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주연상이 뭐 어때서요? 여우주연상을 받아도 흑기사는 아무나 있는 것이 아니에요!”유찬혁은 그녀의 말투 속의 조롱함을 알아들을 수 있었고 이런 말썽이 많이 생기는 연예계에서 성설연이 살아남으려면 곽보미에게 의지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는 말없이 곽보미를 한번 바라보았는데 그녀의 붉어진 눈시울을 보았다.왠지 모르게 유찬혁의 마음은 원인 모를 아픔이 몰려왔다.강서연은 천천히 성설연 앞으로 걸어가 말했다.“성설연 씨, 촬영장 생활에 적응하고 있어요?”강서연이 그녀에 대해 관심을 보이자 유찬혁은 성설연에게 강서연과 대화를 더 많이 하라고 눈치를 줬다.하지만 성설연이 강서연을 바라보는 눈빛은 질투와 두려움이 역력했다.“제가 특별히 하나뿐인 디저트를 준비해 왔어요.”강서연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자 누군가가 작은 바구니 속 물건들을 꺼내놓았다.정교한 유럽식 본차이나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홍차가 아니라 약간 푸른빛이 도는 색이었다.“성설연 씨, 촬영장에 들어오면 화내지 마세요. 녹차를 마셔서 화를 가라앉히는 게 당신에게 좋을 거예요.”눈치가 있는 사람은 강서연이 성설연을 욕하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웃음을 참고 있었다.“성설연 씨, 좋은 차로 준비 했어요.”강서연은 또 옆에 작은 접시에서 디저트를 하나 집어 들었다.“이건 흰 연꽃의 꽃술로 만든 거예요. 한번 드셔보세요! 왜요? 맘에 안 들어요?”또 일부러 말했다.“성설연 씨 전에 이 차를 다른 손님에게 대접한 적이 있는데 그분마저도 좋다고 했어요! 마시지 않으면 너무 아까워요.”“당신...”성설연은 화가 났지만 감히 말하지 못했고 강서연과 눈이 마주친 순간 아연실색했다.유찬혁은 곧 강서연의 깊은 뜻을 알게 됐고 그 역시 이 갈등은 성설연의 잘못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그러나 그는 여전히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 성설연을 지켜줬다.온 세상이 그녀를 비난해도 유찬혁은 그녀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그는 온 세상을 등
곽보미는 강서연과 눈을 마주친 후 살짝 웃으며 정신을 다잡았다.“준비하세요.”그녀는 무전기를 들고 진지하게 화면을 바라보았다.“액션!”“쌍년아!”주아에게 클로즈업을 하자 여우주연상 받은 배우답게 전혀 사양하지 않고 손을 위로 들어 세게 성설연의 얼굴을 한 대 후려쳤다.성설연은 경악하여 본능적으로 얼굴의 반을 가렸고 너무 아파서 머리가 어지러웠다.주아는 머리카락을 풀어 헤치고 한복의 단추는 두 개나 뜯어져 있어 캐릭터와 완벽하게 어울리는 화끈한 성격의 소유자다.그녀는 성설연을 가리키고 침을 튀기며 욕을 했다.“이년아, 감히 나한테서 남자를 빼앗아? 네가 뭔데!”이 말에는 다소 진실한 감정이 실려있었다.주아는 1초 만에 몰입했고 자신을 곽보미로 상상하며 성설연을 노려봤다.“지금 아주 좋아요!”조감독이 한쪽에서 지휘했다.“배우님은 감정에 주의하세요. 맞습니다... 더 격하게! 클로즈업해 주세요... 계속 대사 하세요!”“야, 일어나! 반항해 봐! 내 앞에서 약한 척하는 거야? 너의 이런 수법은 남자에게는 통하지만 나에게는 통하지 않아! 오늘은 안 봐줄 거야!”주아는 대사를 말하는 요령이 탄탄하고 표정과 감정도 모두 갖춰져 있어 이 신은 순조롭게 끝났다.“좋았어요!”곽보미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이 장면이 통과되자 그녀의 마음속에 있던 큰 돌덩이가 땅에 떨어졌다. 금세 방금의 불쾌함을 뒤로하고 정신을 차리고 다음 장면을 준비했다.다음은 성설연의 신이 없다.성설연은 주아의 따귀를 맞고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손발이 차갑고 온몸을 떨며 한쪽으로 물러나 강서연과 곽보미를 싸늘하게 응시했다.주아는 속이 후련한지 망토를 두르고는 우쭐거리며 그녀의 앞을 지나쳐 가면서도 그녀에게 경멸 가득한 눈빛을 던지는 것을 잊지 않았다.촬영장은 다시 정돈된 질서를 되찾았고 곽보미도 일에 몰두하고 다른 배우들도 모두 호흡을 맞췄다.성설연만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유찬혁을 바라보며 불공평한 대우를 받은 듯한 모습이다.유찬혁은 인상을 구겼고 잠
“고마워.”“친구끼리 이 정도쯤이야!”유찬혁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럼... 지금 화 풀렸어?”“응?”“나도 네가 이성적이고 신중하고 열정적이고 솔직한 사람인 거 알아. 그래서 아까... 분명히 설연이가 잘못해서 네가 그렇게 화내 게 된 거야. 내가 대신 사과할게. 화내지 마.”곽보미는 잠시 멈칫하더니 막 사라졌던 먹구름이 다시 마음속에 막혔다.알고 보니 유찬혁이 자기에게 이것을 준 것은 결국 성설연 때문이었다.유찬혁의 눈에 곽보미는 매우 철이 들었기 때문에 철이 든 사람은 관대하고 이해심이 많아야 하며 마음이 넓어야 한다. 설령 억울한 일을 당해도 따지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사탕은 우는 애들이나 주는 거다!곽보미는 시종일관 성설연 같은 모습을 할 수 없었고 그렇게 하는 것을 하찮게 여겼다.그래서 유찬혁의 마음속에서 그녀는 영원히 성설연보다 못하다.곽보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여 보니 손에 들고 있는 복주머니가 그렇게 화사해 보이지 않은 것 같았다....늦은 시간 남자 몇 명이 술집에서 만나기로 했다.최연준은 원래 가고 싶지 않았으나 배경원이 이 술값은 그가 내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마지못해 갔다.배경원은 그를 보자마자 배시시 웃기만 했다.“형, 내가 기억하기로는 강주에 있을 때 형수님이 형한테 돈을 다 썼잖아요! 형은 어떻게 지금... 이렇게 초라해졌어요?”최연준은 그에게 날카로운 눈빛을 던지며 손에 들고 있는 시바스 리갈을 먹고 있었다.“당연히 초라하죠!”육경섭은 게임을 하면서 웃고 있었다.“경원 씨는 온몸에 10만 원만 가지고 있는 재벌 후계자를 본 적이 있어요?”“경섭 형님도 만만치 않아요!”배경원이 팩폭을 했다.“형님, 마지막으로 담배 피운 게 언제 적이에요?”“에잇!”육경섭은 게임기를 버리고 그를 때리러 갔다.최연준은 싸움을 말리는 척하며 틈을 타 배경원을 몇 대 때렸고 배경원의 비명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세 사람은 왁자지껄 떠들썩하게 어울렸지만 유찬혁만이 한쪽에 앉
“연준 형...”유찬혁은 목이 조여 왔고 평소 언변이 좋았던 그는 지금 최연준 앞에서 식은땀만 흘렸다.게다가 그는 이렇게 엄숙한 최연준을 본 적이 없다.“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잘못이 없지만 너는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해!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알아야 사랑할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판단할 수가 있어.”“연준 형...”유찬혁은 쓴웃음을 지으며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형은 서연 씨를 알고 나서야 사랑하기로 한 거예요? 아니잖아요! 분명 형은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아했을 거예요!”최연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유찬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에게 한 잔을 더 따랐다.“서연이는 그 여자와 달라!”최연준은 싸늘하게 말했다.“너는 그 둘을 비교하면 안 돼!”“왜요?”유찬혁은 술기운을 빌려 냉랭하게 웃었다.“형의 여자는 손안에 들고 있는 보물이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 가치도 없어요?”“너...”‘이 멍청한 놈!’성설연이 유찬혁을 신경 썼더라면 벌써 그와 함께 있었을 텐데 이렇게 오랫동안 어장관리를 하지는 않았을 거다!이 여자가 그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유찬혁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그 사람은 나를 좋아할 거예요...”유찬혁은 술병을 들고 마셨다.그는 변호사이기 때문에 항상 냉정하고 정신을 차려야 하므로 이렇게 마신 적이 없는데 오늘 그는 추태를 부렸다.최연준은 그를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관여하지 않고 방에서 나왔다.유찬혁은 마지막으로 술집에서 나왔고 이때 이미 늦은 밤이었다. 그는 술을 많이 마셔서 걸을 때 몸이 약간 흔들렸다.그의 기억이 맞는다면 이렇게 제멋대로 한 것은 태어나서 처음인 것 같다.유씨 가문은 오성에서 으뜸가는 학자 집안으로 어려서부터 유찬혁에 대한 훈육도 매우 엄격하여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일을 하고 나서 일부 접대가 불가피하므로 상징적으로 한 모금 마시는 것뿐이었다.감정적으로는 더더욱 텅 비어 있었다.
최지한은 위아래로 유찬혁을 훑어보다가 그가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자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서 물었다. “유 변호사님, 생각해 보지 않겠어요?”“제 일에 신경 쓰지 마세요.”유찬혁이 싸늘하게 그를 바라보았다.“저는 도련님께서 자기 일에 좀 신경을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니 몸이 점점 안 좋아지는 것 같은데요?”“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적당히 절제하는 것도 자신에게 이로워요!”유찬혁은 복잡한 웃음을 지으며 최지한의 어깨를 토닥였다.“젊은 나이에 신장이 허하여 머리숱이 없어서야 되겠어요? 최씨 가문의 체면은 정말 당신 하나 때문에 구겨지겠어요!”“당신...”최지한의 손이 올라가자마자 유찬혁은 바로 그의 손목을 잡고 그를 옆으로 세차게 내동댕이쳤다. 술에 취했지만 여전히 힘은 셌다.유찬혁은 웃으며 주차장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최지한은 최연준 옆에 있는 친구들이 모두 실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작은 변호사 주제에 감히 그에게 대들 줄은 생각도 못 했다.강서연이 모든 경호원을 철수시킨 바람에 이제 최지한은 자신의 세력을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다!최지한은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성을 냈고 옆에 있던 차가 그의 화풀이 대상이 되어 그는 세게 발길질했다.자동차는 바로 경적을 울렸다.최지한이 떠나고 싶어도 이미 늦었다. 술집에서는 몇 명의 건장한 청년들이 걸어 나왔는데 하나둘씩 만취한 모습이고 찐빵 같은 얼굴로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누가 내 차를 찼어?”최지한이 잠시 멈칫하자 반응도 못 한 채 선두에 선 사람이 그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뭐 하는 거야? 눈멀었어? 날 몰라?”청년들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한동안 자세히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어디서 나온 개미 한 마리야?”“너희들...”“이 개자식아, 감히 내 차를 걷어차다니. 가만 안 놔둘 거야!”“나는 최상가 장손 최지한이야!”청년들이 실소했다.“그럼 나는 최연준이다. 하하하...”“야, 당장 와서 내 차에 사과해!”주차장은
“연기하지 마세요!”윤문희는 어이없어했다.“윤정재 씨, 당신만 의사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사람을 속이고 싶어도 넘어갈 수 있는 호구를 찾으세요.”그녀는 그의 팔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혼자 보세요. 당신이 찌른 위치는 내가 방금 찌른 것과 전혀 다른 혈 자리잖아요!”“문희야...”윤정재는 소심하게 그녀를 한 번 불렀고 또 바보와 같이 웃기 시작했다.‘왜 아직도 어릴 때랑 똑같지?’예전에 윤문희는 화가 났을 때 자주 바늘로 그를 찔렀던 것이 기억났다. 그때 다른 여자와 몇 마디 말을 더 했더니 몸에 이상하게 여러 개의 침 구멍이 생기고 몸의 절반이 마비됐던 적이 있다.윤정재는 열몇 살 되는 소녀가 어떻게 이렇게 정확하게 찌를 수 있는지 의문점이 들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녀는 진짜 윤제 그룹의 공주였고 조상 대대로 황실 어의여서 의학에도 타고난 재질을 가지고 있었다.하지만 윤정재는 그녀와 달리 전부 다 각고의 노력으로 차근차근 밟아 나가는 것이지 지름길이 없고 버티기만 할 뿐이다.그해의 그 복수처럼 윤문희가 그와 결별한 순간 윤정재의 마음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죽을힘을 다해 버텨냈다.지금까지 버텼지만 그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문희야, 내가 몇 마디만 할 수 있게...”“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윤문희는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당신이 완전히 회복되고 퇴원하면 다시 모르는 사이로 됩시다.”“문희야!”“윤정재 씨.”그녀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그때 한 약속을 잊지 마세요.”윤정재가 잠시 멈칫했다.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돌아가서 그 약속을 한 자신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무슨 약속을 함부로 했을까? 그것도 다시는 귀찮게 안 하겠다고 영원히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 진짜 그때 머리가 어떻게 된 거는 아닌지 후회막심했다.윤정재는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윤문희가 등을 돌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뒷모습은 더 이상 소싯적처럼 가녀리고 여리지 않았고 세월의 흔적이 남았다.
윤정재의 가슴은 뜯기듯 아팠다.“나도 내가 늦었다는 걸 알아. 네가 서연이 낳았을 때 너희 모녀를 강주에서 데려왔어야 했는데!”그러나 당시 윤씨 가문은 내우외환이 있었다. 가문의 일부 사람들은 그가 권좌를 찬탈하였다고 업신여겼고 그에게 적개심이 커서 외부 세력과 결탁하여 그를 쫓아내려 하였다.윤정재는 이런 골치 아픈 일들을 처리하면서도 레시피를 연구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이 시점에 윤문희가 돌아오면 안 됐다. 그녀가 돌아오면 그 사람들의 표적이 되어 가벼우면 이용당하고 심하면 그녀와 딸을 인질로 삼아 윤정재를 협박할 수도 있었다.그러나 지금 윤정재는 후회하고 있다.어떻게 해서든 그들을 데려왔어야지 윤문희를 계속 강주에 버려두고 또 강명원 그 쓰레기를 만나게 한다니! 아이들에게 더 나은 삶을 줘야지 강서연이 어린 나이에 눈치를 보게 하고 윤찬의 학업 생활이 순탄하지 않은 것도 다 그의 탓이다.가족은 함께 있어야 하고 아무리 힘든 날을 보내더라도 함께 있으면 희망이 보일 것이다.“문희야...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안 돼?”윤정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윤문희는 마음이 칼에 베인 것 같았다.그녀는 그동안 윤정재가 윤제 그룹을 위해 한 일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는 이전의 레시피를 다시 사용하지 않고 밤낮으로 새로운 레시피를 연구하였다.윤정재의 출세 수단은 비열했지만 적어도 그녀의 가족을 부당하게 대우한 적은 없다.윤문희의 형제자매들은 모두 윤제 그룹 계열사에서 관리직을 맡고 있고 윤정재는 한 번도 그들을 난처하게 하지 않았다. 그녀의 부모님조차도 윤정재가 보살피다가 돌아가셨다.더구나 원한을 따져보면 원래 윤씨 가문이 잘못한 것이다.윤문희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눈물을 닦았다.“정재 씨, 제발 나 좀 보내줘요. 나는 이제 당신을 미워하지 않으니 당신도 다시는 나 찾아오지 마요. 나는 정말 평안하게 남은 생을 살고 싶어요...”“내가 곁에 있어 줄게.”윤정재가 불쑥 말을 꺼냈다.“나는 조용히 있을게. 네가 말하지 못하게 할 때는 절대 말
“엄마...”한참 후 강서연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괜찮으세요?”“응, 괜찮아!”윤문희는 말하면서 조금 전 다 깎지 못한 사과를 가져와 칼을 단번에 사과에 꽂았는데 포스가 남달랐다.강서연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 기억 속의 엄마는 항상 부드럽고 섬세한 여자였는데 병이 난 그동안을 제외하고는 말이다.하지만 그때는 정신이 불안정해서 화를 내는 것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전혀 몰랐다.윤문희의 정신이 회복된 후에는 이렇게 엄한 적이 없었다.윤정재를 다시 보니 그녀가 소리를 지르자 순간 얌전해져서 머리를 움츠리고 조용히 침대 옆에 앉아 두 손을 비비고 또 비비고 있었다. 침대가 높아서 두 발이 땅에 닿지도 않았는데 다리도 같이 어슬렁거렸다.그 모습이 꼭 옛날 집에서 최연준에게 호통을 맞던 뚱냥이 같았다.강서연은 입을 막고 몰래 웃었는데 마치 드라마 속 시골 할아버지 느낌이 났다.그녀는 참지 못하고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는데 이때 따뜻한 큰손이 그녀의 손을 잡아줬다. 최연준이 웃으며 강서연을 보고 윤정재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윤 회장님, 걱정하지 마세요. 할아버지의 뜻은 먼저 혼인신고를 하면 최상 그룹을 서연이에게 맡겨도 되는 명분이 생긴다고 하셨어요. 결혼식은 반드시 있을 것이고 그것도 성대하게 치러질 것입니다. 이 부분은 이미 준비 중이고 확인해야 할 세부 사항이 많고 소홀히 할 수 없기 때문에 시간이 좀 걸립니다.”강서연은 약간 놀란 표정으로 최연준을 바라보았다.그의 말투와 태도는... 평소 그가 윤정재에게 하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이렇게 인내심을 가진 것은 처음이다.하지만 최연준은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아마도 윤문희의 위풍을 보고 자신의 앞날이 보였고... 그리고 현재 최씨 가문에서의 자신의 지위를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그를 아끼지 않고 어머니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 바람에 갑자기 윤정재를 공감했다.갑자기 동병상련 같은 느낌이 들어 그의 말투는 자신도 모르게 부드러워졌다.인생도 쉽지 않은데 남자가
그 순간, 조순철의 묵직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오늘 이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 매우 기쁩니다. 온유가 돌아왔다는 이유만은 아닙니다. 여러분과 한자리에 모일 수 있다는 이유만도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드디어 백인서 씨의 결백을 밝혀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뭐라고요?”영미의 귀에서 윙 하는 소리가 났다.“알고 있습니다. 요 며칠, 외부에서 떠도는 소문이 많았습니다. 온유의 실종이 백인서 씨와 연관되었다는 말까지 나돌고 있었죠.”조순철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힘이 실려 있었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또렷하게 공간을 메웠다.“심지어 경쟁자들이 저를 음해하기 위해 이런 추문을 이용하려 했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조순철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시선을 돌려 영미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렇죠, 영미 아가씨?”영미는 얼어붙었다. 순간, 모든 사람의 시선이 영미에게 쏠렸다. 그 시선은 바늘처럼 날카로워 영미의 온몸을 꿰뚫는 듯했다. 영미는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조... 조 시장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영미 아가씨, 제 말을 정말 이해 못 하시겠습니까?”조순철의 미소 속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빛이 서려 있었다.그리고 권욱의 시선은 더욱 살기를 띠고 있었다.부모는 자신에게 닥친 모든 일은 어떻게든 참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아이에게 손을 댄 사람이 있다면, 그 누구라도 가만히 둘 수 없었다.강소아와 최군형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부하들이 정대명을 방으로 데리고 들어왔다.영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영미는 본능적으로 정대명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정대명은 그녀를 보자마자 구원의 손길이라도 찾은 듯 온몸을 흔들며 다급히 외쳤다.“아니, 영... 영미 씨! 영미 아가씨! 제발 나 좀 도와줘!”“뭐 하는 짓이에요?”영미는 분노에 차 외쳤다.“제가 왜 당신을 도와줍니까?”“영미 아가씨가 나한테...”“그래요, 제가 당신에게 돈을 줬죠.”영
연회는 여전히 그 4성급 호텔에서 열리고 있었다.손님들 사이에서 소곤소곤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시장님이 정말 청렴하셔서 연회도 대단하게 하지 않고 이렇게 간소하게 한다는 대화였다.“무슨 소리야? 새로 취임했으니 당연히 이미지 관리를 하는 거겠지!”“하지만 권씨 가문이나 조씨 가문 정도라면 연회를 더 화려하게 할 수도 있잖아? 아무리 시장이라고 해도, 사위는 사업가 아닌가?”“맞아. 게다가 사대 가문과의 관계를 생각해 봐도, 좀 더 사치스럽게 해도 문제 될 건 없지.”“혹시... 이 호텔을 선택한 데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영미는 한쪽에서 조용히 이 대화를 듣고 있었다.특별한 이유라... 글쎄, 그런 건 없을 것 같았다. 영미는 그저 자신만 무사하면 된다고 생각했다.조순철은 무대 위에 서서 손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음악이 멈추고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조순철에게 집중됐다.비록 나이가 들었지만, 조순철은 여전히 허리를 꼿꼿이 펴고 기품 있는 모습으로 무대에 섰다. 그의 목소리는 힘 있고 우렁찼다.“먼저, 오늘 연회에 와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선거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여러분의 지지 덕분입니다. 여러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오성 시민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오성을 더 밝은 미래로 이끌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청중들은 힘찬 박수로 화답하며 잔을 들어 축하의 뜻을 전했다.“또한, 여러분께서 제 외손녀 권온유를 많이 걱정해 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조순철의 말이 끝나자마자 권온유가 무대로 달려 나와 외할아버지에게 안겼다. 조순철은 권온유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무대 아래에서는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대부분 사람이 권온유가 납치당한 일을 알고 있었고 권온유가 이렇게 빨리 돌아온 건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이 모든 행운이 가능했던 건 정승우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그 순간, 정승우는 한쪽 구석에서 권온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부
“정 선생님, 아직도 진실을 말할 생각이 없으신가요? 영미가 대체 얼마나 좋은 조건을 내걸었기에, 백인서를 모함하는 데 가담한 거죠?”정대명은 눈동자를 굴리며 머뭇거렸다. 어디까지 입을 열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당신이 인서의 양아버지라는 말은 사실입니까?”“그... 그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진실이야!”“그렇다면 딸을 키운 정도 있을 텐데 왜 모함하려 하신 거죠?”정대명의 몸이 떨렸고 시선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정 선생님, 이제 영미조차도 당신을 지켜줄 수 없습니다. 진실을 말하지 않으신다면 감옥에서 나올 수 없게 될 겁니다!”그때, 바깥에서 소연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소아는 정대명을 매섭게 노려본 뒤, 사람을 시켜 문을 잠그도록 지시했다.소연화는 최군형과 최지용을 데리고 들어왔다.“여보!”최군형은 강소아를 보자 반갑게 웃으며 말했다.“권온유와 정승우, 두 아이 모두 찾았어!”“정말인가요?”“그래.”최지용도 후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드디어 인서의 억울함을 풀 수 있게 됐어.”“인서는 원래부터 결백했어요!”강소아가 웃으며 말했다.“누가 아이들을 찾았나요?”“아이들이 어찌나 영리하던지, 스스로 빠져나왔더군.”최군형이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그날 밤, 우리가 정대명을 찾았을 때, 정대명의 머리가 다쳐 있었던 거 기억하지? 그 틈을 타 도망쳤대. 길에서 착한 운전사분을 만나 도움을 받았고 그 운전사가 집까지 데려다줬어. 차 안에서 정승우가 휴대전화를 빌렸는데 다행히도 권온유가 자기 엄마 전화번호를 기억하고 있어서 덕분에 바로 연락할 수 있었어. 아마 20분 후면, 두 아이 모두 안전하게 권씨 집안에 도착할 거야.”“정말 놀랍군요...”강소아는 감탄이 담긴 눈빛으로 답했다.“이렇게 어린아이들이 그런 상황 속에서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니. 역시 아이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어요! 저도 이제부터 가원이에게 제 전화번호를 외우게 해야겠어요!”“그런 말 하지 마!”최군형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집으로 돌아온 영미의 마음속엔 불안이 가득 찼다. 그러다 문득 시장 선거의 마지막 대결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이 스쳤다.지금이라도 폭탄 같은 뉴스가 터진다면 사람들의 관심은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쏠릴 것이 분명했다.그리고 그 뉴스가 백인서와 관련된 것이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영미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가에 자신감 넘치는 차가운 미소를 띠며 휴대전화를 들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기자와의 약속을 잡았다.“조순철 씨의 외손녀가 실종된 사건, 알고 계십니까?”카페의 한구석, 눈에 잘 띄지 않는 자리였다. 영미는 얼굴을 거의 가릴 만큼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맞은편에는 기자는 커피잔을 천천히 저으며 영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이건 단순한 어린이 실종 사건이 아닙니다. 누군가 계획적으로 벌인 일입니다.”“영미 씨.”기자가 녹음기를 켜며 말했다.“아시는 내용을 모두 말씀해 주세요. 자료는 제가 정리해 영미 씨 말씀대로 보도하겠습니다.”“좋아요.”영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제가 알고 있기로, 권씨 가문의 어린 딸을 데려간 사람은 바로 그 공익학교 프로젝트에 있던 한 학생입니다. 그리고 그 학생은 백인서의 지시를 받았죠!”녹음기를 쥔 기자의 손이 떨렸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강소아는 방문 앞을 서성이며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그 방에는 정대명이 갇혀있었는데 강소아가 아무리 질문해도 정대명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육경섭은 딸이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보고 희철을 시켜 예전 식으로 정대명을 다루려 했지만, 강소아가 막아섰다.현재 육씨 가문은 이미 정식 사업가로 자리 잡은 상황이었다.과거의 폭력적인 방식은 더 이상 적합하지 않았다.강소아는 육경섭을 설득해 물러서게 한 뒤, 다음 수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소연화가 급히 뛰어왔다.“아가씨, 이것 좀 보세요!”소연화는 휴대전화를 내밀었다.화면에는 뉴스가 떠 있었고 제목은 눈에 띌 정도로 충격적이었다.[조씨 공익학교에서 터진 충격적인 추문, 관리직
가끔 차가 지나갔지만, 정승우가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어도 아무도 멈춰 서지 않았다.어둠이 내려앉았고 기온은 점점 내려가고 있었다.며칠 동안 육체와 마음이 지친 권온유는 이제 무너질 듯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정승우는 어쩔 수 없이 온유를 등에 업고 비틀거리며 길을 걸었다.“오빠...”권온유는 울먹이며 말했다.“해가 졌어요. 저... 무서워요.”“괜찮아.”정승우는 뒤돌아 미소를 지었다.“오빠가 집에 데려다줄게.”“오빠, 우리 그냥 돌아가요...”“뭐라고?”권온유의 시선이 정승우의 피로 물든 발에 닿았다.“발이 많이 아프죠?”권온유의 작은 얼굴 위로 눈물이 두 줄기 흘러내렸다.“오빠, 저 내려주세요. 그냥 돌아가요...”“온유야?”권온유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그 집이 낡고 춥긴 해도... 오빠 발에서 피가 나진 않잖아요!”정승우는 멍하니 잠시 굳어 있다가 그 어눌한 말 속에 담긴 다정함을 깨달았다.이 작은 아이는 납치당했던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라도 정승우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정승우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작은 새들이 집으로 향해 줄지어 날고 있었다.정승우는 온유를 데리고 반드시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다짐했다.“바보야.”정승우는 온유를 내려놓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난 하나도 안 아파. 그리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어.”“그 사람이... 우리를 때릴까요?”“그럴 거야.”정승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어린 시절, 정대명에게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탈출할 때 그의 뒤통수를 내려친 한 방은 그동안의 빚을 모두 갚은 셈이었다.“그런데 오빠, 그 사람은 오빠 아빠잖아요?”권온유는 작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하지만 오빠가 아프다고 제가 말했을 때 오빠 아빠가 들어왔었잖아요.”정승우는 쓴웃음을 지었다.자신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정대명이 들어온 것은 아마 걱정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죽으면 함께 나쁜 짓을 할 사람이 없어질까 봐서였었다.정대명은 단지
차 안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영미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정대명에게 다가갔다. 그의 머리 아래로 어두운 핏자국이 퍼져 있었고 그 흔적은 이미 굳어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의 코 밑에 손을 가져다 댔다.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영미는 떨리는 마음을 억누른 채 차가운 눈빛으로 정대명을 내려다보다가 거칠게 발길을 휘둘렀다.“일어나요!”강소아와 최군형도 다가와 공장 안을 살폈지만 안은 고요히 비어 있었다.“아이들은요?”“아이고...”정대명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살려줘, 살려줘... 저 괘씸한 녀석이!”“정대명 씨!”영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했다.어쨌든 이번 일은 영미가 자신 있게 권온유의 행방을 안다고 장담한 일이었다.영미는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함께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확신에 차 말했다.그런데 지금... 정대명은 다쳐 쓰러져 있고 두 아이는 사라졌었다.백인서를 함정에 빠뜨리려던 영미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것이다.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정대명은 도움을 청하려다 영미가 눈짓을 주는 것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영미의 눈길을 따라 보니 최군형과 강소아도 함께 와있었다.정대명은 예전에 영미가 했던 경고가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아는 척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정대명은 머리를 살짝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신이 정대명인가요?”최군형이 다가가 물었다.정대명은 말끝을 흐리며 최군형의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백인서의 양아버지시고?”최군형은 다시 물었다.“당신이 당신 아들과 함께 권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게 맞나요?”“아니야, 나 아니야!”정대명은 크게 당황하며 손을 흔들었다.“이봐, 동생, 난 억울해! 내 아들 녀석이 나를 해치려고 했어! 내 머리를 봐, 그 자식이 벽돌로 내리쳤다니까!”“그만해요!”영미는 정대명의 말이 길어질수록 상황이 불리해질 것을 우려해 정대명을 노려보며 더 이상 말을 못 하게 했다.강소아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들의 서툰 수법이 한심하기만
경찰서 밖에서 최지용은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한참을 걷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젊은 경찰관이 안에서 뛰어나오고 있었다. 최지용은 급히 다가가며 말했다.“정호야!”정호라는 젊은 경찰관은 최지용을 보자 반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 녀석!”최지용은 정호에게 다가가 가볍게 주먹을 툭 날리며 말했다.“도대체 무슨 일이야? 왜 사전에 알려주지 않은 거야?”정호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방금 최씨 집안에서 백인서를 데려간 사람 중에 정호도 있었다. 최지용도 놀라웠지만, 영미 역시 경찰이 직접 찾아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떠나기 전, 정호가 살짝 눈짓을 보냈고 최지용은 그의 의도를 알아채 경찰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지용이 형.”정호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형수님께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잘 구분하고 계시니 문제없을 겁니다!”“도대체 누구 지시로 백인서를 여기로 데려온 거지?”“소아 아가씨예요!”정호는 어깨를 으쓱했다.“소아 아가씨가 갑자기 지시한 거라 사전에 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최지용은 살짝 놀랐다. 강소아의 지시라니.“형수님께서도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으니까요. 그 아이가 실종되기 전에 형수님께서 만난 적이 있거든요. 경찰이 형수님을 데려가서 조사하는 건 당연한 절차입니다.”최지용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피식 웃음을 지었다.강소아가 이런 ‘당연한 절차’를 이용해 백인서를 경찰서로 보낸 이유는 경찰서야말로 가장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또 누군가가 음모를 꾸며 백인서에게 덮어씌우려 한다 해도 경찰서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경찰서 안에는 일을 봐주는 사람들도 있으니 백인서가 여기서 며칠 지내는 동안 힘든 일 없이 외부의 소란도 피할 수 있는 셈이었다.최지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강소아는 정말 자매를 위한 배려가 남달랐다. 이렇게까지 배려심 깊은 방안을 생각해 내다니!“지용이 형.”정호가 계속해서 말했다.“도련님께서
영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소아 언니, 저를 믿지 않으세요?”“난 오직 사실만을 믿어.”“권씨 가문의 딸이 실종된 사건에 백인서 씨의 양아버지와 남동생이 관련되었어요, 그게 바로 사실이에요!”강소아는 순간 멍하니 있다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려 했다.세상에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다 있나 싶었다.호텔 뒷뜰에 있는 그 CCTV가 정말 완전히 고장 났다고 생각하는 걸까? 육씨 가문과 최씨 가문이 힘을 합쳐 그 고장 난 CCTV 하나도 못 고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최군형은 강소아의 어깨를 가볍게 눌러 안심시키며 슬며시 휴대전화를 건넸다.강소아는 화면을 확인했다. 최군형의 부하가 보낸 메시지였다.“도련님, CCTV 데이터를 복구 중입니다. 곧 진실이 밝혀질 겁니다!”강소아는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영미가 이렇게까지 백인서를 몰아세우는 걸 보니 마음 한구석에 무언가 꺼림칙한 게 남아 있는 것 같았다.어차피 꼬리가 저절로 드러날 것이었기에 그저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다.바로 그때, 집사가 다소 당황한 얼굴로 방에 들어섰다. 집사의 뒤에는 몇 명의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신분을 밝힌 후 방 안을 둘러보며 엄숙한 목소리로 물었다.“여기 백인서 씨가 계십니까?”표아정은 등을 꼿꼿이 펴고 대답했다.“경찰관님께서 여긴 무슨 일로 오셨나요?”“당신이 백인서 씨인가요?”“저는...”“백인서 씨가 납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신고를 접수했습니다!”“뭐라고요?”백인서는 얼굴이 창백해졌다.“백인서 씨, 조사에 협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희와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권온유가 납치된 지 하루가 지났다.그동안 정대명은 단 한 번 음식을 가져왔는데, 그것도 차갑게 식은 죽 한 그릇과 딱딱한 빵 한 조각뿐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귀하게 자란 권온유에게 이런 음식은 처음이었다. 울고 싶었지만, 감히 울지 못하고 그저 눈물을 참으며 빵을 조금씩 뜯어 먹고 있었다.정승우는 그런 온유의 모습을 보고
“아줌마,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그럼, 제가 알아낸 사실을 전부 말씀드릴게요!”영미는 입가에 교만한 미소를 띠며 백인서를 차갑게 한 번 쳐다보았다.“백인서 씨의 친어머니인 백홍은 인신매매범이었다는 사실, 모두 아셨나요? 백인서 씨의 어머니는 백인서를 정대명의 집에 맡겼고... 흥! 정대명의 아내도 백홍이 납치해 왔다는 소문이 있어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잖아요. 제 생각엔... 인신매매범의 딸이라면 그런 일쯤은 익숙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은 권온유의 실종이 정말로 백인서 씨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시나요?”“영미!”강소아가 나서며 분노를 가득 담아 소리쳤다.“허위 사실을 퍼뜨리지 마!”“소유 아가씨, 억울하네요!”영미는 강소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제가 이렇게까지 조사한 건 다 아가씨를 위한 거예요! 딸도 있는 사람이 백인서를 곁에 두고도 마음이 놓이세요?”“그만해!”최지용이 크게 소리쳤다.백인서는 몸을 떨며 믿기지 않는 눈으로 최지용을 쳐다보았다.그러나 최지용의 얼굴에는 의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최지용은 굳건한 눈빛으로 뒤에 있는 백인서를 지키고 있었다.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처럼 백인서를 아끼고 있었다.백인서는 코끝이 찡해지며 본능적으로 최지용의 손을 꼭 붙잡았다. 최지용의 따스한 손은 백인서에게 큰 용기를 주었고 그 온기가 어둠의 두려움을 잊게 해주었다.최지용은 백인서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고 다시 영미를 바라볼 때는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영미야.”최지용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두 집안의 관계를 생각해서 그저 넘어가는 거야. 더 이상 선을 넘지 마.”최군형도 나서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요, 백인서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모르겠어요? 영미 아가씨, 우리 최씨 가문 사람들을 바보로 생각하는 건 아니죠?”영미는 순간 긴장했다. 최군형의 말 속엔 어딘가 숨은 뜻이 있는 듯했다.최군형의 깊고 복잡한 눈빛을 파악하기 어려웠다.표아정은 천천히 일어나 어깨에 걸친 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