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의 자선 경매는 성대하게 진행했다. 유명 인사들이 모였고 모두 서화 수집가의 탑이다.강서연은 이런 자리가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뼛속까지 새겨진 그 고귀함 때문인지 드레스를 입고 사람들 사이에 서서 미소 짓는 모습은 눈부시게 빛나는 진주와 같았다.김자옥도 기분 좋게 강서연을 데리고 파트너들에게 소개했다.“제 며느리예요!”“맞아요, 제 며느리예요!”걸어오는 내내 김자옥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보물을 찾았어요! 하하하... 우리 집 연준이가 복이 있다니깐요!”“뭐라고요? 영감님이 반대한다고요?”김자옥은 즉시 목소리를 높여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강서연은 암암리에 김자옥을 끌어당겼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대표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쳤다.“영감님이 동의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에요? 나의 며느리지 영감님의 며느리가 아니잖아요! 전에부터 나를 싫어했는데 지금 내 며느리까지 싫어한다고요? 나 김자옥 앞에서는 이런 게 안 먹혀요!”경매장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마음이 따뜻해진 강서연은 김자옥의 손을 잡고 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십여 초 잠잠해진 후에 사람들이 잇달아 낮은 목소리로 의논했다.“김 대표님이 영감님께 전하고 싶은 말이겠죠?”“내가 보기에 김 대표는 강씨를 좋아해서 며느리로 삼은 것이 아니라, 영감님이 강씨를 싫어해서 그런 것 같아요. 적의 적은 아군이기 때문에 이것은 결국 최씨 가문과 김씨 가문의 원한이에요.”“아니죠. 김 대표는 똑똑한 사람이에요. 아무리 큰 원한이 있더라도 영감님에게 체면을 조금이라도 살려 줄 거예요. 정말 강씨를 좋아하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옹호할 수가 없어요.”“일리 있는 말이에요...”김자옥은 강서연을 향해 웃고 계속 당당하게 걸어갔다.“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절대로 고개를 숙이지 마.”김자옥은 강서연의 손등을 토닥이며 웃었다. “안 그러면 왕관이 떨어질 거야!”강서연도 웃으며 김자옥처럼 여유롭게 걸었다.“아줌마, 제가 언제 아줌마처럼 될 수 있을까요?”“나처럼?”김자옥이
사람들이 이런저런 추측을 늘어놓던 그때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강서연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려보니 임나연이 오만한 기세로 걸어오고 있었다. 어깨의 테슬이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렸다. 고개를 빳빳이 쳐든 그녀는 자기가 가장 잘났다는 표정으로 사람들을 깔보았다.그런데 강서연과 눈이 마주친 순간 살짝 움찔하는가 싶더니 이내 입가에 조롱 섞인 미소를 지었다.“어머, 임나연 씨였군요.”경매 사회자가 황급히 달려가 그녀를 맞이했다. 그때 인파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씨 가문 회장님이 임우 그룹을 임나연 씨에게 전부 다 맡겼대요.”“그럼 4대 가문 중에서 가장 젊은 여자 대표겠네요. 어쩐지 이 규모가 대통령이 오실 때보다도 더 엄청나더라니.”임나연은 강서연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녀의 두 눈에 강서연에 대한 증오가 잠깐 스쳐 지나갔다.“서연 씨, 오랜만이에요.”“네, 오랜만이네요.”강서연은 그녀가 다른 속셈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나연 씨는 요즘 뭐 하고 지냈어요? 자산을 물려받느라 아주 바빴나 봐요?”“그렇죠, 뭐.”임나연은 팔짱을 끼고 말을 이었다.“아빠가 임우 그룹을 나한테 맡기셔서 요즘 좀 많이 바빴어요.”“아무리 바빠도 나한테 얘기는 했어야죠.”강서연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서교 땅 프로젝트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임우 그룹에서 담당한 부분에 대해 벌써 석 주일이나 보고를 올리지 않았다고요.”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몰래 키득키득 웃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임나연은 굳어진 얼굴로 강서연을 노려보았다.“나연 씨.”강서연이 정색한 얼굴로 말했다.“당신이 자산을 물려받든 말든 서교 땅 프로젝트에서 난 당신의 상사예요. 무단결근도 모자라 진행 상황까지 나한테 보고하지 않았어요. 계속 이러면 규정에 따라 일방적으로 임우 그룹과 계약을 해지할 수 있어요.”“당신...”“그러니까 명심해요. 다음에도 또 이러면 절대 이렇게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알겠어요?”임나연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강서연의
김자옥은 한숨을 내쉬고는 그림을 조용히 바라보았다.그림에 반딧불 두 마리가 그려져 있었는데 윤정재와 윤문희를 뜻했다. 그리고 그림의 배경인 숲은 그들이 자주 데이트하던 곳이었다.윤문희가 이 그림을 본다면 과거의 속상했던 기억을 떠올릴 게 뻔했다. 하여 김자옥은 그림을 살 생각이 없었고 그저 경매가를 올려 자선 단체에 더 많은 돈을 기부할 계획이었다. 이 또한 그림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는 방법이었다.“전화하지 마, 서연아...”김자옥이 억지 미소를 지었다.“사실 네 엄마에게 얘기했었는데 안 오겠다고 했어.”“그래요?”강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휴대 전화를 내려놓았다.“이게 다 너희 엄마가 어렸을 적에 그린 작품이라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해. 아 참, 돌아가서 이 얘기 꺼내지 마.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옛날 기억이라도 떠올리면...”“네, 저도 알아요.”강서연이 대답했다. 엄마 앞에서 얘기를 꺼낼 수는 없지만 엄마의 작품이 낙찰되는 것만 봐도 강서연은 아주 자랑스러웠다.“손님 여러분, 경매를 곧 시작하겠습니다.”사회자가 무대 위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개했다.“첫 번째 경매 작품은 반딧불의 빛입니다.”무대 아래에서는 벌써 경쟁이 시작되었다. 강서연이 김자옥을 쳐다보자 김자옥은 그녀에게 응원의 미소를 보냈다.“팻말 들어.”“4억요.”사회자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좋습니다. 이분께서 4억을 제시하셨습니다. 더 부를 분 계십니까?”“6억요!”그 목소리는 귀에 거슬릴 정도로 날카로웠다.강서연이 고개를 돌려보니 임나연이 도발 섞인 웃음을 짓고 있었다.“괜찮아.”김자옥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넌 그냥 계속 경매가를 올리다가 마지막 라운드에 쟤한테 지면 돼.”그녀의 뜻을 단번에 알아챈 강서연은 다시 팻말을 들었다.“10억요!”임나연은 두 눈을 부릅뜨고 강서연과 계속 경쟁했다. 결국 그 그림의 경매가는 40억까지 치솟았다.사회자는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경매가가 높을수록 이번 경매가 성공적이라는 것을 뜻한다. 첫
배경원을 본 간호사들이 반갑게 인사했다.“도련님, 또 오셨네요?”배경원은 간호사들을 향해 씩 웃고는 곧장 병실 안으로 걸어갔다.그에게 반한 몇몇 간호사들은 한데 모여 까르르 웃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경원 도련님 너무 멋지지 않아요? 어린 남자들 전혀 못지않아요.”“그러게 말이에요. 얼굴도 멋있고 정도 많아요. 수정 씨가 입원해 있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왔어요... 어휴, 그런데 수정 씨는 도련님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니, 너무 안타까워요.”“수정 씨도 참 가여워요. 사고를 당했는데 친아버지도 나 몰라라 하잖아요... 경원 도련님이라도 곁에 있어 줘서 얼마나 다행이에요.”배경원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임수정이 침대 머리맡에 멍하니 앉아있었다.그는 잠깐 움찔하다가 이내 미소를 쥐어짜고 침대 옆으로 살며시 다가갔다.“오늘은 좀 어때요?”배경원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손을 들자 임수정은 본능적으로 피하더니 몸을 움츠린 채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그 모습에 배경원은 속상하기만 했다. 오랜 시간 옆에 있어 줬지만 임수정은 여전히 그를 낯선 사람 대하듯 했다.배경원은 억지로 웃으며 손을 거두어들였다. 그는 물 한 잔을 따라 침대 머리맡에 내려놓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수정 씨, 그거 알아요? 예전에 어떤 사람이 잠을 자는데 모기 한 마리가 와서 물어버린 거예요. 잠에서 깬 그 사람이 모기를 잡으려는데 모기가 글쎄 이런 말을 하더래요. ‘제발 죽이지 말아주세요. 오늘 제 생일이에요.’ 그래서 그 사람은 그 말을 듣고 모기를 조심스럽게 손바닥에 놓은 다음에 손뼉을 치면서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대요. 하하...”배경원은 혼자 웃기 시작했고 임수정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런 그를 쳐다보았다. 임수정이 아무 반응이 없자 배경원의 웃음도 점점 굳어졌다.“어... 안 웃겨요?”배경원이 머리를 긁적였다.“내가 웃긴 얘기를 하면 항상 이렇게 썰렁해지더라고요.”임수정은 뜻밖에도 그의 이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그녀의 미소는 마치 밤
“수정 씨...”윤정재는 잠깐 생각하다가 슬쩍 물었다.“혹시 뭔가 생각난 거 있어요?”임수정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나한테는 다 얘기해도 돼요.”윤정재의 미소는 마치 모든 걸 다 꿰뚫어 보는 듯했다.“사실 수정 씨를 진료하던 첫날에 수정 씨가 사람들에게 숨기는 게 있다고 생각했어요. 뭔가 생각난 게 아니라 아예 기억을 잃은 적이 없죠?”임수정은 다리를 움츠리고 앉아 작은 주먹을 깨물었다.한참 동안의 침묵이 흐른 후 윤정재가 그녀에게 주사를 놓으려는데 임수정이 갑자기 윤정재의 손을 덥석 잡았다. 창백한 얼굴로 뭔가 애원하는 것 같았다.“아저씨는 좋은 사람인 거 알아요...”임수정의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그러니까 제발 다른 사람에게는 얘기하지 말아 주세요.”윤정재는 무의식적으로 병실 밖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들어와 문을 걸어 잠갔다.“사실 제 옆에 있던 의사와 간호사 중에 몇 명은 임나연의 사람이에요...”임수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하지만 정확히 구분할 수 없어서 기억을 잃은 척한 거예요.”윤정재가 눈살을 찌푸렸다.“그래서 사고가 난 그날에 일부러 강서연 씨의 차를 들이박은 거예요?”“전 강서연 씨의 차인 줄 몰랐어요.”임수정이 다급하게 설명했다.“그때 납치됐을 때 운전기사가 임나연이 시켰다고 하더라고요. 너무 무서워서... 그냥 아무 차나 들이박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사고라도 나면 적어도 절 어쩌진 못하니까요.”“네.”윤정재가 고개를 끄덕였다.“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했네요. 그럼 기억을 잃은 척한 것도 임나연이 또 수정 씨를 해칠까 봐 그런 거예요?”임수정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제가 죽지 않는 한 임나연은 또 다른 방법으로 절 죽이려 할 거예요. 제가 없어야 임나연이 살 수 있거든요...”윤정재는 눈앞의 연약하고 병약한 임수정을 다시 보게 되었다.침착하고 자신을 지킬 줄 알았으며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도 다시 살아났다. 권민지의 고귀한 혈통을 물
윤정재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는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비록 몸은 아팠지만 반짝이는 두 눈은 그 질문을 하기 전에 그녀 마음속에 이미 답이 있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임수정은 권민지를 도와주고 싶었고 자신을 위해 정의를 되찾고 싶었다.“잘 생각해야 해요.”윤정재가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이것들이 세상에 공개된다면 그야말로 집안 망신이에요. 그때 가서 수정 씨도 연루될 수 있어요.”“그딴 건 두렵지 않아요.”임수정이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어차피 저는 곧 죽을 사람인데 두려울 게 뭐가 있겠어요? 하지만 저들이 우리 엄마를 괴롭히는 걸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어요.”“누가 그래요? 수정 씨가 죽는다고? 지금 내 의술을 의심하는 거예요?”윤정재가 피식 웃었다.“이런 얘기를 하면 수정 씨를 좋아하는 사람이 속상해한단 말이에요.”임수정은 잠깐 멈칫했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이 갑자기 발갛게 달아올랐다.“경원 씨 괜찮던데, 임정수보다 수정 씨를 더 걱정하더라고요.”윤정재는 주삿바늘을 꺼내 그녀의 정맥을 능숙하게 찔렀다.“우리 아빠는 절 걱정해 준 적이 없어요.”임수정은 자신을 비웃었다.“제가 태어날 때부터 부족해서 아빠는 항상 절 짐이라고 생각했었어요. 매달 수억 원에 달하는 치료비가 부담된다면서 내기 싫어하셨죠. 만약 엄마가 치료를 고집하지 않았더라면 아빠는 아마 절 그냥 죽게 내버려 뒀을걸요.”윤정재는 이런 소리를 끔찍이도 싫어했다.‘딸은 금이야 옥이야 하면서 키워야 하는 거 아니야? 서연이었더라면 수억 원이 아니라 수십억, 수백억... 아니 전 재산을 다 쓰더라도... 퉤퉤퉤!’윤정재는 자신의 생각을 바로 접었다.‘갑자기 왜 서연이가 아파질 생각을 하는 건지, 원.’“아저씨, 전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요.”임수정이 계속하여 말했다.“누구보다 체면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라서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라는 이미지를 버리지 못해요. 그러니까 사생아가 있다는 사실을 절대 외부에 공개하지 않을 겁니다.”“이게 임정수에게는 치명
임정수가 그들과 술잔을 기울이던 그때 대문이 열렸다. 현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천장에 매달린 크리스털 등이 서로 부딪치면서 쨍그랑 소리를 냈다.강서연은 얼굴에 미소를 띤 채 임정수 부녀에게 걸어갔다.임나연의 안색이 어두워지면서 발끈하려던 그때 임정수가 몰래 그녀를 말렸다.“이젠 예전의 강서연이 아니야. 앞으로 자주 볼 텐데 일단 참아.”임나연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강서연을 싸늘하게 쳐다보았다.“이렇게 좋은 일을 왜 저에게 알리지 않았어요?”강서연은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나연 씨 혹시 아직도 나에 대해 풀리지 않은 응어리가 있어요?”“농담도 참. 응어리도 절친 사이에나 있는 법이죠. 나와 서연 씨는 친구도 아니잖아요.”“그래요? 절친이라...”강서연이 피식 웃었다.“마침 잘됐네요. 오늘 나연 씨 절친도 함께 왔어요. 두 사람 풀지 못한 응어리가 있으면 여기서 다 풀어요.”“뭐라고요?”임나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때 임정수가 한 걸음 나서서 말했다.“강서연 씨, 오늘은 임우 그룹 내부의 일입니다. 진심으로 축하해 주러 온 거라면 당연히 환영이지만 다른...”“저도 당연히 알죠. 임우 그룹에 관해서는 저는 아무것도 물을 자격이 없어요.”강서연이 정색한 얼굴로 말했다.“하지만 전 서교 땅 프로젝트의 담당자예요. 파트너에게는 반드시 신중을 기울여야죠.”“아저씨, 진짜로 임우 그룹을 나연 씨에게 넘길 건가요?”“강서연 씨!”임나연이 참다못해 언성을 높였다.“오늘 난동을 부리려고 왔어요? 담당자인지 뭔지, 그딴 걸로 날 협박하려 하지 말아요. 계속 소란을 피웠다간 경호원더러 확 내쫓으라고 할 수 있어요.”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 앞에 사람들이 불쑥 나타났다. 하나같이 험상궂은 얼굴에 손에는 쇠 방망이나 기관총을 들고 있었고 검은 티셔츠 뒷면에 육이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적혀있었다.홀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고 살벌해졌다.최연준과 육경섭이 함께 걸어들어왔다. 가죽 구두를 신고 대리석 바닥을 밟는 소리가 총알
“나연 씨 날 알아봤네요?”문나의 싸늘한 웃음소리에 임나연은 움찔했다. 그녀를 쳐다보는 문나의 눈빛은 더는 절친을 대하는 그런 눈빛이 아니었다.“여... 여긴 왜 왔어요?”임나연은 그녀에게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혼냈다.“문나 씨도 저 사람들이랑 같이 내 얼굴에 먹칠하러 왔어요? 내가 없었더라면 당신이 이름을 알릴 수나 있었겠어요?”“그렇죠.”문나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당신이 없었더라면 오늘 이 꼴이 되지도 않았겠죠.”그러고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스카프를 벗어 던졌다. 그녀의 얼굴에 깊게 팬 흉터를 본 순간 임나연은 아연실색했다.“당신이 날 이렇게 만들었어요!”“헛소리하지 말아요!”임나연은 놀란 나머지 뒷걸음질 쳤다.“난 문나 씨의 얼굴을 망가뜨리라고 한 적 없어요.”“나연 씨가 한 짓은 아니죠. 하지만 이 모든 게 다 당신 때문에 일어난 거예요.”문나는 사람들을 향해 얼굴 흉터를 보여주며 당당하게 말했다.“전 오늘 이 자리에서 임나연 씨가 그동안 했던 짓에 대해 다 까발리려고 합니다. 임나연 씨는 저에게 육 대표님을 꼬시라고 했어요. 육 대표님의 술에 약을 타라고 했고 또... 기자를 불러서 스캔들을 터트렸어요. 그 바람에 사모님이 충격을 받고 뱃속의 아이를 잃은 겁니다.”“문나 씨!”임나연이 소리를 질렀다.“당신 미쳤어요? 지금 그 일을 다 나에게 덮어씌우려고요? 내가 알려준 방법이긴 하지만 당신은 머리가 돌지 않아요? 스스로 생각이라는 거 안 해요? 내가 시켰다고 해서 그대로 따라 해요?”“아직도 변명거리가 더 남았어요?”문나는 그녀를 째려보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알겠어요. 내 얘기는 이쯤하고 당신 여동생 얘기나 할게요... 임수정 씨를 해한 적이 정말 없어요?”“그 입 다물어요!”임나연이 조급한 나머지 문나를 확 밀치려 하자 눈치 빠른 경호원은 총으로 그녀의 머리를 겨누었다.임나연은 가슴이 두근거려 더는 꼼짝도 못 했다.“임수정 씨에게 정말 해서는 안 될 짓을 많이 했죠.”문나는 이를 꽉 깨물고 말했
가끔 차가 지나갔지만, 정승우가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어도 아무도 멈춰 서지 않았다.어둠이 내려앉았고 기온은 점점 내려가고 있었다.며칠 동안 육체와 마음이 지친 권온유는 이제 무너질 듯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정승우는 어쩔 수 없이 온유를 등에 업고 비틀거리며 길을 걸었다.“오빠...”권온유는 울먹이며 말했다.“해가 졌어요. 저... 무서워요.”“괜찮아.”정승우는 뒤돌아 미소를 지었다.“오빠가 집에 데려다줄게.”“오빠, 우리 그냥 돌아가요...”“뭐라고?”권온유의 시선이 정승우의 피로 물든 발에 닿았다.“발이 많이 아프죠?”권온유의 작은 얼굴 위로 눈물이 두 줄기 흘러내렸다.“오빠, 저 내려주세요. 그냥 돌아가요...”“온유야?”권온유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그 집이 낡고 춥긴 해도... 오빠 발에서 피가 나진 않잖아요!”정승우는 멍하니 잠시 굳어 있다가 그 어눌한 말 속에 담긴 다정함을 깨달았다.이 작은 아이는 납치당했던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라도 정승우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정승우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작은 새들이 집으로 향해 줄지어 날고 있었다.정승우는 온유를 데리고 반드시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다짐했다.“바보야.”정승우는 온유를 내려놓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난 하나도 안 아파. 그리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어.”“그 사람이... 우리를 때릴까요?”“그럴 거야.”정승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어린 시절, 정대명에게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탈출할 때 그의 뒤통수를 내려친 한 방은 그동안의 빚을 모두 갚은 셈이었다.“그런데 오빠, 그 사람은 오빠 아빠잖아요?”권온유는 작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하지만 오빠가 아프다고 제가 말했을 때 오빠 아빠가 들어왔었잖아요.”정승우는 쓴웃음을 지었다.자신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정대명이 들어온 것은 아마 걱정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죽으면 함께 나쁜 짓을 할 사람이 없어질까 봐서였었다.정대명은 단지
차 안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영미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정대명에게 다가갔다. 그의 머리 아래로 어두운 핏자국이 퍼져 있었고 그 흔적은 이미 굳어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의 코 밑에 손을 가져다 댔다.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영미는 떨리는 마음을 억누른 채 차가운 눈빛으로 정대명을 내려다보다가 거칠게 발길을 휘둘렀다.“일어나요!”강소아와 최군형도 다가와 공장 안을 살폈지만 안은 고요히 비어 있었다.“아이들은요?”“아이고...”정대명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살려줘, 살려줘... 저 괘씸한 녀석이!”“정대명 씨!”영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했다.어쨌든 이번 일은 영미가 자신 있게 권온유의 행방을 안다고 장담한 일이었다.영미는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함께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확신에 차 말했다.그런데 지금... 정대명은 다쳐 쓰러져 있고 두 아이는 사라졌었다.백인서를 함정에 빠뜨리려던 영미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것이다.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정대명은 도움을 청하려다 영미가 눈짓을 주는 것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영미의 눈길을 따라 보니 최군형과 강소아도 함께 와있었다.정대명은 예전에 영미가 했던 경고가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아는 척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정대명은 머리를 살짝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신이 정대명인가요?”최군형이 다가가 물었다.정대명은 말끝을 흐리며 최군형의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백인서의 양아버지시고?”최군형은 다시 물었다.“당신이 당신 아들과 함께 권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게 맞나요?”“아니야, 나 아니야!”정대명은 크게 당황하며 손을 흔들었다.“이봐, 동생, 난 억울해! 내 아들 녀석이 나를 해치려고 했어! 내 머리를 봐, 그 자식이 벽돌로 내리쳤다니까!”“그만해요!”영미는 정대명의 말이 길어질수록 상황이 불리해질 것을 우려해 정대명을 노려보며 더 이상 말을 못 하게 했다.강소아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들의 서툰 수법이 한심하기만
경찰서 밖에서 최지용은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한참을 걷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젊은 경찰관이 안에서 뛰어나오고 있었다. 최지용은 급히 다가가며 말했다.“정호야!”정호라는 젊은 경찰관은 최지용을 보자 반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 녀석!”최지용은 정호에게 다가가 가볍게 주먹을 툭 날리며 말했다.“도대체 무슨 일이야? 왜 사전에 알려주지 않은 거야?”정호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방금 최씨 집안에서 백인서를 데려간 사람 중에 정호도 있었다. 최지용도 놀라웠지만, 영미 역시 경찰이 직접 찾아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떠나기 전, 정호가 살짝 눈짓을 보냈고 최지용은 그의 의도를 알아채 경찰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지용이 형.”정호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형수님께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잘 구분하고 계시니 문제없을 겁니다!”“도대체 누구 지시로 백인서를 여기로 데려온 거지?”“소아 아가씨예요!”정호는 어깨를 으쓱했다.“소아 아가씨가 갑자기 지시한 거라 사전에 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최지용은 살짝 놀랐다. 강소아의 지시라니.“형수님께서도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으니까요. 그 아이가 실종되기 전에 형수님께서 만난 적이 있거든요. 경찰이 형수님을 데려가서 조사하는 건 당연한 절차입니다.”최지용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피식 웃음을 지었다.강소아가 이런 ‘당연한 절차’를 이용해 백인서를 경찰서로 보낸 이유는 경찰서야말로 가장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또 누군가가 음모를 꾸며 백인서에게 덮어씌우려 한다 해도 경찰서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경찰서 안에는 일을 봐주는 사람들도 있으니 백인서가 여기서 며칠 지내는 동안 힘든 일 없이 외부의 소란도 피할 수 있는 셈이었다.최지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강소아는 정말 자매를 위한 배려가 남달랐다. 이렇게까지 배려심 깊은 방안을 생각해 내다니!“지용이 형.”정호가 계속해서 말했다.“도련님께서
영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소아 언니, 저를 믿지 않으세요?”“난 오직 사실만을 믿어.”“권씨 가문의 딸이 실종된 사건에 백인서 씨의 양아버지와 남동생이 관련되었어요, 그게 바로 사실이에요!”강소아는 순간 멍하니 있다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려 했다.세상에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다 있나 싶었다.호텔 뒷뜰에 있는 그 CCTV가 정말 완전히 고장 났다고 생각하는 걸까? 육씨 가문과 최씨 가문이 힘을 합쳐 그 고장 난 CCTV 하나도 못 고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최군형은 강소아의 어깨를 가볍게 눌러 안심시키며 슬며시 휴대전화를 건넸다.강소아는 화면을 확인했다. 최군형의 부하가 보낸 메시지였다.“도련님, CCTV 데이터를 복구 중입니다. 곧 진실이 밝혀질 겁니다!”강소아는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영미가 이렇게까지 백인서를 몰아세우는 걸 보니 마음 한구석에 무언가 꺼림칙한 게 남아 있는 것 같았다.어차피 꼬리가 저절로 드러날 것이었기에 그저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다.바로 그때, 집사가 다소 당황한 얼굴로 방에 들어섰다. 집사의 뒤에는 몇 명의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신분을 밝힌 후 방 안을 둘러보며 엄숙한 목소리로 물었다.“여기 백인서 씨가 계십니까?”표아정은 등을 꼿꼿이 펴고 대답했다.“경찰관님께서 여긴 무슨 일로 오셨나요?”“당신이 백인서 씨인가요?”“저는...”“백인서 씨가 납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신고를 접수했습니다!”“뭐라고요?”백인서는 얼굴이 창백해졌다.“백인서 씨, 조사에 협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희와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권온유가 납치된 지 하루가 지났다.그동안 정대명은 단 한 번 음식을 가져왔는데, 그것도 차갑게 식은 죽 한 그릇과 딱딱한 빵 한 조각뿐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귀하게 자란 권온유에게 이런 음식은 처음이었다. 울고 싶었지만, 감히 울지 못하고 그저 눈물을 참으며 빵을 조금씩 뜯어 먹고 있었다.정승우는 그런 온유의 모습을 보고
“아줌마,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그럼, 제가 알아낸 사실을 전부 말씀드릴게요!”영미는 입가에 교만한 미소를 띠며 백인서를 차갑게 한 번 쳐다보았다.“백인서 씨의 친어머니인 백홍은 인신매매범이었다는 사실, 모두 아셨나요? 백인서 씨의 어머니는 백인서를 정대명의 집에 맡겼고... 흥! 정대명의 아내도 백홍이 납치해 왔다는 소문이 있어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잖아요. 제 생각엔... 인신매매범의 딸이라면 그런 일쯤은 익숙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은 권온유의 실종이 정말로 백인서 씨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시나요?”“영미!”강소아가 나서며 분노를 가득 담아 소리쳤다.“허위 사실을 퍼뜨리지 마!”“소유 아가씨, 억울하네요!”영미는 강소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제가 이렇게까지 조사한 건 다 아가씨를 위한 거예요! 딸도 있는 사람이 백인서를 곁에 두고도 마음이 놓이세요?”“그만해!”최지용이 크게 소리쳤다.백인서는 몸을 떨며 믿기지 않는 눈으로 최지용을 쳐다보았다.그러나 최지용의 얼굴에는 의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최지용은 굳건한 눈빛으로 뒤에 있는 백인서를 지키고 있었다.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처럼 백인서를 아끼고 있었다.백인서는 코끝이 찡해지며 본능적으로 최지용의 손을 꼭 붙잡았다. 최지용의 따스한 손은 백인서에게 큰 용기를 주었고 그 온기가 어둠의 두려움을 잊게 해주었다.최지용은 백인서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고 다시 영미를 바라볼 때는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영미야.”최지용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두 집안의 관계를 생각해서 그저 넘어가는 거야. 더 이상 선을 넘지 마.”최군형도 나서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요, 백인서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모르겠어요? 영미 아가씨, 우리 최씨 가문 사람들을 바보로 생각하는 건 아니죠?”영미는 순간 긴장했다. 최군형의 말 속엔 어딘가 숨은 뜻이 있는 듯했다.최군형의 깊고 복잡한 눈빛을 파악하기 어려웠다.표아정은 천천히 일어나 어깨에 걸친 숄을
백인서는 복잡한 눈빛으로 최지용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그때 최지용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표아정이었고 다급한 목소리로 서둘러 돌아오라고 재촉했다.최지용은 결국 어머니의 말에 따라 백인서를 데리고 최씨 집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넓은 거실에는 최군형과 강소아도 나와 있었고 모두 엄숙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백인서가 들어서자, 표아정이 백인서를 올려다보며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다.강소아는 백인서와 눈을 마주치며 단호하게 미소 지었다.백인서가 의아해하던 찰나, 영미가 천천히 밖에서 걸어 들어왔다.“아줌마, 지용 오빠. 제가 권온유의 행방을 알아냈어요.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뭐라고?”최지용이 놀라서 물었다.“네가 어떻게 아는데?”영미는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지용 오빠, 특수부대 출신이라고 정보가 우리보다 더 빠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최씨 가문은 만능이 아니에요, 최씨 가문도 모르는 정보가 있다고요.”표아정은 가볍게 기침하며 차분히 상황을 지켜보았다.최군형과 강소아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떤 일이 일어날지 주목하고 있었다.최지용의 이마에는 점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미의 눈에는 한 줄기 교만한 빛이 번졌다.영미는 오는 길에 이미 모든 계획을 짰다. 정대명의 말이 맞았다. 누구를 훔치든 상관없었다. 인신매매범의 딸인 백인서가 아이들을 해치러 다닌다는 누명을 씌우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하면 백인서는 모두의 신뢰를 잃게 될 터였다.영미는 이제 한 아이의 엄마가 된 강소아가 인신매매범을 곁에 둘 리 없다고 믿었고, 최지용 역시 이 사실을 알면 더는 백인서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래서 영미는 정대명을 배신하기로 마음먹었다.영미는 권온유를 넘기고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한패가 되어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주장할 계획이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백인서는 변명의 여지도 없이 궁지에 몰릴 것이었다!“지용 오빠.”영미는 고개를 돌려 최지용을 바라보며 한 글자씩 천천히 말했다.“권온유는 정승
“그... 괜찮아!”정승우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권온유에게 말했다. 정승우는 이곳에서 권온유를 반드시 데리고 나가겠다고 결심했다.그런데 이때, 공장 문이 “쾅” 하고 열리더니 곧바로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정승우는 재빨리 권온유에게 눈짓했고 권온유도 알아채고는 즉시 땅바닥에 쓰러져 의식이 없는 척했다.정승우는 벽에 기대어 눈을 반쯤 감았다.“이 아이인가요?”영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맞아.”정대명은 영미를 흘깃 노려보며 묵묵히 대답했다.영미는 두 걸음 앞으로 다가서서 희미한 빛 속에 있는 아이를 살펴보더니, 곧 얼굴빛이 확 변했다.“이 아이... 혹시 권씨 집안의 막내딸 아니에요?”정대명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애초에 아이를 훔쳐 올 때 이 아이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 리가 없었다.“정대명 씨.”영미가 차갑게 웃으며 돌아보았다.“제가 최씨 가문 집안 아이를 훔쳐 오라고 했지, 권씨 집안 아이를 훔치라고 했나요? 이러고도 저를 속이지 않았다고요?”“그게...”정대명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영미 아가씨, 어차피 목적은 백인서를 곤경에 빠뜨리는 거잖아? 그러니 누구를 훔쳐 오든 상관없지 않아? 아이를 훔치기만 하면 유괴범이 되는 거니까.”이 말은 영미에게만 충격을 준 게 아니었다. 정승우의 귀에도 또렷이 들어왔다.“좋아요.”영미는 깊은숨을 들이마신 뒤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이 아이는 잘 지키고 있어요, 제가 다시 연락할 테니까.”...한편, 권씨 집안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권욱은 조순영을 탓하며 아이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했고, 조순영은 오열하며 남편을 원망했다. 조순영은 권욱이 바깥에서 여자와 부적절하게 얽히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라고 했다.“헛소리하지 마! 사람들이 나한테 어떤 소문을 퍼뜨렸는지 잘 알잖아. 결혼 생활 내내 너한테 부끄러운 일 한 적 없어.”“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정말 떳떳하게 행동했다면 왜 사람들이 당신만 가만두지 않는 건데?”며칠 전까지만
권온유의 질문에 정승우는 당황했다.권온유는 커다란 눈망울로 정승우를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했던 슈퍼맨 같은 오빠가, 이제는 먹을 것 하나 구하지 못하는 모습이 되어버린 것이다.정승우는 어색하게 입가를 씰룩이며 권온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이야기를 이어갔다.“너, 정말 배고파?”“네!”권온유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 작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원래는 엄마랑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 했어요. 엄마가 특별히 고등어조림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하셨거든요... 엉엉... 엉엉...”“울지 마, 울지 마! 그냥 생선 하나 가지고...”“나 배고파!”정승우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아이와 대화하는 건 그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겨우 권온유를 달래고 나서 정승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팔을 걷어붙이며 권온유에게 내밀었다.“너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 배고프면, 여기 한번 물어볼래?”권온유는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정승우를 바라보았다.“우리 집은 가난해서 늘 먹을 게 부족했거든. 그래서 어릴 때 너무 배가 고프면 이렇게 배고픔을 달랠 만한 걸 물곤 했어.”권온유는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배고픔을 달랠 만한 것'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정승우는 웃으며 계속 설명했다.“예를 들어 쌀통 같은 거야. 한때 쌀이 들어 있던 쌀통은 비어 있어도 쌀 냄새가 남아 있거든. 그래서 쌀통 가장자리를 살짝 물면서 하얀 쌀밥을 먹는 상상하는 거야. 그러면 배가 덜 고파져.”“그리고 이웃집에서 밥하는 냄새를 맡으며 그 밥을 먹는 상상을 하는 거야. 그러면 그렇게 배고프지 않더라고.”권온유는 정승우의 이야기에 넋을 잃고 입을 벌린 채 있었다. 정승우는 웃음을 터뜨렸다.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한때 정대명이 도박과 술에 빠져 정승우를 굶겼던 시절은 그야말로 비참한 순간들이었다.잠시 후, 권온유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고 정승우는 속으로 ‘큰일이다'라고 생
영미는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최지용을 지켜보았다.최지용은 다소 초조한 기색으로 구석에 앉아 휴대전화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 전화를 걸기도 했다.영미는 바로 뒤를 따라갔고 최지용의 낮고 다급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찾았습니까?”“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세요... 만약 납치범의 목적이 돈이었다면 분명 전화를 걸어올 겁니다!”영미의 가슴이 철렁하며 내려앉았다.납치범이라니? 대체 뭘 찾는다는 거지?백인서와 통화한 걸까?그때, 최군성이 큰 소리로 외쳤다.“지용이 형, 여기서 뭐 해요?”영미는 얼른 몸을 숨겼고 최군성은 최지용에게 다가가 최지용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우리 형이 찾고 있었는데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거예요? 어서 와서 먹고 즐기자고요!”최지용은 최군성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영미와 눈이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잠시 멈칫했다.영미는 급히 시선을 피하며 억지 미소로 인사했다.“지용 오빠...”“어, 영미?”최군성도 배윤아처럼 물었다.“여기 웬일이야? 형님이 널 초대한 것 같지 않은데?”“그게...”영미는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최군성은 영미의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최지용을 끌고 가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최지용은 점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영미가 도대체 여기 왜 있는 거지? 평소에는 볼 수 없던 사람이, 왜 하필 오늘 온유가 사라진 날에 나타난 걸까?그때, 최군형과 강소아가 가원이를 품에 안고 나타났다.강소아는 아이를 보행기에 앉혔고 아이는 보행기 가장자리를 잡고 작은 발을 내디뎠다. 이 모습에 방 안의 모든 사람이 환호성을 질렀다.영미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자리를 떠 교외의 버려진 공장으로 향했다.그 시각, 정대명은 영미의 지시에 따라 승합차를 몰고 공장에 도착해 있었고 영미가 도착했을 때 그는 공장 문 앞에서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영미는 핸드백을 휘둘러 정대명에게 던졌다.“정대명 씨, 감히 날 속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