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아영의 환한 웃음을 본 유정연은 소름이 다 끼쳤다.한 시간 후, 도아영은 깔끔한 청바지에 흰색 민소매를 입었고 그 위에 청재킷을 매치했다.이경 그룹 문밖에 있던 직원들은 도아영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도아영은 선글라스를 낀 채 프런트로 다가갔다.“이 대표님 만나러 왔어요.”프런트 직원은 예쁜 얼굴에 몸매도 예술인 그녀를 보고는 말했다.“죄송한데 혹시 예약하셨나요?”프런트 직원이 알아보지 못하자 도아영은 선글라스를 벗었다.“도아영입니다.”그러자 프런트 직원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도... 도아영 씨?”“올라가도 될까요?”“그... 그럼요.”프런트 직원은 도아영이 올라갈 수 있게 엘리베이터를 눌러주었다.“봤어요? 아까 그 여자 도아영 씨였어요.”“아영 씨 웬일로 옷을 저렇게 입었대요?”“너무 예뻐요. 전에는 저렇게 예쁜 줄 몰랐었는데.”“이유를 꼭 말해야 알아요? 당연히 대표님께 잘 보이려고 그런 거죠. 도아영 씨가 평소에 강이나 씨의 스타일을 따라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이번에도 또 따라 한 게 분명해요.”...이경 그룹 대표이사실.임규리는 이수호에게 커피도 가져다주고 서류도 옮겨주었다. 안지원은 원망 한마디 없이 바삐 움직이는 임규리를 보면서 존경심이 다 들 정도였다.이 정도까지 할 수 있었던 사람은 도아영 말고 그녀가 두 번째였다.“도아영 씨, 대표님 사무실 바로 앞에 있어요. 따라오세요.”“네.”도아영의 시선이 이수호의 사무실로 향했다. 반투명 유리문이라 사무실 안의 상황이 정확히 보였다.임규리가 조심스럽게 이수호의 책상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두 눈에 그에 대한 사랑이 가득 담겨있었다.너무도 익숙한 장면에 예전의 자신이 떠올랐다. 도아영의 눈빛이 순식간에 서늘해졌다.슬슬 짜증이 난 이수호가 임규리를 내보내려던 그때 사무실 밖에 서 있는 도아영을 발견했다.전과 확연히 다른 도아영의 옷차림에 이수호는 잠깐 넋을 놓았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코웃음을 쳤다.이수호는 임규리의 아래턱을
“언... 언니.”임규리는 도아영을 보자마자 겁에 질려 벌떡 일어났다. 뒤로 물러나려던 그때 이수호가 손목을 덥석 잡더니 느긋하게 말했다.“아직 채 닦지도 못했는데 왜 도망가?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계속 무릎 꿇고 닦아.”“네... 대표님.”임규리는 다시 무릎을 꿇고 이수호의 신발을 닦아주었다. 이수호는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도아영에게 말했다.“도아영, 어떤 일은 네가 아니어도 충분히 대신할 사람이 있어. 게다가 너보다 더 잘해.”“대표님, 이런 꼴 보려고 여기 온 게 아닙니다.”도아영이 싸늘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수호는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이나한테 무릎 꿇고 사과만 하면 전에 있었던 일은 없던 거로 해주고 이틀 뒤 약혼식도 원래대로 진행할 거야. 그리고 도원 그룹에 거액의 투자도 할게.”그녀가 아무 말이 없자 이수호가 피식 웃었다.“무릎 꿇고 사과만 하면 되는데 그렇게 어려워? 전에는 잘만 꿇더니 왜? 이젠 못하겠어?”이수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도아영의 옆으로 다가갔다.“비위를 맞추겠으면 제대로 맞춰야지. 전에는 말 잘 들었잖아.”이수호가 점점 다가오자 도아영은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아 뒷걸음질 치며 거리를 멀리했다. 그러다가 손님들이 앉는 소파에 앉아 말했다.“대표님, 오늘 아줌마가 부탁하지 않았더라면 여기 오지도 않았어요.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거예요. 대표님이 투자를 철회하든 일부러 도원 그룹을 무너뜨리든 나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리고 강이나 씨한테 사과하라고 한 건...”도아영은 고개를 들고 이수호를 올려다보면서 웃었다.“내가 강이나 씨 목에 칼을 대고 손목을 그으라고 협박한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사과해야 하는데요?”그녀의 말에 이수호의 얼굴에 나타났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도아영의 개의치 않는 듯한 태도를 보고 있자니 이수호는 가슴속에 분노가 끓어올라 답답하기만 했다. 그가 냉랭하게 말했다.“도아영, 말하기 전에 생각 좀 해.”“제대로 생각하고 말하는 거예요. 사과는 절대 불가능합니다.”도아영
도아영의 말을 듣던 이수호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가 나간 후 임규리는 대놓고 도아영을 비난했다.“언니는 참 은혜도 모른단 말이죠. 제가 언니 대신 사과할게요...”“꺼져!”이수호의 갑작스러운 호통에 임규리는 겁에 질려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더 있었다간 이수호의 심기만 건드릴 것 같아 울면서 뛰쳐나갔다.사무실 밖에 있던 안지원이 들어와 굳은 얼굴로 말했다.“대표님, 도아영 씨 그냥 갔어요.”이수호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여 안지원도 더는 뭐라 하지 못했다. 사무실에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르고 나서야 이수호가 말했다.“내가 예전에 도아영을 많이 못살게 굴었어?”“사실을 듣고 싶으세요?”이수호의 날카로운 눈빛에 안지원은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누가 그렇게 하라고 했어? 자기가 기꺼이 원해서 하고서는.”“네... 대표님 말씀이 다 옳아요.”“자발적으로 그런 거면서 이제 와서 뭐가 억울하다고 저래?”“그러게요... 다 도아영 씨가 원해서 한 건데.”안지원이 맞장구를 치자 이수호도 그제야 기분이 조금 나아진 듯했다.그때 심정우가 사무실로 들어오더니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방금 누굴 봤는지 알아? 피부도 하얗고 몸매도 죽여주는 선글라스 여인을 봤어.”심정우는 이수호에게 다가가 툭 쳤다.“이수호, 난 널 친구라고 생각하는데 어쩜 회사에 이렇게 예쁜 여자를 두고도 나한테 얘기하지 않을 수가 있어?”이수호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옆에 있던 안지원이 가볍게 기침하며 귀띔했다.“도련님, 그분... 도아영 씨예요.”“뭐? 도아영?”심정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였다.‘엄청 얌전하고 조신하던 여자 아니었어? 저런 섹시한 옷을 입은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기분이 좋지 않았던 이수호가 얼굴을 찌푸리고 물었다.“여긴 왜 왔어?”심정우가 의아해하며 말했다.“왜 왔냐고? 오늘 강이나 생일인 거 잊었어? 나인 클럽에서 생일 축하해주겠다고 했잖아.”
“왜? 도아영한테 관심 있어?”이수호의 질문에 심정우는 다급하게 선을 그었다.“내가 어찌 감히 다른 마음을 품겠어? 도아영 씨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난 자격이 없지. 근데 아영 씨가 요즘 네 라이벌인 구연준이랑 가깝게 지낸다는 소문이 있어. 지난번 경매가 끝난 뒤로 두 사람이 맨날 만난대. 그것도 남들 몰래!”그의 말을 듣던 이수호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코웃음을 쳤다.‘어쩐지 내 앞에서 건방을 떨더라니. 구연준한테 붙은 거였구나. 그러면서 어젯밤에 뻔뻔스럽게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한 거야? 내가 바보인 줄 아나.’“그리고 허재환이라는 애 알지? 걔도 아영 씨를 눈여겨본 지 엄청 오래됐어. 오늘 강이나 생일이라는 소리를 듣고 오겠다고 하더라고. 나더러 너한테 진짜 아영 씨랑 끝낼 생각인지 물어봐달라고 했어. 만약 진짜 끝내면 자기가 대시하겠다고.”심정우는 마른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계속하여 말했다.“내가 끼어들 일이 아닌 건 아는데 너도 알잖아. 허재환 걔 정말 인간쓰레기라는 거. 아영 씨가 강이나 씨를 따라 하긴 했지만 그래도 너한테는 진심이었잖아. 너...”“대시하고 싶으면 하라고 해. 나한테 물어볼 필요 없어.”이수호는 도아영이 무슨 일을 당하든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냉랭하게 말했다.해 질 무렵 나인 클럽.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나인 클럽 문 앞에 멈춰 섰다. 행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마이바흐로 향했다.그 바닥 사람들은 이 마이바흐가 전 세계 한 대뿐이고 이수호의 것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지금까지 이 차에 앉아본 사람은 이수호 말고 강이나밖에 없었다.강이나가 차에서 내리자 안지원은 그녀를 나인 클럽의 룸까지 안내했다. 룸 안에 재벌 집 자제들이 이미 모여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이나가 룸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선물이 끊이질 않았다.“강이나 씨, 전부 수호가 준비한 건데 어때요? 많이 놀랐죠?”강이나는 쑥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파에 앉아 있는 이수호를 쳐다보았다.“고마워요, 수호 씨.”“와서 앉아.”그
주민서의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어두웠다.부모님이 생일 파티에 참석하라고 강요하지만 않았어도 절대 오지 않았을 것이다. 꼴불견인 사람들끼리 모여서 하는 역겨운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주민서, 네가 도아영의 절친이라는 거 여기 모르는 사람이 없어. 너무 편들지도 마. 아니면 도아영한테 전화해서 오라고 할래? 오늘 강이나 씨 생일이고 이 대표님과 강이나 씨가 곧 키스한다고 해. 그럼 바로 달려올걸?”주변이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되었다.주민서는 너무도 화가 나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당... 당신들...”“전화 안 할 거야? 그럼 내가 할게.”그때 한 재벌 도련님이 주민서의 휴대폰을 빼앗았다. 주민서의 표정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휴대폰 돌려줘!”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정우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정창윤, 적당히 해. 얼른 주민서한테 다시 돌려줘.”“연결됐어. 연결됐어.”정창윤은 이미 취기가 올라온 상태였다. 휴대폰 너머로 도아영의 느긋하면서도 도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이야?”룸 안이 순식간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정창윤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도아영 씨, 이 대표님이 취했는데 지금 강이나 씨랑 키스하겠대요. 안 올래요?”한동안 침묵이 흘렀다.이수호의 시선이 어느새 주민서의 휴대폰으로 향했다. 멍하니 쳐다보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을 때 이수호는 얼굴을 찌푸렸다.‘젠장. 나 지금 도아영이 뭐라고 대답할지 신경 쓰고 있는 거야?’주민서는 굳은 얼굴로 휴대폰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아영아, 절대 오지 마. 지금 놀리고 있는 거라고.”“끼어들지 마, 주민서. 우린 지금 도아영 씨한테 묻고 있어.”정창윤이 경멸스러운 태도로 말했다.“어떡할래요? 아영 씨? 안 온다면 대표님 진짜 강이나 씨랑 키스하게 생겼어요.”사람들 모두 흥미진진하게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수호도 소파에 기댄 채 지켜만 볼 뿐 말리지 않았다.강이나는 그런 이수호를 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술에 취한 재벌 도련님들은 이수호를 이용하
그들이 도아영을 웃음거리로 만든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도아영은 마구 짓밟아도 되는 존재였다.심정우는 거의 울 것 같은 주민서를 보고는 안타까운 마음에 이수호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이수호는 소파에 기댄 채 무표정한 얼굴로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다.그들의 일에 전혀 끼어들 생각이 없어 보였다.“이수호!”심정우는 이수호에게 다가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적당히 해. 이따가 도아영 씨가 진짜 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강주의 웃음거리가 되게 내버려 둘 거야?”“굴욕을 자초하겠다는데 내가 왜 말려?”이수호의 차가운 말투에 심정우는 불만을 터트렸다.“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은 강이나 씨야. 일을 크게 벌이면 이나 씨한테도 좋을 게 없어.”강이나는 이수호의 팔을 잡으면서 난감해했다.“맞아요, 수호 씨. 아영 씨한테 전화해서 오지 말라고 하는 건 어때요?”“걔 때문에 네가 할머니 앞에서 굴욕당한 거 잊었어? 네 앞에 무릎 꿇고 사과하게 하겠다고 약속했잖아.”덤덤한 표정과 달리 이수호의 말투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강이나는 이수호의 팔을 잡고 있던 손을 내려놓았다. 심정우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이수호, 너무한 거 아니야? 예전에는 이렇게 지나치게 행동한 적이 없더니 오늘은 왜 이래?”전에도 이수호는 도아영을 싫어하긴 했지만 공공장소에서 모욕을 준 적은 없었다. 가장 도가 지나친 때가 바로 약혼식 날에 기분이 좋지 않아서 반지를 수영장에 던진 그때였다. 그런데 도아영이 진짜로 물에 들어가서 주울 줄은 몰랐다.그날 이후로 심정우는 도아영의 마음이 진심이라고 확신했다. 허영심이 많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면서 이수호에게 접근하는 그런 여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수호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도아영을 모욕하려 했다.심정우의 질문에 이수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위스키 반 잔을 단숨에 마셔버렸다.어느덧 30분이 지났다. 다들 벌써 몇 잔이나 마셔 술기운이 꽤 올라왔다.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던 이수호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도아영
도아영이 한 손을 내밀고 물었다.“휴대폰 어디 있어?”정창윤이 주민서의 휴대폰을 쥔 손을 들어 보였다.“여기요. 도아영 씨, 전에 강이나 씨한테 무례를 범한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사과하면 돌려줄게요.”“아영아, 휴대폰 돌려받지 않아도 되니까 그냥 가자.”주민서가 그냥 가려 했지만 도아영은 정창윤에게로 걸어갔다. 코끝을 스치는 도아영의 향기에 정창윤은 순간 멍해지면서 마음마저 설렜다. 그런데 그때 도아영이 다리를 높게 들더니 정창윤의 그곳을 냅다 걷어찼다.“으악.”정창윤은 비명을 지르면서 바닥에 쓰러졌고 휴대폰도 툭 떨어졌다. 도아영은 떨어지는 휴대폰을 깔끔하게 잡고는 정창윤을 싸늘하게 흘겨보면서 휴대폰을 주민서에게 돌려주었다.“정씨 일가에 상장 회사도 있는 것 같지 않은데 이 모임에는 어떻게 들어온 거지? 몇 년 전에 우리 아빠가 계셨을 때 정씨 일가는 도원 그룹에 발을 들일 자격조차 없었어. 근데 감히 내 앞에서 건방을 떨어?”그러고는 하이힐로 정창윤의 손바닥을 힘껏 밟았다.“모임마다 룰이 있어. 너희 집안이 우리 집안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니까 말을 가려서 해야지. 안 그러면... 정씨 일가가 내일 강주에서 완전히 사라질지도 몰라.”“아파! 으악! 아프다고. 이거 놔. 도아영 너 미쳤어?”룸 안에 비명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도아영의 잔인한 모습을 처음 본 사람들은 놀라서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그녀의 모습에 이수호는 얼굴을 찌푸렸다. 도아영은 룸 안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이수호를 거들떠본 적도 없었다. 그는 괜히 짜증이 밀려왔다.이수호의 안색이 좋지 않은 걸 본 강이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아영 씨, 다들 재미있게 놀려고 온 거고 창윤 씨도 그냥 장난 좀 쳤을 뿐이에요.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은 난데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요?”“내가 너무했다고요?”도아영은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정창윤을 더 힘껏 밟았다.“으악! 도아영, 죽여버릴 거야.”정창윤은 손이 다 부러질 것만 같았고 안색도 점점 창백
주변에서 떠들어대는 소리가 점점 귀에 거슬렸다.참다못한 주민서가 분노를 터트리려던 그때 도아영이 그녀의 손을 잡고 고개를 내저었다.주민서에게는 가족이 있어 이 모임에 있는 사람들을 건드려선 안 되었다.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보며 강이나가 나서서 말했다.“아영 씨, 수호 씨가 내 생일을 축하해줘서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아무 잘못 없는 창윤 씨한테 화풀이해서는 안 되죠.”강이나는 테이블 위의 술잔을 들어 도아영에게 건넸다.“오늘 생일인 나의 체면을 봐서 여기까지만 해요.”도아영은 그 술잔을 받았다. 강이나와 도아영이 술 한잔을 주고받으려던 그때 이수호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강이나에게 다가갔다.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이수호를 지켜보았다. 이수호는 강이나의 술잔을 빼앗더니 도아영이 보는 앞에서 잔에 담긴 술을 바닥에 부어버렸다.이 행동은 도아영의 체면을 완전히 짓밟은 거나 마찬가지였다.“수호 씨, 이러지 말아요...”강이나는 이수호의 팔을 잡아당기면서 말렸다. 스킨십이 참으로 자연스럽고 친밀했다.사람들은 도아영이 웃음거리가 되기만을 기다렸다. 도아영이 아니라 어떤 여자든지 많은 사람 앞에서 이런 모욕을 당한다면 울음을 터트렸을 것이다.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잠시 후 도아영이 갑자기 피식 웃으면서 술잔을 들었다.“이 잔 마실게요. 근데... 이나 씨 생일을 축하해서가 아니라 두 분이 부부가 되고 빨리 득남 득녀하길 바란다는 뜻에서 마시는 술입니다.”그러고는 단숨에 한잔을 마셔버렸다.이수호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고 지켜보던 사람들도 너무 놀라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전에 도아영이 이수호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왜 저러는 것일까? 이수호가 강이나와 결혼할 수 있었더라면 진작 했겠지.듣건대 강이나가 예전에 임신했었지만 남현숙이 강이나를 반대한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아이를 지웠다고 했다.부부가 되어 빨리 득남 득녀하길 바란다는 말은 겉으로 보기에는 축복 같
“웃기는 사람이네.”도아영이 말했다.“수호 씨가 날 집으로 데려온 지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 CCTV 영상을 지울 이유가 뭐 있지? 설령 3개월 동안 살았더라도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영상 자료의 위치까지 어떻게 알겠어? 따지고 보면 오늘 온종일 집에 혼자 있었던 미소 씨가 더 의심스럽지 않아? 더욱이 도씨 일가 아가씨로서 고작 도우미에게 누명을 씌울 명분도 없잖아.”“저 아니에요. 진짜 오해예요.”김미소는 초조한 얼굴로 이수호를 향해 설명했다.“대표님, 전 억울해요.”“그만!”이수호가 눈살을 찌푸렸다.그동안 집안 도우미들이 몰래 도아영을 괴롭힌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단지 매번 나서서 시비를 따지기 귀찮았을 뿐이었다.게다가 도아영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하지만 이번에 김미소는 선을 넘었다.이수호가 싸늘하게 말했다.“우리 집에 너처럼 행실이 나쁜 도우미는 필요 없으니까 이번 달 월급 받고 돌아가. 내일부터 출근 안 해도 돼.”갑작스러운 불호령에 김미소는 사색이 되었다.“대표님! 진짜 저 아니에요. 정말 억울해요.”이수호는 이런 사소한 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김미소는 안지원에게 끌려 밖으로 나갔다.도아영은 몸에 걸친 타월을 정리하며 말했다.“이제 올라가서 옷 갈아입어도 될까요?”팔다리를 훤히 드러낸 그녀를 발견한 이수호는 외투를 벗어 던져주며 싸늘하게 말했다.“옷 입고 내려와. 물어볼 게 있어.”도아영은 손에 든 외투를 힐긋 내려다보더니 다시 이수호를 향해 휙 던졌다.“마음만 받을게요.”얼떨결에 외투를 붙잡은 이수호는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간덩이가 부었군!’도아영은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이내 소파에 앉아 그녀를 잠자코 기다리는 이수호를 발견했다.그러다 문득 전생에 멀리서 묵묵히 지켜보기만 하던 자기 모습이 떠올랐다.워낙 그녀에 대한 적대감이 강해서 차마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항상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사랑하는 감
“그게 무슨 헛소리에요?”도아영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눈앞의 이수호를 바라보았다.“한창 샤워 중인데 본인이 갑자기 들이닥치고 왜 제 탓하는 거죠?”“이...!”이수호의 시선이 도아영한테서 떠나지 않았다.타월로 몸을 아슬아슬하게 가린 그녀는 매끈하고 하얀 다리를 고스란히 드러냈고, 촉촉하게 젖은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쓸어 넘겼다. 게다가 쇄골에 맺힌 물방울까지 더해 유난히 매혹적으로 느껴졌다.적나라한 이수호의 눈빛에 도아영은 타월을 위로 끌어올렸다.“그래서 제 방에는 왜 왔어요?”“누가 너 보고 유니폼을 자르래?”그녀는 이수호의 추궁에도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제가요? 언제요? 당최 무슨 말인지...”“어디서 발뺌이야!”이수호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옷을 잘라버린 의도가 뭐지? 나한테 반항하는 건가? 아니면 일부러 관심이라도 끌려는 거야?”“수호 씨, 무슨 얘기인지 도통 이해가 안 가네요.”도아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유니폼을 본 적이 없는데 설령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해도 그럴싸한 핑계를 대야지 않겠어요?”끝까지 오리발을 내미는 그녀를 보자 이수호는 코웃음을 쳤다.“그래? 따라 와.”이내 저벅저벅 걸어가 도아영의 팔을 붙잡고 아래층으로 끌고 갔다.손목에서 전해지는 통증에 도아영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1층에 도착하자 김미소는 아직도 바닥에 널브러진 천 쪼가리를 치우고 있었다.유니폼은 이미 갈기갈기 찢어진 상태였다. 도아영은 옷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가 자른 거 아니에요.”“거짓말! 분명 아영 씨가 잘랐잖아요.”시치미를 떼는 도아영을 보자 김미소는 이수호를 향해 말했다.“아영 씨가 제 앞에서 가위로 옷을 싹둑싹둑 잘랐죠. 증언해드릴 수도 있어요!”“증언이라니? 날 고발한 사람이 미소 씨인데 어떻게 믿음이 가겠어?”도아영이 느긋하게 받아쳤다.“설령 범인이 나라는 걸 증명하고 싶어도 다른 증인이 한 명 더 있어야 하지 않을까?”“그건...”김미소는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짝!우렁찬 따귀 소리와 함께 도우미는 별안간 뺨을 얻어맞았다.이내 볼을 감쌌고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도아영은 싸늘한 시선으로 눈앞의 젊고 아리따운 여자를 쳐다보았다.“미소 씨 맞지? 내가 누군지 알고 있으니까 그동안 존칭을 썼을 텐데 함부로 반말하면 되겠어?”“이...!”김미소는 이씨 저택에서 일을 오래 하고 얼굴이 예쁘장하다는 이유로 도아영이 늘 안중에도 없었다.또한, 전생에 그녀가 이 집안에서 얼마나 비굴했는지 똑똑히 지켜봐 온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했다.심지어 엉뚱한 조언을 해준 탓에 이수호 앞에서 망신당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닌 거로 기억했다.따라서 이번 생에는 얼굴만 믿고 건방지게 구는 김미소를 절대로 봐줄 생각이 없었다.“아영 씨, 한낱 도우미라고 해도 엄연히 이씨 일가의 직원이거든요? 저한테 손찌검하는 건 대표님의 체면을 깎아내리는 셈이죠. 지금 당장 보고할 테니까 대표님이 준비한 유니폼을 잘라버린 이상 이 집에서 쫓겨나도 뭐라 하지 마세요.”김미소는 도아영을 노려보더니 너덜너덜해진 옷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저녁 무렵, 이수호는 유태범이 돌연 구연준과 손을 잡게 된 일 때문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이내 집에 도착하자 홀로 책상 앞에 앉아 울고 있는 김미소를 발견했다.이수호는 눈살을 찌푸렸고, 옆에 있던 안지원이 다가가서 물었다.“저녁 준비는 끝났어요? 왜 울어요?”“대표님, 아영 씨가 글쎄 대표님이 준비한 유니폼을 가위로 잘라버렸어요.”말을 마치고 나서 너덜너덜해진 옷을 내밀었다.눈앞에 펼쳐진 참상에 이수호는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낮에 도아영이 강이나와 그를 두고 홀연히 떠나가는 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생생했는데 엉망이 된 옷을 보자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지금 어디 있어?”이수호의 화를 돋우는 데 성공하자 김미소는 속으로 의기양양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말했다.“2층이요! 옷을 자르자마자 올라가서 잠을 자더라고요. 대표님이 안중에 없는 게 분명해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수호는 굳은 얼굴로 2
남자가 바람 피우는 건 지극히 정상이고, 여자는 욕심이 과하면 안 된다니?이런 막무가내가 어디 있는가?“오늘 일은 못 본 척해줄 테니까 알아서 잘 처리해.”말을 마치고 나서 무언가를 떠올린 듯 한 마디 보탰다.“참, 전에 휴학했다고 하지 않았어?”“네.”“그렇다면 학교는 굳이 안 나가도 돼.”남현숙이 말을 이어갔다.“우리 집 손자며느리로 들어온 이상 설령 학교에 다니지 않아도 졸업증은 받을 거야.”“할머니...”“이만 가 봐. 지금은 오로지 수호의 마음을 어떻게 사로잡을지 고민하고 나머지는 신경 쓰지 마. 게다가 곧 결혼할 새댁이 아직도 학교에 다니면 남들이 비웃을지도 몰라.”남현숙은 명령조로 말했다.도아영은 못마땅했지만 당장 거절할 입장이 안 되었다.만약 남현숙과 등을 돌리는 순간 도원 그룹이 이수호의 공격이라도 받게 된다면 그녀는 끌려다니기 마련이다.결국 아무 말 없이 묵인했다.그제야 고분고분해진 도아영을 보자 남현숙이 흡족하게 말했다.“우리 아영이 착하네. 내가 널 좋아하는 이유도 말을 잘 듣기 때문이지. 수호가 한 집에서 같이 살기로 했다던데 아주 긍정적인 신호야.”남현숙은 도아영의 손을 토닥였다.“남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입맛부터 공략해야 해. 너의 가장 큰 장점이 바로 요리 솜씨잖아. 수호는 다른 사람이 만든 음식은 입에 대지도 않으니까 제대로 만족만 시켜준다면 널 떠날 걱정은 안 해도 돼.”의미심장한 말투에 도아영은 그녀가 언급한 ‘만족’이 무엇을 뜻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보아하니 이수호와 이미 관계를 가졌기에 같이 살게 된 거로 단단히 오해한 듯싶었다.도아영이 피식 웃었다.“알겠어요. 할머니.”“알면 다행이고.”남현숙은 작은 병 하나를 그녀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앞으로 자기 전에 한 방울씩 떨어뜨려. 무슨 효능이 있는지는 차차 알게 될 거야.”도아영은 갈색 병을 흘긋 내려다보았다.남현숙이 자리를 뜨고 나서야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았는데 달콤한 향이 코를 찔렀다.지난번 이수호의 방에서
“어르신!”장서남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그동안 남현숙을 모시면서 말실수한 적이 처음은 아니지만 해고를 운운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이 주둥이가 방정이네요. 전 단지...”“끌고 가.”남현숙은 장서남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곧이어 경호원이 다가와 그를 바닥에서 일으켜 세우더니 자리를 떠났다.도아영은 남현숙의 친숙한 면만 봐왔던 지라 이렇게 무자비하게 누군가를 내치는 모습이 너무 낯설었다.어쩌면 이게 바로 그녀의 본모습일지 모른다. 아마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만 너그러운 척 선의를 베풀었을 수도 있다.심성이 원래 착하신 분이라면 고작 말실수를 한 번 했다고 몇 년 동안 따라다니던 직원을 가차 없이 자르지는 않을 테니까.“아영아, 혹시 기사 내용에 대해 알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어서 오늘 널 불렀어.”“무슨 기사요?”도아영은 모르는 척 남현숙을 바라보았다.남현숙이 휴대폰을 꺼내자 화면에 그녀가 도원 그룹의 후계자로서 구호 그룹과 손을 잡았다는 내용이 떡하니 나타났다.“구연준이 4천억을 빌려준 거야?”남현숙은 못마땅한 말투로 물었다.언젠간 물어볼 거로 예상했지만 이렇게 빨리 그녀의 귀에 흘러 들어갈 줄은 몰랐다.“할머니, 소문이 와전된 것 같은데 구호 그룹과 도원 그룹은 평범한 비즈니스 파트너일 뿐이에요.”“평범하든 말든 둘째치고, 적어도 수호의 약혼녀로서 구연준과 너무 친하게 지내는 건 아니라고 봐.”남현숙의 말투가 어느새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게다가 이미 임자도 있는 사람이 무슨 회사를 운영한다고 그래? 이참에 남동생에게 넘겨줘. 서남의 말에 많이 불쾌하겠지만 일부는 맞다고 생각해. 어쨌거나 자기 약혼자한테 신경을 써야지 회사 일은 너무 깊게 관여하지 마. 여자는 기가 너무 세도 남자가 싫어해.”남현숙의 말에 도아영은 헛웃음이 났다.“할머니, 회사는 아빠가 물려준 유산이라 남한테 넘길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수호 씨의 마음은 애초에 딴 데 있는지라 제가 아무리 애를 써도 되돌리기는 힘들걸요? 저를 설득하는 것보다 차라리
장서남은 도아영을 쫓아가기 위해 얼른 차에 올라탔다.부리나케 뒤따라오는 장서남을 보자 도아영은 냉소를 지었다.성격이 물러터진 고용주 때문에 일개 직원 따위가 감히 건방지게 구는 것이다.엄연히 도씨 일가 아가씨로서 어떻게 보면 손님인 셈인데 고작 운전기사가 주인 행세를 하며 무례하게 행동하는 건 납득이 불가했다.예전에는 화가 나도 참았지만 이제는 절대 봐주지 않을 것이다.잠시 후 택시는 이씨 별장 앞에 멈추어 섰다.남현숙은 본가에서 이사한 이후로 별장에서 지냈다.창문 너머로 택시에서 내리는 도아영을 보자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뭐지? 서남한테 데리러 가라고 하지 않았어? 왜 혼자 왔대?”“글쎄요...”옆에 있던 도우미도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분명 장서남이 픽업 간다고 하지 않았는가?“지금 장난해? 동네방네 웃음거리로 전락하게 할 작정이야?”남현숙은 씩씩거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리고 거실로 들어선 도아영을 발견하고 재빨리 다가가 물었다.“아영아, 왜 혼자 왔어? 서남이가 데리러 안 갔어?”“아니요. 픽업하러 오셨던데 저보다 강이나 씨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서 그냥 택시 타고 왔어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장서남이 현관문을 열고 허둥지둥 뛰어왔다.남현숙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아영을 픽업하러 보냈더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어, 어르신...”장서남은 진땀을 흘리며 말했다.“그냥 잡담을 몇 마디 했을 뿐인데 아영 씨가 화를 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게다가 어르신의 체면이 구겨지게 택시를 타다니! 이게 다 제 탓입니다. 괜히 허튼소리를 해서 말이에요. 단지 대표님에게 신경을 좀 더 쓰면 좋을 것 같다고 했는데 정색하며 차에서 내릴 줄이야... 만약 다른 사람의 귀에 흘러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을 텐데 정말 큰 일이네요.”남현숙을 오랫동안 모셔 온 사람으로서 성격 또한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체면을 가장 중요시했다.손님이 택시를 타고 집에 오는 일은 여태껏 단 한 번도 없었다.따라서 도아영이
그제야 장서남은 도아영의 눈에 웃음기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이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도씨 일가 아가씨라고 해도 두려울 게 뭐 있나 싶었다. 그래봤자 이수호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는 신세이지 않은가?그리고 말을 이어갔다.“아영 씨, 어르신에게 잘 보이면 장땡이라고 생각하는 건 큰 오산이에요. 대표님께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바로 성질이 고약한 여자이죠. 그에 비해 강이나 씨는 여성스러움과 착함의 대명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대로 손 놓고 있다가는 사모님의 자리를 양보해야 할지도 몰라요.”장서남은 도아영에게 이수호의 아내, 더욱이 강이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아니면 애초에 강이나를 따라 하며 환심을 사려고 애를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도아영의 콧대를 꺾었다는 생각에 장서남은 의기양양했다. 곧이어 싸늘한 호통 소리가 울려 퍼졌다.“차 세워요!”갑작스러운 명령에 깜짝 놀란 나머지 브레이크를 밟았다.“아영 씨...”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아영은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이를 본 장서남은 겁에 질려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그리고 운전석을 허둥지둥 벗어나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아영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이씨 일가에 어떻게 이런 무례한 직원이 다 있죠? 방금 그런 말은 대체 누가 해도 된다고 했는지 궁금하네요.”진지한 모습은 절대로 농담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장서남의 안색이 순식간에 돌변했다.도아영은 워낙 성격이 순하고 소심한 탓에 방금 내뱉은 말은커녕 설령 수위가 훨씬 더 높아도 여태껏 화를 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그런데 오늘은 갑자기 무슨 상황이란 말이지?“이게 다 아영 씨를 위해서 하는 말인데 은혜도 모르고 뭐 하는 짓이죠? 만약 강이나 씨였더라면 고참 직원을 이렇게 함부로 대하지 않았을 거예요.”그는 일부러 ‘고참’이라는 단어를 강조해서 말했다.도아영은 장서남이 남현숙의 최측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한 지 벌써 10년이 넘었는지라 신뢰가 두둑했다.따라서
도아영의 편을 들어주는 이수호 때문에 강이나는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동안 원수를 대하는 듯 냉정한 모습만 지켜봐 왔기에 모욕은 일상이며, 더욱이 감싸주는 건 상상조차 못 했다.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되었단 말이지?설마 도아영과 정말 결혼할 생각인가?한편, 주민서는 따라오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다행히 따돌렸나 봐. 이수호 장난 아닌데? 설마 경호원을 총동원한 거야? 영문을 모르는 사람은 영화라도 찍는 줄 알겠어.”그러고 나서 도아영을 돌아보며 툴툴거렸다.“너도 참, 쓸데없이 이수호는 왜 도와줘? 그냥 둘이 지지고 볶게 놔두지. 결국 너만 남의 흉내를 내서 남자나 꼬시러 다니는 여우 년이 되어버렸잖아. 본전도 못 찾았네.”“이수호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였거든?”전생에 이미 교훈을 얻은 만큼 다시는 이수호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는 게 답이었다.게다가 강이나라면 죽고 못 사는 남자이니 이번 생에는 흔쾌히 자리를 양보해서 비운의 커플을 이뤄줄 생각이었다.이때, 도아영의 휴대폰이 울렸다.발신자를 확인하는 순간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이번에는 또 무슨 일로 전화한 걸까?곧이어 통화 버튼을 누르자 휴대폰 너머로 남현숙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영아, 이따가 기사님을 보낼게. 물어볼 게 있어.”왠지 모르게 딱딱한 말투에 도아영이 재빨리 대답했다.“할머니, 저 아직 학교라서 당장은 어려울 것 같아요.”“교장 선생님께 이미 말씀드렸으니 그냥 가도 돼. 기사님이 곧 도착할 거야.”말을 마치고 나서 전화를 뚝 끊었다.끊임없이 이어지는 통화 종료음을 들으면서 도아영은 조소를 머금었다.그리고 속으로 바보 같은 자신을 비웃었다.그동안 이수호가 무슨 짓을 하든 남현숙만큼은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다시 태어나고 나서야 이씨 가문 사람은 한통속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미래의 시할머니에게 진심을 바라는 자체가 사치였다.결국 모든 건 이익으로 귀결되었다.곧이어 도아영
그러고 나서 유하영과 조나린에게 둘러싸인 채 강의실로 걸어갔다.내부는 이경 그룹의 경호원들로 가득했다.유하영은 이수호를 보자마자 손을 흔들었다.“대표님!”이수호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고 멀지 않은 곳에서 강이나의 모습을 발견했다.한편, 강이나는 이수호의 맞은편에 있는 도아영을 바라보았다.게다가 도아영의 팔을 잡은 이수호 때문에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아영 씨가 여긴 왜...”유하영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고 조나린과 시선을 주고받았다.이수호가 강이나를 찾으러 왔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도아영한테 볼 일이 있을 줄이야.결국 분위기는 일촉즉발의 상태까지 이르렀다.“수호 씨, 이게 무슨 상황이죠?”강이나는 불만을 애써 참으며 물었다.도아영이 이수호의 손을 뿌리치며 불쑥 끼어들었다.“이나 씨를 찾으러 왔다고 하지 않았나요? 이제 만나게 되었으니까 전 이만 가볼게요.”말을 마치고 나서 혼란스러운 틈을 타 주민서를 데리고 도망쳤다.이수호는 굳은 얼굴로 따라가려고 했지만 강이나가 그를 불렀다.“수호 씨!”이내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유하영이 불쑥 끼어들었다.“내가 뭐랬어? 대표님은 널 보러 왔다고 했지? 이게 다 뻔뻔스러운 도아영 탓이야. 예전부터 너만 따라 하기 급급하더니 어쩌면 지금도 변함이 없을까? 누가 봐도 대표님을 유혹하려고 수작을 부리는 거잖아. 흥! 제 주제도 모르고 말이야.”유하영의 말을 듣고 있던 이수호는 표정이 싸늘하게 식어갔다.강이나는 이수호에게 다가가 물었다.“수호 씨, 하영 말이 맞아요?”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강주에서 이수호가 강이나를 사랑한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반면, 도아영은 예전부터 강이나의 스타일을 따라 하며 흡사한 외모를 무기 삼아 이수호의 환심을 사려고 애를 썼다.“당연하지 않겠어? 대표님은 사람을 잘못 본 게 확실해.”조나린이 맞장구를 쳤다.죽이 척척 맞는 두 여자 때문에 도아영은 본의 아니게 이수호를 유혹하기 위해 갖은 꿍꿍이를 꾸미는 여자가 되어버렸다.“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