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겠어요. 쉬고 있으세요.”윤정재는 좋은 태도를 보이지 않고 곧장 일어서서 작별 인사를 했다.그러나 방에서 나오기도 전에 최재원에게 붙잡혔다.“윤 회장님, 잠시만요!”윤정재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또 무슨 일이 있어요?”최재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짓만 하며 그를 불렀다. 윤정재는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렸지만 또 아버지뻘 되는 노인과 따지는 것은 차마 하지 못했다.그는 굳은 얼굴로 최재원의 침대 옆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최재원은 그를 보며 입가에 알아차리기 어려운 미소를 지었다.“무슨 일이 있어요?”윤정재는 시계를 보니 곧 점심시간이 되었는데 그는 서둘러서 어진 엔터테인먼트 빌딩 아래로 가서 소중한 딸을 봐야 한다.“윤 회장님.”최재원이 웃음을 거두고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뭔가 알아내셨습니까?”윤정재는 안색이 굳어지더니 눈빛이 어두워졌다.최재원은 이 표정을 보자마자 이해했다.“괜찮아요, 말해주세요.”최재원은 웃으며 말했다.“내가 칠팔십 년을 살았는데 무슨 큰 풍파를 못 봤겠어요? 이런 사소한 일로 저를 놀라게 할 수는 없어요.”윤정재는 생각에 잠겼고 영감님이 놀라지 않게 말조심해야 한다. 이것은 그가 다년간 의사 생활을 하면서 터득한 습관인데, 사실을 말하되 너무 직설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윤정재가 고민할 때 최재원이 직접 물었다.“제가 마시던 그 약 속에 이상한 것이 있어요?”윤정재는 몸을 곧추세우고 최재원의 눈을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약 찌꺼기를 검사했는데 다 좋은 재료이긴 하지만 문제는 배합이 잘못되었어요. 그런 비율은 입맛을 돋우는데 특히 기름과 소금이 많은 음식을 좋아할 거예요. 영감님 연세에 기름지고 소금기 많은 음식을 드시는 것은 건강에 백해무익합니다.”최재원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그리고...”윤정재가 계속해서 말했다.“이 약에 중독성이 있는 성분이 섞여 있는데 제가 판단하기에는 남양 쪽 식물의 일종이라고 봅니다.”“양귀비요?”“그렇지 않아요.”윤정재
최재원은 의아한 얼굴로 윤정재를 쳐다보았고 윤정재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최재원을 노려보았다.두 사람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윤정재가 먼저 고요함을 깨뜨렸다.“영감님, 영감님의 손주에게 이미 약혼녀가 있다고 들었는데요?”“약혼녀요?”최재원은 순간 멈칫했다.‘강서연은 여자친구 아니었어? 언제 약혼녀가 됐지? 그리고 프러포즈도 이틀 전에 했잖아. 아프니까 밖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겠어.’최재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윤정재는 최재원의 생각이 바뀐 줄 모르고 여전히 강서연을 탐탁지 않아 한다고 생각했다.“아니에요, 아니에요...”최재원이 손을 내저었다.“약혼녀는 무슨. 우리 연준이 혼사는 이틀 전에 정해졌어요. 그 여자애가 괜찮긴 하더라고요. 어휴, 이게 다 제 탓이에요.”최재원이 한숨을 내쉬었다.“경수가 내가 나이가 들어서 사람 볼 줄 모른대요. 허... 진짜 그런가 봐요. 좋은 손주며느리를 앞에 두고 놓칠 뻔했으니... 그 여자애가 우리 집에 시집오려 하겠는지도 모르겠어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단 예물을 거하게 줘야죠. 필요하다면 그 여자애의 집에 직접 가서 혼담을 꺼낼 생각이에요...”아픔은 늘 사람에게 변화를 가져다준다. 자부심이 강하여 지려고 하지 않던 최재원은 아픈 동안에 많은 생각을 했다.사실 최연준이 마음에 드는 여자와 결혼하게 내버려두면 되는 것을 왜 굳이 임씨 가문과 사돈을 맺으려 했을까?최씨 가문은 이미 4대 가문의 톱이기에 굳이 다른 가문과 혼약을 맺는 것으로 손을 잡지 않아도 충분히 더 발전할 수 있다. 그런데 굳이 아끼는 손자를 이런 식으로 억압할 필요가 있을까?사실... 강서연도 훌륭했다. 몇 번 만나본 결과 그가 바라던 손주며느리의 이미지에 완전히 부합되었다.최재원이 덤덤하게 웃었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 속에 보기 드문 부드러움이 스쳐 지나갔다.그는 윤정재를 쳐다보았다. 윤정재가 그와 함께 이 기쁨을 누릴 줄 알았지만 윤정재의 표정을 본 순간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윤정재의 표정이 말이 아
윤정재는 씩씩거리며 차에 올라탔다. 진용수는 백미러로 그를 힐끔거렸는데 그야말로 생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회장님, 왜 이렇게 화가 많이 나셨어요? 무슨 일 있었어요?”“빌어먹을 자식...”윤정재가 넥타이를 잡아당겼다.“최연준이 다른 여자와 결혼한대.”“뭐라고요?”진용수도 화들짝 놀랐다.“회장님께서 잘못 들으신 건 아닌가요?”“최재원 그 영감이 직접 얘기했어.”“이게 대체...”진용수가 눈살을 찌푸렸다.“그럼 우리 서연 씨는 어떡해요?”“허.”윤정재가 싸늘하게 웃었다.“말끝마다 내 딸을 사랑한다고 하고선 할아버지가 압력을 가하니까 바로 겁먹었어. 이런 남자에게 평생 서연이를 맡길 수 없어. 차라리 잘 헤어졌어.”비록 말은 이렇게 했지만 윤정재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았다. 헤어지더라도 강서연이 먼저 이별 통보를 해야지, 최연준에게 차이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윤정재는 한참 생각하다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우리 딸에게 힘 있는 배경이 없어서 그러는 거잖아. 괜찮아, 지금 당장 서연이에게 모든 사실을 밝히면 돼. 서연이 뒤에 우리 윤씨 가문이 있다는 걸 최씨 가문 사람들에게 보여줘야겠어.”그의 말에 진용수의 표정이 확 변했다.그동안 진용수와 윤정재는 사실을 밝힐 계획을 세웠다. 디테일 하나하나 꼼꼼하게 신경 쓰면서 시뮬레이션도 여러 번 했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짠 계획을 하나도 쓰질 못한 판이다.“회장님, 진정하세요.”진용수가 그를 달랬다.“이 일 천천히 하시겠다면서요? 이렇게 갑자기 서연 씨를 찾아간다면 서연 씨가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어요.”“그럼 문희를 만나러 갈 거야.”화들짝 놀란 진용수는 급브레이크를 밟을 뻔했다.윤정재의 안색이 굳어졌고 눈빛도 확고했다.“어찌 됐든 우리는 서연이의 아빠 엄마야... 지금 딸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부모인 우리가 나서서 화풀이라도 해야지 않겠어?”진용수는 할 말을 잃었다.윤정재가 강서연에게 모든 사실을 밝히는 것도 충분히 급작스러운데 그보다 더 급작스러운 게 있을 줄은
김자옥은 입술을 적시더니 커피잔을 들고 한 모금 크게 들이켰다. 커피잔으로 얼굴을 가려야만 그녀의 어색한 연기를 감출 수 있었다.그때 샴고양이 한 마리가 폴짝폴짝 뛰어와 야옹 하며 윤문희의 다리에 비벼댔다.윤문희는 깜짝 놀랐다가 웃으며 샴고양이를 안더니 자리에 올려놓고 살살 쓰다듬었다.김자옥은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이틀 전에 윤정재가 부리나케 달려와 윤문희와 만나야 한다면서 그녀에게 도움을 청한 적이 있었다.그때 갑작스러운 상황에 넋이 나간 김자옥은 윤정재가 침을 잘못 맞은 건지, 아니면 약을 잘못 먹은 건지 의심까지 들 정도였다.‘윤정재가 나에게 부탁을?’평생 오만방자하게 살아온 사람이라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김자옥은 윤정재가 아직 윤문희를 잊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를 한참 동안 싸늘하게 쳐다보다가 말했다.“그래도 양심은 있네.”“그렇다면 날 돕겠다는 말이지?”“그래.”김자옥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모레 오후에 문희와 커피 한잔하기로 했어. 가게 위치 보내줄 테니까 당신도 시간 맞춰서 와.”“알았어.”윤정재가 고개를 끄덕였다.김자옥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그에 관한 생각이 바뀌던 찰나 윤정재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는 한마디를 했다.“일단 두 모녀에게 사실을 밝히고 내 딸부터 지킨 다음에 그 자식에게 따져 물을 거야.”“당신...”김자옥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기분이 언짢아지니 도와주려는 마음도 순식간에 싹 사라졌다. 하여 윤정재의 부탁을 모른 척하려 했지만 마치 운명의 장난인 듯 바로 그날에 윤문희에게 작은 사고가 일어났다.윤문희가 혼자 집에서 전구를 갈다가 실수로 그만 넘어졌는데 의자에서 떨어지면서 발목을 삐끗하고 말았다. 그래도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다.그 일로 인하여 김자옥은 누군가 옆에서 윤문희를 돌봐줘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두 사람은 이젠 나이가 있어 아무리 건강하다고 해도 젊은이들보다는 한참 뒤떨어졌다.윤문희가 다친 그 날 다행히 혼자 기어서
그 시각 같은 거리에 있는 또 다른 커피숍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어쩌다가 완전체로 모인 자리라 그들도 커피숍을 전체 대관했다.배경원은 임수정과 함께 창가 자리에 앉아 서로 머리를 맞댔다. 임수정은 괴테의 시집을 아주 열중하여 읽고 있었고 배경원은 그런 그녀를 보면서 헤벌쭉 웃었다.육경섭은 또 몰래 나가 담배를 피우려다가 임우정에게 딱 걸려 귀를 잡힌 채 끌려들어 왔다.최연희는 카드를 꺼내 신석훈과 함께 놀자고 했다. 그런데 신석훈이 씩 웃더니 수능 문제집을 꺼냈다... 그녀는 순간 넋을 잃었고 절망에 빠진 듯했다. 신석훈은 진지하고 의미심장하게 최연희를 타일렀다.“너 휴학한 지 오래됐잖아. 올해 수능은 이미 지났으니 내년에 좋은 성적을 거두려면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해야 해. 자, 먼저 이 문제집부터 풀어봐. 모르는 게 있으면 내가 가르쳐줄게.”최연준과 강서연은 마주 향해 웃고는 최연희에게 화이팅 제스처를 보냈다.최연준은 강서연을 안고 창가 쪽 소파에 앉아있었는데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질 지경이었다.유찬혁과 곽보미도 그 자리에 있었지만 두 사람은 거리를 두고 앉았다.방한서는 시무룩한 얼굴로 문 앞을 지켰고 커피숍에 가득한 여러 쌍의 커플들을 보고 있자니 솔로의 외로움이 더욱 짙어졌다.겨울 햇볕이 창문으로 비춰 들어와 커피숍을 더욱 따스하게 만들었고 고요함이 흘렀다.오늘 그들은 최연준과 강서연의 결혼에 관해 의논하려고 한 자리에 모였다.“서연 씨, 혼인 신고한 다음에 결혼식을 올려요?”“그것도 좋은 것 같아요. 혼인 신고한 다음에 성대한 결혼식을 준비하는 거죠. 오성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 정도로요.”“오빠, 두 사람이 결혼을 준비하는 동안에 아이가 생기는 거 아니야?”“넌 문제나 풀어.”“하하...”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의논하던 그때 배경원이 갑자기 한마디 툭 던졌다.“연준 형, 이 일은 경실 아주머니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아요.”그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전부 배경원에게 쏠렸다.“왜?”“경실 아주머니가 점 볼 줄 아시잖아요.”
곽보미는 피식 웃으며 다시 남자처럼 털털하게 행동했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와 달리 여성스러운 체크 원피스를 입었다.“너와 나 사이에 무슨 못 할 말이 있다고 그래?”곽보미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이렇게 난감해하는 모습은 정말 드문데 말이야.”유찬혁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한참 후에 나지막이 말했다.“보미야, 넌 줄곧 날 친구로 생각한 거 맞지?”곽보미는 잠깐 멈칫하다가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우린... 형제 같은 친구야?”“허허...”곽보미는 어색하게 웃다가 결국 인정했다.“그럼, 당연하지. 줄곧 형제 같은 친구였어.”“그럼 친구로서 너에게 부탁 하나 하자.”곽보미는 그를 쳐다보며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귀를 기울여 들었다.“말해 봐.”“지금 새 영화 준비 중이지?”“응.”“혹시...”유찬혁이 입술을 적시며 망설였다.“네 영화에서 작은 배역이라도 좋으니까 성설연에게 연기할 기회를 줄 수 있을까?”곽보미의 얼굴에 나타났던 미소가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녀는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가 다시 천천히 놓았다. 그의 부탁을 거절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몰랐다. 지금까지 그녀는 유찬혁에게 거절이란 걸 한 적이 없었다.곽보미는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지만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평소와 같은 웃음을 지었다.“보미야.”유찬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힘들면 부탁 들어주지 않아도 돼. 내가 다른 방법 생각해 볼게.”“나...”“괜찮아.”유찬혁도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무리한 부탁이라는 거 알아. 사실 아까 얘기하기 전부터 그리 기대하지도 않았어. 그리고 이런 거액을 투자한 영화에서 어떤 배우를 쓰든 너 혼자 결정할 수 없고 투자자의 의견도 물어봐야 한다는 것도 알아.”곽보미는 뭐라 얘기하고 싶었지만 목구멍이 막힌 것처럼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널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유찬혁이 나지막이 말했다.“다른 방법 더 생각해 볼게. 그나저나 여기서 내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그러고는 그
최연준은 강서연의 손을 잡고 안심시킨 후 침착하게 길거리로 나섰다.구급차는 그들과 두 길목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최연준과 강서연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보니 커피숍 주변에 이미 많은 사람이 몰려있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진지한 얼굴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들것 주변에서 당황해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김자옥이었다.“엄마?”최연준이 그녀를 불렀다. 고개를 든 김자옥은 인파 속에서 두 사람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강서연은 조급한 마음에 다짜고짜 물었다.“아주머니, 혹시 우리 엄마가...”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윤문희가 커피숍에서 멀쩡하게 걸어 나왔다.강서연은 재빨리 다가가 그녀의 팔을 잡고 꼼꼼하게 살폈다. 다행히 아직 정신을 차리고 있는 걸 보니 예전의 병이 재발한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안색이 백지장처럼 새하얬다.“엄마, 왜 그래요?”강서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날... 놀라게 하지 말아요.”“난 괜찮아.”윤문희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멀지 않은 곳의 김자옥을 보면서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김자옥은 그녀의 뜻을 바로 알아챘다. 윤문희는 아직 강서연에게 자신의 출신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 김자옥은 강서연에게 다가가 어깨를 다독이며 웃었다.“서연아, 우리 둘 다 아무 일 없어... 저 사람은 윤 회장님이야.”“네?”강서연의 두 눈이 더욱 휘둥그레졌다.“그냥... 우연히 만났어.”김자옥은 머리를 굴려 거짓말을 늘어놓았다.“나와 네 엄마가 여기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윤 회장님을 우연히 만났어. 그런데 윤 회장님의 심장병이 발병한 거야.”윤문희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야말로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아저씨에게 심장병이 있었어요? 왜 저는 몰랐죠?”“나이가 들면 다 그래. 큰 문제 아니야.”김자옥은 재빨리 두 사람을 돌려보냈다.“됐어, 그만들 돌아가. 서연아, 나와 네 엄마는 윤 회장님을 병원에 데려갈 테니까 이따가 먹을 것 좀 가져다줘.”...병원 안, 윤문희는 어두
“아, 아무것도 아니야.”윤문희가 침착한 말투로 말했다.“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했어. 사람은 나이가 들면 진짜 건강 관리 잘해야 해.”“엄마...”강서연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말할까 말까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결국 물어보기로 했다.“혹시 아저씨랑 이미 만났어요?”윤문희는 잠깐 멈칫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응.”“이런 우연이!”강서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보며 웃었다.“제가 엄마에게 소개하려고 했던 분이 바로 이 아저씨예요. 아저씨도 샴고양이를 키워요. 지난번에 뚱냥이도 데리고 두 사람을 만나게 하려 했었어요.”김자옥이 마른기침을 했고 윤문희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최연준은 강서연의 작은 손을 꼭 잡았다. 눈치 빠른 강서연은 그들의 안색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어디가 이상한지 구체적으로 얘기할 수는 없었다.세심하고 꼼꼼한 김자옥은 강서연이 머리가 똑똑하여 집으로 돌아가 조금만 생각하면 뭔가 알아차리리라 생각했다. 그때가 되면 윤문희가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게 된다.그런 상황을 막으려면 지금 화제를 돌려야 했다. 김자옥은 웃으며 강서연의 손을 잡고 말했다.“서연아, 며칠 전에 네 엄마가 혼자 집에서 넘어졌잖아. 너와 찬이도 평소 집에 없어서 혼자 외로울까 봐...”“그러니까 아주머니도 엄마와 아저씨가 어울린다는 말씀이죠?”강서연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응?”김자옥이 두 눈을 깜빡였다.‘난 집에서도 누군가 문희를 챙길 수 있게 도우미를 찾았으면 좋겠다는 얘기였는데.’하지만 강서연의 순진하고 기대 가득한 웃음에 김자옥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병실에 누워있던 윤정재가 드디어 깨어났다. 깨어나자마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나름 준수했던 얼굴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퉁퉁 부었고 두 눈도 실눈이 되고 말았다. 너무 부은 탓에 말을 하려고 애를 써도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고 한마디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강서연은 그에게 조용히 다가갔다. 그의 모습이 웃기면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