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하!”가연 왕후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그를 쳐다보며 그의 손을 꽉 잡았다.그녀는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전엔 호위대 몇 명만 남아있었고 두 명의 시중도 믿을만한 이들이었다.그녀는 사람들을 모두 물렸고, 그렇게 그곳엔 가연과 송이수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가연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임월에게 죄책감을 갖고 있으시다는 거 압니다. 하지만 물은 이미 엎질러졌고, 우리에게 다른 선택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서쪽 궁전에서 최고의 약을 들여 치료받게 한 것만으로도 저흰 최선을 다한 겁니다.”“그리고, 당시의 상황에서... 임월은 황위에 앉지 못했을 겁니다.”송이수의 머릿속에 어렴풋한 옛 기억이 떠올랐다.황실 남매 중에서 그는 송임월과 가장 가까웠다. 어렸을 적 임월은 아주 총명하고, 예뻤고, 능력도 출중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선 고귀하고 우아한 공주님이었지만 오빠 앞에선 애교스럽고 장난기 많은 여자아이였다.황궁 밖엔 바닷가가 있었는데, 그곳은 송이수와 송임월의 비밀 아지트였다.두 남매는 매일 학교를 마치고 나면 늘 이곳에 모여 신발을 벗고 맨발로 파도를 느꼈다. 갈매기가 자유롭게 날갯짓하는 아름다운 석양 아래엔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흘러넘쳤다. 힘들 때면 그녀는 송이수의 등에 뛰어 올라가 업어달라고 조르곤 했다.“임월아, 앞으로 나처럼 널 업어줄 수 있는 남자친구를 찾아야 해. 알았지?”“네... 하지만 못 찾으면요?”“그럴 리가 없어. 모든 면에서 훌륭할뿐더러 남양의 재물 모두를 가진 너를 어떤 남자가 좋아하지 않겠어?”“오빠, 만약 찾지 못한다면 오빠가 평생 궁궐에서 저와 함께 살며 업어주면 안 돼요?”송이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당시의 농담이 이런 식으로 반쪽짜리 현실이 될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임월은 정말 평생 궁에 남게 되었고, 평생 업어주겠다고 약속했던 오빠는 그 후로 다시는 그녀를 따뜻하게 업어주지 못했다...“폐하? 폐하!”멍하니 서 있는 그의 모습을 본 가연은 걱정스러운 마
“그때 난 황위에 눈이 멀어 그릇된 선택을 했소. 더는 이대로 잘못된 길을 걸을 수 없소.”송이수가 고개를 들고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어떤 대가를 치르든 반드시 윤정재에게 임월의 병을 치료해 내게 하겠소!”“또한 반드시 그 아이를 찾아내 두 모녀를 만나게 할 것이오.”...결혼식에서의 소동이 끝난 뒤, 강서연은 다친 서지현을 집으로 데려갔다.서지현은 그저 작은 상처일 뿐이라는 생각에 못내 미안해했다. 반면 강서연이 보기에 만약 서지현이 나서지 않았다면 그 포크는 틀림없이 자신의 아이에게 향했을 것이다.그 때문에 서지현은 그들 모자의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었다.“당분간 이곳에서 푹 쉬어.”강서연이 말했다.“너 대학 갈 준비한다면서? 여긴 넓고, 조용하고, 책도 많으니까 편안하게 공부할 수 있을 거야.”“양복점에 계속 출근하고 싶다면 운전기사가 매일 출퇴근 시켜줄 거야. 하지만 일하고 싶지 않고, 또 이곳에서 공짜로 먹고 자는 게 미안하다면...”강서연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그럼 날 도와 정원을 가꿔줘. 우리 군형이한테 옷도 만들어주고. 괜찮아?”“안 괜찮아!”그때 문 쪽에서 돌연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나석진이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걸어들어왔다.역광을 받으며 등장하는 그 모습은 마치 신화 이야기 속 신 같았다.“왜 안 괜찮다는 거예요?”강서연이 눈을 흘겼다.“그럼 지현이를 오빠 집에서 머무르게 하려고요?”나석진이 눈동자를 반짝이며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그거 좋은 생각이네!”“오빠...”“전 어디도 안 갈 거예요.”서지현이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요즘 며칠 동안 자신을 위해 정신없이 돌아치는 나석진을 보며 그녀는 감동했었다.하지만 그날 대황궁에서 주아에게 추파를 던지던 그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질투의 감정에 사로잡혔다.하여 더는 그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어디도 안 가겠다고?”나석진이 이마를 찌푸렸다.“그럼 뭘 하고 싶은데? 계속 그 낡아빠진 양복점에서 지낼 거야?”“낡아빠진 양복
“지현이가 말을 안 하면 오빠가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야죠.”강서연은 그들 두 사람보다 더 조급해하고 있었다.“지금보다 어떻게 더 다가가야 하는데?”나석진이 이마를 찌푸리고는 또다시 아래턱을 치켜들고 평소의 오만한 모습으로 말했다.“난 이미 고백까지 했어. 하지만 고백하고 있을 때 지현이가 뭘 했는지 알아? 청개구리와 놀고 있더라고! 난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하지 않아. 아니면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것 같아!”“...”“괜찮아. 천천히 지현이와 맞춰 가면 돼.”나석진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마지막에 누가 이기는지 보자고!”강서연은 곧바로 얼굴을 감싸 쥐고 도망쳤다.저 두 사람은 정말이지 똑같이 호락호락하지 않다.“어이, 동생, 어디 가는 거야? 내 계획을 아직 말하지 못했단 말이야!”“듣지 않을래요. 듣지 않을래요.”강서연은 결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군형이가 절 찾아요.”“하나만 더!”나석진이 뒤에서 소리쳤다.“서지현이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잖아. 검사 결과 어땠어?”...송지아는 시간 맞춰 편전에 도착했고, 가연은 이미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마음은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얼굴엔 내비치지 않았다.“숙모님...”송지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가연이 힘껏 그녀의 따귀를 때렸다.송지아는 퉁퉁 부어오른 얼굴을 부여잡고 휘둥그레진 눈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 가연을 바라보았다.그때의 가연은 평소 자애로웠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채 분노에 씩씩거리며 송지아를 노려보고 있었다.“너 재밌는 일을 했더구나!”“숙모님, 전...”“대체 왜 송임월을 풀어준 거야?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잖아. 네 큰아버지를 망가뜨리고 싶어서 그래?”송지아는 최선을 다해 변명했다.“숙모님, 제가 한 게 아니에요.”“너 정말 큰아버지와 날 바보 멍청이라고 생각하는 거야?”가연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송지아, 어렸을 때 어머니를 여읜 너를 가엾이 여겨 황궁에서 자라게 한 건 나와 네 큰아버지야. 네가 어떤 성
“그리고 서지현은...”가연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서지현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보아하니 서지현은 나석진이 진심으로 마음을 주고 있는 사람인 듯하다. 또한 송혁준이 나석진을 총애하는 정도와 계급이나 출신 관념이 별로 없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그는 아마 두 사람의 결혼을 흔쾌히 허락할 것이다.망둥이처럼 날뛰는 송시아가 나씨 가문의 심기를 거스르게 하는 것보단, 서지현을 이용해 나씨 가문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더 바람직할 수도 있다.어찌 됐든 그녀의 최종 목표는 송이수가 천하를 지키게 하는 것이니 말이다.그녀는 송이수를 사랑한다. 그에게 득이 되는 일이라면 어떤 대가를 치르든 감수할 수 있다. 윤씨 가문이든, 나씨 가문이든 손을 잡고 협력하기만 한다면, 송이수의 든든한 오른팔과 왼팔이 될 것이다.반면 누군가 송이수의 앞길을 막는다면, 그녀는 무슨 수단을 동원하든 깡그리 치워버리고 말 것이다!“숙모님...”송지아가 조심스레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서지현을 어떻게 할 생각이세요?”가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다음에 다시 얘기해!”“송지아.”편전을 나서기 전 가연은 특별히 당부했다.“더는 사고 치지 않고 얌전히 조용하게 엎드려 있는 게 좋을 거야. 그럼 내가 널 밀어줄지도 몰라.”송지아는 화들짝 놀랐다.“숙모님?”“난 송혁준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아.”가연이 한숨을 내쉬었다.“황실 전통과 법도는 송혁준 같은 군왕을 용납할 수 없어. 차라리 평생 친왕의 자리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유유자적 보내는 것이 송혁준에게도 더 좋을 거야.”그 말을 들은 송지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아직 좋아하긴 일러.”가연이 차갑게 그녀를 노려보았다.“다시 한번 네 큰아버지의 자리를 위협하는 일을 저지른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말을 마친 그녀는 편전을 떠났다.가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송지아의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전하, 괜찮으세요?”시녀가 걸어와 송지아의 낯빛을 살피며 물었다.“황후 마
순간 윤정재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미소만 지어 보였다.송혁준이 다시 돌아와 얼어붙은 분위기를 풀었다.“윤 회장님 댁에 아주 귀한 꽃이 있다고 들었는데, 기회가 된다면 혹시 감상할 수 있을까요?”“물론입니다!”윤정재는 곧바로 대답했다.“전하, 이쪽으로 오시지요.”송혁준은 윤정재와 함께 웃음꽃을 피우며 꽃을 구경했다. 그로 인해 뒤에 혼자 버려진 송지아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전하, 저 사람들에게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옆에 있던 시녀가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위로했다.“응. 신경 쓰고 싶지 않아.”송지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난 미래의 군왕이야. 언젠가 분명 날 이렇게 무시한 걸 후회하는 날이 올 거야!”“네. 그날이 곧 올 겁니다.”시녀가 몰래 그녀에게 창문 쪽을 보라고 눈짓했다.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그곳에 가까이 다가가 보니 호숫가에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서지현과 나석진이었다.윤씨 저택 정원은 마치 숲속과도 같았다. 잔잔한 물보라가 일렁이는 호수, 무성하게 자란 오동나무, 은은한 꽃향기가 배어든 시원한 공기까지...몸과 마음을 행복하게 만드는 훌륭한 경치였지만, 송시아에게는 심장을 찌르는 날카로운 비수와도 같았다.서지현이 개구리 한 마리를 잡고 들어 올리자 결벽증으로 유명한 나석진은 뜻밖에도 개구리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그 모습에 서지현은 깔깔 웃어댔다.“전하...”시녀가 조심스레 그녀의 얼굴색을 살폈다.“제가 가서 석진 도련님을 모셔 올까요?”“됐어!”송지아가 이를 부득부득 갈며 말했다.“저런 비천한 여자가 좋다면 같이 엉겨 붙으라지 뭐!”“전하, 고작 저런 저급한 여자 때문에 도련님을 놓치면 안 됩니다. 저 여자를 제거할 방법은 많습니다!”송지아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다시 두 사람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너무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눈알까지 튀어나올 뻔했다. 서지현의 머리끈이 떨어지는 바람에 예쁜 긴 머리가 스르륵
최연준은 얼굴을 감싸 쥐고 한숨을 내쉬었다.아들이 태어나기 전 나날들은 정말 행복하고 아름다웠었다... 그때 강서연은 물처럼 부드러웠고, 토끼처럼 온순했다. 그녀는 그의 가슴에 기대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세상에서 자신에게 가장 큰 안정감을 느끼게 해주는 곳이 바로 그의 넓은 가슴이라고 하면서 말이다...하지만 지금은?아들이 그녀의 몸, 그녀의 마음, 그녀의 세계까지 송두리째 빼앗아 갔다.최연준은 이 모든 것을 바꿀 방법을 찾고 싶었다.그중 하나가 바로 모유 수유를 끝내는 것이었다.군형이가 태어난 지 6개월에 접어들었을 때, 강서연은 모유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고 그 질도 좋지 않았다. 또한 아이의 입안에 이가 자라나 가끔 꽉 깨물 때면 강서연은 통증에 정신이 아찔해 났다.그때마다 최연준은 식은땀에 흠뻑 젖어있음에도 아이가 깰까 봐 입술을 꽉 깨물고 소리조차 내지 않는 강서연의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곤 했다.하지만 그대로 가만히 놔둘 최연준이 아니었다.그는 옆에 있는 방울을 집어 들고 아들의 주의력을 끌었다. 역시나 군형이가 입을 열고 큰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최연준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이놈은 정말 배가 고픈 것이 아니라 이가 자라나 씹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뭐 하는 거예요?”강서연이 눈을 부릅떴다.남자는 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큰손으로 아이를 안아 재빨리 도우미에게 건네고는 분부했다.“데리고 나가서 우유를 먹이세요.”도우미와 유모가 아이를 데리고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강서연은 옷도 미처 정리하지 못한 채 급히 따라 나가려 했다.하지만 최연준이 그녀를 막아 세우고 품 안에 꼭 끌어안았다.“이거 놔요!”강서연은 때리고 발길질하면서 벗어나려 했다.“군형이가 아직 못 먹었단 말이에요.”“유모도 있고 우유도 있으니 배고프진 않을 거야.”최연준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이제 더는 모유 먹이지 마!”“뭐라고요?”“군형이한테 물린 것 좀 봐!”강서연은 난처한 얼굴로 옷을 내렸다.하지만 그 두 곳이 옷과 접촉하니
송혁준은 최연준 강서연 부부, 그리고 두 사람의 아이도 함께 황궁에 초대했다. 또한 남양 최고의 사진작가를 찾아 그들의 가족사진을 찍어주었다.군형이는 아기 보행기를 타고 뒤뚱뒤뚱 걸어 다니고 있었다. 황궁 어화원에 흥미를 느꼈는지 통통한 작은 손으로 풀을 휘젓고, 잔뜩 흥분한 채 아야아야 옹알이를 하며 나비와 새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최연준은 단번에 그를 들어 어깨 위에 올렸다. 아들은 또다시 겁에 질려 연신 소리를 질렀다.강서연은 불안한 마음에 몇 번이나 최연준을 제지하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송혁준이 그녀를 막아섰다.“걱정하지 마세요. 연준 씨는 절대 아들을 다치게 하지 않을 거예요.”송혁준이 웃으며 말했다.강서연도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터뜨렸다. 실은 송혁준은 황궁 안 경호원과 시녀들에게 한순간도 놓치지 말고 따라다니라고 일러두었다. 만에 하나 최연준이 손이 미끄러져 아이를 떨어뜨린다고 해도 그들은 틀림없이 아이를 받아 안을 것이다.강서연이 고마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전하께선 정말 다정하고 세심하시네요.”“난 그저 아이가 웃는 걸 보는 게 좋을 뿐이에요.”송혁준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저 부자를 보세요. 얼마나 즐거워 보여요.”“송혁준...”강서연은 연준 씨를 좋아하냐고 물으려다가 잠시 고민하고는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그걸 물어 무엇하겠는가.송혁준은 이미 그걸 비밀에 부치기로 마음먹었으니, 그의 생각을 존중해 주면 된다.“왜요?”송혁준이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강서연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전하께선 정말 좋은 사람 같아서요. 전하 같은 분이 국왕이 되신다면 남양 국민들은 분명 행복할 거예요.”“하하. 저 역시 국왕이 되고 싶어요.”송혁준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남양 국민들은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면 절 남양에서 내쫓을지도 몰라요.”“그들이 과연 자신들을 진심으로 위하는 사람을 내쫓으려 할까요?”강서연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전하, 사람들은 전하가 생각하는
나석진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송지아를 발견하고는 이마를 찌푸린 채 서지현의 어깨를 감싸 안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난감함에 고민에 잠겼다. 여친왕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지만, 나씨 가문도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다.때문에 그들은 간단히 예만 표하고 핑계를 대어 자리를 떴다.송지아는 사람들이 자신을 외면하는 이 광경을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누나.”그때 송혁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송혁준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황실 핏줄이라는 신분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송혁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람들은 바보가 아니야. 누나가 어느 정도의 사람인지 다들 짐작하고 있어.”“뭐라고?”송지아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나 이제 이런 파티에도 참석하지 못하는 거야? 여긴 궁이고, 내 집이기도 해. 주인의 동의도 없이 파티를 연 이 상황이 말이 된다고 생각해?”“누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이 황궁이 언제부터 누나 집이었어? 여긴 큰아버지의 집이야. 우리 두 남매는 얹혀사는 것뿐이고!”“너...”“그리고 이 파티는 큰아버지에게 허락받고 연 거야.”“송혁준!”송지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넌 왜 그렇게 나랑 맞서지 못해서 안달이야?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한테는 그렇게 잘해주면서 친누나인 나한테는 왜 이렇게 못되게 구는 건데!”“누나, 난 그냥 누나가 이곳에서 비웃음을 당하는 걸 원치 않는 거야.”송혁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누난 매일같이 황실 체면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잖아. 그러니까 제발 황실 체면을 깎아내리는 일은 하지 마!”말을 마친 송혁준은 차갑게 그녀를 노려보고는 매정하게 돌아섰다.송지아는 손톱이 살을 파고들도록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분노에 씩씩거리는 그녀의 얼굴에 악독함이 어렸다.그때 마침 도우미들이 목탄을 들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송지아는 아무도 모르게 발을 쑥 뻗었다. 그 바람에 도우미는 바닥
“어떻게 소피아라는 걸 확신하죠?”배윤아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부모님이 회사의 핵심 자료를 제게 모두 맡기셨어요. 그런데 그걸 받은 지 이틀 만에 공격을 당했죠. 이게 단순한 우연일까요?”임지강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그 자료들은 어디 있어요?”“아마 소피아가 가지고 있을 거예요. 그 자료들은 너무 중요해서 항상 제 곁에 두고 다녔거든요. 하지만 그날 제가 기절하고 다시 깨어났을 때, 가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다만...”“다만 뭐요?”“법인 도장은 가방 안에 없었어요.”배윤아는 미소를 지으며 약간 능글맞은 표정을 지었다.“법인 도장은 본사가 모든 자원을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이에요. 엄마가 제게 주자마자 저는 바로 군성이에게 맡겼어요. 지금 법인 도장은 최씨 가문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어요.”“그렇다면 소피아가 자료를 손에 넣더라도 아무 쓸모가 없겠군요?”배윤아는 확신에 차서 고개를 끄덕였다.“똑똑하네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었다.“배씨 가문 사람들도 다 무능하진 않나 보네요.”“임 선생님...”배윤아는 고개를 약간 숙이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오빠가 송윤지에게 잘못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는 임 선생님이 우리 가문에 복수하려고 저를 납치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아요. 선생님은 그런 수준 낮은 사람이 아니니까요.”임지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확실히 똑똑한 사람이네요.”그러나 배윤아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그런데... 정말 우리 오빠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요?”임지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임지강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가족들에게 안부 전화라도 주세요. 걱정을 많이 하고 계실 거예요.”“이미 군성이에게 연락을 했어요.”배윤아가 말했다.“군성이에게 조용히 아빠에게 알려 드리라고 했어요. 엄마는 충격을 받으시면 안 되니까요... 하지만 제 상황을 오빠에겐 비밀로 해야 해요. 오빠와 소피아는 제가 조 회장님에게 잡혀 있고 선생님이 일부러 복수를 위해 조 회장님을
“설마...”“소피아!”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이름을 입에 올린 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정말 소피아일 줄이야.”임지강이 담배를 꺼내 들었다. 조 회장이 눈짓을 하자 부하가 공손히 불을 붙였다.방 안은 금세 니코틴 냄새로 가득 찼고 임지강은 잠시 침묵하며 담배 재를 털어냈다.“아마... 조 회장님도 지금 저와 같은 처지겠죠.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했다는 누명을 쓰게 됐으니 말이에요.”“그러게 말이야.”조 회장은 차갑게 웃었다.“겉으로는 온갖 아부를 떨면서도 뒤에서는 이런 음모를 꾸미고 내가 배윤아를 납치했다고 소문까지 퍼뜨리고 있더군.”“회장님과 제가 가까운 사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의심의 화살을 제게도 돌리겠죠.”임지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면, 연루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겁니다. 저 때문에 저의 매형까지 연루되면, 배씨 가문과 육씨 가문의 사이도 틀어질 거고요.”“그 여자는 이런 식으로 우리 모두를 자기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조 회장님 생각은 어떻습니까?”“웃기지 말라 그래.”조 회장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임지강은 조 회장의 꽉 쥐어진 주먹을 발견했다. 그의 손등에는 화가 잔뜩 난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조 회장님.”임지강은 잠시 침묵한 뒤 부드럽게 말했다.“운산시 광산의 가격을 조작하도록 제가 이미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 두 광산은 이제 그렇게 가치 있는 자산이 아닙니다.”“알고 있어.”조 회장은 임지강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이 일은 원래 자네 복수를 위해 시작한 일이야. 자네의 화가 조금이라도 풀린다면 내 수고도 헛된 게 아니야. 하지만 문제는...”조 회장은 손짓으로 방 안을 가리켰다.그때 방 안에서 배윤아가 몸을 뒤척이며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임지강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배윤아와 단둘이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조 회장은 잠시 망
임지강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차가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그를 철저히 파산시키고 싶습니다.”“배씨 가문 전체를 함께 무너뜨리겠다는 뜻인가?”조 회장이 묻자, 임지강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말하면, 예전의 저라면 그렇게 했겠죠. 하지만 지금은...”“지금은 마음이 약해졌다는 건가?”조 회장이 비웃듯 웃으며 말했다.“내가 알던 임지강은 그런 자비를 베풀 인물이 아닌데?”임지강도 미소를 지었다.그 웃음 뒤로 누군가의 맑은 눈빛과 깨끗한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이번 일은 송윤지가 부탁해서 오게 된 것이었다.송윤지는 배윤아의 실종 소식을 듣고 매우 걱정하고 있었다. 비록 배현진과 부부의 연을 맺지 못했지만, 배윤아와는 과거에 친하게 지냈던 사이였기에 친구로서 걱정되었기 때문이다.임지강 자신도 이곳에 올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송윤지의 부탁 때문이고 또 하나는 배윤아의 납치 사건이 왜 갑자기 자신에게 덮어씌워졌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임지강은 배윤아와 거의 만난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은 사실상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조 회장님, 전 자비를 베푸는 게 아닙니다.”임지강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단지 이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이미 많은데 한낱 파리 한 마리와 얽혀서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서입니다. 그 녀석에게 적당히 벌을 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게다가 저는 배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과는 아무런 원한도 없으니, 배씨 가문을 완전히 망가뜨릴 필요는 없습니다.”“흠...”조 회장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1조라... 적지 않은 금액이지. 배현진은 은행에서 전 재산을 담보로 대출받았다고 하더군. 이 일이 발각되면 한동안 꽤 고생하겠지.”“조 회장님, 사실 오늘 제가 온 이유는 다른 목적도 있어서입니다.”임지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약간 굽히며 공손히 말했다. 그러나 조 회장은 손짓으로 그를 제지하며 미소를 지었다.조 회장은 아무 말 없이 손짓으로 따라오라는
배현진은 병원 복도에 있는 긴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잡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완전히 무너진 모습이었다.“그럴 리가 없어...”한참 동안 앉아 있던 배현진은 갑자기 고개를 들며 말했다.“연준 아저씨와 서연 이모는 소피아와 함께 지낸 적이 없잖아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소피아는 절대 저를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이 녀석아,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고집을 부릴 거야.”최연준이 엄하게 꾸짖었다.배경원은 아무 말 없이 아들의 손을 잡았다. 그의 눈에는 깊은 절망이 서려 있었다.“그만해요, 셋째 형님...”배경원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수정이가 응급실에 있는데, 이 아이와 더 이상 다투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없는 아들이라고 생각하려 합니다.”“아버지!”“꺼져버려!”배경원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눈빛 너머에는 모든 걸 놓아버린 듯한 깊은 허무가 스며 있었다.배현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돌아섰다. 떠나기 전, 그는 다시 돌아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윤아를 반드시 무사히 데려올게요. 엄마도 무사할 거예요. 우리 가족은... 예전처럼 다시 행복해질 거예요.”배경원은 아들에게 단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잠시 후, 응급실의 불이 꺼졌다. 배경원은 화살처럼 뛰어가며 아내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의사가 땀으로 흠뻑 젖은 마스크를 벗으며 가까스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배 선생님, 사모님께서는 일단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뭐라고요?”강서연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일단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건, 앞으로 위험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다들 진정하세요.”의사는 부드럽게 설명했다.“사모님의 상태가 많이 복잡합니다. 곧바로 특수 병동으로 옮길 예정이라 당분간 면회는 어려울 겁니다. 이번 주가 아주 중요한 시기이긴 하지만, 제 판단으로는 이 고비를 무사히 넘기실 가능성이 큽니다.”세 사람은 안도의 숨을 쉬며 그나마
“아내라고?”강서연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현진이와 정식으로 결혼한 적 있니? 다른 사람과 약혼한 상태에서 끼어든 건 너잖아. 명분도 없는 관계에 ‘아내’라는 말을 쓰다니, 웃음거리밖에 안 될 거야.”“최 사모님...”“갑자기 생각난 건데.”강서연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수정 씨가 쓰러졌을 때 네가 침대 옆에 있었던 거 맞지?”“아, 네.”소피아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제가 현진 씨를 대신해 효도하러 갔던 거예요. 하지만 어머님 건강이 그렇게 나쁘실 줄은 몰랐습니다.”“수정 씨가 쓰러지기 직전에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말해보렴.”소피아는 순간 멈칫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말할 수 없는 이유라도 있니?”강서연은 한 발짝 다가가며 소피아를 몰아붙였다.“수정 씨는 평소 건강관리를 철저히 하던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쉽게 쓰러질 리 없지. 분명 큰 충격이 있었을 거야. 쓰러지기 직전 병실에 너 혼자 있었다며?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해.”“서연 이모,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배현진은 소피아를 자신의 뒤로 끌어당기며 소피아에게 나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소피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복도를 따라 빠르게 사라졌다.소피아가 사라지자, 배현진은 조심스럽게 말했다.“서연 이모, 소피아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배현진!”강서연은 배경원이 아들을 두 번이나 때린 이유를 이제야 완벽히 이해한 듯,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너 어떻게 이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니? 네 엄마는 지금 저 안에 누워 있어.”“정말로 소피아와는 아무 관련이 없어요...”배현진은 조심스럽게 입술을 핥으며 설명했다.“서연 이모, 사실 소피아도 자책하고 있어요. 그날 소피아도 윤아의 안전을 걱정하다가 엄마 앞에서 그만 실수로 말을 흘리고 만 거예요. 그래서...”“뭐라고?”최연준이 눈을 부릅뜨며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배현진, 네 엄마 쓰러졌을 때 넌 방에 없었잖아.”“소피아가 제게 그렇게 말했어요.”“너...”최연준은 순간
병원 응급실 밖.배경원은 의자에 주저앉아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충혈된 눈으로 응급실 문을 응시하며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한때 당당했던 그의 어깨는 지금 축 처져 있었다. 뒷모습만으로도 절망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배경원은 주먹을 단단히 쥐었지만, 온몸은 떨리고 있었다.적막이 흐르는 복도는 불길한 정적마저 감돌았다.결국, 억눌렀던 감정이 터져 나와 눈물이 조용히 뺨을 적셨다.“경원아!”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배경원이 고개를 들자, 최연준과 강서연이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질 뻔한 배경원을 최연준이 재빨리 부축했다.강서연은 응급실 문을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치료는 연희 씨와 신석훈 씨의 제자들이 맡고 있어요. 모두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이에요. 수정 씨는 평소 건강을 잘 관리하셨으니 금방 회복될 겁니다.”“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최연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갑자기 병세가 심각해진 거야? 그리고 윤아는...”배경원은 떨리는 손으로 최연준의 팔을 붙잡으며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셋째 형님, 제발 윤아를 찾아주세요. 딸은 사라지고 아내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어요. 둘 다 잃으면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그런 바보 같은 말 하지 마세요. 둘 다 무사할 겁니다.”강서연이 단호히 말했다.“윤아는 우리 집안의 며느리예요. 누가 윤아를 해치려 한다면 최씨 가문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어요. 그 결과가 어떤 건지 모를 리도 없고요. 그리고...”강서연은 순간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을 이어가려다 복도 끝에서 배현진이 소피아와 함께 급히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는 말을 삼키고 배현진을 노려보았다.“연준 아저씨, 서연 이모...”배현진은 어딘가 죄책감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배현진은 배경원에게 다가가 팔을 살며시 부축하며 조심스레 말했다.“아버지...”그 순간, 배경원이 배현진의 뺨을 내려쳤다.배경원은 분노로 가득 찬 눈빛으로 배현진을 노려보며
임수정은 갑작스러운 기침을 하며 침대 옆 경보 벨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소피아에 의해 단호히 막혔다.“사모님, 제 말을 듣는 게 좋으실 겁니다.”소피아는 부드럽지만 섬뜩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제가 만든 음식이 그렇게 형편없지도 않고 독을 넣을 만큼 제가 어리석지도 않아요. 안심하세요. 이 모든 재료는 사모님의 건강을 생각하며 준비한 겁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온 이유는 진심으로 사모님을 돌보고 싶어서예요.”임수정은 가슴을 움켜쥔 채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임수정의 눈엔 불신과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요즘 배경원은 외출이 잦아졌고 이유를 묻자, 회사 일 때문이라며 안심하라는 대답뿐이었다.그럼에도 임수정의 마음속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점점 커져만 갔다.깊게 숨을 들이마신 임수정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겉으론 소피아의 말을 따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사모님, 잘 생각하셨어요.”소피아는 임수정에게 쿠션을 건네며 은은하게 웃었다.“우리 결국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될 사이잖아요. 지금부터 제 존재에 익숙해지시는 게 좋을 겁니다.”“흥! 내 아들이 눈이 먼 게 분명해.”임수정은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떻게 너 같은 사람에게 속을 수 있는지...”“저를 깔보지 마세요. 저는 이혼하고 아이도 데리고 있지만, 현진 씨를 향한 제 진심은 변하지 않아요. 저는 현진 씨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누구와는 달리 겉으론 순수한 척하면서 남자를 유혹하는 짓은 안 한다는 건 알아주셨으면 해요.”“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임수정은 언성을 높이며 노려보았다.소피아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더욱 날카롭게 말했다.“사모님, 제가 말하는 사람은 바로 사모님의 그 옛날 며느리가 될 뻔했던 그 사람이에요.”“헛소리하지 마!”임수정은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그 일은 우리 배씨 가문이 송윤지에게 잘못한 일이야. 그 애의 명예를 더럽히지 마.”“사모님,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없는 법이에요.”소피아는 태연한
“너와 상관없다고?”임우정은 다급하게 외쳤다.“네 형부가 이미 윤아의 통화 기록을 조사했어. 윤아가 실종되기 전에 조 회장이랑 통화했던 게 드러났다고! 지강아, 너와 조 회장이 어떤 관계인지 나한테도 숨길 작정이었어?”임지강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사건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머릿속에서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그래요. 저와 조 회장이 가까운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와 배윤아 사이엔 원한이라곤 없잖아요... 누나, 왜 저를 의심하는 거예요?”“지강아!”임우정의 목소리가 더욱 절박해졌다.“너, 송윤지 일 때문에 배현진을 미워하는 건 알아. 하지만... 네 말대로라면 윤아한테까지 증오를 전가하면 안 되잖아!”“누나, 정신 좀 차리세요!”임지강의 목소리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어둠이 깃든 그의 얼굴은 단호함을 더했다.“무슨 근거로 저를 의심하시는 건데요?”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임지강의 강경한 태도에 임우정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한참 후, 임우정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렇다면... 배씨 가문을 좀 도와줄 순 없겠니?”임지강은 코웃음을 치며 전화를 끊었다.수화기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리자 맑고 투명한 송윤지의 눈빛과 마주쳤다.“배씨 가문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요양원 병실 문 앞.소피아의 하이힐 소리가 텅 빈 복도를 울리며 퍼져 나갔다. 소피아의 손엔 보온 도시락이 들려 있었고 문 앞을 지키는 경호원들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제가 사모님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안으로 들여보내 주세요.”경호원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말없이 서 있었다.“이건 도련님께서 지시하신 거예요.”소피아는 휴대전화를 꺼내 그들에게 일부러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실래요? 아시다시피 사모님 건강이 좋지 않으세요. 세 끼 제대로 챙겨 드시지 못하면 여러분들이 책임지실 겁니까?”경호원들은 난처한 얼굴로 머뭇거리다 결국 길을 내주었다.“이제야 말이 통하네.”소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앞으로
송윤지는 겨우 한 모금을 마시고 사레가 들어 술을 뱉을 뻔했다. 마신 술이 얼굴에 스며든 듯 송윤지의 뽀얀 볼은 어느새 매혹적인 와인빛으로 물들었다.임지강은 그런 송윤지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임지강은 송윤지에게 다가가 가볍게 등을 두드리며 입가에 묻은 술자국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임 대표님...”송윤지는 조심스럽게 임지강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 애썼다.하지만 임지강은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아 통유리창 앞까지 데려갔다.송윤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 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깊고 짙은 밤하늘에 수많은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잘게 부서진 불빛들이 반짝거렸다.불꽃은 색과 모양을 끊임없이 바꾸며 꿈같은 광경을 만들어냈다.송윤지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마음에 들어요?”임지강의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송윤지의 귀에 스며들었다.“잠깐 눈 좀 감아 봐요.”“네?”임지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제가 별을 따다 줄게요.”마지막 불꽃이 빛의 궤적을 남기며 밤하늘로 사라지고 다시 평온한 고요가 찾아왔다.송윤지는 미소를 지으며 임지강의 말을 따라 눈을 감았다. 그러자 따뜻하면서도 약간 서늘한 남자의 손길이 송윤지의 손을 잡더니 손바닥 위에 무언가가 놓이는 느낌이 들었다.송윤지는 깜짝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손에는 정말로 ‘별’이 있었다.“이건...”그것은 목걸이였다. 펜던트는 별 모양으로 깎아낸 다이아몬드로, 완벽하게 다듬어져 찬란한 빛이 퍼지고 있었다.“제가 해줄게요.”임지강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이건 너무 비싼 거라서 제가...”“받아줘요.”임지강의 눈빛은 따스하고도 단호했다.“그리고...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송윤지는 고개를 숙였다. 귀 끝까지 붉어진 송윤지의 얼굴은 마치 열이 오른 듯했다.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의 귓가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살짝 정리해 주었다.“사실,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저 윤지 씨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