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에서 제일 잘나가는 호텔은 명황세가잖아!”강서연이 웃으며 윤찬을 놀렸다.“굳이 네가 쏘겠다고?”“이번에는 달라요!”윤찬이 진지하게 말했다.“매형, 절대로 호텔에 미리 말하지 마세요. 제가 진짜로 제가 번 돈으로 좋은 음식을 대접하고 싶을 뿐이에요.”“그래요, 저도 찬성이에요.”최연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세요. 오늘은 제가 아무 말도 안 할 테니 그냥 호텔에 가는 일반 소비자라고 생각하시면 돼요.”윤찬이 기분 좋게 동의했다.그들은 먼저 집으로 돌아가 윤문희를 모시고 또 김자옥을 초대했다.그래도 최연준은 은밀하게 최상의 룸으로 준비해달라고 요구했고 음식은 원가에서 티 내지 않게 적당하게 할인해 주면 된다고 여러 번 당부했다.호텔의 다른 직원들은 모두 이게 무슨 작전인지 이해하지 못했고 지배인만 금방 알아차렸다.셋째 도련님의 처남이 흥이 나서 한턱내겠다고 하니, 당연히 그의 소원을 들어줘야지!지배인은 메뉴판을 새로 만들었다. 룸에 있는 음식들은 모두 최고급으로 올라왔고 가격은 로비보다 훨씬 저렴하다.방한서는 웃으며 매니저를 바라보고 눈빛으로 말해줬다.‘당신의 미래는 창창하고 앞길이 구만리일 거야!’룸에서는 시시때때로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룸밖에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가 복잡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아무도 그 사람을 유의하지 않았다.윤찬이 시상대에 섰을 때처럼 객석에 누군가 몰래 감격의 눈물을 쏟아냈다.“회장님.”진용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돌아갑시다. 이미 여기에 오래 서 있었습니다.”“나...”윤정재가 우물쭈물하다가 마지막에는 어린아이처럼 애원했다.“조금만 더 보고 갈게.”진용수는 윤정재 마음속의 고통과 모순을 이해했다.윤정재가 서 있는 각도에서 바라보면 룸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만 어렴풋이 보였고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윤정재는 룸에 있는 그들의 행복한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강서연도 있고 윤찬도 있고 윤문희도 있고...윤정재까지 더해 네 식구가 화목하게 지내면 얼
너무 급한 나머지 윤정재는 목소리 톤까지 변했다. 강서연은 깜짝 놀라 아이패드를 내려놓고 윤정재를 바라봤다.“내 말은...”윤정재도 무슨 감정인지 표현하기가 어려웠다.최연준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거는 인정한다. 윤정재가 생각하는 완벽한 사윗감 기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최연준보다 더 좋은 사람을 찾기는 좀 어려울 것이다.그래도 윤정재는 아무리 봐도 최연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게다가 최연준은 김자옥의 아들이다...염라대왕 같은 시어머니를 두면 앞으로 딸이 고생할까 봐 걱정했다!“제 뜻은 아직 젊으시잖아요.”윤정재가 걱정스럽게 쳐다봤다.“젊은 사람들은 변수가 너무 많아서 일찍 시집을 가고 나중에 더 좋은 사람을 만나면 어떡해요?”“그렇지 않아요.”강서연이 웃으며 말했다.“연준 씨가 저에게 가장 잘 맞는 사람이에요!”“그건 남자를 많이 못 만나봐서 그래요!”윤정재가 이 말을 하자 자신도 깜짝 놀랐다.시간은 마치 3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윤정재가 윤씨 저택 밖에서 집안의 말다툼 소리를 들었다.윤씨 집안 어르신들이 윤문희를 꾸짖었다.“네가 남자를 많이 못 만나봐서 그래!”윤정재는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지고 몸이 떨렸다.“아저씨, 왜 그래요?”강서연이 그를 부르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아무것도 아니에요.”“어디 아프세요?”강서연이 따뜻한 물 한 잔 가져다드렸다.“몸이 편찮으시면 먼저 들어가 쉬세요. 우리 프로젝트는 이미 충분히 정리했어요. 나머지는 밑에 사람들에게 맡기면 돼요.”“제가 다 하고 싶어서 그래요.”윤정재는 힘겹게 웃음을 지었다.그는 이 병원을 완벽하게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의사로서의 사명감뿐만이 아니라 이 병원을 자기가 끔찍이 아끼는 딸에게 선물로 주고 싶었다.“병원은 다른 것보다 더 세심하게 봐야 해요. 번거로움을 두려워해서는 안 돼요.”강서연은 윤정재의 말을 듣고 가볍게 웃었다.“아저씨는 생활 속에서도 세심한 사람이죠?”윤정재는 한번 생각하고 진지하게 대답했다.“나는 그렇다고 생각해요.”“
윤정재는 순간 당황하며 강서연을 빤히 바라봤다.이게 무슨 뜻이지? 딸이 자기를 떠보는 건가?아니면 윤문희는 이미 윤정재가 오성에 왔다는 것을 알고 있어 딸을 시켜 자기를 떠보게 하여 아직도 그녀를 마음에 품고 있는지 알아보게 한 걸까?윤정재는 코끝에서 땀방울이 송골송골 뿜어져 나왔고 가슴도 두근거렸다.강서연은 윤정재가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고 그냥 너무 뜬금없이 물어 어르신들을 놀라게 한 줄 알았다.‘엄마를 위해 짝을 찾고 싶다고 해도 이렇게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잖아!’“죄송해요.”강서연이 연달아 사과했다.“아저씨, 악의로 물어본 게 아니에요. 대답하기 싫으면 안 물어볼게요!”“그게...”윤정재가 어색하게 웃었다.“사실 내가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동안 일과 의학 연구로 바빴기 때문에 이 부분은 생각 범위 밖이에요.”“누군가가 아저씨와 함께 여생을 보낼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요?”‘그런가? 좋을까?’윤정재는 곤경에 빠졌다.그 사람을 제외하고 윤정재는 그 어떤 여자와도 남은 인생을 함께 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 사람은 어쩌면 평생 자기를 용서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이 일은 나중에 얘기하죠.”윤정재는 대충 둘러댔다.“현재 병원을 짓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해요!”강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계속 일에 몰두했다.그날 밤 윤정재는 몸을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고 날이 밝아질 무렵에 겨우 잠이 들었다.그러나 두 시간도 채 못 자고 진용수가 그를 깨웠다.“회장님?”진용수는 윤정재의 피곤한 얼굴에 다크서클까지 있는 모습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윤정재는 극도로 자율적인 사람으로, 매일 몇 시에 자고 몇 시에 출근하는지를 정해 시간을 완벽히 지킨다.‘오늘은 왜 이런 모습이지?’“회장님, 오늘 최씨 영감님을 만나러 가는 데 이렇게 가실 건 아니죠?”윤정재는 잠시 멈칫했다.그제야 오늘 최재원을 방문하기로 약속한 것이 생각났다.윤정재는 급하게 옷을 갈아입고 아침을 먹었다. 다행히 미리
진용수는 두 번이나 힘껏 기침하여 윤정재가 지금 너무 오바하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윤정재는 그제야 궁금증을 거두고 활보하며 밖으로 나갔다.이때 누군가 와서 달인 한약을 박경수에게 건네주었다.윤정재는 한약재에 대한 예민함을 타고난 탓에 이 냄새를 맡고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이게 뭐예요?”“영감님의 보약이에요.”박경수가 막 돌아서려는데 갑자기 무엇이 생각났는지 걸음을 멈추고 윤정재를 바라보았다.“윤 회장님!”“왜요?”박경수는 조심스럽게 약 뚜껑을 열어 낮은 소리로 말했다.“윤 회장님께서 한번 봐주세요.”윤정재는 눈빛이 어두워졌다.박경수는 최재원의 측근이고 지금 이 약에 대해 의심을 품었다.그렇다면 이 약은 문제가 있는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회장님, 제가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박경수가 소곤거렸다.“그냥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을 뿐이에요. 약도 결국엔 많이 먹으면 독이 되니 영감님께서 과음하시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게다가 영감님의 몸은 아무 이상이 없어요...”윤정재는 가볍게 웃으며 뚜껑을 닫았다.이런 일은 말하기가 어렵다. 약에 문제가 있든 없든 최상 그룹 내부의 모순이다.그는 외부인으로서 어떻게 끼어들 수 있겠는가.“윤 회장님!”박경수는 윤정재의 이런 반응을 보고 급하게 손목을 잡았다.머뭇거리다가 박경수는 사실대로 말했다.“말할게요... 저는 약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이 약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 처방은 영감님께서 오랫동안 복용한 것이어서 문제가 없어야 하는데... 최근 들어 영감님께서 겉으로는 건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신 상태가 좋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이 약을 의심하게 되었어요...”윤정재는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다.그는 다시 약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았는데, 냄새가 이상한 것 같지는 않았다.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보약재다.안에서 냄새가 나지 않는 것들이 문제가 있을까 봐 걱정이다.“경수 씨.”윤정재가 그를 보며 물었다.“영감님께서 요즘 식욕이 어떻습니까?”박경수는 한
강서연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그게 같을 리가 있나? 뚱냥이의 털은 부드럽지만 최연준의 머리카락은 그의 성격처럼 까칠한데.강서연은 그의 준수한 얼굴을 어루만지며 다정하게 웃었다.“여보.”최연준이 그녀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강서연은 그가 배고픈 줄 알고 진지하게 대답했다.“경실 아주머니 오늘 휴가 가셔서 집에 밥할 사람이 없어요.”요즘 일이 많아 피곤한 탓인지 두 사람은 서로 바라보며 씩 웃고는 계속 소파에서 꿈쩍도 하질 않았다.강서연은 책을 3분의 2 정도 읽었고 최연준은 자세를 바꾸어 그녀를 끌어안았다.창밖을 내다보니 오늘 날씨가 온 하루 집에 있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화창했다.그때 최연준의 배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들렸다. 강서연이 웃으며 일어나 밥하려는데 최연준이 그녀를 잡았다.“힘들게 밥하느라 하지 말고 우리 나가서 먹을까?”“네?”강서연이 씁쓸하게 웃었다.“난 더는 명황세가의 밥을 먹고 싶지 않아요...”최연준은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주방장이 이 소리를 들었더라면 아주 치욕적이라고 생각할 거야.”“난 그 뜻이 아니라...”강서연이 다급하게 설명했다.“너무 자주 가서 메뉴판까지 다 외울 지경이에요. 가끔 입맛을 바꿔주는 것도 나쁘지 않죠.”“그래요? 사모님 요구가 아주 높네요? 가끔 입맛도 바꿔줘야 해요?”최연준은 그녀의 턱을 올리고 그윽하게 쳐다보았다.“그럼 나도 바꾸고 싶어?”“가능하다면 바꿔보고 싶어요.”강서연은 웃으며 그를 밀어냈다.“당신...”그 한마디에 삐진 최연준은 그녀를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꽉 껴안았다.“장난 그만 쳐.”최연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입술을 적셨다. 배만 고프지 않았더라면 침대에서 그녀를 혼쭐냈을 것이다.“연준 씨, 우리 어디 가서 먹어요?”강서연이 고분고분한 태도로 물었다.“오늘 내가 쏠 테니까 연준 씨가 식당 골라요.”“그럼...”최연준은 휴대 전화를 꺼내 검색했다.“이 집 가보자.”강서연은 고개를 내밀고 확인했다.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핫한
“조금만 더 줘...”“안 돼요!”“여보, 조금만.”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다 큰 남자가 애처럼 유치하게 왜 저래...”“저 여자는 아들을 데리고 나왔나 봐. 하하.”그들의 수군거리는 소리에 강서연은 웃음을 터트렸다. 최연준은 그녀의 눈치를 힐끗 살피더니 마지막 동물 쿠키 한 조각을 내려놓고 단정하게 앉았다.번호가 불리는 속도가 여전히 매우 늦었다. 종업원은 손님들에게 머리띠를 나눠주기 시작했다.앞에서 기다리던 한 커플은 이미 머리띠를 하고 있었는데 안에 전구가 반짝거리는 머리띠였다.해 보고 싶어 안달 나 하는 강서연의 모습에 최연준은 큼지막한 손으로 그녀의 두 눈을 가렸다.“뭐 하는 거예요?”“보지 마.”최연준이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달라고도 하지 마.”‘난 저런 거 죽어도 안 해. 너무 창피해!’“두 분, 안녕하세요.”종업원은 두 사람에게도 나눠주었다.“어떤 스타일 좋아해요? 울트라맨과 몬스터 어때요?”강서연은 최연준의 손을 떼어내려 애를 썼다. 하지만 최연준은 끄떡없었고 싸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우린 필요 없어요.”“주세요!”“안 주셔도 돼요.”종업원은 멋쩍은지 마른기침을 했다.“이건 저희 가게에서 드리는 서비스예요. 점장님께서 손님들이 오래 기다리신다고 지루해할까 봐...”“아무래도 연준 씨의 블랙 카드를 다시 가져와야겠어요.”이 협박은 그 무엇보다도 효과가 짱이었다. 최연준은 결국 하는 수 없이 손을 내려놓았다. 그에게서 벗어난 강서연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종업원이 건네는 울트라맨과 몬스터 머리띠를 받았다.“하려면 혼자 해. 난 싫...”하지만 그가 싫다고 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차갑고 도도하기만 하던 최연준이 사람들 속에서 줄을 선 것도 모자라 머리에는 몬스터 머리띠까지 하고 앉아있었다.강서연이 버튼을 누르자 몬스터가 반짝이기 시작했는데 그의 체념한 듯한 표정과 어우러지니 그야말로 감격스러운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그 모습에 강서연은
최연준은 시무룩한 얼굴로 배경원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연준 형.”배경원은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움찔했다. 지금 이 순간 최연준은 그를 모른 척하고 싶었다.‘누구세요?’최연준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그 한마디를 꾹꾹 누르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응.”배경원은 그가 왜 이러는지 알 리가 없었다. 임수정은 종업원에게서 같은 머리띠를 건네받고 배경원에게도 하나 건넸다.잠시 후 드디어 그들 차례가 되었고 네 사람은 한 테이블에 앉았다.“어쩌다가 만났는데.”강서연이 웃으며 말했다.“오늘 드시고 싶은 거 다 시켜요. 제가 쏠게요!”“그건 안 되죠.”배경원도 따라 웃었다.“형수님의 돈을 써서야 하겠어요? 쏴도 제가 쏴야죠.”그들은 메뉴판을 펼치고 메뉴를 고르기 시작했다. 강서연은 임수정이 밖으로 나온 걸 보고 무척이나 기쁜 마음에 그녀의 손을 잡고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요즘 많이 좋아졌죠? 병원은 정기적으로 가요? 정재 아저씨가 언제쯤이면 약을 끊을 수 있는지 알려주던가요?”옅은 미소를 짓는 임수정의 두 눈은 샘물처럼 맑고 반짝였다.“수정 씨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어요.”배경원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사랑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요즘 병원에 갈 때도 저와 함께 가요.”“네.”강서연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수정 씨가 많이 좋아진 게 경원 씨의 공이 아주 컸네요?”배경원은 머리를 긁적이며 배시시 웃었다. 최연준의 차가운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쟤는 어릴 적부터 뭘 제대로 한 게 없지만 이 일 하나만은 아주 잘했어.”“형, 그만 좀 디스해요.”배경원은 억울하다는 듯 그를 노려보았다.“제가 형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데요. 예전에 형의 감방 동기 역할도 했었잖아요.”감방 동기라는 소리에 강서연은 박장대소했다. 무슨 말인지 알 리가 없었던 임수정은 막연한 얼굴로 배경원을 쳐다보았다.“감방 동기요?”“아주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나중에 천천히 들려줄게요.”임수정
그와 같은 재벌 집 남자라면 밖에 다른 여자가 있고 또 혼외 자식이 있는 것도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그나저나 정재 아저씨에게 진짜 애가 있다면 어떻게 엄마에게 소개해 주지?’강서연은 풀이 죽은 모습으로 회를 집어 먹었다. 그런데 최연준의 표정이 어딘가 이상했다.그는 임수정을 보며 어두운 목소리로 물었다.“진짜 딸이 있는 게 확실해요?”“확실하진 않아요.”임수정이 어깨를 들먹였다.“아무튼 자기 집 계집애 때문에 저의 병을 치료해 준다고 했어요. 정확히 누구인지는 저도 모르죠.”최연준은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강서연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얼마 전 강서연과 함께 갤러리에 갔던 때가 떠올랐다. ‘반딧불의 빛’이라는 작품이 가장 눈에 띄는 곳에 걸려있었는데 강서연은 어머니의 작품이라고 그에게 자랑했었다.최연준은 작품의 아래 끝에 문희라고 적혀있는 이름을 발견했다.“장모님 성함이 문자 희자셔?”장모님과 알고 지낸 지 오래됐지만 이름을 안 건 그때 처음이었다.“네.”강서연이 웃으며 대답했다.“윤문희예요.”‘윤문희... 다 성이 윤씨야.’성남에 남양에서 건너온 약이 있었는데 약병에 아주 정교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강서연의 어머니가 강서연에게 준 나무 상자에 그 무늬가 새겨져 있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윤정재, 윤문희.게다가 그 약은 윤제 그룹 계열사인 재희 제약에서 제조한 것이다.재는 윤정재의 재이고, 희는 그가 사랑했지만 함께 할 수 없었던 여자라면...최연준은 갑자기 발을 헛디딘 것처럼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머릿속에 온통 이 생각뿐이라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젠 단서도 명확해졌고 확인하는 일만 남았다.그는 강서연을 집에 데려다준 후 회사에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김자옥을 찾으러 부리나케 어진 엔터테인먼트로 달려갔다.서류 한 뭉치를 들고 복도를 거닐던 김자옥은 마주 향해 오는 최연준과 하마터면 부딪칠 뻔했다.“최연준, 깜짝 놀랐잖아!”“엄마...”다른 걸 신경 쓸 겨
“어떻게 소피아라는 걸 확신하죠?”배윤아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부모님이 회사의 핵심 자료를 제게 모두 맡기셨어요. 그런데 그걸 받은 지 이틀 만에 공격을 당했죠. 이게 단순한 우연일까요?”임지강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그 자료들은 어디 있어요?”“아마 소피아가 가지고 있을 거예요. 그 자료들은 너무 중요해서 항상 제 곁에 두고 다녔거든요. 하지만 그날 제가 기절하고 다시 깨어났을 때, 가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다만...”“다만 뭐요?”“법인 도장은 가방 안에 없었어요.”배윤아는 미소를 지으며 약간 능글맞은 표정을 지었다.“법인 도장은 본사가 모든 자원을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이에요. 엄마가 제게 주자마자 저는 바로 군성이에게 맡겼어요. 지금 법인 도장은 최씨 가문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어요.”“그렇다면 소피아가 자료를 손에 넣더라도 아무 쓸모가 없겠군요?”배윤아는 확신에 차서 고개를 끄덕였다.“똑똑하네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었다.“배씨 가문 사람들도 다 무능하진 않나 보네요.”“임 선생님...”배윤아는 고개를 약간 숙이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오빠가 송윤지에게 잘못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는 임 선생님이 우리 가문에 복수하려고 저를 납치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아요. 선생님은 그런 수준 낮은 사람이 아니니까요.”임지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확실히 똑똑한 사람이네요.”그러나 배윤아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그런데... 정말 우리 오빠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요?”임지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임지강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가족들에게 안부 전화라도 주세요. 걱정을 많이 하고 계실 거예요.”“이미 군성이에게 연락을 했어요.”배윤아가 말했다.“군성이에게 조용히 아빠에게 알려 드리라고 했어요. 엄마는 충격을 받으시면 안 되니까요... 하지만 제 상황을 오빠에겐 비밀로 해야 해요. 오빠와 소피아는 제가 조 회장님에게 잡혀 있고 선생님이 일부러 복수를 위해 조 회장님을
“설마...”“소피아!”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이름을 입에 올린 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정말 소피아일 줄이야.”임지강이 담배를 꺼내 들었다. 조 회장이 눈짓을 하자 부하가 공손히 불을 붙였다.방 안은 금세 니코틴 냄새로 가득 찼고 임지강은 잠시 침묵하며 담배 재를 털어냈다.“아마... 조 회장님도 지금 저와 같은 처지겠죠.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했다는 누명을 쓰게 됐으니 말이에요.”“그러게 말이야.”조 회장은 차갑게 웃었다.“겉으로는 온갖 아부를 떨면서도 뒤에서는 이런 음모를 꾸미고 내가 배윤아를 납치했다고 소문까지 퍼뜨리고 있더군.”“회장님과 제가 가까운 사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의심의 화살을 제게도 돌리겠죠.”임지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면, 연루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겁니다. 저 때문에 저의 매형까지 연루되면, 배씨 가문과 육씨 가문의 사이도 틀어질 거고요.”“그 여자는 이런 식으로 우리 모두를 자기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조 회장님 생각은 어떻습니까?”“웃기지 말라 그래.”조 회장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임지강은 조 회장의 꽉 쥐어진 주먹을 발견했다. 그의 손등에는 화가 잔뜩 난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조 회장님.”임지강은 잠시 침묵한 뒤 부드럽게 말했다.“운산시 광산의 가격을 조작하도록 제가 이미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 두 광산은 이제 그렇게 가치 있는 자산이 아닙니다.”“알고 있어.”조 회장은 임지강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이 일은 원래 자네 복수를 위해 시작한 일이야. 자네의 화가 조금이라도 풀린다면 내 수고도 헛된 게 아니야. 하지만 문제는...”조 회장은 손짓으로 방 안을 가리켰다.그때 방 안에서 배윤아가 몸을 뒤척이며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임지강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배윤아와 단둘이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조 회장은 잠시 망
임지강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차가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그를 철저히 파산시키고 싶습니다.”“배씨 가문 전체를 함께 무너뜨리겠다는 뜻인가?”조 회장이 묻자, 임지강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말하면, 예전의 저라면 그렇게 했겠죠. 하지만 지금은...”“지금은 마음이 약해졌다는 건가?”조 회장이 비웃듯 웃으며 말했다.“내가 알던 임지강은 그런 자비를 베풀 인물이 아닌데?”임지강도 미소를 지었다.그 웃음 뒤로 누군가의 맑은 눈빛과 깨끗한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이번 일은 송윤지가 부탁해서 오게 된 것이었다.송윤지는 배윤아의 실종 소식을 듣고 매우 걱정하고 있었다. 비록 배현진과 부부의 연을 맺지 못했지만, 배윤아와는 과거에 친하게 지냈던 사이였기에 친구로서 걱정되었기 때문이다.임지강 자신도 이곳에 올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송윤지의 부탁 때문이고 또 하나는 배윤아의 납치 사건이 왜 갑자기 자신에게 덮어씌워졌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임지강은 배윤아와 거의 만난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은 사실상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조 회장님, 전 자비를 베푸는 게 아닙니다.”임지강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단지 이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이미 많은데 한낱 파리 한 마리와 얽혀서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서입니다. 그 녀석에게 적당히 벌을 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게다가 저는 배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과는 아무런 원한도 없으니, 배씨 가문을 완전히 망가뜨릴 필요는 없습니다.”“흠...”조 회장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1조라... 적지 않은 금액이지. 배현진은 은행에서 전 재산을 담보로 대출받았다고 하더군. 이 일이 발각되면 한동안 꽤 고생하겠지.”“조 회장님, 사실 오늘 제가 온 이유는 다른 목적도 있어서입니다.”임지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약간 굽히며 공손히 말했다. 그러나 조 회장은 손짓으로 그를 제지하며 미소를 지었다.조 회장은 아무 말 없이 손짓으로 따라오라는
배현진은 병원 복도에 있는 긴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잡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완전히 무너진 모습이었다.“그럴 리가 없어...”한참 동안 앉아 있던 배현진은 갑자기 고개를 들며 말했다.“연준 아저씨와 서연 이모는 소피아와 함께 지낸 적이 없잖아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소피아는 절대 저를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이 녀석아,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고집을 부릴 거야.”최연준이 엄하게 꾸짖었다.배경원은 아무 말 없이 아들의 손을 잡았다. 그의 눈에는 깊은 절망이 서려 있었다.“그만해요, 셋째 형님...”배경원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수정이가 응급실에 있는데, 이 아이와 더 이상 다투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없는 아들이라고 생각하려 합니다.”“아버지!”“꺼져버려!”배경원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눈빛 너머에는 모든 걸 놓아버린 듯한 깊은 허무가 스며 있었다.배현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돌아섰다. 떠나기 전, 그는 다시 돌아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윤아를 반드시 무사히 데려올게요. 엄마도 무사할 거예요. 우리 가족은... 예전처럼 다시 행복해질 거예요.”배경원은 아들에게 단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잠시 후, 응급실의 불이 꺼졌다. 배경원은 화살처럼 뛰어가며 아내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의사가 땀으로 흠뻑 젖은 마스크를 벗으며 가까스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배 선생님, 사모님께서는 일단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뭐라고요?”강서연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일단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건, 앞으로 위험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다들 진정하세요.”의사는 부드럽게 설명했다.“사모님의 상태가 많이 복잡합니다. 곧바로 특수 병동으로 옮길 예정이라 당분간 면회는 어려울 겁니다. 이번 주가 아주 중요한 시기이긴 하지만, 제 판단으로는 이 고비를 무사히 넘기실 가능성이 큽니다.”세 사람은 안도의 숨을 쉬며 그나마
“아내라고?”강서연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현진이와 정식으로 결혼한 적 있니? 다른 사람과 약혼한 상태에서 끼어든 건 너잖아. 명분도 없는 관계에 ‘아내’라는 말을 쓰다니, 웃음거리밖에 안 될 거야.”“최 사모님...”“갑자기 생각난 건데.”강서연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수정 씨가 쓰러졌을 때 네가 침대 옆에 있었던 거 맞지?”“아, 네.”소피아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제가 현진 씨를 대신해 효도하러 갔던 거예요. 하지만 어머님 건강이 그렇게 나쁘실 줄은 몰랐습니다.”“수정 씨가 쓰러지기 직전에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말해보렴.”소피아는 순간 멈칫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말할 수 없는 이유라도 있니?”강서연은 한 발짝 다가가며 소피아를 몰아붙였다.“수정 씨는 평소 건강관리를 철저히 하던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쉽게 쓰러질 리 없지. 분명 큰 충격이 있었을 거야. 쓰러지기 직전 병실에 너 혼자 있었다며?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해.”“서연 이모,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배현진은 소피아를 자신의 뒤로 끌어당기며 소피아에게 나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소피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복도를 따라 빠르게 사라졌다.소피아가 사라지자, 배현진은 조심스럽게 말했다.“서연 이모, 소피아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배현진!”강서연은 배경원이 아들을 두 번이나 때린 이유를 이제야 완벽히 이해한 듯,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너 어떻게 이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니? 네 엄마는 지금 저 안에 누워 있어.”“정말로 소피아와는 아무 관련이 없어요...”배현진은 조심스럽게 입술을 핥으며 설명했다.“서연 이모, 사실 소피아도 자책하고 있어요. 그날 소피아도 윤아의 안전을 걱정하다가 엄마 앞에서 그만 실수로 말을 흘리고 만 거예요. 그래서...”“뭐라고?”최연준이 눈을 부릅뜨며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배현진, 네 엄마 쓰러졌을 때 넌 방에 없었잖아.”“소피아가 제게 그렇게 말했어요.”“너...”최연준은 순간
병원 응급실 밖.배경원은 의자에 주저앉아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충혈된 눈으로 응급실 문을 응시하며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한때 당당했던 그의 어깨는 지금 축 처져 있었다. 뒷모습만으로도 절망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배경원은 주먹을 단단히 쥐었지만, 온몸은 떨리고 있었다.적막이 흐르는 복도는 불길한 정적마저 감돌았다.결국, 억눌렀던 감정이 터져 나와 눈물이 조용히 뺨을 적셨다.“경원아!”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배경원이 고개를 들자, 최연준과 강서연이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질 뻔한 배경원을 최연준이 재빨리 부축했다.강서연은 응급실 문을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치료는 연희 씨와 신석훈 씨의 제자들이 맡고 있어요. 모두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이에요. 수정 씨는 평소 건강을 잘 관리하셨으니 금방 회복될 겁니다.”“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최연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갑자기 병세가 심각해진 거야? 그리고 윤아는...”배경원은 떨리는 손으로 최연준의 팔을 붙잡으며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셋째 형님, 제발 윤아를 찾아주세요. 딸은 사라지고 아내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어요. 둘 다 잃으면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그런 바보 같은 말 하지 마세요. 둘 다 무사할 겁니다.”강서연이 단호히 말했다.“윤아는 우리 집안의 며느리예요. 누가 윤아를 해치려 한다면 최씨 가문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어요. 그 결과가 어떤 건지 모를 리도 없고요. 그리고...”강서연은 순간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을 이어가려다 복도 끝에서 배현진이 소피아와 함께 급히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는 말을 삼키고 배현진을 노려보았다.“연준 아저씨, 서연 이모...”배현진은 어딘가 죄책감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배현진은 배경원에게 다가가 팔을 살며시 부축하며 조심스레 말했다.“아버지...”그 순간, 배경원이 배현진의 뺨을 내려쳤다.배경원은 분노로 가득 찬 눈빛으로 배현진을 노려보며
임수정은 갑작스러운 기침을 하며 침대 옆 경보 벨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소피아에 의해 단호히 막혔다.“사모님, 제 말을 듣는 게 좋으실 겁니다.”소피아는 부드럽지만 섬뜩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제가 만든 음식이 그렇게 형편없지도 않고 독을 넣을 만큼 제가 어리석지도 않아요. 안심하세요. 이 모든 재료는 사모님의 건강을 생각하며 준비한 겁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온 이유는 진심으로 사모님을 돌보고 싶어서예요.”임수정은 가슴을 움켜쥔 채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임수정의 눈엔 불신과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요즘 배경원은 외출이 잦아졌고 이유를 묻자, 회사 일 때문이라며 안심하라는 대답뿐이었다.그럼에도 임수정의 마음속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점점 커져만 갔다.깊게 숨을 들이마신 임수정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겉으론 소피아의 말을 따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사모님, 잘 생각하셨어요.”소피아는 임수정에게 쿠션을 건네며 은은하게 웃었다.“우리 결국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될 사이잖아요. 지금부터 제 존재에 익숙해지시는 게 좋을 겁니다.”“흥! 내 아들이 눈이 먼 게 분명해.”임수정은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떻게 너 같은 사람에게 속을 수 있는지...”“저를 깔보지 마세요. 저는 이혼하고 아이도 데리고 있지만, 현진 씨를 향한 제 진심은 변하지 않아요. 저는 현진 씨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누구와는 달리 겉으론 순수한 척하면서 남자를 유혹하는 짓은 안 한다는 건 알아주셨으면 해요.”“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임수정은 언성을 높이며 노려보았다.소피아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더욱 날카롭게 말했다.“사모님, 제가 말하는 사람은 바로 사모님의 그 옛날 며느리가 될 뻔했던 그 사람이에요.”“헛소리하지 마!”임수정은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그 일은 우리 배씨 가문이 송윤지에게 잘못한 일이야. 그 애의 명예를 더럽히지 마.”“사모님,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없는 법이에요.”소피아는 태연한
“너와 상관없다고?”임우정은 다급하게 외쳤다.“네 형부가 이미 윤아의 통화 기록을 조사했어. 윤아가 실종되기 전에 조 회장이랑 통화했던 게 드러났다고! 지강아, 너와 조 회장이 어떤 관계인지 나한테도 숨길 작정이었어?”임지강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사건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머릿속에서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그래요. 저와 조 회장이 가까운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와 배윤아 사이엔 원한이라곤 없잖아요... 누나, 왜 저를 의심하는 거예요?”“지강아!”임우정의 목소리가 더욱 절박해졌다.“너, 송윤지 일 때문에 배현진을 미워하는 건 알아. 하지만... 네 말대로라면 윤아한테까지 증오를 전가하면 안 되잖아!”“누나, 정신 좀 차리세요!”임지강의 목소리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어둠이 깃든 그의 얼굴은 단호함을 더했다.“무슨 근거로 저를 의심하시는 건데요?”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임지강의 강경한 태도에 임우정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한참 후, 임우정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렇다면... 배씨 가문을 좀 도와줄 순 없겠니?”임지강은 코웃음을 치며 전화를 끊었다.수화기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리자 맑고 투명한 송윤지의 눈빛과 마주쳤다.“배씨 가문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요양원 병실 문 앞.소피아의 하이힐 소리가 텅 빈 복도를 울리며 퍼져 나갔다. 소피아의 손엔 보온 도시락이 들려 있었고 문 앞을 지키는 경호원들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제가 사모님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안으로 들여보내 주세요.”경호원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말없이 서 있었다.“이건 도련님께서 지시하신 거예요.”소피아는 휴대전화를 꺼내 그들에게 일부러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실래요? 아시다시피 사모님 건강이 좋지 않으세요. 세 끼 제대로 챙겨 드시지 못하면 여러분들이 책임지실 겁니까?”경호원들은 난처한 얼굴로 머뭇거리다 결국 길을 내주었다.“이제야 말이 통하네.”소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앞으로
송윤지는 겨우 한 모금을 마시고 사레가 들어 술을 뱉을 뻔했다. 마신 술이 얼굴에 스며든 듯 송윤지의 뽀얀 볼은 어느새 매혹적인 와인빛으로 물들었다.임지강은 그런 송윤지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임지강은 송윤지에게 다가가 가볍게 등을 두드리며 입가에 묻은 술자국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임 대표님...”송윤지는 조심스럽게 임지강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 애썼다.하지만 임지강은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아 통유리창 앞까지 데려갔다.송윤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 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깊고 짙은 밤하늘에 수많은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잘게 부서진 불빛들이 반짝거렸다.불꽃은 색과 모양을 끊임없이 바꾸며 꿈같은 광경을 만들어냈다.송윤지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마음에 들어요?”임지강의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송윤지의 귀에 스며들었다.“잠깐 눈 좀 감아 봐요.”“네?”임지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제가 별을 따다 줄게요.”마지막 불꽃이 빛의 궤적을 남기며 밤하늘로 사라지고 다시 평온한 고요가 찾아왔다.송윤지는 미소를 지으며 임지강의 말을 따라 눈을 감았다. 그러자 따뜻하면서도 약간 서늘한 남자의 손길이 송윤지의 손을 잡더니 손바닥 위에 무언가가 놓이는 느낌이 들었다.송윤지는 깜짝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손에는 정말로 ‘별’이 있었다.“이건...”그것은 목걸이였다. 펜던트는 별 모양으로 깎아낸 다이아몬드로, 완벽하게 다듬어져 찬란한 빛이 퍼지고 있었다.“제가 해줄게요.”임지강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이건 너무 비싼 거라서 제가...”“받아줘요.”임지강의 눈빛은 따스하고도 단호했다.“그리고...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송윤지는 고개를 숙였다. 귀 끝까지 붉어진 송윤지의 얼굴은 마치 열이 오른 듯했다.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의 귓가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살짝 정리해 주었다.“사실,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저 윤지 씨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