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현은 어안이 벙벙했다.이 익숙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잠시 숨이 멎다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나석진이 몸을 돌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세상은 멈춘 것 같았다.나석진이 서지현을 오성으로 데려온 이후로 그녀는 줄곧 에덴에서 살았고 그와 연락한 적이 없다.두 사람 사이의 유일한 연결고리는 그녀가 수십 개의 계정을 등록하고 동영상 아래에 댓글을 올린 것이다.지금 다시 만나니 서지현은 어떤 느낌인지 말할 수 없다.그녀는 뻣뻣하게 웃으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에게 인사했다.“안녕하세요, 아저씨!”나석진의 눈빛은 어둡고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의 옆에 있는 손은 주먹이 되었다.그는 자신에게 화가 나 있었다. 계속해서 자신에게 공항까지 따라온 이유가 강서연과 함께 남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고, 작은이모의 병이 걱정돼서 자신도 한동안 남양에 가서 쉬고 싶었다고 말했다.그러나 사실은 서지현이 남양으로 가기 때문에 그가 이렇게 급하게 달려온 것이다.실제로 그는 두 개의 급한 행사가 더 있었는데 오늘 임시로 짐을 정리해서 달려오는 바람에 박철이 화가 많이 나 있었다.나석진은 깊은숨을 들이마시고는 씁쓸하게 웃었다.헬리콥터에서 그녀가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느냐?그는 그저 아저씨, 아저씨일 뿐이다!이때 최군형이 잠에서 깨어나 한바탕 통곡하여 이곳의 침묵을 깨뜨렸다.강서연은 서둘러 그를 모유 수유실로 데려갔다.나석진은 최연준앞에 가서 마른기침을 두 번하고 말했다.“그... 지현이는 제가 데려갈게요.”“네?”최연준은 어안이 벙벙했다.나석진은 아무 이유 없이 서지현을 자기 곁으로 끌고 왔다.“아저씨...”“너는 내가 영국에서 데려온 사람이니 당연히 나를 따라가야지!”“하지만 서연 언니가 자기를 따라다니면 된다고 했어요...”서지현은 고개를 숙였다.입으로는 그렇게 말하지만 속으로는 달콤했다.“서지현.”나석진이 오만하게 그녀를 한 번 바라보았다.“이제 내가 말하는 것은 소용없다는 거야?”“아니에요!”“그러면 내 비행기에 타!”나
설마 부끄러운 나머지 화가 난 것인가?강서연과 최연준은 서로 마주 보며 히히 웃기 시작했다.나석진은 이 부부가 한패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과 말다툼하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고개를 저어 두 손은 등 뒤로 한 채 자기 세상에 심취한 걸음걸이로 비행기를 타러 나갔다.나석진의 전용기는 최씨 가문 비행기에 비해서는 좀 작지만 내부 인테리어는 고급스럽고 세련되었다.비행기를 타고 세계 곳곳을 누비며 촬영을 하기 때문에 이 비행기도 그의 슈퍼스타 기질에 걸맞게 꾸며져 있었다.서지현은 얌전히 자리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조금만 더 움직이면 어디 부딪히고 더럽힐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큰 눈을 뜨고 호기심에 사방을 둘러보았는데 기내에는 나석진이 출연했던 영화 포스터가 붙어 있었고 포스터마다 그는 센터 자리에 서 있었다.스타일도 다르고 메이크업도 제각각이지만 이 남자는 아무리 꾸미고 다녀도 잘생기셨다는 공통점이 있다.특히 눈에 띄는 한 장이 있었는데 킬러 역할을 맡았다.포스터 속 그는 상반신을 드러낸 채 완벽한 역삼각형 몸매를 자랑하고 있으며 탄탄한 가슴 근육에는 상처가 선명하게 한 줄 그어있었고 그의 각진 얼굴 위로 빛이 은은하게 드리워져 있다.서지현은 금사빠처럼 뚫어져라 쳐다보며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아가씨, 비행기가 곧 이륙하니 안전벨트를 매 주십시오. 아가씨? 아가씨!”스튜어디스가 몇 번이나 그녀를 불렀지만 서지현은 반응이 없었다.나석진이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 낮은 소리로 외쳤다.“서지현!”“네?”서지현은 깜짝 놀라 황급히 시선을 거두었다.스튜어디스가 웃으며 안전벨트를 채워주고는 몇 마디 당부한 뒤 슬리퍼와 담요를 가져다줬다.서지현은 이런 대우를 받은 적이 없어서 어색하게 웃었다.그러나 그녀는 나석진의 굵직한 기침 소리를 듣고는 조심스럽게 미소를 감추었다.“너...”나석진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나에게 할 말이 없어?”서지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이어 고개를 저었다.지난번에
서지현은 임시거주 증명서를 쥐고 가슴에 살포시 대었다.그녀는 조용하게 나석진을 한참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웃었다.시간이 이 순간에 머물렀으면 좋겠다.사실 그녀가 그렇게 똑똑한데 어떻게 그가 무엇을 듣고 싶어 하는지 모를 수 있겠는가? 그녀는 단지 그를 더 멀리 밀어내려고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때로는 밀어내는 것이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놓아주는 것이 오히려 상대방을 위해서이기도 하다.서지현은 웃으며 의자에 몸을 기대고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창밖에 햇빛이 눈부시게 비치고 그녀의 얼굴 위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비행기는 곧 남양에 착륙했다.공항 밖에는 윤씨 가문의 운전기사와 집사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강서연과 최연준은 황실만이 이용할 수 있는 프라이빗 통로를 걸었다.공항 밖으로 나가자 강서연은 발걸음을 멈추었다.이것은 사방이 높은 야자수로 둘러싸인 낯선 환경이었다. 남양의 기후는 습하고 덥기 때문에 태양이 모든 빛과 열을 이 땅에 쏟아붓는 것 같아 길가의 들꽃마저도 더할 나위 없이 화사했다.강서연은 복잡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여기서 태어나고 자랐어야 했는데...최연준은 아들을 안고 뒤에서 걸어가며 속삭였다. “여보, 빨리 차에 타.”강서연은 억지로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안 돼서 윤씨 가문의 사가원림에서 윤정재를 만났다.그는 전형적인 남양 차림을 하고 있었고 최군형이 살이 찐 것을 보자 몹시 기뻐하며 돈봉투뿐만 아니라 금 한 상자를 가득 준비하였다.“아빠, 이렇게 하면 애를 버릇없게 만들 거예요!”강서연이 웃으며 말했다.“나의 외손자는 당연히 좋은 것만 가져야지!”강서연은 윤문희의 병세를 걱정해서 물었다.“아빠, 엄마는 어떠세요?”최군형을 달래고 있던 윤정재의 손은 순간 멈칫하고 얼굴에 먹구름이 스쳤다.“엄마가 많이 아파요? 지금 어디 있어요? 빨리 가봅시다!”강서연은 몹시 긴장했다.“너무 조급해하지 마.”윤정재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문희는 지금 요양원에 계셔. 윤씨
강서연은 잠깐 멈칫했다.“아빠? 무슨 친왕이에요?”윤정재는 안색이 그리 좋지 않았고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군형이를 도우미에게 맡기고 연준이를 불러와. 내가 너희 둘을 데리고 사람들을 만나야 해.”잠시 후 다들 거실로 모였다.문을 들어서자마자 강서연은 소파에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윤씨 가문의 거실은 화려하게 꾸미었고 그들 두 사람은 그곳에 앉아 전통 남양 복식에 진주로 화려한 용모를 과시했다.진용수는 황실 예절에 따라 강서연과 최연준을 그들에게 안내했다.“아가씨, 도련님.”진용수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왼쪽에 있는 분은 송지아 친왕이고 오른쪽에 있는 분이 송혁준 친왕이에요. 인사해야 합니다.”강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나서야 그들을 바라보았다.송지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와 인사를 하는데 그녀는 황실에서 유일한 여성 친왕으로 지위가 높다고 들었다.지위가 높을 뿐만 아니라 얼굴도 예쁘고 어려서부터 황실에서 자라 우아하고 고귀함이 이미 뼛속 깊이 새겨져 있다고 강서연이 속으로 생각했다.그녀의 곁에 있는 송혁준 친왕이 도리어 여성적인 아름다움이 있어 사람에게 온화하고 예의 바르고 사람에게 다가가기 쉬운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전에는 윤 회장님 댁의 도련님만 보았는데 이 아가씨는 처음 보는 것 같네요.”송혁준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나는 이 아가씨를 들어본 적이 있어.”송지아가 살짝 웃었다.“예전에 줄곧 강주에 살았던 강서연이잖아.”“이미 윤서연으로 개명했습니다.”윤정재는 입술을 치켜올렸다.“서연이가 20여 년 동안 강서연으로 살아와서 예전에 쓰던 이름이 더 익숙해요. 사실 이름은 중요하지 않아요. 서연이가 내 딸인 것이 가장 중요해요.”강서연은 송지아와 처음 만났는데 이 여친왕이 이미 그녀의 배경을 낱낱이 조사해 와서 의외였다.반면 송혁준은 줄곧 옆에서 웃고 있었고 그의 시선은 최연준의 얼굴에 잠시 멈췄다.“누나, 중요한 일을 잊지 마.”그가 일깨워줬다.송지아는
여친왕이 남자에 너무 목메어 있다는 것을 남들이 알면 황실의 체면은 전 세계에 망신을 당할 것이다!그러자 윤정재는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고는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눈빛에는 날카로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전하께서 묻고자 하시는 것은 나석진이신지요?”송지아는 계속 구슬을 만지작거리다가 나석진 이름을 듣고는 손가락이 움츠러들었다.그러나 여전히 얼굴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윤정재가 웃으며 말했다.“석진이도 따라왔어요.”송지아는 망설였다.“그럼 제가...”“전하께서 귀하신 몸이신데 어떻게 이런 말씀을 주선하십니까?”윤정재는 느긋하게 말했다.“황실의 법도에 따르면 전하는 독단적으로 남자를 만날 수 없습니다. 만나더라도 석진이가 선물을 준비하고 전하를 정식으로 초대하는 것이 맞습니다.”송지아의 안색이 변했다.나석진더러 데이트를 신청하라고? 해가 서쪽에서 뜨게 하는 거랑 뭐가 다를까?그러나 윤정재는 황실의 규칙을 가져와 그녀를 반박할 수 없게 만들었다.그녀는 손가락 사이의 구슬을 힘껏 잡아당기며 입술을 깨물었다.송혁준은 눈치가 빨라 윤정재가 두 사람을 반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비록 황실이지만 이 나라에서 황실은 장식품에 불과했다.윤정재는 체면을 생각하고서야 비로소 전하라고 우러러 존칭하였다.이제 그들 둘은 떠날 때가 되었다.송혁준은 송지아의 소매를 잡아당겨 그녀에게 눈짓을 했다.송지아는 기분이 좋지 않아 얼굴이 굳었고 송혁준은 스스로 일어나 몇 마디 인사를 더 한 뒤 수행원들이 길을 터주며 천천히 문 쪽으로 걸어갔다.최연준과 스쳐 지나갈 때 그의 시선이 다시 그의 얼굴에 잠깐 머물렀다.최연준은 경각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눈을 들어 상대하는 것은 그 사람의 온화한 미소였다.두 사람이 떠난 후 강서연과 최연준은 윤정재를 데리고 서재로 왔다.“남양왕은 자기 자식이 없어.”윤정재가 설명해 줬다.“종족 중의 자식들 가운데 친왕으로 책봉한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되는데 살펴보고 누가 뛰어나서 장차 왕위를 이을 것인지 지켜보
강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양 황실에는 파벌이 많고 복잡하게 얽혀 있어 그 안에서 벌어지는 암투는 오성의 4대 가문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어쩌면 4대 가문보다 지나쳤으면 지나쳤지 절대 못 미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이 다투는 것은 재산뿐만이 아니었고 더 중요한 건 왕위였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병권을 잡는 사람이 왕위를 차지하는 데 승산이 더 컸다. 그래서 현재 나씨 가문의 권세가 대단하다. 나 장군께서 나석진의 혼약을 서두르지 않는 것 또한 어떤 파벌이 가장 잠재력이 있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송지아와 송혁준 두 사람이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어. 두 사람은 평소에도 황실의 사람들과 자주 왕래해야 하니 꼭 조신하게 행동해야 한다.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해야 하고 절대 자신이 어느 편인지 보여서는 안 돼. 알겠느냐?”옆에 있던 윤정재가 두 사람을 쳐다보며 신신당부했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알았어요.”“앞으로 윤제 그룹은 너희 두 사람에게 부탁한다...”윤정재가 두 사람의 손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네?”그 말에 강서연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고 최연준도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던 최연준은 한참 동안 머뭇거리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장인어른, 처남도 있는데 이렇게 결정하시면...”“허튼 생각하지 말게나.”윤정재는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예전처럼 도도한 표정을 지었다.“자네한테 윤제 그룹 전체를 맡긴다는 소리는 아니었네.”말문이 막힌 최연준은 입을 삐죽거렸다. “서연아, 윤찬이가 배운 것이 많긴 하지만 아직은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다. 애가 선비 같은 면이 있어. 윤제 그룹을 그한테 맡기는 건 아직 마음이 놓이지 않는구나.”“그래서 회사의 일부를 너와 연준이 명의로 해놓을 생각이야. 윤찬이가 스스로 회사 일을 맡을 수 있을 때까지 연준이가 옆에서 잘 도와줬으면 좋겠구나.”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최연준은 입을 삐죽거렸다.‘늙은이가 이제서야 내 생각이
남양 현지에는 이런 재봉소가 많았고 솜씨가 뛰어난 재봉사들도 꽤 있었다. 서지현이 면접을 보러 갔을 때 사장은 그녀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그러니 그녀가 면접을 통과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하지만 그녀는 그곳에서 임시 거주 자격만 있을 뿐 정식 신분이 없기 때문에 월급이 남보다 적었다. 그래도 서지현은 상관없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이렇게 정정당당하게 살아본 적이 없다.예전에 맨체스터 시티에서 그녀는 자신이 하수구에 있는 쥐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 당시 그녀는 자신이 이렇게 떳떳하게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있고 아르바이트를 한 돈으로 자신을 먹여 살릴 수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어렵게 얻은 이 기회를 소중히 여겼고 남들보다 더 열심히 노력했다. 돈을 충분히 저축한 다음 먼저 강서연이 대신 내준 집세를 갚고 계속 돈을 모아 대학에 갈 생각이었다. 그녀가 재봉소의 일에 익숙해진 후, 예쁘고 일 잘하고 부지런한 그녀가 매우 마음에 들었던 사장은 가끔 그녀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 오후, 서지현은 한창 손님 옷에 자수를 놓고 있었다. 일에 집중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사장 아주머니가 차 한 잔을 들고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좀 쉬어. 이건 급한 거 아니니까.”서지현은 고개를 들고 웃고는 단숨에 차를 마셔버렸다. “오전 내내 일했더니 눈이 피곤하지?”“괜찮아요. 피곤하지 않아요.”사장 아주머니의 물음에 서지현은 어깨를 주물럭거리며 입을 열었다. “다른 여자애들은 이 나이 때면 게으름을 피울 것인데 넌 어쩜 여기서 이리 죽기 내기로 일을 하는 거야?”사장 아주머니가 웃으며 말했다.“더 벌 수 있으면 더 벌어야죠.”서지현의 목소리는 은방울 소리와 같이 듣기 좋았다.“그리고 전 이 일이 마음에 들어요. 재미있기도 하고 돈도 벌고...”그녀는 눈을 굴리며 생각하다가 말을 이어갔다.“일석이조이니 얼마나 좋아요?”사장 아주머니는 그녀를 쳐다보며 큰소리로 웃었다. 요즘 그녀는 서지현에게 한국어를 가르
서지현은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등줄기가 뻣뻣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끼고 몇 번이고 돌아서려 했지만 마치 저항하는 힘이라도 있는 듯 제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무거운 발소리가 그녀를 향해 점점 다가왔다. 작은 재봉소 안은 한순간에 싸늘한 분위기에 휩싸였다.많은 사람을 봐온 사장 아주머니는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나석진을 보고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이내 알아차리고 황급히 다가가서 웃으며 물었다.“손님, 옷 만들러 오셨나요?”말을 꺼내자마자 그녀는 후회가 되었다. 나석진의 옷차림으로 보면 딱 봐도 어느 부잣집 도련님인 것 같았고 모든 옷을 맞춤 제작하는 그가 이런 작은 재봉소로 올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게다가 이 사람은 재봉소를 들어서자마자 곧장 자신을 등지고 서 있는 서지현을 향해 걸어갔다. 사장 아주머니는 입을 삐죽거렸다.‘이제 보니 이 계집애한테 남자친구가 있었군. 남자친구가 꽤 신분이 높은 사람인 것 같은데.”“저기, 손님...”“옷을 맞추러 온 것이 아닙니다.”나석진은 차갑게 입을 열었다. 한편, 서지현은 숨을 죽인 채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여기 사장이 당신인가요?”그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물었다. 싸늘한 그의 눈빛을 마주한 사장 아주머니는 그 자리에서 몸이 굳어버렸다. 낯이 익은 것 같지만 그의 매서운 카리스마에 그녀는 약간 몸이 떨렸다. “네... 그런데요.”“잠깐 나가주실래요?”“네? 하지만 손님, 저...”“사장님께서 계속 계시겠다는 건 저한테 돈을 달라는 뜻인가요?”나석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하지만 제가 일단 돈을 지불하게 된다면 옷만 사지는 않을 겁니다. 제가 사는 건 이 가게가 될 것입니다.”그의 말에 사장 아주머니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무슨 사람이야? 오자마자 남의 가게를 사겠다니?’“사장님, 이 집 오래됐죠?”이때, 여기저기 둘러보던 나석진이 차갑게 말했다. “제가 알기로는 이 거리에 남은 재봉소가 많지 않고 곧 정부에서 이곳을 철거한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