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저녁 임씨 가문.임정수네 부부는 서재에서 연합 병원 프로젝트를 따낼 방법을 상의하고 있었고 임나연은 옆에 앉아 주의 깊게 들었다.임씨 가문 사모님은 그녀에게 별로 알려주고 싶지 않아 일찍 들어가서 쉬라고 했다.몇 년 전부터 그녀는 임나연을 경계하기 시작했고 임씨 가문의 중요한 업무를 그녀에게 맡기지 않으려 했다.하지만 임정수는 별로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비록 친자식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키웠는데 정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게다가 임나연이 사업적으로도 그를 잘 도와주었다.“어디서 들려온 소문인지는 모르겠는데.”임정수가 목소리를 낮췄다.“윤정재가 4대 가문 중에서 우리 임씨 가문을 가장 눈여겨 보고 있고 우리랑 손을 잡으려 한대.”임씨 가문 사모님이 눈살을 찌푸렸다.처음에는 거론할 가치도 없는 얘기라고 생각했었지만 소문이 퍼지면 퍼질수록 점점 진짜처럼 변해갔다. 그런데 소문과 달리 윤정재는 임씨 가문과 실질적으로 만난 적이 없었다.“아빠, 정말 그런 소문이 돌아요?”임나연이 우쭐거리며 물었다.“응.”임정수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너 뭐 아는 거라도 있어?”“그건 아닌데.”임나연이 가볍게 웃었다.“이 서교 땅 프로젝트가 최씨 가문에서 주요하게 밀고 있는 프로젝트잖아요. 저도 요즘 계속 알아보면서 연합 병원에 관한 기획안을 만들고 있었어요. 최상 그룹의 뜻은 이 땅이 최상 그룹의 것이니까 병원 프로젝트의 이윤을 적당한 선에서 양도하겠다는 뜻이더라고요. 어차피 그 땅에 지으니까요. 아빠, 이건 제가 최상 그룹 측과 몇 번 미팅한 결과인데 쉽지 않아요!”임정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최씨 가문은 진짜 참여하지 않는 모양이다. 땅과 프로젝트 모두 차지하려는 건 아닐 것이다. 최씨 가문은 줄곧 다 함께 돈을 버는 걸 지향했었다.“만약 최상 그룹이 경쟁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 소문이 진짜일지도 몰라.”“설마 그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임씨 가문 사모님이 싸늘하게 웃었다.“최
배경원은 웃으며 청첩장 두 장을 꺼내 임정수 부부의 손에 정중히 건넸다.“어머님이 여시는 음악회예요. 아저씨 아줌마께서 꼭 참석하셔야 해요!”임씨 가문 사모님께서 정교한 초대장을 넘기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배씨 가문 사모님은 사모님들 사이에서 소문난 재녀다. 금기 서화에 능할 뿐만 아니라 모든 종목이 전문가 수준에 이르렀다.“제 기억이 맞는다면, 작년에 사모님께서 그림 전시회를 열었었죠!”임씨 가문 사모님께서 웃으며 말했다.“올해는 음악회를 여신다니, 정말 대단하군요!”“아닙니다!”배경원은 머리를 긁적이며 어수룩하게 웃었다.“어머니께서는 그냥 집에서 장난삼아서 하는 거예요. 아저씨 아줌마께서 시간 되신다면 꼭 참석해 주세요!”“당연하죠!”“이번에 어머니께서 바다 음악회를 하고 싶어해요. 우리 집의 개인소유 바닷가에서 주최하려고 하는데 어른들은 유람선을 타고, 우리 같은 젊은이들은 요트를 타고 바다로 나가서 놀 계획이에요.”“참으로 좋은 아이디어네요!”임정수는 웃으며 말했다. “배씨 가문 사모님께 전해주세요. 저희는 꼭 제시간에 맞춰서 도착할게요!”배경원은 임무를 완수하고 임씨 부부와 작별을 고했고, 두 사람은 그를 현관의 긴 복도까지 데려다주었다. 마침 몇 명의 집사들이 막 씻은 옷을 들고 지나가고 있었다.집사들은 배경원을 보고 인사를 했고 공교롭게도 같은 시각 배경원도 그들을 돌아보았다.집사들이 손에 들고 있는 옷도 봐버렸다.그중에는 남색 재킷이 있었는데 옷깃에 나비 모양의 자수가 있다...배경원은 잠깐 멈칫했다.이건... 그의 외투가 아닌가? 경매 날, 배경원은 수정이라는 소녀를 만났고 두 사람이 정원에서 산책하고 있을 때 그가 벗어서 그녀에게 덮어준 그 재킷이다.“경원 조카?”임정수는 그가 생각에 잠기는 것을 보고 몇 번 불렀다.배경원은 다시 생각을 접고 억지로 웃었다.집사들은 이미 지나갔는데 옷 한 벌 때문에 다시 불러 세우는 것도 이상했다.하지만 배경원이 입는 옷은 전부다 커스터마이징이다.그리고 그 옷
“회장님... 반쯤 브리핑하셨는데 다시 돌아가시겠습니까...”“그럴 필요 없어.”윤정재는 손사래를 쳤다.어차피 나왔고 지금도 한가하니 차라리 동물병원에 가보겠다.진용수는 곧 그를 데리고 근처의 유명한 동물병원으로 갔다.차가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윤정재는 강서연이 뚱냥이를 조심스럽게 안고 들어가는 것을 봤다.윤정재도 따라 들어갈 생각이었으나 다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진용수더러 가까운 펫숍에 가서 샴고양이를 사 오라고 했다. 동물병원에 들어갈 때 손에 무엇이라도 안고 가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너무 이상할 것이다.진용수는 즉시 움직였다.윤정재는 남양에서 신분이 귀하여 어디를 가든지 감히 막을 자가 없었다.하지만 지금은 고양이 한 마리에 의지해서 동물병원에 들어가야 한다니.그는 생각만 해도 자신의 처지가 웃겼다.강서연이 뚱냥이를 안고 줄을 서 있는 동안, 윤정재는 그녀와 멀지 않은 곳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잠시 후 그녀의 옆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그는 다시 조금씩 그녀 곁으로 옮겼다.윤정재는 조용히 강서연을 훑어보았다.딸은 피부가 하얗고 눈매가 고운데, 특히 그 앙증맞은 코와 붉은 입술이 젊은 시절의 윤문희를 빼닮았다.강서연은 카디건을 입고 있었는데, 딱 맞게 예쁜 쇄골이 드러났다.품에 안긴 뚱냥이는 얌전히 강서연의 품에 안겨있고 그녀가 머리를 쓰다듬자 편안한 듯 눈을 감았다.윤정재는 눈시울이 붉어졌다.오성에 온 지 오래되었는데, 이것은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딸을 가까이서 보는 것이다.“야옹!”뚱냥이가 갑자기 머리를 흔들었다.강서연은 잠깐 멈칫했다. 뚱냥이는 옆에 있는 고양이에게 관심이 많은 듯한 모습을 보였고, 그쪽 고양이도 발바닥을 내밀어 서로 기웃거리며 장난을 쳤다.강서연은 웃으며 고양이를 따라 그 고양이 주인을 보았다.“아저씨.”그녀의 목소리는 달콤했다.“둘이 잘 맞는가 봐요!”윤정재는 멍하니 그녀를 보며 말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아저씨?”“네...”윤정재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러네요. 잘 맞
윤정재는 뜸을 들였다. 목구멍은 뭔가에 막힌 듯했고 눈빛은 점점 슬퍼졌다.강서연은 자신이 말실수를 한 줄 알고 자책하며 말을 돌렸다.“아저씨 고양이는 정신이 멀쩡해서 아파 보이지 않는데요!”“그게...”윤정재는 정신을 가다듬고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얘도 요 며칠 몸이 안 좋아 보여서 아무래도 검사를 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데려왔어요.”“그런데 이 줄이 너무 기네요.”강서연이 탄식했다.동물병원은 크지도 않고 고양이와 강아지들은 통제가 어려운 데다가 말도 못 하고 아프면 짖기만 한다.그래서 경험이 있는 수의사도 진단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린다.“아직 아가씨 순서가 아닌데 제가 고양이를 한번 봐줄까요?”윤정재는 웃으며 말했다.강서연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혹시 수의사세요?”“저는 의사예요.”“아저씨.”그녀는 웃으며 말했다.“사람도 볼 수 있고 동물도 볼 줄 아는 거예요?”윤정재는 강서연과 가까워질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억지로 말했다.“의학적인 이론은 모두 하나를 보고 열을 안다고 문제없을 거예요!”강서연은 눈살을 찌푸렸다.신석훈은 다르게 말했다. 술업에는 전공이 있다고 특히 의학은 정밀도가 상당히 높아서 더 자세히 나눈다고 했다.“어차피 오래 기다려야 되잖아요!”윤정재는 웃으며 말했다. “제가 먼저 봐줄게요. 저에게는 조상 대대로 전해온 비법이 있거든요!”강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그녀는 의심스럽게 뚱냥이를 내려놓았다.윤정재는 딸과 조금이라도 더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생애 처음으로 고양이에게 맥을 짚어줬다.그러나 윤정재도 맥박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짚는지 모른다.윤정재가 이리저리 만져서 뚱냥이는 이미 인내심이 바닥났다. 뚱냥이는 소리를 지르며 그의 손등을 심하게 긁었다!“앗!”강서연은 깜짝 놀랐다.“뚱냥아, 너 뭐 하는 거야!”윤정재의 손등에 붉은 자국이 몇 개 생기더니 순식간에 부어올랐다.강서연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연거푸 사과를 했다.“아저씨, 정말 죄송해요! 제가 단속을 잘못했어요...”
거대한 유람선 한 척이 배씨 가문의 프라이빗 오션에서 운항하고 있다.잔잔한 거문고 소리가 온 해변에 퍼져 갈매기까지 따라서 춤을 춘다.윤정재도 초대 손님에 포함되어 있다.그는 뱃머리에 서서 천천히 샴페인을 음미하고 있었는데, 배씨 가문이 왜 그를 초대했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모두 다 연합병원 프로젝트를 위한 것이다.그는 샴페인을 한 모금에 다 마시고 돌아서서 유람선으로 돌아가 휴식실로 들어갔다.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아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지막하고 우스꽝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윤 회장님, 그 샴고양이는 안 데려오셨어요?”윤정재는 눈을 부릅떴다.최연준은 바로 그의 앞에 서서 냉랭한 얼굴에 비아냥거리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윤 회장님, 그동안 잘 지내셨죠!”최연준은 차갑게 보며 말했다.윤정재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셋째 도련님.”그는 몸을 일으켜 가볍게 웃었다.두 사람은 마주 서 있었고, 최연준의 눈빛은 독기를 품어 있었다. 최연준은 갑자기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윤정재를 벽 쪽으로 몰아세웠다.그날 그가 제때 동물병원에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이 늙은 여우가 강서연에게 무슨 짓을 할지는 상상이 안 간다.“윤정재 씨.”최연준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그새를 참지 못하고 제 주변 사람들에게 손을 대요?”“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윤정재는 눈살을 찌푸렸다.“저한테는 모르는 척하지 마세요!”최연준은 한 글자씩 강조했다.“그 고양이는 당신 것이 아니죠?”윤정재는 그를 한 번 쳐다보고 떠나려고 하는데, 최연준은 갑자기 그의 멱살을 움켜잡고 데저트 이글을 그의 허리춤에 갖다 댔다!“도대체 무슨 목적을 가지고 서연이에게 접근하는 거예요?”“제가 아무 목적도 없다고 하면 믿어 줄 거예요?”최연준은 증오의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았다. 탕 소리와 함께 권총은 이미 장전되어 있었다.“당신이 또다시 서연이한테 접근하면 영원히 남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할 것이에요!”최연준은 흉악스럽게 말했다.“제가 다가가지 않으면 남양으
최연준은 살짝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보았다.“제가 가든지 말든지, 회장님께서 왜 그리 서두르세요?”“아니...”“윤 회장님께서 너무 많이 관여하는 것 같네요!”최연준은 강력하게 말하고 짙은 눈동자에는 서늘한 빛이 감돌았다.그러나 의외로 윤정재는 침묵했고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얼굴에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애절함이 스쳤다.“그래요. 제가 신경 쓸 일이 아니죠.”윤정재는 혼잣말을 하고, 자조 섞인 웃음을 지으며 밖으로 나갔다.“내가 뭐라고...”최연준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이 늙은 여우가 뭘 하려는 거지? 그가 무슨 짓을 하든 서연이에게 접근만 안 하면 돼.’최연준은 몸을 돌려 휴게실을 성큼성큼 떠났다.갑판에는 음악회가 이미 끝나 사람들이 삼삼오오 술잔을 들고 분위기가 떠들썩했다.강서연은 혼자 뱃머리에 서서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형수님, 어떻게 혼자 여기 있어요!”배경원이 웃으며 달려와서 와인 한 잔을 건넸다.“연준 형이랑 같이 안 왔어요?”“방금 전화했는데 금방 온대요.”강서연이 웃으며 말했다.갑자기 최연준이 그녀에게 배경원이 연애하고 있다고 말한 것이 생각났다. 강서연은 호기심에 누구냐고 물었다.배경원이 쑥스럽게 대답했다.“이것도 알고 있어요?”강서연은 웃으며 대답했다.“어떤 여자가 경원 씨를 설레게 했는지 궁금해서요.”“사실, 저도 그녀가 누군지 몰라요.”“네?”강서연이 깜짝 놀랐다.“저는 그녀의 이름만 알 뿐, 심지어 성도 몰라요.”배경원은 입꼬리를 치켜 올렸다.“어쩌면 그녀는 저의 아름다운 꿈이었는지도 몰라요... 꿈에서 깨면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죠.”배경원이 이렇게 진지하고 슬퍼하는 모습은 보기 드물었다.강서연은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그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막 무슨 말을 하려는데 나지막한 기침 소리가 들렸다.최연준은 안색이 조금 어두웠고, 활보하며 다가와서 강서연의 가녀린 허리를 감싸 안고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왔다.배경원이 아무
최연준은 윤정재를 한번 노려보고 무의식적으로 강서연을 감싸 안았다.“연준 씨.”강서연은 그를 한번 보고, 또 윤정재를 쳐다봤다.“아저씨와 아는 사이예요?”“아는 사이예요.”윤정재가 대답했다.“모르는데.”최연준도 따라서 대답했다.“...”강서연은 잠시 뜸을 들였다. 최연준의 안색은 안 좋았고 윤정재는 웃는 것 같기도, 웃지 않는 것 같기도 한 표정을 지어서 두 사람이 껄끄러운 사이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하였다.그러나 배씨 가문의 음악회에서 일을 크게 벌여서는 안 된다.강서연은 가볍게 최연준과 깍지를 끼고 부드럽게 그를 바라봤다.그녀의 미소는 최연준의 마음을 순간적으로 안정시켜 주는 마법 같은 힘이 있다.“이분은 남양 의학회 회장이자 윤제 의약의 수장이야.”최연준은 간단하게 소개했다.강서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최근에 남양이라는 단어를 너무 많이 들어서 그런지 그녀의 마음속에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솟구쳤다.“배씨 가문에서 회장님과 협업하고 싶다고 해서 음악회에 초대했어.”최연준은 조용히 말했다.강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윤정재를 보며 예의 바르게 웃었다.“같이 요트에 가자.”최연준이 귓속말을 했다.“안 돼요.”윤정재는 단호하게 그들을 막았다.최연준이 그를 힐끗 보았다.“정말 안전하지 않아요!”윤정재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저기 보세요. 저 요트는 크지도 않아, 풍랑이 오면 버티지 못할 거예요! 게다가 젊은이들이 수영복을 입고 그 위에서 술도 마시면서 춤추는 게 보기도 안 좋아요!”강서연은 입을 막고 가볍게 웃었고 최연준은 얼굴에 경멸의 빛을 띠었다.“만약 두 분이 꼭 올라가야 한다면 저도 따라갈 거예요.”윤정재가 말했다.최연준은 그를 노려보며 거의 발작할 뻔했다.“저희를 왜 따라와요?”최연준은 화를 내며 말했다.강서연은 그의 성질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그를 잡아당겼다.“연준 씨, 괜찮아요.”강서연은 최연준을 옆으로 끌고 가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저번에 동물병원에서 이 아저씨를 만났는데, 아저씨
윤정재는 울적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뒤를 쫓았다. 최연준의 손이 강서연을 만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침을 놓아주고 싶었다.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두 사람의 사이가 그만큼 좋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원하는 결과다.윤정재는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결국 윤정재는 여기서 그들을 방해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돌아서서 집사를 불러 큰 배에 태워달라고 하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수상한 두 사람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발견했다.“누구야?”윤정재는 소리 질렀다.그 두 사람은 재빨리 운전석 쪽으로 달려갔고, 윤정재는 안 좋은 예감이 들어 그쪽으로 쫓아갔다.그는 운전실로 쫓아갔는데, 안에서 무슨 움직임이 있는 것 같았다.“아무도 없어요?”그는 느낌이 싸해서 문을 두드렸다.몇 초 동안 침묵만 흘렀고 파도 소리만 그의 귓가에서 울려 퍼졌다.갑자기 ‘쿵’ 하는 굉음이 울렸다. 윤정재는 황급히 몸을 피했지만, 운전석에서 뛰쳐나온 두 사람은 총으로 그를 겨누었다.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저 둘은 최진혁의 부하다!“윤 회장님.”한 사람이 차갑게 말했다.“여기 일은 회장님께서 상관할 일이 아니니 참견하지 마세요!”“너희들 지금 여기서 뭐 하려고?”윤정재가 목소리를 높이고 말했다.“왜 이 배에 타고 있는 거야!”오늘은 배씨 가문의 음악회이고 이 요트는 배경원의 것이다.그런데 최진혁의 부하가 나타났다!“최진혁이 배경원의 땅에서 일을 벌이려고 하는구나!”윤정재가 냉소했다.“눈엣가시 같은 사람을 없애버리는 것은 물론 죄명을 배씨 가문에 뒤집어씌우려 하는 거야! 정말 일석이조의 좋은 계략이네!”“윤 회장님, 말씀드렸듯이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너희가 최연준을 건드리려면 먼저 나랑 붙어!”윤정재는 나이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민첩한 몸놀림으로 한 사람의 손에 있던 총을 발로 차 떨어뜨렸다.다른 한 사람은 크게 놀라서 총을 들어 그를 쐈는데, 윤정재가 옆으로 비켜서는 바람에 총알이 난간에 맞았다. ‘핑’ 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나면서 불꽃이
가끔 차가 지나갔지만, 정승우가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어도 아무도 멈춰 서지 않았다.어둠이 내려앉았고 기온은 점점 내려가고 있었다.며칠 동안 육체와 마음이 지친 권온유는 이제 무너질 듯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정승우는 어쩔 수 없이 온유를 등에 업고 비틀거리며 길을 걸었다.“오빠...”권온유는 울먹이며 말했다.“해가 졌어요. 저... 무서워요.”“괜찮아.”정승우는 뒤돌아 미소를 지었다.“오빠가 집에 데려다줄게.”“오빠, 우리 그냥 돌아가요...”“뭐라고?”권온유의 시선이 정승우의 피로 물든 발에 닿았다.“발이 많이 아프죠?”권온유의 작은 얼굴 위로 눈물이 두 줄기 흘러내렸다.“오빠, 저 내려주세요. 그냥 돌아가요...”“온유야?”권온유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그 집이 낡고 춥긴 해도... 오빠 발에서 피가 나진 않잖아요!”정승우는 멍하니 잠시 굳어 있다가 그 어눌한 말 속에 담긴 다정함을 깨달았다.이 작은 아이는 납치당했던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라도 정승우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정승우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작은 새들이 집으로 향해 줄지어 날고 있었다.정승우는 온유를 데리고 반드시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다짐했다.“바보야.”정승우는 온유를 내려놓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난 하나도 안 아파. 그리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어.”“그 사람이... 우리를 때릴까요?”“그럴 거야.”정승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어린 시절, 정대명에게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탈출할 때 그의 뒤통수를 내려친 한 방은 그동안의 빚을 모두 갚은 셈이었다.“그런데 오빠, 그 사람은 오빠 아빠잖아요?”권온유는 작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하지만 오빠가 아프다고 제가 말했을 때 오빠 아빠가 들어왔었잖아요.”정승우는 쓴웃음을 지었다.자신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정대명이 들어온 것은 아마 걱정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죽으면 함께 나쁜 짓을 할 사람이 없어질까 봐서였었다.정대명은 단지
차 안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영미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정대명에게 다가갔다. 그의 머리 아래로 어두운 핏자국이 퍼져 있었고 그 흔적은 이미 굳어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의 코 밑에 손을 가져다 댔다.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영미는 떨리는 마음을 억누른 채 차가운 눈빛으로 정대명을 내려다보다가 거칠게 발길을 휘둘렀다.“일어나요!”강소아와 최군형도 다가와 공장 안을 살폈지만 안은 고요히 비어 있었다.“아이들은요?”“아이고...”정대명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살려줘, 살려줘... 저 괘씸한 녀석이!”“정대명 씨!”영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했다.어쨌든 이번 일은 영미가 자신 있게 권온유의 행방을 안다고 장담한 일이었다.영미는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함께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확신에 차 말했다.그런데 지금... 정대명은 다쳐 쓰러져 있고 두 아이는 사라졌었다.백인서를 함정에 빠뜨리려던 영미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것이다.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정대명은 도움을 청하려다 영미가 눈짓을 주는 것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영미의 눈길을 따라 보니 최군형과 강소아도 함께 와있었다.정대명은 예전에 영미가 했던 경고가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아는 척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정대명은 머리를 살짝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신이 정대명인가요?”최군형이 다가가 물었다.정대명은 말끝을 흐리며 최군형의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백인서의 양아버지시고?”최군형은 다시 물었다.“당신이 당신 아들과 함께 권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게 맞나요?”“아니야, 나 아니야!”정대명은 크게 당황하며 손을 흔들었다.“이봐, 동생, 난 억울해! 내 아들 녀석이 나를 해치려고 했어! 내 머리를 봐, 그 자식이 벽돌로 내리쳤다니까!”“그만해요!”영미는 정대명의 말이 길어질수록 상황이 불리해질 것을 우려해 정대명을 노려보며 더 이상 말을 못 하게 했다.강소아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들의 서툰 수법이 한심하기만
경찰서 밖에서 최지용은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한참을 걷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젊은 경찰관이 안에서 뛰어나오고 있었다. 최지용은 급히 다가가며 말했다.“정호야!”정호라는 젊은 경찰관은 최지용을 보자 반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 녀석!”최지용은 정호에게 다가가 가볍게 주먹을 툭 날리며 말했다.“도대체 무슨 일이야? 왜 사전에 알려주지 않은 거야?”정호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방금 최씨 집안에서 백인서를 데려간 사람 중에 정호도 있었다. 최지용도 놀라웠지만, 영미 역시 경찰이 직접 찾아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떠나기 전, 정호가 살짝 눈짓을 보냈고 최지용은 그의 의도를 알아채 경찰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지용이 형.”정호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형수님께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잘 구분하고 계시니 문제없을 겁니다!”“도대체 누구 지시로 백인서를 여기로 데려온 거지?”“소아 아가씨예요!”정호는 어깨를 으쓱했다.“소아 아가씨가 갑자기 지시한 거라 사전에 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최지용은 살짝 놀랐다. 강소아의 지시라니.“형수님께서도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으니까요. 그 아이가 실종되기 전에 형수님께서 만난 적이 있거든요. 경찰이 형수님을 데려가서 조사하는 건 당연한 절차입니다.”최지용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피식 웃음을 지었다.강소아가 이런 ‘당연한 절차’를 이용해 백인서를 경찰서로 보낸 이유는 경찰서야말로 가장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또 누군가가 음모를 꾸며 백인서에게 덮어씌우려 한다 해도 경찰서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경찰서 안에는 일을 봐주는 사람들도 있으니 백인서가 여기서 며칠 지내는 동안 힘든 일 없이 외부의 소란도 피할 수 있는 셈이었다.최지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강소아는 정말 자매를 위한 배려가 남달랐다. 이렇게까지 배려심 깊은 방안을 생각해 내다니!“지용이 형.”정호가 계속해서 말했다.“도련님께서
영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소아 언니, 저를 믿지 않으세요?”“난 오직 사실만을 믿어.”“권씨 가문의 딸이 실종된 사건에 백인서 씨의 양아버지와 남동생이 관련되었어요, 그게 바로 사실이에요!”강소아는 순간 멍하니 있다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려 했다.세상에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다 있나 싶었다.호텔 뒷뜰에 있는 그 CCTV가 정말 완전히 고장 났다고 생각하는 걸까? 육씨 가문과 최씨 가문이 힘을 합쳐 그 고장 난 CCTV 하나도 못 고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최군형은 강소아의 어깨를 가볍게 눌러 안심시키며 슬며시 휴대전화를 건넸다.강소아는 화면을 확인했다. 최군형의 부하가 보낸 메시지였다.“도련님, CCTV 데이터를 복구 중입니다. 곧 진실이 밝혀질 겁니다!”강소아는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영미가 이렇게까지 백인서를 몰아세우는 걸 보니 마음 한구석에 무언가 꺼림칙한 게 남아 있는 것 같았다.어차피 꼬리가 저절로 드러날 것이었기에 그저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다.바로 그때, 집사가 다소 당황한 얼굴로 방에 들어섰다. 집사의 뒤에는 몇 명의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신분을 밝힌 후 방 안을 둘러보며 엄숙한 목소리로 물었다.“여기 백인서 씨가 계십니까?”표아정은 등을 꼿꼿이 펴고 대답했다.“경찰관님께서 여긴 무슨 일로 오셨나요?”“당신이 백인서 씨인가요?”“저는...”“백인서 씨가 납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신고를 접수했습니다!”“뭐라고요?”백인서는 얼굴이 창백해졌다.“백인서 씨, 조사에 협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희와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권온유가 납치된 지 하루가 지났다.그동안 정대명은 단 한 번 음식을 가져왔는데, 그것도 차갑게 식은 죽 한 그릇과 딱딱한 빵 한 조각뿐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귀하게 자란 권온유에게 이런 음식은 처음이었다. 울고 싶었지만, 감히 울지 못하고 그저 눈물을 참으며 빵을 조금씩 뜯어 먹고 있었다.정승우는 그런 온유의 모습을 보고
“아줌마,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그럼, 제가 알아낸 사실을 전부 말씀드릴게요!”영미는 입가에 교만한 미소를 띠며 백인서를 차갑게 한 번 쳐다보았다.“백인서 씨의 친어머니인 백홍은 인신매매범이었다는 사실, 모두 아셨나요? 백인서 씨의 어머니는 백인서를 정대명의 집에 맡겼고... 흥! 정대명의 아내도 백홍이 납치해 왔다는 소문이 있어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잖아요. 제 생각엔... 인신매매범의 딸이라면 그런 일쯤은 익숙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은 권온유의 실종이 정말로 백인서 씨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시나요?”“영미!”강소아가 나서며 분노를 가득 담아 소리쳤다.“허위 사실을 퍼뜨리지 마!”“소유 아가씨, 억울하네요!”영미는 강소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제가 이렇게까지 조사한 건 다 아가씨를 위한 거예요! 딸도 있는 사람이 백인서를 곁에 두고도 마음이 놓이세요?”“그만해!”최지용이 크게 소리쳤다.백인서는 몸을 떨며 믿기지 않는 눈으로 최지용을 쳐다보았다.그러나 최지용의 얼굴에는 의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최지용은 굳건한 눈빛으로 뒤에 있는 백인서를 지키고 있었다.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처럼 백인서를 아끼고 있었다.백인서는 코끝이 찡해지며 본능적으로 최지용의 손을 꼭 붙잡았다. 최지용의 따스한 손은 백인서에게 큰 용기를 주었고 그 온기가 어둠의 두려움을 잊게 해주었다.최지용은 백인서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고 다시 영미를 바라볼 때는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영미야.”최지용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두 집안의 관계를 생각해서 그저 넘어가는 거야. 더 이상 선을 넘지 마.”최군형도 나서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요, 백인서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모르겠어요? 영미 아가씨, 우리 최씨 가문 사람들을 바보로 생각하는 건 아니죠?”영미는 순간 긴장했다. 최군형의 말 속엔 어딘가 숨은 뜻이 있는 듯했다.최군형의 깊고 복잡한 눈빛을 파악하기 어려웠다.표아정은 천천히 일어나 어깨에 걸친 숄을
백인서는 복잡한 눈빛으로 최지용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그때 최지용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표아정이었고 다급한 목소리로 서둘러 돌아오라고 재촉했다.최지용은 결국 어머니의 말에 따라 백인서를 데리고 최씨 집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넓은 거실에는 최군형과 강소아도 나와 있었고 모두 엄숙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백인서가 들어서자, 표아정이 백인서를 올려다보며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다.강소아는 백인서와 눈을 마주치며 단호하게 미소 지었다.백인서가 의아해하던 찰나, 영미가 천천히 밖에서 걸어 들어왔다.“아줌마, 지용 오빠. 제가 권온유의 행방을 알아냈어요.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뭐라고?”최지용이 놀라서 물었다.“네가 어떻게 아는데?”영미는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지용 오빠, 특수부대 출신이라고 정보가 우리보다 더 빠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최씨 가문은 만능이 아니에요, 최씨 가문도 모르는 정보가 있다고요.”표아정은 가볍게 기침하며 차분히 상황을 지켜보았다.최군형과 강소아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떤 일이 일어날지 주목하고 있었다.최지용의 이마에는 점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미의 눈에는 한 줄기 교만한 빛이 번졌다.영미는 오는 길에 이미 모든 계획을 짰다. 정대명의 말이 맞았다. 누구를 훔치든 상관없었다. 인신매매범의 딸인 백인서가 아이들을 해치러 다닌다는 누명을 씌우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하면 백인서는 모두의 신뢰를 잃게 될 터였다.영미는 이제 한 아이의 엄마가 된 강소아가 인신매매범을 곁에 둘 리 없다고 믿었고, 최지용 역시 이 사실을 알면 더는 백인서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래서 영미는 정대명을 배신하기로 마음먹었다.영미는 권온유를 넘기고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한패가 되어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주장할 계획이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백인서는 변명의 여지도 없이 궁지에 몰릴 것이었다!“지용 오빠.”영미는 고개를 돌려 최지용을 바라보며 한 글자씩 천천히 말했다.“권온유는 정승
“그... 괜찮아!”정승우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권온유에게 말했다. 정승우는 이곳에서 권온유를 반드시 데리고 나가겠다고 결심했다.그런데 이때, 공장 문이 “쾅” 하고 열리더니 곧바로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정승우는 재빨리 권온유에게 눈짓했고 권온유도 알아채고는 즉시 땅바닥에 쓰러져 의식이 없는 척했다.정승우는 벽에 기대어 눈을 반쯤 감았다.“이 아이인가요?”영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맞아.”정대명은 영미를 흘깃 노려보며 묵묵히 대답했다.영미는 두 걸음 앞으로 다가서서 희미한 빛 속에 있는 아이를 살펴보더니, 곧 얼굴빛이 확 변했다.“이 아이... 혹시 권씨 집안의 막내딸 아니에요?”정대명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애초에 아이를 훔쳐 올 때 이 아이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 리가 없었다.“정대명 씨.”영미가 차갑게 웃으며 돌아보았다.“제가 최씨 가문 집안 아이를 훔쳐 오라고 했지, 권씨 집안 아이를 훔치라고 했나요? 이러고도 저를 속이지 않았다고요?”“그게...”정대명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영미 아가씨, 어차피 목적은 백인서를 곤경에 빠뜨리는 거잖아? 그러니 누구를 훔쳐 오든 상관없지 않아? 아이를 훔치기만 하면 유괴범이 되는 거니까.”이 말은 영미에게만 충격을 준 게 아니었다. 정승우의 귀에도 또렷이 들어왔다.“좋아요.”영미는 깊은숨을 들이마신 뒤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이 아이는 잘 지키고 있어요, 제가 다시 연락할 테니까.”...한편, 권씨 집안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권욱은 조순영을 탓하며 아이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했고, 조순영은 오열하며 남편을 원망했다. 조순영은 권욱이 바깥에서 여자와 부적절하게 얽히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라고 했다.“헛소리하지 마! 사람들이 나한테 어떤 소문을 퍼뜨렸는지 잘 알잖아. 결혼 생활 내내 너한테 부끄러운 일 한 적 없어.”“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정말 떳떳하게 행동했다면 왜 사람들이 당신만 가만두지 않는 건데?”며칠 전까지만
권온유의 질문에 정승우는 당황했다.권온유는 커다란 눈망울로 정승우를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했던 슈퍼맨 같은 오빠가, 이제는 먹을 것 하나 구하지 못하는 모습이 되어버린 것이다.정승우는 어색하게 입가를 씰룩이며 권온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이야기를 이어갔다.“너, 정말 배고파?”“네!”권온유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 작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원래는 엄마랑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 했어요. 엄마가 특별히 고등어조림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하셨거든요... 엉엉... 엉엉...”“울지 마, 울지 마! 그냥 생선 하나 가지고...”“나 배고파!”정승우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아이와 대화하는 건 그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겨우 권온유를 달래고 나서 정승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팔을 걷어붙이며 권온유에게 내밀었다.“너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 배고프면, 여기 한번 물어볼래?”권온유는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정승우를 바라보았다.“우리 집은 가난해서 늘 먹을 게 부족했거든. 그래서 어릴 때 너무 배가 고프면 이렇게 배고픔을 달랠 만한 걸 물곤 했어.”권온유는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배고픔을 달랠 만한 것'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정승우는 웃으며 계속 설명했다.“예를 들어 쌀통 같은 거야. 한때 쌀이 들어 있던 쌀통은 비어 있어도 쌀 냄새가 남아 있거든. 그래서 쌀통 가장자리를 살짝 물면서 하얀 쌀밥을 먹는 상상하는 거야. 그러면 배가 덜 고파져.”“그리고 이웃집에서 밥하는 냄새를 맡으며 그 밥을 먹는 상상을 하는 거야. 그러면 그렇게 배고프지 않더라고.”권온유는 정승우의 이야기에 넋을 잃고 입을 벌린 채 있었다. 정승우는 웃음을 터뜨렸다.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한때 정대명이 도박과 술에 빠져 정승우를 굶겼던 시절은 그야말로 비참한 순간들이었다.잠시 후, 권온유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고 정승우는 속으로 ‘큰일이다'라고 생
영미는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최지용을 지켜보았다.최지용은 다소 초조한 기색으로 구석에 앉아 휴대전화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 전화를 걸기도 했다.영미는 바로 뒤를 따라갔고 최지용의 낮고 다급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찾았습니까?”“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세요... 만약 납치범의 목적이 돈이었다면 분명 전화를 걸어올 겁니다!”영미의 가슴이 철렁하며 내려앉았다.납치범이라니? 대체 뭘 찾는다는 거지?백인서와 통화한 걸까?그때, 최군성이 큰 소리로 외쳤다.“지용이 형, 여기서 뭐 해요?”영미는 얼른 몸을 숨겼고 최군성은 최지용에게 다가가 최지용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우리 형이 찾고 있었는데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거예요? 어서 와서 먹고 즐기자고요!”최지용은 최군성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영미와 눈이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잠시 멈칫했다.영미는 급히 시선을 피하며 억지 미소로 인사했다.“지용 오빠...”“어, 영미?”최군성도 배윤아처럼 물었다.“여기 웬일이야? 형님이 널 초대한 것 같지 않은데?”“그게...”영미는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최군성은 영미의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최지용을 끌고 가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최지용은 점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영미가 도대체 여기 왜 있는 거지? 평소에는 볼 수 없던 사람이, 왜 하필 오늘 온유가 사라진 날에 나타난 걸까?그때, 최군형과 강소아가 가원이를 품에 안고 나타났다.강소아는 아이를 보행기에 앉혔고 아이는 보행기 가장자리를 잡고 작은 발을 내디뎠다. 이 모습에 방 안의 모든 사람이 환호성을 질렀다.영미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자리를 떠 교외의 버려진 공장으로 향했다.그 시각, 정대명은 영미의 지시에 따라 승합차를 몰고 공장에 도착해 있었고 영미가 도착했을 때 그는 공장 문 앞에서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영미는 핸드백을 휘둘러 정대명에게 던졌다.“정대명 씨, 감히 날 속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