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아무것도 아니야.”윤문희가 침착한 말투로 말했다.“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했어. 사람은 나이가 들면 진짜 건강 관리 잘해야 해.”“엄마...”강서연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말할까 말까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결국 물어보기로 했다.“혹시 아저씨랑 이미 만났어요?”윤문희는 잠깐 멈칫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응.”“이런 우연이!”강서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보며 웃었다.“제가 엄마에게 소개하려고 했던 분이 바로 이 아저씨예요. 아저씨도 샴고양이를 키워요. 지난번에 뚱냥이도 데리고 두 사람을 만나게 하려 했었어요.”김자옥이 마른기침을 했고 윤문희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최연준은 강서연의 작은 손을 꼭 잡았다. 눈치 빠른 강서연은 그들의 안색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어디가 이상한지 구체적으로 얘기할 수는 없었다.세심하고 꼼꼼한 김자옥은 강서연이 머리가 똑똑하여 집으로 돌아가 조금만 생각하면 뭔가 알아차리리라 생각했다. 그때가 되면 윤문희가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게 된다.그런 상황을 막으려면 지금 화제를 돌려야 했다. 김자옥은 웃으며 강서연의 손을 잡고 말했다.“서연아, 며칠 전에 네 엄마가 혼자 집에서 넘어졌잖아. 너와 찬이도 평소 집에 없어서 혼자 외로울까 봐...”“그러니까 아주머니도 엄마와 아저씨가 어울린다는 말씀이죠?”강서연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응?”김자옥이 두 눈을 깜빡였다.‘난 집에서도 누군가 문희를 챙길 수 있게 도우미를 찾았으면 좋겠다는 얘기였는데.’하지만 강서연의 순진하고 기대 가득한 웃음에 김자옥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병실에 누워있던 윤정재가 드디어 깨어났다. 깨어나자마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나름 준수했던 얼굴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퉁퉁 부었고 두 눈도 실눈이 되고 말았다. 너무 부은 탓에 말을 하려고 애를 써도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고 한마디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강서연은 그에게 조용히 다가갔다. 그의 모습이 웃기면
잠시 후, 박경수가 손에 노트북을 들고 왔다.강서연이 식사를 마친 후 박경수는 도우미에게 그녀 앞에 놓인 식기를 전부 치우라고 한 다음 그 자리에 노트북을 내려놓았다.최연준도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다가가 보았다. 노트북 화면에 숫자가 빼곡하게 적힌 표가 나타났다.“그건 장부야. 회사 건 아니고 최상 빌라 거야.”최재원의 말투는 매우 담담했다.“서연아, 이상한 부분이 있는지 꼼꼼하게 봐줘.”“할아버지, 이건...”최연준이 뭐라 하려던 그때 강서연이 몰래 그의 손등을 꽉 눌렀다. 강서연은 최연준에게 눈치를 주며 고개를 내저었다.최재원은 지금 그녀를 시험하고 있었다.지난번 서교 땅 프로젝트의 불법 매매가 최진혁과 연관이 있다는 걸 강서연이 알아낸 후로 최재원은 그녀를 달리 보기 시작했다.하여 요즘 최재원은 최연준과 강서연을 집으로 자주 불렀고 가끔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에게 질문을 던지곤 했다. 그리고 머리가 영리한 그녀는 최재원의 질문에 항상 완벽하게 답했다.지난번에 국제 정치 형세에 관한 생각을 물었었는데 이번에는... 경제 장부?강서연은 심호흡 한번 하고 노트북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장부가 복잡하고 숫자들이 빼곡하게 적혀있어 눈만 피곤한 게 아니라 머리도 지끈거릴 정도였다. 반드시 좋은 기억력을 지녀야만 데이터를 제대로 분석하여 최재원이 말한 ‘문제’를 찾아낼 수 있다.강서연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점차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30분이 지나갔고 최상 빌라의 장부에 대한 윤곽도 대충 잡혔다.그녀는 마우스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부적절한 곳을 과감하게 집어냈다.최재원은 강서연이 찾아낸 부분을 보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이 돈은 애들 생활비야.”“알아요. 그래서 소부분만 삭제했어요. 기본적인 의식주는 보장해야 하니까요.”그러자 최재원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이게 소부분이라고? 네가 삭제한 것들이 적은 액수는 아닌데?”“액수가 적었다면 골라내지도 않았죠.”강서연이 웃으며 말했다.“할아버지, 전 최씨 가문의 자제들
“그리고...”강서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보안 비용과 개인 경호 비용은 중복된 거니까 삭제해야 해요.”“뭐?”최재원이 화들짝 놀랐다.“할아버지.”강서연은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게 설명했다.“이 빌라에는 이미 가장 선진적인 보안 시스템이 있고 가장 뛰어난 경호원들이 각 별장에 분포되어 있어요. 그런데 굳이 개인 경호원까지 쓸 필요가 있을까요? 개인 경호원이라면 스스로 알아서 돈을 내서 구해야지, 가문에서 대준다는 게 말이 돼요?”최연준은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고 몰래 속으로 아내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강서연이 집어낸 이 문제는 최진혁과 최지한을 가리켰다.최씨 가문의 자제 중에 최재원의 중시를 받는 최연준 말고도 몇몇 사촌 형제들이 있었는데 다들 본부에서 힘을 보태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사촌 누나와 사촌 여동생들도 여자지만 남자에게 전혀 뒤지지 않았고 각자의 계열사를 잘 경영해 나가고 있었다.오직 최지한만이 집에 일전 한 푼 보태준 적이 없으면서도 돈을 물처럼 쓰듯 했다. 그 바람에 박경수는 장부상의 수입과 지출을 맞추려고 자주 애를 먹곤 했다.게다가 개인 경호원도 최진혁과 최지한만 있었다.최연준도 예전에 이 문제 때문에 최재원과 한바탕 싸운 적이 있었다. 하지만 최재원은 각자의 세력을 평등화하기 위하여 최진혁의 일부 행동을 보고도 못 본 척했다.이젠 최씨 가문도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할 듯싶다. 계속 이대로 나갔다간 임씨 가문처럼 겉보기는 화려하지만 속은 썩어 문드러진 꼴이 될 게 뻔했다.“그럼 이 몇 가지는?”최재원은 웃으며 일부러 물었다.“아낄 필요 없겠어?”최재원이 가리킨 건 집사와 도우미의 복지 혜택이었다. 중복된 부분이 있긴 했지만 강서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최재원의 두 눈에 빛이 스쳐 지나갔다.“이유가 뭐지?”“최씨 가문의 복지 혜택이 아주 좋아요. 이건 집사와 도우미들이 떠나지 않고 오랜 시간 일할 수 있는 전제죠.”강서연이 나지막이 말했다.“한 가문이 오랫동안 흥성하려면 결국에는 믿을 만한
강서연은 살짝 멈칫했다. 귀여운 두 볼이 발그스름해졌고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설레고 흥분됐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최재원은 자신의 감정을 밖에 드러내지 않는 강서연의 성격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아무 말 없으면 동의한 걸로 알게.”최재원이 웃으며 말했다.“아무튼 나중에 연준이와 결혼하면 우리 집안의 안주인이 될 것이고 가업도 두 사람에게 다 맡길 생각이야. 하하... 반평생 쉬지도 못하고 바쁘게 살아온 나도 드디어 여유를 좀 누릴 수 있겠구나.”“할아버지...”최연준은 놀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고 기쁨에 겨워 말을 잇지 못했다.“왜 그런 표정을 하고 있어?”최재원이 아래위로 훑어보자 최연준이 피식 웃었다.“계속 반대하시더니 왜 갑자기... 안 그래도 제가 서연이에게 프러포즈한 사실을 요 며칠 할아버지께 말씀드릴 참이었는데...”“너 이 녀석.”최연준의 말이 끝나기 전에 최재원이 두 눈을 부릅떴다.“내가 언제 계속 반대했어?”최연준은 순간 멍해졌다.“경수야, 내가 반대한 적이 있었어?”“당연히 없죠.”박경수는 바로 최재원의 편을 들었다.“셋째 도련님께서 잘못 기억하신 거 아니에요? 영감님께서는 줄곧 서연 씨를 마음에 들어 하셨고 예전부터 손주며느리로 들일 생각이셨어요.”“내가 사람 보는 눈이 어때?”“영감님의 사람 보는 눈이 언제 틀린 적이 있었던가요? 걱정하지 마세요. 서연 씨는... 아니, 셋째 사모님은 앞으로 최씨 가문을 잘 관리할 거니까 영감님은 복이나 누릴 준비하세요.”최연준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그때 찬 바람이 휙 불면서 그의 머리가 살짝 헝클어졌다.본가의 위치가 빌라에서 가장 좋은 곳인데 창문을 안 닫은 건가? 아니면 문을 안 닫은 건가?“서연아.”최재원은 최연준을 혼낸 후 바로 다시 다정하게 웃었고 목소리도 한결 부드러워졌다.“할아버지는 다 먹었으니까 너희들은 천천히 먹어. 하하... 오늘 특별히 새로 온 이탈리아 요리사에게 부탁한 거
“네.”최연준이 고개를 끄덕였고 최재원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생각에 잠긴 듯했다.“서연이는 다 좋은데 출신이 조금...”‘출신?’최연준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비록 윤정재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또 요즘 대체 무슨 영문인지 최연준을 볼 때마다 원수 보듯 했지만 그래도... 결국에는 강서연의 친아버지였다. 최연준이 참는 수밖에 더 있겠는가?아내를 사랑하면 처가 말뚝에다 대고 절까지 한다고 했다.최연준은 정신을 가다듬고 최재원에게 강서연의 출신에 대해 얘기하려 했다. 그런데 그가 아직 말을 꺼내기도 전에 최재원이 갑자기 확고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연준아, 아무래도 서연이의 양부모가 될만한 괜찮은 집안을 알아봐야겠어.”“네?”최연준이 화들짝 놀랐다.“4대 가문끼리 대대로 사돈을 맺어왔어.”최재원의 눈빛이 복잡했다.“이건 우리 조상님들이 남긴 규정인데 내 세대에서 깨지면 안 돼. 그런데 난 서연이가 참 마음에 들거든. 그러니까 서연이에게 양부모를 찾아주는 것보다 더 좋은 선택은 없어.”“할아버지...”“배경이 있는 가족을 찾아주면 서연이도 기댈 수 있는 곳이 생기고 남들도 더는 서연이의 출신이 좋지 않다고 수군거리지 않을 거야. 어때?”최재원이 눈썹을 치켜올렸는데 그 표정은 마치 이런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나 똑똑하지?’최연준은 어이가 없었다.“그럴 필요 없어요, 할아버지. 서연이는...”“왜 필요 없어?”최재원이 그를 째려보았다.“넌 네 와이프가 걱정되지 않겠지만 난 내 손녀가 걱정된다고.”“손... 녀요?”“그래!”최재원이 당당하게 말했다.“서연이는 나와 마음이 잘 맞아. 너희들 같이 집안을 망치는 자식들보다 훨씬 나아.”최연준은 막연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어떻게 이런 충격적인 말씀을 할 수가 있죠? 집안을 망치는 자식은 최지한뿐인데.’최재원은 고개를 내저으며 옥패를 다시 넣더니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아무튼 이미 다 찾아놓았어.”그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요즘 내 병
최연준이 에덴으로 돌아왔을 때 강서연은 박경실에게서 주방에서 요리를 배우고 있었다.박경실이 가스 불을 낮추었고 솥 안의 국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온 집안에 맛있는 냄새와 따뜻함이 가득했다.“마지막에 이걸 넣으면 돼요.”박경실이 차근차근 가르쳐주었고 강서연도 열심히 배웠다.“이러면 돼요?”“네.”“그렇군요.”강서연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이걸 넣으니까 향이 더 좋아진 것 같아요.”“이런 국은 사모님과 도련님 모두 드셔도 좋아요. 이젠 겨울이라 날씨도 차갑고 건조하잖아요. 영양 보충하셔야죠.”“네.”강서연은 웃으며 대답한 후 솥뚜껑을 닫고 불을 꺼버렸다. 그러자 박경실이 의아해하며 물었다.“안... 드세요?”“연준 씨가 돌아오면 같이 먹으려고요.”“도련님 오늘 본가로 가시지 않았어요? 바로 돌아올 것 같진 않은데 먼저 드세요. 도련님 건 따로 남겨드리면 되죠.”“안 돼요. 혼자 먹으면 맛없어요.”강서연이 히죽 웃었다.“와서 같이 먹어야 맛있어요.”그녀의 달콤한 목소리에 주방 밖에 있던 최연준은 마음이 설렜고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예전에 강주에 있을 때도 강서연은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최연준이 돌아오길 기다렸다가 함께 먹곤 했다. 그때 그녀는 최연준이 제대로 먹지 못할까 봐, 옷을 제대로 입지 못하여 밖에서 놀림이라도 당할까 봐 가장 걱정했었다. 하여 그에게 최대한 좋은 삶을 주기 위하여 미친 듯이 돈을 벌었다.3개월의 인센티브를 모아서 최연준에게 수백만 원짜리 양복을 사주었고 전 재산을 털어 자동차까지 사주었다.가장 어려웠을 때도 최연준이 60만 원짜리 벨트를 사겠다고 하자 강서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돈을 줬었다.그리고 강서연이 첫 월급을 탔을 때 두 사람은 제인 호텔에 갔었다. 강서연은 돈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랍스터 리소토를 사주면서 웃으며 말했다.“당신이 일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내가 먹여 살리면 되죠.”최연준은 눈시울이 붉어졌고 복잡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오성에 온 후 사람들은 최연준이 강서연
“감독님.”누군가 말끝을 길게 늘어뜨리며 곽보미 옆으로 다가오더니 그녀를 비난하듯이 쳐다보고는 옆에 빈자리에 앉았다.“무슨 일이죠?”곽보미는 피곤한지 미간을 어루만졌다.다가온 여자의 이름은 주아였는데 다년간 곽보미와 함께 작품을 한 간판급 여배우였다.지난번 임씨 가문의 연회에서 많은 여자 연예인들이 힘을 합쳐 성설연을 몰아붙일 때 주아도 한몫했었다.비록 가끔 생트집을 잡고 남에게 빌붙으려 하는 성격이긴 하지만 연기력 하나만큼은 흠잡을 데 없이 뛰어났다. 주아가 여러 작품에서 완벽한 연기를 펼친 덕에 곽보미도 상을 탈 수 있었다.두 사람 중 한 명이라도 없었더라면 오늘 이 자리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감독님, 서브 여주 좀 바꿔주면 안 돼요?”주아는 거리낌 없이 말했다.“이 속도로 촬영했다가 언제 다 촬영해요? 아직 나석진 씨와의 신도 남아있단 말이에요.”“주아 씨와 석진 씨의 연기가 문제없어서 한 번에 오케이 할 수 있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곽보미의 목소리가 축 처졌다.곽보미와 오랜 시간 함께 일해온 주아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있었다.‘남자 때문에 이렇게까지 해야 해?’남자는 무엇인가? 주아에게 있어서 남자는 그저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받는 디딤돌에 불과했다. 그녀는 항상 남자는 끊이지 않지만 트로피는 흔치 않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그러니 연애란 무엇이겠는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그때그때 즐기면 된다. 어쨌거나 일보다 더 좋은 건 없으니까.“보미 씨.”주아는 곽보미의 어깨를 잡고 진지하게 쳐다보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진짜로 때리라고 한마디만 해주면 저년 얼굴을 아주 만신창이로 만들어서 복수해... 읍!”주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곽보미가 그녀의 입을 막았다. 곽보미는 그녀를 째려보았고 주아는 미친 듯이 발버둥 치다가 놀란 얼굴로 거울을 비춰보았다.“보미 씨, 이렇게 꽉 누르면 어떡해요. 턱을 한 지 얼마 안 됐단 말이에요.”곽보미는 잠깐 멈칫하다가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주아
“설연 씨.”곽보미가 다가가 진지하게 말했다.“이 신은 클로즈업 해야 해서 이따가 설연 씨 협조가 필요해요. 그러니까 진짜로... 맞아야 해요. 알겠죠?”“뭐라고요?”성설연의 낯빛이 확 굳어지더니 잠시 후 싸늘하게 웃었다.“허, 아무리 명성이 자자한 곽 감독님의 재주도 이 정도밖에 안 되나 봐요? 제가 왜 맞아야 하죠?”곽보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참았다.“방금 클로즈업 해야 한다고 했잖아요. 실감 나는 효과를 위해서라면 진짜로 때리는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주아 씨는 경험 있는 배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예전에도 다른 작품을 촬영할 때 진짜로 때리긴 했지만 아프지 않게 알아서 잘 조절했거든요.”“그 말 지금 저더러 믿으라고요?”성설연은 곽보미를 째려보았다.“감독님,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죠? 따귀 신을 진짜로 때린다면 교통사고 신은 그럼 진짜로 차에 부딪혀야겠네요?”곽보미는 말문이 막혀버렸다.전에 성설연이 촬영팀에 합류하면 잘 챙겨주겠다고 유찬혁과 약속했었다. 유찬혁은 고맙다면서 그녀에게 밥까지 사주었다. 곽보미는 힘들고 속상한 식사 자리일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갔다. 유찬혁과 함께할 수 있는 그 어떤 기회도 놓칠 수가 없었다.식사 자리에서 유찬혁은 곽보미에게 계속 술을 따라주면서 말끝마다 성설연 소리만 했다. 곽보미는 마음이 울컥했지만 그래도 겉으로는 억지 미소를 쥐어짜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걱정하지 마. 내가 있잖아. 나에게 맡겨.”곽보미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성설연과 대화하려 했다.“촬영은 원래 힘들어요. 주아 씨는 여우주연상까지 탄 배우인데도 필요하다면 차가운 물에 종일 몸을 담그라고 하면 담가요. 그리고 나석진 씨는 액션 신을 찍을 때도 스턴트맨을 쓰지 않아요. 와이어 신을 찍다가 온몸이 퉁퉁 부어도 아프단 소리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고요. 그런데 설연 씨는 따귀 신 하나 찍는데 이 정도로 엄살 부릴 필요 있나요? 게다가 이번 신은 주요하게 주아 씨를 찍어요. 주아 씨 연기라면 많아봤자 두 번 정
그 순간, 조순철의 묵직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오늘 이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 매우 기쁩니다. 온유가 돌아왔다는 이유만은 아닙니다. 여러분과 한자리에 모일 수 있다는 이유만도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드디어 백인서 씨의 결백을 밝혀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뭐라고요?”영미의 귀에서 윙 하는 소리가 났다.“알고 있습니다. 요 며칠, 외부에서 떠도는 소문이 많았습니다. 온유의 실종이 백인서 씨와 연관되었다는 말까지 나돌고 있었죠.”조순철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힘이 실려 있었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또렷하게 공간을 메웠다.“심지어 경쟁자들이 저를 음해하기 위해 이런 추문을 이용하려 했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조순철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시선을 돌려 영미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렇죠, 영미 아가씨?”영미는 얼어붙었다. 순간, 모든 사람의 시선이 영미에게 쏠렸다. 그 시선은 바늘처럼 날카로워 영미의 온몸을 꿰뚫는 듯했다. 영미는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조... 조 시장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영미 아가씨, 제 말을 정말 이해 못 하시겠습니까?”조순철의 미소 속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빛이 서려 있었다.그리고 권욱의 시선은 더욱 살기를 띠고 있었다.부모는 자신에게 닥친 모든 일은 어떻게든 참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아이에게 손을 댄 사람이 있다면, 그 누구라도 가만히 둘 수 없었다.강소아와 최군형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부하들이 정대명을 방으로 데리고 들어왔다.영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영미는 본능적으로 정대명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정대명은 그녀를 보자마자 구원의 손길이라도 찾은 듯 온몸을 흔들며 다급히 외쳤다.“아니, 영... 영미 씨! 영미 아가씨! 제발 나 좀 도와줘!”“뭐 하는 짓이에요?”영미는 분노에 차 외쳤다.“제가 왜 당신을 도와줍니까?”“영미 아가씨가 나한테...”“그래요, 제가 당신에게 돈을 줬죠.”영
연회는 여전히 그 4성급 호텔에서 열리고 있었다.손님들 사이에서 소곤소곤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시장님이 정말 청렴하셔서 연회도 대단하게 하지 않고 이렇게 간소하게 한다는 대화였다.“무슨 소리야? 새로 취임했으니 당연히 이미지 관리를 하는 거겠지!”“하지만 권씨 가문이나 조씨 가문 정도라면 연회를 더 화려하게 할 수도 있잖아? 아무리 시장이라고 해도, 사위는 사업가 아닌가?”“맞아. 게다가 사대 가문과의 관계를 생각해 봐도, 좀 더 사치스럽게 해도 문제 될 건 없지.”“혹시... 이 호텔을 선택한 데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영미는 한쪽에서 조용히 이 대화를 듣고 있었다.특별한 이유라... 글쎄, 그런 건 없을 것 같았다. 영미는 그저 자신만 무사하면 된다고 생각했다.조순철은 무대 위에 서서 손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음악이 멈추고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조순철에게 집중됐다.비록 나이가 들었지만, 조순철은 여전히 허리를 꼿꼿이 펴고 기품 있는 모습으로 무대에 섰다. 그의 목소리는 힘 있고 우렁찼다.“먼저, 오늘 연회에 와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선거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여러분의 지지 덕분입니다. 여러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오성 시민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오성을 더 밝은 미래로 이끌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청중들은 힘찬 박수로 화답하며 잔을 들어 축하의 뜻을 전했다.“또한, 여러분께서 제 외손녀 권온유를 많이 걱정해 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조순철의 말이 끝나자마자 권온유가 무대로 달려 나와 외할아버지에게 안겼다. 조순철은 권온유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무대 아래에서는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대부분 사람이 권온유가 납치당한 일을 알고 있었고 권온유가 이렇게 빨리 돌아온 건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이 모든 행운이 가능했던 건 정승우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그 순간, 정승우는 한쪽 구석에서 권온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부
“정 선생님, 아직도 진실을 말할 생각이 없으신가요? 영미가 대체 얼마나 좋은 조건을 내걸었기에, 백인서를 모함하는 데 가담한 거죠?”정대명은 눈동자를 굴리며 머뭇거렸다. 어디까지 입을 열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당신이 인서의 양아버지라는 말은 사실입니까?”“그... 그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진실이야!”“그렇다면 딸을 키운 정도 있을 텐데 왜 모함하려 하신 거죠?”정대명의 몸이 떨렸고 시선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정 선생님, 이제 영미조차도 당신을 지켜줄 수 없습니다. 진실을 말하지 않으신다면 감옥에서 나올 수 없게 될 겁니다!”그때, 바깥에서 소연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소아는 정대명을 매섭게 노려본 뒤, 사람을 시켜 문을 잠그도록 지시했다.소연화는 최군형과 최지용을 데리고 들어왔다.“여보!”최군형은 강소아를 보자 반갑게 웃으며 말했다.“권온유와 정승우, 두 아이 모두 찾았어!”“정말인가요?”“그래.”최지용도 후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드디어 인서의 억울함을 풀 수 있게 됐어.”“인서는 원래부터 결백했어요!”강소아가 웃으며 말했다.“누가 아이들을 찾았나요?”“아이들이 어찌나 영리하던지, 스스로 빠져나왔더군.”최군형이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그날 밤, 우리가 정대명을 찾았을 때, 정대명의 머리가 다쳐 있었던 거 기억하지? 그 틈을 타 도망쳤대. 길에서 착한 운전사분을 만나 도움을 받았고 그 운전사가 집까지 데려다줬어. 차 안에서 정승우가 휴대전화를 빌렸는데 다행히도 권온유가 자기 엄마 전화번호를 기억하고 있어서 덕분에 바로 연락할 수 있었어. 아마 20분 후면, 두 아이 모두 안전하게 권씨 집안에 도착할 거야.”“정말 놀랍군요...”강소아는 감탄이 담긴 눈빛으로 답했다.“이렇게 어린아이들이 그런 상황 속에서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니. 역시 아이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어요! 저도 이제부터 가원이에게 제 전화번호를 외우게 해야겠어요!”“그런 말 하지 마!”최군형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집으로 돌아온 영미의 마음속엔 불안이 가득 찼다. 그러다 문득 시장 선거의 마지막 대결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이 스쳤다.지금이라도 폭탄 같은 뉴스가 터진다면 사람들의 관심은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쏠릴 것이 분명했다.그리고 그 뉴스가 백인서와 관련된 것이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영미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가에 자신감 넘치는 차가운 미소를 띠며 휴대전화를 들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기자와의 약속을 잡았다.“조순철 씨의 외손녀가 실종된 사건, 알고 계십니까?”카페의 한구석, 눈에 잘 띄지 않는 자리였다. 영미는 얼굴을 거의 가릴 만큼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맞은편에는 기자는 커피잔을 천천히 저으며 영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이건 단순한 어린이 실종 사건이 아닙니다. 누군가 계획적으로 벌인 일입니다.”“영미 씨.”기자가 녹음기를 켜며 말했다.“아시는 내용을 모두 말씀해 주세요. 자료는 제가 정리해 영미 씨 말씀대로 보도하겠습니다.”“좋아요.”영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제가 알고 있기로, 권씨 가문의 어린 딸을 데려간 사람은 바로 그 공익학교 프로젝트에 있던 한 학생입니다. 그리고 그 학생은 백인서의 지시를 받았죠!”녹음기를 쥔 기자의 손이 떨렸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강소아는 방문 앞을 서성이며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그 방에는 정대명이 갇혀있었는데 강소아가 아무리 질문해도 정대명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육경섭은 딸이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보고 희철을 시켜 예전 식으로 정대명을 다루려 했지만, 강소아가 막아섰다.현재 육씨 가문은 이미 정식 사업가로 자리 잡은 상황이었다.과거의 폭력적인 방식은 더 이상 적합하지 않았다.강소아는 육경섭을 설득해 물러서게 한 뒤, 다음 수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소연화가 급히 뛰어왔다.“아가씨, 이것 좀 보세요!”소연화는 휴대전화를 내밀었다.화면에는 뉴스가 떠 있었고 제목은 눈에 띌 정도로 충격적이었다.[조씨 공익학교에서 터진 충격적인 추문, 관리직
가끔 차가 지나갔지만, 정승우가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어도 아무도 멈춰 서지 않았다.어둠이 내려앉았고 기온은 점점 내려가고 있었다.며칠 동안 육체와 마음이 지친 권온유는 이제 무너질 듯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정승우는 어쩔 수 없이 온유를 등에 업고 비틀거리며 길을 걸었다.“오빠...”권온유는 울먹이며 말했다.“해가 졌어요. 저... 무서워요.”“괜찮아.”정승우는 뒤돌아 미소를 지었다.“오빠가 집에 데려다줄게.”“오빠, 우리 그냥 돌아가요...”“뭐라고?”권온유의 시선이 정승우의 피로 물든 발에 닿았다.“발이 많이 아프죠?”권온유의 작은 얼굴 위로 눈물이 두 줄기 흘러내렸다.“오빠, 저 내려주세요. 그냥 돌아가요...”“온유야?”권온유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그 집이 낡고 춥긴 해도... 오빠 발에서 피가 나진 않잖아요!”정승우는 멍하니 잠시 굳어 있다가 그 어눌한 말 속에 담긴 다정함을 깨달았다.이 작은 아이는 납치당했던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라도 정승우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정승우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작은 새들이 집으로 향해 줄지어 날고 있었다.정승우는 온유를 데리고 반드시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다짐했다.“바보야.”정승우는 온유를 내려놓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난 하나도 안 아파. 그리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어.”“그 사람이... 우리를 때릴까요?”“그럴 거야.”정승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어린 시절, 정대명에게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탈출할 때 그의 뒤통수를 내려친 한 방은 그동안의 빚을 모두 갚은 셈이었다.“그런데 오빠, 그 사람은 오빠 아빠잖아요?”권온유는 작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하지만 오빠가 아프다고 제가 말했을 때 오빠 아빠가 들어왔었잖아요.”정승우는 쓴웃음을 지었다.자신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정대명이 들어온 것은 아마 걱정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죽으면 함께 나쁜 짓을 할 사람이 없어질까 봐서였었다.정대명은 단지
차 안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영미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정대명에게 다가갔다. 그의 머리 아래로 어두운 핏자국이 퍼져 있었고 그 흔적은 이미 굳어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의 코 밑에 손을 가져다 댔다.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영미는 떨리는 마음을 억누른 채 차가운 눈빛으로 정대명을 내려다보다가 거칠게 발길을 휘둘렀다.“일어나요!”강소아와 최군형도 다가와 공장 안을 살폈지만 안은 고요히 비어 있었다.“아이들은요?”“아이고...”정대명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살려줘, 살려줘... 저 괘씸한 녀석이!”“정대명 씨!”영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했다.어쨌든 이번 일은 영미가 자신 있게 권온유의 행방을 안다고 장담한 일이었다.영미는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함께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확신에 차 말했다.그런데 지금... 정대명은 다쳐 쓰러져 있고 두 아이는 사라졌었다.백인서를 함정에 빠뜨리려던 영미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것이다.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정대명은 도움을 청하려다 영미가 눈짓을 주는 것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영미의 눈길을 따라 보니 최군형과 강소아도 함께 와있었다.정대명은 예전에 영미가 했던 경고가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아는 척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정대명은 머리를 살짝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신이 정대명인가요?”최군형이 다가가 물었다.정대명은 말끝을 흐리며 최군형의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백인서의 양아버지시고?”최군형은 다시 물었다.“당신이 당신 아들과 함께 권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게 맞나요?”“아니야, 나 아니야!”정대명은 크게 당황하며 손을 흔들었다.“이봐, 동생, 난 억울해! 내 아들 녀석이 나를 해치려고 했어! 내 머리를 봐, 그 자식이 벽돌로 내리쳤다니까!”“그만해요!”영미는 정대명의 말이 길어질수록 상황이 불리해질 것을 우려해 정대명을 노려보며 더 이상 말을 못 하게 했다.강소아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들의 서툰 수법이 한심하기만
경찰서 밖에서 최지용은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한참을 걷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젊은 경찰관이 안에서 뛰어나오고 있었다. 최지용은 급히 다가가며 말했다.“정호야!”정호라는 젊은 경찰관은 최지용을 보자 반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 녀석!”최지용은 정호에게 다가가 가볍게 주먹을 툭 날리며 말했다.“도대체 무슨 일이야? 왜 사전에 알려주지 않은 거야?”정호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방금 최씨 집안에서 백인서를 데려간 사람 중에 정호도 있었다. 최지용도 놀라웠지만, 영미 역시 경찰이 직접 찾아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떠나기 전, 정호가 살짝 눈짓을 보냈고 최지용은 그의 의도를 알아채 경찰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지용이 형.”정호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형수님께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잘 구분하고 계시니 문제없을 겁니다!”“도대체 누구 지시로 백인서를 여기로 데려온 거지?”“소아 아가씨예요!”정호는 어깨를 으쓱했다.“소아 아가씨가 갑자기 지시한 거라 사전에 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최지용은 살짝 놀랐다. 강소아의 지시라니.“형수님께서도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으니까요. 그 아이가 실종되기 전에 형수님께서 만난 적이 있거든요. 경찰이 형수님을 데려가서 조사하는 건 당연한 절차입니다.”최지용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피식 웃음을 지었다.강소아가 이런 ‘당연한 절차’를 이용해 백인서를 경찰서로 보낸 이유는 경찰서야말로 가장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또 누군가가 음모를 꾸며 백인서에게 덮어씌우려 한다 해도 경찰서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경찰서 안에는 일을 봐주는 사람들도 있으니 백인서가 여기서 며칠 지내는 동안 힘든 일 없이 외부의 소란도 피할 수 있는 셈이었다.최지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강소아는 정말 자매를 위한 배려가 남달랐다. 이렇게까지 배려심 깊은 방안을 생각해 내다니!“지용이 형.”정호가 계속해서 말했다.“도련님께서
영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소아 언니, 저를 믿지 않으세요?”“난 오직 사실만을 믿어.”“권씨 가문의 딸이 실종된 사건에 백인서 씨의 양아버지와 남동생이 관련되었어요, 그게 바로 사실이에요!”강소아는 순간 멍하니 있다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려 했다.세상에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다 있나 싶었다.호텔 뒷뜰에 있는 그 CCTV가 정말 완전히 고장 났다고 생각하는 걸까? 육씨 가문과 최씨 가문이 힘을 합쳐 그 고장 난 CCTV 하나도 못 고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최군형은 강소아의 어깨를 가볍게 눌러 안심시키며 슬며시 휴대전화를 건넸다.강소아는 화면을 확인했다. 최군형의 부하가 보낸 메시지였다.“도련님, CCTV 데이터를 복구 중입니다. 곧 진실이 밝혀질 겁니다!”강소아는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영미가 이렇게까지 백인서를 몰아세우는 걸 보니 마음 한구석에 무언가 꺼림칙한 게 남아 있는 것 같았다.어차피 꼬리가 저절로 드러날 것이었기에 그저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다.바로 그때, 집사가 다소 당황한 얼굴로 방에 들어섰다. 집사의 뒤에는 몇 명의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신분을 밝힌 후 방 안을 둘러보며 엄숙한 목소리로 물었다.“여기 백인서 씨가 계십니까?”표아정은 등을 꼿꼿이 펴고 대답했다.“경찰관님께서 여긴 무슨 일로 오셨나요?”“당신이 백인서 씨인가요?”“저는...”“백인서 씨가 납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신고를 접수했습니다!”“뭐라고요?”백인서는 얼굴이 창백해졌다.“백인서 씨, 조사에 협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희와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권온유가 납치된 지 하루가 지났다.그동안 정대명은 단 한 번 음식을 가져왔는데, 그것도 차갑게 식은 죽 한 그릇과 딱딱한 빵 한 조각뿐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귀하게 자란 권온유에게 이런 음식은 처음이었다. 울고 싶었지만, 감히 울지 못하고 그저 눈물을 참으며 빵을 조금씩 뜯어 먹고 있었다.정승우는 그런 온유의 모습을 보고
“아줌마,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그럼, 제가 알아낸 사실을 전부 말씀드릴게요!”영미는 입가에 교만한 미소를 띠며 백인서를 차갑게 한 번 쳐다보았다.“백인서 씨의 친어머니인 백홍은 인신매매범이었다는 사실, 모두 아셨나요? 백인서 씨의 어머니는 백인서를 정대명의 집에 맡겼고... 흥! 정대명의 아내도 백홍이 납치해 왔다는 소문이 있어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잖아요. 제 생각엔... 인신매매범의 딸이라면 그런 일쯤은 익숙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은 권온유의 실종이 정말로 백인서 씨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시나요?”“영미!”강소아가 나서며 분노를 가득 담아 소리쳤다.“허위 사실을 퍼뜨리지 마!”“소유 아가씨, 억울하네요!”영미는 강소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제가 이렇게까지 조사한 건 다 아가씨를 위한 거예요! 딸도 있는 사람이 백인서를 곁에 두고도 마음이 놓이세요?”“그만해!”최지용이 크게 소리쳤다.백인서는 몸을 떨며 믿기지 않는 눈으로 최지용을 쳐다보았다.그러나 최지용의 얼굴에는 의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최지용은 굳건한 눈빛으로 뒤에 있는 백인서를 지키고 있었다.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처럼 백인서를 아끼고 있었다.백인서는 코끝이 찡해지며 본능적으로 최지용의 손을 꼭 붙잡았다. 최지용의 따스한 손은 백인서에게 큰 용기를 주었고 그 온기가 어둠의 두려움을 잊게 해주었다.최지용은 백인서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고 다시 영미를 바라볼 때는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영미야.”최지용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두 집안의 관계를 생각해서 그저 넘어가는 거야. 더 이상 선을 넘지 마.”최군형도 나서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요, 백인서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모르겠어요? 영미 아가씨, 우리 최씨 가문 사람들을 바보로 생각하는 건 아니죠?”영미는 순간 긴장했다. 최군형의 말 속엔 어딘가 숨은 뜻이 있는 듯했다.최군형의 깊고 복잡한 눈빛을 파악하기 어려웠다.표아정은 천천히 일어나 어깨에 걸친 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