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옥은 입술을 적시더니 커피잔을 들고 한 모금 크게 들이켰다. 커피잔으로 얼굴을 가려야만 그녀의 어색한 연기를 감출 수 있었다.그때 샴고양이 한 마리가 폴짝폴짝 뛰어와 야옹 하며 윤문희의 다리에 비벼댔다.윤문희는 깜짝 놀랐다가 웃으며 샴고양이를 안더니 자리에 올려놓고 살살 쓰다듬었다.김자옥은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이틀 전에 윤정재가 부리나케 달려와 윤문희와 만나야 한다면서 그녀에게 도움을 청한 적이 있었다.그때 갑작스러운 상황에 넋이 나간 김자옥은 윤정재가 침을 잘못 맞은 건지, 아니면 약을 잘못 먹은 건지 의심까지 들 정도였다.‘윤정재가 나에게 부탁을?’평생 오만방자하게 살아온 사람이라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김자옥은 윤정재가 아직 윤문희를 잊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를 한참 동안 싸늘하게 쳐다보다가 말했다.“그래도 양심은 있네.”“그렇다면 날 돕겠다는 말이지?”“그래.”김자옥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모레 오후에 문희와 커피 한잔하기로 했어. 가게 위치 보내줄 테니까 당신도 시간 맞춰서 와.”“알았어.”윤정재가 고개를 끄덕였다.김자옥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그에 관한 생각이 바뀌던 찰나 윤정재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는 한마디를 했다.“일단 두 모녀에게 사실을 밝히고 내 딸부터 지킨 다음에 그 자식에게 따져 물을 거야.”“당신...”김자옥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기분이 언짢아지니 도와주려는 마음도 순식간에 싹 사라졌다. 하여 윤정재의 부탁을 모른 척하려 했지만 마치 운명의 장난인 듯 바로 그날에 윤문희에게 작은 사고가 일어났다.윤문희가 혼자 집에서 전구를 갈다가 실수로 그만 넘어졌는데 의자에서 떨어지면서 발목을 삐끗하고 말았다. 그래도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다.그 일로 인하여 김자옥은 누군가 옆에서 윤문희를 돌봐줘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두 사람은 이젠 나이가 있어 아무리 건강하다고 해도 젊은이들보다는 한참 뒤떨어졌다.윤문희가 다친 그 날 다행히 혼자 기어서
그 시각 같은 거리에 있는 또 다른 커피숍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어쩌다가 완전체로 모인 자리라 그들도 커피숍을 전체 대관했다.배경원은 임수정과 함께 창가 자리에 앉아 서로 머리를 맞댔다. 임수정은 괴테의 시집을 아주 열중하여 읽고 있었고 배경원은 그런 그녀를 보면서 헤벌쭉 웃었다.육경섭은 또 몰래 나가 담배를 피우려다가 임우정에게 딱 걸려 귀를 잡힌 채 끌려들어 왔다.최연희는 카드를 꺼내 신석훈과 함께 놀자고 했다. 그런데 신석훈이 씩 웃더니 수능 문제집을 꺼냈다... 그녀는 순간 넋을 잃었고 절망에 빠진 듯했다. 신석훈은 진지하고 의미심장하게 최연희를 타일렀다.“너 휴학한 지 오래됐잖아. 올해 수능은 이미 지났으니 내년에 좋은 성적을 거두려면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해야 해. 자, 먼저 이 문제집부터 풀어봐. 모르는 게 있으면 내가 가르쳐줄게.”최연준과 강서연은 마주 향해 웃고는 최연희에게 화이팅 제스처를 보냈다.최연준은 강서연을 안고 창가 쪽 소파에 앉아있었는데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질 지경이었다.유찬혁과 곽보미도 그 자리에 있었지만 두 사람은 거리를 두고 앉았다.방한서는 시무룩한 얼굴로 문 앞을 지켰고 커피숍에 가득한 여러 쌍의 커플들을 보고 있자니 솔로의 외로움이 더욱 짙어졌다.겨울 햇볕이 창문으로 비춰 들어와 커피숍을 더욱 따스하게 만들었고 고요함이 흘렀다.오늘 그들은 최연준과 강서연의 결혼에 관해 의논하려고 한 자리에 모였다.“서연 씨, 혼인 신고한 다음에 결혼식을 올려요?”“그것도 좋은 것 같아요. 혼인 신고한 다음에 성대한 결혼식을 준비하는 거죠. 오성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 정도로요.”“오빠, 두 사람이 결혼을 준비하는 동안에 아이가 생기는 거 아니야?”“넌 문제나 풀어.”“하하...”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의논하던 그때 배경원이 갑자기 한마디 툭 던졌다.“연준 형, 이 일은 경실 아주머니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아요.”그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전부 배경원에게 쏠렸다.“왜?”“경실 아주머니가 점 볼 줄 아시잖아요.”
곽보미는 피식 웃으며 다시 남자처럼 털털하게 행동했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와 달리 여성스러운 체크 원피스를 입었다.“너와 나 사이에 무슨 못 할 말이 있다고 그래?”곽보미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이렇게 난감해하는 모습은 정말 드문데 말이야.”유찬혁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한참 후에 나지막이 말했다.“보미야, 넌 줄곧 날 친구로 생각한 거 맞지?”곽보미는 잠깐 멈칫하다가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우린... 형제 같은 친구야?”“허허...”곽보미는 어색하게 웃다가 결국 인정했다.“그럼, 당연하지. 줄곧 형제 같은 친구였어.”“그럼 친구로서 너에게 부탁 하나 하자.”곽보미는 그를 쳐다보며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귀를 기울여 들었다.“말해 봐.”“지금 새 영화 준비 중이지?”“응.”“혹시...”유찬혁이 입술을 적시며 망설였다.“네 영화에서 작은 배역이라도 좋으니까 성설연에게 연기할 기회를 줄 수 있을까?”곽보미의 얼굴에 나타났던 미소가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녀는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가 다시 천천히 놓았다. 그의 부탁을 거절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몰랐다. 지금까지 그녀는 유찬혁에게 거절이란 걸 한 적이 없었다.곽보미는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지만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평소와 같은 웃음을 지었다.“보미야.”유찬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힘들면 부탁 들어주지 않아도 돼. 내가 다른 방법 생각해 볼게.”“나...”“괜찮아.”유찬혁도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무리한 부탁이라는 거 알아. 사실 아까 얘기하기 전부터 그리 기대하지도 않았어. 그리고 이런 거액을 투자한 영화에서 어떤 배우를 쓰든 너 혼자 결정할 수 없고 투자자의 의견도 물어봐야 한다는 것도 알아.”곽보미는 뭐라 얘기하고 싶었지만 목구멍이 막힌 것처럼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널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유찬혁이 나지막이 말했다.“다른 방법 더 생각해 볼게. 그나저나 여기서 내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그러고는 그
최연준은 강서연의 손을 잡고 안심시킨 후 침착하게 길거리로 나섰다.구급차는 그들과 두 길목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최연준과 강서연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보니 커피숍 주변에 이미 많은 사람이 몰려있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진지한 얼굴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들것 주변에서 당황해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김자옥이었다.“엄마?”최연준이 그녀를 불렀다. 고개를 든 김자옥은 인파 속에서 두 사람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강서연은 조급한 마음에 다짜고짜 물었다.“아주머니, 혹시 우리 엄마가...”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윤문희가 커피숍에서 멀쩡하게 걸어 나왔다.강서연은 재빨리 다가가 그녀의 팔을 잡고 꼼꼼하게 살폈다. 다행히 아직 정신을 차리고 있는 걸 보니 예전의 병이 재발한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안색이 백지장처럼 새하얬다.“엄마, 왜 그래요?”강서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날... 놀라게 하지 말아요.”“난 괜찮아.”윤문희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멀지 않은 곳의 김자옥을 보면서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김자옥은 그녀의 뜻을 바로 알아챘다. 윤문희는 아직 강서연에게 자신의 출신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 김자옥은 강서연에게 다가가 어깨를 다독이며 웃었다.“서연아, 우리 둘 다 아무 일 없어... 저 사람은 윤 회장님이야.”“네?”강서연의 두 눈이 더욱 휘둥그레졌다.“그냥... 우연히 만났어.”김자옥은 머리를 굴려 거짓말을 늘어놓았다.“나와 네 엄마가 여기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윤 회장님을 우연히 만났어. 그런데 윤 회장님의 심장병이 발병한 거야.”윤문희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야말로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아저씨에게 심장병이 있었어요? 왜 저는 몰랐죠?”“나이가 들면 다 그래. 큰 문제 아니야.”김자옥은 재빨리 두 사람을 돌려보냈다.“됐어, 그만들 돌아가. 서연아, 나와 네 엄마는 윤 회장님을 병원에 데려갈 테니까 이따가 먹을 것 좀 가져다줘.”...병원 안, 윤문희는 어두
“아, 아무것도 아니야.”윤문희가 침착한 말투로 말했다.“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했어. 사람은 나이가 들면 진짜 건강 관리 잘해야 해.”“엄마...”강서연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말할까 말까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결국 물어보기로 했다.“혹시 아저씨랑 이미 만났어요?”윤문희는 잠깐 멈칫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응.”“이런 우연이!”강서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보며 웃었다.“제가 엄마에게 소개하려고 했던 분이 바로 이 아저씨예요. 아저씨도 샴고양이를 키워요. 지난번에 뚱냥이도 데리고 두 사람을 만나게 하려 했었어요.”김자옥이 마른기침을 했고 윤문희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최연준은 강서연의 작은 손을 꼭 잡았다. 눈치 빠른 강서연은 그들의 안색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어디가 이상한지 구체적으로 얘기할 수는 없었다.세심하고 꼼꼼한 김자옥은 강서연이 머리가 똑똑하여 집으로 돌아가 조금만 생각하면 뭔가 알아차리리라 생각했다. 그때가 되면 윤문희가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게 된다.그런 상황을 막으려면 지금 화제를 돌려야 했다. 김자옥은 웃으며 강서연의 손을 잡고 말했다.“서연아, 며칠 전에 네 엄마가 혼자 집에서 넘어졌잖아. 너와 찬이도 평소 집에 없어서 혼자 외로울까 봐...”“그러니까 아주머니도 엄마와 아저씨가 어울린다는 말씀이죠?”강서연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응?”김자옥이 두 눈을 깜빡였다.‘난 집에서도 누군가 문희를 챙길 수 있게 도우미를 찾았으면 좋겠다는 얘기였는데.’하지만 강서연의 순진하고 기대 가득한 웃음에 김자옥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병실에 누워있던 윤정재가 드디어 깨어났다. 깨어나자마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나름 준수했던 얼굴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퉁퉁 부었고 두 눈도 실눈이 되고 말았다. 너무 부은 탓에 말을 하려고 애를 써도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고 한마디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강서연은 그에게 조용히 다가갔다. 그의 모습이 웃기면
잠시 후, 박경수가 손에 노트북을 들고 왔다.강서연이 식사를 마친 후 박경수는 도우미에게 그녀 앞에 놓인 식기를 전부 치우라고 한 다음 그 자리에 노트북을 내려놓았다.최연준도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다가가 보았다. 노트북 화면에 숫자가 빼곡하게 적힌 표가 나타났다.“그건 장부야. 회사 건 아니고 최상 빌라 거야.”최재원의 말투는 매우 담담했다.“서연아, 이상한 부분이 있는지 꼼꼼하게 봐줘.”“할아버지, 이건...”최연준이 뭐라 하려던 그때 강서연이 몰래 그의 손등을 꽉 눌렀다. 강서연은 최연준에게 눈치를 주며 고개를 내저었다.최재원은 지금 그녀를 시험하고 있었다.지난번 서교 땅 프로젝트의 불법 매매가 최진혁과 연관이 있다는 걸 강서연이 알아낸 후로 최재원은 그녀를 달리 보기 시작했다.하여 요즘 최재원은 최연준과 강서연을 집으로 자주 불렀고 가끔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에게 질문을 던지곤 했다. 그리고 머리가 영리한 그녀는 최재원의 질문에 항상 완벽하게 답했다.지난번에 국제 정치 형세에 관한 생각을 물었었는데 이번에는... 경제 장부?강서연은 심호흡 한번 하고 노트북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장부가 복잡하고 숫자들이 빼곡하게 적혀있어 눈만 피곤한 게 아니라 머리도 지끈거릴 정도였다. 반드시 좋은 기억력을 지녀야만 데이터를 제대로 분석하여 최재원이 말한 ‘문제’를 찾아낼 수 있다.강서연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점차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30분이 지나갔고 최상 빌라의 장부에 대한 윤곽도 대충 잡혔다.그녀는 마우스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부적절한 곳을 과감하게 집어냈다.최재원은 강서연이 찾아낸 부분을 보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이 돈은 애들 생활비야.”“알아요. 그래서 소부분만 삭제했어요. 기본적인 의식주는 보장해야 하니까요.”그러자 최재원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이게 소부분이라고? 네가 삭제한 것들이 적은 액수는 아닌데?”“액수가 적었다면 골라내지도 않았죠.”강서연이 웃으며 말했다.“할아버지, 전 최씨 가문의 자제들
“그리고...”강서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보안 비용과 개인 경호 비용은 중복된 거니까 삭제해야 해요.”“뭐?”최재원이 화들짝 놀랐다.“할아버지.”강서연은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게 설명했다.“이 빌라에는 이미 가장 선진적인 보안 시스템이 있고 가장 뛰어난 경호원들이 각 별장에 분포되어 있어요. 그런데 굳이 개인 경호원까지 쓸 필요가 있을까요? 개인 경호원이라면 스스로 알아서 돈을 내서 구해야지, 가문에서 대준다는 게 말이 돼요?”최연준은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고 몰래 속으로 아내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강서연이 집어낸 이 문제는 최진혁과 최지한을 가리켰다.최씨 가문의 자제 중에 최재원의 중시를 받는 최연준 말고도 몇몇 사촌 형제들이 있었는데 다들 본부에서 힘을 보태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사촌 누나와 사촌 여동생들도 여자지만 남자에게 전혀 뒤지지 않았고 각자의 계열사를 잘 경영해 나가고 있었다.오직 최지한만이 집에 일전 한 푼 보태준 적이 없으면서도 돈을 물처럼 쓰듯 했다. 그 바람에 박경수는 장부상의 수입과 지출을 맞추려고 자주 애를 먹곤 했다.게다가 개인 경호원도 최진혁과 최지한만 있었다.최연준도 예전에 이 문제 때문에 최재원과 한바탕 싸운 적이 있었다. 하지만 최재원은 각자의 세력을 평등화하기 위하여 최진혁의 일부 행동을 보고도 못 본 척했다.이젠 최씨 가문도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할 듯싶다. 계속 이대로 나갔다간 임씨 가문처럼 겉보기는 화려하지만 속은 썩어 문드러진 꼴이 될 게 뻔했다.“그럼 이 몇 가지는?”최재원은 웃으며 일부러 물었다.“아낄 필요 없겠어?”최재원이 가리킨 건 집사와 도우미의 복지 혜택이었다. 중복된 부분이 있긴 했지만 강서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최재원의 두 눈에 빛이 스쳐 지나갔다.“이유가 뭐지?”“최씨 가문의 복지 혜택이 아주 좋아요. 이건 집사와 도우미들이 떠나지 않고 오랜 시간 일할 수 있는 전제죠.”강서연이 나지막이 말했다.“한 가문이 오랫동안 흥성하려면 결국에는 믿을 만한
강서연은 살짝 멈칫했다. 귀여운 두 볼이 발그스름해졌고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설레고 흥분됐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최재원은 자신의 감정을 밖에 드러내지 않는 강서연의 성격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아무 말 없으면 동의한 걸로 알게.”최재원이 웃으며 말했다.“아무튼 나중에 연준이와 결혼하면 우리 집안의 안주인이 될 것이고 가업도 두 사람에게 다 맡길 생각이야. 하하... 반평생 쉬지도 못하고 바쁘게 살아온 나도 드디어 여유를 좀 누릴 수 있겠구나.”“할아버지...”최연준은 놀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고 기쁨에 겨워 말을 잇지 못했다.“왜 그런 표정을 하고 있어?”최재원이 아래위로 훑어보자 최연준이 피식 웃었다.“계속 반대하시더니 왜 갑자기... 안 그래도 제가 서연이에게 프러포즈한 사실을 요 며칠 할아버지께 말씀드릴 참이었는데...”“너 이 녀석.”최연준의 말이 끝나기 전에 최재원이 두 눈을 부릅떴다.“내가 언제 계속 반대했어?”최연준은 순간 멍해졌다.“경수야, 내가 반대한 적이 있었어?”“당연히 없죠.”박경수는 바로 최재원의 편을 들었다.“셋째 도련님께서 잘못 기억하신 거 아니에요? 영감님께서는 줄곧 서연 씨를 마음에 들어 하셨고 예전부터 손주며느리로 들일 생각이셨어요.”“내가 사람 보는 눈이 어때?”“영감님의 사람 보는 눈이 언제 틀린 적이 있었던가요? 걱정하지 마세요. 서연 씨는... 아니, 셋째 사모님은 앞으로 최씨 가문을 잘 관리할 거니까 영감님은 복이나 누릴 준비하세요.”최연준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그때 찬 바람이 휙 불면서 그의 머리가 살짝 헝클어졌다.본가의 위치가 빌라에서 가장 좋은 곳인데 창문을 안 닫은 건가? 아니면 문을 안 닫은 건가?“서연아.”최재원은 최연준을 혼낸 후 바로 다시 다정하게 웃었고 목소리도 한결 부드러워졌다.“할아버지는 다 먹었으니까 너희들은 천천히 먹어. 하하... 오늘 특별히 새로 온 이탈리아 요리사에게 부탁한 거
“정 선생님, 아직도 진실을 말할 생각이 없으신가요? 영미가 대체 얼마나 좋은 조건을 내걸었기에, 백인서를 모함하는 데 가담한 거죠?”정대명은 눈동자를 굴리며 머뭇거렸다. 어디까지 입을 열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당신이 인서의 양아버지라는 말은 사실입니까?”“그... 그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진실이야!”“그렇다면 딸을 키운 정도 있을 텐데 왜 모함하려 하신 거죠?”정대명의 몸이 떨렸고 시선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정 선생님, 이제 영미조차도 당신을 지켜줄 수 없습니다. 진실을 말하지 않으신다면 감옥에서 나올 수 없게 될 겁니다!”그때, 바깥에서 소연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소아는 정대명을 매섭게 노려본 뒤, 사람을 시켜 문을 잠그도록 지시했다.소연화는 최군형과 최지용을 데리고 들어왔다.“여보!”최군형은 강소아를 보자 반갑게 웃으며 말했다.“권온유와 정승우, 두 아이 모두 찾았어!”“정말인가요?”“그래.”최지용도 후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드디어 인서의 억울함을 풀 수 있게 됐어.”“인서는 원래부터 결백했어요!”강소아가 웃으며 말했다.“누가 아이들을 찾았나요?”“아이들이 어찌나 영리하던지, 스스로 빠져나왔더군.”최군형이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그날 밤, 우리가 정대명을 찾았을 때, 정대명의 머리가 다쳐 있었던 거 기억하지? 그 틈을 타 도망쳤대. 길에서 착한 운전사분을 만나 도움을 받았고 그 운전사가 집까지 데려다줬어. 차 안에서 정승우가 휴대전화를 빌렸는데 다행히도 권온유가 자기 엄마 전화번호를 기억하고 있어서 덕분에 바로 연락할 수 있었어. 아마 20분 후면, 두 아이 모두 안전하게 권씨 집안에 도착할 거야.”“정말 놀랍군요...”강소아는 감탄이 담긴 눈빛으로 답했다.“이렇게 어린아이들이 그런 상황 속에서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니. 역시 아이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어요! 저도 이제부터 가원이에게 제 전화번호를 외우게 해야겠어요!”“그런 말 하지 마!”최군형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집으로 돌아온 영미의 마음속엔 불안이 가득 찼다. 그러다 문득 시장 선거의 마지막 대결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이 스쳤다.지금이라도 폭탄 같은 뉴스가 터진다면 사람들의 관심은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쏠릴 것이 분명했다.그리고 그 뉴스가 백인서와 관련된 것이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영미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가에 자신감 넘치는 차가운 미소를 띠며 휴대전화를 들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기자와의 약속을 잡았다.“조순철 씨의 외손녀가 실종된 사건, 알고 계십니까?”카페의 한구석, 눈에 잘 띄지 않는 자리였다. 영미는 얼굴을 거의 가릴 만큼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맞은편에는 기자는 커피잔을 천천히 저으며 영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이건 단순한 어린이 실종 사건이 아닙니다. 누군가 계획적으로 벌인 일입니다.”“영미 씨.”기자가 녹음기를 켜며 말했다.“아시는 내용을 모두 말씀해 주세요. 자료는 제가 정리해 영미 씨 말씀대로 보도하겠습니다.”“좋아요.”영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제가 알고 있기로, 권씨 가문의 어린 딸을 데려간 사람은 바로 그 공익학교 프로젝트에 있던 한 학생입니다. 그리고 그 학생은 백인서의 지시를 받았죠!”녹음기를 쥔 기자의 손이 떨렸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강소아는 방문 앞을 서성이며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그 방에는 정대명이 갇혀있었는데 강소아가 아무리 질문해도 정대명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육경섭은 딸이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보고 희철을 시켜 예전 식으로 정대명을 다루려 했지만, 강소아가 막아섰다.현재 육씨 가문은 이미 정식 사업가로 자리 잡은 상황이었다.과거의 폭력적인 방식은 더 이상 적합하지 않았다.강소아는 육경섭을 설득해 물러서게 한 뒤, 다음 수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소연화가 급히 뛰어왔다.“아가씨, 이것 좀 보세요!”소연화는 휴대전화를 내밀었다.화면에는 뉴스가 떠 있었고 제목은 눈에 띌 정도로 충격적이었다.[조씨 공익학교에서 터진 충격적인 추문, 관리직
가끔 차가 지나갔지만, 정승우가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어도 아무도 멈춰 서지 않았다.어둠이 내려앉았고 기온은 점점 내려가고 있었다.며칠 동안 육체와 마음이 지친 권온유는 이제 무너질 듯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정승우는 어쩔 수 없이 온유를 등에 업고 비틀거리며 길을 걸었다.“오빠...”권온유는 울먹이며 말했다.“해가 졌어요. 저... 무서워요.”“괜찮아.”정승우는 뒤돌아 미소를 지었다.“오빠가 집에 데려다줄게.”“오빠, 우리 그냥 돌아가요...”“뭐라고?”권온유의 시선이 정승우의 피로 물든 발에 닿았다.“발이 많이 아프죠?”권온유의 작은 얼굴 위로 눈물이 두 줄기 흘러내렸다.“오빠, 저 내려주세요. 그냥 돌아가요...”“온유야?”권온유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그 집이 낡고 춥긴 해도... 오빠 발에서 피가 나진 않잖아요!”정승우는 멍하니 잠시 굳어 있다가 그 어눌한 말 속에 담긴 다정함을 깨달았다.이 작은 아이는 납치당했던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라도 정승우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정승우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작은 새들이 집으로 향해 줄지어 날고 있었다.정승우는 온유를 데리고 반드시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다짐했다.“바보야.”정승우는 온유를 내려놓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난 하나도 안 아파. 그리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어.”“그 사람이... 우리를 때릴까요?”“그럴 거야.”정승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어린 시절, 정대명에게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탈출할 때 그의 뒤통수를 내려친 한 방은 그동안의 빚을 모두 갚은 셈이었다.“그런데 오빠, 그 사람은 오빠 아빠잖아요?”권온유는 작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하지만 오빠가 아프다고 제가 말했을 때 오빠 아빠가 들어왔었잖아요.”정승우는 쓴웃음을 지었다.자신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정대명이 들어온 것은 아마 걱정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죽으면 함께 나쁜 짓을 할 사람이 없어질까 봐서였었다.정대명은 단지
차 안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영미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정대명에게 다가갔다. 그의 머리 아래로 어두운 핏자국이 퍼져 있었고 그 흔적은 이미 굳어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의 코 밑에 손을 가져다 댔다.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영미는 떨리는 마음을 억누른 채 차가운 눈빛으로 정대명을 내려다보다가 거칠게 발길을 휘둘렀다.“일어나요!”강소아와 최군형도 다가와 공장 안을 살폈지만 안은 고요히 비어 있었다.“아이들은요?”“아이고...”정대명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살려줘, 살려줘... 저 괘씸한 녀석이!”“정대명 씨!”영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했다.어쨌든 이번 일은 영미가 자신 있게 권온유의 행방을 안다고 장담한 일이었다.영미는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함께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확신에 차 말했다.그런데 지금... 정대명은 다쳐 쓰러져 있고 두 아이는 사라졌었다.백인서를 함정에 빠뜨리려던 영미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것이다.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정대명은 도움을 청하려다 영미가 눈짓을 주는 것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영미의 눈길을 따라 보니 최군형과 강소아도 함께 와있었다.정대명은 예전에 영미가 했던 경고가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아는 척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정대명은 머리를 살짝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신이 정대명인가요?”최군형이 다가가 물었다.정대명은 말끝을 흐리며 최군형의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백인서의 양아버지시고?”최군형은 다시 물었다.“당신이 당신 아들과 함께 권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게 맞나요?”“아니야, 나 아니야!”정대명은 크게 당황하며 손을 흔들었다.“이봐, 동생, 난 억울해! 내 아들 녀석이 나를 해치려고 했어! 내 머리를 봐, 그 자식이 벽돌로 내리쳤다니까!”“그만해요!”영미는 정대명의 말이 길어질수록 상황이 불리해질 것을 우려해 정대명을 노려보며 더 이상 말을 못 하게 했다.강소아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들의 서툰 수법이 한심하기만
경찰서 밖에서 최지용은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한참을 걷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젊은 경찰관이 안에서 뛰어나오고 있었다. 최지용은 급히 다가가며 말했다.“정호야!”정호라는 젊은 경찰관은 최지용을 보자 반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 녀석!”최지용은 정호에게 다가가 가볍게 주먹을 툭 날리며 말했다.“도대체 무슨 일이야? 왜 사전에 알려주지 않은 거야?”정호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방금 최씨 집안에서 백인서를 데려간 사람 중에 정호도 있었다. 최지용도 놀라웠지만, 영미 역시 경찰이 직접 찾아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떠나기 전, 정호가 살짝 눈짓을 보냈고 최지용은 그의 의도를 알아채 경찰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지용이 형.”정호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형수님께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잘 구분하고 계시니 문제없을 겁니다!”“도대체 누구 지시로 백인서를 여기로 데려온 거지?”“소아 아가씨예요!”정호는 어깨를 으쓱했다.“소아 아가씨가 갑자기 지시한 거라 사전에 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최지용은 살짝 놀랐다. 강소아의 지시라니.“형수님께서도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으니까요. 그 아이가 실종되기 전에 형수님께서 만난 적이 있거든요. 경찰이 형수님을 데려가서 조사하는 건 당연한 절차입니다.”최지용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피식 웃음을 지었다.강소아가 이런 ‘당연한 절차’를 이용해 백인서를 경찰서로 보낸 이유는 경찰서야말로 가장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또 누군가가 음모를 꾸며 백인서에게 덮어씌우려 한다 해도 경찰서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경찰서 안에는 일을 봐주는 사람들도 있으니 백인서가 여기서 며칠 지내는 동안 힘든 일 없이 외부의 소란도 피할 수 있는 셈이었다.최지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강소아는 정말 자매를 위한 배려가 남달랐다. 이렇게까지 배려심 깊은 방안을 생각해 내다니!“지용이 형.”정호가 계속해서 말했다.“도련님께서
영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소아 언니, 저를 믿지 않으세요?”“난 오직 사실만을 믿어.”“권씨 가문의 딸이 실종된 사건에 백인서 씨의 양아버지와 남동생이 관련되었어요, 그게 바로 사실이에요!”강소아는 순간 멍하니 있다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려 했다.세상에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다 있나 싶었다.호텔 뒷뜰에 있는 그 CCTV가 정말 완전히 고장 났다고 생각하는 걸까? 육씨 가문과 최씨 가문이 힘을 합쳐 그 고장 난 CCTV 하나도 못 고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최군형은 강소아의 어깨를 가볍게 눌러 안심시키며 슬며시 휴대전화를 건넸다.강소아는 화면을 확인했다. 최군형의 부하가 보낸 메시지였다.“도련님, CCTV 데이터를 복구 중입니다. 곧 진실이 밝혀질 겁니다!”강소아는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영미가 이렇게까지 백인서를 몰아세우는 걸 보니 마음 한구석에 무언가 꺼림칙한 게 남아 있는 것 같았다.어차피 꼬리가 저절로 드러날 것이었기에 그저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다.바로 그때, 집사가 다소 당황한 얼굴로 방에 들어섰다. 집사의 뒤에는 몇 명의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신분을 밝힌 후 방 안을 둘러보며 엄숙한 목소리로 물었다.“여기 백인서 씨가 계십니까?”표아정은 등을 꼿꼿이 펴고 대답했다.“경찰관님께서 여긴 무슨 일로 오셨나요?”“당신이 백인서 씨인가요?”“저는...”“백인서 씨가 납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신고를 접수했습니다!”“뭐라고요?”백인서는 얼굴이 창백해졌다.“백인서 씨, 조사에 협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희와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권온유가 납치된 지 하루가 지났다.그동안 정대명은 단 한 번 음식을 가져왔는데, 그것도 차갑게 식은 죽 한 그릇과 딱딱한 빵 한 조각뿐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귀하게 자란 권온유에게 이런 음식은 처음이었다. 울고 싶었지만, 감히 울지 못하고 그저 눈물을 참으며 빵을 조금씩 뜯어 먹고 있었다.정승우는 그런 온유의 모습을 보고
“아줌마,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그럼, 제가 알아낸 사실을 전부 말씀드릴게요!”영미는 입가에 교만한 미소를 띠며 백인서를 차갑게 한 번 쳐다보았다.“백인서 씨의 친어머니인 백홍은 인신매매범이었다는 사실, 모두 아셨나요? 백인서 씨의 어머니는 백인서를 정대명의 집에 맡겼고... 흥! 정대명의 아내도 백홍이 납치해 왔다는 소문이 있어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잖아요. 제 생각엔... 인신매매범의 딸이라면 그런 일쯤은 익숙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은 권온유의 실종이 정말로 백인서 씨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시나요?”“영미!”강소아가 나서며 분노를 가득 담아 소리쳤다.“허위 사실을 퍼뜨리지 마!”“소유 아가씨, 억울하네요!”영미는 강소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제가 이렇게까지 조사한 건 다 아가씨를 위한 거예요! 딸도 있는 사람이 백인서를 곁에 두고도 마음이 놓이세요?”“그만해!”최지용이 크게 소리쳤다.백인서는 몸을 떨며 믿기지 않는 눈으로 최지용을 쳐다보았다.그러나 최지용의 얼굴에는 의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최지용은 굳건한 눈빛으로 뒤에 있는 백인서를 지키고 있었다.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처럼 백인서를 아끼고 있었다.백인서는 코끝이 찡해지며 본능적으로 최지용의 손을 꼭 붙잡았다. 최지용의 따스한 손은 백인서에게 큰 용기를 주었고 그 온기가 어둠의 두려움을 잊게 해주었다.최지용은 백인서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고 다시 영미를 바라볼 때는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영미야.”최지용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두 집안의 관계를 생각해서 그저 넘어가는 거야. 더 이상 선을 넘지 마.”최군형도 나서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요, 백인서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모르겠어요? 영미 아가씨, 우리 최씨 가문 사람들을 바보로 생각하는 건 아니죠?”영미는 순간 긴장했다. 최군형의 말 속엔 어딘가 숨은 뜻이 있는 듯했다.최군형의 깊고 복잡한 눈빛을 파악하기 어려웠다.표아정은 천천히 일어나 어깨에 걸친 숄을
백인서는 복잡한 눈빛으로 최지용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그때 최지용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표아정이었고 다급한 목소리로 서둘러 돌아오라고 재촉했다.최지용은 결국 어머니의 말에 따라 백인서를 데리고 최씨 집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넓은 거실에는 최군형과 강소아도 나와 있었고 모두 엄숙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백인서가 들어서자, 표아정이 백인서를 올려다보며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다.강소아는 백인서와 눈을 마주치며 단호하게 미소 지었다.백인서가 의아해하던 찰나, 영미가 천천히 밖에서 걸어 들어왔다.“아줌마, 지용 오빠. 제가 권온유의 행방을 알아냈어요.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뭐라고?”최지용이 놀라서 물었다.“네가 어떻게 아는데?”영미는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지용 오빠, 특수부대 출신이라고 정보가 우리보다 더 빠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최씨 가문은 만능이 아니에요, 최씨 가문도 모르는 정보가 있다고요.”표아정은 가볍게 기침하며 차분히 상황을 지켜보았다.최군형과 강소아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떤 일이 일어날지 주목하고 있었다.최지용의 이마에는 점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미의 눈에는 한 줄기 교만한 빛이 번졌다.영미는 오는 길에 이미 모든 계획을 짰다. 정대명의 말이 맞았다. 누구를 훔치든 상관없었다. 인신매매범의 딸인 백인서가 아이들을 해치러 다닌다는 누명을 씌우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하면 백인서는 모두의 신뢰를 잃게 될 터였다.영미는 이제 한 아이의 엄마가 된 강소아가 인신매매범을 곁에 둘 리 없다고 믿었고, 최지용 역시 이 사실을 알면 더는 백인서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래서 영미는 정대명을 배신하기로 마음먹었다.영미는 권온유를 넘기고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한패가 되어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주장할 계획이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백인서는 변명의 여지도 없이 궁지에 몰릴 것이었다!“지용 오빠.”영미는 고개를 돌려 최지용을 바라보며 한 글자씩 천천히 말했다.“권온유는 정승
“그... 괜찮아!”정승우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권온유에게 말했다. 정승우는 이곳에서 권온유를 반드시 데리고 나가겠다고 결심했다.그런데 이때, 공장 문이 “쾅” 하고 열리더니 곧바로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정승우는 재빨리 권온유에게 눈짓했고 권온유도 알아채고는 즉시 땅바닥에 쓰러져 의식이 없는 척했다.정승우는 벽에 기대어 눈을 반쯤 감았다.“이 아이인가요?”영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맞아.”정대명은 영미를 흘깃 노려보며 묵묵히 대답했다.영미는 두 걸음 앞으로 다가서서 희미한 빛 속에 있는 아이를 살펴보더니, 곧 얼굴빛이 확 변했다.“이 아이... 혹시 권씨 집안의 막내딸 아니에요?”정대명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애초에 아이를 훔쳐 올 때 이 아이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 리가 없었다.“정대명 씨.”영미가 차갑게 웃으며 돌아보았다.“제가 최씨 가문 집안 아이를 훔쳐 오라고 했지, 권씨 집안 아이를 훔치라고 했나요? 이러고도 저를 속이지 않았다고요?”“그게...”정대명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영미 아가씨, 어차피 목적은 백인서를 곤경에 빠뜨리는 거잖아? 그러니 누구를 훔쳐 오든 상관없지 않아? 아이를 훔치기만 하면 유괴범이 되는 거니까.”이 말은 영미에게만 충격을 준 게 아니었다. 정승우의 귀에도 또렷이 들어왔다.“좋아요.”영미는 깊은숨을 들이마신 뒤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이 아이는 잘 지키고 있어요, 제가 다시 연락할 테니까.”...한편, 권씨 집안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권욱은 조순영을 탓하며 아이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했고, 조순영은 오열하며 남편을 원망했다. 조순영은 권욱이 바깥에서 여자와 부적절하게 얽히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라고 했다.“헛소리하지 마! 사람들이 나한테 어떤 소문을 퍼뜨렸는지 잘 알잖아. 결혼 생활 내내 너한테 부끄러운 일 한 적 없어.”“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정말 떳떳하게 행동했다면 왜 사람들이 당신만 가만두지 않는 건데?”며칠 전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