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에서 제일 잘나가는 호텔은 명황세가잖아!”강서연이 웃으며 윤찬을 놀렸다.“굳이 네가 쏘겠다고?”“이번에는 달라요!”윤찬이 진지하게 말했다.“매형, 절대로 호텔에 미리 말하지 마세요. 제가 진짜로 제가 번 돈으로 좋은 음식을 대접하고 싶을 뿐이에요.”“그래요, 저도 찬성이에요.”최연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세요. 오늘은 제가 아무 말도 안 할 테니 그냥 호텔에 가는 일반 소비자라고 생각하시면 돼요.”윤찬이 기분 좋게 동의했다.그들은 먼저 집으로 돌아가 윤문희를 모시고 또 김자옥을 초대했다.그래도 최연준은 은밀하게 최상의 룸으로 준비해달라고 요구했고 음식은 원가에서 티 내지 않게 적당하게 할인해 주면 된다고 여러 번 당부했다.호텔의 다른 직원들은 모두 이게 무슨 작전인지 이해하지 못했고 지배인만 금방 알아차렸다.셋째 도련님의 처남이 흥이 나서 한턱내겠다고 하니, 당연히 그의 소원을 들어줘야지!지배인은 메뉴판을 새로 만들었다. 룸에 있는 음식들은 모두 최고급으로 올라왔고 가격은 로비보다 훨씬 저렴하다.방한서는 웃으며 매니저를 바라보고 눈빛으로 말해줬다.‘당신의 미래는 창창하고 앞길이 구만리일 거야!’룸에서는 시시때때로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룸밖에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가 복잡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아무도 그 사람을 유의하지 않았다.윤찬이 시상대에 섰을 때처럼 객석에 누군가 몰래 감격의 눈물을 쏟아냈다.“회장님.”진용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돌아갑시다. 이미 여기에 오래 서 있었습니다.”“나...”윤정재가 우물쭈물하다가 마지막에는 어린아이처럼 애원했다.“조금만 더 보고 갈게.”진용수는 윤정재 마음속의 고통과 모순을 이해했다.윤정재가 서 있는 각도에서 바라보면 룸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만 어렴풋이 보였고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윤정재는 룸에 있는 그들의 행복한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강서연도 있고 윤찬도 있고 윤문희도 있고...윤정재까지 더해 네 식구가 화목하게 지내면 얼
너무 급한 나머지 윤정재는 목소리 톤까지 변했다. 강서연은 깜짝 놀라 아이패드를 내려놓고 윤정재를 바라봤다.“내 말은...”윤정재도 무슨 감정인지 표현하기가 어려웠다.최연준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거는 인정한다. 윤정재가 생각하는 완벽한 사윗감 기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최연준보다 더 좋은 사람을 찾기는 좀 어려울 것이다.그래도 윤정재는 아무리 봐도 최연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게다가 최연준은 김자옥의 아들이다...염라대왕 같은 시어머니를 두면 앞으로 딸이 고생할까 봐 걱정했다!“제 뜻은 아직 젊으시잖아요.”윤정재가 걱정스럽게 쳐다봤다.“젊은 사람들은 변수가 너무 많아서 일찍 시집을 가고 나중에 더 좋은 사람을 만나면 어떡해요?”“그렇지 않아요.”강서연이 웃으며 말했다.“연준 씨가 저에게 가장 잘 맞는 사람이에요!”“그건 남자를 많이 못 만나봐서 그래요!”윤정재가 이 말을 하자 자신도 깜짝 놀랐다.시간은 마치 3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윤정재가 윤씨 저택 밖에서 집안의 말다툼 소리를 들었다.윤씨 집안 어르신들이 윤문희를 꾸짖었다.“네가 남자를 많이 못 만나봐서 그래!”윤정재는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지고 몸이 떨렸다.“아저씨, 왜 그래요?”강서연이 그를 부르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아무것도 아니에요.”“어디 아프세요?”강서연이 따뜻한 물 한 잔 가져다드렸다.“몸이 편찮으시면 먼저 들어가 쉬세요. 우리 프로젝트는 이미 충분히 정리했어요. 나머지는 밑에 사람들에게 맡기면 돼요.”“제가 다 하고 싶어서 그래요.”윤정재는 힘겹게 웃음을 지었다.그는 이 병원을 완벽하게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의사로서의 사명감뿐만이 아니라 이 병원을 자기가 끔찍이 아끼는 딸에게 선물로 주고 싶었다.“병원은 다른 것보다 더 세심하게 봐야 해요. 번거로움을 두려워해서는 안 돼요.”강서연은 윤정재의 말을 듣고 가볍게 웃었다.“아저씨는 생활 속에서도 세심한 사람이죠?”윤정재는 한번 생각하고 진지하게 대답했다.“나는 그렇다고 생각해요.”“
윤정재는 순간 당황하며 강서연을 빤히 바라봤다.이게 무슨 뜻이지? 딸이 자기를 떠보는 건가?아니면 윤문희는 이미 윤정재가 오성에 왔다는 것을 알고 있어 딸을 시켜 자기를 떠보게 하여 아직도 그녀를 마음에 품고 있는지 알아보게 한 걸까?윤정재는 코끝에서 땀방울이 송골송골 뿜어져 나왔고 가슴도 두근거렸다.강서연은 윤정재가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고 그냥 너무 뜬금없이 물어 어르신들을 놀라게 한 줄 알았다.‘엄마를 위해 짝을 찾고 싶다고 해도 이렇게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잖아!’“죄송해요.”강서연이 연달아 사과했다.“아저씨, 악의로 물어본 게 아니에요. 대답하기 싫으면 안 물어볼게요!”“그게...”윤정재가 어색하게 웃었다.“사실 내가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동안 일과 의학 연구로 바빴기 때문에 이 부분은 생각 범위 밖이에요.”“누군가가 아저씨와 함께 여생을 보낼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요?”‘그런가? 좋을까?’윤정재는 곤경에 빠졌다.그 사람을 제외하고 윤정재는 그 어떤 여자와도 남은 인생을 함께 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 사람은 어쩌면 평생 자기를 용서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이 일은 나중에 얘기하죠.”윤정재는 대충 둘러댔다.“현재 병원을 짓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해요!”강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계속 일에 몰두했다.그날 밤 윤정재는 몸을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고 날이 밝아질 무렵에 겨우 잠이 들었다.그러나 두 시간도 채 못 자고 진용수가 그를 깨웠다.“회장님?”진용수는 윤정재의 피곤한 얼굴에 다크서클까지 있는 모습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윤정재는 극도로 자율적인 사람으로, 매일 몇 시에 자고 몇 시에 출근하는지를 정해 시간을 완벽히 지킨다.‘오늘은 왜 이런 모습이지?’“회장님, 오늘 최씨 영감님을 만나러 가는 데 이렇게 가실 건 아니죠?”윤정재는 잠시 멈칫했다.그제야 오늘 최재원을 방문하기로 약속한 것이 생각났다.윤정재는 급하게 옷을 갈아입고 아침을 먹었다. 다행히 미리
진용수는 두 번이나 힘껏 기침하여 윤정재가 지금 너무 오바하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윤정재는 그제야 궁금증을 거두고 활보하며 밖으로 나갔다.이때 누군가 와서 달인 한약을 박경수에게 건네주었다.윤정재는 한약재에 대한 예민함을 타고난 탓에 이 냄새를 맡고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이게 뭐예요?”“영감님의 보약이에요.”박경수가 막 돌아서려는데 갑자기 무엇이 생각났는지 걸음을 멈추고 윤정재를 바라보았다.“윤 회장님!”“왜요?”박경수는 조심스럽게 약 뚜껑을 열어 낮은 소리로 말했다.“윤 회장님께서 한번 봐주세요.”윤정재는 눈빛이 어두워졌다.박경수는 최재원의 측근이고 지금 이 약에 대해 의심을 품었다.그렇다면 이 약은 문제가 있는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회장님, 제가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박경수가 소곤거렸다.“그냥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을 뿐이에요. 약도 결국엔 많이 먹으면 독이 되니 영감님께서 과음하시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게다가 영감님의 몸은 아무 이상이 없어요...”윤정재는 가볍게 웃으며 뚜껑을 닫았다.이런 일은 말하기가 어렵다. 약에 문제가 있든 없든 최상 그룹 내부의 모순이다.그는 외부인으로서 어떻게 끼어들 수 있겠는가.“윤 회장님!”박경수는 윤정재의 이런 반응을 보고 급하게 손목을 잡았다.머뭇거리다가 박경수는 사실대로 말했다.“말할게요... 저는 약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이 약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 처방은 영감님께서 오랫동안 복용한 것이어서 문제가 없어야 하는데... 최근 들어 영감님께서 겉으로는 건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신 상태가 좋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이 약을 의심하게 되었어요...”윤정재는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다.그는 다시 약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았는데, 냄새가 이상한 것 같지는 않았다.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보약재다.안에서 냄새가 나지 않는 것들이 문제가 있을까 봐 걱정이다.“경수 씨.”윤정재가 그를 보며 물었다.“영감님께서 요즘 식욕이 어떻습니까?”박경수는 한
강서연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그게 같을 리가 있나? 뚱냥이의 털은 부드럽지만 최연준의 머리카락은 그의 성격처럼 까칠한데.강서연은 그의 준수한 얼굴을 어루만지며 다정하게 웃었다.“여보.”최연준이 그녀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강서연은 그가 배고픈 줄 알고 진지하게 대답했다.“경실 아주머니 오늘 휴가 가셔서 집에 밥할 사람이 없어요.”요즘 일이 많아 피곤한 탓인지 두 사람은 서로 바라보며 씩 웃고는 계속 소파에서 꿈쩍도 하질 않았다.강서연은 책을 3분의 2 정도 읽었고 최연준은 자세를 바꾸어 그녀를 끌어안았다.창밖을 내다보니 오늘 날씨가 온 하루 집에 있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화창했다.그때 최연준의 배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들렸다. 강서연이 웃으며 일어나 밥하려는데 최연준이 그녀를 잡았다.“힘들게 밥하느라 하지 말고 우리 나가서 먹을까?”“네?”강서연이 씁쓸하게 웃었다.“난 더는 명황세가의 밥을 먹고 싶지 않아요...”최연준은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주방장이 이 소리를 들었더라면 아주 치욕적이라고 생각할 거야.”“난 그 뜻이 아니라...”강서연이 다급하게 설명했다.“너무 자주 가서 메뉴판까지 다 외울 지경이에요. 가끔 입맛을 바꿔주는 것도 나쁘지 않죠.”“그래요? 사모님 요구가 아주 높네요? 가끔 입맛도 바꿔줘야 해요?”최연준은 그녀의 턱을 올리고 그윽하게 쳐다보았다.“그럼 나도 바꾸고 싶어?”“가능하다면 바꿔보고 싶어요.”강서연은 웃으며 그를 밀어냈다.“당신...”그 한마디에 삐진 최연준은 그녀를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꽉 껴안았다.“장난 그만 쳐.”최연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입술을 적셨다. 배만 고프지 않았더라면 침대에서 그녀를 혼쭐냈을 것이다.“연준 씨, 우리 어디 가서 먹어요?”강서연이 고분고분한 태도로 물었다.“오늘 내가 쏠 테니까 연준 씨가 식당 골라요.”“그럼...”최연준은 휴대 전화를 꺼내 검색했다.“이 집 가보자.”강서연은 고개를 내밀고 확인했다.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핫한
“조금만 더 줘...”“안 돼요!”“여보, 조금만.”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다 큰 남자가 애처럼 유치하게 왜 저래...”“저 여자는 아들을 데리고 나왔나 봐. 하하.”그들의 수군거리는 소리에 강서연은 웃음을 터트렸다. 최연준은 그녀의 눈치를 힐끗 살피더니 마지막 동물 쿠키 한 조각을 내려놓고 단정하게 앉았다.번호가 불리는 속도가 여전히 매우 늦었다. 종업원은 손님들에게 머리띠를 나눠주기 시작했다.앞에서 기다리던 한 커플은 이미 머리띠를 하고 있었는데 안에 전구가 반짝거리는 머리띠였다.해 보고 싶어 안달 나 하는 강서연의 모습에 최연준은 큼지막한 손으로 그녀의 두 눈을 가렸다.“뭐 하는 거예요?”“보지 마.”최연준이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달라고도 하지 마.”‘난 저런 거 죽어도 안 해. 너무 창피해!’“두 분, 안녕하세요.”종업원은 두 사람에게도 나눠주었다.“어떤 스타일 좋아해요? 울트라맨과 몬스터 어때요?”강서연은 최연준의 손을 떼어내려 애를 썼다. 하지만 최연준은 끄떡없었고 싸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우린 필요 없어요.”“주세요!”“안 주셔도 돼요.”종업원은 멋쩍은지 마른기침을 했다.“이건 저희 가게에서 드리는 서비스예요. 점장님께서 손님들이 오래 기다리신다고 지루해할까 봐...”“아무래도 연준 씨의 블랙 카드를 다시 가져와야겠어요.”이 협박은 그 무엇보다도 효과가 짱이었다. 최연준은 결국 하는 수 없이 손을 내려놓았다. 그에게서 벗어난 강서연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종업원이 건네는 울트라맨과 몬스터 머리띠를 받았다.“하려면 혼자 해. 난 싫...”하지만 그가 싫다고 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차갑고 도도하기만 하던 최연준이 사람들 속에서 줄을 선 것도 모자라 머리에는 몬스터 머리띠까지 하고 앉아있었다.강서연이 버튼을 누르자 몬스터가 반짝이기 시작했는데 그의 체념한 듯한 표정과 어우러지니 그야말로 감격스러운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그 모습에 강서연은
최연준은 시무룩한 얼굴로 배경원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연준 형.”배경원은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움찔했다. 지금 이 순간 최연준은 그를 모른 척하고 싶었다.‘누구세요?’최연준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그 한마디를 꾹꾹 누르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응.”배경원은 그가 왜 이러는지 알 리가 없었다. 임수정은 종업원에게서 같은 머리띠를 건네받고 배경원에게도 하나 건넸다.잠시 후 드디어 그들 차례가 되었고 네 사람은 한 테이블에 앉았다.“어쩌다가 만났는데.”강서연이 웃으며 말했다.“오늘 드시고 싶은 거 다 시켜요. 제가 쏠게요!”“그건 안 되죠.”배경원도 따라 웃었다.“형수님의 돈을 써서야 하겠어요? 쏴도 제가 쏴야죠.”그들은 메뉴판을 펼치고 메뉴를 고르기 시작했다. 강서연은 임수정이 밖으로 나온 걸 보고 무척이나 기쁜 마음에 그녀의 손을 잡고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요즘 많이 좋아졌죠? 병원은 정기적으로 가요? 정재 아저씨가 언제쯤이면 약을 끊을 수 있는지 알려주던가요?”옅은 미소를 짓는 임수정의 두 눈은 샘물처럼 맑고 반짝였다.“수정 씨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어요.”배경원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사랑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요즘 병원에 갈 때도 저와 함께 가요.”“네.”강서연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수정 씨가 많이 좋아진 게 경원 씨의 공이 아주 컸네요?”배경원은 머리를 긁적이며 배시시 웃었다. 최연준의 차가운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쟤는 어릴 적부터 뭘 제대로 한 게 없지만 이 일 하나만은 아주 잘했어.”“형, 그만 좀 디스해요.”배경원은 억울하다는 듯 그를 노려보았다.“제가 형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데요. 예전에 형의 감방 동기 역할도 했었잖아요.”감방 동기라는 소리에 강서연은 박장대소했다. 무슨 말인지 알 리가 없었던 임수정은 막연한 얼굴로 배경원을 쳐다보았다.“감방 동기요?”“아주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나중에 천천히 들려줄게요.”임수정
그와 같은 재벌 집 남자라면 밖에 다른 여자가 있고 또 혼외 자식이 있는 것도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그나저나 정재 아저씨에게 진짜 애가 있다면 어떻게 엄마에게 소개해 주지?’강서연은 풀이 죽은 모습으로 회를 집어 먹었다. 그런데 최연준의 표정이 어딘가 이상했다.그는 임수정을 보며 어두운 목소리로 물었다.“진짜 딸이 있는 게 확실해요?”“확실하진 않아요.”임수정이 어깨를 들먹였다.“아무튼 자기 집 계집애 때문에 저의 병을 치료해 준다고 했어요. 정확히 누구인지는 저도 모르죠.”최연준은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강서연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얼마 전 강서연과 함께 갤러리에 갔던 때가 떠올랐다. ‘반딧불의 빛’이라는 작품이 가장 눈에 띄는 곳에 걸려있었는데 강서연은 어머니의 작품이라고 그에게 자랑했었다.최연준은 작품의 아래 끝에 문희라고 적혀있는 이름을 발견했다.“장모님 성함이 문자 희자셔?”장모님과 알고 지낸 지 오래됐지만 이름을 안 건 그때 처음이었다.“네.”강서연이 웃으며 대답했다.“윤문희예요.”‘윤문희... 다 성이 윤씨야.’성남에 남양에서 건너온 약이 있었는데 약병에 아주 정교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강서연의 어머니가 강서연에게 준 나무 상자에 그 무늬가 새겨져 있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윤정재, 윤문희.게다가 그 약은 윤제 그룹 계열사인 재희 제약에서 제조한 것이다.재는 윤정재의 재이고, 희는 그가 사랑했지만 함께 할 수 없었던 여자라면...최연준은 갑자기 발을 헛디딘 것처럼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머릿속에 온통 이 생각뿐이라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젠 단서도 명확해졌고 확인하는 일만 남았다.그는 강서연을 집에 데려다준 후 회사에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김자옥을 찾으러 부리나케 어진 엔터테인먼트로 달려갔다.서류 한 뭉치를 들고 복도를 거닐던 김자옥은 마주 향해 오는 최연준과 하마터면 부딪칠 뻔했다.“최연준, 깜짝 놀랐잖아!”“엄마...”다른 걸 신경 쓸 겨
“정 선생님, 아직도 진실을 말할 생각이 없으신가요? 영미가 대체 얼마나 좋은 조건을 내걸었기에, 백인서를 모함하는 데 가담한 거죠?”정대명은 눈동자를 굴리며 머뭇거렸다. 어디까지 입을 열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당신이 인서의 양아버지라는 말은 사실입니까?”“그... 그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진실이야!”“그렇다면 딸을 키운 정도 있을 텐데 왜 모함하려 하신 거죠?”정대명의 몸이 떨렸고 시선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정 선생님, 이제 영미조차도 당신을 지켜줄 수 없습니다. 진실을 말하지 않으신다면 감옥에서 나올 수 없게 될 겁니다!”그때, 바깥에서 소연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소아는 정대명을 매섭게 노려본 뒤, 사람을 시켜 문을 잠그도록 지시했다.소연화는 최군형과 최지용을 데리고 들어왔다.“여보!”최군형은 강소아를 보자 반갑게 웃으며 말했다.“권온유와 정승우, 두 아이 모두 찾았어!”“정말인가요?”“그래.”최지용도 후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드디어 인서의 억울함을 풀 수 있게 됐어.”“인서는 원래부터 결백했어요!”강소아가 웃으며 말했다.“누가 아이들을 찾았나요?”“아이들이 어찌나 영리하던지, 스스로 빠져나왔더군.”최군형이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그날 밤, 우리가 정대명을 찾았을 때, 정대명의 머리가 다쳐 있었던 거 기억하지? 그 틈을 타 도망쳤대. 길에서 착한 운전사분을 만나 도움을 받았고 그 운전사가 집까지 데려다줬어. 차 안에서 정승우가 휴대전화를 빌렸는데 다행히도 권온유가 자기 엄마 전화번호를 기억하고 있어서 덕분에 바로 연락할 수 있었어. 아마 20분 후면, 두 아이 모두 안전하게 권씨 집안에 도착할 거야.”“정말 놀랍군요...”강소아는 감탄이 담긴 눈빛으로 답했다.“이렇게 어린아이들이 그런 상황 속에서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니. 역시 아이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어요! 저도 이제부터 가원이에게 제 전화번호를 외우게 해야겠어요!”“그런 말 하지 마!”최군형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집으로 돌아온 영미의 마음속엔 불안이 가득 찼다. 그러다 문득 시장 선거의 마지막 대결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이 스쳤다.지금이라도 폭탄 같은 뉴스가 터진다면 사람들의 관심은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쏠릴 것이 분명했다.그리고 그 뉴스가 백인서와 관련된 것이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영미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가에 자신감 넘치는 차가운 미소를 띠며 휴대전화를 들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기자와의 약속을 잡았다.“조순철 씨의 외손녀가 실종된 사건, 알고 계십니까?”카페의 한구석, 눈에 잘 띄지 않는 자리였다. 영미는 얼굴을 거의 가릴 만큼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맞은편에는 기자는 커피잔을 천천히 저으며 영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이건 단순한 어린이 실종 사건이 아닙니다. 누군가 계획적으로 벌인 일입니다.”“영미 씨.”기자가 녹음기를 켜며 말했다.“아시는 내용을 모두 말씀해 주세요. 자료는 제가 정리해 영미 씨 말씀대로 보도하겠습니다.”“좋아요.”영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제가 알고 있기로, 권씨 가문의 어린 딸을 데려간 사람은 바로 그 공익학교 프로젝트에 있던 한 학생입니다. 그리고 그 학생은 백인서의 지시를 받았죠!”녹음기를 쥔 기자의 손이 떨렸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강소아는 방문 앞을 서성이며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그 방에는 정대명이 갇혀있었는데 강소아가 아무리 질문해도 정대명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육경섭은 딸이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보고 희철을 시켜 예전 식으로 정대명을 다루려 했지만, 강소아가 막아섰다.현재 육씨 가문은 이미 정식 사업가로 자리 잡은 상황이었다.과거의 폭력적인 방식은 더 이상 적합하지 않았다.강소아는 육경섭을 설득해 물러서게 한 뒤, 다음 수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소연화가 급히 뛰어왔다.“아가씨, 이것 좀 보세요!”소연화는 휴대전화를 내밀었다.화면에는 뉴스가 떠 있었고 제목은 눈에 띌 정도로 충격적이었다.[조씨 공익학교에서 터진 충격적인 추문, 관리직
가끔 차가 지나갔지만, 정승우가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어도 아무도 멈춰 서지 않았다.어둠이 내려앉았고 기온은 점점 내려가고 있었다.며칠 동안 육체와 마음이 지친 권온유는 이제 무너질 듯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정승우는 어쩔 수 없이 온유를 등에 업고 비틀거리며 길을 걸었다.“오빠...”권온유는 울먹이며 말했다.“해가 졌어요. 저... 무서워요.”“괜찮아.”정승우는 뒤돌아 미소를 지었다.“오빠가 집에 데려다줄게.”“오빠, 우리 그냥 돌아가요...”“뭐라고?”권온유의 시선이 정승우의 피로 물든 발에 닿았다.“발이 많이 아프죠?”권온유의 작은 얼굴 위로 눈물이 두 줄기 흘러내렸다.“오빠, 저 내려주세요. 그냥 돌아가요...”“온유야?”권온유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그 집이 낡고 춥긴 해도... 오빠 발에서 피가 나진 않잖아요!”정승우는 멍하니 잠시 굳어 있다가 그 어눌한 말 속에 담긴 다정함을 깨달았다.이 작은 아이는 납치당했던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라도 정승우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정승우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작은 새들이 집으로 향해 줄지어 날고 있었다.정승우는 온유를 데리고 반드시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다짐했다.“바보야.”정승우는 온유를 내려놓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난 하나도 안 아파. 그리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어.”“그 사람이... 우리를 때릴까요?”“그럴 거야.”정승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어린 시절, 정대명에게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탈출할 때 그의 뒤통수를 내려친 한 방은 그동안의 빚을 모두 갚은 셈이었다.“그런데 오빠, 그 사람은 오빠 아빠잖아요?”권온유는 작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하지만 오빠가 아프다고 제가 말했을 때 오빠 아빠가 들어왔었잖아요.”정승우는 쓴웃음을 지었다.자신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정대명이 들어온 것은 아마 걱정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죽으면 함께 나쁜 짓을 할 사람이 없어질까 봐서였었다.정대명은 단지
차 안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영미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정대명에게 다가갔다. 그의 머리 아래로 어두운 핏자국이 퍼져 있었고 그 흔적은 이미 굳어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의 코 밑에 손을 가져다 댔다.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영미는 떨리는 마음을 억누른 채 차가운 눈빛으로 정대명을 내려다보다가 거칠게 발길을 휘둘렀다.“일어나요!”강소아와 최군형도 다가와 공장 안을 살폈지만 안은 고요히 비어 있었다.“아이들은요?”“아이고...”정대명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살려줘, 살려줘... 저 괘씸한 녀석이!”“정대명 씨!”영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했다.어쨌든 이번 일은 영미가 자신 있게 권온유의 행방을 안다고 장담한 일이었다.영미는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함께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확신에 차 말했다.그런데 지금... 정대명은 다쳐 쓰러져 있고 두 아이는 사라졌었다.백인서를 함정에 빠뜨리려던 영미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것이다.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정대명은 도움을 청하려다 영미가 눈짓을 주는 것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영미의 눈길을 따라 보니 최군형과 강소아도 함께 와있었다.정대명은 예전에 영미가 했던 경고가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아는 척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정대명은 머리를 살짝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신이 정대명인가요?”최군형이 다가가 물었다.정대명은 말끝을 흐리며 최군형의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백인서의 양아버지시고?”최군형은 다시 물었다.“당신이 당신 아들과 함께 권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게 맞나요?”“아니야, 나 아니야!”정대명은 크게 당황하며 손을 흔들었다.“이봐, 동생, 난 억울해! 내 아들 녀석이 나를 해치려고 했어! 내 머리를 봐, 그 자식이 벽돌로 내리쳤다니까!”“그만해요!”영미는 정대명의 말이 길어질수록 상황이 불리해질 것을 우려해 정대명을 노려보며 더 이상 말을 못 하게 했다.강소아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들의 서툰 수법이 한심하기만
경찰서 밖에서 최지용은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한참을 걷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젊은 경찰관이 안에서 뛰어나오고 있었다. 최지용은 급히 다가가며 말했다.“정호야!”정호라는 젊은 경찰관은 최지용을 보자 반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 녀석!”최지용은 정호에게 다가가 가볍게 주먹을 툭 날리며 말했다.“도대체 무슨 일이야? 왜 사전에 알려주지 않은 거야?”정호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방금 최씨 집안에서 백인서를 데려간 사람 중에 정호도 있었다. 최지용도 놀라웠지만, 영미 역시 경찰이 직접 찾아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떠나기 전, 정호가 살짝 눈짓을 보냈고 최지용은 그의 의도를 알아채 경찰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지용이 형.”정호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형수님께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잘 구분하고 계시니 문제없을 겁니다!”“도대체 누구 지시로 백인서를 여기로 데려온 거지?”“소아 아가씨예요!”정호는 어깨를 으쓱했다.“소아 아가씨가 갑자기 지시한 거라 사전에 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최지용은 살짝 놀랐다. 강소아의 지시라니.“형수님께서도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으니까요. 그 아이가 실종되기 전에 형수님께서 만난 적이 있거든요. 경찰이 형수님을 데려가서 조사하는 건 당연한 절차입니다.”최지용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피식 웃음을 지었다.강소아가 이런 ‘당연한 절차’를 이용해 백인서를 경찰서로 보낸 이유는 경찰서야말로 가장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또 누군가가 음모를 꾸며 백인서에게 덮어씌우려 한다 해도 경찰서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경찰서 안에는 일을 봐주는 사람들도 있으니 백인서가 여기서 며칠 지내는 동안 힘든 일 없이 외부의 소란도 피할 수 있는 셈이었다.최지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강소아는 정말 자매를 위한 배려가 남달랐다. 이렇게까지 배려심 깊은 방안을 생각해 내다니!“지용이 형.”정호가 계속해서 말했다.“도련님께서
영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소아 언니, 저를 믿지 않으세요?”“난 오직 사실만을 믿어.”“권씨 가문의 딸이 실종된 사건에 백인서 씨의 양아버지와 남동생이 관련되었어요, 그게 바로 사실이에요!”강소아는 순간 멍하니 있다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려 했다.세상에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다 있나 싶었다.호텔 뒷뜰에 있는 그 CCTV가 정말 완전히 고장 났다고 생각하는 걸까? 육씨 가문과 최씨 가문이 힘을 합쳐 그 고장 난 CCTV 하나도 못 고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최군형은 강소아의 어깨를 가볍게 눌러 안심시키며 슬며시 휴대전화를 건넸다.강소아는 화면을 확인했다. 최군형의 부하가 보낸 메시지였다.“도련님, CCTV 데이터를 복구 중입니다. 곧 진실이 밝혀질 겁니다!”강소아는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영미가 이렇게까지 백인서를 몰아세우는 걸 보니 마음 한구석에 무언가 꺼림칙한 게 남아 있는 것 같았다.어차피 꼬리가 저절로 드러날 것이었기에 그저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다.바로 그때, 집사가 다소 당황한 얼굴로 방에 들어섰다. 집사의 뒤에는 몇 명의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신분을 밝힌 후 방 안을 둘러보며 엄숙한 목소리로 물었다.“여기 백인서 씨가 계십니까?”표아정은 등을 꼿꼿이 펴고 대답했다.“경찰관님께서 여긴 무슨 일로 오셨나요?”“당신이 백인서 씨인가요?”“저는...”“백인서 씨가 납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신고를 접수했습니다!”“뭐라고요?”백인서는 얼굴이 창백해졌다.“백인서 씨, 조사에 협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희와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권온유가 납치된 지 하루가 지났다.그동안 정대명은 단 한 번 음식을 가져왔는데, 그것도 차갑게 식은 죽 한 그릇과 딱딱한 빵 한 조각뿐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귀하게 자란 권온유에게 이런 음식은 처음이었다. 울고 싶었지만, 감히 울지 못하고 그저 눈물을 참으며 빵을 조금씩 뜯어 먹고 있었다.정승우는 그런 온유의 모습을 보고
“아줌마,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그럼, 제가 알아낸 사실을 전부 말씀드릴게요!”영미는 입가에 교만한 미소를 띠며 백인서를 차갑게 한 번 쳐다보았다.“백인서 씨의 친어머니인 백홍은 인신매매범이었다는 사실, 모두 아셨나요? 백인서 씨의 어머니는 백인서를 정대명의 집에 맡겼고... 흥! 정대명의 아내도 백홍이 납치해 왔다는 소문이 있어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잖아요. 제 생각엔... 인신매매범의 딸이라면 그런 일쯤은 익숙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은 권온유의 실종이 정말로 백인서 씨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시나요?”“영미!”강소아가 나서며 분노를 가득 담아 소리쳤다.“허위 사실을 퍼뜨리지 마!”“소유 아가씨, 억울하네요!”영미는 강소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제가 이렇게까지 조사한 건 다 아가씨를 위한 거예요! 딸도 있는 사람이 백인서를 곁에 두고도 마음이 놓이세요?”“그만해!”최지용이 크게 소리쳤다.백인서는 몸을 떨며 믿기지 않는 눈으로 최지용을 쳐다보았다.그러나 최지용의 얼굴에는 의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최지용은 굳건한 눈빛으로 뒤에 있는 백인서를 지키고 있었다.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처럼 백인서를 아끼고 있었다.백인서는 코끝이 찡해지며 본능적으로 최지용의 손을 꼭 붙잡았다. 최지용의 따스한 손은 백인서에게 큰 용기를 주었고 그 온기가 어둠의 두려움을 잊게 해주었다.최지용은 백인서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고 다시 영미를 바라볼 때는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영미야.”최지용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두 집안의 관계를 생각해서 그저 넘어가는 거야. 더 이상 선을 넘지 마.”최군형도 나서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요, 백인서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모르겠어요? 영미 아가씨, 우리 최씨 가문 사람들을 바보로 생각하는 건 아니죠?”영미는 순간 긴장했다. 최군형의 말 속엔 어딘가 숨은 뜻이 있는 듯했다.최군형의 깊고 복잡한 눈빛을 파악하기 어려웠다.표아정은 천천히 일어나 어깨에 걸친 숄을
백인서는 복잡한 눈빛으로 최지용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그때 최지용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표아정이었고 다급한 목소리로 서둘러 돌아오라고 재촉했다.최지용은 결국 어머니의 말에 따라 백인서를 데리고 최씨 집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넓은 거실에는 최군형과 강소아도 나와 있었고 모두 엄숙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백인서가 들어서자, 표아정이 백인서를 올려다보며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다.강소아는 백인서와 눈을 마주치며 단호하게 미소 지었다.백인서가 의아해하던 찰나, 영미가 천천히 밖에서 걸어 들어왔다.“아줌마, 지용 오빠. 제가 권온유의 행방을 알아냈어요.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뭐라고?”최지용이 놀라서 물었다.“네가 어떻게 아는데?”영미는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지용 오빠, 특수부대 출신이라고 정보가 우리보다 더 빠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최씨 가문은 만능이 아니에요, 최씨 가문도 모르는 정보가 있다고요.”표아정은 가볍게 기침하며 차분히 상황을 지켜보았다.최군형과 강소아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떤 일이 일어날지 주목하고 있었다.최지용의 이마에는 점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미의 눈에는 한 줄기 교만한 빛이 번졌다.영미는 오는 길에 이미 모든 계획을 짰다. 정대명의 말이 맞았다. 누구를 훔치든 상관없었다. 인신매매범의 딸인 백인서가 아이들을 해치러 다닌다는 누명을 씌우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하면 백인서는 모두의 신뢰를 잃게 될 터였다.영미는 이제 한 아이의 엄마가 된 강소아가 인신매매범을 곁에 둘 리 없다고 믿었고, 최지용 역시 이 사실을 알면 더는 백인서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래서 영미는 정대명을 배신하기로 마음먹었다.영미는 권온유를 넘기고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한패가 되어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주장할 계획이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백인서는 변명의 여지도 없이 궁지에 몰릴 것이었다!“지용 오빠.”영미는 고개를 돌려 최지용을 바라보며 한 글자씩 천천히 말했다.“권온유는 정승
“그... 괜찮아!”정승우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권온유에게 말했다. 정승우는 이곳에서 권온유를 반드시 데리고 나가겠다고 결심했다.그런데 이때, 공장 문이 “쾅” 하고 열리더니 곧바로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정승우는 재빨리 권온유에게 눈짓했고 권온유도 알아채고는 즉시 땅바닥에 쓰러져 의식이 없는 척했다.정승우는 벽에 기대어 눈을 반쯤 감았다.“이 아이인가요?”영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맞아.”정대명은 영미를 흘깃 노려보며 묵묵히 대답했다.영미는 두 걸음 앞으로 다가서서 희미한 빛 속에 있는 아이를 살펴보더니, 곧 얼굴빛이 확 변했다.“이 아이... 혹시 권씨 집안의 막내딸 아니에요?”정대명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애초에 아이를 훔쳐 올 때 이 아이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 리가 없었다.“정대명 씨.”영미가 차갑게 웃으며 돌아보았다.“제가 최씨 가문 집안 아이를 훔쳐 오라고 했지, 권씨 집안 아이를 훔치라고 했나요? 이러고도 저를 속이지 않았다고요?”“그게...”정대명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영미 아가씨, 어차피 목적은 백인서를 곤경에 빠뜨리는 거잖아? 그러니 누구를 훔쳐 오든 상관없지 않아? 아이를 훔치기만 하면 유괴범이 되는 거니까.”이 말은 영미에게만 충격을 준 게 아니었다. 정승우의 귀에도 또렷이 들어왔다.“좋아요.”영미는 깊은숨을 들이마신 뒤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이 아이는 잘 지키고 있어요, 제가 다시 연락할 테니까.”...한편, 권씨 집안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권욱은 조순영을 탓하며 아이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했고, 조순영은 오열하며 남편을 원망했다. 조순영은 권욱이 바깥에서 여자와 부적절하게 얽히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라고 했다.“헛소리하지 마! 사람들이 나한테 어떤 소문을 퍼뜨렸는지 잘 알잖아. 결혼 생활 내내 너한테 부끄러운 일 한 적 없어.”“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정말 떳떳하게 행동했다면 왜 사람들이 당신만 가만두지 않는 건데?”며칠 전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