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수정이에요?”배경원은 볼을 불룩하게 하고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럼 성이 뭐예요?”임수정은 시선을 아래로 보며 묵묵부답했다.어차피 그녀의 성이 무엇이든 이름은 암호에 불과할 뿐이라고 생각한 배경원은 웃으며 말했다.“알겠어요. 그럼, 마당에 산책하러 갑시다!”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문밖으로 나가려고 했다.“아니, 그게...”그는 밖으로 나가기도 전에 임수정에게 붙잡혔다.배경원은 멍하니 고개를 숙였는데...‘바지를 안 입었잖아!’그는 순간 얼굴이 붉어지고 놀란 눈으로 임수정을 바라보면서 우는 것보다 더 볼썽사나운 웃음을 지어냈다.임수정은 배경원 덕분에 웃었고 창백하던 작은 얼굴에 마침내 핏기가 돌았다.배경원은 황급히 탈의실로 뛰어 들어가 서둘러 바지를 입은 뒤 임수정을 데리고 마당으로 산책하러 나갔다.가을밤은 아름다웠다. 마당은 하루 종일 햇볕을 쫴서 아직도 따스한 햇볕 냄새가 난다. 마당은 조용했고 때때로 작은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반딧불도 날아다녔다.임수정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가볍게 눈을 감았다.이렇게 마당에 서서 자유롭게 숨을 쉬는 건 전생에나 있을 법한 일이다.“너무 좋아요.”임수정은 웃으며 눈을 뜨고 짙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네?”배경원은 못 알아들었다.“제가 이렇게 마당에 서서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것은 이미 저에게는 흔치 않은 일이에요.”“...”배경원은 더 이해가 안 갔다.“평소에 숨 안 쉬어요? 혹시 인공호흡기를 차고 살아요?”임수정은 그를 보고 싱긋 웃었다.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었지만 오래 알고 지낸 것 같았다.임수정은 오랫동안 웃지 않았는데 오늘 밤의 웃음은 모두 배경원이 선사해 준 것이다.방금 전 그는 그녀를 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그대로 바닥에 눕혔고... 그 순간 그녀의 심장박동이 빨라졌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 같았다.임수정은 배경원 셔츠에서 나는 맑은 냄새를 맡았고 그의 남자다운 기운을 느꼈다.그녀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던 문이 갑자기 그
배경원은 한순간 심장이 멈칫한 것을 느꼈고 자신이 주체할 수 없었다.임수정의 청아한 얼굴은 마치 마법이 있는 듯했고 그 두 눈은 마치 신비로운 세계처럼 그를 유인했다.그는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분위기가 갑자기 조용해졌고, 온 세상의 빛이 그녀에게 집중되는 것 같았다.시원한 바람이 불어오자, 임수정은 기침을 몇 번 했다.배경원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외투를 벗어 그녀에게 덮어 주었다.“괜찮아요!”“어서 걸치세요!”배경원은 옷을 그녀에게 걸쳐 주었다. “몸이 안 좋다면서요? 그럼 더더욱 감기에 걸리면 안 돼요!”임수정은 입술을 깨물고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이때 경매장 안에서 소리가 들려왔고, 사람들은 문밖으로 걸어 나왔다.“다 끝난 것 같네요.”배경원이 가볍게 기침을 두 번 하고 말했다.“제가... 집까지 데려다줄게요. 어디 사세요?”임수정은 잠깐 멈칫하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조금 전의 모든 것이 마치 꿈인 것 같았다. 이제는 꿈에서 나올 무렵이 됐고 그녀도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현실은 임씨 가문의 알려지지 않은 딸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신이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 전부 미지수다...임수정은 몸을 돌려 천천히 걷고 있었고 멀지 않은 곳에서 임씨 가문 집사들이 자기를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배경원을 돌아보며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고마워요.”그에게 감사해야 한다.방금 이 꿈은 모두 그가 선사해 준 것이다.배경원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괜찮아요!”배경원은 퉁명스럽게 굴었다.“다음에 또 산책하고 싶으면 저를 찾으세요...”그러나 말소리가 채 떨어지기도 전에 임수정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배경원은 눈을 크게 뜨고 그녀의 흰 그림자가 그에게서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을 지켜만 보았다....최연준은 강서연에게 은근슬쩍 말했다.“경원이 연애하는 것 같아.”강서연은 뚱냥이한테 고양이 밥을 주고 있었는데, 이 말을 듣자마자 머리가 잠깐 안 돌아갔다.“경원 씨가 연애한
강서연은 얼굴을 붉혔다. 최연준이 정신이 산만해진 틈을 타 황급히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방한서는 등골이 오싹해져 도망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최연준의 그 얼굴은 너무 어두워 잉크를 짜낼 수 있는 정도다.그는 대문까지 몇 걸음 걸어가서 철문을 쾅 하고 열어 얼음장처럼 굳은 눈으로 방한서를 노려보았다.방한서는 입꼬리를 씰룩이며 억지웃음을 지었고 심장은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무슨 일이야?”최연준은 차갑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방한서는 하고 싶은 말을 다 잊어버리고 멍하니 그를 쳐다만 봤다.몇 초간의 침묵은 마치 몇 세기처럼 길었다.그리고 강서연은 방에서 누군가의 포효를 들었다.“방한서!”박경실은 채소를 반쯤 다듬다가 이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주방에서 뛰쳐나왔다.“도련님, 왜 그러세요?”강서연은 소파에 앉아 몰래 실실 웃었다.“이 방비서가 또 무슨 사고를 쳤길래!”박경실은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저으며 주방으로 돌아가 혼잣말했다.“도련님께서 목이 너무 무리한 것 같은데, 이따가 탕을 끓여서 몸보신을 해줘야겠어.”마당에서 뚱냥이는 밥을 몽땅 먹어 치우고 몸을 비틀거리며 두 남자 사이로 파고들어 갔다. 이리저리 살펴보고는 울음소리를 냈다.최연준이 고개를 숙여 뚱냥이를 보고 나서야 어두운 얼굴이 그나마 조금 풀렸다.그는 방한서를 째려보았다.“너는 고양이보다도 못해!”고양이도 용돈 받는 것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네, 네...”방한서는 사과하는 내내 진땀이 났다.그때 갑자기 머릿속에 번뜩 스치는 게 있었다. 이곳에 온 목적이 생각난 방한서는 황급히 주머니에서 낡은 핸드폰을 꺼냈다.바로 전에 인지석 방에서 발견한 그 폰이다.“도련님, 핸드폰의 데이터가 복구되었습니다. 한 번 확인해 보세요!”최연준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핸드폰을 받고 뒤적였다. 그 안에는 최연희와 인지석의 채팅 기록이 남아있다.그는 얼굴빛이 어두워지더니, 성큼성큼 집으로 걸어 들어갔다.최연준은 핸드폰을 강서연
“네, 도련님.”방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윤정재는 신비한 존재고 대중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경매장에도 그는 모습만 드러냈을 뿐 자리에는 나타나지 않았고, 그의 참모습을 본 사람도 몇 명 되지 않았다.“우리의 이름으로 초대하면 아마 거절할 거야.”최연준은 일찍이 이를 생각하였다.“그러면... 영감님 이름으로 요청할까요?”“그럴 필요는 없어.”최연준은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냥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 한다고 전해줘!”방한서는 잠깐 멈칫했다.“네, 이것도 방법이네요! 어차피 영감님 위신이 거기에 있으니, 윤정재가 거절할 수는 없을 거예요.”최연준은 웃고 있었는데 갑자기 안색이 안 좋아졌다.그는 몸을 굽혔고 다리 관절이 뭔가에 갈라지는 것 같아 통증이 심해서 낮은 소리로 신음했다.“도련님, 괜찮으십니까?”방한서가 많이 당황했다.최연준은 강서연이 주방에 있어 조용히 하라고 눈길을 줬다.“괜찮아. 큰 문제 아니야.”그는 몸을 움직이면서 통증을 완화했다.“예전에 입었던 상처가 재발한 거예요?”방한서가 걱정 가득한 말투로 물었다.항공 사고 후, 최연준은 상처를 입었다. 다른 곳은 괜찮았는데, 두 다리의 부상만이 후유증을 남겼다.“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아.”최연준은 몸을 곧추세우고 담담하게 말했다.“요즘 날씨가 추워져서 가끔 아픈 거야. 날씨에 적응하면 괜찮을 거야.”“신 의사님께... 한 번 더 여쭤볼까요?”최연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그는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었고, 뼈는 한 조각 한 조각 강제로 떼어진 것처럼 몇 번이나 아파서 죽을 지경이었던 기억이 났다.신석훈은 그의 옆에서 지극정성으로 보살폈고, 그의 썩은 표정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그가 회복할 수 있었던 것도 신석훈 덕분이다.그리고 최연준이 어렴풋이 기억하기로 신석훈이 그에게 일종의 약을 사용했는데 효과가 아주 좋았다. 지금 다시 재발했으니 그 약을 다시 한번 먹으면 금방 나을지도 모른다....다음날 최연준은 의학연구센터에 찾아갔다.
“네.”최연준은 엄숙한 표정으로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말했다. “서연이 몰래 온 거라서 비밀로 해주세요...”“무슨 일인데요?”“제 다리 상처가... 최근에 아프기 시작했어요.”신석훈은 깜짝 놀라 그를 진찰실로 데리고 가서 제대로 검사하려고 했다.“그럴 필요는 없어요.”최연준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고질이에요. 전에는 한 번도 아픈 적이 없었는데, 요즘은 날씨가 추워지면 심하게 아파요. 그때 석훈 씨가 저한테 약 처방을 했잖아요. 반은 내복, 반은 외용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효과가 아주 좋았어요... 그래서 오늘 온 것도 그 약을 더 처방해 줬으면 하는 거예요.”신석훈은 좀 난처해서 한참 동안 말을 안 했다.“왜 그래요?”최연준은 궁금했다. ‘의사가 약을 처방하는 것이 어려운 건가?’“연준 씨.”신석훈은 그를 보며 입술을 깨물면서 우물우물 말했다.“사실 저는... 그게 무슨 약인지 몰라요.”“무슨 소리예요?”최연준은 의아했다.“석훈 씨가 저한테 준 약이잖아요!”“제가 쓴 거는 맞는데 약은 다른 사람이 준 거예요!”최연준은 더욱 의심스러웠다.신석훈은 한숨을 내쉬고 사실을 전부 털어놓았다.“연준 씨, 생각해 보세요. 그때 제가 의대를 졸업했지만, 의사가 된 지 얼마 안 됐어요. 혼자서 수술도 안 해봤는데 어떻게 당신을 치료해 줄 수 있었겠어요? 저는 당연히 연준 씨를 치료하고 싶었지만, 능력이 부족해서... 그때 연준 씨는 상처투성이였고, 상처가 감염되어 고열을 일으켜 엄청 위독한 상태였어요. 저는 당신이 구제 불능이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이 일을 하면서 처음으로 내 손에 죽은 부상자라고 생각했단 말이에요. 그때 제가 속수무책이었을 때 어르신 한 분이 저한테 그 약을 주면서 연준 씨 상처를 치료할 수 있다고 해서 제가...”“어르신?”최연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네.”신석훈은 고개를 끄덕였다.“이 일에 대해서 제가 연준 씨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저의 허영심 때문이에요. 어떤 의사도 자신이 다른 사람을 치료할
“정말 비겁하기 짝이 없군요!”윤정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최진혁은 교활한 눈빛으로 그를 보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나쁜 생각밖에 없는 것 같다.최연준이 전용 비행기를 탔다가 사고가 났었던 사실을 윤정재는 모르고 있었다. 그때 그와 최진혁은 연회에서 알게 된 사이인데 기껏해야 고개나 끄덕이며 인사한 정도였다.남양의 윤제 그룹은 제약 회사 말고도 민용 공항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남양 지역의 몇몇 대형 공항도 전부 윤제 그룹이 관리하고 있었다.하여 최진혁은 윤정재에게 사실을 숨기고 기술 직원을 매수하여 최연준의 전용 비행기에 손을 썼던 것이었다...그러고는 윤정재에게 엄청난 금액의 보험증명서를 보여주면서 거기에 적힌 수천억에 달하는 보험금이 그의 것이라고 했다.윤정재는 자신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에 휘말리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회장님, 이 일이 만약 퍼져나가기라도 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회장님의 변명을 들으려 하지도 않고 회장님의 부하가 최연준을 해쳤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때가 되면 회장님이 평생 쌓아온 명예도 함께 무너지겠죠!”윤정재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보험증명서를 혐오스럽게 힐끗 보고는 자리를 떠났다.그러다가 나중에 죄책감이 들어 최연준의 행방을 찾아다녔다. 그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소식을 알게 된 윤정재는 이건 하늘이 그에게 준 기회라고 생각했다.하여 사람을 보내 최연준이 얼마나 다쳤는지 상태를 몰래 알아보게 했고 또 약까지 보내줬다. 그때 보낸 약으로 거의 이삼 년은 버틸 수 있었는데 이제 그 기한이 거의 된다...“최진혁 씨.”그의 눈빛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난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당신 같은 나쁜 사람과 손을 잡지도 않아요.”“하하, 윤 회장님.”최진혁이 코웃음을 쳤다.“어디서 고상한 척이에요? 회장님이 무슨 짓까지 해가면서 그 자리에 앉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아무리 그래도 사람들은 내 앞에서 대놓고 얘기하진 못해요. 왜인 줄 알아요?”윤정재는 뒷짐을 지고 카리스마를 뽐냈다
강서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화려한 치장에 선글라스를 끼고 과한 귀걸이와 목걸이를 한 여자가 흐느적거리며 걸어왔다.“프로 매니저팀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선글라스를 벗고 강서연을 쳐다보는 그녀의 태도는 쌀쌀맞기 그지없었다.“어디 있는 거죠?”하 매니저는 강서연과 눈빛을 주고받고는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그러자 강서연이 먼저 웃으며 악수를 건넸다.“문나 씨죠? 저는...”문나는 오만함이 하늘을 찌를 기세였고 그녀가 건네는 악수도 가볍게 무시했다. 강서연은 허공에 머무른 손을 멋쩍게 거두어들였다.하 매니저가 한 걸음 나서서 말했다.“문나 씨, 이분은 어진 엔터테인먼트의 수석 비서 강서연 씨입니다. 연예인 관리를 담당하고 있으니, 앞으로 문제 있으면 서연 씨와 얘기하시면 돼요.”“아, 강서연 씨!”문나는 새로 한 크리스탈 네일을 보며 말끝을 길게 늘어뜨렸다.“서연 씨는 경험이 있어요? 전 아무나 케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문나 씨. 강 비서님이 이 바닥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업무 능력이 아주 뛰어나요.”“업무 능력이 뛰어난가요, 아니면 남자를 달래는 능력이 뛰어난가요?”하 매니저는 일그러진 얼굴로 강서연을 쳐다보았다. 강서연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조금 전 문나는 임나연의 추천으로 들어온 사람이라고 하 매니저에게서 들었다.‘의도가 불순한 걸 보니 날 노리고 온 거 맞네.’하지만 근래 문나의 인기가 높은 건 사실이었다. 대표작이 없어도 팬덤만으로도 평생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이 넉넉하게 살 수 있었다.이게 바로 어진 엔터테인먼트가 그녀와 계약한 이유겠지.숨을 깊게 들이마신 강서연이 뭔가 얘기하려던 그때 휴대 전화가 진동했다. 먼 유럽에서 걸려 온 김자옥의 전화였다.강서연은 그 핑계로 자리를 피하여 김자옥의 사무실로 들어와 문을 걸어 잠갔다. 방음 효과가 좋아 밖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대표님.”그녀는 전화를 받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강서연이 물잔에 물을 따르고 한 모금 마시려다가 하마터면 뿜을 뻔했다. 전화를 끊은 강서연은 사무실에서 나왔다.문나는 밖에서 조급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그녀를 째려보았다.“대체 뭐 하는 거예요? 이러면서 프로라고 할 수 있어요?”문나가 목청 높이 소리쳤다.“어진 엔터테인먼트는 그래도 업계에서 실력 있는 큰 회사인데 이런 매니저가 있다는 게 말이 돼요? 오자마자 연예인을 혼자 내팽개치기나 하고. 정말 예의라곤 없네요!”더는 참을 수 없었던 하 매니저가 입을 열었다.“그러는 문나 씨는 예의가 있고요?”문나는 하 매니저를 째려보았다.“강 비서님은 김 대표님의 수석 개인 비서예요. 모든 연예인들의 활동과 그 외 많은 일을 담당하고 있어요. 나석진 씨마저도 강 비서님의 말을 따라야 하는데, 문나 씨 설마 자기 지위가 나석진 씨보다도 높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하 매니저의 말은 그녀의 정곡을 찔렀다. 문나는 하는 수 없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섰지만 얼굴에는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다.강서연은 웃으며 책상 위의 서류를 집었다. 서류에 몇몇 연예인들의 스케줄이 적혀있었다.“이건 문나 씨 스케줄이에요.”강서연은 서류를 문나에게 건넸다.“이 프로그램에 출연하려면 주의 사항이 몇 가지 있어요. 나중에 문나 씨 매니저한테 미리 얘기해 둘게요.”“이건 무슨 프로그램이에요?”문나는 서류를 대충 훑어보고는 다시 옆으로 휙 던졌다.“저 안 나가요!”“이건 회사의 지시예요.”강서연은 그녀를 싸늘하게 쳐다보았다.“회사 지시? 강 비서님, 전 유명한 감독님과 대형 프로젝트를 보고 어진 엔터테인먼트랑 계약한 거예요. 지금 저한테 영화나 드라마를 주는 게 아니라 예능프로에 출연하라고요?”“문나 씨는 팬덤이 큰 연예인이라서 얼굴을 자주 비춰야 해요. 그리고 지금 문나 씨한테 어울리는 작품이 없어요.”“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죠?”문나는 그녀를 아니꼽게 노려보았다.“문나 씨.”강서연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문나 씨가 벌어들인 돈은 전부 회사에 들어가는데 제가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