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연은 샤워하고 갑판으로 나왔다.이때는 해가 하늘 한가운데 있어 정오일 것이다. 가을이지만 아직 기온이 높은 편이라 갑판 위는 따뜻했고 맨발로 밟아도 무척 편했다.강서연은 윤정재가 뱃머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윤정재도 그녀를 발견하고 몸을 돌려 그녀한테 인사를 했다.“아저씨.”강서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윤정재는 그녀더러 그의 옆에 앉으라고 손짓했다.“남자 친구는요?”그가 웃으면서 물었다.“빨래하러 갔어요.”강서연이 숲을 가리켰다.“그쪽 샘물 쪽에 있어요.”윤정재는 잠시 생각을 하고 그녀에게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평소에 둘이 집에 있을 때... 다 연준 씨가 빨래하는 거죠?”“집에 집사가 한 명 있는데, 평소에 집안일은 모두 그분이 하세요.”윤정재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그러면 이 얌생이는 부지런하지도 않고 집안일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에요?”강서연은 어색하게 웃었다.그녀도 아저씨가 왜 이렇게 자기 일에 많이 참견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자식들이 곁에 없어서 그런지 그분도 아버지의 노릇을 하고 싶은가 보다.참 이상한 노인이다...“사실... 연준 씨도 많이 하고 있어요. 지금 빨래를 하고 있잖아요! 그리고 제가 찬물에 손도 대지 못하게 해요.”“그럼 다행이네요.”최연준을 만난 이후로 장인의 머릿속에는 자동으로 테이블이 생성되었다.잘하면 가산점을 주고 못하면 감점을 준다.지금까지 최연준의 점수는 마이너스다.윤정재는 입을 삐죽 내밀고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찬물을 만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자랑할 만한 일인가... 남자라면 자기 여자가 찬물을 만지게 하지 말아야지!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하려고?”“아저씨, 무슨 말씀 하셨어요?”“아무것도 아니에요!”윤정재는 다시 웃으며 말했다.“도련님은 좋은 사람인 것 같네요. 둘 다 복이 많은 사람이어서 서로 만나게 된 것이에요.”강서연은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졌다.윤정재는 그녀의 머리가 아직 마르지 않은 것을 보고 서둘러 자신의 모자를 벗어 그
강서연은 웃음을 빵 터뜨렸다.“남자를 믿으면 안 돼요.”이 말이 그녀의 웃음 포인트다. ‘아저씨도 남자인데, 설마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아저씨, 남자들도 달라요!”강서연은 웃으며 말했다.“저는 제 남자에 대한 믿음이 있어요. 그 사람은 아저씨가 말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바보예요? 나쁜 놈들은 본인 스스로 얘기하겠어요?”윤정재는 자기도 웃긴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꿋꿋이 말해나갔다.“제가 직접 겪은 경험으로 말하는데, 반드시 자신을 위해서 많이 생각해야 해요! 그리고 누구도 쉽게 믿어서는 안 돼요!”“아저씨가 직접 경험한 거요?”강서연은 빠르게 핵심을 캐치했다.“아저씨는 어떤 것을 경험하셨어요?”“그게...”윤정재는 얼굴색이 변하더니 말이 없었다.그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가 어떻게 그녀의 어머니를 버렸고, 또 어떻게 윤제 그룹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고?아니면 그냥 자기가 믿을 수 없고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할까?하지만 그녀 앞에서 윤정재는 갑자기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할 용기를 잃었다.윤정재는 천천히 일어나 손을 흔들고 요트 조종석 쪽으로 걸어갔다.강서연은 자신이 방금 그렇게 물어본 것이 실례가 되지 않았는가 생각하며 조금 후회가 되었다.사실 그녀는 이 아저씨에 대한 인상이 매우 좋았다. 최연준이 그를 윤 회장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서야 그도 윤씨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엄마와 성이 같은 탓인지 강서연은 어딘가 모르게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잠시 멈췄다가 윤정재의 뒤를 따라 조종실로 들어갔다.이때 윤정재가 조종대 앞에서 설명서를 보며 조금씩 조작하고 있었다.때마침 최연준도 빨래를 하고 돌아왔다.“무슨 일이야?”그는 조종석 문 앞에 서서 강서연을 보고 말했다.“설마...”“요트의 신호 시스템을 킬 수 있는 법을 알아냈어요!”강서연은 흥분하며 말했다.최연준도 들어가서 도와줬는데 얼마 안 돼서 조종실은 전기가 통하고 화면도 켜졌다.이곳에서 핸드폰 신호가 잡히지
최연준이 눈살을 찌푸렸고 옆에 있는 윤정재의 얼굴에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이 신호로 역추적할 수 있어요?”윤정재의 질문에 최연준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가능할 거예요. 하지만 아직 설명서를 이해하지 못해서 조작할 줄 몰라요.”윤정재는 나머지 설명서를 가져다 차근차근 읽어보기 시작했다.“윤 회장님.”잠깐의 침묵 후 최연준이 입을 열었다.“아무래도 이 구조 신호는 우리가 아니라 경원이한테 보내려 했던 것 같아요.”“경원 씨한테요?”윤정재는 눈썹을 치켜올렸다.“그럼 조난 당한 유람선이 더 있단 말이에요?”“그럴 수도 있어요...”실눈을 뜬 최연준의 뇌리에 뭔가가 전광석화처럼 스쳐 지나갔다.예전에 배경원이 그에게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 나중에 별다른 결과가 없이 그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설마... 그 여자는 배경원과 만나기 싫은 게 아니라 만날 수 없었던 것인가?최연준은 순간 마음이 움찔했다. 살려달라는 구조 신호를 빤히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무선 통신과 인터넷이 끊겼다 연결됐다 했지만 최연준과 윤정재가 끊임없이 신호를 보낸 덕에 드디어 연락이 닿았다.이틀 후, 배경원과 방한서는 구조팀과 함께 섬에 도착하여 세 사람을 무사히 구출했다.강서연은 뱃머리에 서서 점점 멀어져가는 섬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섬이 이젠 멀어지다 못해 하나의 검은 점이 되면서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녀는 섬 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뭔 생각을 그렇게 해?”그때 누군가가 그녀에게 겉옷을 걸쳐주었다. 강서연이 고개를 돌리자 최연준의 따뜻한 눈빛과 딱 마주쳤다.“여기 바람이 세.”최연준은 혹시라도 그녀가 추울까 꼼꼼하게 겉옷을 입혀주었다.“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해야지.”강서연은 그를 향해 히죽 웃고는 그의 가슴팍에 살포시 기댔다.“내가 무슨 생각 했는지 맞혀봐요.”“음...”최연준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저 섬을 떠나는 게 아쉬워서 그러지?”“어떻게 알았어요?”“난 당신이 무
최연준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너 언제부터 이렇게 눈치가 무뎌졌어?”방한서는 말문이 막혀버렸다.“나 저 섬 사겠다고. 인제 알아들었어?”오성으로 돌아온 후 최연준은 바로 그 섬을 사들여 개발에 돌입했다. 최재원을 포함한 최상 그룹 사람들 모두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다.오성 주변의 몇 개 섬 중에서 그 섬의 지리적 위치가 가장 별로였고 면적도 가장 작았다. 풍경이 아름다운 것 외에는 상업 개발의 가치가 전혀 없는 섬이었다.그 바람에 이사회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도련님한테 무슨 마가 꼈나? 거기 한 번 다녀오더니 머리가 어떻게 된 것 같아요!”“저 섬은 사봤자 밑지는 장사인데. 최상 그룹에 이런 이기적인 후계자가 있다는 게 참으로 안타깝네요!”어떤 이는 심지어 이런 얘기까지 했다.“그 섬에 설마 무슨 미스터리한 힘이 있어서 도련님을 홀린 건 아니겠죠?”하지만 최연준의 대답은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었다.“제가 언제 이 섬을 상업적으로 개발한다고 했어요?”사람들 모두 화들짝 놀란 눈치였다.“그게 무슨 말씀이죠?”최연준은 손으로 여유롭게 펜을 돌리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전 그 섬을 살 때 최상 그룹의 돈을 일전 한 푼도 쓰지 않았고 또 개인 명의로 샀어요. 개발한다고 해도 대외적으로 개방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사님들, 쓸데없는 근심 좀 하지 마세요!”이사회 임원들은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평소 늘 조용하고 겸손하게 움직이던 최연준이 갑자기 떠들썩하게 섬을 샀다는 건 마가 낀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특별히 연회를 열어 기자들까지 아주 많이 초대했다.연회 시작 전에 기자들은 최연준이 연회에서 서교 땅의 배후 보스가 누구인지 발표할 거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서교 땅의 배후에 진짜 주인이 있을까요?”많은 언론사들이 추측하기 시작했다.“제가 보기에 최상 그룹에서 이목을 끌려고 일부러 이러는 것 같아요. 어차피 이 프로젝트는 최연준 도련님이
임나연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며칠 전 임나연이 최재원을 찾아갔을 때 최재원은 여전히 임나연과 최연준의 결혼을 밀어주겠다고 했었다.임씨 가문 사모님이 임씨 가문과 최씨 가문은 혼약 같은 걸 맺은 적이 없으니 결혼은 젊은 사람들이 알아서 결정해야 한다고 완곡하게 설명했었지만 임나연은 여전히 고집을 꺾지 않았다.그녀는 무슨 수를 쓰든 최씨 가문에 시집가고 싶었다. 그래야만 부모님이 그녀를 높이 살 거라고 생각하니까. 최연준이라는 든든한 배후가 생긴다면 최씨 가문에서도 그녀를 업신여기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그때가 되면 그녀의 출생의 비밀이 다른 사람에게 들킬까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된다. 그녀의 출생의 비밀은 영원히 세상밖에 공개돼서는 안 된다.“연준 씨.”임나연은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지금은 충동적으로 이런다는 거 알아요. 서연 씨가 좋은 사람인 건 맞지만 연준 씨랑은 어울리지 않아요. 결혼은 집을 짓는 것과 같아요. 기반이 튼튼해야 더 높이 지을 수 있잖아요. 안 그래요?”최연준이 아무 말이 없자 임나연은 그에게 살며시 다가갔다.남자의 날카로운 턱선은 거의 완벽에 가까웠고 타고난 귀티와 도도함은 여자를 미치게 했다. 이 또한 임나연이 최연준을 가지려는 이유 중 하나였다. 최연준이 허영에 물든 다른 재벌 집 자제들보다는 훨씬 나은 건 사실이었다.“아참.”임나연은 계속하여 뻔뻔스럽게 웃으며 말했다.“이번 연회에서 연준 씨가 서교 땅 프로젝트의 진짜 대표가 누구인지 발표한다고 밖에서 미친 듯이 떠들어대고 있던데... 우리가 이렇게 오랜 시간 손을 잡으면서 매주 최상 그룹의 보고회에 참석했었지만 진짜 대표인지 뭔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연준 씨가 기자들한테 거짓말한 거 맞죠? 아니면... 진짜 대표가 설마 할아버지인가요?”“쓸데없는 생각 많이도 했네요.”최연준의 말투는 냉랭하기 그지없었다.“진짜 대표를 본 적이 없다고 해서 없는 건 아니에요. 이따가 곧 만날 테니까 조급해하지 말아요.”임나연의 표정이 잠깐 흔
“그런 말씀 마세요, 사모님.”최연준은 연장자에 대한 예의는 그래도 지켰다.“그저께 할아버지께서 아저씨랑 사모님 얘기를 꺼내시면서 연회에서 대신 안부를 물어달라고 하셨어요.”“회장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줘요.”임씨 가문 사모님은 고개를 살짝 들고 말했다.“회장님께서 지금까지 우리 가문을 많이 도와주신 걸 알아요. 우리도 은혜를 잊지 않고 있으니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요!”“네.”최연준은 인사치레로 몇 마디 나눈 후 다른 손님을 맞이하러 갔다.임나연은 화가 가라앉지 않아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손발도 차가워졌다. 임씨 가문 사모님은 노여움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째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여긴 나랑 네 아빠만 있으면 돼. 적응하지 못하겠으면 먼저 집에 가 있어.”“엄마!”임나연은 조급해졌다.“회장님께서 저랑 연준 씨의 결혼을 허락하셨는데 엄마는 왜 계속 막으려고 하세요?”“난 체면이 중요해!”임씨 가문 사모님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임나연은 입술을 앙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임씨 가문 사모님은 그녀의 팔을 덥석 잡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끌고 와 째려보며 말했다.“널 보육원에서 데려오긴 했어도 그래도 임씨 가문에서 이십 년 넘게 살았어. 난 널 친딸처럼 키웠고 심지어 너한테 수정이보다도 더 많이 신경 썼어. 그런데 넌 어떻게 이리 뻔뻔할 수가 있어?”“엄마.”임나연이 울먹였다.“제가 연준 씨랑 결혼하려는 건 우리 가문을 위해서...”“그 입 다물어!”임씨 가문 사모님이 사나운 표정으로 말했다.“진짜 임씨 가문을 위한다면 창피한 짓 좀 그만하고 더는 강서연 씨도 찾아가지 마! 회장님이 널 밀어준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야? 최연준이 저렇게 싫다는데 설마 납치라도 해서 너랑 결혼시키겠어? 임나연, 정신 똑바로 차려! 괜히 말썽 일으키지 마!”임나연은 일단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녀를 쳐다보는 임나연의 눈빛에 원망이 짙어졌다. 임씨 가문 사모님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계속하여 말했다.“앞으로는 수정이 보러 가지 않아도 돼. 나 임
강서연은 연회장 한가운데 당당하게 서 있었다. 노란 드레스가 어찌나 우아하고 고귀한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았다. 사람들의 이목이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쏠렸다.사회자도 그녀의 미모에 잠깐 넋을 놓았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조수에게서 큐카드를 받았다. 그는 마른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활짝 웃으며 강서연을 소개하기 시작했다.“다들 이미 눈치채셨죠?”사회자의 목소리는 진중하면서도 힘이 넘쳤다.“이분이 바로 서교 땅 프로젝트의 진짜 대표이자 새로 상장한 세 회사의 대표 강서연 씨입니다.”그 순간 연회장의 사람들은 제자리에 얼어붙었고 온 세상이 마치 진공 속에 빠진 듯 조용했다. 몇 초 동안의 침묵이 흐른 후 연회장에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강서연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을 훑어보다가 임나연에게 시선이 머물렀다.최연준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마주하여 다정하게 웃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그 어떤 빛보다도 반짝이는 것 같았다.“발표할 일이 하나 더 있어요.”그녀를 쳐다보는 최연준의 얼굴에 사랑이 가득했다.“이 섬을 사서 개발한 다음에 강서연의 개인 섬으로 선물할 겁니다.”사람들이 웅성웅성하기 시작했다.“나중에 여러분들이 섬에 놀러 오고 싶으면 섬 주인의 동의를 거쳐야 합니다!”강서연은 그를 보며 쑥스럽게 웃고는 그의 어깨에 살포시 기댔다.최연준에게 다른 마음을 품었던 규수들은 그저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만 보았다. 하지만 임나연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인파 속에 서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강서연은 약이 바싹 오른 임나연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나연 씨.”강서연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오랜만이에요.”임나연의 두 눈에 원망이 가득했다.임씨 가문 사모님은 혹시라도 임나연이 무슨 사고라도 칠까 봐 황급히 나서서 말했다.“오랜만이에요, 서연 씨.”“사모님이시군요.”강서연은 그녀를 보며 말했다.“사모님은 딸한테 참 자상하신 것 같아요.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시네요. 설마 제가 나연 씨를 인적 드문 곳
강서연이 부드럽게 말했다.“저도 대표는 처음이라서 앞으로 부족한 게 있으면 많이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최연준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저쪽에 협력 파트너가 몇 분 더 계셔. 같이 인사드리러 가자!”두 사람이 떠나고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그 자리엔 임나연 혼자만 쓸쓸하게 남았다.임씨 가문 사모님은 두어 걸음 갔다가 다시 돌아섰다.“계속 거기 서 있을 거야? 아직도 망신을 덜 당했어?”임나연은 화나고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이 임씨 가문 사모님을 뒤따라 연회장을 나섰다....“연회의 상황은 대충 이러합니다.”진용수가 윤정재에게 보고했다. 윤정재는 거실의 통유리 앞에 서 있었다. 이곳은 그의 개인 저택이었고 에덴과 아주 가까웠다.“서연 씨는 역시 대단해요.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임나연을 해결했어요!”진용수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윤정재는 뿌듯한 마음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당연히 대단하지, 누구 딸인데!’“그나저나...”그는 멈칫하다가 눈썹을 치켜올렸다.“최연준 그 자식이 정말로 서교 땅과 회사를 전부 서연이한테 줬어?”“네.”진용수가 고개를 끄덕였다.“제가 다 알아봤어요. 서교 땅 프로젝트와 최연준이 설립한 세 회사, 그리고 최연준의 명의로 되어 있던 해외 자산과 부동산까지...”“전부 서연이 명의로 됐어?”윤정재의 두 눈이 반짝였다.“네.”윤정재는 생각에 잠긴 듯했다.한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는 돈이 유일한 판단 기준은 아니지만 중요한 요소이다.최연준이 강서연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절대 그 많은 재산을 그녀 명의로 돌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 명의로 돌렸다는 건 그녀에게 든든한 보장을 주기 위해서였다.윤정재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최연준에 대한 생각이 조금 바뀐 것 같다.“그러니까... 내 딸 지금 돈이 엄청 많다는 거네?”진용수가 히죽 웃었다.“회장님의 관심사는 참...”“참 뭐?”윤정재가 눈썹을 치켜올렸다.“돈은 당연히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서교 땅
“어떻게 소피아라는 걸 확신하죠?”배윤아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부모님이 회사의 핵심 자료를 제게 모두 맡기셨어요. 그런데 그걸 받은 지 이틀 만에 공격을 당했죠. 이게 단순한 우연일까요?”임지강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그 자료들은 어디 있어요?”“아마 소피아가 가지고 있을 거예요. 그 자료들은 너무 중요해서 항상 제 곁에 두고 다녔거든요. 하지만 그날 제가 기절하고 다시 깨어났을 때, 가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다만...”“다만 뭐요?”“법인 도장은 가방 안에 없었어요.”배윤아는 미소를 지으며 약간 능글맞은 표정을 지었다.“법인 도장은 본사가 모든 자원을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이에요. 엄마가 제게 주자마자 저는 바로 군성이에게 맡겼어요. 지금 법인 도장은 최씨 가문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어요.”“그렇다면 소피아가 자료를 손에 넣더라도 아무 쓸모가 없겠군요?”배윤아는 확신에 차서 고개를 끄덕였다.“똑똑하네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었다.“배씨 가문 사람들도 다 무능하진 않나 보네요.”“임 선생님...”배윤아는 고개를 약간 숙이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오빠가 송윤지에게 잘못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는 임 선생님이 우리 가문에 복수하려고 저를 납치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아요. 선생님은 그런 수준 낮은 사람이 아니니까요.”임지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확실히 똑똑한 사람이네요.”그러나 배윤아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그런데... 정말 우리 오빠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요?”임지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임지강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가족들에게 안부 전화라도 주세요. 걱정을 많이 하고 계실 거예요.”“이미 군성이에게 연락을 했어요.”배윤아가 말했다.“군성이에게 조용히 아빠에게 알려 드리라고 했어요. 엄마는 충격을 받으시면 안 되니까요... 하지만 제 상황을 오빠에겐 비밀로 해야 해요. 오빠와 소피아는 제가 조 회장님에게 잡혀 있고 선생님이 일부러 복수를 위해 조 회장님을
“설마...”“소피아!”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이름을 입에 올린 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정말 소피아일 줄이야.”임지강이 담배를 꺼내 들었다. 조 회장이 눈짓을 하자 부하가 공손히 불을 붙였다.방 안은 금세 니코틴 냄새로 가득 찼고 임지강은 잠시 침묵하며 담배 재를 털어냈다.“아마... 조 회장님도 지금 저와 같은 처지겠죠.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했다는 누명을 쓰게 됐으니 말이에요.”“그러게 말이야.”조 회장은 차갑게 웃었다.“겉으로는 온갖 아부를 떨면서도 뒤에서는 이런 음모를 꾸미고 내가 배윤아를 납치했다고 소문까지 퍼뜨리고 있더군.”“회장님과 제가 가까운 사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의심의 화살을 제게도 돌리겠죠.”임지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면, 연루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겁니다. 저 때문에 저의 매형까지 연루되면, 배씨 가문과 육씨 가문의 사이도 틀어질 거고요.”“그 여자는 이런 식으로 우리 모두를 자기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조 회장님 생각은 어떻습니까?”“웃기지 말라 그래.”조 회장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임지강은 조 회장의 꽉 쥐어진 주먹을 발견했다. 그의 손등에는 화가 잔뜩 난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조 회장님.”임지강은 잠시 침묵한 뒤 부드럽게 말했다.“운산시 광산의 가격을 조작하도록 제가 이미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 두 광산은 이제 그렇게 가치 있는 자산이 아닙니다.”“알고 있어.”조 회장은 임지강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이 일은 원래 자네 복수를 위해 시작한 일이야. 자네의 화가 조금이라도 풀린다면 내 수고도 헛된 게 아니야. 하지만 문제는...”조 회장은 손짓으로 방 안을 가리켰다.그때 방 안에서 배윤아가 몸을 뒤척이며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임지강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배윤아와 단둘이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조 회장은 잠시 망
임지강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차가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그를 철저히 파산시키고 싶습니다.”“배씨 가문 전체를 함께 무너뜨리겠다는 뜻인가?”조 회장이 묻자, 임지강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말하면, 예전의 저라면 그렇게 했겠죠. 하지만 지금은...”“지금은 마음이 약해졌다는 건가?”조 회장이 비웃듯 웃으며 말했다.“내가 알던 임지강은 그런 자비를 베풀 인물이 아닌데?”임지강도 미소를 지었다.그 웃음 뒤로 누군가의 맑은 눈빛과 깨끗한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이번 일은 송윤지가 부탁해서 오게 된 것이었다.송윤지는 배윤아의 실종 소식을 듣고 매우 걱정하고 있었다. 비록 배현진과 부부의 연을 맺지 못했지만, 배윤아와는 과거에 친하게 지냈던 사이였기에 친구로서 걱정되었기 때문이다.임지강 자신도 이곳에 올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송윤지의 부탁 때문이고 또 하나는 배윤아의 납치 사건이 왜 갑자기 자신에게 덮어씌워졌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임지강은 배윤아와 거의 만난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은 사실상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조 회장님, 전 자비를 베푸는 게 아닙니다.”임지강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단지 이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이미 많은데 한낱 파리 한 마리와 얽혀서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서입니다. 그 녀석에게 적당히 벌을 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게다가 저는 배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과는 아무런 원한도 없으니, 배씨 가문을 완전히 망가뜨릴 필요는 없습니다.”“흠...”조 회장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1조라... 적지 않은 금액이지. 배현진은 은행에서 전 재산을 담보로 대출받았다고 하더군. 이 일이 발각되면 한동안 꽤 고생하겠지.”“조 회장님, 사실 오늘 제가 온 이유는 다른 목적도 있어서입니다.”임지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약간 굽히며 공손히 말했다. 그러나 조 회장은 손짓으로 그를 제지하며 미소를 지었다.조 회장은 아무 말 없이 손짓으로 따라오라는
배현진은 병원 복도에 있는 긴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잡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완전히 무너진 모습이었다.“그럴 리가 없어...”한참 동안 앉아 있던 배현진은 갑자기 고개를 들며 말했다.“연준 아저씨와 서연 이모는 소피아와 함께 지낸 적이 없잖아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소피아는 절대 저를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이 녀석아,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고집을 부릴 거야.”최연준이 엄하게 꾸짖었다.배경원은 아무 말 없이 아들의 손을 잡았다. 그의 눈에는 깊은 절망이 서려 있었다.“그만해요, 셋째 형님...”배경원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수정이가 응급실에 있는데, 이 아이와 더 이상 다투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없는 아들이라고 생각하려 합니다.”“아버지!”“꺼져버려!”배경원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눈빛 너머에는 모든 걸 놓아버린 듯한 깊은 허무가 스며 있었다.배현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돌아섰다. 떠나기 전, 그는 다시 돌아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윤아를 반드시 무사히 데려올게요. 엄마도 무사할 거예요. 우리 가족은... 예전처럼 다시 행복해질 거예요.”배경원은 아들에게 단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잠시 후, 응급실의 불이 꺼졌다. 배경원은 화살처럼 뛰어가며 아내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의사가 땀으로 흠뻑 젖은 마스크를 벗으며 가까스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배 선생님, 사모님께서는 일단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뭐라고요?”강서연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일단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건, 앞으로 위험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다들 진정하세요.”의사는 부드럽게 설명했다.“사모님의 상태가 많이 복잡합니다. 곧바로 특수 병동으로 옮길 예정이라 당분간 면회는 어려울 겁니다. 이번 주가 아주 중요한 시기이긴 하지만, 제 판단으로는 이 고비를 무사히 넘기실 가능성이 큽니다.”세 사람은 안도의 숨을 쉬며 그나마
“아내라고?”강서연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현진이와 정식으로 결혼한 적 있니? 다른 사람과 약혼한 상태에서 끼어든 건 너잖아. 명분도 없는 관계에 ‘아내’라는 말을 쓰다니, 웃음거리밖에 안 될 거야.”“최 사모님...”“갑자기 생각난 건데.”강서연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수정 씨가 쓰러졌을 때 네가 침대 옆에 있었던 거 맞지?”“아, 네.”소피아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제가 현진 씨를 대신해 효도하러 갔던 거예요. 하지만 어머님 건강이 그렇게 나쁘실 줄은 몰랐습니다.”“수정 씨가 쓰러지기 직전에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말해보렴.”소피아는 순간 멈칫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말할 수 없는 이유라도 있니?”강서연은 한 발짝 다가가며 소피아를 몰아붙였다.“수정 씨는 평소 건강관리를 철저히 하던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쉽게 쓰러질 리 없지. 분명 큰 충격이 있었을 거야. 쓰러지기 직전 병실에 너 혼자 있었다며?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해.”“서연 이모,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배현진은 소피아를 자신의 뒤로 끌어당기며 소피아에게 나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소피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복도를 따라 빠르게 사라졌다.소피아가 사라지자, 배현진은 조심스럽게 말했다.“서연 이모, 소피아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배현진!”강서연은 배경원이 아들을 두 번이나 때린 이유를 이제야 완벽히 이해한 듯,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너 어떻게 이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니? 네 엄마는 지금 저 안에 누워 있어.”“정말로 소피아와는 아무 관련이 없어요...”배현진은 조심스럽게 입술을 핥으며 설명했다.“서연 이모, 사실 소피아도 자책하고 있어요. 그날 소피아도 윤아의 안전을 걱정하다가 엄마 앞에서 그만 실수로 말을 흘리고 만 거예요. 그래서...”“뭐라고?”최연준이 눈을 부릅뜨며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배현진, 네 엄마 쓰러졌을 때 넌 방에 없었잖아.”“소피아가 제게 그렇게 말했어요.”“너...”최연준은 순간
병원 응급실 밖.배경원은 의자에 주저앉아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충혈된 눈으로 응급실 문을 응시하며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한때 당당했던 그의 어깨는 지금 축 처져 있었다. 뒷모습만으로도 절망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배경원은 주먹을 단단히 쥐었지만, 온몸은 떨리고 있었다.적막이 흐르는 복도는 불길한 정적마저 감돌았다.결국, 억눌렀던 감정이 터져 나와 눈물이 조용히 뺨을 적셨다.“경원아!”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배경원이 고개를 들자, 최연준과 강서연이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질 뻔한 배경원을 최연준이 재빨리 부축했다.강서연은 응급실 문을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치료는 연희 씨와 신석훈 씨의 제자들이 맡고 있어요. 모두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이에요. 수정 씨는 평소 건강을 잘 관리하셨으니 금방 회복될 겁니다.”“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최연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갑자기 병세가 심각해진 거야? 그리고 윤아는...”배경원은 떨리는 손으로 최연준의 팔을 붙잡으며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셋째 형님, 제발 윤아를 찾아주세요. 딸은 사라지고 아내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어요. 둘 다 잃으면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그런 바보 같은 말 하지 마세요. 둘 다 무사할 겁니다.”강서연이 단호히 말했다.“윤아는 우리 집안의 며느리예요. 누가 윤아를 해치려 한다면 최씨 가문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어요. 그 결과가 어떤 건지 모를 리도 없고요. 그리고...”강서연은 순간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을 이어가려다 복도 끝에서 배현진이 소피아와 함께 급히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는 말을 삼키고 배현진을 노려보았다.“연준 아저씨, 서연 이모...”배현진은 어딘가 죄책감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배현진은 배경원에게 다가가 팔을 살며시 부축하며 조심스레 말했다.“아버지...”그 순간, 배경원이 배현진의 뺨을 내려쳤다.배경원은 분노로 가득 찬 눈빛으로 배현진을 노려보며
임수정은 갑작스러운 기침을 하며 침대 옆 경보 벨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소피아에 의해 단호히 막혔다.“사모님, 제 말을 듣는 게 좋으실 겁니다.”소피아는 부드럽지만 섬뜩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제가 만든 음식이 그렇게 형편없지도 않고 독을 넣을 만큼 제가 어리석지도 않아요. 안심하세요. 이 모든 재료는 사모님의 건강을 생각하며 준비한 겁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온 이유는 진심으로 사모님을 돌보고 싶어서예요.”임수정은 가슴을 움켜쥔 채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임수정의 눈엔 불신과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요즘 배경원은 외출이 잦아졌고 이유를 묻자, 회사 일 때문이라며 안심하라는 대답뿐이었다.그럼에도 임수정의 마음속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점점 커져만 갔다.깊게 숨을 들이마신 임수정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겉으론 소피아의 말을 따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사모님, 잘 생각하셨어요.”소피아는 임수정에게 쿠션을 건네며 은은하게 웃었다.“우리 결국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될 사이잖아요. 지금부터 제 존재에 익숙해지시는 게 좋을 겁니다.”“흥! 내 아들이 눈이 먼 게 분명해.”임수정은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떻게 너 같은 사람에게 속을 수 있는지...”“저를 깔보지 마세요. 저는 이혼하고 아이도 데리고 있지만, 현진 씨를 향한 제 진심은 변하지 않아요. 저는 현진 씨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누구와는 달리 겉으론 순수한 척하면서 남자를 유혹하는 짓은 안 한다는 건 알아주셨으면 해요.”“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임수정은 언성을 높이며 노려보았다.소피아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더욱 날카롭게 말했다.“사모님, 제가 말하는 사람은 바로 사모님의 그 옛날 며느리가 될 뻔했던 그 사람이에요.”“헛소리하지 마!”임수정은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그 일은 우리 배씨 가문이 송윤지에게 잘못한 일이야. 그 애의 명예를 더럽히지 마.”“사모님,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없는 법이에요.”소피아는 태연한
“너와 상관없다고?”임우정은 다급하게 외쳤다.“네 형부가 이미 윤아의 통화 기록을 조사했어. 윤아가 실종되기 전에 조 회장이랑 통화했던 게 드러났다고! 지강아, 너와 조 회장이 어떤 관계인지 나한테도 숨길 작정이었어?”임지강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사건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머릿속에서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그래요. 저와 조 회장이 가까운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와 배윤아 사이엔 원한이라곤 없잖아요... 누나, 왜 저를 의심하는 거예요?”“지강아!”임우정의 목소리가 더욱 절박해졌다.“너, 송윤지 일 때문에 배현진을 미워하는 건 알아. 하지만... 네 말대로라면 윤아한테까지 증오를 전가하면 안 되잖아!”“누나, 정신 좀 차리세요!”임지강의 목소리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어둠이 깃든 그의 얼굴은 단호함을 더했다.“무슨 근거로 저를 의심하시는 건데요?”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임지강의 강경한 태도에 임우정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한참 후, 임우정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렇다면... 배씨 가문을 좀 도와줄 순 없겠니?”임지강은 코웃음을 치며 전화를 끊었다.수화기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리자 맑고 투명한 송윤지의 눈빛과 마주쳤다.“배씨 가문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요양원 병실 문 앞.소피아의 하이힐 소리가 텅 빈 복도를 울리며 퍼져 나갔다. 소피아의 손엔 보온 도시락이 들려 있었고 문 앞을 지키는 경호원들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제가 사모님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안으로 들여보내 주세요.”경호원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말없이 서 있었다.“이건 도련님께서 지시하신 거예요.”소피아는 휴대전화를 꺼내 그들에게 일부러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실래요? 아시다시피 사모님 건강이 좋지 않으세요. 세 끼 제대로 챙겨 드시지 못하면 여러분들이 책임지실 겁니까?”경호원들은 난처한 얼굴로 머뭇거리다 결국 길을 내주었다.“이제야 말이 통하네.”소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앞으로
송윤지는 겨우 한 모금을 마시고 사레가 들어 술을 뱉을 뻔했다. 마신 술이 얼굴에 스며든 듯 송윤지의 뽀얀 볼은 어느새 매혹적인 와인빛으로 물들었다.임지강은 그런 송윤지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임지강은 송윤지에게 다가가 가볍게 등을 두드리며 입가에 묻은 술자국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임 대표님...”송윤지는 조심스럽게 임지강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 애썼다.하지만 임지강은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아 통유리창 앞까지 데려갔다.송윤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 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깊고 짙은 밤하늘에 수많은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잘게 부서진 불빛들이 반짝거렸다.불꽃은 색과 모양을 끊임없이 바꾸며 꿈같은 광경을 만들어냈다.송윤지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마음에 들어요?”임지강의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송윤지의 귀에 스며들었다.“잠깐 눈 좀 감아 봐요.”“네?”임지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제가 별을 따다 줄게요.”마지막 불꽃이 빛의 궤적을 남기며 밤하늘로 사라지고 다시 평온한 고요가 찾아왔다.송윤지는 미소를 지으며 임지강의 말을 따라 눈을 감았다. 그러자 따뜻하면서도 약간 서늘한 남자의 손길이 송윤지의 손을 잡더니 손바닥 위에 무언가가 놓이는 느낌이 들었다.송윤지는 깜짝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손에는 정말로 ‘별’이 있었다.“이건...”그것은 목걸이였다. 펜던트는 별 모양으로 깎아낸 다이아몬드로, 완벽하게 다듬어져 찬란한 빛이 퍼지고 있었다.“제가 해줄게요.”임지강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이건 너무 비싼 거라서 제가...”“받아줘요.”임지강의 눈빛은 따스하고도 단호했다.“그리고...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송윤지는 고개를 숙였다. 귀 끝까지 붉어진 송윤지의 얼굴은 마치 열이 오른 듯했다.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의 귓가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살짝 정리해 주었다.“사실,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저 윤지 씨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