수호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가 나간 후 임규리는 대놓고 도아영을 비난했다.“언니는 참 은혜도 모른단 말이죠. 제가 언니 대신 사과할게요...”“꺼져!”이수호의 갑작스러운 호통에 임규리는 겁에 질려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더 있었다간 이수호의 심기만 건드릴 것 같아 울면서 뛰쳐나갔다.사무실 밖에 있던 안지원이 들어와 굳은 얼굴로 말했다.“대표님, 도아영 씨 그냥 갔어요.”이수호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여 안지원도 더는 뭐라 하지 못했다. 사무실에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르고 나서야 이수호가 말했다.“내가 예전에 도아영을 많이 못살게 굴었어?”“사실을 듣고 싶으세요?”이수호의 날카로운 눈빛에 안지원은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누가 그렇게 하라고 했어? 자기가 기꺼이 원해서 하고서는.”“네... 대표님 말씀이 다 옳아요.”“자발적으로 그런 거면서 이제 와서 뭐가 억울하다고 저래?”“그러게요... 다 도아영 씨가 원해서 한 건데.”안지원이 맞장구를 치자 이수호도 그제야 기분이 조금 나아진 듯했다.그때 심정우가 사무실로 들어오더니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방금 누굴 봤는지 알아? 피부도 하얗고 몸매도 죽여주는 선글라스 여인을 봤어.”심정우는 이수호에게 다가가 툭 쳤다.“이수호, 난 널 친구라고 생각하는데 어쩜 회사에 이렇게 예쁜 여자를 두고도 나한테 얘기하지 않을 수가 있어?”이수호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옆에 있던 안지원이 가볍게 기침하며 귀띔했다.“도련님, 그분... 도아영 씨예요.”“뭐? 도아영?”심정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였다.‘엄청 얌전하고 조신하던 여자 아니었어? 저런 섹시한 옷을 입은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기분이 좋지 않았던 이수호가 얼굴을 찌푸리고 물었다.“여긴 왜 왔어?”심정우가 의아해하며 말했다.“왜 왔냐고? 오늘 강이나 생일인 거 잊었어? 나인 클럽에서 생일 축하해주겠다고 했잖아.”
모두가 구연준이 강이나의 유학 문제로 찾아왔을 거라 여길 때 이 남자는 매우 차분하게 조나린을 가리켰다.“조나린.”불현듯 지명을 당한 조나린은 온몸이 돌처럼 굳어버렸다.“네...”그녀는 초조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연준이 왜 찾아왔는지 몰라서 어리둥절할 때 문밖의 경호원이 긴급하게 프린트한 통지서를 그에게 건넸다.구연준은 통지서를 확인하지도 않고 아예 조나린에게 내던졌다.“넌 오늘부로 퇴학이야.”통지서가 조나린의 발끝에 떨어졌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말도 안 돼!”허겁지겁 통지서를 주워서 봉투를 열어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퇴학 조치 서류였다.퇴학이란 두 글자를 본 조나린은 온몸이 경직되었다.‘이럴 수가? 내가 왜? 대체 왜?’그녀는 옆에 있는 강이나에게 시선을 돌렸다.한편 강이나도 안색이 어두웠다.두 여자가 절친 사이란 걸 모르는 이는 없다. 구연준이 직접 이곳까지 찾아와서 모든 학생들 앞에서 퇴학 통지서를 내던졌다는 건 대놓고 조나린의 뺨을 때리는 거나 다름없었다.“대표님, 오해예요. 다 오해라고요!”조나린이 횡설수설하면서 해명하려 했지만 딱히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이에 구연준이 차분한 얼굴로 되물었다.“오해? 도서관에서 폭력을 행사한 영상이 모조리 녹화됐어. 병원에서 부상 진단서까지 받았는데 오해라고? 이번 사건은 범법 행위에 속하니 넌 고의상해죄 및 학교 폭력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아야 할 거야. 다른 학생들도 잘 들어. 이제 모두가 성인이라 법적 상식을 갖고 본인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해!”뭇사람들은 감히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어느새 경찰이 안으로 들어왔다.“조나린 씨 맞죠? 저희와 함께 서에 가시죠.”경찰 한 명이 입을 열자 조나린은 사색이 되었다.졸업을 코앞에 두고 퇴학이라니, 게다가 경찰서까지 잡혀갈 신세가 되었다.그녀는 강이나에게 거의 애원하듯 소리쳤다.“이나야, 강이나! 살려줘! 나 좀 구해달란 말이야.”다만 강이나도 감히 꿈쩍하지 못했다.구연준에게 겁먹은 것도 있고
“사태가 워낙 심각하다 보니 무조건 퇴학 조처를 해야 합니다!”“저도 같은 의견입니다!”...회의실에서 선생님들이 하나둘씩 손을 들었다.그 시각 학교 통보를 기다리는 조나린은 너무 긴장해서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조나린은 교실 안에서 강이나의 팔을 꼭 잡고 있었다.“이나야, 나 퇴학당하는 거 아니겠지? 뭐라고 말 좀 해봐.”유하영은 바짝 긴장한 그녀를 보더니 얼른 다가가서 위로했다.“괜찮아, 나린아. 부주의로 손을 밟은 것뿐인데 어떻게 퇴학까지 가겠어? 게다가 이나도 이미 이 대표님께 말했을 거야. 이번 일은 꼭 잘 해결될 테니까 너무 걱정 마.”말을 마친 그녀는 줄곧 함구하는 강이나를 바라봤다.“이나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강이나는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녀는 조나린을 위해 사정한 적이 없는데 이 사실을 아직 유하영과 조나린에게 알리지 못했다.어제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이수호에게 의심을 받았던 터라 본인 문제도 해결 못 한 마당에 조나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있었을까?하지만 이건 단지 도아영의 손등을 밟은 간단한 문제이니 너무 심각한 조처는 없을 것 같았다. 강이나는 결국 모든 공로를 본인에게 돌렸다.“그래, 맞아. 어제 수호 씨한테 다 얘기했으니 너도 아무 일 없을 거야. 걱정 마, 나린아.”조나린은 그제야 불안했던 마음이 진정됐다.‘하긴, 도아영이 대체 뭐라고? 이수호랑 파혼까지 한 마당에 뭐가 그렇게 대단해?’그도 그럴 것이 한성대는 실력과 배경이 없으면 괴롭힘을 당하는 수밖에 없다.손등만 밟았을 뿐이니 딱히 문제 될 건 없었다.‘도아영, 넌 이제 뒤 봐주는 사람이 없어. 학교에서도 이번 사건을 그냥 스쳐 지날 거야.’조나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강이나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으니 딱히 걱정될 건 없었다. 강이나만 나서면 그녀는 무조건 무사할 테니까.이제 한시름 놨다고 생각할 때 교실 밖에서 웅장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구연준이 어느새 정장으로 갈아입고 금테안경까지 착용하니 고귀한 분위기가 저절로 흘러
그녀의 말을 들은 이수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뭐라고?”“대표님, 나 같은 여자애가 투자에 대해 뭘 알겠어요. 게다가 그 땅은 내가 사려던 게 아니라 연준 씨가 사겠다고 해서 낙찰받은 거예요. 대표님도 잘 알다시피 내가 그때 도씨 일가의 실권도 장악하지 못했는데 어디서 천억을 구하겠어요? 그 땅이 정 그렇게 욕심난다면 구 대표님을 찾아가 보세요. 팔지 말지는 구 대표님께 걸렸거든요.”도아영은 해맑은 표정으로 말했지만 이수호는 그녀의 말투에서 선의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지금 장난해? 그 땅은 분명 네가 원해서 산 거잖아. 이렇게 쉽게 줘버렸다고?”“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그 당시 연준 씨가 돈을 대줬고 이제 와서 거둬가겠다고 하니 제가 무슨 권력이 있겠어요? 당연히 연준 씨한테 돌려줘야죠.”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솔직히 저도 후회해요. 이 땅이 이렇게까지 값질 줄 알았다면 애초에 눈 딱 감고 사버리는 건데! 괜히 좋다 말았네요.”“너...”이수호는 그녀를 뭐라고 평가해야 할지 몰랐다.하늘에서 떨어진 횡재를 이토록 홀가분하게 구연준에게 넘겨주다니.구씨 일가와 이씨 일가가 줄곧 앙숙이라는 걸 모르는 자가 있을까?이 땅을 구연준에게 줬다는 건 이경 그룹 하반기 온천리조트 계획이 백 퍼센트 망한다는 것을 뜻한다.이수호가 떠나가려 하자 그녀는 일부러 목을 내빼면서 말했다.“벌써 가게요? 좀 더 있으시지.”쾅 하는 소리와 함께 이수호가 침실을 나섰다.그가 떠난 후 도아영도 가면을 벗고 편하게 쉬었다.이수호는 그녀가 아빠가 주신 혼수를 전부 끌어모아 남원 교외의 땅을 산 걸 전혀 모르고 있다. 그것참, 모르길 천만다행이지, 알았더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원 그룹을 압박하여 그녀의 손에서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이 땅을 뺏어갔을 것이다.‘연준 씨, 미안하게 됐네요. 또 연준 씨를 내세우고 말았어요.’그 시각, 한성대 캠퍼스.“에취!”구연준은 난생처음 학교에서 이미지도 신경 쓰지 못하고 재채기를 해댔다.학생들이 전부 쳐다보자
‘이 인간도 알고 있었네!’도아영은 무고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지금 대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 정부의 결책을 내가 무슨 수로 알아요? 미리 알다니, 말도 안 돼!”“그래? 그럼 이건 뭔데?”이수호는 또다시 신문 기사를 그녀에게 내던졌다.“남원 교외에서 샘물을 파냈다고 하는데 이것도 모른다고 할 거야?”“정말요?”그녀는 일부러 놀란 척했다.“에이, 설마. 나 그냥 대충 한번 땅을 낙찰받은 건데 그럼 이제 부자 되는 거예요?”“도아영!”이수호의 안색이 점점 일그러졌다.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침대에 잠자코 누워있었다.이에 이수호가 마침내 목소리를 내리깔고 그 말을 입밖에 내뱉었다.“이 땅은 우리 이경 그룹에서 가져갈 거야. 추후에 계약서 보낼 테니 넌 사인만 하면 돼.”“죄송하지만 나 아직 허락한다고 안 했는데요?”그녀가 주제도 모르고 날뛰자 이수호는 단호하게 말했다.“우리 회사에서 하반기에 온천리조트를 개발할 계획이란 걸 너도 다 알고 있잖아!”“이경 그룹 향후 계획을 내가 어떻게 알아요?”도아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지금 이 땅이 곧 개발된다고 하니까 나한테서 뺏는 거예요?”“뺏는다고 안 했어. 마땅한 금액으로 보상해줄 거야.”이수호가 차갑게 말했다.“이 프로젝트는 규모가 너무 커서 네가 조종할만한 사이즈가 아니야. 지금 바로 돈도 챙기고 좋잖아?”그의 말을 들은 도아영은 하마터면 실소를 터트릴 뻔했다.이 남자는 늘 이렇게 거만했다.다만 그가 이토록 이 땅에 집착하는 걸 보아 도아영도 한 번쯤 떠보고 싶었다.“그럼 얼마 줄 수 있는데요?”“열 배로 쳐줄게.”이수호가 답했다.“애초에 네가 천억으로 샀으니 열 배로 갚을게. 그 땅 이경 그룹에 넘겨.”그녀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장사꾼은 역시 장사꾼이라니까.’이 땅은 정부의 보상과 지지를 받고 있고 또한 정부에서 지지하는 중점 개발 구역으로 확정되었으며 거기에 샘물까지 파냈으니 미래 가치는 가늠할 수가 없다.1조 원이 아니라 지금
다음날 이수호는 가정부와 기사를 시켜서 도아영을 집으로 보낸 후 회의하러 회사에 나갔다.그는 회의내용 따위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어젯밤에 그녀가 병상에 누워서 한바탕 욕설을 퍼붓던 장면밖에 떠오르지 않았으니까.도아영이 일부러 그랬다는 걸 생각만 해도 웃겼다. 그는 저도 몰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이 광경을 본 회의실의 뭇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대표님이 왜 이러시지?’“에헴!”옆에 있던 안지원이 마른기침을 하면서 이수호에게 눈치를 줬다.그제야 이수호도 다들 자신을 쳐다보는 걸 알아챘다.그는 곧장 웃음기를 거두고 싸늘하게 말했다.“그럼 이 방안대로 해요.”“대표님,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어요.”이때 매니저 한 명이 입을 열었다.“남원 교외의 땅을 며칠째 파고 있는데 어제 그 땅에서 샘물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하반기 온천리조트 사업과 충돌하니 이 땅을 빨리 사들여야 합니다. 남원 교외가 우리 회사의 미래 산업에 방해가 돼서는 안되잖아요. 또한 우리도 그 땅을 이용해서 온천리조트 계획을 확장할 수 있고요.”이수호는 처음에 그다지 새겨듣지 않았는데 남원 교외라는 네 글자가 어딘가 익숙했다.“대표님, 남원 교외는 도아영 씨가...”안지원이 가장 먼저 눈치채고 그에게 말했다.도아영을 언급하는 순간 이수호는 경매장에서 그녀가 천억을 주고 남원 교외의 땅을 낙찰받은 일이 떠올랐다.그의 안색이 확 어두워지자 뭇사람들은 어쩔 바를 몰랐다.“회의 끝!”이수호가 이를 악물고 회의를 마무리하자 안지원이 재빨리 서류를 정리하고 그를 따라나섰다.회의실에 남은 임원들은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봤다.‘대표님이 요즘 왜 이러실까?’그가 워낙 빨리 걷다 보니 안지원은 겨우 따라잡았다.차에 탄 이수호는 어두운 표정으로 쏘아붙였다.“남원 교외의 땅에 관한 모든 정보를 낱낱이 조사해봐.”“네, 대표님.”안지원은 운전하면서 매니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이경 그룹은 순식간에 발칵 뒤집혔다. 모두가 남원 교외의 땅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
‘내가 만약 아영이랑 결혼한다면 몇십 년 후에도 과연 이런 모습일까?’이때 포장을 마친 사장님이 그에게 봉투를 건네면서 활짝 웃었다.“여자친구분 쾌유를 바랄게요.”이수호도 흐뭇하게 웃으며 돈을 꺼냈다.백만 원짜리 수표를 본 순간 사장 부부는 입이 쩍 벌어졌다. 이수호를 쫓아서 밖에 나왔을 때 그는 이미 택시를 타고 가버렸다.병원 병실.도아영은 어느새 죽을 한 그릇 다 비웠다.방에 들어온 이수호는 불을 켜고 텅 빈 죽그릇을 치우고는 찐빵을 선반에 내려놓았다.한가득 포장해온 찐빵을 보더니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뭐가 이렇게 많아요?”“네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몰라서 종류별로 두 개씩 샀어.”이수호는 그녀 대신 재빨리 어수선해진 선반을 치웠다.이때 그녀가 말했다.“너무 늦게 돌아왔잖아요. 나 이미 배부르게 먹었어요.”“그래?”이수호는 별 반응이 없었다.“화 안 나요?”“나 놀리는 거 알아. 네가 지금 환자니까 그냥 참는 거야.”그는 소파에 앉아서 담담하게 말했다.“먹고 싶으면 먹고 못 먹겠으면 다 버려.”“...”너무나도 차분한 이 남자의 모습에 도아영은 포장을 뜯고 찐빵을 한입 물었다.이수호는 침대에 누워서 찐빵을 먹는 그녀에게 물었다.“마지막으로 그 찐빵 가게에 간 게 언제야?”도아영은 잠시 동작을 멈추고 차갑게 답했다.“기억 안 나요.”“너희 아빠가 입원했을 때 맞지?”순간 그녀의 안색이 확 차가워졌다.“그게 대표님이랑 무슨 상관이죠? 우린 이미 파혼했으니 더는 사적인 일에 대해 묻지 말아 주세요.”입맛이 떨어진 그녀는 찐빵을 내려놨다.문득 아빠가 입원했을 때 그녀 홀로 바삐 돌아쳤던 기억이 났다.유정연도 오긴 했지만 아빠가 하루빨리 죽어서 도지호에게 유산을 물려주기만을 바랐다.전에 도씨 일가와 거래했거나 협력했던 대표들도 하나같이 나쁜 심보를 품고 있었다.도아영은 마치 언제든 잡아먹히게 될 토끼처럼 무기력하게 이 모든 걸 마주해야만 했다.그리고 그때 남현숙은 그녀를 손주며느리로 찜했었다.이수호는
야채죽과 삶은 계란, 그리고 밑반찬들까지 전부 담백한 음식인지라 식욕이 당기지 않았다.“음식이 별로네요.”도아영이 힐긋 내려다보며 말했다.“그럼 뭐 먹고 싶은데?”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줄줄이 설명했다.“이 병원 나가서 좌회전하고 백 미터 걸어가면 찐빵 가게가 하나 있는데 24시 가게거든요. 나 거기 찐빵 엄청 좋아해요. 대신 가서 사주실래요?”이수호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알았어.”그는 곧장 병실을 나섰다.이수호가 떠난 후 도아영은 야채죽을 맛있게 먹었다.‘꽤 맛있네!’병원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심야인지라 주위가 어두컴컴하고 가로등 불빛만 어렴풋이 비쳤다.그는 도아영의 말대로 병원에서 좌회전해서 백 미터를 걸어갔지만 아무것도 안 보였다.이수호는 마침내 도아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녀가 곧장 전화를 받자 이 남자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찐빵 가게가 대체 어디 있는데?”도아영은 일부러 난감한 척하며 되물었다.“실은 나도 이제 기억이 잘 안 나요. 그냥 휴대폰으로 한번 위치 찾아보시겠어요?”말을 마친 후 그녀는 전화를 꺼버렸다.‘자식, 너 이번엔 제대로 걸려들었어!’이수호는 차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휴대폰을 꺼내 검색해보았지만 근처 1킬로미터 이내에 찐빵 가게라곤 없었다.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가장 가까운 찐빵 가게로 가려고 해도 택시를 타야만 한다.심야 시간대라 택시를 잡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결국 길거리까지 나가서 힘들게 택시를 잡았다.찐방 가게까지 도착하니 20분이나 소요됐다.한편 가게로 들어갔더니 찐빵 소가 무려 일여덟 가지나 되었다. 이수호는 그녀가 어떤 맛을 좋아하는지 전혀 몰랐다.“손님, 뭐로 해드릴까요?”이때 사장님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새벽이라 가게에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이수호는 또다시 그녀에게 전화해서 어떤 맛으로 사 올지 물어보려고 했지만 쉬는 데 방해가 될까 봐 휴대폰을 넣어두었다.“종류마다 두 개씩 포장해주세요.”사장은 의아한 눈길로 그를 쳐다봤다.오밤중에 무슨
이수호는 본인 잘못인 걸 알기에 딱히 반박할 자격이 없었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욕도 시원하게 했겠다. 무슨 보상을 원하는데? 그냥 얘기해.”“역시 통쾌하네요.”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앞으로 우리 집안을 겨냥하지도 말고 나도 더는 건드리지 말아요. 우리 이미 파혼했으니 각자 갈 길 가요. 내가 다친 건 다 대표님 때문이니 치료비는 전적으로 책임지세요.”“그게 다야?”“네.”도아영이 그를 지그시 바라봤다.“뭐 대표님께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일종의 경제적인 보상을 하고 싶다면 저도 마다하진 않을게요. 이런 건 이별 비용이라고 하죠 뭐.”이별 비용이란 단어를 듣는 순간 이수호의 얼굴이 한없이 차가워졌다.그는 왠지 모르게 이 단어가 너무 거슬렸다.“왜요? 돈 아까워요?”“줄게.”이수호가 곧장 대답했다.그녀도 너무 놀란 눈치는 아니었다.이수호에게 차고 넘치는 게 돈이니까 이별 비용으로 몇십억 정도 주는 건 손해라고 할 것도 없었다.“나 때문에 이렇게 됐으니 치료받는 동안 전적으로 책임질게.”“오케이.”도아영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양심은 있네, 그래도.’“내일 안 비서 시켜서 퇴원 수속 할 테니 당분간 우리 집에서 병 치료하는 줄 알아.”순간 그녀의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내가 왜요? 왜 그리로 들어가야 하는 건데요?”“이미 함 원장한테 말해서 해외 최고의 의료진을 모셔오기로 했어. 너 그 손 치료하지 못하면 평생 오른손을 못 쓸 거래. 그러니까 내 말 들어.”“대표님...”“이것도 다 널 끝까지 책임지는 거잖아. 5개월 후에 손이 다 낫거든 무조건 보내줄게. 만약 그때까지도 회복하지 못하면 대신 보상금 줄게. 금액은 네가 정해.”여기까지 들은 도아영은 그제야 마음이 진정됐다. 그녀는 반신반의하며 되물었다.“금액을 내가 정하라고요?”“응.”“얼마든지 다 오케이?”은근슬쩍 신난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이수호는 덜컥 겁이 났다. 보상금이랍시고 한도 제한이 없다면 이 여자는 이
같은 시각 안지원은 다음날 회의에 필요한 자료를 이수호에게 전송했다.이수호가 힘겹게 휴대폰을 꺼내 들고 내일 회의자료를 훑고 있는데 도아영이 갑자기 악몽을 꿨는지 울면서 소리쳤다.“때리지 마. 날 때리지 말라고!”이수호는 곧장 침대 옆으로 다가가 어떻게 위로할지 몰라서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괜찮아, 내가 옆에 있으니까 아무도 너 못 건드려.”그제야 도아영은 조금 진정된 모습이었다.이수호는 안쓰러운 눈길로 그런 그녀를 쳐다봤다.이토록 가녀린 여자애가 오늘 같은 끔찍한 일을 겪었으니 충격이 얼마나 컸을까?그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려고 할 때 도아영이 갑자기 두 팔을 번쩍 들었다.이를 본 이수호도 화들짝 놀랐다.이어서 도아영은 매우 또박또박하게 쏘아붙였다.“X발, 감히 날 때려? 넌 오늘 뒈졌어!”“...”“이수호 이 개자식!”“...”“널 목 졸라 죽일 거야!”“...”“죽어, 이수호!”“...”이수호는 휴대폰으로 내일 회의자료를 확인하려다가 어느덧 저도 몰래 네이버 검색창에 전신마취가 덜 풀렸을 때 왜 잠꼬대를 하는지에 대해 검색하고 있었다.한편 도아영의 욕설은 점점 더 험악해졌다.이수호는 회의자료를 볼 기분이 아닌지라 모두 내려놓았다.‘얘 분명 의도적이야. 틀림없어.’야간 당직을 서는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좀전의 일로 이수호에게 사과하려고 들어왔는데 이 남자가 눈길 한번 안 주고 차갑게 쏘아붙였다.“나가.”“대표님, 이건 방금 안 비서가 보내온 음식입니다.”간호사는 음식을 이수호의 옆에 있는 책상에 올려놓았다.“얘 아까까지 계속 잠꼬대했는데 전신마취 때문이야?”간호사는 당황해서 어쩔 바를 몰랐다.“전신마취요?”“왜? 아니야?”“이 환자분은 큰 수술이 아니어서 부분 마취만 했는데요?”“...”이수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그는 침대에 누운 도아영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이때 도아영이 기지개를 켜고 비스듬히 눈을 떴다.“어머?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