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연 씨.”곽보미가 다가가 진지하게 말했다.“이 신은 클로즈업 해야 해서 이따가 설연 씨 협조가 필요해요. 그러니까 진짜로... 맞아야 해요. 알겠죠?”“뭐라고요?”성설연의 낯빛이 확 굳어지더니 잠시 후 싸늘하게 웃었다.“허, 아무리 명성이 자자한 곽 감독님의 재주도 이 정도밖에 안 되나 봐요? 제가 왜 맞아야 하죠?”곽보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참았다.“방금 클로즈업 해야 한다고 했잖아요. 실감 나는 효과를 위해서라면 진짜로 때리는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주아 씨는 경험 있는 배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예전에도 다른 작품을 촬영할 때 진짜로 때리긴 했지만 아프지 않게 알아서 잘 조절했거든요.”“그 말 지금 저더러 믿으라고요?”성설연은 곽보미를 째려보았다.“감독님,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죠? 따귀 신을 진짜로 때린다면 교통사고 신은 그럼 진짜로 차에 부딪혀야겠네요?”곽보미는 말문이 막혀버렸다.전에 성설연이 촬영팀에 합류하면 잘 챙겨주겠다고 유찬혁과 약속했었다. 유찬혁은 고맙다면서 그녀에게 밥까지 사주었다. 곽보미는 힘들고 속상한 식사 자리일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갔다. 유찬혁과 함께할 수 있는 그 어떤 기회도 놓칠 수가 없었다.식사 자리에서 유찬혁은 곽보미에게 계속 술을 따라주면서 말끝마다 성설연 소리만 했다. 곽보미는 마음이 울컥했지만 그래도 겉으로는 억지 미소를 쥐어짜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걱정하지 마. 내가 있잖아. 나에게 맡겨.”곽보미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성설연과 대화하려 했다.“촬영은 원래 힘들어요. 주아 씨는 여우주연상까지 탄 배우인데도 필요하다면 차가운 물에 종일 몸을 담그라고 하면 담가요. 그리고 나석진 씨는 액션 신을 찍을 때도 스턴트맨을 쓰지 않아요. 와이어 신을 찍다가 온몸이 퉁퉁 부어도 아프단 소리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고요. 그런데 설연 씨는 따귀 신 하나 찍는데 이 정도로 엄살 부릴 필요 있나요? 게다가 이번 신은 주요하게 주아 씨를 찍어요. 주아 씨 연기라면 많아봤자 두 번 정
곽보미는 깜짝 놀란 얼굴로 문 쪽을 돌아보았다.유찬혁이 문 앞에 서 있었고 촬영팀 사람들도 가득 몰려있었다.곽보미는 유찬혁의 두 눈에 스친 실망감을 보아냈다. 이 상황을 설명하고 싶었지만 목구멍이 막힌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성설연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울먹이며 유찬혁의 품에 와락 안겼다.갑작스러운 포옹에 유찬혁은 온몸이 굳어버렸다. 한참 망설이다가 결국 성설연의 어깨를 토닥였다.“찬혁아, 내 말 좀 들어봐...”곽보미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방금은...”“방금 일은 나도 다 들었고 내 눈으로도 똑똑히 봤어.”유찬혁의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차분했지만 검은 두 눈에는 그녀에 대한 실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곽보미는 찢어질 듯한 마음의 고통이 온몸에 퍼져나가는 것만 같았다.“보미야.”유찬혁은 그녀 앞으로 다가가 복잡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설연이는 가수 출신 연기자야. 아직 모르는 게 많아서 그러는 건데 차근차근 가르쳐줄 수도 있잖아. 얘가 잘못한 게 있다면 내가 먼저 대신 사과할게.”“변호사님도 참 웃기시네요.”주아가 날카롭게 말했다.“대신요? 뭐든지 다 대신할 수 있다면 차라리 연기까지 대신하시죠?”유찬혁은 다른 사람은 거들떠보지 않고 곽보미만 어두운 눈빛으로 보았다. 곽보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다시 풀었다. 잠시 후,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이 신 하나 찍는데 설연 씨가 NG를 스무 번 넘게 냈어. 여기서 시간을 지체하면 나머지 신은 어떡해?”“보미 너...”“찬혁아, 됐어.”성설연은 속상한 척하며 그에게 기댔다.“곽 감독님이 나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거 알아... 남들은 연기 경험도 있고 천부적인 재능도 있지만 나만 멍청해. 아마 난 태어날 때부터 이런 애였나 봐. 찬혁아, 감독님에게 뭐라 하지 마. 감독님은 좋은 감독님이야. 지금까지 줄곧 인내심 있게 가르쳐줬어.”“인내심?”유찬혁의 눈빛에 싸늘함이 스쳐 지나갔고 아수라장이 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이건
“여우주연상이 뭐 어때서요? 여우주연상을 받아도 흑기사는 아무나 있는 것이 아니에요!”유찬혁은 그녀의 말투 속의 조롱함을 알아들을 수 있었고 이런 말썽이 많이 생기는 연예계에서 성설연이 살아남으려면 곽보미에게 의지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는 말없이 곽보미를 한번 바라보았는데 그녀의 붉어진 눈시울을 보았다.왠지 모르게 유찬혁의 마음은 원인 모를 아픔이 몰려왔다.강서연은 천천히 성설연 앞으로 걸어가 말했다.“성설연 씨, 촬영장 생활에 적응하고 있어요?”강서연이 그녀에 대해 관심을 보이자 유찬혁은 성설연에게 강서연과 대화를 더 많이 하라고 눈치를 줬다.하지만 성설연이 강서연을 바라보는 눈빛은 질투와 두려움이 역력했다.“제가 특별히 하나뿐인 디저트를 준비해 왔어요.”강서연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자 누군가가 작은 바구니 속 물건들을 꺼내놓았다.정교한 유럽식 본차이나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홍차가 아니라 약간 푸른빛이 도는 색이었다.“성설연 씨, 촬영장에 들어오면 화내지 마세요. 녹차를 마셔서 화를 가라앉히는 게 당신에게 좋을 거예요.”눈치가 있는 사람은 강서연이 성설연을 욕하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웃음을 참고 있었다.“성설연 씨, 좋은 차로 준비 했어요.”강서연은 또 옆에 작은 접시에서 디저트를 하나 집어 들었다.“이건 흰 연꽃의 꽃술로 만든 거예요. 한번 드셔보세요! 왜요? 맘에 안 들어요?”또 일부러 말했다.“성설연 씨 전에 이 차를 다른 손님에게 대접한 적이 있는데 그분마저도 좋다고 했어요! 마시지 않으면 너무 아까워요.”“당신...”성설연은 화가 났지만 감히 말하지 못했고 강서연과 눈이 마주친 순간 아연실색했다.유찬혁은 곧 강서연의 깊은 뜻을 알게 됐고 그 역시 이 갈등은 성설연의 잘못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그러나 그는 여전히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 성설연을 지켜줬다.온 세상이 그녀를 비난해도 유찬혁은 그녀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그는 온 세상을 등
곽보미는 강서연과 눈을 마주친 후 살짝 웃으며 정신을 다잡았다.“준비하세요.”그녀는 무전기를 들고 진지하게 화면을 바라보았다.“액션!”“쌍년아!”주아에게 클로즈업을 하자 여우주연상 받은 배우답게 전혀 사양하지 않고 손을 위로 들어 세게 성설연의 얼굴을 한 대 후려쳤다.성설연은 경악하여 본능적으로 얼굴의 반을 가렸고 너무 아파서 머리가 어지러웠다.주아는 머리카락을 풀어 헤치고 한복의 단추는 두 개나 뜯어져 있어 캐릭터와 완벽하게 어울리는 화끈한 성격의 소유자다.그녀는 성설연을 가리키고 침을 튀기며 욕을 했다.“이년아, 감히 나한테서 남자를 빼앗아? 네가 뭔데!”이 말에는 다소 진실한 감정이 실려있었다.주아는 1초 만에 몰입했고 자신을 곽보미로 상상하며 성설연을 노려봤다.“지금 아주 좋아요!”조감독이 한쪽에서 지휘했다.“배우님은 감정에 주의하세요. 맞습니다... 더 격하게! 클로즈업해 주세요... 계속 대사 하세요!”“야, 일어나! 반항해 봐! 내 앞에서 약한 척하는 거야? 너의 이런 수법은 남자에게는 통하지만 나에게는 통하지 않아! 오늘은 안 봐줄 거야!”주아는 대사를 말하는 요령이 탄탄하고 표정과 감정도 모두 갖춰져 있어 이 신은 순조롭게 끝났다.“좋았어요!”곽보미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이 장면이 통과되자 그녀의 마음속에 있던 큰 돌덩이가 땅에 떨어졌다. 금세 방금의 불쾌함을 뒤로하고 정신을 차리고 다음 장면을 준비했다.다음은 성설연의 신이 없다.성설연은 주아의 따귀를 맞고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손발이 차갑고 온몸을 떨며 한쪽으로 물러나 강서연과 곽보미를 싸늘하게 응시했다.주아는 속이 후련한지 망토를 두르고는 우쭐거리며 그녀의 앞을 지나쳐 가면서도 그녀에게 경멸 가득한 눈빛을 던지는 것을 잊지 않았다.촬영장은 다시 정돈된 질서를 되찾았고 곽보미도 일에 몰두하고 다른 배우들도 모두 호흡을 맞췄다.성설연만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유찬혁을 바라보며 불공평한 대우를 받은 듯한 모습이다.유찬혁은 인상을 구겼고 잠
“고마워.”“친구끼리 이 정도쯤이야!”유찬혁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럼... 지금 화 풀렸어?”“응?”“나도 네가 이성적이고 신중하고 열정적이고 솔직한 사람인 거 알아. 그래서 아까... 분명히 설연이가 잘못해서 네가 그렇게 화내 게 된 거야. 내가 대신 사과할게. 화내지 마.”곽보미는 잠시 멈칫하더니 막 사라졌던 먹구름이 다시 마음속에 막혔다.알고 보니 유찬혁이 자기에게 이것을 준 것은 결국 성설연 때문이었다.유찬혁의 눈에 곽보미는 매우 철이 들었기 때문에 철이 든 사람은 관대하고 이해심이 많아야 하며 마음이 넓어야 한다. 설령 억울한 일을 당해도 따지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사탕은 우는 애들이나 주는 거다!곽보미는 시종일관 성설연 같은 모습을 할 수 없었고 그렇게 하는 것을 하찮게 여겼다.그래서 유찬혁의 마음속에서 그녀는 영원히 성설연보다 못하다.곽보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여 보니 손에 들고 있는 복주머니가 그렇게 화사해 보이지 않은 것 같았다....늦은 시간 남자 몇 명이 술집에서 만나기로 했다.최연준은 원래 가고 싶지 않았으나 배경원이 이 술값은 그가 내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마지못해 갔다.배경원은 그를 보자마자 배시시 웃기만 했다.“형, 내가 기억하기로는 강주에 있을 때 형수님이 형한테 돈을 다 썼잖아요! 형은 어떻게 지금... 이렇게 초라해졌어요?”최연준은 그에게 날카로운 눈빛을 던지며 손에 들고 있는 시바스 리갈을 먹고 있었다.“당연히 초라하죠!”육경섭은 게임을 하면서 웃고 있었다.“경원 씨는 온몸에 10만 원만 가지고 있는 재벌 후계자를 본 적이 있어요?”“경섭 형님도 만만치 않아요!”배경원이 팩폭을 했다.“형님, 마지막으로 담배 피운 게 언제 적이에요?”“에잇!”육경섭은 게임기를 버리고 그를 때리러 갔다.최연준은 싸움을 말리는 척하며 틈을 타 배경원을 몇 대 때렸고 배경원의 비명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세 사람은 왁자지껄 떠들썩하게 어울렸지만 유찬혁만이 한쪽에 앉
“연준 형...”유찬혁은 목이 조여 왔고 평소 언변이 좋았던 그는 지금 최연준 앞에서 식은땀만 흘렸다.게다가 그는 이렇게 엄숙한 최연준을 본 적이 없다.“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잘못이 없지만 너는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해!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알아야 사랑할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판단할 수가 있어.”“연준 형...”유찬혁은 쓴웃음을 지으며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형은 서연 씨를 알고 나서야 사랑하기로 한 거예요? 아니잖아요! 분명 형은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아했을 거예요!”최연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유찬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에게 한 잔을 더 따랐다.“서연이는 그 여자와 달라!”최연준은 싸늘하게 말했다.“너는 그 둘을 비교하면 안 돼!”“왜요?”유찬혁은 술기운을 빌려 냉랭하게 웃었다.“형의 여자는 손안에 들고 있는 보물이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 가치도 없어요?”“너...”‘이 멍청한 놈!’성설연이 유찬혁을 신경 썼더라면 벌써 그와 함께 있었을 텐데 이렇게 오랫동안 어장관리를 하지는 않았을 거다!이 여자가 그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유찬혁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그 사람은 나를 좋아할 거예요...”유찬혁은 술병을 들고 마셨다.그는 변호사이기 때문에 항상 냉정하고 정신을 차려야 하므로 이렇게 마신 적이 없는데 오늘 그는 추태를 부렸다.최연준은 그를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관여하지 않고 방에서 나왔다.유찬혁은 마지막으로 술집에서 나왔고 이때 이미 늦은 밤이었다. 그는 술을 많이 마셔서 걸을 때 몸이 약간 흔들렸다.그의 기억이 맞는다면 이렇게 제멋대로 한 것은 태어나서 처음인 것 같다.유씨 가문은 오성에서 으뜸가는 학자 집안으로 어려서부터 유찬혁에 대한 훈육도 매우 엄격하여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일을 하고 나서 일부 접대가 불가피하므로 상징적으로 한 모금 마시는 것뿐이었다.감정적으로는 더더욱 텅 비어 있었다.
최지한은 위아래로 유찬혁을 훑어보다가 그가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자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서 물었다. “유 변호사님, 생각해 보지 않겠어요?”“제 일에 신경 쓰지 마세요.”유찬혁이 싸늘하게 그를 바라보았다.“저는 도련님께서 자기 일에 좀 신경을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니 몸이 점점 안 좋아지는 것 같은데요?”“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적당히 절제하는 것도 자신에게 이로워요!”유찬혁은 복잡한 웃음을 지으며 최지한의 어깨를 토닥였다.“젊은 나이에 신장이 허하여 머리숱이 없어서야 되겠어요? 최씨 가문의 체면은 정말 당신 하나 때문에 구겨지겠어요!”“당신...”최지한의 손이 올라가자마자 유찬혁은 바로 그의 손목을 잡고 그를 옆으로 세차게 내동댕이쳤다. 술에 취했지만 여전히 힘은 셌다.유찬혁은 웃으며 주차장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최지한은 최연준 옆에 있는 친구들이 모두 실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작은 변호사 주제에 감히 그에게 대들 줄은 생각도 못 했다.강서연이 모든 경호원을 철수시킨 바람에 이제 최지한은 자신의 세력을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다!최지한은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성을 냈고 옆에 있던 차가 그의 화풀이 대상이 되어 그는 세게 발길질했다.자동차는 바로 경적을 울렸다.최지한이 떠나고 싶어도 이미 늦었다. 술집에서는 몇 명의 건장한 청년들이 걸어 나왔는데 하나둘씩 만취한 모습이고 찐빵 같은 얼굴로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누가 내 차를 찼어?”최지한이 잠시 멈칫하자 반응도 못 한 채 선두에 선 사람이 그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뭐 하는 거야? 눈멀었어? 날 몰라?”청년들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한동안 자세히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어디서 나온 개미 한 마리야?”“너희들...”“이 개자식아, 감히 내 차를 걷어차다니. 가만 안 놔둘 거야!”“나는 최상가 장손 최지한이야!”청년들이 실소했다.“그럼 나는 최연준이다. 하하하...”“야, 당장 와서 내 차에 사과해!”주차장은
“연기하지 마세요!”윤문희는 어이없어했다.“윤정재 씨, 당신만 의사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사람을 속이고 싶어도 넘어갈 수 있는 호구를 찾으세요.”그녀는 그의 팔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혼자 보세요. 당신이 찌른 위치는 내가 방금 찌른 것과 전혀 다른 혈 자리잖아요!”“문희야...”윤정재는 소심하게 그녀를 한 번 불렀고 또 바보와 같이 웃기 시작했다.‘왜 아직도 어릴 때랑 똑같지?’예전에 윤문희는 화가 났을 때 자주 바늘로 그를 찔렀던 것이 기억났다. 그때 다른 여자와 몇 마디 말을 더 했더니 몸에 이상하게 여러 개의 침 구멍이 생기고 몸의 절반이 마비됐던 적이 있다.윤정재는 열몇 살 되는 소녀가 어떻게 이렇게 정확하게 찌를 수 있는지 의문점이 들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녀는 진짜 윤제 그룹의 공주였고 조상 대대로 황실 어의여서 의학에도 타고난 재질을 가지고 있었다.하지만 윤정재는 그녀와 달리 전부 다 각고의 노력으로 차근차근 밟아 나가는 것이지 지름길이 없고 버티기만 할 뿐이다.그해의 그 복수처럼 윤문희가 그와 결별한 순간 윤정재의 마음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죽을힘을 다해 버텨냈다.지금까지 버텼지만 그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문희야, 내가 몇 마디만 할 수 있게...”“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윤문희는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당신이 완전히 회복되고 퇴원하면 다시 모르는 사이로 됩시다.”“문희야!”“윤정재 씨.”그녀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그때 한 약속을 잊지 마세요.”윤정재가 잠시 멈칫했다.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돌아가서 그 약속을 한 자신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무슨 약속을 함부로 했을까? 그것도 다시는 귀찮게 안 하겠다고 영원히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 진짜 그때 머리가 어떻게 된 거는 아닌지 후회막심했다.윤정재는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윤문희가 등을 돌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뒷모습은 더 이상 소싯적처럼 가녀리고 여리지 않았고 세월의 흔적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