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비겁하기 짝이 없군요!”윤정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최진혁은 교활한 눈빛으로 그를 보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나쁜 생각밖에 없는 것 같다.최연준이 전용 비행기를 탔다가 사고가 났었던 사실을 윤정재는 모르고 있었다. 그때 그와 최진혁은 연회에서 알게 된 사이인데 기껏해야 고개나 끄덕이며 인사한 정도였다.남양의 윤제 그룹은 제약 회사 말고도 민용 공항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남양 지역의 몇몇 대형 공항도 전부 윤제 그룹이 관리하고 있었다.하여 최진혁은 윤정재에게 사실을 숨기고 기술 직원을 매수하여 최연준의 전용 비행기에 손을 썼던 것이었다...그러고는 윤정재에게 엄청난 금액의 보험증명서를 보여주면서 거기에 적힌 수천억에 달하는 보험금이 그의 것이라고 했다.윤정재는 자신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에 휘말리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회장님, 이 일이 만약 퍼져나가기라도 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회장님의 변명을 들으려 하지도 않고 회장님의 부하가 최연준을 해쳤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때가 되면 회장님이 평생 쌓아온 명예도 함께 무너지겠죠!”윤정재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보험증명서를 혐오스럽게 힐끗 보고는 자리를 떠났다.그러다가 나중에 죄책감이 들어 최연준의 행방을 찾아다녔다. 그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소식을 알게 된 윤정재는 이건 하늘이 그에게 준 기회라고 생각했다.하여 사람을 보내 최연준이 얼마나 다쳤는지 상태를 몰래 알아보게 했고 또 약까지 보내줬다. 그때 보낸 약으로 거의 이삼 년은 버틸 수 있었는데 이제 그 기한이 거의 된다...“최진혁 씨.”그의 눈빛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난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당신 같은 나쁜 사람과 손을 잡지도 않아요.”“하하, 윤 회장님.”최진혁이 코웃음을 쳤다.“어디서 고상한 척이에요? 회장님이 무슨 짓까지 해가면서 그 자리에 앉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아무리 그래도 사람들은 내 앞에서 대놓고 얘기하진 못해요. 왜인 줄 알아요?”윤정재는 뒷짐을 지고 카리스마를 뽐냈다
강서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화려한 치장에 선글라스를 끼고 과한 귀걸이와 목걸이를 한 여자가 흐느적거리며 걸어왔다.“프로 매니저팀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선글라스를 벗고 강서연을 쳐다보는 그녀의 태도는 쌀쌀맞기 그지없었다.“어디 있는 거죠?”하 매니저는 강서연과 눈빛을 주고받고는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그러자 강서연이 먼저 웃으며 악수를 건넸다.“문나 씨죠? 저는...”문나는 오만함이 하늘을 찌를 기세였고 그녀가 건네는 악수도 가볍게 무시했다. 강서연은 허공에 머무른 손을 멋쩍게 거두어들였다.하 매니저가 한 걸음 나서서 말했다.“문나 씨, 이분은 어진 엔터테인먼트의 수석 비서 강서연 씨입니다. 연예인 관리를 담당하고 있으니, 앞으로 문제 있으면 서연 씨와 얘기하시면 돼요.”“아, 강서연 씨!”문나는 새로 한 크리스탈 네일을 보며 말끝을 길게 늘어뜨렸다.“서연 씨는 경험이 있어요? 전 아무나 케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문나 씨. 강 비서님이 이 바닥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업무 능력이 아주 뛰어나요.”“업무 능력이 뛰어난가요, 아니면 남자를 달래는 능력이 뛰어난가요?”하 매니저는 일그러진 얼굴로 강서연을 쳐다보았다. 강서연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조금 전 문나는 임나연의 추천으로 들어온 사람이라고 하 매니저에게서 들었다.‘의도가 불순한 걸 보니 날 노리고 온 거 맞네.’하지만 근래 문나의 인기가 높은 건 사실이었다. 대표작이 없어도 팬덤만으로도 평생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이 넉넉하게 살 수 있었다.이게 바로 어진 엔터테인먼트가 그녀와 계약한 이유겠지.숨을 깊게 들이마신 강서연이 뭔가 얘기하려던 그때 휴대 전화가 진동했다. 먼 유럽에서 걸려 온 김자옥의 전화였다.강서연은 그 핑계로 자리를 피하여 김자옥의 사무실로 들어와 문을 걸어 잠갔다. 방음 효과가 좋아 밖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대표님.”그녀는 전화를 받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강서연이 물잔에 물을 따르고 한 모금 마시려다가 하마터면 뿜을 뻔했다. 전화를 끊은 강서연은 사무실에서 나왔다.문나는 밖에서 조급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그녀를 째려보았다.“대체 뭐 하는 거예요? 이러면서 프로라고 할 수 있어요?”문나가 목청 높이 소리쳤다.“어진 엔터테인먼트는 그래도 업계에서 실력 있는 큰 회사인데 이런 매니저가 있다는 게 말이 돼요? 오자마자 연예인을 혼자 내팽개치기나 하고. 정말 예의라곤 없네요!”더는 참을 수 없었던 하 매니저가 입을 열었다.“그러는 문나 씨는 예의가 있고요?”문나는 하 매니저를 째려보았다.“강 비서님은 김 대표님의 수석 개인 비서예요. 모든 연예인들의 활동과 그 외 많은 일을 담당하고 있어요. 나석진 씨마저도 강 비서님의 말을 따라야 하는데, 문나 씨 설마 자기 지위가 나석진 씨보다도 높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하 매니저의 말은 그녀의 정곡을 찔렀다. 문나는 하는 수 없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섰지만 얼굴에는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다.강서연은 웃으며 책상 위의 서류를 집었다. 서류에 몇몇 연예인들의 스케줄이 적혀있었다.“이건 문나 씨 스케줄이에요.”강서연은 서류를 문나에게 건넸다.“이 프로그램에 출연하려면 주의 사항이 몇 가지 있어요. 나중에 문나 씨 매니저한테 미리 얘기해 둘게요.”“이건 무슨 프로그램이에요?”문나는 서류를 대충 훑어보고는 다시 옆으로 휙 던졌다.“저 안 나가요!”“이건 회사의 지시예요.”강서연은 그녀를 싸늘하게 쳐다보았다.“회사 지시? 강 비서님, 전 유명한 감독님과 대형 프로젝트를 보고 어진 엔터테인먼트랑 계약한 거예요. 지금 저한테 영화나 드라마를 주는 게 아니라 예능프로에 출연하라고요?”“문나 씨는 팬덤이 큰 연예인이라서 얼굴을 자주 비춰야 해요. 그리고 지금 문나 씨한테 어울리는 작품이 없어요.”“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죠?”문나는 그녀를 아니꼽게 노려보았다.“문나 씨.”강서연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문나 씨가 벌어들인 돈은 전부 회사에 들어가는데 제가
강서연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문나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곽보미는 업계의 유명한 감독이고 작품마다 거의 다 국제상을 받았다. 그녀는 국내의 연예계에 큰 돌풍을 일으켰고 국제 영화계에서도 이름을 날렸다.하여 연예계에 종사하는 사람들 모두 곽보미의 팀에 들어가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물론 문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천재인 곽보미는 평소에도 기고만장한 성격이라 대표작은 없고 팬덤만 큰 연예인을 별로 눈에 차지 않아 했다. 그런데 방금...“정말 곽보미 감독님한테 전화한 거예요?”“네.”하 매니저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곽 감독님 요즘에 새 작품을 기획하시는데 나석진 배우도 출연한대요. 강 비서님은 줄곧 곽 감독님과 연락을 취하고 있었고요.”문나는 후회막심했다.“강... 강 비서님.”문나가 강서연을 보며 말했다.“곽 감독님도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세요? 곽 감독님은 절대 예능에 출연하지 않는다던데요!”강서연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거 그냥 일반 예능프로 아닌가요?”약이 바싹 오른 문나와 달리 강서연은 입술을 적시며 담담하게 말했다.“괜찮아요. 우리 회사는 항상 연예인의 선택을 존중하거든요. 문나 씨가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다른 사람을 찾으면 돼요. 아니면 제가 위약금을 내도 되고요. 꽤 많은 액수이긴 하지만 김 대표님한테는 별거 아니에요. 소속 연예인의 행복이 무엇보다 중요하잖아요.”“잠깐만요!”문나가 황급히 그녀를 불렀다.곽보미도 이 프로그램에 출연한다고 했으니, 그녀와 안면을 틀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나중에 조연 역할이라도 주어질지 누가 알겠는가?강서연은 돌아서서 웃으며 물었다.“또 다른 일 더 있어요?”“저...”문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이 프로그램 나갈게요!”“정말이에요?”“네. 회사의 지시에 따를게요.”문나는 갑자기 태도를 확 바꾸었다.“예능에 출연하는 게 나쁠 것도 없죠. 방금 비서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화면에 자주 얼굴
윤정재는 유리창을 통해 눈도 깜빡이지 않고 온 오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아침에 강서연이 종종걸음으로 출근하는 모습을 보았고 10시가 조금 지나서 커피 사러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는 걸 보았다. 그러고는 지금까지 강서연은 건물 밖을 나온 적이 없다.윤정재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대로 그냥 가기 아쉬운지 손가락으로 무릎을 툭툭 두드렸다.“회장님, 계속 기다리실 건가요?”부하 진용수는 그의 밑에서 일한 지 오래되어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다가가고 싶어도 다가갈 수 없는 그 기분은 말로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회장님.”진용수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왜 직접 가서 만나지 않으시는 겁니까? 사실 오랜 시간 동안 회장님은 두 분을 계속 마음에 품고 계셨잖아요...”“그만 얘기해.”윤정재가 목소리를 내리깔았다.어찌 쉽게 내려놓을 수 있겠는가?윤문희 말고 평생 다른 여자를 사랑한 적이 없었고 강서연은 또 두 사람의 귀한 딸인데.젊었을 때 그는 나중에 딸이 생기면 사랑을 마음껏 주면서 예쁘게 키울 거라는 상상을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윤정재의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고 마음이 칼로 도려내듯 아팠다.“그럼... 회장님.”진용수가 또 물었다.“최연준 도련님한테는 언제 약을 가져다줄까요?”윤정재는 잠깐 생각하다가 한마디 툭 던졌다.“급할 거 없어.”“네?”진용수가 화들짝 놀랐다.“하지만 도련님의 약이 기한이 다 됐을 텐데요...”“기한이 다 돼도 목숨에는 지장이 없잖아!”윤정재는 진용수를 노려보았다.“오늘따라 왜 이렇게 말이 많아?”진용수는 더는 아무 말이 없었다.“최연준이 우리 서연이한테 어떻게 하는지 잘 보고 치료해 줄지 결정해야지, 안 그래?”진용수는 잠깐 놀라는가 싶더니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표정을 지었다.의술로 세인을 구제한다면서? 의사의 자애로운 마음은 어디로 간 걸까?다른 사람에게는 한없이 베풀면서 자기 사위는 지켜보겠다고 한다.“회장님, 만
진용수는 계속하여 말했다.“오성에서 그 땅을 눈독 들인 대가문이 여러 집 있는데 다들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연합 병원 프로젝트는 꽤 할 만한 프로젝트예요.”“그래, 알았어.”윤정재가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그에게 있어서 병원은 둘째였다. 가장 중요한 건 강서연과 만나 말이라도 몇 마디 하면서 마음껏 지켜보고 싶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것 같았다.사실 강서연을 만나기 전에 그는 이미 오성대에 가서 윤찬을 몰래 봤었다.기세가 드높은 아들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머리가 좋고 공부도 열심히 하여 장차 아주 훌륭한 인물이 될 기질이 보였다. 게다가 의학원에 들어가 연구까지 하는 걸 보면 뭔가 타고난 재능이 있는 게 확실했다.그 모습에 윤정재는 무척이나 뿌듯했다.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그는 아들보다 딸을 더 예뻐했다...남자애는 시련을 겪어도 툭툭 털고 일어나야 하기에 과하게 친절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자애는 애지중지하며 예쁘게 키워야 한다.윤정재의 침착하고 차가운 얼굴에 따뜻한 웃음이 지어졌다.“일단 내가 아직 누구랑 손을 잡을지 결정하지 못했다고 알려.”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때가 되면 그 사람들이 먼저 날 찾아올 거야.”진용수는 잠깐 망설였다. 다른 가문은 그래도 말이 잘 통하지만 유독 최씨 가문만 예로부터 기고만장하여 상대하기 쉽지 않았다.“최연준 도련님은 먼저 연락하지 않을 겁니다.”진용수가 웃으며 말했다.“도련님은 아마 회장님께서 먼저 고개를 숙이시길 기다릴걸요?”“지금 장난해?”윤정재의 낯빛이 어두워졌고 목소리도 아까보다 훨씬 높아졌다.“그 새X 눈에 장인어른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회장님, 제 기억이 맞는다면 그날 최진혁이 도련님을 새X라고 했을 때 회장님께서...”“내가 그러는 건 괜찮아!”윤정재가 두 눈을 부릅떴다.“하지만 다른 사람은 안 돼!”진용수는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윤정재는 이 사위를 그래도 인정하는 눈치였다.
“전화한 건 맞지만 그저 안부 전화였을 뿐이에요.”문나의 낯빛이 창백해졌다.그렇다. 강서연은 단 한 번도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아까 곽보미와 통화할 때도 그저 문나의 상황을 솔직하게 얘기했을 뿐이었다.이게 다 문나가 너무 조급했던 탓이었다. 곽보미의 새 작품에 출연하려고, 유명 감독 앞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려 했기 때문에 강서연의 꾀에 넘어간 것이었다.문나는 너무도 화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는 이를 꽉 깨물고 말했다.“날 엿먹였다 이거죠?”강서연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싸늘하게 쳐다보았다.“회사 규정도 따르지 않고 여기서 소란을 피우는 게 옳은 일이라 생각해요? 팬이 좀 있다고 해서 진짜 공주라도 된 줄 알아요?”“강서연, 당신...”“팬은 당신을 높이 치켜세울 수 있지만 감옥에도 처넣을 수 있다는 거 잊지 말아요.”강서연의 한마디 한마디는 마치 무거운 돌덩이처럼 그녀의 마음을 마구 때렸다.문나는 분통이 터졌지만 할 수 있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어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그리고 저.”강서연은 팔짱을 끼고 담담하게 웃었다.“문나 씨가 여기서 마구 행패를 부리는 건 참을 수 있어요. 하지만 당신이 가진 모든 걸 잃게 할 수 있다는 것도 명심해요! 못 믿겠으면 어디 한번 해보시든지!”문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히려고 연신 심호흡을 했다.그녀의 몇몇 매니저들이 다가와 귀띔했다.“문나야, 강 비서님은 김 대표님을 모시는 수석 비서이자 어진 엔터테인먼트의 총괄 매니저란 말이야. 강 비서님을 건드려서는 절대 안 돼.”“왜? 저런 사람을 내가 겁내야 해?”“그럼요! 당연히 겁내야죠.”그때 책장 뒤에서 갑자기 인기척이 들려왔다.화들짝 놀란 문나는 인기척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책장이 양쪽으로 열리면서 박경실이 웃으며 걸어 나왔다.그녀는 휴대 전화를 흔들며 강서연에게 말했다.“서연 씨, 저 이러다가 아주 촬영 쪽으로 전향하겠는데요?”강서연은 박경실의 팔짱을 끼고 애처럼 귀엽게 애교를 부렸다.문
문나는 순간 두려움이 밀려와 두 다리에 힘이 풀릴 것만 같았다.조금 전 내뱉은 말은 홧김에 머리를 거치지 않고 나온 말이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생각해 보니 아무리 임나연을 위해 나선 거라고 해도 이 타이밍에 나서서는 안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강서연이 어떻게 나올까? 설마 따귀를 때리진 않겠지?’문나는 고개를 들고 주변을 힐끔거렸다. 마침 문 앞 복도에 서 있어 멀지 않은 곳에 CCTV가 있었다. 그녀는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만약 강서연이 손이라도 댄다면 살을 더 보태 CCTV 영상을 공개하여 팬들의 악플 세례를 받게 할 생각이었다.“왜요? 제 말이 틀렸어요?”문나는 다시 의기양양했다.“4대 가문에서 그 자리를 어떻게 지켰는지 알아요? 서로 혼약을 맺고 자원을 교환하면서 지금까지 지킨 거예요!”문나가 코웃음을 쳤다.“나중에 연준 도련님한테 무슨 어려운 일이라도 생기면 나연 씨는 도련님을 도울 수 있지만 서연 씨는 발목만 잡을 거예요! 서연 씨는 남자한테 빌붙어 사는 거 말고 할 줄 아는 게 뭐예요?”“그래요.”강서연이 덤덤하게 대답했다.“전 연준 씨한테 빌붙어 살아요. 그런데 왜요? 어떤 사람은 빌붙고 싶어도 못 빌붙는데!”말문이 막힌 문나는 그녀를 노려보기만 했다.강서연은 상 위에 놓인 산세베리아를 만지며 씩 웃었다. 눈빛이 어찌나 그윽한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저한테 배경이 없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전 연준 씨만 있으면 돼요. 그리고 결혼에 관하여 연준 씨가 저한테 뭐라 했는지 알아요?”그녀가 피식 웃었다.“제가 최씨 가문에 시집가는 게 아니라 저한테 장가오는 거랬어요!”문나는 놀란 나머지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문나 씨, 우리 결혼 때문에 걱정 끼쳐서 정말 미안해요.”강서연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하지만 앞으로는 일에 더 많이 신경 썼으면 좋겠어요. 저랑 연준 씨 일은 문나 씨가 신경 쓰고 싶어도 기회가 없을 겁니다!”...최연준이 집에 돌아와 보니 강서연은 뚱냥이를 안은 채
가끔 차가 지나갔지만, 정승우가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어도 아무도 멈춰 서지 않았다.어둠이 내려앉았고 기온은 점점 내려가고 있었다.며칠 동안 육체와 마음이 지친 권온유는 이제 무너질 듯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정승우는 어쩔 수 없이 온유를 등에 업고 비틀거리며 길을 걸었다.“오빠...”권온유는 울먹이며 말했다.“해가 졌어요. 저... 무서워요.”“괜찮아.”정승우는 뒤돌아 미소를 지었다.“오빠가 집에 데려다줄게.”“오빠, 우리 그냥 돌아가요...”“뭐라고?”권온유의 시선이 정승우의 피로 물든 발에 닿았다.“발이 많이 아프죠?”권온유의 작은 얼굴 위로 눈물이 두 줄기 흘러내렸다.“오빠, 저 내려주세요. 그냥 돌아가요...”“온유야?”권온유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그 집이 낡고 춥긴 해도... 오빠 발에서 피가 나진 않잖아요!”정승우는 멍하니 잠시 굳어 있다가 그 어눌한 말 속에 담긴 다정함을 깨달았다.이 작은 아이는 납치당했던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라도 정승우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정승우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작은 새들이 집으로 향해 줄지어 날고 있었다.정승우는 온유를 데리고 반드시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다짐했다.“바보야.”정승우는 온유를 내려놓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난 하나도 안 아파. 그리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어.”“그 사람이... 우리를 때릴까요?”“그럴 거야.”정승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어린 시절, 정대명에게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탈출할 때 그의 뒤통수를 내려친 한 방은 그동안의 빚을 모두 갚은 셈이었다.“그런데 오빠, 그 사람은 오빠 아빠잖아요?”권온유는 작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하지만 오빠가 아프다고 제가 말했을 때 오빠 아빠가 들어왔었잖아요.”정승우는 쓴웃음을 지었다.자신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정대명이 들어온 것은 아마 걱정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죽으면 함께 나쁜 짓을 할 사람이 없어질까 봐서였었다.정대명은 단지
차 안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영미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정대명에게 다가갔다. 그의 머리 아래로 어두운 핏자국이 퍼져 있었고 그 흔적은 이미 굳어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의 코 밑에 손을 가져다 댔다.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영미는 떨리는 마음을 억누른 채 차가운 눈빛으로 정대명을 내려다보다가 거칠게 발길을 휘둘렀다.“일어나요!”강소아와 최군형도 다가와 공장 안을 살폈지만 안은 고요히 비어 있었다.“아이들은요?”“아이고...”정대명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살려줘, 살려줘... 저 괘씸한 녀석이!”“정대명 씨!”영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했다.어쨌든 이번 일은 영미가 자신 있게 권온유의 행방을 안다고 장담한 일이었다.영미는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함께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확신에 차 말했다.그런데 지금... 정대명은 다쳐 쓰러져 있고 두 아이는 사라졌었다.백인서를 함정에 빠뜨리려던 영미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것이다.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정대명은 도움을 청하려다 영미가 눈짓을 주는 것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영미의 눈길을 따라 보니 최군형과 강소아도 함께 와있었다.정대명은 예전에 영미가 했던 경고가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아는 척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정대명은 머리를 살짝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신이 정대명인가요?”최군형이 다가가 물었다.정대명은 말끝을 흐리며 최군형의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백인서의 양아버지시고?”최군형은 다시 물었다.“당신이 당신 아들과 함께 권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게 맞나요?”“아니야, 나 아니야!”정대명은 크게 당황하며 손을 흔들었다.“이봐, 동생, 난 억울해! 내 아들 녀석이 나를 해치려고 했어! 내 머리를 봐, 그 자식이 벽돌로 내리쳤다니까!”“그만해요!”영미는 정대명의 말이 길어질수록 상황이 불리해질 것을 우려해 정대명을 노려보며 더 이상 말을 못 하게 했다.강소아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들의 서툰 수법이 한심하기만
경찰서 밖에서 최지용은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한참을 걷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젊은 경찰관이 안에서 뛰어나오고 있었다. 최지용은 급히 다가가며 말했다.“정호야!”정호라는 젊은 경찰관은 최지용을 보자 반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 녀석!”최지용은 정호에게 다가가 가볍게 주먹을 툭 날리며 말했다.“도대체 무슨 일이야? 왜 사전에 알려주지 않은 거야?”정호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방금 최씨 집안에서 백인서를 데려간 사람 중에 정호도 있었다. 최지용도 놀라웠지만, 영미 역시 경찰이 직접 찾아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떠나기 전, 정호가 살짝 눈짓을 보냈고 최지용은 그의 의도를 알아채 경찰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지용이 형.”정호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형수님께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잘 구분하고 계시니 문제없을 겁니다!”“도대체 누구 지시로 백인서를 여기로 데려온 거지?”“소아 아가씨예요!”정호는 어깨를 으쓱했다.“소아 아가씨가 갑자기 지시한 거라 사전에 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최지용은 살짝 놀랐다. 강소아의 지시라니.“형수님께서도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으니까요. 그 아이가 실종되기 전에 형수님께서 만난 적이 있거든요. 경찰이 형수님을 데려가서 조사하는 건 당연한 절차입니다.”최지용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피식 웃음을 지었다.강소아가 이런 ‘당연한 절차’를 이용해 백인서를 경찰서로 보낸 이유는 경찰서야말로 가장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또 누군가가 음모를 꾸며 백인서에게 덮어씌우려 한다 해도 경찰서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경찰서 안에는 일을 봐주는 사람들도 있으니 백인서가 여기서 며칠 지내는 동안 힘든 일 없이 외부의 소란도 피할 수 있는 셈이었다.최지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강소아는 정말 자매를 위한 배려가 남달랐다. 이렇게까지 배려심 깊은 방안을 생각해 내다니!“지용이 형.”정호가 계속해서 말했다.“도련님께서
영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소아 언니, 저를 믿지 않으세요?”“난 오직 사실만을 믿어.”“권씨 가문의 딸이 실종된 사건에 백인서 씨의 양아버지와 남동생이 관련되었어요, 그게 바로 사실이에요!”강소아는 순간 멍하니 있다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려 했다.세상에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다 있나 싶었다.호텔 뒷뜰에 있는 그 CCTV가 정말 완전히 고장 났다고 생각하는 걸까? 육씨 가문과 최씨 가문이 힘을 합쳐 그 고장 난 CCTV 하나도 못 고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최군형은 강소아의 어깨를 가볍게 눌러 안심시키며 슬며시 휴대전화를 건넸다.강소아는 화면을 확인했다. 최군형의 부하가 보낸 메시지였다.“도련님, CCTV 데이터를 복구 중입니다. 곧 진실이 밝혀질 겁니다!”강소아는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영미가 이렇게까지 백인서를 몰아세우는 걸 보니 마음 한구석에 무언가 꺼림칙한 게 남아 있는 것 같았다.어차피 꼬리가 저절로 드러날 것이었기에 그저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다.바로 그때, 집사가 다소 당황한 얼굴로 방에 들어섰다. 집사의 뒤에는 몇 명의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신분을 밝힌 후 방 안을 둘러보며 엄숙한 목소리로 물었다.“여기 백인서 씨가 계십니까?”표아정은 등을 꼿꼿이 펴고 대답했다.“경찰관님께서 여긴 무슨 일로 오셨나요?”“당신이 백인서 씨인가요?”“저는...”“백인서 씨가 납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신고를 접수했습니다!”“뭐라고요?”백인서는 얼굴이 창백해졌다.“백인서 씨, 조사에 협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희와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권온유가 납치된 지 하루가 지났다.그동안 정대명은 단 한 번 음식을 가져왔는데, 그것도 차갑게 식은 죽 한 그릇과 딱딱한 빵 한 조각뿐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귀하게 자란 권온유에게 이런 음식은 처음이었다. 울고 싶었지만, 감히 울지 못하고 그저 눈물을 참으며 빵을 조금씩 뜯어 먹고 있었다.정승우는 그런 온유의 모습을 보고
“아줌마,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그럼, 제가 알아낸 사실을 전부 말씀드릴게요!”영미는 입가에 교만한 미소를 띠며 백인서를 차갑게 한 번 쳐다보았다.“백인서 씨의 친어머니인 백홍은 인신매매범이었다는 사실, 모두 아셨나요? 백인서 씨의 어머니는 백인서를 정대명의 집에 맡겼고... 흥! 정대명의 아내도 백홍이 납치해 왔다는 소문이 있어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잖아요. 제 생각엔... 인신매매범의 딸이라면 그런 일쯤은 익숙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은 권온유의 실종이 정말로 백인서 씨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시나요?”“영미!”강소아가 나서며 분노를 가득 담아 소리쳤다.“허위 사실을 퍼뜨리지 마!”“소유 아가씨, 억울하네요!”영미는 강소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제가 이렇게까지 조사한 건 다 아가씨를 위한 거예요! 딸도 있는 사람이 백인서를 곁에 두고도 마음이 놓이세요?”“그만해!”최지용이 크게 소리쳤다.백인서는 몸을 떨며 믿기지 않는 눈으로 최지용을 쳐다보았다.그러나 최지용의 얼굴에는 의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최지용은 굳건한 눈빛으로 뒤에 있는 백인서를 지키고 있었다.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처럼 백인서를 아끼고 있었다.백인서는 코끝이 찡해지며 본능적으로 최지용의 손을 꼭 붙잡았다. 최지용의 따스한 손은 백인서에게 큰 용기를 주었고 그 온기가 어둠의 두려움을 잊게 해주었다.최지용은 백인서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고 다시 영미를 바라볼 때는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영미야.”최지용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두 집안의 관계를 생각해서 그저 넘어가는 거야. 더 이상 선을 넘지 마.”최군형도 나서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요, 백인서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모르겠어요? 영미 아가씨, 우리 최씨 가문 사람들을 바보로 생각하는 건 아니죠?”영미는 순간 긴장했다. 최군형의 말 속엔 어딘가 숨은 뜻이 있는 듯했다.최군형의 깊고 복잡한 눈빛을 파악하기 어려웠다.표아정은 천천히 일어나 어깨에 걸친 숄을
백인서는 복잡한 눈빛으로 최지용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그때 최지용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표아정이었고 다급한 목소리로 서둘러 돌아오라고 재촉했다.최지용은 결국 어머니의 말에 따라 백인서를 데리고 최씨 집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넓은 거실에는 최군형과 강소아도 나와 있었고 모두 엄숙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백인서가 들어서자, 표아정이 백인서를 올려다보며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다.강소아는 백인서와 눈을 마주치며 단호하게 미소 지었다.백인서가 의아해하던 찰나, 영미가 천천히 밖에서 걸어 들어왔다.“아줌마, 지용 오빠. 제가 권온유의 행방을 알아냈어요.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뭐라고?”최지용이 놀라서 물었다.“네가 어떻게 아는데?”영미는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지용 오빠, 특수부대 출신이라고 정보가 우리보다 더 빠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최씨 가문은 만능이 아니에요, 최씨 가문도 모르는 정보가 있다고요.”표아정은 가볍게 기침하며 차분히 상황을 지켜보았다.최군형과 강소아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떤 일이 일어날지 주목하고 있었다.최지용의 이마에는 점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미의 눈에는 한 줄기 교만한 빛이 번졌다.영미는 오는 길에 이미 모든 계획을 짰다. 정대명의 말이 맞았다. 누구를 훔치든 상관없었다. 인신매매범의 딸인 백인서가 아이들을 해치러 다닌다는 누명을 씌우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하면 백인서는 모두의 신뢰를 잃게 될 터였다.영미는 이제 한 아이의 엄마가 된 강소아가 인신매매범을 곁에 둘 리 없다고 믿었고, 최지용 역시 이 사실을 알면 더는 백인서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래서 영미는 정대명을 배신하기로 마음먹었다.영미는 권온유를 넘기고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한패가 되어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주장할 계획이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백인서는 변명의 여지도 없이 궁지에 몰릴 것이었다!“지용 오빠.”영미는 고개를 돌려 최지용을 바라보며 한 글자씩 천천히 말했다.“권온유는 정승
“그... 괜찮아!”정승우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권온유에게 말했다. 정승우는 이곳에서 권온유를 반드시 데리고 나가겠다고 결심했다.그런데 이때, 공장 문이 “쾅” 하고 열리더니 곧바로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정승우는 재빨리 권온유에게 눈짓했고 권온유도 알아채고는 즉시 땅바닥에 쓰러져 의식이 없는 척했다.정승우는 벽에 기대어 눈을 반쯤 감았다.“이 아이인가요?”영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맞아.”정대명은 영미를 흘깃 노려보며 묵묵히 대답했다.영미는 두 걸음 앞으로 다가서서 희미한 빛 속에 있는 아이를 살펴보더니, 곧 얼굴빛이 확 변했다.“이 아이... 혹시 권씨 집안의 막내딸 아니에요?”정대명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애초에 아이를 훔쳐 올 때 이 아이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 리가 없었다.“정대명 씨.”영미가 차갑게 웃으며 돌아보았다.“제가 최씨 가문 집안 아이를 훔쳐 오라고 했지, 권씨 집안 아이를 훔치라고 했나요? 이러고도 저를 속이지 않았다고요?”“그게...”정대명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영미 아가씨, 어차피 목적은 백인서를 곤경에 빠뜨리는 거잖아? 그러니 누구를 훔쳐 오든 상관없지 않아? 아이를 훔치기만 하면 유괴범이 되는 거니까.”이 말은 영미에게만 충격을 준 게 아니었다. 정승우의 귀에도 또렷이 들어왔다.“좋아요.”영미는 깊은숨을 들이마신 뒤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이 아이는 잘 지키고 있어요, 제가 다시 연락할 테니까.”...한편, 권씨 집안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권욱은 조순영을 탓하며 아이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했고, 조순영은 오열하며 남편을 원망했다. 조순영은 권욱이 바깥에서 여자와 부적절하게 얽히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라고 했다.“헛소리하지 마! 사람들이 나한테 어떤 소문을 퍼뜨렸는지 잘 알잖아. 결혼 생활 내내 너한테 부끄러운 일 한 적 없어.”“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정말 떳떳하게 행동했다면 왜 사람들이 당신만 가만두지 않는 건데?”며칠 전까지만
권온유의 질문에 정승우는 당황했다.권온유는 커다란 눈망울로 정승우를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했던 슈퍼맨 같은 오빠가, 이제는 먹을 것 하나 구하지 못하는 모습이 되어버린 것이다.정승우는 어색하게 입가를 씰룩이며 권온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이야기를 이어갔다.“너, 정말 배고파?”“네!”권온유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 작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원래는 엄마랑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 했어요. 엄마가 특별히 고등어조림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하셨거든요... 엉엉... 엉엉...”“울지 마, 울지 마! 그냥 생선 하나 가지고...”“나 배고파!”정승우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아이와 대화하는 건 그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겨우 권온유를 달래고 나서 정승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팔을 걷어붙이며 권온유에게 내밀었다.“너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 배고프면, 여기 한번 물어볼래?”권온유는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정승우를 바라보았다.“우리 집은 가난해서 늘 먹을 게 부족했거든. 그래서 어릴 때 너무 배가 고프면 이렇게 배고픔을 달랠 만한 걸 물곤 했어.”권온유는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배고픔을 달랠 만한 것'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정승우는 웃으며 계속 설명했다.“예를 들어 쌀통 같은 거야. 한때 쌀이 들어 있던 쌀통은 비어 있어도 쌀 냄새가 남아 있거든. 그래서 쌀통 가장자리를 살짝 물면서 하얀 쌀밥을 먹는 상상하는 거야. 그러면 배가 덜 고파져.”“그리고 이웃집에서 밥하는 냄새를 맡으며 그 밥을 먹는 상상을 하는 거야. 그러면 그렇게 배고프지 않더라고.”권온유는 정승우의 이야기에 넋을 잃고 입을 벌린 채 있었다. 정승우는 웃음을 터뜨렸다.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한때 정대명이 도박과 술에 빠져 정승우를 굶겼던 시절은 그야말로 비참한 순간들이었다.잠시 후, 권온유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고 정승우는 속으로 ‘큰일이다'라고 생
영미는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최지용을 지켜보았다.최지용은 다소 초조한 기색으로 구석에 앉아 휴대전화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 전화를 걸기도 했다.영미는 바로 뒤를 따라갔고 최지용의 낮고 다급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찾았습니까?”“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세요... 만약 납치범의 목적이 돈이었다면 분명 전화를 걸어올 겁니다!”영미의 가슴이 철렁하며 내려앉았다.납치범이라니? 대체 뭘 찾는다는 거지?백인서와 통화한 걸까?그때, 최군성이 큰 소리로 외쳤다.“지용이 형, 여기서 뭐 해요?”영미는 얼른 몸을 숨겼고 최군성은 최지용에게 다가가 최지용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우리 형이 찾고 있었는데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거예요? 어서 와서 먹고 즐기자고요!”최지용은 최군성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영미와 눈이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잠시 멈칫했다.영미는 급히 시선을 피하며 억지 미소로 인사했다.“지용 오빠...”“어, 영미?”최군성도 배윤아처럼 물었다.“여기 웬일이야? 형님이 널 초대한 것 같지 않은데?”“그게...”영미는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최군성은 영미의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최지용을 끌고 가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최지용은 점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영미가 도대체 여기 왜 있는 거지? 평소에는 볼 수 없던 사람이, 왜 하필 오늘 온유가 사라진 날에 나타난 걸까?그때, 최군형과 강소아가 가원이를 품에 안고 나타났다.강소아는 아이를 보행기에 앉혔고 아이는 보행기 가장자리를 잡고 작은 발을 내디뎠다. 이 모습에 방 안의 모든 사람이 환호성을 질렀다.영미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자리를 떠 교외의 버려진 공장으로 향했다.그 시각, 정대명은 영미의 지시에 따라 승합차를 몰고 공장에 도착해 있었고 영미가 도착했을 때 그는 공장 문 앞에서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영미는 핸드백을 휘둘러 정대명에게 던졌다.“정대명 씨, 감히 날 속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