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서지현은...”가연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서지현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보아하니 서지현은 나석진이 진심으로 마음을 주고 있는 사람인 듯하다. 또한 송혁준이 나석진을 총애하는 정도와 계급이나 출신 관념이 별로 없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그는 아마 두 사람의 결혼을 흔쾌히 허락할 것이다.망둥이처럼 날뛰는 송시아가 나씨 가문의 심기를 거스르게 하는 것보단, 서지현을 이용해 나씨 가문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더 바람직할 수도 있다.어찌 됐든 그녀의 최종 목표는 송이수가 천하를 지키게 하는 것이니 말이다.그녀는 송이수를 사랑한다. 그에게 득이 되는 일이라면 어떤 대가를 치르든 감수할 수 있다. 윤씨 가문이든, 나씨 가문이든 손을 잡고 협력하기만 한다면, 송이수의 든든한 오른팔과 왼팔이 될 것이다.반면 누군가 송이수의 앞길을 막는다면, 그녀는 무슨 수단을 동원하든 깡그리 치워버리고 말 것이다!“숙모님...”송지아가 조심스레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서지현을 어떻게 할 생각이세요?”가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다음에 다시 얘기해!”“송지아.”편전을 나서기 전 가연은 특별히 당부했다.“더는 사고 치지 않고 얌전히 조용하게 엎드려 있는 게 좋을 거야. 그럼 내가 널 밀어줄지도 몰라.”송지아는 화들짝 놀랐다.“숙모님?”“난 송혁준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아.”가연이 한숨을 내쉬었다.“황실 전통과 법도는 송혁준 같은 군왕을 용납할 수 없어. 차라리 평생 친왕의 자리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유유자적 보내는 것이 송혁준에게도 더 좋을 거야.”그 말을 들은 송지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아직 좋아하긴 일러.”가연이 차갑게 그녀를 노려보았다.“다시 한번 네 큰아버지의 자리를 위협하는 일을 저지른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말을 마친 그녀는 편전을 떠났다.가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송지아의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전하, 괜찮으세요?”시녀가 걸어와 송지아의 낯빛을 살피며 물었다.“황후 마
순간 윤정재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미소만 지어 보였다.송혁준이 다시 돌아와 얼어붙은 분위기를 풀었다.“윤 회장님 댁에 아주 귀한 꽃이 있다고 들었는데, 기회가 된다면 혹시 감상할 수 있을까요?”“물론입니다!”윤정재는 곧바로 대답했다.“전하, 이쪽으로 오시지요.”송혁준은 윤정재와 함께 웃음꽃을 피우며 꽃을 구경했다. 그로 인해 뒤에 혼자 버려진 송지아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전하, 저 사람들에게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옆에 있던 시녀가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위로했다.“응. 신경 쓰고 싶지 않아.”송지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난 미래의 군왕이야. 언젠가 분명 날 이렇게 무시한 걸 후회하는 날이 올 거야!”“네. 그날이 곧 올 겁니다.”시녀가 몰래 그녀에게 창문 쪽을 보라고 눈짓했다.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그곳에 가까이 다가가 보니 호숫가에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서지현과 나석진이었다.윤씨 저택 정원은 마치 숲속과도 같았다. 잔잔한 물보라가 일렁이는 호수, 무성하게 자란 오동나무, 은은한 꽃향기가 배어든 시원한 공기까지...몸과 마음을 행복하게 만드는 훌륭한 경치였지만, 송시아에게는 심장을 찌르는 날카로운 비수와도 같았다.서지현이 개구리 한 마리를 잡고 들어 올리자 결벽증으로 유명한 나석진은 뜻밖에도 개구리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그 모습에 서지현은 깔깔 웃어댔다.“전하...”시녀가 조심스레 그녀의 얼굴색을 살폈다.“제가 가서 석진 도련님을 모셔 올까요?”“됐어!”송지아가 이를 부득부득 갈며 말했다.“저런 비천한 여자가 좋다면 같이 엉겨 붙으라지 뭐!”“전하, 고작 저런 저급한 여자 때문에 도련님을 놓치면 안 됩니다. 저 여자를 제거할 방법은 많습니다!”송지아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다시 두 사람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너무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눈알까지 튀어나올 뻔했다. 서지현의 머리끈이 떨어지는 바람에 예쁜 긴 머리가 스르륵
최연준은 얼굴을 감싸 쥐고 한숨을 내쉬었다.아들이 태어나기 전 나날들은 정말 행복하고 아름다웠었다... 그때 강서연은 물처럼 부드러웠고, 토끼처럼 온순했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 기대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세상에서 자신에게 가장 큰 안정감을 느끼게 해주는 곳이 바로 그의 넓은 가슴이라고 하면서 말이다...하지만 지금은?아들이 그녀의 몸, 그녀의 마음, 그녀의 세계까지 송두리째 빼앗아 갔다.최연준은 이 모든 것을 바꿀 방법을 찾고 싶었다.그중 하나가 바로 모유 수유를 끝내는 것이었다.군형이가 태어난 지 6개월에 접어들었을 때, 강서연은 모유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고 그 질도 좋지 않았다. 또한 아이의 입안에 이가 자라나 가끔 꽉 깨물 때면 강서연은 통증에 정신이 아찔해 났다.그때마다 최연준은 식은땀에 흠뻑 젖어있음에도 아이가 깰까 봐 입술을 꽉 깨물고 소리조차 내지 않는 강서연의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곤 했다.하지만 그대로 가만히 놔둘 최연준이 아니었다.그는 옆에 있는 방울을 집어 들고 아들의 주의력을 끌었다. 역시나 군형이가 입을 열고 큰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최연준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이놈은 정말 배가 고픈 것이 아니라 이가 자라나 씹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뭐 하는 거예요?”강서연이 눈을 부릅떴다.남자는 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큰손으로 아이를 안아 재빨리 도우미에게 건네고는 분부했다.“데리고 나가서 우유를 먹이세요.”도우미와 유모가 아이를 데리고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강서연은 옷도 미처 정리하지 못한 채 급히 따라 나가려 했다.하지만 최연준이 그녀를 막아 세우고 품 안에 꼭 끌어안았다.“이거 놔요!”강서연은 때리고 발길질하면서 벗어나려 했다.“군형이가 아직 못 먹었단 말이에요.”“유모도 있고 우유도 있으니 배고프진 않을 거야.”최연준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이제 더는 모유 먹이지 마!”“뭐라고요?”“군형이한테 물린 것 좀 봐!”강서연은 난처한 얼굴로 옷을 내렸다.하지만 그 두 곳이 옷과 접촉하니
송혁준은 최연준 강서연 부부, 그리고 두 사람의 아이도 함께 황궁에 초대했다. 또한 남양 최고의 사진작가를 찾아 그들의 가족사진을 찍어주었다.군형이는 아기 보행기를 타고 뒤뚱뒤뚱 걸어 다니고 있었다. 황궁 어화원에 흥미를 느꼈는지 통통한 작은 손으로 풀을 휘젓고, 잔뜩 흥분한 채 아야아야 옹알이를 하며 나비와 새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최연준은 단번에 그를 들어 어깨 위에 올렸다. 아들은 또다시 겁에 질려 연신 소리를 질렀다.강서연은 불안한 마음에 몇 번이나 최연준을 제지하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송혁준이 그녀를 막아섰다.“걱정하지 마세요. 연준 씨는 절대 아들을 다치게 하지 않을 거예요.”송혁준이 웃으며 말했다.강서연도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터뜨렸다. 실은 송혁준은 황궁 안 경호원과 시녀들에게 한순간도 놓치지 말고 따라다니라고 일러두었다. 만에 하나 최연준이 손이 미끄러져 아이를 떨어뜨린다고 해도 그들은 틀림없이 아이를 받아 안을 것이다.강서연이 고마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전하께선 정말 다정하고 세심하시네요.”“난 그저 아이가 웃는 걸 보는 게 좋을 뿐이에요.”송혁준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저 부자를 보세요. 얼마나 즐거워 보여요.”“송혁준...”강서연은 연준 씨를 좋아하냐고 물으려다가 잠시 고민하고는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그걸 물어 무엇하겠는가.송혁준은 이미 그걸 비밀에 부치기로 마음먹었으니, 그의 생각을 존중해 주면 된다.“왜요?”송혁준이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강서연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전하께선 정말 좋은 사람 같아서요. 전하 같은 분이 국왕이 되신다면 남양 국민들은 분명 행복할 거예요.”“하하. 저 역시 국왕이 되고 싶어요.”송혁준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남양 국민들은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면 절 남양에서 내쫓을지도 몰라요.”“그들이 과연 자신들을 진심으로 위하는 사람을 내쫓으려 할까요?”강서연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전하, 사람들은 전하가 생각하는
나석진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송지아를 발견하고는 이마를 찌푸린 채 서지현의 어깨를 감싸 안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난감함에 고민에 잠겼다. 여친왕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지만, 나씨 가문도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다.때문에 그들은 간단히 예만 표하고 핑계를 대어 자리를 떴다.송지아는 사람들이 자신을 외면하는 이 광경을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누나.”그때 송혁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송혁준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황실 핏줄이라는 신분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송혁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람들은 바보가 아니야. 누나가 어느 정도의 사람인지 다들 짐작하고 있어.”“뭐라고?”송지아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나 이제 이런 파티에도 참석하지 못하는 거야? 여긴 궁이고, 내 집이기도 해. 주인의 동의도 없이 파티를 연 이 상황이 말이 된다고 생각해?”“누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이 황궁이 언제부터 누나 집이었어? 여긴 큰아버지의 집이야. 우리 두 남매는 얹혀사는 것뿐이고!”“너...”“그리고 이 파티는 큰아버지에게 허락받고 연 거야.”“송혁준!”송지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넌 왜 그렇게 나랑 맞서지 못해서 안달이야?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한테는 그렇게 잘해주면서 친누나인 나한테는 왜 이렇게 못되게 구는 건데!”“누나, 난 그냥 누나가 이곳에서 비웃음을 당하는 걸 원치 않는 거야.”송혁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누난 매일같이 황실 체면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잖아. 그러니까 제발 황실 체면을 깎아내리는 일은 하지 마!”말을 마친 송혁준은 차갑게 그녀를 노려보고는 매정하게 돌아섰다.송지아는 손톱이 살을 파고들도록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분노에 씩씩거리는 그녀의 얼굴에 악독함이 어렸다.그때 마침 도우미들이 목탄을 들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송지아는 아무도 모르게 발을 쑥 뻗었다. 그 바람에 도우미는 바닥
시녀는 그녀가 또 서지현 때문에 화났음을 눈치챘다.“전하.”시녀가 그런 그녀를 달래주려고 이렇게 말했다.“새로 들어온 정보가 있습니다...”송지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뭔데?”“뒷조사하러 간 사람이 그러는데 서지현은 맨체스터 시티 판자촌에서 자라나 종일 집시들과 어울렸다고 합니다. 부모님은 밀항객에 아버지는 마약, 어머니는 몸 파는 여자라 어릴 적부터 버려진 거나 다름없다고 했습니다.”“그럼 우리 고모와도 아무 관계 없겠네.”송지아는 그제야 길게 숨을 내쉬며 자기가 생각이 많아진 거라고 생각했다.“전하, 당연한 말씀입니다.”시녀가 웃으며 말했다.“그 비천한 출신으로 남양에 상경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큰 복이지요. 전하, 오늘 무슨 일 있었습니까? 혹시 석진 도련님과 싸우셨는지요?”송지아는 울화가 치밀어올라 등을 돌렸다.차라리 싸웠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석진이 얼마나 다쳤는지도 모르는데 이 상황을 어떻게 넘겨야 할지 모르겠다.저번에 가연 왕후가 이미 그녀에게 나씨 집안과 윤씨 집안과 대적하지 말라고 했건만 지금 이렇게 상황이 꼬인 것이다.송지아는 눈을 질끈 감더니 다시 번쩍 떴다.“흥, 내가 무서워할게 뭐람?”그녀는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아저씨가 이런 비천한 여자랑 돌아다니는 걸 알면 나씨 집안도 쪽팔릴 거야. 오늘 내가 서지현 씨한테 손댄 건 혼 좀 내줘서 나씨 집안 체면을 살려주려고 한 것뿐이라고.”가연 왕후가 물으면 이렇게 답할 생각이었다.칼날을 서지현에게 돌리면 가연 왕후도 나석진이 다친 걸 추궁하지는 않을 것이다.이렇게 생각한 송지아는 기분이 좋아졌다. 좋은 아이디어가 생기자 몸도 마음도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됐어. 나도 이만 쉴래. 나가봐.”“전하, 말씀드릴 게 하나 더 있습니다...”“뭔데?”“어제 윤 회장님을 봤습니다.”시녀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서궁 쪽으로 가는 걸 봤습니다. 혁준 전하께서 정말 윤 회장님께 임월 공주님의 치료를 부탁하셨나 봅니다.”“그런 일이 있었어?”송지아가 미간을
“...”최연준은 말문이 막혔다.만약 강서연이 아이를 낳지 않기로 마음 먹으면, 이제 뜨겁고 엉큼한 짓은 못하게 된다.아이를 낳는 건 둘째 치고 뜨겁고 엉큼한 짓을 못 하는 건 큰일이다.요즘 일진이 좋지 않은지 말을 잘못하지 않으면 곧 말을 잘못할 예정이었다.최연준은 얼른 강서연의 팔을 끌어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여보, 나는 그 뜻이 아니라, 내 말은... 그러니까 전에 당신한테도 얘기하지 않았나? 당신을 딸처럼 아껴주겠다고?”강서연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만해요.”“진짜야.”최연준도 웃으며 말했다.“이번 생에 내 ‘딸’은 너 하나야...”“네 이놈!”최연준은 갑자기 들려오는 윤정재의 목소리에 심장이 떨렸다.윤정재는 어느샌가 편전으로 들어와 있었다. 최연준은 고개를 들자마자 부릅뜬 윤정재의 두 눈을 맞닥트렸다.“무슨 헛소리야?”“...”“지금 감히 내 머리 위로 기어올라?”윤정재는 은침으로 소독을 하던 차에 은침을 하나 더 꺼내 최연준을 찌르려고 했다.강서연이 얼른 최연준을 막아서며 말을 돌렸다.“아빠, 아빠가 약 가져다 달라고 시켜서 온 거잖아요. 확인해 보세요. 이거 맞아요?”윤정재는 그제야 동작을 멈추고 그들이 가져온 한약을 유심히 살펴봤다.그는 한약을 살피면서 오버스럽게 냄새를 킁킁 맡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하게 웃었다.“그래, 이거 맞아... 음, 그래 이것도 맞고.”강서연은 윤정재가 도대체 뭐 하자는 건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최연준은 멈칫하더니 주변을 둘러봤다.생기를 잃은 듯 창백한 여자가 내전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바로 송임월이었다.강서연과 최연준이 오기 전에 윤정재는 이미 송임월의 주요 혈 자리에 침을 놓았기에 그녀는 이렇게 깊이 잠들 수 있었다.송임월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은...최연준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 시녀들은 아마 송임월을 보살피러 온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좋은 마음’으로 일부러 송임월 옆에 심어놓은 사람일 수도 있다.지
윤정재는 실눈을 뜨고 씩씩거리며 최연준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고 은침함을 만지작거렸다.이때 멀지 않은 곳에서 달콤하지만 어딘가 어색한 발음이 들려왔다.“하라부지.”윤정재가 멈칫했다.최군형이 비틀거리며 윤정재를 향해 달려왔다. 멀리서 보면 정말 하얗고 동그란 것이 찹쌀떡 같았고 동그란 눈은 사람을 사르르 녹게 했다.햇빛 아래 어린아이의 미소는 유난히 빛났다. 마치 하느님이 그를 만들 때 모든 아름다움을 그의 보조개에 때려 넣은 것처럼 말이다.강서연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지으며 얼른 고쳐주었다.“내 새끼, 할아버지야, 하라부지가 아니라.”윤정재는 마음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든 하라부지든 막론하고 손주의 목소리는 천사의 속삭임 같았다.윤정재는 얼굴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환하게 웃으며 두 팔을 벌리고 큰 소리로 불렀다.“아이고! 하라부지 여기 있다. 하라부지가 우리 손주 만나러 왔어.”강서연과 최연준이 서로 마주 보며 겨우 웃음을 참아냈다.찹쌀떡과도 같은 최군형은 그대로 윤정재의 품에 쏙 안겼고 윤정재는 최군형을 번쩍 들어 올리더니 조심스럽게 그를 꼭 끌어안았다. 뽀뽀하고 싶었지만 꺼칠꺼칠한 수염이 그를 찌를까 봐 짓궂은 표정을 지었고 이에 최군형이 깔깔 웃어댔다.최연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최군형은 하늘이 보낸 구세주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윤정재는 최군형을 보자 최연준이 개코라고 한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손주랑 놀아주기 시작했다.평소에 다가가기 힘들다고 소문난 윤정재는 늘 엄숙하고 거리감이 느껴졌고 그와 대화하려면 숨을 꾹 참고 얘기해야 할 것 같았다.하지만 최군형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윤정재의 수염을 당기고 눈썹을 뽑고 머리채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아이는 힘 조절이라는 걸 몰랐기에 윤정재는 아파서 표정이 일그러졌고 보다 못한 강서연이 최군형의 포동포동한 손을 찰싹 내리쳤다.“이거 놔!”“뭐 하는 거야?”윤정재는 바로 눈을 부릅뜨며 최군형을 품속에 숨겼다.“아빠, 어릴 때부터 좋은 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