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한 건 맞지만 그저 안부 전화였을 뿐이에요.”문나의 낯빛이 창백해졌다.그렇다. 강서연은 단 한 번도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아까 곽보미와 통화할 때도 그저 문나의 상황을 솔직하게 얘기했을 뿐이었다.이게 다 문나가 너무 조급했던 탓이었다. 곽보미의 새 작품에 출연하려고, 유명 감독 앞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려 했기 때문에 강서연의 꾀에 넘어간 것이었다.문나는 너무도 화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는 이를 꽉 깨물고 말했다.“날 엿먹였다 이거죠?”강서연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싸늘하게 쳐다보았다.“회사 규정도 따르지 않고 여기서 소란을 피우는 게 옳은 일이라 생각해요? 팬이 좀 있다고 해서 진짜 공주라도 된 줄 알아요?”“강서연, 당신...”“팬은 당신을 높이 치켜세울 수 있지만 감옥에도 처넣을 수 있다는 거 잊지 말아요.”강서연의 한마디 한마디는 마치 무거운 돌덩이처럼 그녀의 마음을 마구 때렸다.문나는 분통이 터졌지만 할 수 있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어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그리고 저.”강서연은 팔짱을 끼고 담담하게 웃었다.“문나 씨가 여기서 마구 행패를 부리는 건 참을 수 있어요. 하지만 당신이 가진 모든 걸 잃게 할 수 있다는 것도 명심해요! 못 믿겠으면 어디 한번 해보시든지!”문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히려고 연신 심호흡을 했다.그녀의 몇몇 매니저들이 다가와 귀띔했다.“문나야, 강 비서님은 김 대표님을 모시는 수석 비서이자 어진 엔터테인먼트의 총괄 매니저란 말이야. 강 비서님을 건드려서는 절대 안 돼.”“왜? 저런 사람을 내가 겁내야 해?”“그럼요! 당연히 겁내야죠.”그때 책장 뒤에서 갑자기 인기척이 들려왔다.화들짝 놀란 문나는 인기척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책장이 양쪽으로 열리면서 박경실이 웃으며 걸어 나왔다.그녀는 휴대 전화를 흔들며 강서연에게 말했다.“서연 씨, 저 이러다가 아주 촬영 쪽으로 전향하겠는데요?”강서연은 박경실의 팔짱을 끼고 애처럼 귀엽게 애교를 부렸다.문
문나는 순간 두려움이 밀려와 두 다리에 힘이 풀릴 것만 같았다.조금 전 내뱉은 말은 홧김에 머리를 거치지 않고 나온 말이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생각해 보니 아무리 임나연을 위해 나선 거라고 해도 이 타이밍에 나서서는 안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강서연이 어떻게 나올까? 설마 따귀를 때리진 않겠지?’문나는 고개를 들고 주변을 힐끔거렸다. 마침 문 앞 복도에 서 있어 멀지 않은 곳에 CCTV가 있었다. 그녀는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만약 강서연이 손이라도 댄다면 살을 더 보태 CCTV 영상을 공개하여 팬들의 악플 세례를 받게 할 생각이었다.“왜요? 제 말이 틀렸어요?”문나는 다시 의기양양했다.“4대 가문에서 그 자리를 어떻게 지켰는지 알아요? 서로 혼약을 맺고 자원을 교환하면서 지금까지 지킨 거예요!”문나가 코웃음을 쳤다.“나중에 연준 도련님한테 무슨 어려운 일이라도 생기면 나연 씨는 도련님을 도울 수 있지만 서연 씨는 발목만 잡을 거예요! 서연 씨는 남자한테 빌붙어 사는 거 말고 할 줄 아는 게 뭐예요?”“그래요.”강서연이 덤덤하게 대답했다.“전 연준 씨한테 빌붙어 살아요. 그런데 왜요? 어떤 사람은 빌붙고 싶어도 못 빌붙는데!”말문이 막힌 문나는 그녀를 노려보기만 했다.강서연은 상 위에 놓인 산세베리아를 만지며 씩 웃었다. 눈빛이 어찌나 그윽한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저한테 배경이 없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전 연준 씨만 있으면 돼요. 그리고 결혼에 관하여 연준 씨가 저한테 뭐라 했는지 알아요?”그녀가 피식 웃었다.“제가 최씨 가문에 시집가는 게 아니라 저한테 장가오는 거랬어요!”문나는 놀란 나머지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문나 씨, 우리 결혼 때문에 걱정 끼쳐서 정말 미안해요.”강서연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하지만 앞으로는 일에 더 많이 신경 썼으면 좋겠어요. 저랑 연준 씨 일은 문나 씨가 신경 쓰고 싶어도 기회가 없을 겁니다!”...최연준이 집에 돌아와 보니 강서연은 뚱냥이를 안은 채
강서연이 어리둥절해하며 두 눈을 깜빡였다.최연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방으로 돌아와 서랍에서 서류 몇 개를 꺼냈다. 서류를 본 강서연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움찔했다.“이건 서교 땅 기획도이고.”최연준은 하나하나 차근차근 그녀에게 설명했다.“이건 다 프로젝트 협력안이야.”그가 마지막 페이지를 펼쳐 보이자, 강서연의 사인이 떡하니 있었다.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최연준을 쳐다보았다. 최연준은 그녀 앞에 웅크리고 앉아 그녀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씩 웃었다.지난번 연회의 대기실에서 그녀에게 서류 몇 장에 사인하라던 때가 떠올랐다. 자신과 함께 맞서 싸우고 리스크를 부담하자면서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댔었다...그때 그녀는 최연준을 철석같이 믿었기에 사인한 서류가 무슨 내용인지 제대로 보지도 않고 망설임 없이 사인했었다.“사실 리스크를 함께 부담하자는 거 아니야.”최연준이 부드럽게 말했다.“프로젝트 리스크는 내가 다 평가해 봤어. 당신한테 사인하라고 한 건... 이 프로젝트가 당신 것이기 때문이야. 난 그저 당신 밑에서 일하는 부하니까 당연히 대표의 사인을 받아야지.”“뭐라고요?”강서연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최연준의 따뜻한 눈웃음 속에는 온통 그녀의 모습뿐이었다.“이 땅뿐만이 아니야.”최연준이 계속 말했다.“이 몇몇 회사들.”그러고는 다른 서류를 꺼내 그녀에게 일일이 보여주었다.강서연은 가슴이 쿵쾅거렸다. 서류에 큼지막하게 적힌 자신의 이름을 보며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고 이 모든 게 마치 꿈만 같았다.‘동명, 레이안, 웨스턴... 이게 다 연준 씨 회사 아니었어?’“이젠 다 당신 거야.”최연준은 그녀를 묵묵히 쳐다보았다. 강서연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고 뭐라 얘기하고 싶었지만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당신 뒤에 아무도 없는 게 아니야. 내가 말했잖아, 당신은 내가 있다고.”강서연은 고개를 숙인 채 한참 동안 입을 꾹 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결국 이 한마디만 내뱉었다.“미안해요...”최연준은 그
에덴 밖에 서 있던 마이바흐의 불빛이 깜빡였다.조금 전 윤정재는 최연준이 강서연을 쫓아 나오는 걸 보았다. 그러다가 둘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다시 그녀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잠시 후, 거실의 불이 꺼졌다.진용수는 고개를 돌려 윤정재를 보며 웃었다.“회장님, 아무래도 화해했나 봐요.”“그래.”윤정재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대답했다.“저 자식 사람을 달래는 건 선수인가 보네!”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씩 웃으며 은침을 다시 거두어들였다.“용수야, 그만 가자.”“네.”진용수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회장님, 다음엔 뭘 할까요?”윤정재는 아무 말이 없었다. 이번에 오성에 와서 꽤 오래 있을 계획이었다.첫 번째는 연합 병원 프로젝트 때문이고 두 번째는 이곳을 떠나기 점점 아쉬워서였다.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의 마음속 영원히 아물지 않는 상처가 되었다.“회장님.”진용수는 그의 생각을 단번에 눈치챘다.“윤문희 씨가 지금 살고 계시는 주소를 알아냈어요. 알려...”“싫어.”윤정재가 어두운 목소리로 그의 말을 가로챘다.미치게 보고 싶지만 또 그녀를 만나는 게 두려웠다.이십여 년 동안 그는 윤제 그룹을 휘황찬란하게 발전시켰다. 이미 돌아가신 그의 아버지, 주주, 그리고 약 사 먹을 돈도 없는 가여운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이의 앞에서 떳떳하게 다닐 수 있었지만... 그가 유일하게 미안한 사람이 바로 윤문희였다.그때 윤문희가 남양을 떠난 후 윤정재는 여전히 그녀를 놓지 못했다. 그녀를 찾았을 때 윤문희는 자신이 강명원의 여자가 되었다고 했었다.윤문희가 딸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몰래 그녀를 보러 강주로 갔었다. 그런데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행복하게 지내지 못했다.윤문희는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했었다. 하지만 몰래 유전자 검사를 해본 결과 강서연은 그의 친딸이었다. 하여 지금까지 매달 윤문희의 계좌에 돈을 입금했다.강서연과 윤찬이 무럭무럭 성장할 수 있
그녀는 모든 화살이 강서연에게 쏠리는 걸 원치 않았다. 이런 방식으로 강서연을 지킨다면 귀찮은 일이 많이 줄어들 것이다.예를 들어 지금처럼 문나는 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도무지 몰랐다...잠깐 생각하던 그녀는 뭔가 깨달은 듯했다.‘이게 다 나연 씨 탓이야!’“다른 일 없으면 그만 나가봐.”김자옥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앞으로 다가가더니 어깨를 툭툭 쳤다. 몸을 부들부들 떠는 문나의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문나 씨.”김자옥이 웃으며 말했다.“사람은 자신을 정확히 아는 게 중요해! 이 점을 놓고 봐도 문나 씨랑 임나연은 많이 배워야 해!”문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마음속에서 분노가 끓어올랐지만, 무서운 그녀 앞에서 티를 낼 수도 없었다.그녀는 대표 사무실 밖의 테이블을 쳐다보았다. 강서연이 마침 자리에 없었다.“왜? 강 비서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어?”김자옥의 위엄있는 목소리에 문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아닙니다, 아니에요...”“그래, 그럼 가서 일이나 해. 문나 씨가 요즘 출연해야 하는 예능이 몇 개 있어. 매니저한테 얘기해 놓았으니까 출연하지 말지는 문나 씨가 알아서 결정해.”문나는 당연히 거절할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그 예능들은 전부 시청률이 낮은 프로그램이라 한물간 연예인도 출연하지 않았다.그런 프로그램에 출연한다는 건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하지만 김자옥이 원하는 게 바로 이거였다.연예인 하나가 내리막길을 걷든 말든 상관없었다. 어진 엔터테인먼트에는 연예인이 부족하지 않으니까.그리고 회사가 입을 손해도 두렵지 않았다. 김자옥은 그깟 돈이 부족한 게 아니니까.하지만 그녀의 며느리를 괴롭히는 자라면 팬덤이 얼마나 크든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그 돈으로 강서연을 괴롭힌 사람을 처리하는 건 전혀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문나는 잿빛이 된 얼굴로 사무실을 나섰다. 김자옥이 코웃음을 치고는 계속 일에 몰두하려던 그때 휴대 전화가 갑자기 울렸다.“여보세요? 아들.”최연준은 오늘 회사에 나가지 않
강서연은 웃으며 솔직하게 대답했다.“최연준 씨요.”사실 그녀가 뭐라 대답할지 나석진은 진작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진짜로 솔직하게 대답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최연준이 그녀 마음속에서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리 서슴없이 대답할 리가 없다.박철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는 어색함을 깨려고 웃음을 터뜨렸다.“저기... 석진 씨, 먼저 저기 앉아서 대본 좀 보고 있어요. 곽 감독님이 오시면 맨 먼저 대본 리딩하게 할게요. 강 비서님도 쉬고 계세요. 석진 씨가 먹을 것 좀 가져오라고 해서 가져왔거든요. 드셔보세요...”그들은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마침 햇살이 내리쬐어 분위기를 더 따스하게 만들어 주었고 창밖에는 가을날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박철이 차를 내리자 방안에 고소한 차 향기가 가득 퍼졌다.나석진은 가방 안에서 정교한 간식 상자를 꺼냈다.짙은 색의 나무 상자였는데 그 위에 정교하고 복잡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순간 움찔한 강서연은 잘못 본 건 아닌지 의심마저 들었다.엄마가 그녀에게 준 상자에도 이것과 비슷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예뻐요?”나석진이 가볍게 웃었다.“남양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무늬예요.”“그렇군요.”강서연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전 성남 사람이라고 했잖아요. 성남이랑 남양이 아주 가까워서 문화와 음식 면에서 남양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그러고는 작은 접시를 꺼내 디저트를 담고 그녀에게 건넸다.“먹어봐요!”강서연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접시에 담긴 디저트는 앙증맞고 정교했다. 초록색의 옥같이 반투명한 색상에 마치 공예품처럼 예뻤다.“이건...”강서연은 놀라면서도 기뻤다. 이건 어릴 적에 어머니가 그녀에게 해줬던 디저트였다.“이게 뭔지 알아요?”나석진이 다정하게 물었다.“녹옥떡이라고 하는데 남양에만 있는 음식이에요.”“남양에만 있다고요?”강서연은 잠깐 멈칫했다. 지난번에 어머니와 함께 서화전에 갔을 때 어머니가 스카프 하
외부인 앞에서 그는 늘 카리스마 넘치고 진지하며 차가운 얼굴이었지만 강서연 앞에서는 질투를 밥 먹듯이 하는 소년으로 변했다.나석진의 눈빛이 복잡미묘해졌다.“지난번에는 카드 게임만 한판 하고 제대로 인사도 못 했네요!”최연준은 그를 차갑게 쳐다보았다. 나석진은 그의 뜻을 알아채고 먼저 악수를 청했다.“도련님, 안녕하세요. 전 나석진입니다. 회사에 저에 관한 자료가 자세하게 있을 거예요.”최연준은 그와 악수하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최연준입니다. 어진 엔터테인먼트의 제2 주주고요.”“알아요.”나석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전 김 대표님께서 직접 데려와 계약했어요...”“허!”최연준이 코웃음을 쳤다.“문나 씨도 그렇게 얘기하던데,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보셨죠?”나석진은 그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물론 나 배우님과 문나 씨는 천지 차이죠. 두 사람을 함께 비교해서는 안 되죠.”나석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지금 약을 올리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사실 최연준은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계속 약을 올렸다.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최연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었다.“고양이가 참 귀엽네요.”나석진이 화제를 돌렸다.“무슨 품종이에요?”최연준은 그제야 고양이도 함께 데려왔다는 사실이 생각났다.“그건 모르겠고 뚱냥이라고 불러요.”그는 소개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 강서연을 와락 끌어안으며 의기양양했다.“저랑 서연이가 함께 키우고 있어요.”그는 ‘함께’ 라는 단어에 힘을 실었다.나석진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뚱냥이를 만지려 했다. 그런데 뚱냥이는 고개를 옆으로 피하며 싸늘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나석진의 손이 멋쩍게 허공에 머물렀다.최연준은 기분이 날아갈 듯이 기뻤다. 평소 그를 별로 반기지도 않던 뚱냥이가 중요한 순간에는 그래도 그의 편을 드는 것 같았다. 왠지 모르게 감동이 밀려왔다.‘오늘 저녁에 생선 통조림 줘야겠다.’“연준 씨.”강서연이 그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오늘 회사 안 나가도 돼요? 왜 뚱냥이
그날 저녁 임씨 가문.임정수네 부부는 서재에서 연합 병원 프로젝트를 따낼 방법을 상의하고 있었고 임나연은 옆에 앉아 주의 깊게 들었다.임씨 가문 사모님은 그녀에게 별로 알려주고 싶지 않아 일찍 들어가서 쉬라고 했다.몇 년 전부터 그녀는 임나연을 경계하기 시작했고 임씨 가문의 중요한 업무를 그녀에게 맡기지 않으려 했다.하지만 임정수는 별로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비록 친자식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키웠는데 정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게다가 임나연이 사업적으로도 그를 잘 도와주었다.“어디서 들려온 소문인지는 모르겠는데.”임정수가 목소리를 낮췄다.“윤정재가 4대 가문 중에서 우리 임씨 가문을 가장 눈여겨 보고 있고 우리랑 손을 잡으려 한대.”임씨 가문 사모님이 눈살을 찌푸렸다.처음에는 거론할 가치도 없는 얘기라고 생각했었지만 소문이 퍼지면 퍼질수록 점점 진짜처럼 변해갔다. 그런데 소문과 달리 윤정재는 임씨 가문과 실질적으로 만난 적이 없었다.“아빠, 정말 그런 소문이 돌아요?”임나연이 우쭐거리며 물었다.“응.”임정수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너 뭐 아는 거라도 있어?”“그건 아닌데.”임나연이 가볍게 웃었다.“이 서교 땅 프로젝트가 최씨 가문에서 주요하게 밀고 있는 프로젝트잖아요. 저도 요즘 계속 알아보면서 연합 병원에 관한 기획안을 만들고 있었어요. 최상 그룹의 뜻은 이 땅이 최상 그룹의 것이니까 병원 프로젝트의 이윤을 적당한 선에서 양도하겠다는 뜻이더라고요. 어차피 그 땅에 지으니까요. 아빠, 이건 제가 최상 그룹 측과 몇 번 미팅한 결과인데 쉽지 않아요!”임정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최씨 가문은 진짜 참여하지 않는 모양이다. 땅과 프로젝트 모두 차지하려는 건 아닐 것이다. 최씨 가문은 줄곧 다 함께 돈을 버는 걸 지향했었다.“만약 최상 그룹이 경쟁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 소문이 진짜일지도 몰라.”“설마 그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임씨 가문 사모님이 싸늘하게 웃었다.“최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