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수는 떨리는 두 손으로 자료를 주어 한장 한장 훑어보았다.권민지가 휠체어 손잡이를 어찌나 꽉 잡았는지 피가 잘 통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임수정의 두 어깨가 파르르 떨리자 그녀는 어깨를 다독였다.임수정이 던진 자료는 전부 복사본이어서 현장에 있는 사람들 모두 하나씩은 주워서 볼 수 있었다.유전자 검사 결과와 상처 진단서를 본 사람들은 임정수와 임나연을 경멸 섞인 눈빛으로 쳐다보았다.“위선자!”“사람이 어찌 그런 짓을!”초라한 모습으로 사람들 속에 서 있는 임정수와 임나연은 마치 교수대에 묶인 채 심판을 받는 것 같았다.“그동안 언니가 절 어떻게 괴롭혔는지 아빠는 모르죠?”임수정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아니면 아빠는 진작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묵과한 건가요?”“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임정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수정아, 너도 아빠 딸이야. 아픈 너를 아빠는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았어...”“내 딸에게서 손 떼요!”권민지는 그를 밀어내고 삿대질까지 했다.“당신은 아빠 노릇을 할 자격이 없어요. 심지어 인간도 아니에요.”“민지야.”“아빠, 저 사람들 신경 쓰지 말아요.”임나연이 그를 부축했다.“흥, 고작 이딴 걸로 날 무너뜨리려고? 꿈 깨! 나 임나연이 이리 쉽게 무너진다면...”“무너진다면 뭐?”그때 누군가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화들짝 놀란 임나연이 고개를 돌려보니 임우정이 그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임우정의 안색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힘 있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임우정은 임나연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이 그녀를 태워버릴 것만 같았다.강서연은 재빨리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나 괜찮아.”임우정은 강서연에게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다시 임나연을 보며 씩 웃었다.“오늘 당신이 무너지지 않으려고 어떻게 하는지 똑똑히 지켜볼 거야.”육경섭이 손을 흔들자 몇몇 경호원이 달려와 임나연을 단숨에 제압했다.“지금 뭐 하는 짓이야?”임나연이 고래고래 소
“그럼 수고 좀 해주세요, 장 국장님.”육경섭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장 국장이 손을 흔들자 부하들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임정수를 잡아들였다.임정수는 흉악하게 날뛰며 소리를 질렀다.“당... 당신 이 사람이랑 한패였어? 육경섭이 깡패인 거 몰라?”“임정수 씨.”장 국장이 차갑게 웃었다.“육 대표님은 정섭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자 영화나 드라마의 발전을 위하여 엄청난 공로를 세우신 분입니다. 내년에는 오성의 10대 걸출 청년의 후보에도 오를 수 있다고요. 임정수 씨의 뜻은 우리 시장님이 그 정도로 사리 분별을 못 한단 말씀인가요?”임정수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눈만 부릅떴다.“당신이 도망치지 못하게 육 대표님이 미리 와서 잡아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하지만... 저 사람들이 들고 있는 총 안 보여요?”“이 총들을 마침 바치려던 참이었어요.”육경섭이 웃으며 말했다.“국장님, 제 친구가 국경 쪽에서 경찰과 협력하여 무기 밀수를 하는 사람을 잡고 있거든요. 이 총들은 전부 다 제 친구가 거두어들인 겁니다. 지금 전부 국장님께 바칠게요. 오성의 시민으로서 의무를 다해야죠.”임정수는 완전히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정수 씨.”장 국장이 옅은 웃음을 지었다.“아까 육 대표님께서 총을 쏘라고 하셨나요?”“아... 아니요.”“그럼 정수 씨에게 실질적인 상해를 입히지 않았네요.”“그렇긴 하지만...”“오성의 시민들은 정의가 넘치는 육 대표님을 본받아야 해요.”“과찬입니다, 국장님.”육경섭은 그와 죽이 척척 잘 맞았다.“오성에 오고 나서 법을 잘 지키는 착한 시민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는걸요?”“아주 좋아요.”장 국장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저와 함께 경찰서로 갑시다. 조서를 작성해야 하니까 협조 부탁드려요.”...조서는 그저 형식에 불과했다. 다들 육경섭이 두려워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임우 그룹은 결국 다시 권민지의 손에 돌아왔다. 임수정의 병이 호전되기 전에 권민지가 맡기로 했다.임우정도
“예전에는 임나연이 우리 엄마만 다치게 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었어요. 어차피 전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이렇게 해서라도 엄마를 지켜주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임나연은 날이 갈수록 저를 점점 더 심하게 괴롭혀서 증거를 남기기 시작한 거예요. 매번 병원에 갈 때마다 몰래 진단서를 받았고 또 유전자 검사까지 했어요. 그런데 그날 저녁에...”임수정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지다가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결심을 내리게 한 사람을 만났죠.”강서연은 그 사람이 바로 배경원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만약 그날 저녁이 없었더라면 임수정은 복수를 갈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배경원을 만난 덕에 그녀의 어두운 인생에 한 줄기의 빛이 들어왔고 모든 걸 알릴 용기가 생긴 것이었다.임수정이 나지막이 말했다.“그 사람을 만난 후로 이 세상에 저의 존재를 알리고 싶었고 또... 그 사람 곁에 있고 싶어졌어요.”강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고 코끝이 찡했다.“경원 씨는 절대 수정 씨를 배신하지 않아요.”강서연은 그녀의 두 눈을 지긋이 쳐다보았다.“수정 씨는 지금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어요.”임수정이 히죽 웃었다. 햇살이 그녀의 미소를 더욱 밝게 비춰주었다. 이십여 년 동안 가장 아름답게 핀 그녀의 웃음꽃이었다....한차례 폭풍이 휩쓸고 간 후, 최재원은 강서연에게 만남을 청했다.“가기 싫으면 가지 않아도 돼. 할아버지에게는 내가 얘기할게.”최연준은 강서연을 품에 안고 귓가에 속삭였다.한창 귤껍질을 까고 있던 강서연은 귤 한 알을 그의 입에 밀어 넣었다. 새콤달콤한 귤이 입안을 적시면서 갈증이 확 가시는 것 같았다.그가 더 달라고 입을 벌리던 그때 강서연이 움직임을 멈췄다. 최연준은 잠깐 멈칫하다가 다시 입을 다물고 다정하게 말했다.“무슨 결정을 하든 내키지 않는 건 절대 하지 마.”강서연은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가볍게 웃었다.“연준 씨 할아버지를 뵈러 가는데 뭐가 내키지 않을 게 있어요?”최연준이 잠깐 멈칫했다.“할아버지께서 날 먼저 보자고 했어요.”
“만지지 마.”윤문희는 그녀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이 안에 딱 두 개밖에 없어. 망가뜨리면 다시 만들어야 한단 말이야.”“엄마...”강서연은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할아버지를 뵈러 가는데 왜 이걸 가져가야 해요? 저도 몇 번 못 먹어봤다고요.”“이 녀석.”윤문희가 피식 웃었다.“우리 그쪽에서는 어른을 공경할 때 다 이렇게 했어.”“우리 그쪽이요?”강서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자신의 고향이 강주라고 알고 있었다. 윤문희는 그제야 괜한 소리를 많이 했다는 걸 알아채고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가져가기 싫으면 됐어.”그녀는 계속 말을 이었다.“다른 선물들도 다 귀한 거니까 최씨 가문에서 널 업신여기진 않을 거야.”그러고는 묵묵히 방으로 돌아갔다.강서연은 거실에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얼굴을 찡그렸다....약속 당일, 야근하려 했던 김자옥은 미팅을 두 개나 취소하고 최상 빌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가는 길에 최연준에게 전화하여 한바탕 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인마, 서연이가 네 할아버지를 만나기로 했다며? 왜 나에게는 얘기하지 않았어?”최연준은 어안이 벙벙했다.“그걸 왜 엄마에게 얘기해요? 와서 소란을 피울 게 뻔한데.”“불효자식 같으니라고!”김자옥은 미친 듯이 액셀을 밟았고 노란색 신호등이 반짝일 때도 아슬아슬하게 건너갔다.“네 할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몰라서 그래? 너와 임나연을 계속 붙여놓으려고 했잖아. 임씨 가문에 일이 터지자마자 서연이를 만나겠다는 건... 무슨 음모가 있는 게 틀림없어. 연준아, 네 할아버지 혹시 임씨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서연이를 협박하는 건 아니겠지?”최연준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한편으로 엄마의 풍부한 상상력을 감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설명했다.“엄마, 할아버지가 노망이 난 것도 아니고 임나연이 오성에서 쫓겨났는데 그럴 리가 있겠어요?”“난 그 노인네가 젊었을 때부터 나중에 치매에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어.”최연
두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누가 같이 왔대?”“누가 같이 왔대요?”상황을 알 리가 없는 최연준은 답답하기만 했다. 두 사람의 표정을 봐서는 방금 한바탕 치열하게 싸운 것 같았다. 그리고 아까 이쪽으로 다가올 때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는데 다름 아닌 그들이었다.최연준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두 사람 사이에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나?’“이봐요!”윤정재는 그를 보자마자 두 눈을 부릅떴다.“왜 아직도 여기 있어요? 오늘 여자친구가 집에 인사하러 온다면서요?”“안 그래도 지금 데리러 가려던 참이었어요.”“얼른 안 가고 뭐 해요!”윤정재는 마음 같아서는 그의 엉덩이라도 확 걷어차고 싶었다.“회장님.”최연준이 눈살을 찌푸렸다.“그나저나 여긴 어떻게...”“길을 잘못 들어섰어요.”윤정재는 눈을 희번덕거리고는 다시 차에 올라탔다. 그의 차가 멀어지고 나서 최연준은 의아한 눈빛으로 김자옥을 쳐다보았다.그런데 그가 입을 열기 전에 김자옥이 먼저 말했다.“재수 없어.”“엄마,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대낮에 귀신을 봤어.”최연준은 어이가 없었다.“엄마, 혹시 윤정재 회장님을 알아요?”김자옥은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최연준은 두 사람 사이에 말 못 할 과거가 있다는 걸 더욱 확신했다.“엄마?”그는 갑자기 뭔가 깨달은 듯 표정이 확 굳어졌다.“설마 저 사람 때문에... 그때 이혼한 거 아니죠?”김자옥은 그를 노려보며 냅다 따귀를 후려갈겼다.“이 엄마를 뭐로 보고. 내가 바람을 피워도 저런 사람과는 안 피워!”“그럼 대체 어떻게 아는 사이예요?”“그건...”김자옥은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더는 과거 일을 꺼내지 않고 아이들에게도 얘기하기 싫다던 윤문희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녀는 조용히 살고 싶다고 했었다. 하여 김자옥은 마른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손을 내저었다.“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잠깐 안 좋은 일이 있었어... 아무튼 저 사람과 너무 예의 차릴 필요 없어.”최연준은 더욱 어리둥절해졌고 웃지도 울지도
최재원의 서재는 마치 도서관처럼 아주 컸다. 책장은 천장에 거의 닿을 정도로 높았고 여러 분야 전문가들의 서적이 가득했다.책들이 빼곡히 진열되어 있어도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메아리 소리가 들렸다.소파에 앉은 강서연은 떨리는 마음에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최연준은 그녀와 깍지를 끼고 위로의 웃음을 지어 보였다.최재원은 한복을 입고 책상 뒤에 앉아있었다. 연세가 지긋했지만 강건하고 활력이 넘쳐 보였다. 강서연을 아래위로 훑어보던 그의 눈빛이 어딘가 복잡했다.“차 마셔요, 서연 씨.”최재원은 그래도 나름 예의를 갖췄다.강서연은 차를 마시기 전 고개를 들어 최연준이 어떻게 마시는지 본 다음 그대로 따라 하며 한 모금 홀짝였다.최재원은 강서연이 머리가 좋은 아이라는 걸 보아냈다. 거칠고 무모하지 않았고 당돌하지도 않았다. 최연준이 옆에 있어도 여전히 예의 바른 모습이었고 어른 앞에서 그와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최연준이 편을 들어줄 거라는 생각에 함부로 행동했을 것이다.최재원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번졌다.그는 강서연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가 무슨 질문을 하든 강서연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했다.잠시 후 서재에서 나온 강서연은 긴장했던 마음이 풀리면서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그렇게나 긴장했어?”최연준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까 할아버지께서 당신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았어.”“그래요?”하지만 강서연의 생각은 달랐다. 이런 집안의 어른은 보통 자기주장이나 고집이 세서 한 사람에 관한 생각을 쉽게 바꾸지 않는다.“아무래도 당신을 받아들인 것 같아.”“예전에도 안 받아들인 건 아니었죠.”강서연이 장난스럽게 웃었다.“연준 씨 내연녀가 되라고 하셨잖아요.”“당신...”최연준이 두 눈을 부릅뜨며 그녀를 간지럽히려 하자 강서연이 그를 말렸다.“연준 씨네 집에서는 이러지 말아요.”“알았어.”최연준은 음흉하게 웃으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운전기사는 헛웃음을 지었다. 저도 모르게 핸들을 해원 별장 쪽으로 틀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명황산에서 둘째와 셋째 사이의 원한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아닙니다, 아니에요.”운전기사는 재빨리 핸들을 틀었다.“저긴 별로 좋지 않은 곳이에요. 가까이 가면... 부정 타요.”“그래요?”강서연은 별로 믿지 않는 눈치였다.‘건물은 나름 이쁘고 화려해 보이는데? 저기 안에도 할아버지가 예뻐하는 자손이 살고 있겠지?’“서연 씨, 다른 곳도 보여드릴게요...”그런데 운전기사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옆길에서 누군가가 갑자기 튀어나왔다.화들짝 놀란 운전기사는 다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관성 때문에 강서연은 하마터면 앞 좌석에 부딪칠 뻔했다.마음을 가라앉히고 차 앞에 나타난 사람의 얼굴을 본 순간 그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강유빈?”“서... 서연아!”헝클어진 머리에 메이크업도 하지 않은 강유빈은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보기 흉할 정도로 여윈 게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서연아.”강유빈은 유리창을 마구 두드렸다.“서연아, 잠깐 내려. 너에게 할 얘기 있어.”강서연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며 운전기사에게 차 문을 잠그라고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강유빈은 다급하게 차 문을 열려 했다.“문 열어, 서연아.”문이 열리지 않자 미친 듯이 유리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뭐라 해도 우린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자매야. 서연아, 언니 좀 살려줘.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둘 거야?”강서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가 막연하게 쳐다보자 운전기사가 마른기침을 두어 번 했다.“제 말이 맞죠? 이쪽에만 오면 부정 탄다니까요. 제가 알아서 따돌릴게요.”“대체... 왜 저러는 걸까요?”운전기사가 대답하기 전에 밖에서 처참한 비명이 들려왔다.강유빈이 몇몇 경호원에게 끌려 나가고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그녀의 목소리가 허공에 맴돌다가 점차 사라졌다. 강서연은 저도 모르게 소름이 쫙 돋았다.“서연 씨, 사실... 저도
비록 마음속으로는 최씨 집안이 이런 대접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있어야 할 예절은 조금도 소홀할 수 없다.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시비를 걸게 해서는 안 된다.윤정재는 만약 강서연이 제대로 준비를 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버지로서 당연히 준비를 해줘서 반드시 영감님을 놀라게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윤정재는 이미 마음속으로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몇백 번을 생각했지만 강서연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강서연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당연히 빈손으로 오지 않았어요. 우리 어머니께서 선물을 준비해줬어요!”윤정재는 잠시 멈칫하고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어머니?”“네.”윤정재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어머니께서 무엇을 준비하셨어요?”강서연은 준비한 것들을 몇 개 말했는데 전부다 남양 쪽에서 여자가 처음으로 남자 집에 갈 때 가지고 갈 물건이었다.윤정재는 코끝이 찡했다. 윤문희가 딸을 위해 준비한 것이니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맞아요. 하나 더 있어요.”강서연은 윤정재를 보며 말했다.“어머니께서 직접 만드신 녹옥떡도 있어요.”윤정재는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그는 강서연에게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침묵에 잠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심지어 안부의 말도 할 수가 없었다.윤정재는 무슨 신분으로 그런 것을 물을 수 있을까?김자옥의 말처럼 강서연이 그동안 자신이 했던 일들을 알게 되면 아저씨라고도 불러 주지 않을 것이다.“아저씨, 왜 그러세요?”윤정재는 갑자기 정신을 차렸고 고개를 숙여 황급히 설명했다.“아니에요... 아까 바람이 불어서 눈에 먼지가 들어갔나 봐요.”“서연 씨.”방한서가 멀지 않은 곳에서 급히 달려와 윤정재에게 인사를 건넨 후 공손하게 강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도련님께서 먼저 집까지 모셔다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서연 씨, 차에 타세요.”“방 비서가 바래다주지 않아도 돼요!”윤정재가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제가 바래다주면 돼요!”“그게...”방한서가 어떻
“어떻게 소피아라는 걸 확신하죠?”배윤아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부모님이 회사의 핵심 자료를 제게 모두 맡기셨어요. 그런데 그걸 받은 지 이틀 만에 공격을 당했죠. 이게 단순한 우연일까요?”임지강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그 자료들은 어디 있어요?”“아마 소피아가 가지고 있을 거예요. 그 자료들은 너무 중요해서 항상 제 곁에 두고 다녔거든요. 하지만 그날 제가 기절하고 다시 깨어났을 때, 가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다만...”“다만 뭐요?”“법인 도장은 가방 안에 없었어요.”배윤아는 미소를 지으며 약간 능글맞은 표정을 지었다.“법인 도장은 본사가 모든 자원을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이에요. 엄마가 제게 주자마자 저는 바로 군성이에게 맡겼어요. 지금 법인 도장은 최씨 가문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어요.”“그렇다면 소피아가 자료를 손에 넣더라도 아무 쓸모가 없겠군요?”배윤아는 확신에 차서 고개를 끄덕였다.“똑똑하네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었다.“배씨 가문 사람들도 다 무능하진 않나 보네요.”“임 선생님...”배윤아는 고개를 약간 숙이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오빠가 송윤지에게 잘못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는 임 선생님이 우리 가문에 복수하려고 저를 납치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아요. 선생님은 그런 수준 낮은 사람이 아니니까요.”임지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확실히 똑똑한 사람이네요.”그러나 배윤아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그런데... 정말 우리 오빠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요?”임지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임지강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가족들에게 안부 전화라도 주세요. 걱정을 많이 하고 계실 거예요.”“이미 군성이에게 연락을 했어요.”배윤아가 말했다.“군성이에게 조용히 아빠에게 알려 드리라고 했어요. 엄마는 충격을 받으시면 안 되니까요... 하지만 제 상황을 오빠에겐 비밀로 해야 해요. 오빠와 소피아는 제가 조 회장님에게 잡혀 있고 선생님이 일부러 복수를 위해 조 회장님을
“설마...”“소피아!”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이름을 입에 올린 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정말 소피아일 줄이야.”임지강이 담배를 꺼내 들었다. 조 회장이 눈짓을 하자 부하가 공손히 불을 붙였다.방 안은 금세 니코틴 냄새로 가득 찼고 임지강은 잠시 침묵하며 담배 재를 털어냈다.“아마... 조 회장님도 지금 저와 같은 처지겠죠.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했다는 누명을 쓰게 됐으니 말이에요.”“그러게 말이야.”조 회장은 차갑게 웃었다.“겉으로는 온갖 아부를 떨면서도 뒤에서는 이런 음모를 꾸미고 내가 배윤아를 납치했다고 소문까지 퍼뜨리고 있더군.”“회장님과 제가 가까운 사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의심의 화살을 제게도 돌리겠죠.”임지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면, 연루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겁니다. 저 때문에 저의 매형까지 연루되면, 배씨 가문과 육씨 가문의 사이도 틀어질 거고요.”“그 여자는 이런 식으로 우리 모두를 자기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조 회장님 생각은 어떻습니까?”“웃기지 말라 그래.”조 회장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임지강은 조 회장의 꽉 쥐어진 주먹을 발견했다. 그의 손등에는 화가 잔뜩 난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조 회장님.”임지강은 잠시 침묵한 뒤 부드럽게 말했다.“운산시 광산의 가격을 조작하도록 제가 이미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 두 광산은 이제 그렇게 가치 있는 자산이 아닙니다.”“알고 있어.”조 회장은 임지강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이 일은 원래 자네 복수를 위해 시작한 일이야. 자네의 화가 조금이라도 풀린다면 내 수고도 헛된 게 아니야. 하지만 문제는...”조 회장은 손짓으로 방 안을 가리켰다.그때 방 안에서 배윤아가 몸을 뒤척이며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임지강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배윤아와 단둘이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조 회장은 잠시 망
임지강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차가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그를 철저히 파산시키고 싶습니다.”“배씨 가문 전체를 함께 무너뜨리겠다는 뜻인가?”조 회장이 묻자, 임지강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말하면, 예전의 저라면 그렇게 했겠죠. 하지만 지금은...”“지금은 마음이 약해졌다는 건가?”조 회장이 비웃듯 웃으며 말했다.“내가 알던 임지강은 그런 자비를 베풀 인물이 아닌데?”임지강도 미소를 지었다.그 웃음 뒤로 누군가의 맑은 눈빛과 깨끗한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이번 일은 송윤지가 부탁해서 오게 된 것이었다.송윤지는 배윤아의 실종 소식을 듣고 매우 걱정하고 있었다. 비록 배현진과 부부의 연을 맺지 못했지만, 배윤아와는 과거에 친하게 지냈던 사이였기에 친구로서 걱정되었기 때문이다.임지강 자신도 이곳에 올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송윤지의 부탁 때문이고 또 하나는 배윤아의 납치 사건이 왜 갑자기 자신에게 덮어씌워졌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임지강은 배윤아와 거의 만난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은 사실상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조 회장님, 전 자비를 베푸는 게 아닙니다.”임지강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단지 이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이미 많은데 한낱 파리 한 마리와 얽혀서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서입니다. 그 녀석에게 적당히 벌을 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게다가 저는 배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과는 아무런 원한도 없으니, 배씨 가문을 완전히 망가뜨릴 필요는 없습니다.”“흠...”조 회장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1조라... 적지 않은 금액이지. 배현진은 은행에서 전 재산을 담보로 대출받았다고 하더군. 이 일이 발각되면 한동안 꽤 고생하겠지.”“조 회장님, 사실 오늘 제가 온 이유는 다른 목적도 있어서입니다.”임지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약간 굽히며 공손히 말했다. 그러나 조 회장은 손짓으로 그를 제지하며 미소를 지었다.조 회장은 아무 말 없이 손짓으로 따라오라는
배현진은 병원 복도에 있는 긴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잡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완전히 무너진 모습이었다.“그럴 리가 없어...”한참 동안 앉아 있던 배현진은 갑자기 고개를 들며 말했다.“연준 아저씨와 서연 이모는 소피아와 함께 지낸 적이 없잖아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소피아는 절대 저를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이 녀석아,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고집을 부릴 거야.”최연준이 엄하게 꾸짖었다.배경원은 아무 말 없이 아들의 손을 잡았다. 그의 눈에는 깊은 절망이 서려 있었다.“그만해요, 셋째 형님...”배경원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수정이가 응급실에 있는데, 이 아이와 더 이상 다투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없는 아들이라고 생각하려 합니다.”“아버지!”“꺼져버려!”배경원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눈빛 너머에는 모든 걸 놓아버린 듯한 깊은 허무가 스며 있었다.배현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돌아섰다. 떠나기 전, 그는 다시 돌아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윤아를 반드시 무사히 데려올게요. 엄마도 무사할 거예요. 우리 가족은... 예전처럼 다시 행복해질 거예요.”배경원은 아들에게 단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잠시 후, 응급실의 불이 꺼졌다. 배경원은 화살처럼 뛰어가며 아내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의사가 땀으로 흠뻑 젖은 마스크를 벗으며 가까스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배 선생님, 사모님께서는 일단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뭐라고요?”강서연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일단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건, 앞으로 위험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다들 진정하세요.”의사는 부드럽게 설명했다.“사모님의 상태가 많이 복잡합니다. 곧바로 특수 병동으로 옮길 예정이라 당분간 면회는 어려울 겁니다. 이번 주가 아주 중요한 시기이긴 하지만, 제 판단으로는 이 고비를 무사히 넘기실 가능성이 큽니다.”세 사람은 안도의 숨을 쉬며 그나마
“아내라고?”강서연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현진이와 정식으로 결혼한 적 있니? 다른 사람과 약혼한 상태에서 끼어든 건 너잖아. 명분도 없는 관계에 ‘아내’라는 말을 쓰다니, 웃음거리밖에 안 될 거야.”“최 사모님...”“갑자기 생각난 건데.”강서연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수정 씨가 쓰러졌을 때 네가 침대 옆에 있었던 거 맞지?”“아, 네.”소피아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제가 현진 씨를 대신해 효도하러 갔던 거예요. 하지만 어머님 건강이 그렇게 나쁘실 줄은 몰랐습니다.”“수정 씨가 쓰러지기 직전에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말해보렴.”소피아는 순간 멈칫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말할 수 없는 이유라도 있니?”강서연은 한 발짝 다가가며 소피아를 몰아붙였다.“수정 씨는 평소 건강관리를 철저히 하던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쉽게 쓰러질 리 없지. 분명 큰 충격이 있었을 거야. 쓰러지기 직전 병실에 너 혼자 있었다며?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해.”“서연 이모,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배현진은 소피아를 자신의 뒤로 끌어당기며 소피아에게 나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소피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복도를 따라 빠르게 사라졌다.소피아가 사라지자, 배현진은 조심스럽게 말했다.“서연 이모, 소피아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배현진!”강서연은 배경원이 아들을 두 번이나 때린 이유를 이제야 완벽히 이해한 듯,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너 어떻게 이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니? 네 엄마는 지금 저 안에 누워 있어.”“정말로 소피아와는 아무 관련이 없어요...”배현진은 조심스럽게 입술을 핥으며 설명했다.“서연 이모, 사실 소피아도 자책하고 있어요. 그날 소피아도 윤아의 안전을 걱정하다가 엄마 앞에서 그만 실수로 말을 흘리고 만 거예요. 그래서...”“뭐라고?”최연준이 눈을 부릅뜨며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배현진, 네 엄마 쓰러졌을 때 넌 방에 없었잖아.”“소피아가 제게 그렇게 말했어요.”“너...”최연준은 순간
병원 응급실 밖.배경원은 의자에 주저앉아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충혈된 눈으로 응급실 문을 응시하며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한때 당당했던 그의 어깨는 지금 축 처져 있었다. 뒷모습만으로도 절망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배경원은 주먹을 단단히 쥐었지만, 온몸은 떨리고 있었다.적막이 흐르는 복도는 불길한 정적마저 감돌았다.결국, 억눌렀던 감정이 터져 나와 눈물이 조용히 뺨을 적셨다.“경원아!”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배경원이 고개를 들자, 최연준과 강서연이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질 뻔한 배경원을 최연준이 재빨리 부축했다.강서연은 응급실 문을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치료는 연희 씨와 신석훈 씨의 제자들이 맡고 있어요. 모두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이에요. 수정 씨는 평소 건강을 잘 관리하셨으니 금방 회복될 겁니다.”“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최연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갑자기 병세가 심각해진 거야? 그리고 윤아는...”배경원은 떨리는 손으로 최연준의 팔을 붙잡으며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셋째 형님, 제발 윤아를 찾아주세요. 딸은 사라지고 아내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어요. 둘 다 잃으면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그런 바보 같은 말 하지 마세요. 둘 다 무사할 겁니다.”강서연이 단호히 말했다.“윤아는 우리 집안의 며느리예요. 누가 윤아를 해치려 한다면 최씨 가문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어요. 그 결과가 어떤 건지 모를 리도 없고요. 그리고...”강서연은 순간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을 이어가려다 복도 끝에서 배현진이 소피아와 함께 급히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는 말을 삼키고 배현진을 노려보았다.“연준 아저씨, 서연 이모...”배현진은 어딘가 죄책감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배현진은 배경원에게 다가가 팔을 살며시 부축하며 조심스레 말했다.“아버지...”그 순간, 배경원이 배현진의 뺨을 내려쳤다.배경원은 분노로 가득 찬 눈빛으로 배현진을 노려보며
임수정은 갑작스러운 기침을 하며 침대 옆 경보 벨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소피아에 의해 단호히 막혔다.“사모님, 제 말을 듣는 게 좋으실 겁니다.”소피아는 부드럽지만 섬뜩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제가 만든 음식이 그렇게 형편없지도 않고 독을 넣을 만큼 제가 어리석지도 않아요. 안심하세요. 이 모든 재료는 사모님의 건강을 생각하며 준비한 겁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온 이유는 진심으로 사모님을 돌보고 싶어서예요.”임수정은 가슴을 움켜쥔 채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임수정의 눈엔 불신과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요즘 배경원은 외출이 잦아졌고 이유를 묻자, 회사 일 때문이라며 안심하라는 대답뿐이었다.그럼에도 임수정의 마음속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점점 커져만 갔다.깊게 숨을 들이마신 임수정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겉으론 소피아의 말을 따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사모님, 잘 생각하셨어요.”소피아는 임수정에게 쿠션을 건네며 은은하게 웃었다.“우리 결국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될 사이잖아요. 지금부터 제 존재에 익숙해지시는 게 좋을 겁니다.”“흥! 내 아들이 눈이 먼 게 분명해.”임수정은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떻게 너 같은 사람에게 속을 수 있는지...”“저를 깔보지 마세요. 저는 이혼하고 아이도 데리고 있지만, 현진 씨를 향한 제 진심은 변하지 않아요. 저는 현진 씨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누구와는 달리 겉으론 순수한 척하면서 남자를 유혹하는 짓은 안 한다는 건 알아주셨으면 해요.”“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임수정은 언성을 높이며 노려보았다.소피아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더욱 날카롭게 말했다.“사모님, 제가 말하는 사람은 바로 사모님의 그 옛날 며느리가 될 뻔했던 그 사람이에요.”“헛소리하지 마!”임수정은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그 일은 우리 배씨 가문이 송윤지에게 잘못한 일이야. 그 애의 명예를 더럽히지 마.”“사모님,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없는 법이에요.”소피아는 태연한
“너와 상관없다고?”임우정은 다급하게 외쳤다.“네 형부가 이미 윤아의 통화 기록을 조사했어. 윤아가 실종되기 전에 조 회장이랑 통화했던 게 드러났다고! 지강아, 너와 조 회장이 어떤 관계인지 나한테도 숨길 작정이었어?”임지강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사건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머릿속에서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그래요. 저와 조 회장이 가까운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와 배윤아 사이엔 원한이라곤 없잖아요... 누나, 왜 저를 의심하는 거예요?”“지강아!”임우정의 목소리가 더욱 절박해졌다.“너, 송윤지 일 때문에 배현진을 미워하는 건 알아. 하지만... 네 말대로라면 윤아한테까지 증오를 전가하면 안 되잖아!”“누나, 정신 좀 차리세요!”임지강의 목소리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어둠이 깃든 그의 얼굴은 단호함을 더했다.“무슨 근거로 저를 의심하시는 건데요?”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임지강의 강경한 태도에 임우정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한참 후, 임우정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렇다면... 배씨 가문을 좀 도와줄 순 없겠니?”임지강은 코웃음을 치며 전화를 끊었다.수화기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리자 맑고 투명한 송윤지의 눈빛과 마주쳤다.“배씨 가문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요양원 병실 문 앞.소피아의 하이힐 소리가 텅 빈 복도를 울리며 퍼져 나갔다. 소피아의 손엔 보온 도시락이 들려 있었고 문 앞을 지키는 경호원들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제가 사모님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안으로 들여보내 주세요.”경호원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말없이 서 있었다.“이건 도련님께서 지시하신 거예요.”소피아는 휴대전화를 꺼내 그들에게 일부러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실래요? 아시다시피 사모님 건강이 좋지 않으세요. 세 끼 제대로 챙겨 드시지 못하면 여러분들이 책임지실 겁니까?”경호원들은 난처한 얼굴로 머뭇거리다 결국 길을 내주었다.“이제야 말이 통하네.”소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앞으로
송윤지는 겨우 한 모금을 마시고 사레가 들어 술을 뱉을 뻔했다. 마신 술이 얼굴에 스며든 듯 송윤지의 뽀얀 볼은 어느새 매혹적인 와인빛으로 물들었다.임지강은 그런 송윤지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임지강은 송윤지에게 다가가 가볍게 등을 두드리며 입가에 묻은 술자국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임 대표님...”송윤지는 조심스럽게 임지강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 애썼다.하지만 임지강은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아 통유리창 앞까지 데려갔다.송윤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 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깊고 짙은 밤하늘에 수많은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잘게 부서진 불빛들이 반짝거렸다.불꽃은 색과 모양을 끊임없이 바꾸며 꿈같은 광경을 만들어냈다.송윤지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마음에 들어요?”임지강의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송윤지의 귀에 스며들었다.“잠깐 눈 좀 감아 봐요.”“네?”임지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제가 별을 따다 줄게요.”마지막 불꽃이 빛의 궤적을 남기며 밤하늘로 사라지고 다시 평온한 고요가 찾아왔다.송윤지는 미소를 지으며 임지강의 말을 따라 눈을 감았다. 그러자 따뜻하면서도 약간 서늘한 남자의 손길이 송윤지의 손을 잡더니 손바닥 위에 무언가가 놓이는 느낌이 들었다.송윤지는 깜짝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손에는 정말로 ‘별’이 있었다.“이건...”그것은 목걸이였다. 펜던트는 별 모양으로 깎아낸 다이아몬드로, 완벽하게 다듬어져 찬란한 빛이 퍼지고 있었다.“제가 해줄게요.”임지강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이건 너무 비싼 거라서 제가...”“받아줘요.”임지강의 눈빛은 따스하고도 단호했다.“그리고...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송윤지는 고개를 숙였다. 귀 끝까지 붉어진 송윤지의 얼굴은 마치 열이 오른 듯했다.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의 귓가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살짝 정리해 주었다.“사실,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저 윤지 씨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