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되자 최연준과 강서연은 에덴으로 돌아왔다.차는 마당에 주차되어 있었고 두 사람은 차 안에서 키스를 하고 있었는데 밀폐된 공간에는 약간의 야릇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강서연은 점점 호흡이 불안정했지만 최연준의 들이닥치는 손을 잡고 집에 가서 하자고 손짓했다.그와 그렇게 오래 같이 있었는데 그런 면에서 그녀는 아직도 보수적이다. 이런 일은 너무 사적이어서 당연히 사적인 곳에서만 할 수 있다.“여보...”최연준은 목이 메었다.“나는 참을 수가 없어!”“참을 수 없어도 참아야 해요!”강서연은 고양이처럼 그의 가슴에 기댔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경고했다.“이번 달 용돈을 취소하게 하지 마요!”최연준은 괴로워 죽겠다는 듯이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하지만 그도 알고 있었다. 강서연이 ‘사적인 공간’ 에서 커튼을 치고 이불을 덮으면 그녀는 더 이상 키스만 해도 얼굴이 빨개지는 사람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그녀가 대담할 때를 생각하면 최연준의 혼을 다 빨아들일 것만 같았는데 그야말로 정말...최연준은 곧바로 그녀를 품에 안고 차에서 내려 곧장 집으로 향했다.두 사람은 현관에서 포옹을 하고 최연준이 아직 키스도 못했는데 거실 불이 갑자기 켜져 강서연이 놀라서 소리를 냈다.방한서가 뚱냥이를 끌어안고 거실에 서 있었고 박경실도 활짝 웃고 있었다. 거실은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고 대리석 바닥에는 장미 꽃잎이 가득 깔려 있어 사소한 것 하나까지 낭만적인 분위기를 풍겼다.“서프라이즈!”방한서는 뚱냥이의 발을 움켜쥐고 그들을 향해 흔들었다.“도련님, 사모님 어떠세요? 제가 특별히 준비한 거예요!”강서연은 볼이 발그레해지고 눈가에는 웃음꽃이 피었다.최연준은 십여 초 동안이나 멍하니 있다가 하마터면 폭발할 뻔했다.‘왜 맨날 쟤야? 맨날 쟤야!’이번에는 더욱 심하다. 이런 날에 박경실과 뚱냥이까지 함께 데리고 오다니!혼인신고를 하고 나서 분명히 얼마나 멀리 갈 수 있으면 가라고 특별히 당부하지 않았던가.“방한서!”이 포효소리는 거의 지붕을 뚫을
안마사는 직업적인 미소를 띠고 말했다.“이 정도 힘이면 될까요?”성설연은 온몸이 한순간에 가벼워졌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저희가 정성껏 모시겠습니다!”성설연은 웃으며 마음이 많이 상쾌해졌다.여기에 오기 전에 그녀는 이미 밤낮없이 이틀 동안 촬영을 했기 때문에 힘들어 죽을 뻔했다. 하필이면 곽보미가 진도를 내야 한다고 말했고 전부 주아와 맞붙는 장면이었다.주아는 어떤 사람인가? 지난번 따귀를 맞은 후 그녀는 다시는 성설연을 순순히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그러자 성설연은 배역을 바꾸고 싶어 했고 주아와 함께 연기하고 싶지 않다고 하자 또 전 출연진의 비웃음을 샀다.곽보미는 그저 담담하게 그녀를 보았을 뿐이었고 말 한마디만 남겼다.“당신은 이 역할밖에 없어요. 촬영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계약을 해지해도 늦지 않아요! 저 곽보미는 이 정도의 돈은 있어요.”이로써 성설연은 모두가 연합하여 그녀를 괴롭힌다고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그녀는 유찬혁에게 전화를 걸어 불쌍하게 울면서 자신이 당한 일을 하소연했는데 유찬혁은 오히려 전화 속에서 그녀를 타일렀다.“설연아, 너는 이제 막 데뷔했으니 겸손하게 행동하고 스텝들과 잘 지내야 해... 보미는 재능 있는 감독이어서 네가 노력하면 그 사람은 너를 띄워 줄 거야.”성설연은 핸드폰을 내던지고 페이스북에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호소한 글을 올렸고 다행히 낸시가 제때 이를 발견하고는 경고했다.“성설연, 연예계에서 은퇴하고 싶으면 일찌감치 말해. 내 밥줄까지 망치지 말고! 이런 것도 올리다니 이제는 사람들을 안 보고 살 거야? 빨리 삭제해!”성설연은 마지못해 글을 삭제했지만 게시한 지 1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봤다.이 중에는 사고뭉치 최지한도 포함되어 있다.“성설연... 혹시 최연준에게 매장당할 뻔한 그 가수 맞아?”“네, 도련님. 유 변호사님이 짝사랑하는 사람이에요!”“유찬혁, 이 개자식아. 네가 화를 자초한 거
성설연은 순간 멈칫했다.‘강유빈? 어진 엔터테인먼트의 강서연 하나라도 골치 아픈데 또 강씨야?’강유빈의 시선도 성설연에게 향했다. 처음에는 의문이 가득했던 표정이 점차 질투와 분노로 바뀌었다.“허, 도련님이 저 여우 년 때문에 날 못 오게 한 거였어?”그 말에 성설연은 순간 발끈했다. 그런데 성설연이 받아치기도 전에 강유빈이 먼저 그녀의 따귀를 냅다 내리쳤다.“이 천한 년!”강유빈은 여리고 나약한 여배우가 아니다. 여배우가 사람을 때리는 건 그래도 어느 정도 연기가 가미된 부분이 있지만 강유빈의 전투력은 예전에 임나연에게서 쌓아온 것이다.“파렴치한 년! 네까짓 게 뭔데 감히 도련님에게 꼬리를 쳐? 오늘 널 갈기갈기 찢어 버릴 거야. 계속 도련님에게 꼬리 칠 수 있는지 두고 보겠어.”“으악. 이거 놔!”두 사람은 마구 잡아 뜯기 시작했다. 클럽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고 비명과 욕설이 난무하면서 명황산 아래 가장 독특한 풍경을 자아냈다.옆에서 말리는 사람도 없었고 어떻게 말려야 할지도 몰라 그저 싸우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성설연은 아예 강유빈의 상대가 아니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이 퉁퉁 부은 채 패했다. 마지막에 강유빈이 주먹으로 가슴팍을 가격하자 실리콘 가슴이 흔들린 바람에 화들짝 놀라 가슴을 움켜쥐었다.최지한이 준 마약을 한 강유빈은 한껏 흥분한 나머지 성설연의 머리카락을 꽉 잡고 절대 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성설연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사람들은 그제야 일이 더 커질까 염려되어 앞으로 다가와 말렸다. 현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크게 기침 소리를 내자 순식간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최지한이 굳은 얼굴로 밖에서 들어오는 걸 본 사람들은 숨소리조차 내질 못했고 강유빈만 성설연의 머리를 계속 쥐어뜯고 있었다.성설연은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얼굴이 다 일그러졌다.“지금 뭐 하는 거야!”최지한의 목소리마저 다 변했다.“미쳤어?”강유빈은 그제야 손을 내려놓고 고분고분해졌다.
유찬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최지한을 쳐다보았다.뒤집을 수 있다는 최연준의 한마디에 유찬혁은 이곳까지 왔다. 그리고 이 시간을 택한 건 최지한이 아직 쉬지 않고 유흥을 즐기고 있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최지한에게서 쓸모 있는 정보를 얻어내려면 당연히 그를 만날 가능성이 있는 시간을 택해야 했다. 그런데 지금 이 시간에 이곳에서 성설연의 이런 모습을 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유찬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가슴 속의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성설연도 놀란 두 눈으로 유찬혁을 쳐다보았다. 옷차림이 단정하지 못하고 머리도 헝클어졌으며 게다가 얼굴에 상처까지 입은 채 최지한의 품에 찰싹 안겨 있었다.유찬혁은 갑자기 자신을 비웃었다. 그동안 그녀를 좋아했던 마음과 집착이 한순간에 완전히 무너졌다.인터넷에서 자주 보던 질문 하나가 문득 떠올랐다. 당신은 언제부터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나요?유찬혁에게 있어서 그 순간이 바로 지금이다. 그는 성설연도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한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했던 그 마음을 좋아한 걸지도 모른다. 여태껏 그는 성설연에게 빛을 수도 없이 가져다주었다.사실 성설연은 연예계에서 다른 일반 여자 연예인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그 여자 연예인들은 그녀보다 훨씬 솔직했다. 적어도 욕망을 얼굴에 드러냈고 그녀처럼 청순한 척하면서 욕망을 숨기진 않았다.“변호사님.”최지한이 피식 웃었다.“저기... 오해하지 말아요. 설연 씨가 촬영하느라 힘든 것 같아서 변호사님 대신 챙겨주려고 그런 거예요.”“참 고맙네요, 도련님.”“별것도 아닌데요, 뭐.”최지한이 씩 웃었다.“변호사님, 여긴 너무 시끄러우니까 다른 데로 자리를 옮길까요?”“그래요.”유찬혁의 목소리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도련님의 뜻대로 하시죠.”유찬혁이 화난 것 같지는 않자 최지한은 그제야 조금 시름이 놓였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성설연을 보내라고 한 후 유찬혁과 함께 클럽하우스의 최고급 V
최연준이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니 강서연은 이미 표를 깔끔하게 만들어놓은 뒤였다.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대고 코를 비벼댔다.“꼼꼼한 당신이 장부를 관리한다면 아무리 복잡한 장부도 깔끔하게 정리되겠네.”“말은 참 예쁘게 한단 말이죠.”강서연은 돌아앉아 그의 코끝을 톡 쳤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여보, 난 말도 예쁘게 하고...”최연준은 낮게 깔린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밤에도 잘해.”강서연은 장부에만 정신이 팔려 뭘 잘한다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뭘 잘한다는 거예요? 회사 일 좀 처리하는 것 말고 당신이 집안일을 신경이나 쓴 적이 있어요? 내가 다시 계산해 보니 까 최씨 빌라의 수입과 지출의 평형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겠더라고요. 하지만 불필요한 비용을 줄이고 자원을 합쳐야 해요. 그러면 많이 아낄 수 있고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어요... 이봐요, 내가 지금 얘기하고 있잖아요. 듣고 있어요?”‘이 남자 대체 뭐 하자는 거야? 내가 지금 진지한 얘기를 하고 있는데 계속 얼굴이나 들이밀고. 못살아, 정말.’“최연준!”“여보, 나 듣기 싫어.”욕구불만인 최연준은 오로지 그녀와 다시 침대로 돌아가 자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강서연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매달 10만 원밖에 안 되는 그의 용돈을 6만 원으로 고쳐놓았다.그 순간 최연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아 참, 저번에 준 블랙 카드 있잖아요. 그것도 다시 내놔요.”“여보... 그건 내 능력으로 번 돈이야.”“이젠 이 집안의 규정이 바뀌었잖아요. 당연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죠.”풀이 죽어 시무룩해진 최연준의 모습에 강서연은 몰래 피식 웃었다.최연준은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그녀에게 하나하나 분석했다. 이렇게 노동력을 착취해서는 안 된다면서 엄청난 자본가도 이 정도 깍쟁이가 아니라고 했다.‘한 달에 6만 원으로 어떻게 살아...’강서연은 갑자기 돌아앉아 작은 손으로 최연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두 눈에 빛이
최연준은 아무 말이 없었다. 원래는 스스로 짊어지려고 했었지만 예전에 입을 꾹 다물었다가 하마터면 그녀를 잃을 뻔했다. 이런 바보 같은 짓을 두 번 다시는 하지 않을 것이다.그는 가볍게 웃으며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 나지막하게 말했다.“강명원이 지금 오성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품에 안겨 있던 강서연이 움찔하자 최연준은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강씨 가문의 회사는 완전히 부도났고 강유빈은 최지한의 노리개가 되었어...”최연준은 그녀에게 차근차근 얘기했다.“강명원 지금 돈이 많이 필요할 거야. 그러니까 딸 찾으러 오성에 온 것도 이상할 건 없지.”“딸 찾으러 온 것만은 아니겠죠.”강서연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마 나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최연준은 그녀의 긴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녀의 부드러우면서도 고집스러운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예전에 강서연을 처음 만났을 땐 그녀가 자기주장도 내세울 줄 모르는 연약한 여자라고 생각했었지만 사실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한 여자였다. 하여 그녀에게 무슨 얘기든 거리낌 없이 했다.“당신을 찾으러 올뿐만 아니라 장모님도 찾으러 갈 거야. 그때 강주에 있을 때도 강명원이 당신네 집에 찾아가서 한바탕 난리를 피웠었잖아. 하지만 걱정하지 마. 강명원이 한 발짝도 다가가지 못하게 장모님 쪽에 이미 사람을 붙여뒀어.”강서연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이내 달콤하게 웃었다. 최연준은 무슨 일이든 항상 미리 완벽하게 처리했다.“왜 그렇게 봐?”최연준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강서연은 그런 그를 보며 솔직하게 얘기했다.“고마워요, 여보...”“당신과 나 사이에 고맙다는 말이 필요해?”강서연은 가볍게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음속에 따뜻함이 사르르 퍼져나갔다.“정말로 고마우면...”최연준이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앞으로 용돈이나 더 줘.”강서연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그를 밀쳐내려 했지만 최연준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소파 위에서 꼼
‘예전에 그렇게 오만하고 자부심도 강했던 할아버지가 언제 이렇게 구차해지셨지?’“할아버지.”강서연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으며 테이블 밑으로 남편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사실 저도 초밥을 먹고 싶었어요. 그리고 장어덮밥도요.”“그래...”최재원이 잠깐 생각하다가 박경수에게 눈빛을 보내자 박경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 요리사도 정신을 번쩍 차리고 자세를 고쳐잡더니 90도 인사를 하고는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네.”그러고는 곧장 준비하러 주방으로 향했다.최연준은 체념한 듯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본가의 분위기가 점점 답답해지고 있어. 다음에는 차라리 단식할까? 할아버지도 직접 키운 후계자가 배를 곯는 걸 보고만 있진 않겠지. 그리고 서연이도 마음 아파할 거야. 어쩌면 예전보다 훨씬 더 다정해지고 용돈도 올려줄 뿐만 아니라 블랙 카드도 다시 줄지 몰라... 그래, 그렇게 하자!’최연준은 씩 웃고는 눈앞의 연어회를 허겁지겁 먹었다.“도련님.”박경수가 서류 하나를 들고 왔다.“이건 내년에 오성대에 후원할 리스트입니다. 한번 보세요...”최연준이 받으려는데 최재원이 한마디 툭 던졌다.“서연이에게 줘. 이제부터 이런 일은 다 서연이가 결정할 거야.”“할아버지, 뭐라고요?”최연준이 화들짝 놀랐다.“아 참, 깜빡하고 얘기 안 했네.”최재원은 휴지로 입을 닦았다.“서연이가 재무관리도 아주 전문가처럼 잘하더라고. 너보다 훨씬 잘해. 그래서 말인데 집안일뿐만 아니라 회사 재정도 앞으로 서연이에게 천천히 맡길 생각이야.”최연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럼 저는...”“넌 돈을 잘 벌잖아.”최재원의 계획은 아주 용의주도했다.“네가 돈을 벌고 서연이가 돈을 관리하면 얼마나 좋아.”“네... 좋긴 하죠.”어젯밤 힘들게 받은 ‘인센티브’ 생각에 최연준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강서연은 반짝이는 두 눈으로 그를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미소에 최연준은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최연준은 강서연의 가느다란 허리를 몰래 감싸
최연준은 이런 얘기는 윤정재나 윤문희가 직접 강서연에게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강서연이 다른 사람에게서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말이 달라진다.최재원은 마른기침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도우미가 복숭아꽃으로 데코한 생선찜을 그들의 앞에 한 접시씩 내려놓았다.“서연아.”최재원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얼른 먹어봐.”강서연은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 최연준의 신분을 몰랐을 적에 그와 함께 온천 리조트로 신혼여행을 갔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 따뜻한 봄이라 꽃이 활짝 피어있었고 온천 근처의 산에 복숭아꽃이 만개하여 그야말로 천국 같았다.그리고 온전 리조트의 간판 요리도 마침 이 생선찜이었다. 그때 강서연은 생선 눈알을 최연준에게 집어줬었다.오늘도 마찬가지로 가장 귀한 걸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었다.그 모습에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최재원의 얼굴에 보일 듯 말 듯 한 부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한참 후, 최재원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예전에 네 할머니도... 나에게 그랬었는데.”최연준과 강서연은 동시에 젓가락질을 멈췄다.최연준은 지금까지 할아버지와 함께 지내면서 할아버지의 이런 슬픈 표정을 처음 봤다.할머니는 최연준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돌아가셨기에 할머니에 대한 인상은 최재원의 서재에 있는 유채화와 테이블 위의 낡은 사진뿐이었다.그리고 그가 알고 있는 최재원은 차갑고 진지하며 인정이 없는 야속한 사람이었고 사업을 할 때는 또 백절불굴의 성격으로 유명했다.하여 최연준은 최재원에게도 남들이 알지 못하는 예민함과 나약함, 그리고 마음속에 사랑하는 사람을 품고 있다는 걸 전혀 몰랐다.“할아버지...”“하하, 괜찮아, 괜찮아.”최재원은 재빨리 마음을 다잡았다.“나 신경 쓰지 말고 계속 식사해. 어휴, 사람은 나이가 들면 자꾸 옛날 생각을 한다니까...”“할아버지.”강서연이 가볍게 웃었다.“혹시 내일 연준 씨와 함께 할머니 뵈러 가도 될까요?”최연준이 화들짝 놀랐다. 그녀를 쳐다보는 최재원의 눈빛에도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