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 씨.”강이나가 이수호를 잡으려 하자 심정우가 재빨리 나서서 강이나의 앞을 막아섰다.“이나 씨, 다들 이나 씨 생일을 축하해주겠다고 기다리고 있는데 얼른 와서 촛불 불어요.”이수호를 쫓아가려 했지만 심정우가 막은 바람에 꼼짝할 수가 없었다. 강이나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기쁘든 화가 나든 좀처럼 내색하지 않던 수호 씨가 왜 자꾸만 도아영 때문에 쉽게 흔들리는 것 같지? 설마 도아영한테 진짜 마음을 준 거야?’나인 클럽 밖으로 나온 주민서는 긴장한 나머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아영아, 이수호... 진짜 화났으면 어떡해? 아까 표정 보니까 엄청 안 좋던데. 설마...”“일단 차에 타.”도아영은 주민서를 차에 태웠다. 주민서가 뭐라 하려던 그때 누군가 도아영을 확 잡아당겼다.“이수호, 이거 놔!”이수호는 도아영의 손목을 꽉 잡고 놓지 않으려 했다. 그 모습을 본 주민서의 얼굴이 사색이 되더니 재빨리 달려가 말렸다.“아영아.”그런데 주민서가 두 사람을 따라가기도 전에 경호원이 주민서의 앞을 막아섰다.“죄송한데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왜 못 들어가는데요? 방금 내 친구가 잡혀간 거 못 봤어요?”“이 대표님은 절대 도아영 씨를 다치게 하지 않으니까 그만 돌아가세요.”“당신!”주민서는 조급한 나머지 안절부절못했다.‘이수호 이 나쁜 자식.’이수호는 도아영을 끌고 나인 클럽 안으로 들어왔다. 도아영이 무섭게 쏘아붙였다.“이수호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도아영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수호는 아무 룸 문이나 걷어찼다. 전부 낯선 얼굴이었지만 이수호는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싹 다 꺼져!”룸에 있던 사람들은 이수호에게 덤비려 했다. 그런데 눈썰미가 남다른 누군가가 이수호인 걸 알아챈 후에는 거의 도망치듯 허둥지둥 나가버렸다.순식간에 룸 전체에 도아영과 이수호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문이 닫힌 걸 본 도아영은 이수호의 손을 뿌리치고 이수호를 멀리했다.“왜요? 대표님을 건드리면 집에도 못 가는 건가요?”
“대표님도 다른 의견이 없는 것 같으니까 이만 가볼게요. 내일 오전 10시에 이경 그룹 기자회견에 제시간에 참석하겠습니다.”도아영이 이수호를 밀어내고 돌아서려는데 이수호가 갑자기 그녀의 팔을 잡았다. 도아영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더러운 쓰레기라도 닿은 듯 싫은 티를 팍팍 냈다.“이수호 씨, 계속 이렇게 매달리면 재미없죠.”이수호는 혐오가 가득한 도아영의 눈빛을 빤히 쳐다보았다. 도아영에게서 이 눈빛을 처음 봤을 때부터 익숙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그땐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조금 전 문득 떠올랐다. 그 눈빛은 바로 그가 예전에 도아영을 쳐다보던 눈빛이었다.이수호는 순간 분노가 치솟았다.‘도아영이 뭔데 날 이런 눈빛으로 쳐다봐?’“도아영, 우리 이씨 일가와 파혼하기 전에 제대로 생각해야지.”이수호는 거의 이를 악물고 말했다.“제대로 생각했어요.”낮게 깔린 중저음이 룸 밖에서 들려왔고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구연준이 하얀 셔츠를 입고 들어왔는데 옷소매를 살짝 걷어 올렸고 은색 암밴드를 하고 있었다.도아영이 그가 왜 여기에 있는지 의아해하던 그때 구연준이 다가와 도아영을 품에 와락 끌어안고는 이수호에게 말했다.“대표님, 아영이는 날 더 좋아하는 것 같은데요.”예상치 못한 구연준의 말에 도아영은 하마터면 미친 거 아니냐는 말을 입 밖에 꺼낼 뻔했다.“연준 씨를요?”이수호는 뒤로 한걸음 물러서더니 도아영과 구연준을 번갈아 쳐다보았다.“도아영, 생각보다 재간이 있구나, 너. 예전에는 내가 널 너무 얕잡아봤어.”눈살을 찌푸린 도아영을 보며 이수호는 계속하여 싸늘하게 말했다.“그래도 충고하는데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강주에서는 구연준의 말이면 뭐든지 다 되는 게 아니야. 구연준이랑 나 가운데 잘 생각하고 선택해.”“선택할 필요가 있을까요?”구연준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우리 집안은 깨끗한 집안이지만 이씨 일가는 그동안 양심도 버리고 장사를 해왔죠. 연애를 해본 적도 없는 나와는 달리 대표님은... 강이나
“난 마음이 불안해서 외출할 때 항상 경호원을 많이 데리고 다니거든요.”구연준이 덤덤하게 말했다.“오늘 누가 여길 못 나갈지는 봐야 알 것 같은데요?”일촉즉발의 상황에 강이나의 생일 파티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구연준과 이수호가 있는 방으로 몰려들었다.강이나는 인파 속을 뚫고 다가오자마자 대치하고 있는 세 사람을 봤다. 그녀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이건 누가 봐도 이수호와 구연준이 도아영을 빼앗는 상황인 게 분명했다.“수호 씨, 대체 무슨 일이에요?”강이나는 피어오르는 의심을 가까스로 억눌렀다.“아영 씨 이미 돌아간 거 아니었어요? 그리고 구 대표님은...”이수호와 구연준보다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건 구연준과 도아영의 관계였다. 어쨌거나 구연준은 여자에게 관심이 없기로 소문이 자자하니까. 그때 도아영이 사람들 앞에서 구연준의 나쁜 말을 한 바람에 지금 구연준이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파다했다.그렇다면 구연준과 도아영이 서로 물고 뜯고 싸워야 정상인데... 뜻밖에도 두 사람은 함께 나란히 서 있었고 게다가 가까워 보이기도 했다.“그 질문 아주 잘했어. 이미 여길 떠났어야 하는 아영이를 누가 다시 잡아 왔을까? 대표님, 누가 그런 거죠?”구연준이 대놓고 얘기하진 않았지만 이수호가 도아영을 룸으로 데려왔다는 뜻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대체 뭘 하려고? 설마 우리가 생각하는 그거?’강이나는 입술을 깨물고 이수호를 쳐다보았다.“수호 씨, 사실이에요?”강이나의 질문에 이수호는 눈살만 찌푸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정우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먼저 나서서 말했다.“수호는 도아영 씨와 기자회견에 관해 상의하려고 그런 거예요. 구연준 씨, 괜히 이목을 흐리지 말아요.”“정우 씨 말이 맞아요.”구연준이 손가락을 튕기더니 웃으면서 말했다.“내일 오전 10시에 기자회견을 하는데 이 대표님이 파혼을 발표하기로 했어요.”그러고는 강이나를 쳐다보았다.“축하해요, 강이나 씨. 드디어 이 대표님 옆자리에
도아영은 구연준이 또 무슨 꿍꿍이인 건지 알지 못했다. 구연준을 알게 된 후로 속이 참 시커먼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그녀는 상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구연준이 왜 이곳에 타이밍 맞게 나타났는지 궁금했다.하여 구연준에게 다가가 코를 훌쩍이며 냄새를 맡았다.“어우, 술 냄새. 혹시 술 마시다가 온 거예요?”구연준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도아영이 계속 말하게 내버려 두었다. 그녀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타이밍이 딱 맞게 나타난 걸 보면 여기 나인 클럽에서 사업을 논하고 있었던 거네요.”“틀렸어.”구연준은 한 손을 내밀어 도아영의 앞에서 흔들었다.“틀렸으니까 상은 없어.”“대표님...”도아영의 말이 끝나기 전에 구연준은 옆 방의 문을 열었다. 한성대 교수들이 옛날 노래를 부르면서 앉아 있었다.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도아영은 어안이 벙벙했다. 교수들의 시선이 일제히 도아영과 구연준에게로 향했다.“구 대표님, 이게 대체...”“우리 과 도아영 아니야? 며칠 동안 학교도 나오지 않고 전화도 안 받더니. 약혼한다는 소리는 들었어. 근데 지금 너한테 가장 중요한 건 학업이야.”한 교수가 다가오며 말했다. 도아영이 누구인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어쨌거나 이수호도 한성대에 투자한 주주 중 한 명이니까.“죄송해요, 교수님. 이 학생과 아직 할 얘기가 있어서요.”구연준은 웃으면서 도아영과 함께 나인 클럽 밖으로 나왔다. 도아영은 아직 조금 전의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듯했다.“대표님, 지금 장난해요? 한성대 교수님들과 술을 마시러 왔다고요?”“오늘 스승의 날이잖아.”구연준이 말을 이었다.“한성대에서 초대한 강사로서 동료들과 회식하는데 뭐 문제 있어?”“당연히 문제 있죠.”영해에서 구연준의 지위라면 한성대의 교수가 아니라 한성대의 교장이라도 그를 이 술자리에 초대할 자격이 부족했다.“됐어.”구연준이 도아영을 밀어냈다.“네 친구가 아직 널 기다리고 있어.”그러고는 집에 가면 전화하라는 제스처를 취하고는 들어가 버렸다.도아영이 정확
“알았어.”도아영은 주민서가 떠난 걸 보고서야 시름 놓고 차에 올라탔다.잠시 후 도씨 일가의 기사가 도착했다. 도아영이 유승범을 보고 물었다.“오늘 당직 형식 씨 아닌가요?”“형식 씨가 아파서 제가 대신 당직 서기로 했어요.”유승범이 웃으면서 말했다.“아가씨, 바로 집으로 모셔다드릴까요?”“네.”도아영이 대답했다.“출발해요.”“알겠습니다.”유승범이 운전했고 도아영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유리창에 기댔다.밀폐된 차 안에서 에어컨을 켠 탓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아영은 가슴이 답답했다.“아저씨, 창문 좀 열어주세요. 머리가 어지러워서요.”유승범이 말했다.“아가씨, 금방 도착하니까 조금만 버텨요.”속이 메슥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워 유리창을 내리려는데 잠겨있어서 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운전석에서 운전하는 유승범은 언제 꼈는지 마스크를 끼고 있었다.그녀는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유승범에게 차를 세우라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온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질 않았다.‘뭐야? 마취약이야?’“아가씨, 저도 시키는 대로 하는 것뿐입니다. 정말 죄송해요...”정신을 잃기 전에 유승범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그 시각 나인 클럽 안.“정말요? 잘했어요. 다른 사람들 모르게 호텔로 데려와요.”허재환은 복도에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도아영이 이미 정신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었다.그녀가 이수호의 내정된 약혼녀라는 사실 때문에 지금까지 건드리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심정우에게 알아보라고 한 결과 두 사람이 끝난 사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건드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돌아가서 사모님께 고맙다고 전해줘요. 나중에 사례는 톡톡히 할게요.”허재환은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벌써 오늘 저녁에 어떻게 즐긴 건지 상상하고 있었다.잠시 후 구연준이 룸에서 나왔다. 계산을 마치고 가려던 그때 재벌 집 도련님들이 모여서 하는 얘기를 들었다.“허재환이 진짜 도아영을 납치했대? 간덩이가 부었구나, 아주.”“이젠 두려울 게 없
룸에 있던 사람들 모두 움직임을 멈추고 구연준을 쳐다보았다. 구연준의 표정이 얼음장같이 차가웠다.“얘네한테 물어봐요.”이수호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심정우는 구연준이 데리고 온 두 사람을 한눈에 알아봤다. 전에 허재환과 계속 어울려 다니던 망나니 친구들이었다.“구 대표님을 건드렸어? 빨리 말해!”심정우의 질문에 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그중 한 사람이 말했다.“허재환이 시킨 거예요. 오늘 도아영이 이 대표님을 건드렸다는 소리를 듣고 허재환이 본때를 좀 보여주려 했거든요.”이 바닥에서 이수호와 구연준이 라이벌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두 사람도 허재환과 함께 이수호의 편이었다. 이수호가 룸에 있는 걸 본 그들은 더는 구연준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른 한 남자가 말했다.“허재환이 그러는데 도아영한테 대시하는 걸 이 대표님도 허락했다고 했어요. 이번에 도아영이 이 대표님을 건드렸으니 당연히 혼 좀 내야죠. 구연준, 우리 이 대표님이 혼 좀 내겠다는데 네가 뭔데 끼어들어?”두 사람의 말에 이수호의 낯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사람들은 이수호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허재환의 소문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마음에 드는 여자가 생기면 강제 추행도 서슴지 않았고 일을 마친 후에는 돈으로 해결했다.전에는 도아영이 이수호의 예비 약혼녀라는 신분 때문에 가만히 있었지만 이젠 두 사람이 파혼했으니 가만히 있을 허재환이 아니었다.사람들도 이수호가 허재환이 도아영에게 대시하는 걸 허락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도아영 이번에 이 대표님을 제대로 건드렸나 봐. 허재환 손에 잡히면 결과가 어떨지 뻔하지.’구연준은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 코웃음을 쳤고 이수호를 경멸스럽게 쳐다보았다.“대표님이 허락한 거였군요. 여자한테 이런 수단을 쓰다니, 정말 많이 배웠어요.”그는 할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두 사람은 아직도 공기 중에 흐르는 무거운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중 한 사람이 구연준의 뒷모습을 보면서 큰소리로 말했다.“구씨 일가의 보잘
끼익.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간사하고 음험한 허재환의 얼굴이 도아영의 앞에 나타났다.“쯧쯧. 이 대표님은 정말 여자 보는 눈이 없어. 어떻게 이렇게 몸매도 예술인 예쁜 여자는 버리고 강이나 같은 도도한 여자를 좋아할 수가 있지? 나였더라면 절대 그 많은 사람 앞에서 망신당하게 하지 않아. 예뻐해도 모자랄 판인데.”허재환은 입맛을 다시면서 도아영에게 다가갔다. 도아영은 역겨움을 참으면서 어떻게 도망칠까 생각했다.이 호텔이 합법적인 호텔은 아닌 듯했다. 그런데 시설이 고급스러운 걸 보면 재벌 도련님들을 위해 준비한 게 분명했다. 일반적으로 이런 곳일 경우 보안이 아주 잘 되어있기에 도망치는 건 꿈도 꾸지 말아야 했다.“허재환, 날 건드렸다간...”“건드리면 뭐?”허재환은 손을 내밀어 도아영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피부가 허재환의 신경을 자극했다.“넌 이미 완전히 버림받았어. 다른 사람한테 부탁해서 물어봤는데 이 대표님이 건드려도 된다고 허락했대.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을 하든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이수호가 허락했다는 소리에 도아영은 순간 흠칫했다.‘날 싫어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허재환이 이런 짓을 하게 허락할 수 있어?’그 생각에 도아영은 속이 더욱 메슥거렸다.“내가 언제 이수호라고 했어?”도아영이 차갑게 말했다.“너도 알잖아. 대표님은 예전부터 날 싫어했다는 거. 날 건드리면 남현숙 어르신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남현숙이라는 소리에 허재환도 눈빛이 흔들렸다. 도아영이 계속하여 말했다.“어르신이 날 엄청 예뻐하셔. 너한테 몹쓸 짓을 당한 걸 알면 허씨 일가 전체가 망할걸? 대표님이 어르신의 말씀이라면 다 따르는 거 알지? 그런데도 널 지켜줄 수 있을까?”“도아영, 헛소리 지껄이지 마.”허재환이 코웃음을 쳤다.“몸이 더러워진 여자를 어르신이 손주며느리로 들일 리가 있겠어? 그때 가서 널 신경이나 쓸 것 같아?”“못 믿겠으면 한번 해보든지, 그럼. 어차피 나중에 망하는 건 허씨 일
“내 뒤에는 이 대표님이 있어. 근데 내가 구연준을 두려워할 것 같아?”허재환은 이미 욕구가 끓어올라 제정신이 아니었다. 상의를 벗고는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소리 잘 지르던데. 이따가 마음껏 지르게 해줄게.”“허재환, 이거 놔! 건드리지 마!”허재환은 도아영의 위에 올라타더니 공 하나를 도아영의 입속에 집어넣고는 채찍으로 마구 때렸다.“예전에 이수호한테 잘 보이겠다고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했다며? 이수호가 어떻게 즐겼는지 나도 오늘 밤에 맛봐야겠어.”허재환이 가까이 다가오자 도아영은 전생에 죽기 전에 당했던 모욕이 문득 떠올랐다. 허재환과 납치범의 얼굴이 한데 겹쳐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환생해도 전생과 같은 운명이란 말이야? 혹시 내가 이수호한테 빚이라도 졌나? 아니야. 하늘이 나한테 다시 기회를 줬어. 절대 굴복하지 않아. 절대!’도아영은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갑자기 어디서 힘이 생겼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머리로 허재환의 이마를 들이받았다.“으악.”허재환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얼마 남지 않은 힘으로 가까스로 버티면서 입안의 공을 빼고는 침대에서 굴러내려 왔다. 허재환이 도아영의 머리카락을 꽉 잡았다.“도망치려고? 꿈 깨. 네가 무슨 고상한 여자라도 되는 줄 알아? 넌 그냥 이수호가 버린 헌신짝이야.”허재환은 도아영을 잡고 다시 침대에 눕히려 했다. 이번에는 그녀에게 도망칠 기회조차 주지 않으려고 끈으로 침대에 묶어버렸다.“또 어디로 도망치나 두고 보겠어.”쾅쾅.그때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한창 흥이 오른 허재환은 갑작스러운 방해에 짜증이 밀려왔다.“누구야?”대답 없이 계속 문만 두드렸다. 허재환은 침대에서 내려와 문을 열면서 짜증을 냈다.“룸서비스 필요 없으니까 그냥 꺼져.”그런데 허재환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누군가 허재환을 발로 힘껏 걷어찼다. 그는 중심을 잃고 바닥에 넘어지고 말했다.“X발, 누구야?”허재환이 고개를 든 순간 구연준이 문밖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
모두가 구연준이 강이나의 유학 문제로 찾아왔을 거라 여길 때 이 남자는 매우 차분하게 조나린을 가리켰다.“조나린.”불현듯 지명을 당한 조나린은 온몸이 돌처럼 굳어버렸다.“네...”그녀는 초조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연준이 왜 찾아왔는지 몰라서 어리둥절할 때 문밖의 경호원이 긴급하게 프린트한 통지서를 그에게 건넸다.구연준은 통지서를 확인하지도 않고 아예 조나린에게 내던졌다.“넌 오늘부로 퇴학이야.”통지서가 조나린의 발끝에 떨어졌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말도 안 돼!”허겁지겁 통지서를 주워서 봉투를 열어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퇴학 조치 서류였다.퇴학이란 두 글자를 본 조나린은 온몸이 경직되었다.‘이럴 수가? 내가 왜? 대체 왜?’그녀는 옆에 있는 강이나에게 시선을 돌렸다.한편 강이나도 안색이 어두웠다.두 여자가 절친 사이란 걸 모르는 이는 없다. 구연준이 직접 이곳까지 찾아와서 모든 학생들 앞에서 퇴학 통지서를 내던졌다는 건 대놓고 조나린의 뺨을 때리는 거나 다름없었다.“대표님, 오해예요. 다 오해라고요!”조나린이 횡설수설하면서 해명하려 했지만 딱히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이에 구연준이 차분한 얼굴로 되물었다.“오해? 도서관에서 폭력을 행사한 영상이 모조리 녹화됐어. 병원에서 부상 진단서까지 받았는데 오해라고? 이번 사건은 범법 행위에 속하니 넌 고의상해죄 및 학교 폭력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아야 할 거야. 다른 학생들도 잘 들어. 이제 모두가 성인이라 법적 상식을 갖고 본인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해!”뭇사람들은 감히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어느새 경찰이 안으로 들어왔다.“조나린 씨 맞죠? 저희와 함께 서에 가시죠.”경찰 한 명이 입을 열자 조나린은 사색이 되었다.졸업을 코앞에 두고 퇴학이라니, 게다가 경찰서까지 잡혀갈 신세가 되었다.그녀는 강이나에게 거의 애원하듯 소리쳤다.“이나야, 강이나! 살려줘! 나 좀 구해달란 말이야.”다만 강이나도 감히 꿈쩍하지 못했다.구연준에게 겁먹은 것도 있고
“사태가 워낙 심각하다 보니 무조건 퇴학 조처를 해야 합니다!”“저도 같은 의견입니다!”...회의실에서 선생님들이 하나둘씩 손을 들었다.그 시각 학교 통보를 기다리는 조나린은 너무 긴장해서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조나린은 교실 안에서 강이나의 팔을 꼭 잡고 있었다.“이나야, 나 퇴학당하는 거 아니겠지? 뭐라고 말 좀 해봐.”유하영은 바짝 긴장한 그녀를 보더니 얼른 다가가서 위로했다.“괜찮아, 나린아. 부주의로 손을 밟은 것뿐인데 어떻게 퇴학까지 가겠어? 게다가 이나도 이미 이 대표님께 말했을 거야. 이번 일은 꼭 잘 해결될 테니까 너무 걱정 마.”말을 마친 그녀는 줄곧 함구하는 강이나를 바라봤다.“이나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강이나는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녀는 조나린을 위해 사정한 적이 없는데 이 사실을 아직 유하영과 조나린에게 알리지 못했다.어제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이수호에게 의심을 받았던 터라 본인 문제도 해결 못 한 마당에 조나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있었을까?하지만 이건 단지 도아영의 손등을 밟은 간단한 문제이니 너무 심각한 조처는 없을 것 같았다. 강이나는 결국 모든 공로를 본인에게 돌렸다.“그래, 맞아. 어제 수호 씨한테 다 얘기했으니 너도 아무 일 없을 거야. 걱정 마, 나린아.”조나린은 그제야 불안했던 마음이 진정됐다.‘하긴, 도아영이 대체 뭐라고? 이수호랑 파혼까지 한 마당에 뭐가 그렇게 대단해?’그도 그럴 것이 한성대는 실력과 배경이 없으면 괴롭힘을 당하는 수밖에 없다.손등만 밟았을 뿐이니 딱히 문제 될 건 없었다.‘도아영, 넌 이제 뒤 봐주는 사람이 없어. 학교에서도 이번 사건을 그냥 스쳐 지날 거야.’조나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강이나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으니 딱히 걱정될 건 없었다. 강이나만 나서면 그녀는 무조건 무사할 테니까.이제 한시름 놨다고 생각할 때 교실 밖에서 웅장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구연준이 어느새 정장으로 갈아입고 금테안경까지 착용하니 고귀한 분위기가 저절로 흘러
그녀의 말을 들은 이수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뭐라고?”“대표님, 나 같은 여자애가 투자에 대해 뭘 알겠어요. 게다가 그 땅은 내가 사려던 게 아니라 연준 씨가 사겠다고 해서 낙찰받은 거예요. 대표님도 잘 알다시피 내가 그때 도씨 일가의 실권도 장악하지 못했는데 어디서 천억을 구하겠어요? 그 땅이 정 그렇게 욕심난다면 구 대표님을 찾아가 보세요. 팔지 말지는 구 대표님께 걸렸거든요.”도아영은 해맑은 표정으로 말했지만 이수호는 그녀의 말투에서 선의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지금 장난해? 그 땅은 분명 네가 원해서 산 거잖아. 이렇게 쉽게 줘버렸다고?”“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그 당시 연준 씨가 돈을 대줬고 이제 와서 거둬가겠다고 하니 제가 무슨 권력이 있겠어요? 당연히 연준 씨한테 돌려줘야죠.”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솔직히 저도 후회해요. 이 땅이 이렇게까지 값질 줄 알았다면 애초에 눈 딱 감고 사버리는 건데! 괜히 좋다 말았네요.”“너...”이수호는 그녀를 뭐라고 평가해야 할지 몰랐다.하늘에서 떨어진 횡재를 이토록 홀가분하게 구연준에게 넘겨주다니.구씨 일가와 이씨 일가가 줄곧 앙숙이라는 걸 모르는 자가 있을까?이 땅을 구연준에게 줬다는 건 이경 그룹 하반기 온천리조트 계획이 백 퍼센트 망한다는 것을 뜻한다.이수호가 떠나가려 하자 그녀는 일부러 목을 내빼면서 말했다.“벌써 가게요? 좀 더 있으시지.”쾅 하는 소리와 함께 이수호가 침실을 나섰다.그가 떠난 후 도아영도 가면을 벗고 편하게 쉬었다.이수호는 그녀가 아빠가 주신 혼수를 전부 끌어모아 남원 교외의 땅을 산 걸 전혀 모르고 있다. 그것참, 모르길 천만다행이지, 알았더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원 그룹을 압박하여 그녀의 손에서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이 땅을 뺏어갔을 것이다.‘연준 씨, 미안하게 됐네요. 또 연준 씨를 내세우고 말았어요.’그 시각, 한성대 캠퍼스.“에취!”구연준은 난생처음 학교에서 이미지도 신경 쓰지 못하고 재채기를 해댔다.학생들이 전부 쳐다보자
‘이 인간도 알고 있었네!’도아영은 무고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지금 대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 정부의 결책을 내가 무슨 수로 알아요? 미리 알다니, 말도 안 돼!”“그래? 그럼 이건 뭔데?”이수호는 또다시 신문 기사를 그녀에게 내던졌다.“남원 교외에서 샘물을 파냈다고 하는데 이것도 모른다고 할 거야?”“정말요?”그녀는 일부러 놀란 척했다.“에이, 설마. 나 그냥 대충 한번 땅을 낙찰받은 건데 그럼 이제 부자 되는 거예요?”“도아영!”이수호의 안색이 점점 일그러졌다.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침대에 잠자코 누워있었다.이에 이수호가 마침내 목소리를 내리깔고 그 말을 입밖에 내뱉었다.“이 땅은 우리 이경 그룹에서 가져갈 거야. 추후에 계약서 보낼 테니 넌 사인만 하면 돼.”“죄송하지만 나 아직 허락한다고 안 했는데요?”그녀가 주제도 모르고 날뛰자 이수호는 단호하게 말했다.“우리 회사에서 하반기에 온천리조트를 개발할 계획이란 걸 너도 다 알고 있잖아!”“이경 그룹 향후 계획을 내가 어떻게 알아요?”도아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지금 이 땅이 곧 개발된다고 하니까 나한테서 뺏는 거예요?”“뺏는다고 안 했어. 마땅한 금액으로 보상해줄 거야.”이수호가 차갑게 말했다.“이 프로젝트는 규모가 너무 커서 네가 조종할만한 사이즈가 아니야. 지금 바로 돈도 챙기고 좋잖아?”그의 말을 들은 도아영은 하마터면 실소를 터트릴 뻔했다.이 남자는 늘 이렇게 거만했다.다만 그가 이토록 이 땅에 집착하는 걸 보아 도아영도 한 번쯤 떠보고 싶었다.“그럼 얼마 줄 수 있는데요?”“열 배로 쳐줄게.”이수호가 답했다.“애초에 네가 천억으로 샀으니 열 배로 갚을게. 그 땅 이경 그룹에 넘겨.”그녀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장사꾼은 역시 장사꾼이라니까.’이 땅은 정부의 보상과 지지를 받고 있고 또한 정부에서 지지하는 중점 개발 구역으로 확정되었으며 거기에 샘물까지 파냈으니 미래 가치는 가늠할 수가 없다.1조 원이 아니라 지금
다음날 이수호는 가정부와 기사를 시켜서 도아영을 집으로 보낸 후 회의하러 회사에 나갔다.그는 회의내용 따위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어젯밤에 그녀가 병상에 누워서 한바탕 욕설을 퍼붓던 장면밖에 떠오르지 않았으니까.도아영이 일부러 그랬다는 걸 생각만 해도 웃겼다. 그는 저도 몰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이 광경을 본 회의실의 뭇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대표님이 왜 이러시지?’“에헴!”옆에 있던 안지원이 마른기침을 하면서 이수호에게 눈치를 줬다.그제야 이수호도 다들 자신을 쳐다보는 걸 알아챘다.그는 곧장 웃음기를 거두고 싸늘하게 말했다.“그럼 이 방안대로 해요.”“대표님,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어요.”이때 매니저 한 명이 입을 열었다.“남원 교외의 땅을 며칠째 파고 있는데 어제 그 땅에서 샘물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하반기 온천리조트 사업과 충돌하니 이 땅을 빨리 사들여야 합니다. 남원 교외가 우리 회사의 미래 산업에 방해가 돼서는 안되잖아요. 또한 우리도 그 땅을 이용해서 온천리조트 계획을 확장할 수 있고요.”이수호는 처음에 그다지 새겨듣지 않았는데 남원 교외라는 네 글자가 어딘가 익숙했다.“대표님, 남원 교외는 도아영 씨가...”안지원이 가장 먼저 눈치채고 그에게 말했다.도아영을 언급하는 순간 이수호는 경매장에서 그녀가 천억을 주고 남원 교외의 땅을 낙찰받은 일이 떠올랐다.그의 안색이 확 어두워지자 뭇사람들은 어쩔 바를 몰랐다.“회의 끝!”이수호가 이를 악물고 회의를 마무리하자 안지원이 재빨리 서류를 정리하고 그를 따라나섰다.회의실에 남은 임원들은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봤다.‘대표님이 요즘 왜 이러실까?’그가 워낙 빨리 걷다 보니 안지원은 겨우 따라잡았다.차에 탄 이수호는 어두운 표정으로 쏘아붙였다.“남원 교외의 땅에 관한 모든 정보를 낱낱이 조사해봐.”“네, 대표님.”안지원은 운전하면서 매니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이경 그룹은 순식간에 발칵 뒤집혔다. 모두가 남원 교외의 땅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
‘내가 만약 아영이랑 결혼한다면 몇십 년 후에도 과연 이런 모습일까?’이때 포장을 마친 사장님이 그에게 봉투를 건네면서 활짝 웃었다.“여자친구분 쾌유를 바랄게요.”이수호도 흐뭇하게 웃으며 돈을 꺼냈다.백만 원짜리 수표를 본 순간 사장 부부는 입이 쩍 벌어졌다. 이수호를 쫓아서 밖에 나왔을 때 그는 이미 택시를 타고 가버렸다.병원 병실.도아영은 어느새 죽을 한 그릇 다 비웠다.방에 들어온 이수호는 불을 켜고 텅 빈 죽그릇을 치우고는 찐빵을 선반에 내려놓았다.한가득 포장해온 찐빵을 보더니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뭐가 이렇게 많아요?”“네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몰라서 종류별로 두 개씩 샀어.”이수호는 그녀 대신 재빨리 어수선해진 선반을 치웠다.이때 그녀가 말했다.“너무 늦게 돌아왔잖아요. 나 이미 배부르게 먹었어요.”“그래?”이수호는 별 반응이 없었다.“화 안 나요?”“나 놀리는 거 알아. 네가 지금 환자니까 그냥 참는 거야.”그는 소파에 앉아서 담담하게 말했다.“먹고 싶으면 먹고 못 먹겠으면 다 버려.”“...”너무나도 차분한 이 남자의 모습에 도아영은 포장을 뜯고 찐빵을 한입 물었다.이수호는 침대에 누워서 찐빵을 먹는 그녀에게 물었다.“마지막으로 그 찐빵 가게에 간 게 언제야?”도아영은 잠시 동작을 멈추고 차갑게 답했다.“기억 안 나요.”“너희 아빠가 입원했을 때 맞지?”순간 그녀의 안색이 확 차가워졌다.“그게 대표님이랑 무슨 상관이죠? 우린 이미 파혼했으니 더는 사적인 일에 대해 묻지 말아 주세요.”입맛이 떨어진 그녀는 찐빵을 내려놨다.문득 아빠가 입원했을 때 그녀 홀로 바삐 돌아쳤던 기억이 났다.유정연도 오긴 했지만 아빠가 하루빨리 죽어서 도지호에게 유산을 물려주기만을 바랐다.전에 도씨 일가와 거래했거나 협력했던 대표들도 하나같이 나쁜 심보를 품고 있었다.도아영은 마치 언제든 잡아먹히게 될 토끼처럼 무기력하게 이 모든 걸 마주해야만 했다.그리고 그때 남현숙은 그녀를 손주며느리로 찜했었다.이수호는
야채죽과 삶은 계란, 그리고 밑반찬들까지 전부 담백한 음식인지라 식욕이 당기지 않았다.“음식이 별로네요.”도아영이 힐긋 내려다보며 말했다.“그럼 뭐 먹고 싶은데?”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줄줄이 설명했다.“이 병원 나가서 좌회전하고 백 미터 걸어가면 찐빵 가게가 하나 있는데 24시 가게거든요. 나 거기 찐빵 엄청 좋아해요. 대신 가서 사주실래요?”이수호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알았어.”그는 곧장 병실을 나섰다.이수호가 떠난 후 도아영은 야채죽을 맛있게 먹었다.‘꽤 맛있네!’병원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심야인지라 주위가 어두컴컴하고 가로등 불빛만 어렴풋이 비쳤다.그는 도아영의 말대로 병원에서 좌회전해서 백 미터를 걸어갔지만 아무것도 안 보였다.이수호는 마침내 도아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녀가 곧장 전화를 받자 이 남자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찐빵 가게가 대체 어디 있는데?”도아영은 일부러 난감한 척하며 되물었다.“실은 나도 이제 기억이 잘 안 나요. 그냥 휴대폰으로 한번 위치 찾아보시겠어요?”말을 마친 후 그녀는 전화를 꺼버렸다.‘자식, 너 이번엔 제대로 걸려들었어!’이수호는 차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휴대폰을 꺼내 검색해보았지만 근처 1킬로미터 이내에 찐빵 가게라곤 없었다.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가장 가까운 찐빵 가게로 가려고 해도 택시를 타야만 한다.심야 시간대라 택시를 잡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결국 길거리까지 나가서 힘들게 택시를 잡았다.찐방 가게까지 도착하니 20분이나 소요됐다.한편 가게로 들어갔더니 찐빵 소가 무려 일여덟 가지나 되었다. 이수호는 그녀가 어떤 맛을 좋아하는지 전혀 몰랐다.“손님, 뭐로 해드릴까요?”이때 사장님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새벽이라 가게에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이수호는 또다시 그녀에게 전화해서 어떤 맛으로 사 올지 물어보려고 했지만 쉬는 데 방해가 될까 봐 휴대폰을 넣어두었다.“종류마다 두 개씩 포장해주세요.”사장은 의아한 눈길로 그를 쳐다봤다.오밤중에 무슨
이수호는 본인 잘못인 걸 알기에 딱히 반박할 자격이 없었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욕도 시원하게 했겠다. 무슨 보상을 원하는데? 그냥 얘기해.”“역시 통쾌하네요.”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앞으로 우리 집안을 겨냥하지도 말고 나도 더는 건드리지 말아요. 우리 이미 파혼했으니 각자 갈 길 가요. 내가 다친 건 다 대표님 때문이니 치료비는 전적으로 책임지세요.”“그게 다야?”“네.”도아영이 그를 지그시 바라봤다.“뭐 대표님께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일종의 경제적인 보상을 하고 싶다면 저도 마다하진 않을게요. 이런 건 이별 비용이라고 하죠 뭐.”이별 비용이란 단어를 듣는 순간 이수호의 얼굴이 한없이 차가워졌다.그는 왠지 모르게 이 단어가 너무 거슬렸다.“왜요? 돈 아까워요?”“줄게.”이수호가 곧장 대답했다.그녀도 너무 놀란 눈치는 아니었다.이수호에게 차고 넘치는 게 돈이니까 이별 비용으로 몇십억 정도 주는 건 손해라고 할 것도 없었다.“나 때문에 이렇게 됐으니 치료받는 동안 전적으로 책임질게.”“오케이.”도아영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양심은 있네, 그래도.’“내일 안 비서 시켜서 퇴원 수속 할 테니 당분간 우리 집에서 병 치료하는 줄 알아.”순간 그녀의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내가 왜요? 왜 그리로 들어가야 하는 건데요?”“이미 함 원장한테 말해서 해외 최고의 의료진을 모셔오기로 했어. 너 그 손 치료하지 못하면 평생 오른손을 못 쓸 거래. 그러니까 내 말 들어.”“대표님...”“이것도 다 널 끝까지 책임지는 거잖아. 5개월 후에 손이 다 낫거든 무조건 보내줄게. 만약 그때까지도 회복하지 못하면 대신 보상금 줄게. 금액은 네가 정해.”여기까지 들은 도아영은 그제야 마음이 진정됐다. 그녀는 반신반의하며 되물었다.“금액을 내가 정하라고요?”“응.”“얼마든지 다 오케이?”은근슬쩍 신난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이수호는 덜컥 겁이 났다. 보상금이랍시고 한도 제한이 없다면 이 여자는 이
같은 시각 안지원은 다음날 회의에 필요한 자료를 이수호에게 전송했다.이수호가 힘겹게 휴대폰을 꺼내 들고 내일 회의자료를 훑고 있는데 도아영이 갑자기 악몽을 꿨는지 울면서 소리쳤다.“때리지 마. 날 때리지 말라고!”이수호는 곧장 침대 옆으로 다가가 어떻게 위로할지 몰라서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괜찮아, 내가 옆에 있으니까 아무도 너 못 건드려.”그제야 도아영은 조금 진정된 모습이었다.이수호는 안쓰러운 눈길로 그런 그녀를 쳐다봤다.이토록 가녀린 여자애가 오늘 같은 끔찍한 일을 겪었으니 충격이 얼마나 컸을까?그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려고 할 때 도아영이 갑자기 두 팔을 번쩍 들었다.이를 본 이수호도 화들짝 놀랐다.이어서 도아영은 매우 또박또박하게 쏘아붙였다.“X발, 감히 날 때려? 넌 오늘 뒈졌어!”“...”“이수호 이 개자식!”“...”“널 목 졸라 죽일 거야!”“...”“죽어, 이수호!”“...”이수호는 휴대폰으로 내일 회의자료를 확인하려다가 어느덧 저도 몰래 네이버 검색창에 전신마취가 덜 풀렸을 때 왜 잠꼬대를 하는지에 대해 검색하고 있었다.한편 도아영의 욕설은 점점 더 험악해졌다.이수호는 회의자료를 볼 기분이 아닌지라 모두 내려놓았다.‘얘 분명 의도적이야. 틀림없어.’야간 당직을 서는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좀전의 일로 이수호에게 사과하려고 들어왔는데 이 남자가 눈길 한번 안 주고 차갑게 쏘아붙였다.“나가.”“대표님, 이건 방금 안 비서가 보내온 음식입니다.”간호사는 음식을 이수호의 옆에 있는 책상에 올려놓았다.“얘 아까까지 계속 잠꼬대했는데 전신마취 때문이야?”간호사는 당황해서 어쩔 바를 몰랐다.“전신마취요?”“왜? 아니야?”“이 환자분은 큰 수술이 아니어서 부분 마취만 했는데요?”“...”이수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그는 침대에 누운 도아영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이때 도아영이 기지개를 켜고 비스듬히 눈을 떴다.“어머?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