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요.”강서연이 부드럽게 말했다.“음료수를 미리 시켰어요. 블루베리 치즈 밀크티 좋아하는 거 맞죠?”“언니.”김유정은 선글라스를 벗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예전에는 좋았는데 지금은 안 돼요! 작품을 찍어야 해서 지금은 몸매를 유지해야 해요. 게다가, 만약 제가 이런 가게에서 밀크티를 마시는 모습이 유출되면 이미지에도 타격이 있을 거예요!”“그래요...”강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애써 담담한 척했다.“유정 씨, 오늘 만나자고 한 건 그 영화 얘기를 하고 싶어서예요.”“다 잘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김유정은 자세를 바로잡았다.“곽 감독님께서는 제가 타고난 배우라고 말했어요. 이 영화는 반드시 저의 성공작이 될 것이에요.”“그래요.”강서연이 싱긋 웃었다.“보미 씨의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영화는 더 이상 못 찍을 것 같아요.”김유정은 선글라스를 벗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뭐라고요?”“유정 씨, 흥분하지 말아요.”강서연이 그녀를 달랬다.“김중 그룹 장부를 제가 봤는데 현금흐름이 많지 않고 몇 개의 투자는 아직 수익을 보지 못해서 장부상으로는 돈이 별로 없어요. 이 영화는 원래 미웨이 엔터테인먼트가 투자한 것인데 지금 미웨이가 급하게 투자를 철회했어요. 참... 안타깝네요.”김유정의 머릿속이 하얘졌다.‘돈이 없다고? 투자금을 철회했다고?’손미현은 분명히 이 영화를 투자한 것은 그녀가 여주인공이 되어 상을 받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이제 다 망한 건가?“유정 씨.”강서연의 모습은 상당히 진정성 있어 보였다.“보미 씨가 유정 씨가 찍은 데모를 보여줬는데 정말 대단해요! 특히 표정이 너무 좋아요. 그날 석진 오빠랑 촬영장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내가 대신 사과 할게요. 오빠가 자존심이 강하고 욕심이 많아서 그런 거예요.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해요. 이 영화가 개봉하면 유정 씨는 틀림없이 상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김유정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한편으로는 강서연의 칭찬 때문이고 다
최연준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문제없어.”이때 그가 보낸 사람은 이미 김유정의 차를 따라갔고 실시간 위치를 공유해왔다.차는 도시 밖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는데 지난번 손미현을 미행했을 때와 같은 방향이었다.김유정은 역시나 여진국을 찾으러 갔다.최연준은 입꼬리가 올라갔고 많은 증거가 부풀어 오르는 풍선처럼 앞으로 다가올 어느 날에 펑 하고 터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진실은 일시적인 고통을 가져올지도 모르지만 김성주에게는 평생의 해탈이다.“여보, 수고했어.”최연준이 부드럽게 말했다.“일찍 가서 쉬어. 남은 일은 나한테 맡겨.”강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고 경호원의 호위를 받으며 별장으로 돌아왔다.며칠 후에 최연준과 나석진은 사무실에서 만났다.나석진은 긴 다리를 꼬고 소파에 앉아 있는데 흰 양복처럼 사람을 가리는 옷도 그에게는 특별히 다림질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김중 그룹 여직원들은 최연준이 무서워서 이 층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그런데 오늘은 하나둘씩 열정 넘치며 최 대표 문 앞을 왔다 갔다 하다가 수시로 만년필을 떨어뜨리거나 노트를 잃어버리고는 허리를 굽혀 유리문 틈새로 들여다보았다.복도 끝에 최연준이 나타나자 이들은 이 세한 기운을 느끼고 뿔뿔이 흩어졌다.최연준은 사무실로 들어와 농담했다.“조금만 더 앉아 있으면 회사 여직원들의 눈알이 다 튀어나올 것 같아요.”“김중 그룹은 남자가 없나 봐요?”나석진이 거만하게 입꼬리를 올리자 최연준은 웃음을 거두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매제, 내가 매제보다 잘생겼다는 걸 인정하는 게 그렇게 힘들어요?”“할 말 없으면 나가세요!”나석진이 웃었다.“농담이에요! 이거 보세요, 원하는 물건을 가져왔어요.”그는 봉투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는데 안에는 사진 한 무더기가 들어 있었다.사진을 본 최연준의 얼음조각 같은 얼굴에 마침내 웃음기가 돌았다.며칠 전 그는 나석진이 데리고 온 사람을 시켜 김유정을 미행하여 여진국의 아지트까지 줄곧 따라갔다.김유정과 여진국이 만나는 장면도
연회는 빌라 마당에 마련되었는데 바이올린 소리가 우아하고 향기로운 술 냄새가 진동한 데다가 정원에 장미꽃이 만발하여 마치 16세기 유럽으로 돌아간 듯 몽환적이었다.강서연은 임신한 채 최연준과 사람들 사이에서 접대를 하고 있었다. 최연준은 그녀가 힘들게 걸어가는 것이 안쓰러워 안아 올리려다가 강서연에게 팔을 붙잡혔다.“왜 그래?”남자가 가볍게 웃었다.“나랑 같이 있을 때 다리 안 써도 된다고 약속했잖아?”“지금은 필요해요!”강서연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당신이 이렇게 많은 식구 앞에서 이러면 안 돼요!”“내가 내 와이프를 아끼는데, 저 사람들이 무슨 상관이야?”강서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지만 그래도 그를 제지했다.“우리 서연이는 너무 착해 빠졌어!”김자옥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실 연준이에게 안겨도 돼. 발이 많이 부어 보이는데... 힘들지?”강서연은 착하게 고개를 저었다.이때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여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어이구, 우리 집 작은 사모님께서 정말 철이 들었네요! 너무 철이 들어 어른을 공경할 줄 모르다니!”역시나 다름없는 손미현의 소리여서 김자옥은 눈살을 찌푸렸다.여자는 비틀비틀 이쪽으로 걸어왔을 뿐 배는 별로 나오지 않았는데 마치 황태후처럼 주위에 여러 사람이 둘러싸고 있었다.김자옥은 그녀를 향해 눈을 째려봤다.“헛소리하지 마! 임신했다고 미친개가 돼서 사람을 막 물고 다니는 거야? 이 사이코야!”“형님, 도대체 누가 사이코인지 곧 알게 될 거예요!”두 사람의 말다툼 소리가 적지 않은 사람들의 구경을 불러왔으나 모두 말은 하지 않고 술잔을 들고 한쪽에서 구경만 하였다.손미현은 때가 무르익자 사진 한 움큼을 앞에 놓인 탁자 위에 내던졌다.사진 속의 몇몇 남자들은 마치 미행하는 것처럼 기웃거리고 있었다.그것을 본 강서연과 최연준은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사실 그들은 이미 손미현이 그 둘을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손미현은 누군가가 자신을 미행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자 그들은 아
손미현은 벌떡 일어나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았다.“최... 최연준! 외숙모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네가 감히 내 아들에게 이렇게 말을 해?”김자옥의 매서운 목소리가 연회장을 뒤흔들었다.손미현은 몸을 움츠리고는 또 몰래 김성주를 찔러 소란을 피우게 했다.김성주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목청껏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누나, 지금 우리 괴롭히는 거야? 우리... 미현이가 뭘 잘못했다는 거야! 사람을 보내서 미행하다니! 미현이는 내 아이를 가졌어! 너희들, 내 와이프가 눈에 거슬리면 나도 눈에 거슬리는 거야!”김자옥은 안색이 매우 좋지 않아 몇 번이나 발작하려 했지만 모두 참았다.어린 시절 동생이 몸을 던져 목숨을 걸고 구하는 장면을 생각하면 마음이 약해지고 천방지축 성질도 못 내고 죄책감에 온몸이 먹먹해진다.최연준은 앞으로 나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뒤로 물러서라고 했다.어머니가 내지 못하는 성질은 그가 대신 내면 된다. 그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이렇게 답답한 것을 본 적이 없다.더군다나 이는 성질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김성주에게 일방적으로 양보하는 것이다. 이런 행위는 그에게 잘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를 더 깊은 지옥으로 밀어 넣는 것이다.차라리 지금 손미현 이 암 덩어리를 없애는 게 낫겠다!최연준은 당황하지 않고 사진 한 움큼을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외숙모, 미행했다고 했잖아요. 외숙모가 사진을 찍었고 나도 찍었어요. 맞아요, 이 사람들은 제가 보냈다고 인정할게요. 하지만 제 부하들이 뭘 찍었는지 자세히 보시는 게 좋겠어요!”손미현은 어안이 벙벙해서 그 사진들을 뒤적거렸고, 결국 볼수록 온몸이 덜덜 떨렸다.“이건...”“유정이에요.”최연준의 목소리는 차가웠다.“외숙모는 자기 딸도 못 알아보는 건 아니겠죠?”손미현은 눈을 부릅뜨고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겁먹은 기색이 역력했다.사진에는 김유정뿐만 아니라 여진국도 있다!손미현은 심장이 벌렁거리고 온몸의 피가 머리 위까지 거꾸로 쏟아지는 듯한 기분이 들어 어쩔 줄 몰라 했다.
손미현이 찔려서 한마디도 할 수 없자 김자옥이 냉소했다.“이 일은 서연이가 잘한 거야! 서연이와 연준이가 눈치를 채고 미행하지 않았더라면 유정이는 이 늙은이에게 정말 속았을지도 몰라. 올케, 임신했지만 딸의 훈육을 소홀히 할 수는 없지 않아?”“그만해요!”손미현이 비명을 지르고 인파 속에 숨어 있는 김유정을 한 번에 보았다.김유정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표정은 그녀와 같이 당황했다.두 사람이 시선이 마주쳤을 때 김유정은 엄마의 눈에 깃든 살기를 느껴 몸을 파르르 떨었다.그때 김씨 가문 영감님이 멀리서 걸어왔다.방금 이쪽의 소란을 그는 모두 똑똑히 들었고 사전에 부하가 일의 자초지종을 하나하나 그에게 들려주었다.이 고희지년까지 살아오면서 영감님은 일찍이 희로애락을 감추는 능력을 익혔지만 파란만장한 눈 밑에 폭풍우가 감돌았고 지금의 침묵은 화산이 폭발하기 전의 짧은 평온일 뿐이었다.“손미현, 김유정.”영감님의 중저음 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봐!”“아버님...”“할아버지...”“외할아버지,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최연준의 목소리는 아무 온도가 없었다.“여진국에 대해 제가 조사해 봤는데 그냥 평범한 장사꾼일 뿐이에요. 벤처캐피털 일을 하는 사람이고 나이가 좀 많은 것 말고는 별거 없어요.”“정말?”“네, 정말이에요.”손미현과 김유정은 동시에 어안이 벙벙했다.최연준의 그 깊은 눈매는 사람을 오싹하게 한다.그들은 이 부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미 여진국을 찾아냈는데 왜 영감님 앞에서 그들을 폭로하지 않는가?“올케.”김자옥이 냉소했다.“평범한 장사꾼이 유정이를 꼬실 수 있다고? 조심해, 속임수가 있을 수도 있어. 유정이는 김씨 가문의 자식이 아니지만 그래도 김씨잖아! 만일 정말 망신당할 일을 한다면 김씨 가문의 체면을 깎을 거야!”손미현의 눈빛에는 원한이 가득했고 영감님은 쾅 하고 지팡이를 내리치며 크게 노발대발했다.“너희 모녀 둘 다 얌전히 있지 못해? 내 집에 들어왔
“엄마...”김유정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다.그녀는 그 화끈거리는 반쪽 얼굴을 만지며 당황하고, 분하고, 화가 나고, 찔리고, 모든 복잡한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다.“엄마라고 부르지 마!”손미현은 거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네 눈에는 이 엄마가 보여? 내가... 내가 어떻게 너 같은 염치없는 놈을 키웠지!”“엄마, 오빠가 하는 헛소리를 듣지 마세요. 저와 진국 아저씨는 단지...”“사진에 똑똑히 찍혔어!”손미현은 분했다.“그 사람이 너의 허리를 만지고 있어! 너는 어떻게 그냥 만지게 놔둘 수가 있어? 정말 나를 화나게 할래?”김유정은 제자리에 굳어서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사실 딸과 애인의 추악한 일에 대해 손미현은 일찍이 알아차렸다.그녀가 김유정을 데리고 여진국을 만난 횟수는 많지 않지만 만날 때마다 여진국의 두 눈은 김유정의 몸을 탐욕스럽게 노려봤다.그녀는 슬프고 화가 났지만 질투가 더 많았다.손미현은 자신의 친딸을 질투했고 더 이상 자신이 가질 수 없는 젊음을 질투했으며 남자를 홀릴 수 있는 그 얼굴을 질투했다.그리고 그녀는 지금 나이가 들어 얼굴도 몸매도 예전 같지 않아 어떻게 발버둥 쳐도 다시 여진국의 총애를 받을 수 없으니 손미현이 할 수 있는 건 그에게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그녀는 또한 김유정에게 여러 번 경고하여 여진국에게서 멀리 떨어지라고 했지만 그들 둘이 그녀 몰래 이런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결국에는 강서연과 최연준에게도 들키고 말았다.손미현은 갑자기 깨달았다. 최연준이 방금 영감님 앞에서 여진국의 정체를 폭로하지 않은 것은 이미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다.김자옥과 최연준은 한 쌍의 살아 있는 염라대왕 같아 다른 사람의 약점을 쥐락펴락하는 데 가장 능숙하다. 그리고 고양이가 쥐를 잡듯이 쥐를 산 채로 놀려 죽인다.손미현은 다리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무릎을 꿇을 뻔했지만 김유정은 차갑게 그녀를 보고 있을 뿐, 부축하러 가지 않았다.손미현은 눈을
이때 몇 명의 보디가드가 손전등을 들고 달려왔다.이들은 모두 최연준이 보낸 것인데 강서연은 그전부터 최연준에게 이 모녀의 일거일동을 주시하라고 귀띔해 줬다.하지만 김유정이 이렇게 잔인하게 자신의 어머니를 연못으로 밀어 넣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빨리! 이쪽이야, 빨리!”보디가드 몇 명은 건장하고 물에 익숙하여 금세 손미현을 건져 올렸다.손미현이 물에 빠져 온 집안을 놀라게 했고 사람들은 급히 그녀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응급실 문 앞에서 의사는 마스크를 벗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모님 배 속의 아이는 다행히 무사합니다.”김성주는 서둘러 감사의 인사를 전했고 하하 호호 웃었다.“그런데...”의사가 또 말했다.“혹시 모르니 사모님께서 종합검진을 받아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김자옥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사에게 관련 수속을 밟으라고 지시했다.그러나 이때 손미현이 응급실에서 밀려 나왔는데 몇몇 간호사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의사는 눈살을 찌푸렸다.“왜 지금 임산부를 데리고 나오는 거예요?”“저희 때문이 아니라...”간호사 중 한 명이 설명했다.“사모님께서 아무것도 검사하지 않고 에이미 선생님만 찾고 있어요.”“네, 안 해요...”병상에 누워있는 손미현은 기운이 없는 와중에도 고집을 부렸다.“검사 안 할래요. 에이미 불러줘요. 에이미...”강서연과 최연준은 눈빛을 교환하며 그 에이미가 손미현의 최측근이자 그녀의 배 속 아이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유일하게 알고 있음을 직감했다.강서연이 앞으로 나와 조용히 물었다.“에이미 선생님은 여기에 있나요?”의사는 난색을 보였다.“사모님께서 찾는 에이미 선생님은 현재 M국에서 수술 중이어서 올 수가 없어요!”“에이미 선생님은 엄청 훌륭한 의사인가요?”“산부인과 의사인데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아요. 의술이 뛰어나다고 말하기엔 우리 병원에는 훌륭한 의사들이 많습니다!”강서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려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의사의 말을 다들 들었는지 손미현의 검사를 먼저 시
“도련님.”김성주의 측근 집사가 말했다.“윤찬 도련님은 남양 윤제 그룹의 후계자이고 이 윤제 그룹은 의학과 제약 방면에서 으뜸가는 대가문입니다. 남양은 말할 것도 없고 전 세계적으로도 전문성이 뛰어납니다.”김성주는 잠시 침묵하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아, 알겠어! 우리 집 약상자! 약상자 안에 몇 병의 상용약이 있는데, 모두 윤제 그룹이라고 쓰여 있어!”“바로 그 가문입니다!”김성주는 신이 나서 구세주를 찾았다고 생각하며 강서연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서연아, 네 동생이 정말 미현이를 도와줄 수 있어? 예전에 미현이가 자주 너를 해코지했는데 내가 대신 사과할게.”김성주는 차렷 자세를 하고 꾸벅 인사를 했다.그는 어릴 때 말 등에서 떨어져 머리가 깨지고 신경이 손상되어 말만 하면 눈살을 찌푸렸다.그러나 강서연은 그가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고 갑자기 마음이 찡해져 그에게 연민을 느꼈다.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잘못된 것은 그 사람은 애초에 그렇게 사랑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외삼촌, 안심하세요.”강서연이 부드럽게 말했다.“제 동생은 훌륭한 의사여서 잘 검사해 드릴 겁니다.”“헤헤...”김성주는 하하 호호 웃었다.그러나 최연준과 강서연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두 사람은 마음이 조금 슬펐다.하루 바쁘게 보내고 돌아가는 길에는 밤이 서서히 물러가고 하늘에는 한 줄기 금빛 서광이 비쳤다.강서연과 최연준이 뒷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녀의 작은 머리가 그의 어깨에 기대어 있었다.그는 그녀를 가볍게 껴안았다.“자고 싶으면 잠깐 자. 집에 도착하면 깨울게.”강서연은 고개를 저었다.그녀는 별다른 잠기운이 없었고 다만 김성주의 그 바보 같은 모습을 생각하면 조금은 괴로웠다.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연준 씨, 우리가 이렇게 하는 거 맞아요?”잠시 침묵을 지키던 최연준이 대답했다.“전혀 잘못되지 않았어. 이 현실을 외삼촌은 언젠가는 마주해야 해.”“하지만 외삼촌이 외숙모한테 그렇게 잘해주고 이 아이를 기대하는 걸 보니.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