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말씀 마세요, 사모님.”최연준은 연장자에 대한 예의는 그래도 지켰다.“그저께 할아버지께서 아저씨랑 사모님 얘기를 꺼내시면서 연회에서 대신 안부를 물어달라고 하셨어요.”“회장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줘요.”임씨 가문 사모님은 고개를 살짝 들고 말했다.“회장님께서 지금까지 우리 가문을 많이 도와주신 걸 알아요. 우리도 은혜를 잊지 않고 있으니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요!”“네.”최연준은 인사치레로 몇 마디 나눈 후 다른 손님을 맞이하러 갔다.임나연은 화가 가라앉지 않아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손발도 차가워졌다. 임씨 가문 사모님은 노여움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째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여긴 나랑 네 아빠만 있으면 돼. 적응하지 못하겠으면 먼저 집에 가 있어.”“엄마!”임나연은 조급해졌다.“회장님께서 저랑 연준 씨의 결혼을 허락하셨는데 엄마는 왜 계속 막으려고 하세요?”“난 체면이 중요해!”임씨 가문 사모님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임나연은 입술을 앙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임씨 가문 사모님은 그녀의 팔을 덥석 잡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끌고 와 째려보며 말했다.“널 보육원에서 데려오긴 했어도 그래도 임씨 가문에서 이십 년 넘게 살았어. 난 널 친딸처럼 키웠고 심지어 너한테 수정이보다도 더 많이 신경 썼어. 그런데 넌 어떻게 이리 뻔뻔할 수가 있어?”“엄마.”임나연이 울먹였다.“제가 연준 씨랑 결혼하려는 건 우리 가문을 위해서...”“그 입 다물어!”임씨 가문 사모님이 사나운 표정으로 말했다.“진짜 임씨 가문을 위한다면 창피한 짓 좀 그만하고 더는 강서연 씨도 찾아가지 마! 회장님이 널 밀어준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야? 최연준이 저렇게 싫다는데 설마 납치라도 해서 너랑 결혼시키겠어? 임나연, 정신 똑바로 차려! 괜히 말썽 일으키지 마!”임나연은 일단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녀를 쳐다보는 임나연의 눈빛에 원망이 짙어졌다. 임씨 가문 사모님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계속하여 말했다.“앞으로는 수정이 보러 가지 않아도 돼. 나 임
강서연은 연회장 한가운데 당당하게 서 있었다. 노란 드레스가 어찌나 우아하고 고귀한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았다. 사람들의 이목이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쏠렸다.사회자도 그녀의 미모에 잠깐 넋을 놓았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조수에게서 큐카드를 받았다. 그는 마른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활짝 웃으며 강서연을 소개하기 시작했다.“다들 이미 눈치채셨죠?”사회자의 목소리는 진중하면서도 힘이 넘쳤다.“이분이 바로 서교 땅 프로젝트의 진짜 대표이자 새로 상장한 세 회사의 대표 강서연 씨입니다.”그 순간 연회장의 사람들은 제자리에 얼어붙었고 온 세상이 마치 진공 속에 빠진 듯 조용했다. 몇 초 동안의 침묵이 흐른 후 연회장에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강서연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을 훑어보다가 임나연에게 시선이 머물렀다.최연준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마주하여 다정하게 웃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그 어떤 빛보다도 반짝이는 것 같았다.“발표할 일이 하나 더 있어요.”그녀를 쳐다보는 최연준의 얼굴에 사랑이 가득했다.“이 섬을 사서 개발한 다음에 강서연의 개인 섬으로 선물할 겁니다.”사람들이 웅성웅성하기 시작했다.“나중에 여러분들이 섬에 놀러 오고 싶으면 섬 주인의 동의를 거쳐야 합니다!”강서연은 그를 보며 쑥스럽게 웃고는 그의 어깨에 살포시 기댔다.최연준에게 다른 마음을 품었던 규수들은 그저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만 보았다. 하지만 임나연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인파 속에 서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강서연은 약이 바싹 오른 임나연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나연 씨.”강서연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오랜만이에요.”임나연의 두 눈에 원망이 가득했다.임씨 가문 사모님은 혹시라도 임나연이 무슨 사고라도 칠까 봐 황급히 나서서 말했다.“오랜만이에요, 서연 씨.”“사모님이시군요.”강서연은 그녀를 보며 말했다.“사모님은 딸한테 참 자상하신 것 같아요.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시네요. 설마 제가 나연 씨를 인적 드문 곳
강서연이 부드럽게 말했다.“저도 대표는 처음이라서 앞으로 부족한 게 있으면 많이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최연준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저쪽에 협력 파트너가 몇 분 더 계셔. 같이 인사드리러 가자!”두 사람이 떠나고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그 자리엔 임나연 혼자만 쓸쓸하게 남았다.임씨 가문 사모님은 두어 걸음 갔다가 다시 돌아섰다.“계속 거기 서 있을 거야? 아직도 망신을 덜 당했어?”임나연은 화나고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이 임씨 가문 사모님을 뒤따라 연회장을 나섰다....“연회의 상황은 대충 이러합니다.”진용수가 윤정재에게 보고했다. 윤정재는 거실의 통유리 앞에 서 있었다. 이곳은 그의 개인 저택이었고 에덴과 아주 가까웠다.“서연 씨는 역시 대단해요.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임나연을 해결했어요!”진용수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윤정재는 뿌듯한 마음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당연히 대단하지, 누구 딸인데!’“그나저나...”그는 멈칫하다가 눈썹을 치켜올렸다.“최연준 그 자식이 정말로 서교 땅과 회사를 전부 서연이한테 줬어?”“네.”진용수가 고개를 끄덕였다.“제가 다 알아봤어요. 서교 땅 프로젝트와 최연준이 설립한 세 회사, 그리고 최연준의 명의로 되어 있던 해외 자산과 부동산까지...”“전부 서연이 명의로 됐어?”윤정재의 두 눈이 반짝였다.“네.”윤정재는 생각에 잠긴 듯했다.한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는 돈이 유일한 판단 기준은 아니지만 중요한 요소이다.최연준이 강서연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절대 그 많은 재산을 그녀 명의로 돌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 명의로 돌렸다는 건 그녀에게 든든한 보장을 주기 위해서였다.윤정재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최연준에 대한 생각이 조금 바뀐 것 같다.“그러니까... 내 딸 지금 돈이 엄청 많다는 거네?”진용수가 히죽 웃었다.“회장님의 관심사는 참...”“참 뭐?”윤정재가 눈썹을 치켜올렸다.“돈은 당연히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서교 땅
집사가 깍듯하게 대답했다.“전부 사모님께서 안배하신 거예요.”임나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집사가 앞을 가로막았다.“지금 사모님께서 안에서 수정 아가씨를 돌보고 계세요.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나도 안 돼요?”임나연은 침착한 척했다.“평소에는 내가 수정이를 돌봤잖아요!”“이건 사모님의 명령입니다!”집사의 눈빛이 싸늘하기 그지없었다.“그만 돌아가세요, 아가씨.”“당신...”임나연은 씩씩거리며 그냥 돌아섰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불안하기만 했다.임씨 가문 사모님이 임수정을 직접 돌본다면 그녀의 비밀을 무조건 알게 될 텐데... 그때가 되면 모든 게 끝이 난다. 임나연은 반드시 대책을 세워서 이 위기를 넘겨야 했다.임나연은 조급한 마음에 마당을 이리저리 거닐며 안절부절못했다.그런데 하필 그때 휴대 전화가 진동했다. 화들짝 놀란 그녀는 고개를 숙여 휴대 전화를 확인했다. 문나가 보낸 문자였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만나자고 했다.임나연은 처음에는 무시하고 싶었지만 잠깐 생각해 보니 문나가 그래도 아직은 쓸모가 있는 것 같아 문나가 보낸 장소로 부랴부랴 달려갔다.피부과였는데 많은 톱 연예인들이 이곳에서 보톡스를 맞거나 시술을 받는다고 한다. 이젠 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하여 위치도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있었고 가격도 터무니없이 비쌌다.임나연이 도착했을 때 문나는 한창 프런트 직원과 된통 싸우고 있었다.“나연 씨, 마침 잘 왔어요.”문나는 그녀를 잡아당겼다.“이 사람들이 날 무시하고 외상을 안 해주지 뭐예요? 나... 나도 예전에는 여기 VIP 고객이었다고요.”“문나 씨.”맨 앞에 선 팀장이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은 말투로 말했다.“VIP 고객님이시면 저희 규정을 더 잘 아실 텐데요. 여긴 외상이 안 됩니다.”“그러니까 말이에요.”프런트 직원이 눈을 희번덕거렸다.“우리가 모시는 톱 배우와 톱 가수들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두룩해요. 그런데 회원 카드도 만들지 않
사실 따지고 보면 문나의 탓도 아니다...김자옥 이 여우 같은 여자가 바로 앞에서 하는 말과 뒤에서 하는 말이 따로따로일 줄은 임나연도 생각지 못했다. 이미 마음에 둔 며느릿감이 있다면서 대외적으로 공개해 놓고 그녀를 착각하게 했다.하지만 그녀가 마음에 둔 며느리는 강서연이었다!임나연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문나 씨가 이렇게 된 건 다 강서연 그년 때문이잖아요!”문나는 씩씩거리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맞아요. 다 그년 때문이에요! 하지만 난 지금 그년을 만날 기회도 없어요. 어진 엔터테인먼트 건물도 들어가지 못해요... 어떻게 복수하면 되죠?”임나연은 잠깐 침묵하다가 이내 가볍게 말했다.“강서연을 못 건드린다면 걔 주변 사람을 건드려요. 어차피 걔 속만 뒤집어 놓으면 누굴 건드리든 다 똑같잖아요!”“주변 사람이요?”문나가 눈알을 굴리기 시작했다.“나연 씨가 예전에 그년 남동생을 건드렸다면서요? 성적을 위조했다고 퇴학당하게 하려 했지만 결국에는...”“됐어요!”임나연은 그 얘기를 다시는 꺼내고 싶지 않았다.“주변 사람들이라고 했잖아요. 제발 내 생각대로 좀 따라와 주면 안 돼요?”“주변 사람이라...”문나는 여전히 어리둥절했다.“친구 말이에요! 누가 가장 만만한지 알아보고 괴롭히면 되잖아요. 내가 이것까지 가르쳐야 해요?”문나는 알겠다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하나 더.”임나연이 계속하여 말했다.“문나 씨는 팬덤이 컸던 연예인이라서 화제성이 있어야 해요. 이미지를 버리고 스캔들을 터트리는 건 어때요? 이슈만 받으면 욕을 먹는 것도 관심이잖아요.”“네, 네!”문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전에도 그녀는 이미지 관리에 너무 신경 쓴 것은 아니기에 스캔들을 터트리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그리고 자원은... 어진 엔터테인먼트에서 얻을 수 없으면 다른 회사에 가서 달라고 하면 되잖아요.”“하지만... 그건 계약 위반인데요?”문나가 난감한 기색을 드러냈다.“어진 엔터테인먼트에 몰래 다른 회사에 가서 따로
“연준 형.”배경원은 억울하기만 했다.“왜 그래요?”눈치 빠른 유찬혁은 배경원의 입을 틀어막고는 종업원에게 음료수를 가져오지 말라고 했다.최연준은 심호흡을 여러 번 하고 나서야 겨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는 유찬혁을 보며 할 얘기가 있으니 휴게실로 가자고 했다.두 사람은 가운을 입고 휴게실로 향했다.“형, 무슨 일이에요?”“그게...”최연준은 잠깐 멈칫하다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말했다.“뭔가 의심스러운 점이 있어서 그래.”“뭔데요?”“우리가 전에 찾았던 거 말이야... 뭔가 빠뜨리지 않았을까?”유찬혁은 전혀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그가 먼저 이렇게 얘기하길 기다린 듯했다.“형도 그렇게 생각해요?”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사실 저도 진작 의심했었는데 더 많은 증거를 찾은 후에 형한테 얘기하려고 했어요.”“비행기 사고가 나기 전에 최진혁이 엄청난 금액의 보험을 들었는데 보험금 수령인이 윤정재로 되어 있다고 한서한테서 들었어.”“형, 그건 항공법 규정에 부합되지 않아요!”최연준의 낯빛이 어두워졌다.“요즘 윤 회장님이랑 함께 살면서 조금 알아가게 되었는데 뭔가 아주 이상한 느낌을 받았어. 날 해칠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 들더라고.”유찬혁이 피식 웃었다.“제가 알아봤는데 그 사람 지금 그 자리에 앉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더라고요. 하지만 다른 건 그래도 다 떳떳했어요.”“그래서 말인데.”최연준이 눈살을 찌푸렸다.“윤 회장님이 그 돈 때문에 마음이 흔들렸는지는 둘째치고 보험금 수령인이 왜 아무 상관 없는 외부인인 걸까? 그때 나랑 한서가 계약서만 들여다보느라 이렇게나 엄청난 단서를 놓쳤어.”“그러니까 말이에요. 나한테 묻지도 않고.”유찬혁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고 최연준이 차갑게 웃었다.“그러니까 누군가가 일부러 이 보험 계약서를 나한테 보여줘서 윤 회장님도 공범이라고 오해하게 만들려는 거겠지.”“맞아요!”유찬혁이 고개를 끄덕였다.“맨 처음에 최진혁이 형한테 보여준 계약서에는 보험금 수령인이 형네 부
“모든 데이터를 다 복구할 수 있어?”“아마 가능할 거예요. 정비소 직원이 그러는데 너무 심각하게 파손된 게 아니래요. 전기회로를 고치면 데이터를 복구할 수 있다고 했어요... 형 혹시 그 두 사람이 어떻게 유람선에 탔는지 알아보려고 그러는 거예요?”“아니.”최연준이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섬에 있을 때 문자 한 통을 받았어.”“문자요?”“그때 인터넷을 복구해서 너한테 연락하려고 방법을 생각하던 참이었거든.”최연준이 그를 보며 말했다.“너한테 구조 신호를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문자를 받았어.”배경원이 눈살을 찌푸렸다.“문자 내용이 뭔데요?”최연준이 살짝 멈칫했다.“살려주세요.”배경원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유람선을 총 여섯 대 샀잖아. 유람선끼리 시스템이 다 이어진 거야? 만약 이어진 거라면 다른 유람선에서도 이 문자를 받았을 텐데.”배경원은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처음에는 이어졌었어요. 그런데 음악회 전에 제가 설정을 변경해서 더는 이어지지 않아요. 왜냐하면... 제가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렸는데 다른 사람한테 보여주기 싫어서 변경했거든요.”배경원이 입술을 적시고 말을 이었다.“그리고 형이 탔던 그 유람선은 원래 형을 위해 준비한 게 아니었어요.”최연준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배경원은 그를 보며 천천히 말했다.“그건 저의 개인 유람선이에요. 해상 음악회 그날, 원래는 형한테 다른 유람선을 안배하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형이랑 형수님은 가장 좋은 걸 타야 한다는 생각에 제 유람선을 양보했죠. 그리고 마침 제가 기다리던 그 사람도 안 올 수 있어서...”유찬혁도 그때를 떠올렸다.“맞아. 그날 네가 나한테 이 얘기를 할 때 누군가가 뒤에서 지나갔었어. 그 사람이 아마 우리 둘 얘기를 듣고 그 유람선에 미리 잠복해 있었던 게 분명해!”최연준은 미간을 찌푸리고 배경원을 쳐다보았다.“그러니까 그 살려달라는 문자는 우리한테 보낸 게 아니라 너한테 보내는 거였어!”배경원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러니까 말이야. 나도 들은 적이 없어!”유찬혁이 말을 이었다.“임정수네 부부도 항상 대외적으로 임나연이 유일한 딸이라고 했어! 만약 임수정이 진짜 죽었다면 살려달라는 문자를 어떻게 보내?”배경원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는 귀신같은 걸 믿지 않았다. 하지만 믿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고는 단정 지을 수 없다. 설마 그런 일이 그에게 일어난 것일까?“연준 형...”배경원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설마 억울함을 당한 사건이 아니겠지? 임수정 씨가... 억울하게 죽은 거면 어떡해?”최연준은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그를 노려보았다.‘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어? 어이없어서 원.’“배경원, 너 대체 언제쯤이면 정신 차릴래!”최연준이 눈살을 찌푸렸다.“임나연의 말도 믿어?”배경원은 억울하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이 세상의 재벌들이 밖에서 사생아를 얼마나 많이 낳았는지 알아?”배경원은 멍하니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그러니까 임씨 가문에 딸이 하나 더 있는지 우리도 모른다고. 진실과 거짓은 종이 한 장 차이일 뿐이야. 만약 임씨네 부부가 일부러 숨긴 거라면 다른 사람은 당연히 알 리가 없지.”최연준이 입을 삐죽거렸다. 배경원은 어릴 적부터 가끔 머리가 잘 돌지 않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임나연의 헛소리 몇 마디에 정말로 자신이 귀신을 본 줄로 착각했다.배경원은 잠깐 생각하다가 걱정 어린 얼굴로 물었다.“그렇다면 수정 씨 지금 위험하다는 말인데... 어떻게 도와야 하죠?”최연준은 아무 말 없이 한참 동안 분석했다.“만약 임수정이 급한 상황에 부닥쳤다면 가장 먼저 경찰에 신고했겠지. 하지만 너한테 문자를 보냈다는 건 급한 상황은 아니지만 위험하다는 뜻이야.”배경원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저 지금 뭘 해야 해요?”“네가 좋아하는 여자를 구하려면 스스로 방법을 생각해야지, 왜 나한테 물어?”“연준 형...”최연준은 그를 흘겨보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이 사건의 핵심은 임나연이었다. 이 여자가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