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준은 강서연의 손을 잡고 안심시킨 후 침착하게 길거리로 나섰다.구급차는 그들과 두 길목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최연준과 강서연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보니 커피숍 주변에 이미 많은 사람이 몰려있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진지한 얼굴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들것 주변에서 당황해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김자옥이었다.“엄마?”최연준이 그녀를 불렀다. 고개를 든 김자옥은 인파 속에서 두 사람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강서연은 조급한 마음에 다짜고짜 물었다.“아주머니, 혹시 우리 엄마가...”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윤문희가 커피숍에서 멀쩡하게 걸어 나왔다.강서연은 재빨리 다가가 그녀의 팔을 잡고 꼼꼼하게 살폈다. 다행히 아직 정신을 차리고 있는 걸 보니 예전의 병이 재발한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안색이 백지장처럼 새하얬다.“엄마, 왜 그래요?”강서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날... 놀라게 하지 말아요.”“난 괜찮아.”윤문희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멀지 않은 곳의 김자옥을 보면서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김자옥은 그녀의 뜻을 바로 알아챘다. 윤문희는 아직 강서연에게 자신의 출신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 김자옥은 강서연에게 다가가 어깨를 다독이며 웃었다.“서연아, 우리 둘 다 아무 일 없어... 저 사람은 윤 회장님이야.”“네?”강서연의 두 눈이 더욱 휘둥그레졌다.“그냥... 우연히 만났어.”김자옥은 머리를 굴려 거짓말을 늘어놓았다.“나와 네 엄마가 여기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윤 회장님을 우연히 만났어. 그런데 윤 회장님의 심장병이 발병한 거야.”윤문희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야말로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아저씨에게 심장병이 있었어요? 왜 저는 몰랐죠?”“나이가 들면 다 그래. 큰 문제 아니야.”김자옥은 재빨리 두 사람을 돌려보냈다.“됐어, 그만들 돌아가. 서연아, 나와 네 엄마는 윤 회장님을 병원에 데려갈 테니까 이따가 먹을 것 좀 가져다줘.”...병원 안, 윤문희는 어두
“아, 아무것도 아니야.”윤문희가 침착한 말투로 말했다.“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했어. 사람은 나이가 들면 진짜 건강 관리 잘해야 해.”“엄마...”강서연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말할까 말까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결국 물어보기로 했다.“혹시 아저씨랑 이미 만났어요?”윤문희는 잠깐 멈칫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응.”“이런 우연이!”강서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보며 웃었다.“제가 엄마에게 소개하려고 했던 분이 바로 이 아저씨예요. 아저씨도 샴고양이를 키워요. 지난번에 뚱냥이도 데리고 두 사람을 만나게 하려 했었어요.”김자옥이 마른기침을 했고 윤문희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최연준은 강서연의 작은 손을 꼭 잡았다. 눈치 빠른 강서연은 그들의 안색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어디가 이상한지 구체적으로 얘기할 수는 없었다.세심하고 꼼꼼한 김자옥은 강서연이 머리가 똑똑하여 집으로 돌아가 조금만 생각하면 뭔가 알아차리리라 생각했다. 그때가 되면 윤문희가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게 된다.그런 상황을 막으려면 지금 화제를 돌려야 했다. 김자옥은 웃으며 강서연의 손을 잡고 말했다.“서연아, 며칠 전에 네 엄마가 혼자 집에서 넘어졌잖아. 너와 찬이도 평소 집에 없어서 혼자 외로울까 봐...”“그러니까 아주머니도 엄마와 아저씨가 어울린다는 말씀이죠?”강서연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응?”김자옥이 두 눈을 깜빡였다.‘난 집에서도 누군가 문희를 챙길 수 있게 도우미를 찾았으면 좋겠다는 얘기였는데.’하지만 강서연의 순진하고 기대 가득한 웃음에 김자옥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병실에 누워있던 윤정재가 드디어 깨어났다. 깨어나자마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나름 준수했던 얼굴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퉁퉁 부었고 두 눈도 실눈이 되고 말았다. 너무 부은 탓에 말을 하려고 애를 써도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고 한마디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강서연은 그에게 조용히 다가갔다. 그의 모습이 웃기면
잠시 후, 박경수가 손에 노트북을 들고 왔다.강서연이 식사를 마친 후 박경수는 도우미에게 그녀 앞에 놓인 식기를 전부 치우라고 한 다음 그 자리에 노트북을 내려놓았다.최연준도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다가가 보았다. 노트북 화면에 숫자가 빼곡하게 적힌 표가 나타났다.“그건 장부야. 회사 건 아니고 최상 빌라 거야.”최재원의 말투는 매우 담담했다.“서연아, 이상한 부분이 있는지 꼼꼼하게 봐줘.”“할아버지, 이건...”최연준이 뭐라 하려던 그때 강서연이 몰래 그의 손등을 꽉 눌렀다. 강서연은 최연준에게 눈치를 주며 고개를 내저었다.최재원은 지금 그녀를 시험하고 있었다.지난번 서교 땅 프로젝트의 불법 매매가 최진혁과 연관이 있다는 걸 강서연이 알아낸 후로 최재원은 그녀를 달리 보기 시작했다.하여 요즘 최재원은 최연준과 강서연을 집으로 자주 불렀고 가끔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에게 질문을 던지곤 했다. 그리고 머리가 영리한 그녀는 최재원의 질문에 항상 완벽하게 답했다.지난번에 국제 정치 형세에 관한 생각을 물었었는데 이번에는... 경제 장부?강서연은 심호흡 한번 하고 노트북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장부가 복잡하고 숫자들이 빼곡하게 적혀있어 눈만 피곤한 게 아니라 머리도 지끈거릴 정도였다. 반드시 좋은 기억력을 지녀야만 데이터를 제대로 분석하여 최재원이 말한 ‘문제’를 찾아낼 수 있다.강서연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점차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30분이 지나갔고 최상 빌라의 장부에 대한 윤곽도 대충 잡혔다.그녀는 마우스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부적절한 곳을 과감하게 집어냈다.최재원은 강서연이 찾아낸 부분을 보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이 돈은 애들 생활비야.”“알아요. 그래서 소부분만 삭제했어요. 기본적인 의식주는 보장해야 하니까요.”그러자 최재원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이게 소부분이라고? 네가 삭제한 것들이 적은 액수는 아닌데?”“액수가 적었다면 골라내지도 않았죠.”강서연이 웃으며 말했다.“할아버지, 전 최씨 가문의 자제들
“그리고...”강서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보안 비용과 개인 경호 비용은 중복된 거니까 삭제해야 해요.”“뭐?”최재원이 화들짝 놀랐다.“할아버지.”강서연은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게 설명했다.“이 빌라에는 이미 가장 선진적인 보안 시스템이 있고 가장 뛰어난 경호원들이 각 별장에 분포되어 있어요. 그런데 굳이 개인 경호원까지 쓸 필요가 있을까요? 개인 경호원이라면 스스로 알아서 돈을 내서 구해야지, 가문에서 대준다는 게 말이 돼요?”최연준은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고 몰래 속으로 아내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강서연이 집어낸 이 문제는 최진혁과 최지한을 가리켰다.최씨 가문의 자제 중에 최재원의 중시를 받는 최연준 말고도 몇몇 사촌 형제들이 있었는데 다들 본부에서 힘을 보태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사촌 누나와 사촌 여동생들도 여자지만 남자에게 전혀 뒤지지 않았고 각자의 계열사를 잘 경영해 나가고 있었다.오직 최지한만이 집에 일전 한 푼 보태준 적이 없으면서도 돈을 물처럼 쓰듯 했다. 그 바람에 박경수는 장부상의 수입과 지출을 맞추려고 자주 애를 먹곤 했다.게다가 개인 경호원도 최진혁과 최지한만 있었다.최연준도 예전에 이 문제 때문에 최재원과 한바탕 싸운 적이 있었다. 하지만 최재원은 각자의 세력을 평등화하기 위하여 최진혁의 일부 행동을 보고도 못 본 척했다.이젠 최씨 가문도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할 듯싶다. 계속 이대로 나갔다간 임씨 가문처럼 겉보기는 화려하지만 속은 썩어 문드러진 꼴이 될 게 뻔했다.“그럼 이 몇 가지는?”최재원은 웃으며 일부러 물었다.“아낄 필요 없겠어?”최재원이 가리킨 건 집사와 도우미의 복지 혜택이었다. 중복된 부분이 있긴 했지만 강서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최재원의 두 눈에 빛이 스쳐 지나갔다.“이유가 뭐지?”“최씨 가문의 복지 혜택이 아주 좋아요. 이건 집사와 도우미들이 떠나지 않고 오랜 시간 일할 수 있는 전제죠.”강서연이 나지막이 말했다.“한 가문이 오랫동안 흥성하려면 결국에는 믿을 만한
강서연은 살짝 멈칫했다. 귀여운 두 볼이 발그스름해졌고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설레고 흥분됐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최재원은 자신의 감정을 밖에 드러내지 않는 강서연의 성격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아무 말 없으면 동의한 걸로 알게.”최재원이 웃으며 말했다.“아무튼 나중에 연준이와 결혼하면 우리 집안의 안주인이 될 것이고 가업도 두 사람에게 다 맡길 생각이야. 하하... 반평생 쉬지도 못하고 바쁘게 살아온 나도 드디어 여유를 좀 누릴 수 있겠구나.”“할아버지...”최연준은 놀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고 기쁨에 겨워 말을 잇지 못했다.“왜 그런 표정을 하고 있어?”최재원이 아래위로 훑어보자 최연준이 피식 웃었다.“계속 반대하시더니 왜 갑자기... 안 그래도 제가 서연이에게 프러포즈한 사실을 요 며칠 할아버지께 말씀드릴 참이었는데...”“너 이 녀석.”최연준의 말이 끝나기 전에 최재원이 두 눈을 부릅떴다.“내가 언제 계속 반대했어?”최연준은 순간 멍해졌다.“경수야, 내가 반대한 적이 있었어?”“당연히 없죠.”박경수는 바로 최재원의 편을 들었다.“셋째 도련님께서 잘못 기억하신 거 아니에요? 영감님께서는 줄곧 서연 씨를 마음에 들어 하셨고 예전부터 손주며느리로 들일 생각이셨어요.”“내가 사람 보는 눈이 어때?”“영감님의 사람 보는 눈이 언제 틀린 적이 있었던가요? 걱정하지 마세요. 서연 씨는... 아니, 셋째 사모님은 앞으로 최씨 가문을 잘 관리할 거니까 영감님은 복이나 누릴 준비하세요.”최연준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그때 찬 바람이 휙 불면서 그의 머리가 살짝 헝클어졌다.본가의 위치가 빌라에서 가장 좋은 곳인데 창문을 안 닫은 건가? 아니면 문을 안 닫은 건가?“서연아.”최재원은 최연준을 혼낸 후 바로 다시 다정하게 웃었고 목소리도 한결 부드러워졌다.“할아버지는 다 먹었으니까 너희들은 천천히 먹어. 하하... 오늘 특별히 새로 온 이탈리아 요리사에게 부탁한 거
“네.”최연준이 고개를 끄덕였고 최재원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생각에 잠긴 듯했다.“서연이는 다 좋은데 출신이 조금...”‘출신?’최연준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비록 윤정재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또 요즘 대체 무슨 영문인지 최연준을 볼 때마다 원수 보듯 했지만 그래도... 결국에는 강서연의 친아버지였다. 최연준이 참는 수밖에 더 있겠는가?아내를 사랑하면 처가 말뚝에다 대고 절까지 한다고 했다.최연준은 정신을 가다듬고 최재원에게 강서연의 출신에 대해 얘기하려 했다. 그런데 그가 아직 말을 꺼내기도 전에 최재원이 갑자기 확고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연준아, 아무래도 서연이의 양부모가 될만한 괜찮은 집안을 알아봐야겠어.”“네?”최연준이 화들짝 놀랐다.“4대 가문끼리 대대로 사돈을 맺어왔어.”최재원의 눈빛이 복잡했다.“이건 우리 조상님들이 남긴 규정인데 내 세대에서 깨지면 안 돼. 그런데 난 서연이가 참 마음에 들거든. 그러니까 서연이에게 양부모를 찾아주는 것보다 더 좋은 선택은 없어.”“할아버지...”“배경이 있는 가족을 찾아주면 서연이도 기댈 수 있는 곳이 생기고 남들도 더는 서연이의 출신이 좋지 않다고 수군거리지 않을 거야. 어때?”최재원이 눈썹을 치켜올렸는데 그 표정은 마치 이런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나 똑똑하지?’최연준은 어이가 없었다.“그럴 필요 없어요, 할아버지. 서연이는...”“왜 필요 없어?”최재원이 그를 째려보았다.“넌 네 와이프가 걱정되지 않겠지만 난 내 손녀가 걱정된다고.”“손... 녀요?”“그래!”최재원이 당당하게 말했다.“서연이는 나와 마음이 잘 맞아. 너희들 같이 집안을 망치는 자식들보다 훨씬 나아.”최연준은 막연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어떻게 이런 충격적인 말씀을 할 수가 있죠? 집안을 망치는 자식은 최지한뿐인데.’최재원은 고개를 내저으며 옥패를 다시 넣더니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아무튼 이미 다 찾아놓았어.”그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요즘 내 병
최연준이 에덴으로 돌아왔을 때 강서연은 박경실에게서 주방에서 요리를 배우고 있었다.박경실이 가스 불을 낮추었고 솥 안의 국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온 집안에 맛있는 냄새와 따뜻함이 가득했다.“마지막에 이걸 넣으면 돼요.”박경실이 차근차근 가르쳐주었고 강서연도 열심히 배웠다.“이러면 돼요?”“네.”“그렇군요.”강서연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이걸 넣으니까 향이 더 좋아진 것 같아요.”“이런 국은 사모님과 도련님 모두 드셔도 좋아요. 이젠 겨울이라 날씨도 차갑고 건조하잖아요. 영양 보충하셔야죠.”“네.”강서연은 웃으며 대답한 후 솥뚜껑을 닫고 불을 꺼버렸다. 그러자 박경실이 의아해하며 물었다.“안... 드세요?”“연준 씨가 돌아오면 같이 먹으려고요.”“도련님 오늘 본가로 가시지 않았어요? 바로 돌아올 것 같진 않은데 먼저 드세요. 도련님 건 따로 남겨드리면 되죠.”“안 돼요. 혼자 먹으면 맛없어요.”강서연이 히죽 웃었다.“와서 같이 먹어야 맛있어요.”그녀의 달콤한 목소리에 주방 밖에 있던 최연준은 마음이 설렜고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예전에 강주에 있을 때도 강서연은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최연준이 돌아오길 기다렸다가 함께 먹곤 했다. 그때 그녀는 최연준이 제대로 먹지 못할까 봐, 옷을 제대로 입지 못하여 밖에서 놀림이라도 당할까 봐 가장 걱정했었다. 하여 그에게 최대한 좋은 삶을 주기 위하여 미친 듯이 돈을 벌었다.3개월의 인센티브를 모아서 최연준에게 수백만 원짜리 양복을 사주었고 전 재산을 털어 자동차까지 사주었다.가장 어려웠을 때도 최연준이 60만 원짜리 벨트를 사겠다고 하자 강서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돈을 줬었다.그리고 강서연이 첫 월급을 탔을 때 두 사람은 제인 호텔에 갔었다. 강서연은 돈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랍스터 리소토를 사주면서 웃으며 말했다.“당신이 일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내가 먹여 살리면 되죠.”최연준은 눈시울이 붉어졌고 복잡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오성에 온 후 사람들은 최연준이 강서연
“감독님.”누군가 말끝을 길게 늘어뜨리며 곽보미 옆으로 다가오더니 그녀를 비난하듯이 쳐다보고는 옆에 빈자리에 앉았다.“무슨 일이죠?”곽보미는 피곤한지 미간을 어루만졌다.다가온 여자의 이름은 주아였는데 다년간 곽보미와 함께 작품을 한 간판급 여배우였다.지난번 임씨 가문의 연회에서 많은 여자 연예인들이 힘을 합쳐 성설연을 몰아붙일 때 주아도 한몫했었다.비록 가끔 생트집을 잡고 남에게 빌붙으려 하는 성격이긴 하지만 연기력 하나만큼은 흠잡을 데 없이 뛰어났다. 주아가 여러 작품에서 완벽한 연기를 펼친 덕에 곽보미도 상을 탈 수 있었다.두 사람 중 한 명이라도 없었더라면 오늘 이 자리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감독님, 서브 여주 좀 바꿔주면 안 돼요?”주아는 거리낌 없이 말했다.“이 속도로 촬영했다가 언제 다 촬영해요? 아직 나석진 씨와의 신도 남아있단 말이에요.”“주아 씨와 석진 씨의 연기가 문제없어서 한 번에 오케이 할 수 있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곽보미의 목소리가 축 처졌다.곽보미와 오랜 시간 함께 일해온 주아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있었다.‘남자 때문에 이렇게까지 해야 해?’남자는 무엇인가? 주아에게 있어서 남자는 그저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받는 디딤돌에 불과했다. 그녀는 항상 남자는 끊이지 않지만 트로피는 흔치 않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그러니 연애란 무엇이겠는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그때그때 즐기면 된다. 어쨌거나 일보다 더 좋은 건 없으니까.“보미 씨.”주아는 곽보미의 어깨를 잡고 진지하게 쳐다보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진짜로 때리라고 한마디만 해주면 저년 얼굴을 아주 만신창이로 만들어서 복수해... 읍!”주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곽보미가 그녀의 입을 막았다. 곽보미는 그녀를 째려보았고 주아는 미친 듯이 발버둥 치다가 놀란 얼굴로 거울을 비춰보았다.“보미 씨, 이렇게 꽉 누르면 어떡해요. 턱을 한 지 얼마 안 됐단 말이에요.”곽보미는 잠깐 멈칫하다가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주아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