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바지를 안 입었다!“아아!”‘망했다!’배경원은 계속해서 비명을 지르며 허둥지둥 옆에서 옷 한 벌을 가져와 가렸다.소녀는 겁에 질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바로 그때 탈의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배경원은 비명을 멈추고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는데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안에 사람이 있습니까? 지금 들어가도 됩니까?”남자 목소리다.배경원은 어리둥절했다.그는 막 문을 열려고 하는데 갑자기 무엇에 발목을 잡혔다.고개를 숙여 봤는데 소녀가 그의 앞에 엎드려 그의 다리를 잡고 있었고 눈에는 물안개가 한층 가라앉았다.“제발”그녀는 애원했다.“제가 여기 있다고 말하지 마세요...”“네?”배경원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이게 무슨 상황이에요?”“제발요!”밖에서 노크 소리가 더 커졌다.배경원은 생각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쾅 차고 들어오는 순간 그는 몸에 걸친 옷을 벗어 던지고 소녀를 바닥에 눕혔다.그는 그녀의 등에 손을 얹고 차가운 바닥과 닿지 않도록 막아줬다.그의 건장한 몸은 작은 그녀를 꽁꽁 싸맸다.몇 명의 남자들이 뛰어 들어와서 눈앞의 이 광경을 보고 경악했다.“뭐 하는 거야?”배경원은 살짝 고개를 돌리고 어두운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놈들이야! 죽고 싶어?”이 사람들은 전부 임씨 집안의 집사여서 배경원을 알아봤다. 다들 너무 놀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배씨... 도련님...”“당장 꺼지지 못해! 지금 바쁜 거 안 보여?”“네. 네...”사람들이 허둥지둥 뛰쳐나갔고 문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발소리가 멀어지자, 배경원은 그제야 몸을 추스르고 조심스럽게 소녀를 일으켜 세웠다.“괜찮아요?”소녀는 기침을 많이 해서 말할 힘조차 없었다.“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배경원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병원에 데려다줄게요.”“괜찮아요...”그녀는 겨우 이 말을 내뱉었다. “제 몸은 제가 잘 알아요.”
“이름이 수정이에요?”배경원은 볼을 불룩하게 하고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럼 성이 뭐예요?”임수정은 시선을 아래로 보며 묵묵부답했다.어차피 그녀의 성이 무엇이든 이름은 암호에 불과할 뿐이라고 생각한 배경원은 웃으며 말했다.“알겠어요. 그럼, 마당에 산책하러 갑시다!”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문밖으로 나가려고 했다.“아니, 그게...”그는 밖으로 나가기도 전에 임수정에게 붙잡혔다.배경원은 멍하니 고개를 숙였는데...‘바지를 안 입었잖아!’그는 순간 얼굴이 붉어지고 놀란 눈으로 임수정을 바라보면서 우는 것보다 더 볼썽사나운 웃음을 지어냈다.임수정은 배경원 덕분에 웃었고 창백하던 작은 얼굴에 마침내 핏기가 돌았다.배경원은 황급히 탈의실로 뛰어 들어가 서둘러 바지를 입은 뒤 임수정을 데리고 마당으로 산책하러 나갔다.가을밤은 아름다웠다. 마당은 하루 종일 햇볕을 쫴서 아직도 따스한 햇볕 냄새가 난다. 마당은 조용했고 때때로 작은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반딧불도 날아다녔다.임수정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가볍게 눈을 감았다.이렇게 마당에 서서 자유롭게 숨을 쉬는 건 전생에나 있을 법한 일이다.“너무 좋아요.”임수정은 웃으며 눈을 뜨고 짙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네?”배경원은 못 알아들었다.“제가 이렇게 마당에 서서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것은 이미 저에게는 흔치 않은 일이에요.”“...”배경원은 더 이해가 안 갔다.“평소에 숨 안 쉬어요? 혹시 인공호흡기를 차고 살아요?”임수정은 그를 보고 싱긋 웃었다.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었지만 오래 알고 지낸 것 같았다.임수정은 오랫동안 웃지 않았는데 오늘 밤의 웃음은 모두 배경원이 선사해 준 것이다.방금 전 그는 그녀를 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그대로 바닥에 눕혔고... 그 순간 그녀의 심장박동이 빨라졌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 같았다.임수정은 배경원 셔츠에서 나는 맑은 냄새를 맡았고 그의 남자다운 기운을 느꼈다.그녀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던 문이 갑자기 그
배경원은 한순간 심장이 멈칫한 것을 느꼈고 자신이 주체할 수 없었다.임수정의 청아한 얼굴은 마치 마법이 있는 듯했고 그 두 눈은 마치 신비로운 세계처럼 그를 유인했다.그는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분위기가 갑자기 조용해졌고, 온 세상의 빛이 그녀에게 집중되는 것 같았다.시원한 바람이 불어오자, 임수정은 기침을 몇 번 했다.배경원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외투를 벗어 그녀에게 덮어 주었다.“괜찮아요!”“어서 걸치세요!”배경원은 옷을 그녀에게 걸쳐 주었다. “몸이 안 좋다면서요? 그럼 더더욱 감기에 걸리면 안 돼요!”임수정은 입술을 깨물고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이때 경매장 안에서 소리가 들려왔고, 사람들은 문밖으로 걸어 나왔다.“다 끝난 것 같네요.”배경원이 가볍게 기침을 두 번 하고 말했다.“제가... 집까지 데려다줄게요. 어디 사세요?”임수정은 잠깐 멈칫하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조금 전의 모든 것이 마치 꿈인 것 같았다. 이제는 꿈에서 나올 무렵이 됐고 그녀도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현실은 임씨 가문의 알려지지 않은 딸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신이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 전부 미지수다...임수정은 몸을 돌려 천천히 걷고 있었고 멀지 않은 곳에서 임씨 가문 집사들이 자기를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배경원을 돌아보며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고마워요.”그에게 감사해야 한다.방금 이 꿈은 모두 그가 선사해 준 것이다.배경원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괜찮아요!”배경원은 퉁명스럽게 굴었다.“다음에 또 산책하고 싶으면 저를 찾으세요...”그러나 말소리가 채 떨어지기도 전에 임수정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배경원은 눈을 크게 뜨고 그녀의 흰 그림자가 그에게서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을 지켜만 보았다....최연준은 강서연에게 은근슬쩍 말했다.“경원이 연애하는 것 같아.”강서연은 뚱냥이한테 고양이 밥을 주고 있었는데, 이 말을 듣자마자 머리가 잠깐 안 돌아갔다.“경원 씨가 연애한
강서연은 얼굴을 붉혔다. 최연준이 정신이 산만해진 틈을 타 황급히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방한서는 등골이 오싹해져 도망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최연준의 그 얼굴은 너무 어두워 잉크를 짜낼 수 있는 정도다.그는 대문까지 몇 걸음 걸어가서 철문을 쾅 하고 열어 얼음장처럼 굳은 눈으로 방한서를 노려보았다.방한서는 입꼬리를 씰룩이며 억지웃음을 지었고 심장은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무슨 일이야?”최연준은 차갑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방한서는 하고 싶은 말을 다 잊어버리고 멍하니 그를 쳐다만 봤다.몇 초간의 침묵은 마치 몇 세기처럼 길었다.그리고 강서연은 방에서 누군가의 포효를 들었다.“방한서!”박경실은 채소를 반쯤 다듬다가 이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주방에서 뛰쳐나왔다.“도련님, 왜 그러세요?”강서연은 소파에 앉아 몰래 실실 웃었다.“이 방비서가 또 무슨 사고를 쳤길래!”박경실은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저으며 주방으로 돌아가 혼잣말했다.“도련님께서 목이 너무 무리한 것 같은데, 이따가 탕을 끓여서 몸보신을 해줘야겠어.”마당에서 뚱냥이는 밥을 몽땅 먹어 치우고 몸을 비틀거리며 두 남자 사이로 파고들어 갔다. 이리저리 살펴보고는 울음소리를 냈다.최연준이 고개를 숙여 뚱냥이를 보고 나서야 어두운 얼굴이 그나마 조금 풀렸다.그는 방한서를 째려보았다.“너는 고양이보다도 못해!”고양이도 용돈 받는 것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네, 네...”방한서는 사과하는 내내 진땀이 났다.그때 갑자기 머릿속에 번뜩 스치는 게 있었다. 이곳에 온 목적이 생각난 방한서는 황급히 주머니에서 낡은 핸드폰을 꺼냈다.바로 전에 인지석 방에서 발견한 그 폰이다.“도련님, 핸드폰의 데이터가 복구되었습니다. 한 번 확인해 보세요!”최연준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핸드폰을 받고 뒤적였다. 그 안에는 최연희와 인지석의 채팅 기록이 남아있다.그는 얼굴빛이 어두워지더니, 성큼성큼 집으로 걸어 들어갔다.최연준은 핸드폰을 강서연
“네, 도련님.”방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윤정재는 신비한 존재고 대중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경매장에도 그는 모습만 드러냈을 뿐 자리에는 나타나지 않았고, 그의 참모습을 본 사람도 몇 명 되지 않았다.“우리의 이름으로 초대하면 아마 거절할 거야.”최연준은 일찍이 이를 생각하였다.“그러면... 영감님 이름으로 요청할까요?”“그럴 필요는 없어.”최연준은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냥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 한다고 전해줘!”방한서는 잠깐 멈칫했다.“네, 이것도 방법이네요! 어차피 영감님 위신이 거기에 있으니, 윤정재가 거절할 수는 없을 거예요.”최연준은 웃고 있었는데 갑자기 안색이 안 좋아졌다.그는 몸을 굽혔고 다리 관절이 뭔가에 갈라지는 것 같아 통증이 심해서 낮은 소리로 신음했다.“도련님, 괜찮으십니까?”방한서가 많이 당황했다.최연준은 강서연이 주방에 있어 조용히 하라고 눈길을 줬다.“괜찮아. 큰 문제 아니야.”그는 몸을 움직이면서 통증을 완화했다.“예전에 입었던 상처가 재발한 거예요?”방한서가 걱정 가득한 말투로 물었다.항공 사고 후, 최연준은 상처를 입었다. 다른 곳은 괜찮았는데, 두 다리의 부상만이 후유증을 남겼다.“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아.”최연준은 몸을 곧추세우고 담담하게 말했다.“요즘 날씨가 추워져서 가끔 아픈 거야. 날씨에 적응하면 괜찮을 거야.”“신 의사님께... 한 번 더 여쭤볼까요?”최연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그는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었고, 뼈는 한 조각 한 조각 강제로 떼어진 것처럼 몇 번이나 아파서 죽을 지경이었던 기억이 났다.신석훈은 그의 옆에서 지극정성으로 보살폈고, 그의 썩은 표정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그가 회복할 수 있었던 것도 신석훈 덕분이다.그리고 최연준이 어렴풋이 기억하기로 신석훈이 그에게 일종의 약을 사용했는데 효과가 아주 좋았다. 지금 다시 재발했으니 그 약을 다시 한번 먹으면 금방 나을지도 모른다....다음날 최연준은 의학연구센터에 찾아갔다.
“네.”최연준은 엄숙한 표정으로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말했다. “서연이 몰래 온 거라서 비밀로 해주세요...”“무슨 일인데요?”“제 다리 상처가... 최근에 아프기 시작했어요.”신석훈은 깜짝 놀라 그를 진찰실로 데리고 가서 제대로 검사하려고 했다.“그럴 필요는 없어요.”최연준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고질이에요. 전에는 한 번도 아픈 적이 없었는데, 요즘은 날씨가 추워지면 심하게 아파요. 그때 석훈 씨가 저한테 약 처방을 했잖아요. 반은 내복, 반은 외용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효과가 아주 좋았어요... 그래서 오늘 온 것도 그 약을 더 처방해 줬으면 하는 거예요.”신석훈은 좀 난처해서 한참 동안 말을 안 했다.“왜 그래요?”최연준은 궁금했다. ‘의사가 약을 처방하는 것이 어려운 건가?’“연준 씨.”신석훈은 그를 보며 입술을 깨물면서 우물우물 말했다.“사실 저는... 그게 무슨 약인지 몰라요.”“무슨 소리예요?”최연준은 의아했다.“석훈 씨가 저한테 준 약이잖아요!”“제가 쓴 거는 맞는데 약은 다른 사람이 준 거예요!”최연준은 더욱 의심스러웠다.신석훈은 한숨을 내쉬고 사실을 전부 털어놓았다.“연준 씨, 생각해 보세요. 그때 제가 의대를 졸업했지만, 의사가 된 지 얼마 안 됐어요. 혼자서 수술도 안 해봤는데 어떻게 당신을 치료해 줄 수 있었겠어요? 저는 당연히 연준 씨를 치료하고 싶었지만, 능력이 부족해서... 그때 연준 씨는 상처투성이였고, 상처가 감염되어 고열을 일으켜 엄청 위독한 상태였어요. 저는 당신이 구제 불능이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이 일을 하면서 처음으로 내 손에 죽은 부상자라고 생각했단 말이에요. 그때 제가 속수무책이었을 때 어르신 한 분이 저한테 그 약을 주면서 연준 씨 상처를 치료할 수 있다고 해서 제가...”“어르신?”최연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네.”신석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이 일에 대해서 제가 연준 씨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저의 허영심 때문이에요. 어떤 의사도 자신이 다른 사람을 치료할
“정말 비겁하기 짝이 없군요!”윤정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최진혁은 교활한 눈빛으로 그를 보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나쁜 생각밖에 없는 것 같다.최연준이 전용 비행기를 탔다가 사고가 났었던 사실을 윤정재는 모르고 있었다. 그때 그와 최진혁은 연회에서 알게 된 사이인데 기껏해야 고개나 끄덕이며 인사한 정도였다.남양의 윤제 그룹은 제약 회사 말고도 민용 공항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남양 지역의 몇몇 대형 공항도 전부 윤제 그룹이 관리하고 있었다.하여 최진혁은 윤정재에게 사실을 숨기고 기술 직원을 매수하여 최연준의 전용 비행기에 손을 썼던 것이었다...그러고는 윤정재에게 엄청난 금액의 보험증명서를 보여주면서 거기에 적힌 수천억에 달하는 보험금이 그의 것이라고 했다.윤정재는 자신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에 휘말리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회장님, 이 일이 만약 퍼져나가기라도 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회장님의 변명을 들으려 하지도 않고 회장님의 부하가 최연준을 해쳤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때가 되면 회장님이 평생 쌓아온 명예도 함께 무너지겠죠!”윤정재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보험증명서를 혐오스럽게 힐끗 보고는 자리를 떠났다.그러다가 나중에 죄책감이 들어 최연준의 행방을 찾아다녔다. 그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소식을 알게 된 윤정재는 이건 하늘이 그에게 준 기회라고 생각했다.하여 사람을 보내 최연준이 얼마나 다쳤는지 상태를 몰래 알아보게 했고 또 약까지 보내줬다. 그때 보낸 약으로 거의 이삼 년은 버틸 수 있었는데 이제 그 기한이 거의 된다...“최진혁 씨.”그의 눈빛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난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당신 같은 나쁜 사람과 손을 잡지도 않아요.”“하하, 윤 회장님.”최진혁이 코웃음을 쳤다.“어디서 고상한 척이에요? 회장님이 무슨 짓까지 해가면서 그 자리에 앉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아무리 그래도 사람들은 내 앞에서 대놓고 얘기하진 못해요. 왜인 줄 알아요?”윤정재는 뒷짐을 지고 카리스마를 뽐냈다
강서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화려한 치장에 선글라스를 끼고 과한 귀걸이와 목걸이를 한 여자가 흐느적거리며 걸어왔다.“프로 매니저팀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선글라스를 벗고 강서연을 쳐다보는 그녀의 태도는 쌀쌀맞기 그지없었다.“어디 있는 거죠?”하 매니저는 강서연과 눈빛을 주고받고는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그러자 강서연이 먼저 웃으며 악수를 건넸다.“문나 씨죠? 저는...”문나는 오만함이 하늘을 찌를 기세였고 그녀가 건네는 악수도 가볍게 무시했다. 강서연은 허공에 머무른 손을 멋쩍게 거두어들였다.하 매니저가 한 걸음 나서서 말했다.“문나 씨, 이분은 어진 엔터테인먼트의 수석 비서 강서연 씨입니다. 연예인 관리를 담당하고 있으니, 앞으로 문제 있으면 서연 씨와 얘기하시면 돼요.”“아, 강서연 씨!”문나는 새로 한 크리스탈 네일을 보며 말끝을 길게 늘어뜨렸다.“서연 씨는 경험이 있어요? 전 아무나 케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문나 씨. 강 비서님이 이 바닥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업무 능력이 아주 뛰어나요.”“업무 능력이 뛰어난가요, 아니면 남자를 달래는 능력이 뛰어난가요?”하 매니저는 일그러진 얼굴로 강서연을 쳐다보았다. 강서연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조금 전 문나는 임나연의 추천으로 들어온 사람이라고 하 매니저에게서 들었다.‘의도가 불순한 걸 보니 날 노리고 온 거 맞네.’하지만 근래 문나의 인기가 높은 건 사실이었다. 대표작이 없어도 팬덤만으로도 평생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이 넉넉하게 살 수 있었다.이게 바로 어진 엔터테인먼트가 그녀와 계약한 이유겠지.숨을 깊게 들이마신 강서연이 뭔가 얘기하려던 그때 휴대 전화가 진동했다. 먼 유럽에서 걸려 온 김자옥의 전화였다.강서연은 그 핑계로 자리를 피하여 김자옥의 사무실로 들어와 문을 걸어 잠갔다. 방음 효과가 좋아 밖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대표님.”그녀는 전화를 받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끔 차가 지나갔지만, 정승우가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어도 아무도 멈춰 서지 않았다.어둠이 내려앉았고 기온은 점점 내려가고 있었다.며칠 동안 육체와 마음이 지친 권온유는 이제 무너질 듯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정승우는 어쩔 수 없이 온유를 등에 업고 비틀거리며 길을 걸었다.“오빠...”권온유는 울먹이며 말했다.“해가 졌어요. 저... 무서워요.”“괜찮아.”정승우는 뒤돌아 미소를 지었다.“오빠가 집에 데려다줄게.”“오빠, 우리 그냥 돌아가요...”“뭐라고?”권온유의 시선이 정승우의 피로 물든 발에 닿았다.“발이 많이 아프죠?”권온유의 작은 얼굴 위로 눈물이 두 줄기 흘러내렸다.“오빠, 저 내려주세요. 그냥 돌아가요...”“온유야?”권온유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그 집이 낡고 춥긴 해도... 오빠 발에서 피가 나진 않잖아요!”정승우는 멍하니 잠시 굳어 있다가 그 어눌한 말 속에 담긴 다정함을 깨달았다.이 작은 아이는 납치당했던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라도 정승우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정승우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작은 새들이 집으로 향해 줄지어 날고 있었다.정승우는 온유를 데리고 반드시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다짐했다.“바보야.”정승우는 온유를 내려놓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난 하나도 안 아파. 그리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어.”“그 사람이... 우리를 때릴까요?”“그럴 거야.”정승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어린 시절, 정대명에게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탈출할 때 그의 뒤통수를 내려친 한 방은 그동안의 빚을 모두 갚은 셈이었다.“그런데 오빠, 그 사람은 오빠 아빠잖아요?”권온유는 작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하지만 오빠가 아프다고 제가 말했을 때 오빠 아빠가 들어왔었잖아요.”정승우는 쓴웃음을 지었다.자신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정대명이 들어온 것은 아마 걱정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죽으면 함께 나쁜 짓을 할 사람이 없어질까 봐서였었다.정대명은 단지
차 안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영미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정대명에게 다가갔다. 그의 머리 아래로 어두운 핏자국이 퍼져 있었고 그 흔적은 이미 굳어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의 코 밑에 손을 가져다 댔다.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영미는 떨리는 마음을 억누른 채 차가운 눈빛으로 정대명을 내려다보다가 거칠게 발길을 휘둘렀다.“일어나요!”강소아와 최군형도 다가와 공장 안을 살폈지만 안은 고요히 비어 있었다.“아이들은요?”“아이고...”정대명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살려줘, 살려줘... 저 괘씸한 녀석이!”“정대명 씨!”영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했다.어쨌든 이번 일은 영미가 자신 있게 권온유의 행방을 안다고 장담한 일이었다.영미는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함께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확신에 차 말했다.그런데 지금... 정대명은 다쳐 쓰러져 있고 두 아이는 사라졌었다.백인서를 함정에 빠뜨리려던 영미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것이다.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정대명은 도움을 청하려다 영미가 눈짓을 주는 것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영미의 눈길을 따라 보니 최군형과 강소아도 함께 와있었다.정대명은 예전에 영미가 했던 경고가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아는 척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정대명은 머리를 살짝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신이 정대명인가요?”최군형이 다가가 물었다.정대명은 말끝을 흐리며 최군형의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백인서의 양아버지시고?”최군형은 다시 물었다.“당신이 당신 아들과 함께 권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게 맞나요?”“아니야, 나 아니야!”정대명은 크게 당황하며 손을 흔들었다.“이봐, 동생, 난 억울해! 내 아들 녀석이 나를 해치려고 했어! 내 머리를 봐, 그 자식이 벽돌로 내리쳤다니까!”“그만해요!”영미는 정대명의 말이 길어질수록 상황이 불리해질 것을 우려해 정대명을 노려보며 더 이상 말을 못 하게 했다.강소아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들의 서툰 수법이 한심하기만
경찰서 밖에서 최지용은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한참을 걷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젊은 경찰관이 안에서 뛰어나오고 있었다. 최지용은 급히 다가가며 말했다.“정호야!”정호라는 젊은 경찰관은 최지용을 보자 반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 녀석!”최지용은 정호에게 다가가 가볍게 주먹을 툭 날리며 말했다.“도대체 무슨 일이야? 왜 사전에 알려주지 않은 거야?”정호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방금 최씨 집안에서 백인서를 데려간 사람 중에 정호도 있었다. 최지용도 놀라웠지만, 영미 역시 경찰이 직접 찾아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떠나기 전, 정호가 살짝 눈짓을 보냈고 최지용은 그의 의도를 알아채 경찰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지용이 형.”정호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형수님께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잘 구분하고 계시니 문제없을 겁니다!”“도대체 누구 지시로 백인서를 여기로 데려온 거지?”“소아 아가씨예요!”정호는 어깨를 으쓱했다.“소아 아가씨가 갑자기 지시한 거라 사전에 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최지용은 살짝 놀랐다. 강소아의 지시라니.“형수님께서도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으니까요. 그 아이가 실종되기 전에 형수님께서 만난 적이 있거든요. 경찰이 형수님을 데려가서 조사하는 건 당연한 절차입니다.”최지용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피식 웃음을 지었다.강소아가 이런 ‘당연한 절차’를 이용해 백인서를 경찰서로 보낸 이유는 경찰서야말로 가장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또 누군가가 음모를 꾸며 백인서에게 덮어씌우려 한다 해도 경찰서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경찰서 안에는 일을 봐주는 사람들도 있으니 백인서가 여기서 며칠 지내는 동안 힘든 일 없이 외부의 소란도 피할 수 있는 셈이었다.최지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강소아는 정말 자매를 위한 배려가 남달랐다. 이렇게까지 배려심 깊은 방안을 생각해 내다니!“지용이 형.”정호가 계속해서 말했다.“도련님께서
영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소아 언니, 저를 믿지 않으세요?”“난 오직 사실만을 믿어.”“권씨 가문의 딸이 실종된 사건에 백인서 씨의 양아버지와 남동생이 관련되었어요, 그게 바로 사실이에요!”강소아는 순간 멍하니 있다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려 했다.세상에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다 있나 싶었다.호텔 뒷뜰에 있는 그 CCTV가 정말 완전히 고장 났다고 생각하는 걸까? 육씨 가문과 최씨 가문이 힘을 합쳐 그 고장 난 CCTV 하나도 못 고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최군형은 강소아의 어깨를 가볍게 눌러 안심시키며 슬며시 휴대전화를 건넸다.강소아는 화면을 확인했다. 최군형의 부하가 보낸 메시지였다.“도련님, CCTV 데이터를 복구 중입니다. 곧 진실이 밝혀질 겁니다!”강소아는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영미가 이렇게까지 백인서를 몰아세우는 걸 보니 마음 한구석에 무언가 꺼림칙한 게 남아 있는 것 같았다.어차피 꼬리가 저절로 드러날 것이었기에 그저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다.바로 그때, 집사가 다소 당황한 얼굴로 방에 들어섰다. 집사의 뒤에는 몇 명의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신분을 밝힌 후 방 안을 둘러보며 엄숙한 목소리로 물었다.“여기 백인서 씨가 계십니까?”표아정은 등을 꼿꼿이 펴고 대답했다.“경찰관님께서 여긴 무슨 일로 오셨나요?”“당신이 백인서 씨인가요?”“저는...”“백인서 씨가 납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신고를 접수했습니다!”“뭐라고요?”백인서는 얼굴이 창백해졌다.“백인서 씨, 조사에 협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희와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권온유가 납치된 지 하루가 지났다.그동안 정대명은 단 한 번 음식을 가져왔는데, 그것도 차갑게 식은 죽 한 그릇과 딱딱한 빵 한 조각뿐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귀하게 자란 권온유에게 이런 음식은 처음이었다. 울고 싶었지만, 감히 울지 못하고 그저 눈물을 참으며 빵을 조금씩 뜯어 먹고 있었다.정승우는 그런 온유의 모습을 보고
“아줌마,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그럼, 제가 알아낸 사실을 전부 말씀드릴게요!”영미는 입가에 교만한 미소를 띠며 백인서를 차갑게 한 번 쳐다보았다.“백인서 씨의 친어머니인 백홍은 인신매매범이었다는 사실, 모두 아셨나요? 백인서 씨의 어머니는 백인서를 정대명의 집에 맡겼고... 흥! 정대명의 아내도 백홍이 납치해 왔다는 소문이 있어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잖아요. 제 생각엔... 인신매매범의 딸이라면 그런 일쯤은 익숙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은 권온유의 실종이 정말로 백인서 씨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시나요?”“영미!”강소아가 나서며 분노를 가득 담아 소리쳤다.“허위 사실을 퍼뜨리지 마!”“소유 아가씨, 억울하네요!”영미는 강소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제가 이렇게까지 조사한 건 다 아가씨를 위한 거예요! 딸도 있는 사람이 백인서를 곁에 두고도 마음이 놓이세요?”“그만해!”최지용이 크게 소리쳤다.백인서는 몸을 떨며 믿기지 않는 눈으로 최지용을 쳐다보았다.그러나 최지용의 얼굴에는 의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최지용은 굳건한 눈빛으로 뒤에 있는 백인서를 지키고 있었다.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처럼 백인서를 아끼고 있었다.백인서는 코끝이 찡해지며 본능적으로 최지용의 손을 꼭 붙잡았다. 최지용의 따스한 손은 백인서에게 큰 용기를 주었고 그 온기가 어둠의 두려움을 잊게 해주었다.최지용은 백인서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고 다시 영미를 바라볼 때는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영미야.”최지용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두 집안의 관계를 생각해서 그저 넘어가는 거야. 더 이상 선을 넘지 마.”최군형도 나서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요, 백인서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모르겠어요? 영미 아가씨, 우리 최씨 가문 사람들을 바보로 생각하는 건 아니죠?”영미는 순간 긴장했다. 최군형의 말 속엔 어딘가 숨은 뜻이 있는 듯했다.최군형의 깊고 복잡한 눈빛을 파악하기 어려웠다.표아정은 천천히 일어나 어깨에 걸친 숄을
백인서는 복잡한 눈빛으로 최지용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그때 최지용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표아정이었고 다급한 목소리로 서둘러 돌아오라고 재촉했다.최지용은 결국 어머니의 말에 따라 백인서를 데리고 최씨 집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넓은 거실에는 최군형과 강소아도 나와 있었고 모두 엄숙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백인서가 들어서자, 표아정이 백인서를 올려다보며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다.강소아는 백인서와 눈을 마주치며 단호하게 미소 지었다.백인서가 의아해하던 찰나, 영미가 천천히 밖에서 걸어 들어왔다.“아줌마, 지용 오빠. 제가 권온유의 행방을 알아냈어요.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뭐라고?”최지용이 놀라서 물었다.“네가 어떻게 아는데?”영미는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지용 오빠, 특수부대 출신이라고 정보가 우리보다 더 빠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최씨 가문은 만능이 아니에요, 최씨 가문도 모르는 정보가 있다고요.”표아정은 가볍게 기침하며 차분히 상황을 지켜보았다.최군형과 강소아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떤 일이 일어날지 주목하고 있었다.최지용의 이마에는 점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미의 눈에는 한 줄기 교만한 빛이 번졌다.영미는 오는 길에 이미 모든 계획을 짰다. 정대명의 말이 맞았다. 누구를 훔치든 상관없었다. 인신매매범의 딸인 백인서가 아이들을 해치러 다닌다는 누명을 씌우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하면 백인서는 모두의 신뢰를 잃게 될 터였다.영미는 이제 한 아이의 엄마가 된 강소아가 인신매매범을 곁에 둘 리 없다고 믿었고, 최지용 역시 이 사실을 알면 더는 백인서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래서 영미는 정대명을 배신하기로 마음먹었다.영미는 권온유를 넘기고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한패가 되어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주장할 계획이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백인서는 변명의 여지도 없이 궁지에 몰릴 것이었다!“지용 오빠.”영미는 고개를 돌려 최지용을 바라보며 한 글자씩 천천히 말했다.“권온유는 정승
“그... 괜찮아!”정승우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권온유에게 말했다. 정승우는 이곳에서 권온유를 반드시 데리고 나가겠다고 결심했다.그런데 이때, 공장 문이 “쾅” 하고 열리더니 곧바로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정승우는 재빨리 권온유에게 눈짓했고 권온유도 알아채고는 즉시 땅바닥에 쓰러져 의식이 없는 척했다.정승우는 벽에 기대어 눈을 반쯤 감았다.“이 아이인가요?”영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맞아.”정대명은 영미를 흘깃 노려보며 묵묵히 대답했다.영미는 두 걸음 앞으로 다가서서 희미한 빛 속에 있는 아이를 살펴보더니, 곧 얼굴빛이 확 변했다.“이 아이... 혹시 권씨 집안의 막내딸 아니에요?”정대명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애초에 아이를 훔쳐 올 때 이 아이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 리가 없었다.“정대명 씨.”영미가 차갑게 웃으며 돌아보았다.“제가 최씨 가문 집안 아이를 훔쳐 오라고 했지, 권씨 집안 아이를 훔치라고 했나요? 이러고도 저를 속이지 않았다고요?”“그게...”정대명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영미 아가씨, 어차피 목적은 백인서를 곤경에 빠뜨리는 거잖아? 그러니 누구를 훔쳐 오든 상관없지 않아? 아이를 훔치기만 하면 유괴범이 되는 거니까.”이 말은 영미에게만 충격을 준 게 아니었다. 정승우의 귀에도 또렷이 들어왔다.“좋아요.”영미는 깊은숨을 들이마신 뒤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이 아이는 잘 지키고 있어요, 제가 다시 연락할 테니까.”...한편, 권씨 집안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권욱은 조순영을 탓하며 아이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했고, 조순영은 오열하며 남편을 원망했다. 조순영은 권욱이 바깥에서 여자와 부적절하게 얽히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라고 했다.“헛소리하지 마! 사람들이 나한테 어떤 소문을 퍼뜨렸는지 잘 알잖아. 결혼 생활 내내 너한테 부끄러운 일 한 적 없어.”“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정말 떳떳하게 행동했다면 왜 사람들이 당신만 가만두지 않는 건데?”며칠 전까지만
권온유의 질문에 정승우는 당황했다.권온유는 커다란 눈망울로 정승우를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했던 슈퍼맨 같은 오빠가, 이제는 먹을 것 하나 구하지 못하는 모습이 되어버린 것이다.정승우는 어색하게 입가를 씰룩이며 권온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이야기를 이어갔다.“너, 정말 배고파?”“네!”권온유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 작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원래는 엄마랑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 했어요. 엄마가 특별히 고등어조림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하셨거든요... 엉엉... 엉엉...”“울지 마, 울지 마! 그냥 생선 하나 가지고...”“나 배고파!”정승우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아이와 대화하는 건 그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겨우 권온유를 달래고 나서 정승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팔을 걷어붙이며 권온유에게 내밀었다.“너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 배고프면, 여기 한번 물어볼래?”권온유는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정승우를 바라보았다.“우리 집은 가난해서 늘 먹을 게 부족했거든. 그래서 어릴 때 너무 배가 고프면 이렇게 배고픔을 달랠 만한 걸 물곤 했어.”권온유는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배고픔을 달랠 만한 것'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정승우는 웃으며 계속 설명했다.“예를 들어 쌀통 같은 거야. 한때 쌀이 들어 있던 쌀통은 비어 있어도 쌀 냄새가 남아 있거든. 그래서 쌀통 가장자리를 살짝 물면서 하얀 쌀밥을 먹는 상상하는 거야. 그러면 배가 덜 고파져.”“그리고 이웃집에서 밥하는 냄새를 맡으며 그 밥을 먹는 상상을 하는 거야. 그러면 그렇게 배고프지 않더라고.”권온유는 정승우의 이야기에 넋을 잃고 입을 벌린 채 있었다. 정승우는 웃음을 터뜨렸다.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한때 정대명이 도박과 술에 빠져 정승우를 굶겼던 시절은 그야말로 비참한 순간들이었다.잠시 후, 권온유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고 정승우는 속으로 ‘큰일이다'라고 생
영미는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최지용을 지켜보았다.최지용은 다소 초조한 기색으로 구석에 앉아 휴대전화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 전화를 걸기도 했다.영미는 바로 뒤를 따라갔고 최지용의 낮고 다급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찾았습니까?”“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세요... 만약 납치범의 목적이 돈이었다면 분명 전화를 걸어올 겁니다!”영미의 가슴이 철렁하며 내려앉았다.납치범이라니? 대체 뭘 찾는다는 거지?백인서와 통화한 걸까?그때, 최군성이 큰 소리로 외쳤다.“지용이 형, 여기서 뭐 해요?”영미는 얼른 몸을 숨겼고 최군성은 최지용에게 다가가 최지용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우리 형이 찾고 있었는데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거예요? 어서 와서 먹고 즐기자고요!”최지용은 최군성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영미와 눈이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잠시 멈칫했다.영미는 급히 시선을 피하며 억지 미소로 인사했다.“지용 오빠...”“어, 영미?”최군성도 배윤아처럼 물었다.“여기 웬일이야? 형님이 널 초대한 것 같지 않은데?”“그게...”영미는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최군성은 영미의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최지용을 끌고 가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최지용은 점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영미가 도대체 여기 왜 있는 거지? 평소에는 볼 수 없던 사람이, 왜 하필 오늘 온유가 사라진 날에 나타난 걸까?그때, 최군형과 강소아가 가원이를 품에 안고 나타났다.강소아는 아이를 보행기에 앉혔고 아이는 보행기 가장자리를 잡고 작은 발을 내디뎠다. 이 모습에 방 안의 모든 사람이 환호성을 질렀다.영미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자리를 떠 교외의 버려진 공장으로 향했다.그 시각, 정대명은 영미의 지시에 따라 승합차를 몰고 공장에 도착해 있었고 영미가 도착했을 때 그는 공장 문 앞에서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영미는 핸드백을 휘둘러 정대명에게 던졌다.“정대명 씨, 감히 날 속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