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준은 이미 마음속으로 윤정재를 수백 번 욕했다.그러나 감히 욕을 밖으로 꺼내지는 못하고 한 번 고민하고 다시 강서연을 보며 속삭였다. “정말이야?”“네.”강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엄마는 어려서부터 남양에서 자랐기 때문에 지금 다시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는데 무슨 문제 있어요?”“글쎄... 맞는 말이야.”최연준은 그녀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남양은 보수적이고 전통적이어서 나와 찬이는 윤씨 가문의 사람이니까 당연히 친부모 밑으로 입적해야죠, 그렇죠?”최연준은 입술을 핥으며 계속해서 맞장구를 쳤다.“그... 그래.”강서연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작은 손으로 그의 슈트를 어루만졌다.“그럼 나는 부모님과 함께 돌아가고 당신은 여기서 혼자 잘 지내고 있어요...”“뭐라고?”말소리가 떨어지기도 전에 최연준의 옥타브 높은 목소리에 끊겼다.강서연이 무고한 얼굴로 말했다.“당신은 내가 가는 게 싫어요?”“당연하지!”“그럼... 나랑 같이 갈래요?”최연준이 잠시 멈칫하자 강서연의 장난기 가득한 사슴 눈망울과 마주쳤다.“여보. 전에 당신이 내가 시집간 게 아니라 당신이 나한테 ‘시집온 거’ 라고 했잖아요? 처가살이한다고 했잖아요!”최연준은 어리둥절해서 이전에 자신에게 이렇게 큰 구덩이를 파 놓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아들, 네가 전에 이런 말을 했어?”김자옥이 듣고 고개를 돌려 그에게 묻자 최연준이 마른기침을 두 번 했다.그가 기침하는 것은 엄마더러 떠벌리지 말라는 뜻이었지만 김자옥의 목청은 확성기처럼 높았다.“서연아, 연준이가 정말 너한테 이런 말을 했어? 하하하... 좋은 일이잖아! 예전에 너희 엄마랑 약속했는데, 나중에 내 아들도 문희 아들이라고! 이게 정말 현실로 될 줄은 몰랐어!”말하면서 그녀는 최연준을 한 번 툭 치고 환하게 웃었다.최연준은 마치 외계인을 보는 듯 자기 엄마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김자옥이 목청을 높이자 주변 사람들은 최연준이 한때 아내의 환심을 사기 위해 처가살이하겠다는 말
최씨 가문 남자들은 다 좋은데 유독 한 가지, 마누라만 보면 기가 죽는다는 공통점이 있다.조상의 조정 중신, 장원, 장군... 모두 밖에서는 살벌하고 과단성이 있고 매정하였으나 집에 돌아오면 부인에게 충성하고 총애한다고 들었다.육경섭은 의심병이 최씨 가문의 유전병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사실 ‘마누라 바라기’ 가 최씨 가문의 모든 남자의 유전자에 새겨져 있다.“여보.”강서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님께서 동의했어요!”최연준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엄마는 동의했지만 할아버지도 있잖아. 할아버지는...”“연준아.”최재원은 안색이 약간 심각한 표정으로 사람들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강서연은 민망한 듯 최연준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며 고개를 저었다.원래 농담으로 한 얘기인데 만약 정말로 영감님을 불쾌하게 한다면 그녀는 죄를 짓는 것이다.“할아버지, 오해하지 마세요!”강서연이 웃으면서 해명했다.“저와 연준 씨는 그냥 하는 말이에요...”“이렇게 큰일을 어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어?”최재원이 목소리를 높였다.강서연은 마음이 긴장해서 작은 손은 불안한 듯 치맛자락을 잡아당겼다.최재원은 눈을 가늘게 뜨고 깊은 눈빛으로 두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정말 그렇게 말했어?”“네.”최연준은 암암리에 강서연의 손을 잡고 태연하게 말했다.“그때 할아버지께서 저와 서연이의 혼인을 반대해서 속상하지 않게 하려고 말했어요. 저도 서연이가 억울함을 당하는 것을 싫어해서 그럴 생각이 있었어요.”“여보...”강서연은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부르고 필사적으로 눈치를 줘서 더 이상 말하지 못하게 했다.가까스로 할아버지의 인정을 받은 그녀는 이 사소한 일로 영감님의 마음속에 있는 좋은 인상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최재원은 무표정한 얼굴이어서 다소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고 음악도 자연스럽게 멈췄다.모두 그를 조마조마하게 바라보며 또 무슨 문제가 생길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침묵이 흐르다가 최재원이 갑자기 말했다.“그래, 말했으니까 그렇게 해야지!
윤정재는 일찍이 이곳의 웃음소리를 듣고 윤문희의 손을 잡고 이쪽으로 왔다.최재원은 곧 진지한 모습으로 돌아와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담소 몇 마디를 건네고 두 사람은 도우미에게서 술잔을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다 마시고 나서 중요한 문제를 묻는 것을 잊지 않았다.“윤 회장님은 언제 남양으로 돌아갈 예정인가요?”“지금 연합 병원의 프로젝트는 겨우 3분의 1밖에 진행되지 않았는데, 어쨌든 병원이 완성되면 돌아갈 거예요!”“그렇군요...”최재원이 계산해 봤다.“그럼 제가 연준이에게 미리 준비하라고 할게요! 나중에 연준이 남양에 가면 회장님에게 많은 폐를 끼칠 수도 있어요!”“네? 누가 데리고 간다고 했어요?”윤정재는 잠시 멈칫했다.최재원도 눈을 크게 뜨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강서연은 웃으면서 두 사람 사이로 걸어가 설명했다.“할아버지, 내가 남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한 것은 연준 씨와 한 농담이에요.”“맞아요.”윤문희도 웃으며 말했다.“서연이가 영감님 손주며느리인데 당연히 오성에 남아야죠!”“연준이가 처가살이하겠대요.”“정말요?”윤정재는 바로 눈을 크게 떴다.“아니에요!”윤문희가 그를 때리고 돌아서서 최재원을 바라보았다.“영감님, 우리 남양 쪽은 엄청 전통적이에요. 비록 제가 딸을 옆에 두고 싶은데 그러면 안 되는 걸 알아서 앞으로 서연이를 잘 부탁드려요!”“문희야, 집에 데리고 가자!”윤정재가 옆에서 속삭였다.“최 서방도 윤씨로 개명하면 내가 평생 배운 것을 모두 물려줄 수 있어.”“당신 정신 나갔어요! 생각도 하지 마세요!”윤문희가 경고했다.“서연이는 최 서방의 처이니, 최 서방이 어디 있으면 서연이도 같이 있어야 해요!”“하지만...”“한마디만 더 하면 당신 혼자 남양으로 돌아가세요!”윤정재는 볼을 빵빵하게 하고 머리를 숙인 채 말을 하지 않았다.최연준은 이런 광경을 보면서 웃었다. 원래 아내를 무서워하는 것은 최씨 가문 남자들만의 것이 아니었구나!강서연은 그의 품에 기대어 있었고 원무곡이 울려 퍼
성설연의 이름을 듣자마자 최지한은 짜증이 확 밀려왔다.‘정말 귀찮은 여자라니까.’“큰 도련님.”도우미는 전전긍긍하며 최지한의 답을 기다렸다.“성설연 씨를...”그런데 도우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설연이 제멋대로 쳐들어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최진혁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최진혁은 아들이 성인군자는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평소 연예인이나 모델을 자주 만났고 예전에 강유빈을 옆에 두고 노리개처럼 가지고 논 적도 있었다. 그런데 옷을 갈아입는 것보다도 여자를 더 자주 갈아치울 줄은 몰랐다.순간 화가 치밀어 오른 최진혁이 노발대발했다.“최지한, 넌 어떻게 된 게 맨날 저런 애들을 데리고 노는 거니?”최지한은 눈을 희번덕거리더니 집사에게 손을 흔들어 최진혁을 내보내라고 했다. 최진혁은 나가면서도 욕설을 멈추지 않았다.“난 네 아버지야. 아버지가 한두 마디 하는데 뭐? 그래, 계속 그렇게 놀아. 놀다가 확 죽어버려도 난 모른다. 쓸모없는 놈...”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오른 최지한은 테이블 위의 컵을 들어 냅다 벽에 던졌다.유리 조각이 성설연의 얼굴에 튀자 성설연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고는 얼굴을 부여잡고 경악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잠시 후, 최지한은 심호흡한 후 그녀를 보며 싸늘하게 웃었다.“무슨 일로 찾아왔어요?”성설연은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조금 전 묻고 싶었던 질문이 한 글자도 떠오르지 않았다.“아, 그게 저...”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려고 애를 썼다.“그러니까... 요즘 제 영상이 왜 순위에 들지 못했는지 여쭤보려고요.”최지한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도련님.”성설연의 얼굴에 조급한 기색이 역력했다.“최근 제 영상에 달린 좋아요 개수도 별로 없고 조회 수도 얼마 안 돼요...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당신이 재주가 없어서 그런 게 나와 무슨 상관이에요?”“도련님께서 절 띄워주시겠다고 하셨잖아요...”“그래요, 그렇게 얘기했었죠. 그런데요
성설연은 생각할수록 내키지 않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엉엉 울면서 화풀이하는 것뿐이었다.정신이 사나워진 최지한이 그녀를 내쫓으려던 그때 휴대 전화가 갑자기 진동했다. 누군가 사진 한 장을 보내왔는데 사진 속에 어떤 남자의 옆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최지한은 사진 속의 남자가 구현수라는걸 단번에 알아챘다.곧바로 메시지가 한 통 도착했다.「구현수 지금 오성에 있어요.」최지한의 두 눈에 음흉함이 스쳐 지나갔다.‘허, 하긴. 강명원이 망하고 나니까 구현수도 더는 강주에 못 있고 살 길을 찾아 나섰겠지.’구현수에게 있어서 오성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왜냐하면 최지한이 오성에 있으니까.최지한은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휴대 전화를 보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예전에 최연준과 구현수를 바꿔치기하려던 작전을 실행하지 못했었다. 구현수가 또 왔으니 이번이야말로 하늘이 그에게 준 기회나 다름없다.귀한 기회를 한 번 더 놓쳐서는 안 되었다. 반드시 이 절호의 찬스를 이용하여 최연준을 제거하고 구현수를 손안에 넣고 휘어잡아야 했다.그리고 성설연은... 너무 귀찮은 존재이니 차라리 구현수에게 해결하라고 해야겠다.최지한은 머리를 굴리며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음흉한 표정으로 성설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설연 씨, 울지 말아요.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울어도 소용없어요.”성설연은 그제야 울음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최지한은 또박또박 싸늘하게 말했다.“정말 인기를 얻고 싶다면 나에게만 기대서는 안 돼요.”“네?”“최연준을 꼬셔야 해요.”성설연은 잠깐 멈칫하다가 이내 미친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안 돼요, 안 돼요. 셋째 도련님의 마음속에는 사모님밖에 없어요. 얼마나 쉽지 않은 분인지 직접 겪어봐서 알아요.”“허, 그건 그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에요.”최지한이 얼굴을 그녀에게 들이밀었다. 그의 얼굴에는 핏기라곤 거의 없었고 얇은 어깨가 마치 옷걸이처럼 널찍한 셔츠를 받쳐주고 있었다. 웃을 때면 두 눈에 음험함과 흉악함
어느 날 저녁 늦은 밤, 에덴.밖의 기온이 뚝 떨어져 마당의 잔디에 서리가 살짝 내려앉았다. 하지만 추운 날씨와 달리 안방 이불 안의 온도는 뜨겁기만 했다...뜨거운 시간을 보낸 후 최연준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침대 머리맡에 기댔고 강서연은 그의 품 안에서 곤히 잠들었다.최연준은 품 안의 그녀에게 입맞춤했다. 잠시 후 그녀에게 팔베개해 주고 있던 팔을 꺼내고는 침대 옆 서랍을 살금살금 열어 반짝이는 현금을 한 뭉치 꺼냈다.그는 어두운 불빛을 빌려 한장 한장 셌다. 만 원, 이만 원, 삼만 원...총 여덟 장인 걸 확인한 순간 그의 입가에 미소가 새어 나왔다. 마치 생전 처음 많은 돈을 본 듯한 표정이었다.최연준은 돈을 다 센 후 재빨리 다시 서랍에 넣었다. 그런데 기쁨도 잠시 이런 생각이 들었다.‘이번 달 너무 부지런하지 못했어. 이 정도로는 횟수가 부족해. 같이 밤을 보낸 나날도 꽤 오래됐는데 아직도 소식이 없다니, 더 분발해야겠어.’최연준은 머리를 긁적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사실 그는 아이를 가질 생각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주변에서 어찌나 재촉하는지 다들 강서연의 배만 신경 쓰고 있었다.윤정재와 윤문희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두 사람의 가장 큰 소원이 바로 오성을 떠나기 전에 강서연이 임신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김자옥도 예전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는데 지금은 절친과 친아들 사이에서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절친을 선택했고 절친과 함께 손주를 안겨달라고 강요했다.최문혁도 가끔 참견하곤 했다. 가족 단톡방에 귀여운 아이의 사진을 보내기도 했다.그리고 최재원은 증손주를 안겨달라는 소리를 맨날 입에 달고 다녔다. 하여 최연준은 요즘 할아버지가 집에 와서 밥을 먹으라는 소리가 가장 두려웠다....이튿날 몇몇 남자들은 또 술집의 룸에 모였다.배경원과 육경섭, 그리고 방한서는 카드 게임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최연준과 유찬혁은 소파 양 끝에 앉아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카드를 섞던 배경원이 슬쩍 물었다.“저 두 사
“그렇다면 연준 씨 문제예요?”“저리 썩 꺼져요!”“왜 화를 내고 그래요? 기능 장애가 있다고 한 것도 아닌데.”육경섭이 목소리를 내리깔았다.“내 말은... 혹시 자주 해요?”최연준의 낯빛이 급변하더니 육경섭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의 표정을 본 육경섭은 최연준의 가슴팍을 쿡 찔렀다.“이것 봐요,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있잖아요, 너무 자주 해서도 안 돼요. 며칠 참았다가 적절한 타이밍에 끝장내야만 한 방에 성공할 수 있다니까요.”최연준은 성가신 듯 표정이 굳었다.“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다 어디 가서 들었어요?”육경섭이 진지하게 말했다.“이건 과학이에요.”‘과학은 개뿔.’최연준은 속으로 욕했다.‘용돈도 얼마 안 되는데 자주 해서는 안 된다는 게 과학이면 돈을 어떻게 벌어?’그들의 수다는 점점 열기를 더해갔지만 유찬혁은 바 카운터에 홀로 쓸쓸하게 앉아있었다. 마치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처럼 말이다.“야, 유찬혁.”배경원이 술을 들고 다가가 그의 등을 툭 쳤다.“혼자 넋 놓지 말고 저쪽 가서 같이 놀자.”“나...”유찬혁은 뭔가 말하려다가 다시 삼켰다. 최연준의 날카로운 눈빛과 마주한 순간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최연준은 자기 술잔에 술을 따르며 가볍게 말했다.“할 얘기 있으면 해.”유찬혁이 머뭇거리자 그들은 또 성설연 때문에 속상해하는 줄로 생각했다. 하여 유찬혁을 설득할 만한 말을 구상하던 그때 유찬혁이 갑자기 말했다.“연준 형, 보미 진짜 나석진 씨와 데이트했대요?”그의 말에 나머지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최연준은 유찬혁의 두 눈을 빤히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그러니까 말이야.”배경원이 큰 소리로 말했다.“진실을 알고 싶으면 곽보미에게 직접 물어봐야지.”유찬혁은 입술만 잘근잘근 씹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찬혁아, 너 오늘 좀 이상하다? 왜 갑자기 곽보미를 신경 쓸까? 난 네가 또 우울해 있으니까 성설연 때문인 줄 알았잖아.”잠시 후 유찬혁이 씁쓸하
“아... 가족?”유찬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예전에 나석진 얘기만 꺼내면 버럭 화를 내던 질투쟁이는 어디 갔지?’다행히 유찬혁은 까발리지 않고 그저 술만 마셨다.그래도 나름대로 경험이 있는 변호사인데 최연준의 두어 마디에 넘어갈 리가 있겠는가?그는 최연준을 향해 씩 웃더니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했다.“연준 형, 이젠 나석진 씨와 형 동생 하는 사이가 되었어요? 그런데 있잖아요, 남양 쪽은 보수적이라서 많은 가문들이 자신의 지위를 굳히려고 사촌들끼리 결혼하게 한대요. 그러니까 남양에서는 사촌 오빠와 사촌 여동생이 결혼하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라고요. 그쪽에서는 합법이에요.”유찬혁은 사촌 오빠와 사촌 여동생, 그리고 합법이란 단어를 특히 더 강조했다.그런데 이 방법이 최연준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았다.최연준은 소파에 털썩 앉더니 한 손은 등받이에 올려놓고 다른 한 손으로 술잔을 흔들며 웃을 듯 말 듯 했다.“그건 내가 진작 알아봤어.”최연준의 여유로운 모습에 유찬혁은 살짝 멈칫했다.“뭐라고요?”“와이프 고향의 풍습을 내가 모를 리가 있겠어?”“연준 형...”최연준이 그윽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고 선이 굵은 얼굴에 조롱 섞인 미소가 지어졌다.“나와 서연이가 결혼하지 않았어도 나석진 씨와 서연이는 불가능해.”평소 어리바리하던 배경원이 웬일로 가장 먼저 알아듣고 풉 하고 입에 있던 술을 뿜었다.‘그래. 연준 형네 장인어른이 정력제까지 준 걸 보면 얘기가 끝났지, 뭐. 다른 사람은 절대 안 돼.’박장대소하는 배경원과 달리 유찬혁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형 그렇게 자신 있어요?”“그럼.”배경원은 웃으며 유찬혁의 어깨를 두드렸다.“자신감이 아주 넘쳐나지.”최연준은 턱을 살짝 치켜들며 의기양양했다.유찬혁은 최연준을 으르는 체하려 했지만 결국 그의 위압감과 지나친 자신감에 두 손 두 발을 들고 말았다.최연준은 언제나 침착하게 행동한다는 걸 진작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이번에는 그의 실책이었다. 아무래도 최연준에게서 뭔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