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원과 임수정은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임수정이 손짓을 하자 연회장의 불빛이 갑자기 어두워졌다.하객들이 놀란 듯 낮은 소리를 내자 순간 스포트라이트가 최연준과 강서연 두 사람에게 쏟아졌다.온 세상의 초점이 그들이었고 최연준의 눈에는 강서연뿐이었다.연회장 중앙의 천장에는 거대한 꽃 구슬이 천천히 열리고 장미 꽃잎이 흩날리며 부드러운 불빛과 감미로운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다. 알록달록한 비눗방울과 함께 모든 것이 꿈처럼 눈앞에 아름답게 펼쳐졌다.강서연은 눈앞의 이 광경에 넋이 나가 말을 잇지 못했다.최연준은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것은 원래 그가 강서연을 위해 정성 들여 준비한 것이고 일찍이 임씨 가문과도 잘 소통한 것인데 성설연 때문에 앞당겨질 줄은 몰랐다.최연준은 미소를 지으며 강서연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다이아몬드 반지를 꺼냈다. 무려 10캐럿에 달하는 다이아몬드가 완벽하게 커팅되어 불빛 아래서 광채가 돋보였다. “최씨 집 도련님께서 여기서 청혼하는 건가요?”“이런 귀한 장면을 찍어야지!”“맞아요. 인스타그램에 올리면 조회수가 장난 아닐 거예요.”손님들은 속삭였고 모두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기대의 눈빛이 담겨있었다.그들의 기억 속의 최연준은 넘사벽이어서 마치 인간 세상에 속하지 않는 존재인 것 같고 욕망과 감정도 없어 보였다.하지만 오늘, 바로 이 순간, 그들은 전혀 다른 최연준을 만났다.“서연아.”강서연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우주를 담은 것 같고 마성의 목소리로 그 말을 정중하게 했다.“나랑 결혼해 줘.”몇 초간의 정적이 흐른 후에 분위기는 즉시 들끓기 시작했다.이 사람이 그들이 알던 최연준이 맞나?그 무자비한 사업가? 최연준?지금 그의 눈빛에는 부드러움이 넘쳐흐르고 있었고 입술 언저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곡선은 매혹적이었다.심지어 강서연에게 무릎 꿇고 프러포즈까지 하다니!“세상에!”다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마치 놀라움을 제외하고는 이미 그들이 이 순간 부러워하는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
이때 육경섭이 사람을 뚫고 나와 손뼉을 치며 축하해줬다.“경섭 씨도 오셨군요.”강서연이 인사했다.“우정 언니는요?”“우정이도 일벌레여서 지금 회사에서 야근하고 있어요!”육경섭은 고개를 저으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연준 씨, 지금 세상이 변했나 봐요. 여자들은 다 유능한데 앞으로 우리 남자들은 정말 여자가 먹여 살려야 하는 건가요?”“그게 어때서요.”최연준은 입꼬리를 올리고 교활하게 웃었다.그는 강서연의 손을 들어 올렸고 다이아몬드 반지는 눈부시게 반짝거렸다.“보세요. 나는 계약금을 냈어요.”최연준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우리 집 서연이가 앞으로 나를 먹여 살릴 거예요.”육경섭이 경멸했다.“정말 속물이 다름없네요.”“그럼 진짜로 속물이 무엇인지 보여 줄까요?”최연준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졌고 눈 밑에는 누구도 꿰뚫어 볼 수 없는 깊고 복잡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그는 다시 그 냉혹하고 기품 있는 남자로 회복했고 분위기는 아까보다 더욱 싸늘해져서 연회장 전체가 저기압에 휩싸인 것 같았다.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본 낸시가 성설연을 데리고 떠나려는데 누군가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성설연 씨, 우리 사이에 아직 할 말이 남아 있지 않아요?”성설연의 몸은 굳었고 어색하게 몸을 돌렸는데 최연준의 차가운 눈동자와 마주치자 자기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었다.최연준은 싸늘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방금 누군가가 내 아내를 막아서서 들어오지 못하게 했고 자신이 최씨 집안 미래의 안주인이 될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았어요?”“아니에요!”낸시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도련님께서 오해하신 것 같은데. 설연이는...”“나는 당신에게 묻지 않았고 성설연 씨에게 물었어요!”낸시는 감히 말을 하지 못하고 묵묵히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성설연은 이미 여러 가지 감정에 휩쓸려 질투, 분노, 두려움, 당혹감... 이것들이 그녀를 가득 채워 지금 이성을 찾지 못하고 생각할 능력도 없었다.“경섭 씨.”최연준이 급히 서두르지도 않고 너무 여유
성설연은 이런 연회에는 반드시 그 사람이 빠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학자 집안에 불과하지만 그 집안의 어른들은 모두 오성의 교육과 사법 제도에 종사하여 법관, 검사, 교수, 대학 총장이 있다.4대 가문 중 어느 가문이든 그들과 친해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성설연이 입술을 깨물었고 갑자기 조롱하는 소리 중에서 초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연준 형, 이러지 마세요!”사람들은 조용해졌고 목소리를 따라 카키색 슈트를 입은 훤칠한 남자를 훑어보았다.얼굴도 잘생겼고 품위도 사람들 틈에서 빼어났다.그런데... 이 사람이 최연준과 대적하다니?모두 서로를 바라보며 즐거운 표정으로 계속해서 구경하고 있었다.최연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쳐다보았다.“어이, 찬혁아. 뭐 하는 거야!”배경원이 작은 목소리로 일깨워 주었다.“지금 와서 영웅이 미인을 구하는 짓을 한다는 거야?”유찬혁은 마른 입술을 핥으며 애원하는 눈빛으로 최연준을 바라보고 있었다.“연준 형...”“유찬혁.”최연준은 목소리가 냉랭하고 날카로웠다.“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연준 형, 저는 설연이를 대신해 용서를 빌고 싶을 뿐이에요.”유찬혁의 목소리는 크지 않지만 눈빛은 견고했다.“설연이가 방금은 무심코 실수한 것이니 이번만큼은 이런 식으로 설연이를 벌하지 말고 한 번 넘어가 주세요.”최연준은 안색이 어두워졌고 배경원 역시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는 필사적으로 눈치를 주며 유찬혁이 말을 하지 못하게 했다.“찬혁아, 이리 와!”배경원은 땀범벅이 되었다.“그만 좀 해. 너 정말... 평소에 머리가 잘 돌아가는데, 오늘따라 왜 나보다 더 멍청하니!”“연준 형.”유찬혁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더없이 고단했다.“설연이가 막 외국에서 돌아와 이곳 사정을 몰라서 본의 아니게 서연 씨에게 폐를 끼쳤어요... 내가 대신 서연 씨에게 사과를 할게요.”말을 마치고 그는 강서연에게 사과를 표했다.그녀는 급히 유찬혁을 일으켜 세우고 또 살그머니 최연준의 안색을 살폈다.“연준 씨.”강
강서연은 손을 빼 오고 초롱초롱한 두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는데 귀엽기만 했다.최연준이 놀란 표정을 하자 그제야 강서연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트렸다.그녀는 손에 있는 큰 다이아몬드를 어루만지며 머리를 최연준의 어깨에 기대고 부드럽게 속삭였다.“나는 이 반지보다 여전히 그 에메랄드가 좋아요.”“응?”최연준이 웃으며 말했다.“다 돼. 어차피 다 당신 거여서 알아서 하면 돼.”둘이 처음 만났을 때 최연준은 이미 전 재산을 그녀에게 맡겼다.“그런데 서연아. 그건 고동이잖아.”“고동이어서 가치가 있는 것이에요!”강서연이 한 번 웃으며 말했다.“당신 조상 중에서 귀비가 될 때 썼던 것이라고 했잖아요.”최연준이 그녀의 코를 한 번 꼬집었다.“너는 귀비가 아니야.”강서연은 웃으면서 말을 하지 않았다.남자는 그녀의 허리에 두 손을 두르고 단단하고 힘센 팔로 그녀의 몸을 감싸고 낮고 자성적인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서 속삭였다.“당신은 귀비가 아니라... 나의 중전이야!”강서연은 감동하여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최연준은 마침내 구름을 걷어내 햇볕을 마주했고 그녀의 작은 손이 그의 목에 걸려 있을 때 그는 무한한 만족감을 느꼈다.“성설연이 당신의 첫사랑 아니었어요?”강서연의 목소리는 새끼 고양이처럼 조심스러웠다.최연준은 잠깐 멈칫했다.밤새 화난 얼굴로 있었던 게 결국 이것 때문인가?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어떻게 성설연이 자기의 첫사랑이라고 단정할 수 있지!“서연아.”최연준이 마음을 가다듬고 물었다.“어디서 들은 거야?”강서연은 입술을 달싹이고 웃으면서 말을 하지 않았다.이번에 그녀가 알았다. 틀림없이 임우정이 말을 잘못 들었을 것이다!“서연아, 원래 내가 너한테 이런 얘기를 안 하려고 했는데 오늘 밤 이렇게 큰 오해를 했으니 꼭 제대로 설명해야겠어.”아직 이른 시간이라 강서연은 편안한 자세로 그의 품에 몸을 기대고 조용히 이야기를 들었다.“성설연은 유찬혁이 중학교 시절 짝사랑했던 사람이야.”최연준은 솔직하게 말했다.“
사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강서연은 그 비바람이 몰아치던 날 최연준을 처음 만났을 때 이미 그를 좋아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강서연은 그날 밤 그 차갑고 도도한 남자, 그녀가 샤워할 때 스스로 자리를 피한 남자, 그녀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강요하지 않았던 남자를 영원히 기억한다. 그 복근은 작은 벽돌 같고 힘이 센 남자, 잊을 수 없는 첫 경험을 선사한 남자...강서연의 두 볼이 발그스름해지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최연준을 바라보았고 작은 손으로 각진 얼굴을 어루만지며 이마 골과 윤곽이 뚜렷한 입술을 어루만졌다.그녀는 갑자기 강명원에게 매우 고마워했다. 만약 그 사람이 중간에서 방해하여 그녀가 대신 시집가지 않았더라면 지금 최연준과 함께 있는 사람은 강유빈이 되지 않았을까?최연준은 그녀의 눈 밑의 간절함을 느꼈고 자신의 어딘가에서 또다시 말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났음을 느꼈다....그는 조금 힘을 주어 그녀를 더욱 꽉 껴안았다.“뭐 하는 거예요?”강서연이 경각심을 가졌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최연준의 품에 안겨 옴짝달싹 못 하게 되었다.“장난하지 마세요.”강서연은 웃으면서 최연준을 밀었지만 움직이지 못해 화가 나서 그를 한 번 때렸다.“당신 이 두 팔이 쇠로 만든 거예요?”“당연히 아니지.”최연준은 못된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작은 손을 잡고 아래로 향했다.“여기가...”강서연이 무심코 부딪치자 놀란 소리를 내며 얼굴이 빨개졌다.“아직도 부끄러워하는 거야?”남자의 숨소리는 불안정해졌다.강서연은 눈을 밑으로 향했고 쑥스러운 표정은 최연준더러 더욱 눈을 떼지 못하게 하였다.“동의했지?”최연준이 물었다.“뭘요?”“내 중전이 되는 거 말이야.”강서연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의 깊은 키스가 들어왔다.초겨울 밤 기온이 뚝 떨어졌지만 방 안은 온통 열기로 가득했고 겨울밤을 뜨겁게 달궜다....최근 윤정재는 이미 최씨 빌라의 단골손님이 되었다.그는 최재원에게 경락을 뚫어 주고 은침을 거두고 손을 닦았다.“영감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
“알겠어요. 쉬고 있으세요.”윤정재는 좋은 태도를 보이지 않고 곧장 일어서서 작별 인사를 했다.그러나 방에서 나오기도 전에 최재원에게 붙잡혔다.“윤 회장님, 잠시만요!”윤정재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또 무슨 일이 있어요?”최재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짓만 하며 그를 불렀다. 윤정재는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렸지만 또 아버지뻘 되는 노인과 따지는 것은 차마 하지 못했다.그는 굳은 얼굴로 최재원의 침대 옆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최재원은 그를 보며 입가에 알아차리기 어려운 미소를 지었다.“무슨 일이 있어요?”윤정재는 시계를 보니 곧 점심시간이 되었는데 그는 서둘러서 어진 엔터테인먼트 빌딩 아래로 가서 소중한 딸을 봐야 한다.“윤 회장님.”최재원이 웃음을 거두고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뭔가 알아내셨습니까?”윤정재는 안색이 굳어지더니 눈빛이 어두워졌다.최재원은 이 표정을 보자마자 이해했다.“괜찮아요, 말해주세요.”최재원은 웃으며 말했다.“내가 칠팔십 년을 살았는데 무슨 큰 풍파를 못 봤겠어요? 이런 사소한 일로 저를 놀라게 할 수는 없어요.”윤정재는 생각에 잠겼고 영감님이 놀라지 않게 말조심해야 한다. 이것은 그가 다년간 의사 생활을 하면서 터득한 습관인데, 사실을 말하되 너무 직설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윤정재가 고민할 때 최재원이 직접 물었다.“제가 마시던 그 약 속에 이상한 것이 있어요?”윤정재는 몸을 곧추세우고 최재원의 눈을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약 찌꺼기를 검사했는데 다 좋은 재료이긴 하지만 문제는 배합이 잘못되었어요. 그런 비율은 입맛을 돋우는데 특히 기름과 소금이 많은 음식을 좋아할 거예요. 영감님 연세에 기름지고 소금기 많은 음식을 드시는 것은 건강에 백해무익합니다.”최재원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그리고...”윤정재가 계속해서 말했다.“이 약에 중독성이 있는 성분이 섞여 있는데 제가 판단하기에는 남양 쪽 식물의 일종이라고 봅니다.”“양귀비요?”“그렇지 않아요.”윤정재
최재원은 의아한 얼굴로 윤정재를 쳐다보았고 윤정재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최재원을 노려보았다.두 사람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윤정재가 먼저 고요함을 깨뜨렸다.“영감님, 영감님의 손주에게 이미 약혼녀가 있다고 들었는데요?”“약혼녀요?”최재원은 순간 멈칫했다.‘강서연은 여자친구 아니었어? 언제 약혼녀가 됐지? 그리고 프러포즈도 이틀 전에 했잖아. 아프니까 밖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겠어.’최재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윤정재는 최재원의 생각이 바뀐 줄 모르고 여전히 강서연을 탐탁지 않아 한다고 생각했다.“아니에요, 아니에요...”최재원이 손을 내저었다.“약혼녀는 무슨. 우리 연준이 혼사는 이틀 전에 정해졌어요. 그 여자애가 괜찮긴 하더라고요. 어휴, 이게 다 제 탓이에요.”최재원이 한숨을 내쉬었다.“경수가 내가 나이가 들어서 사람 볼 줄 모른대요. 허... 진짜 그런가 봐요. 좋은 손주며느리를 앞에 두고 놓칠 뻔했으니... 그 여자애가 우리 집에 시집오려 하겠는지도 모르겠어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단 예물을 거하게 줘야죠. 필요하다면 그 여자애의 집에 직접 가서 혼담을 꺼낼 생각이에요...”아픔은 늘 사람에게 변화를 가져다준다. 자부심이 강하여 지려고 하지 않던 최재원은 아픈 동안에 많은 생각을 했다.사실 최연준이 마음에 드는 여자와 결혼하게 내버려두면 되는 것을 왜 굳이 임씨 가문과 사돈을 맺으려 했을까?최씨 가문은 이미 4대 가문의 톱이기에 굳이 다른 가문과 혼약을 맺는 것으로 손을 잡지 않아도 충분히 더 발전할 수 있다. 그런데 굳이 아끼는 손자를 이런 식으로 억압할 필요가 있을까?사실... 강서연도 훌륭했다. 몇 번 만나본 결과 그가 바라던 손주며느리의 이미지에 완전히 부합되었다.최재원이 덤덤하게 웃었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 속에 보기 드문 부드러움이 스쳐 지나갔다.그는 윤정재를 쳐다보았다. 윤정재가 그와 함께 이 기쁨을 누릴 줄 알았지만 윤정재의 표정을 본 순간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윤정재의 표정이 말이 아
윤정재는 씩씩거리며 차에 올라탔다. 진용수는 백미러로 그를 힐끔거렸는데 그야말로 생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회장님, 왜 이렇게 화가 많이 나셨어요? 무슨 일 있었어요?”“빌어먹을 자식...”윤정재가 넥타이를 잡아당겼다.“최연준이 다른 여자와 결혼한대.”“뭐라고요?”진용수도 화들짝 놀랐다.“회장님께서 잘못 들으신 건 아닌가요?”“최재원 그 영감이 직접 얘기했어.”“이게 대체...”진용수가 눈살을 찌푸렸다.“그럼 우리 서연 씨는 어떡해요?”“허.”윤정재가 싸늘하게 웃었다.“말끝마다 내 딸을 사랑한다고 하고선 할아버지가 압력을 가하니까 바로 겁먹었어. 이런 남자에게 평생 서연이를 맡길 수 없어. 차라리 잘 헤어졌어.”비록 말은 이렇게 했지만 윤정재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았다. 헤어지더라도 강서연이 먼저 이별 통보를 해야지, 최연준에게 차이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윤정재는 한참 생각하다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우리 딸에게 힘 있는 배경이 없어서 그러는 거잖아. 괜찮아, 지금 당장 서연이에게 모든 사실을 밝히면 돼. 서연이 뒤에 우리 윤씨 가문이 있다는 걸 최씨 가문 사람들에게 보여줘야겠어.”그의 말에 진용수의 표정이 확 변했다.그동안 진용수와 윤정재는 사실을 밝힐 계획을 세웠다. 디테일 하나하나 꼼꼼하게 신경 쓰면서 시뮬레이션도 여러 번 했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짠 계획을 하나도 쓰질 못한 판이다.“회장님, 진정하세요.”진용수가 그를 달랬다.“이 일 천천히 하시겠다면서요? 이렇게 갑자기 서연 씨를 찾아간다면 서연 씨가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어요.”“그럼 문희를 만나러 갈 거야.”화들짝 놀란 진용수는 급브레이크를 밟을 뻔했다.윤정재의 안색이 굳어졌고 눈빛도 확고했다.“어찌 됐든 우리는 서연이의 아빠 엄마야... 지금 딸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부모인 우리가 나서서 화풀이라도 해야지 않겠어?”진용수는 할 말을 잃었다.윤정재가 강서연에게 모든 사실을 밝히는 것도 충분히 급작스러운데 그보다 더 급작스러운 게 있을 줄은
“어떻게 소피아라는 걸 확신하죠?”배윤아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부모님이 회사의 핵심 자료를 제게 모두 맡기셨어요. 그런데 그걸 받은 지 이틀 만에 공격을 당했죠. 이게 단순한 우연일까요?”임지강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그 자료들은 어디 있어요?”“아마 소피아가 가지고 있을 거예요. 그 자료들은 너무 중요해서 항상 제 곁에 두고 다녔거든요. 하지만 그날 제가 기절하고 다시 깨어났을 때, 가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다만...”“다만 뭐요?”“법인 도장은 가방 안에 없었어요.”배윤아는 미소를 지으며 약간 능글맞은 표정을 지었다.“법인 도장은 본사가 모든 자원을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이에요. 엄마가 제게 주자마자 저는 바로 군성이에게 맡겼어요. 지금 법인 도장은 최씨 가문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어요.”“그렇다면 소피아가 자료를 손에 넣더라도 아무 쓸모가 없겠군요?”배윤아는 확신에 차서 고개를 끄덕였다.“똑똑하네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었다.“배씨 가문 사람들도 다 무능하진 않나 보네요.”“임 선생님...”배윤아는 고개를 약간 숙이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오빠가 송윤지에게 잘못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는 임 선생님이 우리 가문에 복수하려고 저를 납치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아요. 선생님은 그런 수준 낮은 사람이 아니니까요.”임지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확실히 똑똑한 사람이네요.”그러나 배윤아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그런데... 정말 우리 오빠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요?”임지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임지강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가족들에게 안부 전화라도 주세요. 걱정을 많이 하고 계실 거예요.”“이미 군성이에게 연락을 했어요.”배윤아가 말했다.“군성이에게 조용히 아빠에게 알려 드리라고 했어요. 엄마는 충격을 받으시면 안 되니까요... 하지만 제 상황을 오빠에겐 비밀로 해야 해요. 오빠와 소피아는 제가 조 회장님에게 잡혀 있고 선생님이 일부러 복수를 위해 조 회장님을
“설마...”“소피아!”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이름을 입에 올린 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정말 소피아일 줄이야.”임지강이 담배를 꺼내 들었다. 조 회장이 눈짓을 하자 부하가 공손히 불을 붙였다.방 안은 금세 니코틴 냄새로 가득 찼고 임지강은 잠시 침묵하며 담배 재를 털어냈다.“아마... 조 회장님도 지금 저와 같은 처지겠죠.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했다는 누명을 쓰게 됐으니 말이에요.”“그러게 말이야.”조 회장은 차갑게 웃었다.“겉으로는 온갖 아부를 떨면서도 뒤에서는 이런 음모를 꾸미고 내가 배윤아를 납치했다고 소문까지 퍼뜨리고 있더군.”“회장님과 제가 가까운 사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의심의 화살을 제게도 돌리겠죠.”임지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면, 연루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겁니다. 저 때문에 저의 매형까지 연루되면, 배씨 가문과 육씨 가문의 사이도 틀어질 거고요.”“그 여자는 이런 식으로 우리 모두를 자기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조 회장님 생각은 어떻습니까?”“웃기지 말라 그래.”조 회장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임지강은 조 회장의 꽉 쥐어진 주먹을 발견했다. 그의 손등에는 화가 잔뜩 난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조 회장님.”임지강은 잠시 침묵한 뒤 부드럽게 말했다.“운산시 광산의 가격을 조작하도록 제가 이미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 두 광산은 이제 그렇게 가치 있는 자산이 아닙니다.”“알고 있어.”조 회장은 임지강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이 일은 원래 자네 복수를 위해 시작한 일이야. 자네의 화가 조금이라도 풀린다면 내 수고도 헛된 게 아니야. 하지만 문제는...”조 회장은 손짓으로 방 안을 가리켰다.그때 방 안에서 배윤아가 몸을 뒤척이며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임지강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배윤아와 단둘이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조 회장은 잠시 망
임지강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차가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그를 철저히 파산시키고 싶습니다.”“배씨 가문 전체를 함께 무너뜨리겠다는 뜻인가?”조 회장이 묻자, 임지강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말하면, 예전의 저라면 그렇게 했겠죠. 하지만 지금은...”“지금은 마음이 약해졌다는 건가?”조 회장이 비웃듯 웃으며 말했다.“내가 알던 임지강은 그런 자비를 베풀 인물이 아닌데?”임지강도 미소를 지었다.그 웃음 뒤로 누군가의 맑은 눈빛과 깨끗한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이번 일은 송윤지가 부탁해서 오게 된 것이었다.송윤지는 배윤아의 실종 소식을 듣고 매우 걱정하고 있었다. 비록 배현진과 부부의 연을 맺지 못했지만, 배윤아와는 과거에 친하게 지냈던 사이였기에 친구로서 걱정되었기 때문이다.임지강 자신도 이곳에 올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송윤지의 부탁 때문이고 또 하나는 배윤아의 납치 사건이 왜 갑자기 자신에게 덮어씌워졌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임지강은 배윤아와 거의 만난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은 사실상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조 회장님, 전 자비를 베푸는 게 아닙니다.”임지강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단지 이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이미 많은데 한낱 파리 한 마리와 얽혀서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서입니다. 그 녀석에게 적당히 벌을 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게다가 저는 배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과는 아무런 원한도 없으니, 배씨 가문을 완전히 망가뜨릴 필요는 없습니다.”“흠...”조 회장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1조라... 적지 않은 금액이지. 배현진은 은행에서 전 재산을 담보로 대출받았다고 하더군. 이 일이 발각되면 한동안 꽤 고생하겠지.”“조 회장님, 사실 오늘 제가 온 이유는 다른 목적도 있어서입니다.”임지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약간 굽히며 공손히 말했다. 그러나 조 회장은 손짓으로 그를 제지하며 미소를 지었다.조 회장은 아무 말 없이 손짓으로 따라오라는
배현진은 병원 복도에 있는 긴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잡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완전히 무너진 모습이었다.“그럴 리가 없어...”한참 동안 앉아 있던 배현진은 갑자기 고개를 들며 말했다.“연준 아저씨와 서연 이모는 소피아와 함께 지낸 적이 없잖아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소피아는 절대 저를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이 녀석아,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고집을 부릴 거야.”최연준이 엄하게 꾸짖었다.배경원은 아무 말 없이 아들의 손을 잡았다. 그의 눈에는 깊은 절망이 서려 있었다.“그만해요, 셋째 형님...”배경원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수정이가 응급실에 있는데, 이 아이와 더 이상 다투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없는 아들이라고 생각하려 합니다.”“아버지!”“꺼져버려!”배경원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눈빛 너머에는 모든 걸 놓아버린 듯한 깊은 허무가 스며 있었다.배현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돌아섰다. 떠나기 전, 그는 다시 돌아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윤아를 반드시 무사히 데려올게요. 엄마도 무사할 거예요. 우리 가족은... 예전처럼 다시 행복해질 거예요.”배경원은 아들에게 단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잠시 후, 응급실의 불이 꺼졌다. 배경원은 화살처럼 뛰어가며 아내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의사가 땀으로 흠뻑 젖은 마스크를 벗으며 가까스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배 선생님, 사모님께서는 일단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뭐라고요?”강서연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일단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건, 앞으로 위험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다들 진정하세요.”의사는 부드럽게 설명했다.“사모님의 상태가 많이 복잡합니다. 곧바로 특수 병동으로 옮길 예정이라 당분간 면회는 어려울 겁니다. 이번 주가 아주 중요한 시기이긴 하지만, 제 판단으로는 이 고비를 무사히 넘기실 가능성이 큽니다.”세 사람은 안도의 숨을 쉬며 그나마
“아내라고?”강서연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현진이와 정식으로 결혼한 적 있니? 다른 사람과 약혼한 상태에서 끼어든 건 너잖아. 명분도 없는 관계에 ‘아내’라는 말을 쓰다니, 웃음거리밖에 안 될 거야.”“최 사모님...”“갑자기 생각난 건데.”강서연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수정 씨가 쓰러졌을 때 네가 침대 옆에 있었던 거 맞지?”“아, 네.”소피아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제가 현진 씨를 대신해 효도하러 갔던 거예요. 하지만 어머님 건강이 그렇게 나쁘실 줄은 몰랐습니다.”“수정 씨가 쓰러지기 직전에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말해보렴.”소피아는 순간 멈칫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말할 수 없는 이유라도 있니?”강서연은 한 발짝 다가가며 소피아를 몰아붙였다.“수정 씨는 평소 건강관리를 철저히 하던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쉽게 쓰러질 리 없지. 분명 큰 충격이 있었을 거야. 쓰러지기 직전 병실에 너 혼자 있었다며?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해.”“서연 이모,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배현진은 소피아를 자신의 뒤로 끌어당기며 소피아에게 나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소피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복도를 따라 빠르게 사라졌다.소피아가 사라지자, 배현진은 조심스럽게 말했다.“서연 이모, 소피아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배현진!”강서연은 배경원이 아들을 두 번이나 때린 이유를 이제야 완벽히 이해한 듯,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너 어떻게 이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니? 네 엄마는 지금 저 안에 누워 있어.”“정말로 소피아와는 아무 관련이 없어요...”배현진은 조심스럽게 입술을 핥으며 설명했다.“서연 이모, 사실 소피아도 자책하고 있어요. 그날 소피아도 윤아의 안전을 걱정하다가 엄마 앞에서 그만 실수로 말을 흘리고 만 거예요. 그래서...”“뭐라고?”최연준이 눈을 부릅뜨며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배현진, 네 엄마 쓰러졌을 때 넌 방에 없었잖아.”“소피아가 제게 그렇게 말했어요.”“너...”최연준은 순간
병원 응급실 밖.배경원은 의자에 주저앉아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충혈된 눈으로 응급실 문을 응시하며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한때 당당했던 그의 어깨는 지금 축 처져 있었다. 뒷모습만으로도 절망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배경원은 주먹을 단단히 쥐었지만, 온몸은 떨리고 있었다.적막이 흐르는 복도는 불길한 정적마저 감돌았다.결국, 억눌렀던 감정이 터져 나와 눈물이 조용히 뺨을 적셨다.“경원아!”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배경원이 고개를 들자, 최연준과 강서연이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질 뻔한 배경원을 최연준이 재빨리 부축했다.강서연은 응급실 문을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치료는 연희 씨와 신석훈 씨의 제자들이 맡고 있어요. 모두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이에요. 수정 씨는 평소 건강을 잘 관리하셨으니 금방 회복될 겁니다.”“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최연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갑자기 병세가 심각해진 거야? 그리고 윤아는...”배경원은 떨리는 손으로 최연준의 팔을 붙잡으며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셋째 형님, 제발 윤아를 찾아주세요. 딸은 사라지고 아내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어요. 둘 다 잃으면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그런 바보 같은 말 하지 마세요. 둘 다 무사할 겁니다.”강서연이 단호히 말했다.“윤아는 우리 집안의 며느리예요. 누가 윤아를 해치려 한다면 최씨 가문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어요. 그 결과가 어떤 건지 모를 리도 없고요. 그리고...”강서연은 순간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을 이어가려다 복도 끝에서 배현진이 소피아와 함께 급히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는 말을 삼키고 배현진을 노려보았다.“연준 아저씨, 서연 이모...”배현진은 어딘가 죄책감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배현진은 배경원에게 다가가 팔을 살며시 부축하며 조심스레 말했다.“아버지...”그 순간, 배경원이 배현진의 뺨을 내려쳤다.배경원은 분노로 가득 찬 눈빛으로 배현진을 노려보며
임수정은 갑작스러운 기침을 하며 침대 옆 경보 벨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소피아에 의해 단호히 막혔다.“사모님, 제 말을 듣는 게 좋으실 겁니다.”소피아는 부드럽지만 섬뜩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제가 만든 음식이 그렇게 형편없지도 않고 독을 넣을 만큼 제가 어리석지도 않아요. 안심하세요. 이 모든 재료는 사모님의 건강을 생각하며 준비한 겁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온 이유는 진심으로 사모님을 돌보고 싶어서예요.”임수정은 가슴을 움켜쥔 채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임수정의 눈엔 불신과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요즘 배경원은 외출이 잦아졌고 이유를 묻자, 회사 일 때문이라며 안심하라는 대답뿐이었다.그럼에도 임수정의 마음속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점점 커져만 갔다.깊게 숨을 들이마신 임수정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겉으론 소피아의 말을 따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사모님, 잘 생각하셨어요.”소피아는 임수정에게 쿠션을 건네며 은은하게 웃었다.“우리 결국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될 사이잖아요. 지금부터 제 존재에 익숙해지시는 게 좋을 겁니다.”“흥! 내 아들이 눈이 먼 게 분명해.”임수정은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떻게 너 같은 사람에게 속을 수 있는지...”“저를 깔보지 마세요. 저는 이혼하고 아이도 데리고 있지만, 현진 씨를 향한 제 진심은 변하지 않아요. 저는 현진 씨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누구와는 달리 겉으론 순수한 척하면서 남자를 유혹하는 짓은 안 한다는 건 알아주셨으면 해요.”“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임수정은 언성을 높이며 노려보았다.소피아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더욱 날카롭게 말했다.“사모님, 제가 말하는 사람은 바로 사모님의 그 옛날 며느리가 될 뻔했던 그 사람이에요.”“헛소리하지 마!”임수정은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그 일은 우리 배씨 가문이 송윤지에게 잘못한 일이야. 그 애의 명예를 더럽히지 마.”“사모님,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없는 법이에요.”소피아는 태연한
“너와 상관없다고?”임우정은 다급하게 외쳤다.“네 형부가 이미 윤아의 통화 기록을 조사했어. 윤아가 실종되기 전에 조 회장이랑 통화했던 게 드러났다고! 지강아, 너와 조 회장이 어떤 관계인지 나한테도 숨길 작정이었어?”임지강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사건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머릿속에서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그래요. 저와 조 회장이 가까운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와 배윤아 사이엔 원한이라곤 없잖아요... 누나, 왜 저를 의심하는 거예요?”“지강아!”임우정의 목소리가 더욱 절박해졌다.“너, 송윤지 일 때문에 배현진을 미워하는 건 알아. 하지만... 네 말대로라면 윤아한테까지 증오를 전가하면 안 되잖아!”“누나, 정신 좀 차리세요!”임지강의 목소리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어둠이 깃든 그의 얼굴은 단호함을 더했다.“무슨 근거로 저를 의심하시는 건데요?”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임지강의 강경한 태도에 임우정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한참 후, 임우정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렇다면... 배씨 가문을 좀 도와줄 순 없겠니?”임지강은 코웃음을 치며 전화를 끊었다.수화기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리자 맑고 투명한 송윤지의 눈빛과 마주쳤다.“배씨 가문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요양원 병실 문 앞.소피아의 하이힐 소리가 텅 빈 복도를 울리며 퍼져 나갔다. 소피아의 손엔 보온 도시락이 들려 있었고 문 앞을 지키는 경호원들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제가 사모님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안으로 들여보내 주세요.”경호원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말없이 서 있었다.“이건 도련님께서 지시하신 거예요.”소피아는 휴대전화를 꺼내 그들에게 일부러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실래요? 아시다시피 사모님 건강이 좋지 않으세요. 세 끼 제대로 챙겨 드시지 못하면 여러분들이 책임지실 겁니까?”경호원들은 난처한 얼굴로 머뭇거리다 결국 길을 내주었다.“이제야 말이 통하네.”소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앞으로
송윤지는 겨우 한 모금을 마시고 사레가 들어 술을 뱉을 뻔했다. 마신 술이 얼굴에 스며든 듯 송윤지의 뽀얀 볼은 어느새 매혹적인 와인빛으로 물들었다.임지강은 그런 송윤지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임지강은 송윤지에게 다가가 가볍게 등을 두드리며 입가에 묻은 술자국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임 대표님...”송윤지는 조심스럽게 임지강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 애썼다.하지만 임지강은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아 통유리창 앞까지 데려갔다.송윤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 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깊고 짙은 밤하늘에 수많은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잘게 부서진 불빛들이 반짝거렸다.불꽃은 색과 모양을 끊임없이 바꾸며 꿈같은 광경을 만들어냈다.송윤지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마음에 들어요?”임지강의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송윤지의 귀에 스며들었다.“잠깐 눈 좀 감아 봐요.”“네?”임지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제가 별을 따다 줄게요.”마지막 불꽃이 빛의 궤적을 남기며 밤하늘로 사라지고 다시 평온한 고요가 찾아왔다.송윤지는 미소를 지으며 임지강의 말을 따라 눈을 감았다. 그러자 따뜻하면서도 약간 서늘한 남자의 손길이 송윤지의 손을 잡더니 손바닥 위에 무언가가 놓이는 느낌이 들었다.송윤지는 깜짝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손에는 정말로 ‘별’이 있었다.“이건...”그것은 목걸이였다. 펜던트는 별 모양으로 깎아낸 다이아몬드로, 완벽하게 다듬어져 찬란한 빛이 퍼지고 있었다.“제가 해줄게요.”임지강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이건 너무 비싼 거라서 제가...”“받아줘요.”임지강의 눈빛은 따스하고도 단호했다.“그리고...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송윤지는 고개를 숙였다. 귀 끝까지 붉어진 송윤지의 얼굴은 마치 열이 오른 듯했다.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의 귓가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살짝 정리해 주었다.“사실,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저 윤지 씨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