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준의 기억력은 문제가 없다.기억은 했는데 이 약이 도대체 무엇인지 윤정재는 아직 말하지 않았다.“윤 회장님, 이게 무슨 약입니까?”윤정재는 그를 바라보며 여우 같은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걱정하지 마, 너에게 유익하기만 하고 아무런 해가 없어!”“그래도 이 약이 뭔지는 알아야 하지 않아요?”윤정재는 입꼬리가 올라가며 또박또박 네 글자를 말했다.“보신익정!”풉!최연준은 하마터면 손에 쥐고 있던 약병을 다시 던져주는 충동을 억제하지 못할 뻔했다.‘보신? 이 늙은이가! 나보다 당신이 더 필요한 것 같은데!’...강서연과 최연준은 혼인신고를 하는 시간을 일부러 오후 13시 14분으로 잡았다.친한 친구들이 모두 참석하여 구청에서 그들 두 사람의 가장 행복한 순간을 함께 목격하였다.두 사람은 강당에서 사진을 찍고 선서를 마친 뒤 진정한 부부가 된 순간 최연준의 심장이 목구멍에서 튀어나올 뻔했다.강서연 역시 감동해서 웃기만 할 뿐 그의 가슴에 기대었다. 강력한 심장박동 소리를 들으며 그녀에게 무한한 안정감을 선사했다.최연준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마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육경섭이 축하해줬다.“축하해요! 두 분 어렵게 여기까지 왔는데 앞으로 좋은 일만 가득하길 바랄게요!”임우정은 눈시울을 붉히며 강서연을 꼭 끌어안은 채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결국 육경섭이 둘을 떼어놓았다.“여보, 서연 씨 남편도 옆에 있는데 주의 좀 해.”“어때서!”임우정이 웃음을 터트렸다.배경원이 준비한 미니 예포를 당기자 펑 하고 예쁜 꽃가루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배경원은 열심히 분위기를 띄워주며 필사적으로 박수를 쳤다.육경섭은 눈살을 찌푸리며 웃음이 새어 나왔다.“경원 씨, 역시 분위기 메이커답게 잘하네요!”“당연하죠!”배경원은 의기양양했다.“나는 두 사람의 결혼식을 위해 서프라이즈를 준비하고 있어요!”“뭘 보여 주려는 거예요?”육경섭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당연히 축가 한 곡 해야죠!”사람들이 줄줄이 도망가는 것처럼 연기하자
“연준 형!”배경원이 소리쳤다.“혼인신고도 했으니 우리 어디 가서 크게 축하할까요?”최연준은 마음을 가다듬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축하해야지.”“그럼 제가 호텔을 예약할게요!”배경원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강서연을 바라봤다.“형수님은 무엇을 드시고 싶어요?”모두 너나 할 것 없이 토론의 열기가 하늘을 찔렀다.최연준은 담담하게 조용히 문 쪽을 바라보았다.그 사람은 이미 없어진 것 같다.“뭘 보고 있어요?”강서연이 그의 팔짱을 끼자 최연준은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속삭였다.“먼저 차에서 기다려. 내가 전화 한 통만 하고 할게.”강서연은 잠시 멈칫했고 오늘 한사람이 나타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이것은 그들 형제 사이의 일이니 갈등이 있더라도 그들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최연준에게 다정한 눈빛을 보내고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그들이 멀리 떠난 후 최연준은 홀로 강당에 앉아 있었고 한참 있다가 밖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연준 형.”최연준이 그를 올려다보았다.유찬혁은 부끄러운 기색을 띠고 어색하게 웃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강서연 씨와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해요.”그는 선물을 최연준 앞에 두었다.“이것은 나의 작은 마음이니 받아주세요.”최연준은 반쯤 침묵했다.유찬혁은 한쪽에 서서 진퇴양난에 빠졌다. 그는 최연준의 희로애락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의 안색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그러나 최연준이 노하면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그도 알고 있었다.유찬혁은 심호흡을 하고 살며시 그를 관찰했다. 한참 후 최연준이 마침내 그를 올려다봤고 먹빛 눈동자 속의 한기가 조금씩 사그라지는 듯했다.“연준 형, 그날 미안했어요.”유찬혁이 정중하게 사과했다.최연준은 일어나 입꼬리가 올라가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유찬혁은 자존감이 강해서 그의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을 듣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됐어, 나도 마음
“찬혁아. 우리는 네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사람은 겪어봐야 아는 것이라고 나중에 네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본 후에 결정하자.”“형, 설연이는...”“됐어, 그 이름 듣기 싫어!”유찬혁은 입술을 깨물고 최연준의 차가운 눈을 보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그리고 또 한 가지 일이 있는데...”유찬혁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이실직고했다.“며칠 전에 최지한이 다쳤는데 알고 있어요?”최연준은 술집 주차장에서 싸움이 붙었다고 한 것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그날이 딱 마침 그와 유찬혁이 사이가 좋지 않았던 날이다.최연준은 생각에 잠겼다가 바로 이해가 갔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유찬혁을 바라보았다.“그날 밤 내가 먼저 간 후에 네가 또 그 사람이랑 잠깐 얘기를 했나 봐?”최연준은 웃는 것 같기도, 웃지 않는 것 같기도 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유찬혁은 온몸에 식은땀을 흘렸다.“연준 형, 나는...”최연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힐끗 보았다.유찬혁은 목이 굳었지만 계속해서 설명했다.“그 사건은... 내가 처리했어요. 경수 아저씨께서 나를 찾아와서 최지한이 시비를 걸어 경찰에 잡혀갔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응.”최연준과 유찬혁은 어려서부터 쭉 알고 지낸 사이로서 최지한이 말 몇 마디로 이간질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괜찮아.”최연준은 유찬혁을 보며 말했다.“변호사로서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많다는 걸 알아. 최지한이 아무리 인성이 더럽고 무능하다 해도 결국은 최씨 가문 사람이야. 최지한에게 일이 생기면 최씨 가문에 먹칠할 수 있어 할아버지께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어. 그래서 아저씨가 너를 찾아간 것도 아마 할아버지의 뜻일 거야.”유찬혁은 한참을 멈췄다가 긴 한숨을 내쉬며 쓴웃음을 지었다.“형이 이해해 주면 돼요.”“다 해결됐어?”“네.”이런 작은 사건은 유찬혁에게 식은 죽 먹기다.“그쪽 상대가 합법적인
밤이 되자 최연준과 강서연은 에덴으로 돌아왔다.차는 마당에 주차되어 있었고 두 사람은 차 안에서 키스를 하고 있었는데 밀폐된 공간에는 약간의 야릇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강서연은 점점 호흡이 불안정했지만 최연준의 들이닥치는 손을 잡고 집에 가서 하자고 손짓했다.그와 그렇게 오래 같이 있었는데 그런 면에서 그녀는 아직도 보수적이다. 이런 일은 너무 사적이어서 당연히 사적인 곳에서만 할 수 있다.“여보...”최연준은 목이 메었다.“나는 참을 수가 없어!”“참을 수 없어도 참아야 해요!”강서연은 고양이처럼 그의 가슴에 기댔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경고했다.“이번 달 용돈을 취소하게 하지 마요!”최연준은 괴로워 죽겠다는 듯이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하지만 그도 알고 있었다. 강서연이 ‘사적인 공간’ 에서 커튼을 치고 이불을 덮으면 그녀는 더 이상 키스만 해도 얼굴이 빨개지는 사람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그녀가 대담할 때를 생각하면 최연준의 혼을 다 빨아들일 것만 같았는데 그야말로 정말...최연준은 곧바로 그녀를 품에 안고 차에서 내려 곧장 집으로 향했다.두 사람은 현관에서 포옹을 하고 최연준이 아직 키스도 못했는데 거실 불이 갑자기 켜져 강서연이 놀라서 소리를 냈다.방한서가 뚱냥이를 끌어안고 거실에 서 있었고 박경실도 활짝 웃고 있었다. 거실은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고 대리석 바닥에는 장미 꽃잎이 가득 깔려 있어 사소한 것 하나까지 낭만적인 분위기를 풍겼다.“서프라이즈!”방한서는 뚱냥이의 발을 움켜쥐고 그들을 향해 흔들었다.“도련님, 사모님 어떠세요? 제가 특별히 준비한 거예요!”강서연은 볼이 발그레해지고 눈가에는 웃음꽃이 피었다.최연준은 십여 초 동안이나 멍하니 있다가 하마터면 폭발할 뻔했다.‘왜 맨날 쟤야? 맨날 쟤야!’이번에는 더욱 심하다. 이런 날에 박경실과 뚱냥이까지 함께 데리고 오다니!혼인신고를 하고 나서 분명히 얼마나 멀리 갈 수 있으면 가라고 특별히 당부하지 않았던가.“방한서!”이 포효소리는 거의 지붕을 뚫을
안마사는 직업적인 미소를 띠고 말했다.“이 정도 힘이면 될까요?”성설연은 온몸이 한순간에 가벼워졌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저희가 정성껏 모시겠습니다!”성설연은 웃으며 마음이 많이 상쾌해졌다.여기에 오기 전에 그녀는 이미 밤낮없이 이틀 동안 촬영을 했기 때문에 힘들어 죽을 뻔했다. 하필이면 곽보미가 진도를 내야 한다고 말했고 전부 주아와 맞붙는 장면이었다.주아는 어떤 사람인가? 지난번 따귀를 맞은 후 그녀는 다시는 성설연을 순순히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그러자 성설연은 배역을 바꾸고 싶어 했고 주아와 함께 연기하고 싶지 않다고 하자 또 전 출연진의 비웃음을 샀다.곽보미는 그저 담담하게 그녀를 보았을 뿐이었고 말 한마디만 남겼다.“당신은 이 역할밖에 없어요. 촬영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계약을 해지해도 늦지 않아요! 저 곽보미는 이 정도의 돈은 있어요.”이로써 성설연은 모두가 연합하여 그녀를 괴롭힌다고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그녀는 유찬혁에게 전화를 걸어 불쌍하게 울면서 자신이 당한 일을 하소연했는데 유찬혁은 오히려 전화 속에서 그녀를 타일렀다.“설연아, 너는 이제 막 데뷔했으니 겸손하게 행동하고 스텝들과 잘 지내야 해... 보미는 재능 있는 감독이어서 네가 노력하면 그 사람은 너를 띄워 줄 거야.”성설연은 핸드폰을 내던지고 페이스북에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호소한 글을 올렸고 다행히 낸시가 제때 이를 발견하고는 경고했다.“성설연, 연예계에서 은퇴하고 싶으면 일찌감치 말해. 내 밥줄까지 망치지 말고! 이런 것도 올리다니 이제는 사람들을 안 보고 살 거야? 빨리 삭제해!”성설연은 마지못해 글을 삭제했지만 게시한 지 1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봤다.이 중에는 사고뭉치 최지한도 포함되어 있다.“성설연... 혹시 최연준에게 매장당할 뻔한 그 가수 맞아?”“네, 도련님. 유 변호사님이 짝사랑하는 사람이에요!”“유찬혁, 이 개자식아. 네가 화를 자초한 거
성설연은 순간 멈칫했다.‘강유빈? 어진 엔터테인먼트의 강서연 하나라도 골치 아픈데 또 강씨야?’강유빈의 시선도 성설연에게 향했다. 처음에는 의문이 가득했던 표정이 점차 질투와 분노로 바뀌었다.“허, 도련님이 저 여우 년 때문에 날 못 오게 한 거였어?”그 말에 성설연은 순간 발끈했다. 그런데 성설연이 받아치기도 전에 강유빈이 먼저 그녀의 따귀를 냅다 내리쳤다.“이 천한 년!”강유빈은 여리고 나약한 여배우가 아니다. 여배우가 사람을 때리는 건 그래도 어느 정도 연기가 가미된 부분이 있지만 강유빈의 전투력은 예전에 임나연에게서 쌓아온 것이다.“파렴치한 년! 네까짓 게 뭔데 감히 도련님에게 꼬리를 쳐? 오늘 널 갈기갈기 찢어 버릴 거야. 계속 도련님에게 꼬리 칠 수 있는지 두고 보겠어.”“으악. 이거 놔!”두 사람은 마구 잡아 뜯기 시작했다. 클럽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고 비명과 욕설이 난무하면서 명황산 아래 가장 독특한 풍경을 자아냈다.옆에서 말리는 사람도 없었고 어떻게 말려야 할지도 몰라 그저 싸우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성설연은 아예 강유빈의 상대가 아니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이 퉁퉁 부은 채 패했다. 마지막에 강유빈이 주먹으로 가슴팍을 가격하자 실리콘 가슴이 흔들린 바람에 화들짝 놀라 가슴을 움켜쥐었다.최지한이 준 마약을 한 강유빈은 한껏 흥분한 나머지 성설연의 머리카락을 꽉 잡고 절대 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성설연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사람들은 그제야 일이 더 커질까 염려되어 앞으로 다가와 말렸다. 현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크게 기침 소리를 내자 순식간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최지한이 굳은 얼굴로 밖에서 들어오는 걸 본 사람들은 숨소리조차 내질 못했고 강유빈만 성설연의 머리를 계속 쥐어뜯고 있었다.성설연은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얼굴이 다 일그러졌다.“지금 뭐 하는 거야!”최지한의 목소리마저 다 변했다.“미쳤어?”강유빈은 그제야 손을 내려놓고 고분고분해졌다.
유찬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최지한을 쳐다보았다.뒤집을 수 있다는 최연준의 한마디에 유찬혁은 이곳까지 왔다. 그리고 이 시간을 택한 건 최지한이 아직 쉬지 않고 유흥을 즐기고 있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최지한에게서 쓸모 있는 정보를 얻어내려면 당연히 그를 만날 가능성이 있는 시간을 택해야 했다. 그런데 지금 이 시간에 이곳에서 성설연의 이런 모습을 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유찬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가슴 속의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성설연도 놀란 두 눈으로 유찬혁을 쳐다보았다. 옷차림이 단정하지 못하고 머리도 헝클어졌으며 게다가 얼굴에 상처까지 입은 채 최지한의 품에 찰싹 안겨 있었다.유찬혁은 갑자기 자신을 비웃었다. 그동안 그녀를 좋아했던 마음과 집착이 한순간에 완전히 무너졌다.인터넷에서 자주 보던 질문 하나가 문득 떠올랐다. 당신은 언제부터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나요?유찬혁에게 있어서 그 순간이 바로 지금이다. 그는 성설연도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한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했던 그 마음을 좋아한 걸지도 모른다. 여태껏 그는 성설연에게 빛을 수도 없이 가져다주었다.사실 성설연은 연예계에서 다른 일반 여자 연예인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그 여자 연예인들은 그녀보다 훨씬 솔직했다. 적어도 욕망을 얼굴에 드러냈고 그녀처럼 청순한 척하면서 욕망을 숨기진 않았다.“변호사님.”최지한이 피식 웃었다.“저기... 오해하지 말아요. 설연 씨가 촬영하느라 힘든 것 같아서 변호사님 대신 챙겨주려고 그런 거예요.”“참 고맙네요, 도련님.”“별것도 아닌데요, 뭐.”최지한이 씩 웃었다.“변호사님, 여긴 너무 시끄러우니까 다른 데로 자리를 옮길까요?”“그래요.”유찬혁의 목소리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도련님의 뜻대로 하시죠.”유찬혁이 화난 것 같지는 않자 최지한은 그제야 조금 시름이 놓였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성설연을 보내라고 한 후 유찬혁과 함께 클럽하우스의 최고급 V
최연준이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니 강서연은 이미 표를 깔끔하게 만들어놓은 뒤였다.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대고 코를 비벼댔다.“꼼꼼한 당신이 장부를 관리한다면 아무리 복잡한 장부도 깔끔하게 정리되겠네.”“말은 참 예쁘게 한단 말이죠.”강서연은 돌아앉아 그의 코끝을 톡 쳤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여보, 난 말도 예쁘게 하고...”최연준은 낮게 깔린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밤에도 잘해.”강서연은 장부에만 정신이 팔려 뭘 잘한다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뭘 잘한다는 거예요? 회사 일 좀 처리하는 것 말고 당신이 집안일을 신경이나 쓴 적이 있어요? 내가 다시 계산해 보니 까 최씨 빌라의 수입과 지출의 평형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겠더라고요. 하지만 불필요한 비용을 줄이고 자원을 합쳐야 해요. 그러면 많이 아낄 수 있고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어요... 이봐요, 내가 지금 얘기하고 있잖아요. 듣고 있어요?”‘이 남자 대체 뭐 하자는 거야? 내가 지금 진지한 얘기를 하고 있는데 계속 얼굴이나 들이밀고. 못살아, 정말.’“최연준!”“여보, 나 듣기 싫어.”욕구불만인 최연준은 오로지 그녀와 다시 침대로 돌아가 자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강서연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매달 10만 원밖에 안 되는 그의 용돈을 6만 원으로 고쳐놓았다.그 순간 최연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아 참, 저번에 준 블랙 카드 있잖아요. 그것도 다시 내놔요.”“여보... 그건 내 능력으로 번 돈이야.”“이젠 이 집안의 규정이 바뀌었잖아요. 당연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죠.”풀이 죽어 시무룩해진 최연준의 모습에 강서연은 몰래 피식 웃었다.최연준은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그녀에게 하나하나 분석했다. 이렇게 노동력을 착취해서는 안 된다면서 엄청난 자본가도 이 정도 깍쟁이가 아니라고 했다.‘한 달에 6만 원으로 어떻게 살아...’강서연은 갑자기 돌아앉아 작은 손으로 최연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두 눈에 빛이
그 순간, 조순철의 묵직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오늘 이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 매우 기쁩니다. 온유가 돌아왔다는 이유만은 아닙니다. 여러분과 한자리에 모일 수 있다는 이유만도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드디어 백인서 씨의 결백을 밝혀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뭐라고요?”영미의 귀에서 윙 하는 소리가 났다.“알고 있습니다. 요 며칠, 외부에서 떠도는 소문이 많았습니다. 온유의 실종이 백인서 씨와 연관되었다는 말까지 나돌고 있었죠.”조순철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힘이 실려 있었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또렷하게 공간을 메웠다.“심지어 경쟁자들이 저를 음해하기 위해 이런 추문을 이용하려 했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조순철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시선을 돌려 영미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렇죠, 영미 아가씨?”영미는 얼어붙었다. 순간, 모든 사람의 시선이 영미에게 쏠렸다. 그 시선은 바늘처럼 날카로워 영미의 온몸을 꿰뚫는 듯했다. 영미는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조... 조 시장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영미 아가씨, 제 말을 정말 이해 못 하시겠습니까?”조순철의 미소 속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빛이 서려 있었다.그리고 권욱의 시선은 더욱 살기를 띠고 있었다.부모는 자신에게 닥친 모든 일은 어떻게든 참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아이에게 손을 댄 사람이 있다면, 그 누구라도 가만히 둘 수 없었다.강소아와 최군형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부하들이 정대명을 방으로 데리고 들어왔다.영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영미는 본능적으로 정대명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정대명은 그녀를 보자마자 구원의 손길이라도 찾은 듯 온몸을 흔들며 다급히 외쳤다.“아니, 영... 영미 씨! 영미 아가씨! 제발 나 좀 도와줘!”“뭐 하는 짓이에요?”영미는 분노에 차 외쳤다.“제가 왜 당신을 도와줍니까?”“영미 아가씨가 나한테...”“그래요, 제가 당신에게 돈을 줬죠.”영
연회는 여전히 그 4성급 호텔에서 열리고 있었다.손님들 사이에서 소곤소곤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시장님이 정말 청렴하셔서 연회도 대단하게 하지 않고 이렇게 간소하게 한다는 대화였다.“무슨 소리야? 새로 취임했으니 당연히 이미지 관리를 하는 거겠지!”“하지만 권씨 가문이나 조씨 가문 정도라면 연회를 더 화려하게 할 수도 있잖아? 아무리 시장이라고 해도, 사위는 사업가 아닌가?”“맞아. 게다가 사대 가문과의 관계를 생각해 봐도, 좀 더 사치스럽게 해도 문제 될 건 없지.”“혹시... 이 호텔을 선택한 데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영미는 한쪽에서 조용히 이 대화를 듣고 있었다.특별한 이유라... 글쎄, 그런 건 없을 것 같았다. 영미는 그저 자신만 무사하면 된다고 생각했다.조순철은 무대 위에 서서 손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음악이 멈추고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조순철에게 집중됐다.비록 나이가 들었지만, 조순철은 여전히 허리를 꼿꼿이 펴고 기품 있는 모습으로 무대에 섰다. 그의 목소리는 힘 있고 우렁찼다.“먼저, 오늘 연회에 와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선거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여러분의 지지 덕분입니다. 여러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오성 시민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오성을 더 밝은 미래로 이끌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청중들은 힘찬 박수로 화답하며 잔을 들어 축하의 뜻을 전했다.“또한, 여러분께서 제 외손녀 권온유를 많이 걱정해 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조순철의 말이 끝나자마자 권온유가 무대로 달려 나와 외할아버지에게 안겼다. 조순철은 권온유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무대 아래에서는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대부분 사람이 권온유가 납치당한 일을 알고 있었고 권온유가 이렇게 빨리 돌아온 건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이 모든 행운이 가능했던 건 정승우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그 순간, 정승우는 한쪽 구석에서 권온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부
“정 선생님, 아직도 진실을 말할 생각이 없으신가요? 영미가 대체 얼마나 좋은 조건을 내걸었기에, 백인서를 모함하는 데 가담한 거죠?”정대명은 눈동자를 굴리며 머뭇거렸다. 어디까지 입을 열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당신이 인서의 양아버지라는 말은 사실입니까?”“그... 그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진실이야!”“그렇다면 딸을 키운 정도 있을 텐데 왜 모함하려 하신 거죠?”정대명의 몸이 떨렸고 시선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정 선생님, 이제 영미조차도 당신을 지켜줄 수 없습니다. 진실을 말하지 않으신다면 감옥에서 나올 수 없게 될 겁니다!”그때, 바깥에서 소연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소아는 정대명을 매섭게 노려본 뒤, 사람을 시켜 문을 잠그도록 지시했다.소연화는 최군형과 최지용을 데리고 들어왔다.“여보!”최군형은 강소아를 보자 반갑게 웃으며 말했다.“권온유와 정승우, 두 아이 모두 찾았어!”“정말인가요?”“그래.”최지용도 후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드디어 인서의 억울함을 풀 수 있게 됐어.”“인서는 원래부터 결백했어요!”강소아가 웃으며 말했다.“누가 아이들을 찾았나요?”“아이들이 어찌나 영리하던지, 스스로 빠져나왔더군.”최군형이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그날 밤, 우리가 정대명을 찾았을 때, 정대명의 머리가 다쳐 있었던 거 기억하지? 그 틈을 타 도망쳤대. 길에서 착한 운전사분을 만나 도움을 받았고 그 운전사가 집까지 데려다줬어. 차 안에서 정승우가 휴대전화를 빌렸는데 다행히도 권온유가 자기 엄마 전화번호를 기억하고 있어서 덕분에 바로 연락할 수 있었어. 아마 20분 후면, 두 아이 모두 안전하게 권씨 집안에 도착할 거야.”“정말 놀랍군요...”강소아는 감탄이 담긴 눈빛으로 답했다.“이렇게 어린아이들이 그런 상황 속에서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니. 역시 아이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어요! 저도 이제부터 가원이에게 제 전화번호를 외우게 해야겠어요!”“그런 말 하지 마!”최군형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집으로 돌아온 영미의 마음속엔 불안이 가득 찼다. 그러다 문득 시장 선거의 마지막 대결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이 스쳤다.지금이라도 폭탄 같은 뉴스가 터진다면 사람들의 관심은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쏠릴 것이 분명했다.그리고 그 뉴스가 백인서와 관련된 것이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영미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가에 자신감 넘치는 차가운 미소를 띠며 휴대전화를 들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기자와의 약속을 잡았다.“조순철 씨의 외손녀가 실종된 사건, 알고 계십니까?”카페의 한구석, 눈에 잘 띄지 않는 자리였다. 영미는 얼굴을 거의 가릴 만큼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맞은편에는 기자는 커피잔을 천천히 저으며 영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이건 단순한 어린이 실종 사건이 아닙니다. 누군가 계획적으로 벌인 일입니다.”“영미 씨.”기자가 녹음기를 켜며 말했다.“아시는 내용을 모두 말씀해 주세요. 자료는 제가 정리해 영미 씨 말씀대로 보도하겠습니다.”“좋아요.”영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제가 알고 있기로, 권씨 가문의 어린 딸을 데려간 사람은 바로 그 공익학교 프로젝트에 있던 한 학생입니다. 그리고 그 학생은 백인서의 지시를 받았죠!”녹음기를 쥔 기자의 손이 떨렸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강소아는 방문 앞을 서성이며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그 방에는 정대명이 갇혀있었는데 강소아가 아무리 질문해도 정대명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육경섭은 딸이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보고 희철을 시켜 예전 식으로 정대명을 다루려 했지만, 강소아가 막아섰다.현재 육씨 가문은 이미 정식 사업가로 자리 잡은 상황이었다.과거의 폭력적인 방식은 더 이상 적합하지 않았다.강소아는 육경섭을 설득해 물러서게 한 뒤, 다음 수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소연화가 급히 뛰어왔다.“아가씨, 이것 좀 보세요!”소연화는 휴대전화를 내밀었다.화면에는 뉴스가 떠 있었고 제목은 눈에 띌 정도로 충격적이었다.[조씨 공익학교에서 터진 충격적인 추문, 관리직
가끔 차가 지나갔지만, 정승우가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어도 아무도 멈춰 서지 않았다.어둠이 내려앉았고 기온은 점점 내려가고 있었다.며칠 동안 육체와 마음이 지친 권온유는 이제 무너질 듯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정승우는 어쩔 수 없이 온유를 등에 업고 비틀거리며 길을 걸었다.“오빠...”권온유는 울먹이며 말했다.“해가 졌어요. 저... 무서워요.”“괜찮아.”정승우는 뒤돌아 미소를 지었다.“오빠가 집에 데려다줄게.”“오빠, 우리 그냥 돌아가요...”“뭐라고?”권온유의 시선이 정승우의 피로 물든 발에 닿았다.“발이 많이 아프죠?”권온유의 작은 얼굴 위로 눈물이 두 줄기 흘러내렸다.“오빠, 저 내려주세요. 그냥 돌아가요...”“온유야?”권온유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그 집이 낡고 춥긴 해도... 오빠 발에서 피가 나진 않잖아요!”정승우는 멍하니 잠시 굳어 있다가 그 어눌한 말 속에 담긴 다정함을 깨달았다.이 작은 아이는 납치당했던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라도 정승우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정승우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작은 새들이 집으로 향해 줄지어 날고 있었다.정승우는 온유를 데리고 반드시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다짐했다.“바보야.”정승우는 온유를 내려놓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난 하나도 안 아파. 그리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어.”“그 사람이... 우리를 때릴까요?”“그럴 거야.”정승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어린 시절, 정대명에게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탈출할 때 그의 뒤통수를 내려친 한 방은 그동안의 빚을 모두 갚은 셈이었다.“그런데 오빠, 그 사람은 오빠 아빠잖아요?”권온유는 작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하지만 오빠가 아프다고 제가 말했을 때 오빠 아빠가 들어왔었잖아요.”정승우는 쓴웃음을 지었다.자신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정대명이 들어온 것은 아마 걱정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죽으면 함께 나쁜 짓을 할 사람이 없어질까 봐서였었다.정대명은 단지
차 안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영미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정대명에게 다가갔다. 그의 머리 아래로 어두운 핏자국이 퍼져 있었고 그 흔적은 이미 굳어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의 코 밑에 손을 가져다 댔다.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영미는 떨리는 마음을 억누른 채 차가운 눈빛으로 정대명을 내려다보다가 거칠게 발길을 휘둘렀다.“일어나요!”강소아와 최군형도 다가와 공장 안을 살폈지만 안은 고요히 비어 있었다.“아이들은요?”“아이고...”정대명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살려줘, 살려줘... 저 괘씸한 녀석이!”“정대명 씨!”영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했다.어쨌든 이번 일은 영미가 자신 있게 권온유의 행방을 안다고 장담한 일이었다.영미는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함께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확신에 차 말했다.그런데 지금... 정대명은 다쳐 쓰러져 있고 두 아이는 사라졌었다.백인서를 함정에 빠뜨리려던 영미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것이다.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정대명은 도움을 청하려다 영미가 눈짓을 주는 것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영미의 눈길을 따라 보니 최군형과 강소아도 함께 와있었다.정대명은 예전에 영미가 했던 경고가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아는 척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정대명은 머리를 살짝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신이 정대명인가요?”최군형이 다가가 물었다.정대명은 말끝을 흐리며 최군형의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백인서의 양아버지시고?”최군형은 다시 물었다.“당신이 당신 아들과 함께 권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게 맞나요?”“아니야, 나 아니야!”정대명은 크게 당황하며 손을 흔들었다.“이봐, 동생, 난 억울해! 내 아들 녀석이 나를 해치려고 했어! 내 머리를 봐, 그 자식이 벽돌로 내리쳤다니까!”“그만해요!”영미는 정대명의 말이 길어질수록 상황이 불리해질 것을 우려해 정대명을 노려보며 더 이상 말을 못 하게 했다.강소아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들의 서툰 수법이 한심하기만
경찰서 밖에서 최지용은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한참을 걷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젊은 경찰관이 안에서 뛰어나오고 있었다. 최지용은 급히 다가가며 말했다.“정호야!”정호라는 젊은 경찰관은 최지용을 보자 반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 녀석!”최지용은 정호에게 다가가 가볍게 주먹을 툭 날리며 말했다.“도대체 무슨 일이야? 왜 사전에 알려주지 않은 거야?”정호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방금 최씨 집안에서 백인서를 데려간 사람 중에 정호도 있었다. 최지용도 놀라웠지만, 영미 역시 경찰이 직접 찾아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떠나기 전, 정호가 살짝 눈짓을 보냈고 최지용은 그의 의도를 알아채 경찰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지용이 형.”정호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형수님께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잘 구분하고 계시니 문제없을 겁니다!”“도대체 누구 지시로 백인서를 여기로 데려온 거지?”“소아 아가씨예요!”정호는 어깨를 으쓱했다.“소아 아가씨가 갑자기 지시한 거라 사전에 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최지용은 살짝 놀랐다. 강소아의 지시라니.“형수님께서도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으니까요. 그 아이가 실종되기 전에 형수님께서 만난 적이 있거든요. 경찰이 형수님을 데려가서 조사하는 건 당연한 절차입니다.”최지용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피식 웃음을 지었다.강소아가 이런 ‘당연한 절차’를 이용해 백인서를 경찰서로 보낸 이유는 경찰서야말로 가장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또 누군가가 음모를 꾸며 백인서에게 덮어씌우려 한다 해도 경찰서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경찰서 안에는 일을 봐주는 사람들도 있으니 백인서가 여기서 며칠 지내는 동안 힘든 일 없이 외부의 소란도 피할 수 있는 셈이었다.최지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강소아는 정말 자매를 위한 배려가 남달랐다. 이렇게까지 배려심 깊은 방안을 생각해 내다니!“지용이 형.”정호가 계속해서 말했다.“도련님께서
영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소아 언니, 저를 믿지 않으세요?”“난 오직 사실만을 믿어.”“권씨 가문의 딸이 실종된 사건에 백인서 씨의 양아버지와 남동생이 관련되었어요, 그게 바로 사실이에요!”강소아는 순간 멍하니 있다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려 했다.세상에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다 있나 싶었다.호텔 뒷뜰에 있는 그 CCTV가 정말 완전히 고장 났다고 생각하는 걸까? 육씨 가문과 최씨 가문이 힘을 합쳐 그 고장 난 CCTV 하나도 못 고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최군형은 강소아의 어깨를 가볍게 눌러 안심시키며 슬며시 휴대전화를 건넸다.강소아는 화면을 확인했다. 최군형의 부하가 보낸 메시지였다.“도련님, CCTV 데이터를 복구 중입니다. 곧 진실이 밝혀질 겁니다!”강소아는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영미가 이렇게까지 백인서를 몰아세우는 걸 보니 마음 한구석에 무언가 꺼림칙한 게 남아 있는 것 같았다.어차피 꼬리가 저절로 드러날 것이었기에 그저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다.바로 그때, 집사가 다소 당황한 얼굴로 방에 들어섰다. 집사의 뒤에는 몇 명의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신분을 밝힌 후 방 안을 둘러보며 엄숙한 목소리로 물었다.“여기 백인서 씨가 계십니까?”표아정은 등을 꼿꼿이 펴고 대답했다.“경찰관님께서 여긴 무슨 일로 오셨나요?”“당신이 백인서 씨인가요?”“저는...”“백인서 씨가 납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신고를 접수했습니다!”“뭐라고요?”백인서는 얼굴이 창백해졌다.“백인서 씨, 조사에 협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희와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권온유가 납치된 지 하루가 지났다.그동안 정대명은 단 한 번 음식을 가져왔는데, 그것도 차갑게 식은 죽 한 그릇과 딱딱한 빵 한 조각뿐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귀하게 자란 권온유에게 이런 음식은 처음이었다. 울고 싶었지만, 감히 울지 못하고 그저 눈물을 참으며 빵을 조금씩 뜯어 먹고 있었다.정승우는 그런 온유의 모습을 보고
“아줌마,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그럼, 제가 알아낸 사실을 전부 말씀드릴게요!”영미는 입가에 교만한 미소를 띠며 백인서를 차갑게 한 번 쳐다보았다.“백인서 씨의 친어머니인 백홍은 인신매매범이었다는 사실, 모두 아셨나요? 백인서 씨의 어머니는 백인서를 정대명의 집에 맡겼고... 흥! 정대명의 아내도 백홍이 납치해 왔다는 소문이 있어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잖아요. 제 생각엔... 인신매매범의 딸이라면 그런 일쯤은 익숙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은 권온유의 실종이 정말로 백인서 씨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시나요?”“영미!”강소아가 나서며 분노를 가득 담아 소리쳤다.“허위 사실을 퍼뜨리지 마!”“소유 아가씨, 억울하네요!”영미는 강소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제가 이렇게까지 조사한 건 다 아가씨를 위한 거예요! 딸도 있는 사람이 백인서를 곁에 두고도 마음이 놓이세요?”“그만해!”최지용이 크게 소리쳤다.백인서는 몸을 떨며 믿기지 않는 눈으로 최지용을 쳐다보았다.그러나 최지용의 얼굴에는 의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최지용은 굳건한 눈빛으로 뒤에 있는 백인서를 지키고 있었다.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처럼 백인서를 아끼고 있었다.백인서는 코끝이 찡해지며 본능적으로 최지용의 손을 꼭 붙잡았다. 최지용의 따스한 손은 백인서에게 큰 용기를 주었고 그 온기가 어둠의 두려움을 잊게 해주었다.최지용은 백인서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고 다시 영미를 바라볼 때는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영미야.”최지용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두 집안의 관계를 생각해서 그저 넘어가는 거야. 더 이상 선을 넘지 마.”최군형도 나서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요, 백인서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모르겠어요? 영미 아가씨, 우리 최씨 가문 사람들을 바보로 생각하는 건 아니죠?”영미는 순간 긴장했다. 최군형의 말 속엔 어딘가 숨은 뜻이 있는 듯했다.최군형의 깊고 복잡한 눈빛을 파악하기 어려웠다.표아정은 천천히 일어나 어깨에 걸친 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