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연이 부드럽게 말했다.“저도 대표는 처음이라서 앞으로 부족한 게 있으면 많이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최연준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저쪽에 협력 파트너가 몇 분 더 계셔. 같이 인사드리러 가자!”두 사람이 떠나고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그 자리엔 임나연 혼자만 쓸쓸하게 남았다.임씨 가문 사모님은 두어 걸음 갔다가 다시 돌아섰다.“계속 거기 서 있을 거야? 아직도 망신을 덜 당했어?”임나연은 화나고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이 임씨 가문 사모님을 뒤따라 연회장을 나섰다....“연회의 상황은 대충 이러합니다.”진용수가 윤정재에게 보고했다. 윤정재는 거실의 통유리 앞에 서 있었다. 이곳은 그의 개인 저택이었고 에덴과 아주 가까웠다.“서연 씨는 역시 대단해요.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임나연을 해결했어요!”진용수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윤정재는 뿌듯한 마음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당연히 대단하지, 누구 딸인데!’“그나저나...”그는 멈칫하다가 눈썹을 치켜올렸다.“최연준 그 자식이 정말로 서교 땅과 회사를 전부 서연이한테 줬어?”“네.”진용수가 고개를 끄덕였다.“제가 다 알아봤어요. 서교 땅 프로젝트와 최연준이 설립한 세 회사, 그리고 최연준의 명의로 되어 있던 해외 자산과 부동산까지...”“전부 서연이 명의로 됐어?”윤정재의 두 눈이 반짝였다.“네.”윤정재는 생각에 잠긴 듯했다.한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는 돈이 유일한 판단 기준은 아니지만 중요한 요소이다.최연준이 강서연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절대 그 많은 재산을 그녀 명의로 돌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 명의로 돌렸다는 건 그녀에게 든든한 보장을 주기 위해서였다.윤정재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최연준에 대한 생각이 조금 바뀐 것 같다.“그러니까... 내 딸 지금 돈이 엄청 많다는 거네?”진용수가 히죽 웃었다.“회장님의 관심사는 참...”“참 뭐?”윤정재가 눈썹을 치켜올렸다.“돈은 당연히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서교 땅
집사가 깍듯하게 대답했다.“전부 사모님께서 안배하신 거예요.”임나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집사가 앞을 가로막았다.“지금 사모님께서 안에서 수정 아가씨를 돌보고 계세요.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나도 안 돼요?”임나연은 침착한 척했다.“평소에는 내가 수정이를 돌봤잖아요!”“이건 사모님의 명령입니다!”집사의 눈빛이 싸늘하기 그지없었다.“그만 돌아가세요, 아가씨.”“당신...”임나연은 씩씩거리며 그냥 돌아섰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불안하기만 했다.임씨 가문 사모님이 임수정을 직접 돌본다면 그녀의 비밀을 무조건 알게 될 텐데... 그때가 되면 모든 게 끝이 난다. 임나연은 반드시 대책을 세워서 이 위기를 넘겨야 했다.임나연은 조급한 마음에 마당을 이리저리 거닐며 안절부절못했다.그런데 하필 그때 휴대 전화가 진동했다. 화들짝 놀란 그녀는 고개를 숙여 휴대 전화를 확인했다. 문나가 보낸 문자였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만나자고 했다.임나연은 처음에는 무시하고 싶었지만 잠깐 생각해 보니 문나가 그래도 아직은 쓸모가 있는 것 같아 문나가 보낸 장소로 부랴부랴 달려갔다.피부과였는데 많은 톱 연예인들이 이곳에서 보톡스를 맞거나 시술을 받는다고 한다. 이젠 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하여 위치도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있었고 가격도 터무니없이 비쌌다.임나연이 도착했을 때 문나는 한창 프런트 직원과 된통 싸우고 있었다.“나연 씨, 마침 잘 왔어요.”문나는 그녀를 잡아당겼다.“이 사람들이 날 무시하고 외상을 안 해주지 뭐예요? 나... 나도 예전에는 여기 VIP 고객이었다고요.”“문나 씨.”맨 앞에 선 팀장이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은 말투로 말했다.“VIP 고객님이시면 저희 규정을 더 잘 아실 텐데요. 여긴 외상이 안 됩니다.”“그러니까 말이에요.”프런트 직원이 눈을 희번덕거렸다.“우리가 모시는 톱 배우와 톱 가수들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두룩해요. 그런데 회원 카드도 만들지 않
사실 따지고 보면 문나의 탓도 아니다...김자옥 이 여우 같은 여자가 바로 앞에서 하는 말과 뒤에서 하는 말이 따로따로일 줄은 임나연도 생각지 못했다. 이미 마음에 둔 며느릿감이 있다면서 대외적으로 공개해 놓고 그녀를 착각하게 했다.하지만 그녀가 마음에 둔 며느리는 강서연이었다!임나연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문나 씨가 이렇게 된 건 다 강서연 그년 때문이잖아요!”문나는 씩씩거리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맞아요. 다 그년 때문이에요! 하지만 난 지금 그년을 만날 기회도 없어요. 어진 엔터테인먼트 건물도 들어가지 못해요... 어떻게 복수하면 되죠?”임나연은 잠깐 침묵하다가 이내 가볍게 말했다.“강서연을 못 건드린다면 걔 주변 사람을 건드려요. 어차피 걔 속만 뒤집어 놓으면 누굴 건드리든 다 똑같잖아요!”“주변 사람이요?”문나가 눈알을 굴리기 시작했다.“나연 씨가 예전에 그년 남동생을 건드렸다면서요? 성적을 위조했다고 퇴학당하게 하려 했지만 결국에는...”“됐어요!”임나연은 그 얘기를 다시는 꺼내고 싶지 않았다.“주변 사람들이라고 했잖아요. 제발 내 생각대로 좀 따라와 주면 안 돼요?”“주변 사람이라...”문나는 여전히 어리둥절했다.“친구 말이에요! 누가 가장 만만한지 알아보고 괴롭히면 되잖아요. 내가 이것까지 가르쳐야 해요?”문나는 알겠다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하나 더.”임나연이 계속하여 말했다.“문나 씨는 팬덤이 컸던 연예인이라서 화제성이 있어야 해요. 이미지를 버리고 스캔들을 터트리는 건 어때요? 이슈만 받으면 욕을 먹는 것도 관심이잖아요.”“네, 네!”문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전에도 그녀는 이미지 관리에 너무 신경 쓴 것은 아니기에 스캔들을 터트리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그리고 자원은... 어진 엔터테인먼트에서 얻을 수 없으면 다른 회사에 가서 달라고 하면 되잖아요.”“하지만... 그건 계약 위반인데요?”문나가 난감한 기색을 드러냈다.“어진 엔터테인먼트에 몰래 다른 회사에 가서 따로
“연준 형.”배경원은 억울하기만 했다.“왜 그래요?”눈치 빠른 유찬혁은 배경원의 입을 틀어막고는 종업원에게 음료수를 가져오지 말라고 했다.최연준은 심호흡을 여러 번 하고 나서야 겨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는 유찬혁을 보며 할 얘기가 있으니 휴게실로 가자고 했다.두 사람은 가운을 입고 휴게실로 향했다.“형, 무슨 일이에요?”“그게...”최연준은 잠깐 멈칫하다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말했다.“뭔가 의심스러운 점이 있어서 그래.”“뭔데요?”“우리가 전에 찾았던 거 말이야... 뭔가 빠뜨리지 않았을까?”유찬혁은 전혀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그가 먼저 이렇게 얘기하길 기다린 듯했다.“형도 그렇게 생각해요?”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사실 저도 진작 의심했었는데 더 많은 증거를 찾은 후에 형한테 얘기하려고 했어요.”“비행기 사고가 나기 전에 최진혁이 엄청난 금액의 보험을 들었는데 보험금 수령인이 윤정재로 되어 있다고 한서한테서 들었어.”“형, 그건 항공법 규정에 부합되지 않아요!”최연준의 낯빛이 어두워졌다.“요즘 윤 회장님이랑 함께 살면서 조금 알아가게 되었는데 뭔가 아주 이상한 느낌을 받았어. 날 해칠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 들더라고.”유찬혁이 피식 웃었다.“제가 알아봤는데 그 사람 지금 그 자리에 앉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더라고요. 하지만 다른 건 그래도 다 떳떳했어요.”“그래서 말인데.”최연준이 눈살을 찌푸렸다.“윤 회장님이 그 돈 때문에 마음이 흔들렸는지는 둘째치고 보험금 수령인이 왜 아무 상관 없는 외부인인 걸까? 그때 나랑 한서가 계약서만 들여다보느라 이렇게나 엄청난 단서를 놓쳤어.”“그러니까 말이에요. 나한테 묻지도 않고.”유찬혁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고 최연준이 차갑게 웃었다.“그러니까 누군가가 일부러 이 보험 계약서를 나한테 보여줘서 윤 회장님도 공범이라고 오해하게 만들려는 거겠지.”“맞아요!”유찬혁이 고개를 끄덕였다.“맨 처음에 최진혁이 형한테 보여준 계약서에는 보험금 수령인이 형네 부
“모든 데이터를 다 복구할 수 있어?”“아마 가능할 거예요. 정비소 직원이 그러는데 너무 심각하게 파손된 게 아니래요. 전기회로를 고치면 데이터를 복구할 수 있다고 했어요... 형 혹시 그 두 사람이 어떻게 유람선에 탔는지 알아보려고 그러는 거예요?”“아니.”최연준이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섬에 있을 때 문자 한 통을 받았어.”“문자요?”“그때 인터넷을 복구해서 너한테 연락하려고 방법을 생각하던 참이었거든.”최연준이 그를 보며 말했다.“너한테 구조 신호를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문자를 받았어.”배경원이 눈살을 찌푸렸다.“문자 내용이 뭔데요?”최연준이 살짝 멈칫했다.“살려주세요.”배경원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유람선을 총 여섯 대 샀잖아. 유람선끼리 시스템이 다 이어진 거야? 만약 이어진 거라면 다른 유람선에서도 이 문자를 받았을 텐데.”배경원은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처음에는 이어졌었어요. 그런데 음악회 전에 제가 설정을 변경해서 더는 이어지지 않아요. 왜냐하면... 제가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렸는데 다른 사람한테 보여주기 싫어서 변경했거든요.”배경원이 입술을 적시고 말을 이었다.“그리고 형이 탔던 그 유람선은 원래 형을 위해 준비한 게 아니었어요.”최연준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배경원은 그를 보며 천천히 말했다.“그건 저의 개인 유람선이에요. 해상 음악회 그날, 원래는 형한테 다른 유람선을 안배하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형이랑 형수님은 가장 좋은 걸 타야 한다는 생각에 제 유람선을 양보했죠. 그리고 마침 제가 기다리던 그 사람도 안 올 수 있어서...”유찬혁도 그때를 떠올렸다.“맞아. 그날 네가 나한테 이 얘기를 할 때 누군가가 뒤에서 지나갔었어. 그 사람이 아마 우리 둘 얘기를 듣고 그 유람선에 미리 잠복해 있었던 게 분명해!”최연준은 미간을 찌푸리고 배경원을 쳐다보았다.“그러니까 그 살려달라는 문자는 우리한테 보낸 게 아니라 너한테 보내는 거였어!”배경원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러니까 말이야. 나도 들은 적이 없어!”유찬혁이 말을 이었다.“임정수네 부부도 항상 대외적으로 임나연이 유일한 딸이라고 했어! 만약 임수정이 진짜 죽었다면 살려달라는 문자를 어떻게 보내?”배경원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는 귀신같은 걸 믿지 않았다. 하지만 믿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고는 단정 지을 수 없다. 설마 그런 일이 그에게 일어난 것일까?“연준 형...”배경원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설마 억울함을 당한 사건이 아니겠지? 임수정 씨가... 억울하게 죽은 거면 어떡해?”최연준은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그를 노려보았다.‘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어? 어이없어서 원.’“배경원, 너 대체 언제쯤이면 정신 차릴래!”최연준이 눈살을 찌푸렸다.“임나연의 말도 믿어?”배경원은 억울하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이 세상의 재벌들이 밖에서 사생아를 얼마나 많이 낳았는지 알아?”배경원은 멍하니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그러니까 임씨 가문에 딸이 하나 더 있는지 우리도 모른다고. 진실과 거짓은 종이 한 장 차이일 뿐이야. 만약 임씨네 부부가 일부러 숨긴 거라면 다른 사람은 당연히 알 리가 없지.”최연준이 입을 삐죽거렸다. 배경원은 어릴 적부터 가끔 머리가 잘 돌지 않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임나연의 헛소리 몇 마디에 정말로 자신이 귀신을 본 줄로 착각했다.배경원은 잠깐 생각하다가 걱정 어린 얼굴로 물었다.“그렇다면 수정 씨 지금 위험하다는 말인데... 어떻게 도와야 하죠?”최연준은 아무 말 없이 한참 동안 분석했다.“만약 임수정이 급한 상황에 부닥쳤다면 가장 먼저 경찰에 신고했겠지. 하지만 너한테 문자를 보냈다는 건 급한 상황은 아니지만 위험하다는 뜻이야.”배경원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저 지금 뭘 해야 해요?”“네가 좋아하는 여자를 구하려면 스스로 방법을 생각해야지, 왜 나한테 물어?”“연준 형...”최연준은 그를 흘겨보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이 사건의 핵심은 임나연이었다. 이 여자가
유찬혁도 씩 웃었다.“네, 이건 제가 증명할 수 있어요.”최연준은 연거푸 마른기침했다.“지금 경원이 얘기를 하고 있잖아. 왜 날 끌어들이고 그래! 그 여자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확고하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제대로 조사해야 해.”그는 배경원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남자라면 책임감이 있어야지!”“네, 그건 저도 알아요, 형.”“유람선 데이터를 복구하고 문자를 보낸 위치부터 알아낸 후에 다음 계획을 세워. 그리고 요즘 임씨 가문에 사람을 붙여. 특히 임나연 말이야!”최연준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입꼬리를 실룩거렸다.“아주 예상치 못한 수확을 얻게 될 거야!”...강서연은 임우정과 함께 산부인과로 와서 산전 검사를 했다. 다행히 모든 게 정상이었다.태아가 벌써 5개월이 되었고 임우정의 아랫배도 눈에 띄게 볼록해졌다. 몸에 살도 좀 오르고 혈색도 아주 좋았다. 심지어 의사마저 모든 수치가 완벽하다면서 모범이 될 정도라고 했다.검사를 마친 후 두 사람은 병원의 정원에 잠깐 앉아있었다.벌써 천고마비의 계절인 가을이 왔다. 아직 햇볕이 따스하여 그녀들의 마음도 따뜻했다. 강서연은 도시락통을 꺼내 이미 깎은 사과 한 조각을 포크로 집어서 임우정에게 건넸다.임우정이 활짝 웃었다. 이건 임산부의 특권이었다. 직접 움직이지 않아도 옆에서 알아서 다 챙겨주었다.“널 너무 오래 붙잡고 있어서 네 남편이 뭐라 하는 거 아니야?”강서연은 잠깐 멈칫하다가 피식 웃었다.임우정은 어제부터 그녀를 불러냈고 저녁에도 가지 못하게 했다. 갈 곳이 없었던 육경섭은 온천을 마친 후 체면도 마다하고 최연준과 함께 에덴으로 돌아왔다.어제 영상통화를 할 때 화면 속 육경섭의 모습은 자유롭기 그지없었다. 널찍한 티셔츠 차림에 양반다리를 한 채 최연준이 아주 아끼는 튀르키예산 양털 카펫 위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앞에는 맥주와 술안주 등 배달 음식이 가득했고 축구 경기를 아주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었다.즐기고 있는 육경섭과 달리 최연준은 절망에 빠진 얼굴이었다.“경섭 씨가
강서연은 그녀의 손을 잡고 어깨를 감싸 안았다.사실 임우정의 결혼생활은 아주 행복했다. 육경섭은 하루 세끼 직접 요리하여 그녀에게 식사를 차려주었고 회사 일이 아무리 바빠도 늘 그녀가 우선이었다.그녀가 임신한 후 갑자기 이상한 음식이 당긴다고 하면 한밤중에도 오성을 돌아다니며 사 오곤 했다. 어쩌면 너무도 행복하여 조금의 오점도 용납할 수 없나 보다.강서연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다정하게 달랬다.“경섭 씨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마음 놓아요. 경섭 씨가 언니한테 잘해준 것만 생각해요! 아참, 경섭 씨가 그때 그 반지를 계속 끼고 있던데, 그렇게 일편단심인 사람이 어찌 마음이 변할 리가 있겠어요?”임우정은 한참 동안 입을 꾹 다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연예계에서 일하면 술자리는 피할 수 없어요.”강서연이 계속하여 다정하게 말했다.“두 사람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었는데 그만한 믿음도 없으면 어떡해요.”“서연아...”강서연이 그녀를 보며 히죽 웃었다.사실 이런 일을 직접 겪어보지 못한 이상 완벽히 공감할 수 없다는 걸 강서연은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녀였더라면 임우정보다 더 진정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친한 친구이기에 임우정이 사소한 일에 집착하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됐어요.”강서연은 휴대 전화를 그녀에게 건넸다.“배고프니까 얼른 집에 와서 밥이나 하라고 문자 보내요. 그럼 경섭 씨 한걸음에 달려올걸요?”임우정은 그녀의 설득 끝에 드디어 웃음을 되찾았다. 육경섭에게 문자를 보낸 후 임우정은 그녀에게 사과했다.“본의 아니게 연준 씨랑 네 사이를 방해해서 미안해. 연준 씨한테 이따가 집에 들어간다고 말해.”“일단 언니부터 무사히 집에 데려다주고요.”강서연이 헤벌쭉 웃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주차장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병원 로비를 지나는데 낯익은 두 사람이 맞은 편에 있었다.“엄마!”임나연은 애교를 부리며 임씨 가문 사모님의 팔짱을 꼈지만 임씨 가문 사모님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매정하게 그녀를 뿌리쳤다.
가끔 차가 지나갔지만, 정승우가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어도 아무도 멈춰 서지 않았다.어둠이 내려앉았고 기온은 점점 내려가고 있었다.며칠 동안 육체와 마음이 지친 권온유는 이제 무너질 듯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정승우는 어쩔 수 없이 온유를 등에 업고 비틀거리며 길을 걸었다.“오빠...”권온유는 울먹이며 말했다.“해가 졌어요. 저... 무서워요.”“괜찮아.”정승우는 뒤돌아 미소를 지었다.“오빠가 집에 데려다줄게.”“오빠, 우리 그냥 돌아가요...”“뭐라고?”권온유의 시선이 정승우의 피로 물든 발에 닿았다.“발이 많이 아프죠?”권온유의 작은 얼굴 위로 눈물이 두 줄기 흘러내렸다.“오빠, 저 내려주세요. 그냥 돌아가요...”“온유야?”권온유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그 집이 낡고 춥긴 해도... 오빠 발에서 피가 나진 않잖아요!”정승우는 멍하니 잠시 굳어 있다가 그 어눌한 말 속에 담긴 다정함을 깨달았다.이 작은 아이는 납치당했던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라도 정승우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정승우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작은 새들이 집으로 향해 줄지어 날고 있었다.정승우는 온유를 데리고 반드시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다짐했다.“바보야.”정승우는 온유를 내려놓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난 하나도 안 아파. 그리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어.”“그 사람이... 우리를 때릴까요?”“그럴 거야.”정승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어린 시절, 정대명에게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탈출할 때 그의 뒤통수를 내려친 한 방은 그동안의 빚을 모두 갚은 셈이었다.“그런데 오빠, 그 사람은 오빠 아빠잖아요?”권온유는 작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하지만 오빠가 아프다고 제가 말했을 때 오빠 아빠가 들어왔었잖아요.”정승우는 쓴웃음을 지었다.자신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정대명이 들어온 것은 아마 걱정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죽으면 함께 나쁜 짓을 할 사람이 없어질까 봐서였었다.정대명은 단지
차 안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영미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정대명에게 다가갔다. 그의 머리 아래로 어두운 핏자국이 퍼져 있었고 그 흔적은 이미 굳어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의 코 밑에 손을 가져다 댔다.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영미는 떨리는 마음을 억누른 채 차가운 눈빛으로 정대명을 내려다보다가 거칠게 발길을 휘둘렀다.“일어나요!”강소아와 최군형도 다가와 공장 안을 살폈지만 안은 고요히 비어 있었다.“아이들은요?”“아이고...”정대명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살려줘, 살려줘... 저 괘씸한 녀석이!”“정대명 씨!”영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했다.어쨌든 이번 일은 영미가 자신 있게 권온유의 행방을 안다고 장담한 일이었다.영미는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함께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확신에 차 말했다.그런데 지금... 정대명은 다쳐 쓰러져 있고 두 아이는 사라졌었다.백인서를 함정에 빠뜨리려던 영미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것이다.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정대명은 도움을 청하려다 영미가 눈짓을 주는 것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영미의 눈길을 따라 보니 최군형과 강소아도 함께 와있었다.정대명은 예전에 영미가 했던 경고가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아는 척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정대명은 머리를 살짝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신이 정대명인가요?”최군형이 다가가 물었다.정대명은 말끝을 흐리며 최군형의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백인서의 양아버지시고?”최군형은 다시 물었다.“당신이 당신 아들과 함께 권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게 맞나요?”“아니야, 나 아니야!”정대명은 크게 당황하며 손을 흔들었다.“이봐, 동생, 난 억울해! 내 아들 녀석이 나를 해치려고 했어! 내 머리를 봐, 그 자식이 벽돌로 내리쳤다니까!”“그만해요!”영미는 정대명의 말이 길어질수록 상황이 불리해질 것을 우려해 정대명을 노려보며 더 이상 말을 못 하게 했다.강소아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들의 서툰 수법이 한심하기만
경찰서 밖에서 최지용은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한참을 걷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젊은 경찰관이 안에서 뛰어나오고 있었다. 최지용은 급히 다가가며 말했다.“정호야!”정호라는 젊은 경찰관은 최지용을 보자 반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 녀석!”최지용은 정호에게 다가가 가볍게 주먹을 툭 날리며 말했다.“도대체 무슨 일이야? 왜 사전에 알려주지 않은 거야?”정호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방금 최씨 집안에서 백인서를 데려간 사람 중에 정호도 있었다. 최지용도 놀라웠지만, 영미 역시 경찰이 직접 찾아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떠나기 전, 정호가 살짝 눈짓을 보냈고 최지용은 그의 의도를 알아채 경찰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지용이 형.”정호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형수님께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잘 구분하고 계시니 문제없을 겁니다!”“도대체 누구 지시로 백인서를 여기로 데려온 거지?”“소아 아가씨예요!”정호는 어깨를 으쓱했다.“소아 아가씨가 갑자기 지시한 거라 사전에 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최지용은 살짝 놀랐다. 강소아의 지시라니.“형수님께서도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으니까요. 그 아이가 실종되기 전에 형수님께서 만난 적이 있거든요. 경찰이 형수님을 데려가서 조사하는 건 당연한 절차입니다.”최지용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피식 웃음을 지었다.강소아가 이런 ‘당연한 절차’를 이용해 백인서를 경찰서로 보낸 이유는 경찰서야말로 가장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또 누군가가 음모를 꾸며 백인서에게 덮어씌우려 한다 해도 경찰서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경찰서 안에는 일을 봐주는 사람들도 있으니 백인서가 여기서 며칠 지내는 동안 힘든 일 없이 외부의 소란도 피할 수 있는 셈이었다.최지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강소아는 정말 자매를 위한 배려가 남달랐다. 이렇게까지 배려심 깊은 방안을 생각해 내다니!“지용이 형.”정호가 계속해서 말했다.“도련님께서
영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소아 언니, 저를 믿지 않으세요?”“난 오직 사실만을 믿어.”“권씨 가문의 딸이 실종된 사건에 백인서 씨의 양아버지와 남동생이 관련되었어요, 그게 바로 사실이에요!”강소아는 순간 멍하니 있다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려 했다.세상에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다 있나 싶었다.호텔 뒷뜰에 있는 그 CCTV가 정말 완전히 고장 났다고 생각하는 걸까? 육씨 가문과 최씨 가문이 힘을 합쳐 그 고장 난 CCTV 하나도 못 고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최군형은 강소아의 어깨를 가볍게 눌러 안심시키며 슬며시 휴대전화를 건넸다.강소아는 화면을 확인했다. 최군형의 부하가 보낸 메시지였다.“도련님, CCTV 데이터를 복구 중입니다. 곧 진실이 밝혀질 겁니다!”강소아는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영미가 이렇게까지 백인서를 몰아세우는 걸 보니 마음 한구석에 무언가 꺼림칙한 게 남아 있는 것 같았다.어차피 꼬리가 저절로 드러날 것이었기에 그저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다.바로 그때, 집사가 다소 당황한 얼굴로 방에 들어섰다. 집사의 뒤에는 몇 명의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신분을 밝힌 후 방 안을 둘러보며 엄숙한 목소리로 물었다.“여기 백인서 씨가 계십니까?”표아정은 등을 꼿꼿이 펴고 대답했다.“경찰관님께서 여긴 무슨 일로 오셨나요?”“당신이 백인서 씨인가요?”“저는...”“백인서 씨가 납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신고를 접수했습니다!”“뭐라고요?”백인서는 얼굴이 창백해졌다.“백인서 씨, 조사에 협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희와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권온유가 납치된 지 하루가 지났다.그동안 정대명은 단 한 번 음식을 가져왔는데, 그것도 차갑게 식은 죽 한 그릇과 딱딱한 빵 한 조각뿐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귀하게 자란 권온유에게 이런 음식은 처음이었다. 울고 싶었지만, 감히 울지 못하고 그저 눈물을 참으며 빵을 조금씩 뜯어 먹고 있었다.정승우는 그런 온유의 모습을 보고
“아줌마,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그럼, 제가 알아낸 사실을 전부 말씀드릴게요!”영미는 입가에 교만한 미소를 띠며 백인서를 차갑게 한 번 쳐다보았다.“백인서 씨의 친어머니인 백홍은 인신매매범이었다는 사실, 모두 아셨나요? 백인서 씨의 어머니는 백인서를 정대명의 집에 맡겼고... 흥! 정대명의 아내도 백홍이 납치해 왔다는 소문이 있어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잖아요. 제 생각엔... 인신매매범의 딸이라면 그런 일쯤은 익숙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은 권온유의 실종이 정말로 백인서 씨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시나요?”“영미!”강소아가 나서며 분노를 가득 담아 소리쳤다.“허위 사실을 퍼뜨리지 마!”“소유 아가씨, 억울하네요!”영미는 강소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제가 이렇게까지 조사한 건 다 아가씨를 위한 거예요! 딸도 있는 사람이 백인서를 곁에 두고도 마음이 놓이세요?”“그만해!”최지용이 크게 소리쳤다.백인서는 몸을 떨며 믿기지 않는 눈으로 최지용을 쳐다보았다.그러나 최지용의 얼굴에는 의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최지용은 굳건한 눈빛으로 뒤에 있는 백인서를 지키고 있었다.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처럼 백인서를 아끼고 있었다.백인서는 코끝이 찡해지며 본능적으로 최지용의 손을 꼭 붙잡았다. 최지용의 따스한 손은 백인서에게 큰 용기를 주었고 그 온기가 어둠의 두려움을 잊게 해주었다.최지용은 백인서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고 다시 영미를 바라볼 때는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영미야.”최지용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두 집안의 관계를 생각해서 그저 넘어가는 거야. 더 이상 선을 넘지 마.”최군형도 나서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요, 백인서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모르겠어요? 영미 아가씨, 우리 최씨 가문 사람들을 바보로 생각하는 건 아니죠?”영미는 순간 긴장했다. 최군형의 말 속엔 어딘가 숨은 뜻이 있는 듯했다.최군형의 깊고 복잡한 눈빛을 파악하기 어려웠다.표아정은 천천히 일어나 어깨에 걸친 숄을
백인서는 복잡한 눈빛으로 최지용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그때 최지용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표아정이었고 다급한 목소리로 서둘러 돌아오라고 재촉했다.최지용은 결국 어머니의 말에 따라 백인서를 데리고 최씨 집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넓은 거실에는 최군형과 강소아도 나와 있었고 모두 엄숙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백인서가 들어서자, 표아정이 백인서를 올려다보며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다.강소아는 백인서와 눈을 마주치며 단호하게 미소 지었다.백인서가 의아해하던 찰나, 영미가 천천히 밖에서 걸어 들어왔다.“아줌마, 지용 오빠. 제가 권온유의 행방을 알아냈어요.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뭐라고?”최지용이 놀라서 물었다.“네가 어떻게 아는데?”영미는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지용 오빠, 특수부대 출신이라고 정보가 우리보다 더 빠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최씨 가문은 만능이 아니에요, 최씨 가문도 모르는 정보가 있다고요.”표아정은 가볍게 기침하며 차분히 상황을 지켜보았다.최군형과 강소아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떤 일이 일어날지 주목하고 있었다.최지용의 이마에는 점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미의 눈에는 한 줄기 교만한 빛이 번졌다.영미는 오는 길에 이미 모든 계획을 짰다. 정대명의 말이 맞았다. 누구를 훔치든 상관없었다. 인신매매범의 딸인 백인서가 아이들을 해치러 다닌다는 누명을 씌우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하면 백인서는 모두의 신뢰를 잃게 될 터였다.영미는 이제 한 아이의 엄마가 된 강소아가 인신매매범을 곁에 둘 리 없다고 믿었고, 최지용 역시 이 사실을 알면 더는 백인서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래서 영미는 정대명을 배신하기로 마음먹었다.영미는 권온유를 넘기고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한패가 되어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주장할 계획이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백인서는 변명의 여지도 없이 궁지에 몰릴 것이었다!“지용 오빠.”영미는 고개를 돌려 최지용을 바라보며 한 글자씩 천천히 말했다.“권온유는 정승
“그... 괜찮아!”정승우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권온유에게 말했다. 정승우는 이곳에서 권온유를 반드시 데리고 나가겠다고 결심했다.그런데 이때, 공장 문이 “쾅” 하고 열리더니 곧바로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정승우는 재빨리 권온유에게 눈짓했고 권온유도 알아채고는 즉시 땅바닥에 쓰러져 의식이 없는 척했다.정승우는 벽에 기대어 눈을 반쯤 감았다.“이 아이인가요?”영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맞아.”정대명은 영미를 흘깃 노려보며 묵묵히 대답했다.영미는 두 걸음 앞으로 다가서서 희미한 빛 속에 있는 아이를 살펴보더니, 곧 얼굴빛이 확 변했다.“이 아이... 혹시 권씨 집안의 막내딸 아니에요?”정대명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애초에 아이를 훔쳐 올 때 이 아이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 리가 없었다.“정대명 씨.”영미가 차갑게 웃으며 돌아보았다.“제가 최씨 가문 집안 아이를 훔쳐 오라고 했지, 권씨 집안 아이를 훔치라고 했나요? 이러고도 저를 속이지 않았다고요?”“그게...”정대명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영미 아가씨, 어차피 목적은 백인서를 곤경에 빠뜨리는 거잖아? 그러니 누구를 훔쳐 오든 상관없지 않아? 아이를 훔치기만 하면 유괴범이 되는 거니까.”이 말은 영미에게만 충격을 준 게 아니었다. 정승우의 귀에도 또렷이 들어왔다.“좋아요.”영미는 깊은숨을 들이마신 뒤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이 아이는 잘 지키고 있어요, 제가 다시 연락할 테니까.”...한편, 권씨 집안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권욱은 조순영을 탓하며 아이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했고, 조순영은 오열하며 남편을 원망했다. 조순영은 권욱이 바깥에서 여자와 부적절하게 얽히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라고 했다.“헛소리하지 마! 사람들이 나한테 어떤 소문을 퍼뜨렸는지 잘 알잖아. 결혼 생활 내내 너한테 부끄러운 일 한 적 없어.”“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정말 떳떳하게 행동했다면 왜 사람들이 당신만 가만두지 않는 건데?”며칠 전까지만
권온유의 질문에 정승우는 당황했다.권온유는 커다란 눈망울로 정승우를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했던 슈퍼맨 같은 오빠가, 이제는 먹을 것 하나 구하지 못하는 모습이 되어버린 것이다.정승우는 어색하게 입가를 씰룩이며 권온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이야기를 이어갔다.“너, 정말 배고파?”“네!”권온유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 작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원래는 엄마랑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 했어요. 엄마가 특별히 고등어조림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하셨거든요... 엉엉... 엉엉...”“울지 마, 울지 마! 그냥 생선 하나 가지고...”“나 배고파!”정승우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아이와 대화하는 건 그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겨우 권온유를 달래고 나서 정승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팔을 걷어붙이며 권온유에게 내밀었다.“너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 배고프면, 여기 한번 물어볼래?”권온유는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정승우를 바라보았다.“우리 집은 가난해서 늘 먹을 게 부족했거든. 그래서 어릴 때 너무 배가 고프면 이렇게 배고픔을 달랠 만한 걸 물곤 했어.”권온유는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배고픔을 달랠 만한 것'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정승우는 웃으며 계속 설명했다.“예를 들어 쌀통 같은 거야. 한때 쌀이 들어 있던 쌀통은 비어 있어도 쌀 냄새가 남아 있거든. 그래서 쌀통 가장자리를 살짝 물면서 하얀 쌀밥을 먹는 상상하는 거야. 그러면 배가 덜 고파져.”“그리고 이웃집에서 밥하는 냄새를 맡으며 그 밥을 먹는 상상을 하는 거야. 그러면 그렇게 배고프지 않더라고.”권온유는 정승우의 이야기에 넋을 잃고 입을 벌린 채 있었다. 정승우는 웃음을 터뜨렸다.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한때 정대명이 도박과 술에 빠져 정승우를 굶겼던 시절은 그야말로 비참한 순간들이었다.잠시 후, 권온유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고 정승우는 속으로 ‘큰일이다'라고 생
영미는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최지용을 지켜보았다.최지용은 다소 초조한 기색으로 구석에 앉아 휴대전화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 전화를 걸기도 했다.영미는 바로 뒤를 따라갔고 최지용의 낮고 다급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찾았습니까?”“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세요... 만약 납치범의 목적이 돈이었다면 분명 전화를 걸어올 겁니다!”영미의 가슴이 철렁하며 내려앉았다.납치범이라니? 대체 뭘 찾는다는 거지?백인서와 통화한 걸까?그때, 최군성이 큰 소리로 외쳤다.“지용이 형, 여기서 뭐 해요?”영미는 얼른 몸을 숨겼고 최군성은 최지용에게 다가가 최지용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우리 형이 찾고 있었는데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거예요? 어서 와서 먹고 즐기자고요!”최지용은 최군성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영미와 눈이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잠시 멈칫했다.영미는 급히 시선을 피하며 억지 미소로 인사했다.“지용 오빠...”“어, 영미?”최군성도 배윤아처럼 물었다.“여기 웬일이야? 형님이 널 초대한 것 같지 않은데?”“그게...”영미는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최군성은 영미의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최지용을 끌고 가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최지용은 점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영미가 도대체 여기 왜 있는 거지? 평소에는 볼 수 없던 사람이, 왜 하필 오늘 온유가 사라진 날에 나타난 걸까?그때, 최군형과 강소아가 가원이를 품에 안고 나타났다.강소아는 아이를 보행기에 앉혔고 아이는 보행기 가장자리를 잡고 작은 발을 내디뎠다. 이 모습에 방 안의 모든 사람이 환호성을 질렀다.영미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자리를 떠 교외의 버려진 공장으로 향했다.그 시각, 정대명은 영미의 지시에 따라 승합차를 몰고 공장에 도착해 있었고 영미가 도착했을 때 그는 공장 문 앞에서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영미는 핸드백을 휘둘러 정대명에게 던졌다.“정대명 씨, 감히 날 속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