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수정은 거절하고 싶었지만, 임나연은 냅다 그녀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어찌나 세게 잡아당겼는지 두피가 다 벗겨질 지경이었다. 임수정은 이를 꽉 깨물고 임나연을 보며 힘겹게 말했다.“언니, 이러지 말아요...”“왜? 싫어?”임나연의 표정이 흉악스럽게 변했고 머리채를 더 세게 잡아당겼다.“너만 없었으면 엄마 아빠는 모든 사랑을 나한테만 줬을 거야. 난 너보다 건강하고 예쁜 데다가 능력까지 있는데... 왜 난 너의 대체품이어야 하는 건데! 임수정, 이게 다 너 때문이야!”임나연은 그녀를 잡고 미친 듯이 흔들었다.“넌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해! 임씨 가문의 딸은 나야, 나라고! 천한 년, 왜 아직도 안 죽어!”“이러지 말아요!”임수정은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휠체어 신세를 져야 하는 그녀는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그동안 쭉 참아왔던 임나연은 임수정에게 화풀이했다. 임수정은 임나연이 한 짓을 사람들에게 까발리고 싶었지만, 임나연은 입을 함부로 놀렸다간 다시는 부모님을 만날 수 없을 거라고 협박했다.“수정아, 지금 엄마 아빠를 기쁘게 해드리는 건 나라서 나한테 아무런 경계심이 없어. 그러니까 엄마 아빠를 죽이는 건 개미 새끼 두 마리를 밟아 죽이는 것보다도 더 쉬워!”임수정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밖에 나갈 수 없어 세상과 단절된 지 오래였다. 하여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임수정은 곧이곧대로 믿을 거라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임수정은 이를 꽉 깨물고 묵묵히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부모님을 잃을까 두려웠고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가족을 잃을까 두려웠다.임나연은 매번 그녀를 괴롭힌 후 예쁘게 단장까지 해주었다. 그러면서 절대 도우미들에게 샤워를 도와달라고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그녀는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만 학대를 가했다. 누군가 상처를 발견했다 하더라도 아무 이유나 대서 넘어갈 수 있었다.그리고 부모님이 그녀를 보려 할 때면 몸이 좋지 않다거나 다른 핑계를 대서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하여 그녀가 지금까지 무슨 일을
‘둘만의 시간이라...’강서연의 두 볼이 발그스름해졌다. 이 얘기를 전에 최연준에게 한 적이 있었다.최연준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훤히 드러난 어깨를 감싸 안았다...이른 아침, 최연준이 먼저 눈을 떴다. 강서연이 아직 자고 있어 살금살금 일어나 주방으로 가서 박경실이 미리 준비한 국을 데웠다.박경실은 요 며칠 매일 몸에 좋은 국을 끓여주었고 강서연은 하루에도 여러 번 마셨다. 하지만 아무리 몸보신해도 저녁에는 여전히 쉽게 지쳤다.최연준은 가볍게 웃으며 주방으로 향했다. 갑자기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는데 마당을 향해 있는 주방 창가에 뚱뚱한 고양이 한 마리가 햇볕을 쬐며 여유롭게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이 뚱냥이는 에덴에 자주 나타나는 단골이었다.처음 봤을 때는 삐쩍 마르고 가여운 길고양이였었다. 게다가 젖도 떼지 못한 어린 고양이라 살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그 후 강서연은 마당에 집까지 지어주며 정성껏 보살폈다. 그녀의 정성에 보답이라도 하듯 고양이는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랐고 밥도 잘 먹었다.가끔 강서연이 외출할 때 꼬리를 흔들며 뛰어와서는 그녀의 발밑에서 비비적거리며 애교를 부리기도 했다.최연준은 예전부터 동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강서연이 좋아하기 때문에 고양이가 집 근처에서 마음대로 다니도록 내버려 두었다.“야, 너 또 왔어?”그는 커튼을 열며 뚱냥이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를 본 뚱냥이는 기지개도 멈추고 도도한 표정을 짓더니 옆으로 휙 숨어버렸다.최연준은 어이가 없어 눈을 희번덕거렸다.‘싫으면 됐어!’최연준이 국을 들고 나가려던 그때 뚱냥이는 창가에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그를 떠보는 듯했다. 들어오고 싶었지만, 최연준인 걸 보고는 또다시 망설였다...최연준은 고양이가 배가 고파서 이런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주방에 딱히 먹을 것이 없어 국 한 그릇을 떠다가 창가 위에 올려놓았다.만약 평소였더라면 절대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늘 기분이 날아갈 듯이 좋기에 망정이지...최연준이 웃으
강서연은 별다른 수가 없어 작은 손으로 그의 목을 감싸 안고 입술에 진한 키스를 남겼다.비록 너무 만족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웃으며 그녀를 놓아주었다.“아침 할 필요 없어요.”강서연이 다정하게 말했다.“지금쯤이면 경실 아주머니가 장 다 보고 올 시간이에요. 보니까 아주 능숙하게 아침상을 뚝딱 차리더라고요. 아참, 아주머니가 아침밥 먹기 전에 이 국을 마시라고 했어요.”그러고는 손을 내밀어 국을 마시려 했다. 그런데 최연준은 뭔가가 뇌리에 스쳤는지 국을 옆으로 내려놓았다.강서연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왜... 왜 그래요?”“아, 아니야.”최연준은 그제야 생각에서 깨어났다.“국이 식었어. 마시지 마.”“아주머니가 데워놓지 않았어요?”“서연아.”최연준이 멈칫하다가 말을 이었다.“당분간은 이런 국 마시지 마. 그리고 경실 아주머니 연세도 많으신데 집안일에 밥까지 하기에는 너무 힘들 거야.”강서연이 두 눈을 깜빡였다. 그의 진지한 모습에 그녀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앞으로 집에서 식사할 땐 호텔에 연락해서 가져오라고 할게.”화들짝 놀란 강서연은 그에게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그냥 가만히 있었다.최연준은 그녀에게 옷을 갈아입으라고 한 후 그녀와 함께 명황세가로 가서 조식을 먹었다.그는 자신의 의심병이 심각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고양이가 국을 마시지 않았다고 해서 뭘 설명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지금까지 박경실은 강서연을 살뜰히 챙겼고 그 모습을 최연준도 쭉 봐왔었다. 사실 그도 나쁜 쪽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세심한 것 하나라도 놓쳐서는 안 되었다!“연준 씨, 왜 그래요?”최연준이 고개를 들어보니 강서연이 의아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안색이 안 좋은데 어디 아파요?”최연준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오늘 아침부터 뭔가 이상했어요.”강서연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히죽 웃으며 그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이따가 내가 출근해야 해서 기분이 안 좋아졌어요?”최연준
강서연은 혀를 날름 내밀고는 눈웃음을 지었다.그녀는 그를 뒤로한 채 홀로 길거리에 나섰다. 어진 엔터테인먼트와 가까워 골목 하나만 지나면 되었다.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회사에 출근했다.최연준이 건물 밑에 잠깐 서 있던 그때 방한서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도련님, 김 대표님의 일 처리 스타일을 아직도 모르세요? 부하직원이 사적인 감정 때문에 일에 영향 주는 걸 가장 싫어하세요. 회사에 대표님과 서연 씨의 관계를 공개한다면 성가신 일이 아주 많이 생길 겁니다!”최연준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무슨 성가신 일?”“예를 들어... 김 대표님이 관리하는 연예인들도 따라서 연애를 한다든가... 그러면 어찌 일에 몰두할 수 있겠어요, 안 그래요?”최연준의 표정이 확 어두워졌다.“그러니까 내 와이프랑 모르는 사이인 척하란 말이야?”방한서가 웃으며 말했다.“아무튼... 이건 김 대표님의 지시예요.”최연준은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하지 말라는 건 꼭 하고 싶었다!그런데 그가 어진 엔터테인먼트의 대문에 발을 들인 순간 프런트 직원이 그를 막아섰다.새 회사라 김자옥은 원래 있던 직원을 싹 다 갈아치웠다. 하여 지금 이 회사의 직원 중에 하 매니저 말고는 그가 누군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누굴 찾으러 오셨나요? 예약하셨나요?”“강 비서님이요? 강 비서님 바빠서 그쪽을 만날 시간이 없어요. 일 방해하지 말고 당장 나가주시겠어요? 안 그러면 경비원 부를 겁니다!”“자기 분수를 알아야지. 우리 강 비서님은 얼굴이 예쁘고 마음도 착할 뿐만 아니라 업무 능력도 뛰어나서 비서님을 따라다니는 남자가 아주 줄을 섰어요. 저런... 똥차를 타고 다니는 남자는 비서님을 만날 자격도 없어요.”‘똥차? 저 차가 바로 당신들이 말하는 강 비서가 사준 거야! 그것도 나한테만!”...강서연은 퇴근 후 에덴으로 돌아갔다.오늘 프런트 직원에게 누군가 그녀를 찾아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직원의 얘기를 듣고 그 사람이 바로 최연준일 거라고 예상했다.하지
강서연은 불안감이 밀려와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고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그런데 그때 누군가 전화를 걸어왔다. 순간 움찔한 그녀는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휴대 전화 너머로 낮고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 서연 씨? 저 신석훈입니다.”“아, 네.”그녀는 정신을 가다듬었다.“신 의사님이군요. 무슨 일로 전화했어요?”신석훈은 잠깐 멈칫하다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혹시 지금 연구소로 올 수 있어요? 제가 일하는 곳 말이에요. 오늘 진료가 있어서 심리상담과에 있어요.”강서연은 최연희와 관련된 일이라는 예감이 바로 들었다. 하여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연구소로 달려갔다.그녀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던 신석훈은 인사말을 몇 마디 주고받은 후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요 며칠 연희랑 꾸준하게 심리 상담을 했거든요.”신석훈은 상담 결과를 그녀에게 건넸다. 결과를 확인한 강서연은 저도 모르게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우울증’이라는 세 글자가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녀의 가슴팍에 꽂혔다.“이게 대체...”그녀가 놀란 얼굴로 쳐다보자, 신석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여러 검사를 한 후에 종합적으로 내린 진단이에요.”“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아직은 가벼운 우울증이에요. 치료만 잘한다면 완치는 문제없을 겁니다.”신석훈이 안타까워했다.“상담하면서 보니까 연희가 자신감이 없는 게 외부 스트레스 때문이더라고요. 아무래도 누군가가 계속 연희한테 안 좋은 소리를 하는 바람에 이 지경이 된 것 같아요.”강서연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인지석이 틀림없어! 그런데 대체 왜 연희 양한테 이러는 거지?’“아직은 마음을 완전히 열지 않았어요.”신석훈이 말을 이었다.“지금 매일 나랑 얘기하게끔 노력하고 있거든요. 완전히 입을 다문 것만 아니면 분명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오늘은 이 얘기 하려고 서연 씨를 부른 거예요. 서연 씨랑 연준 씨는 걱정하지 말아요. 연희가 저랑 있으면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네.”강서연은 고
강서연의 표정이 흔들리더니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지난번에, 집에서 불쾌한 일이 있고 난 뒤로 그녀도 인지석의 소식을 오랫동안 듣지 못했다.“오성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강서연이 솔직하게 대답했다.“하지만 그 사람은 최상 빌라의 집사라서 매일 할 일이 산더미일 텐데 함부로 자리를 비울 리가 있을까요?”“아...”신석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연희가 요 며칠 그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해서 오성을 떠난 줄 알았어요.”“석훈 씨!”강서연이 다급하게 말했다.“그 사람이 나타난다고 해도 절대 연희 양과 만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저랑 연준 씨 모두 연희 양이 그 사람과 연락을 끊길 바라고 있어요. 그 사람은 너무 위험해요!”신석훈은 잠깐 고뇌에 빠졌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조수가 헐레벌떡 뛰어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말했다.“연희 양이 깼어요. 그런데 정신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요...”신석훈은 재빨리 상담실로 달려갔다.강서연도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 올라가는 신석훈의 뒤를 따랐다. 그가 들어가자, 최연희는 바로 안정을 되찾았고 한시름을 놓은 듯했다.신석훈은 그녀에게 간단한 검사를 진행하고 별문제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웃으며 얘기를 나누었다.그의 웃음은 마치 겨울의 햇볕처럼 따스했고 먹구름도 완전히 없앨 수 있을 것만 같았다.밖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강서연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먹먹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신석훈이 문을 살며시 닫고 나왔다. 강서연이 아직 있는 걸 보고는 웃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괜찮아졌어요.”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까 상담받다가 요 며칠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소파에서 잠들었더라고요. 깨어나 보니까 주변 환경이 낯설어서 당황한 나머지 소리를 질렀던 것 같아요.”강서연의 얼굴에 근심이 어렸다.“연희 양의 정신 상태가 이렇게나 많이 안 좋아요?”“많이 안 좋은 건 아니에요.”신석훈이 어깨를 들썩였다.“학교에서 공부할 때는 참 좋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나한테 나중에 의대에
“환자는 식중독인데 다행히도 증상이 아주 약합니다. 이미 약을 먹였으니 이번 주에 푹 쉬면 금방 나을 겁니다.”강서연은 소스라치게 놀랐다.“식중독이라고요?”“다 내 잘못이야.”최연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서연아... 아침에 그 국물을 마시지 말라고 한 것도 아주머니가 국에 약을 탔다고 의심해서야.”강서연은 등골이 오싹해졌다.그러나 그녀는 최연준이 이유 없이 남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더욱이 그에게 충실한 집사에게 누명을 씌우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원래 그 국물을 당신한테 가져다주려고 했는데 그때 뚱냥이가 창턱에 뛰어올라 먹을 것을 찾고 있는 거야. 그래서 국물 한 그릇 떠서 줬는데 이상하게도 고양이가 냄새를 맡고 피하는 거야. 그때부터 국물에 뭔가 섞여 있을 수도 있다고 의심이 들었어.”강서연은 그제야 최연준이 왜 그때 마음이 심란했는지, 왜 이상한 말을 했는지, 앞으로 박경실이 만든 음식을 먹지 말라고 했는지 알게 됐다...최연준은 계속해서 말했다.“오후에 집에 돌아와 보니 아주머니가 집에서 바쁘게 일하고 있는 거야. 내가 그때 이미 아주머니를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머니가 실수하는 것을 기다렸어. 그래서 국물을 왜 안 먹었냐고 물었을 때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거짓말을 했어. 그런데 아주머니가 그릇을 집어 들고 먹어 보는 거야.”강서연은 듣는 내내 간담이 서늘해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만약 정말 아주머니가 넣은 약이라면, 그녀는 독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먹었을 리가 없다. 그러고 보니 아주머니도 몰랐던 것이다! 누가 자유롭게 집을 드나들면서 이런 더러운 것들을 주방에 가져올 수 있지?강서연은 이를 생각하자 소름이 끼치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어... 어떤 독이에요?”최연준은 그녀를 가볍게 껴안았고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만성 독약입니다. 약에는 중독성이 강한 성분이 있어 장기간 복용할 경우 중추신경계와 심혈관계를 손상할 수 있습니다.” 의사가 설명해 줬다.“환자분은 예전에 혈
“뭐라고?”최연준은 실눈을 뜨고 잠시 생각하다가 냉소했다.“아마도 죄가 들통날까 봐 도망간 거겠지.”강서연은 그를 바라보았다.공교롭게도, 조금 전에 그녀도 인지석이라고 의심했다.인지석과 최연희을 제외하고는 에덴에는 다른 손님을 접대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방 비서.”최연준은 싸늘한 눈빛으로 물어봤다.“인지석의 행방을 알아냈어?”방한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지석의 비행기표는 강주로 가는 것입니다.”보아하니 강주 쪽에 뭔가 그를 끌어당기는 것이 있는 것 같았다.“우선 집안의 인씨 성을 가진 집사들을 모두 감시해 봐. 그리고 즉시 사람을 보내 인지석의 강주 행방을 추적해 내!”최연준의 목소리는 뚜렷하고 차가웠다.“알겠습니다!”“인지석이 그렇게 쉽게 빌라에서 휴가를 얻어 도망칠 수 있다는 것은 배후에 그를 지지하고 있는 세력이 분명히 있다는 뜻이야!”최연준의 눈빛은 싸늘했지만, 머릿속에는 이미 초보적인 계획이 있었다.인지석은 그저 미끼일 뿐, 최연준은 그를 이용해서 배후에 있는 사람을 낚아내려 한다!그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최연준은 이미 짐작 가는 사람이 있었다.최연준은 말없이 옆에 있던 강서연을 돌아봤다.그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품에 안고는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이런 생활이 너무 무섭지?”강서연은 말하지 않고 무뚝뚝하게 그의 품에 안겨 있었고, 한 쌍의 까만 눈동자에는 복잡함이 스치고 지나갔다.“당신이 내 세상에 들어오려고 노력한다고 말했잖아. 내 세상이 이 모양이야. 언제든지 남에게 당할 수 있어.”최연준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나는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단것을 먹지 않았어. 왜 그런지 알아? 내가 아홉 살 때 생일 케이크에 수은이 들어 있었는데... 그 생일이 내게 트라우마로 남겨져 있어. 그래서 그 이후로 단것을 먹지 않게 됐어.”강서연은 그를 보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부귀영화와 권문세가, 이것들은 모두 남한테 보여 주는 것이다.그 속에는 이미 상처투성이와 거친 파도고 자기 자신 외에는 누구
가끔 차가 지나갔지만, 정승우가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어도 아무도 멈춰 서지 않았다.어둠이 내려앉았고 기온은 점점 내려가고 있었다.며칠 동안 육체와 마음이 지친 권온유는 이제 무너질 듯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정승우는 어쩔 수 없이 온유를 등에 업고 비틀거리며 길을 걸었다.“오빠...”권온유는 울먹이며 말했다.“해가 졌어요. 저... 무서워요.”“괜찮아.”정승우는 뒤돌아 미소를 지었다.“오빠가 집에 데려다줄게.”“오빠, 우리 그냥 돌아가요...”“뭐라고?”권온유의 시선이 정승우의 피로 물든 발에 닿았다.“발이 많이 아프죠?”권온유의 작은 얼굴 위로 눈물이 두 줄기 흘러내렸다.“오빠, 저 내려주세요. 그냥 돌아가요...”“온유야?”권온유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그 집이 낡고 춥긴 해도... 오빠 발에서 피가 나진 않잖아요!”정승우는 멍하니 잠시 굳어 있다가 그 어눌한 말 속에 담긴 다정함을 깨달았다.이 작은 아이는 납치당했던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라도 정승우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정승우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작은 새들이 집으로 향해 줄지어 날고 있었다.정승우는 온유를 데리고 반드시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다짐했다.“바보야.”정승우는 온유를 내려놓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난 하나도 안 아파. 그리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어.”“그 사람이... 우리를 때릴까요?”“그럴 거야.”정승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어린 시절, 정대명에게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탈출할 때 그의 뒤통수를 내려친 한 방은 그동안의 빚을 모두 갚은 셈이었다.“그런데 오빠, 그 사람은 오빠 아빠잖아요?”권온유는 작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하지만 오빠가 아프다고 제가 말했을 때 오빠 아빠가 들어왔었잖아요.”정승우는 쓴웃음을 지었다.자신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정대명이 들어온 것은 아마 걱정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죽으면 함께 나쁜 짓을 할 사람이 없어질까 봐서였었다.정대명은 단지
차 안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영미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정대명에게 다가갔다. 그의 머리 아래로 어두운 핏자국이 퍼져 있었고 그 흔적은 이미 굳어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의 코 밑에 손을 가져다 댔다.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영미는 떨리는 마음을 억누른 채 차가운 눈빛으로 정대명을 내려다보다가 거칠게 발길을 휘둘렀다.“일어나요!”강소아와 최군형도 다가와 공장 안을 살폈지만 안은 고요히 비어 있었다.“아이들은요?”“아이고...”정대명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살려줘, 살려줘... 저 괘씸한 녀석이!”“정대명 씨!”영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했다.어쨌든 이번 일은 영미가 자신 있게 권온유의 행방을 안다고 장담한 일이었다.영미는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함께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확신에 차 말했다.그런데 지금... 정대명은 다쳐 쓰러져 있고 두 아이는 사라졌었다.백인서를 함정에 빠뜨리려던 영미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것이다.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정대명은 도움을 청하려다 영미가 눈짓을 주는 것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영미의 눈길을 따라 보니 최군형과 강소아도 함께 와있었다.정대명은 예전에 영미가 했던 경고가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아는 척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정대명은 머리를 살짝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신이 정대명인가요?”최군형이 다가가 물었다.정대명은 말끝을 흐리며 최군형의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백인서의 양아버지시고?”최군형은 다시 물었다.“당신이 당신 아들과 함께 권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게 맞나요?”“아니야, 나 아니야!”정대명은 크게 당황하며 손을 흔들었다.“이봐, 동생, 난 억울해! 내 아들 녀석이 나를 해치려고 했어! 내 머리를 봐, 그 자식이 벽돌로 내리쳤다니까!”“그만해요!”영미는 정대명의 말이 길어질수록 상황이 불리해질 것을 우려해 정대명을 노려보며 더 이상 말을 못 하게 했다.강소아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들의 서툰 수법이 한심하기만
경찰서 밖에서 최지용은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한참을 걷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젊은 경찰관이 안에서 뛰어나오고 있었다. 최지용은 급히 다가가며 말했다.“정호야!”정호라는 젊은 경찰관은 최지용을 보자 반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 녀석!”최지용은 정호에게 다가가 가볍게 주먹을 툭 날리며 말했다.“도대체 무슨 일이야? 왜 사전에 알려주지 않은 거야?”정호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방금 최씨 집안에서 백인서를 데려간 사람 중에 정호도 있었다. 최지용도 놀라웠지만, 영미 역시 경찰이 직접 찾아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떠나기 전, 정호가 살짝 눈짓을 보냈고 최지용은 그의 의도를 알아채 경찰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지용이 형.”정호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형수님께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잘 구분하고 계시니 문제없을 겁니다!”“도대체 누구 지시로 백인서를 여기로 데려온 거지?”“소아 아가씨예요!”정호는 어깨를 으쓱했다.“소아 아가씨가 갑자기 지시한 거라 사전에 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최지용은 살짝 놀랐다. 강소아의 지시라니.“형수님께서도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으니까요. 그 아이가 실종되기 전에 형수님께서 만난 적이 있거든요. 경찰이 형수님을 데려가서 조사하는 건 당연한 절차입니다.”최지용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피식 웃음을 지었다.강소아가 이런 ‘당연한 절차’를 이용해 백인서를 경찰서로 보낸 이유는 경찰서야말로 가장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또 누군가가 음모를 꾸며 백인서에게 덮어씌우려 한다 해도 경찰서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경찰서 안에는 일을 봐주는 사람들도 있으니 백인서가 여기서 며칠 지내는 동안 힘든 일 없이 외부의 소란도 피할 수 있는 셈이었다.최지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강소아는 정말 자매를 위한 배려가 남달랐다. 이렇게까지 배려심 깊은 방안을 생각해 내다니!“지용이 형.”정호가 계속해서 말했다.“도련님께서
영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소아 언니, 저를 믿지 않으세요?”“난 오직 사실만을 믿어.”“권씨 가문의 딸이 실종된 사건에 백인서 씨의 양아버지와 남동생이 관련되었어요, 그게 바로 사실이에요!”강소아는 순간 멍하니 있다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려 했다.세상에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다 있나 싶었다.호텔 뒷뜰에 있는 그 CCTV가 정말 완전히 고장 났다고 생각하는 걸까? 육씨 가문과 최씨 가문이 힘을 합쳐 그 고장 난 CCTV 하나도 못 고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최군형은 강소아의 어깨를 가볍게 눌러 안심시키며 슬며시 휴대전화를 건넸다.강소아는 화면을 확인했다. 최군형의 부하가 보낸 메시지였다.“도련님, CCTV 데이터를 복구 중입니다. 곧 진실이 밝혀질 겁니다!”강소아는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영미가 이렇게까지 백인서를 몰아세우는 걸 보니 마음 한구석에 무언가 꺼림칙한 게 남아 있는 것 같았다.어차피 꼬리가 저절로 드러날 것이었기에 그저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다.바로 그때, 집사가 다소 당황한 얼굴로 방에 들어섰다. 집사의 뒤에는 몇 명의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신분을 밝힌 후 방 안을 둘러보며 엄숙한 목소리로 물었다.“여기 백인서 씨가 계십니까?”표아정은 등을 꼿꼿이 펴고 대답했다.“경찰관님께서 여긴 무슨 일로 오셨나요?”“당신이 백인서 씨인가요?”“저는...”“백인서 씨가 납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신고를 접수했습니다!”“뭐라고요?”백인서는 얼굴이 창백해졌다.“백인서 씨, 조사에 협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희와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권온유가 납치된 지 하루가 지났다.그동안 정대명은 단 한 번 음식을 가져왔는데, 그것도 차갑게 식은 죽 한 그릇과 딱딱한 빵 한 조각뿐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귀하게 자란 권온유에게 이런 음식은 처음이었다. 울고 싶었지만, 감히 울지 못하고 그저 눈물을 참으며 빵을 조금씩 뜯어 먹고 있었다.정승우는 그런 온유의 모습을 보고
“아줌마,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그럼, 제가 알아낸 사실을 전부 말씀드릴게요!”영미는 입가에 교만한 미소를 띠며 백인서를 차갑게 한 번 쳐다보았다.“백인서 씨의 친어머니인 백홍은 인신매매범이었다는 사실, 모두 아셨나요? 백인서 씨의 어머니는 백인서를 정대명의 집에 맡겼고... 흥! 정대명의 아내도 백홍이 납치해 왔다는 소문이 있어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잖아요. 제 생각엔... 인신매매범의 딸이라면 그런 일쯤은 익숙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은 권온유의 실종이 정말로 백인서 씨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시나요?”“영미!”강소아가 나서며 분노를 가득 담아 소리쳤다.“허위 사실을 퍼뜨리지 마!”“소유 아가씨, 억울하네요!”영미는 강소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제가 이렇게까지 조사한 건 다 아가씨를 위한 거예요! 딸도 있는 사람이 백인서를 곁에 두고도 마음이 놓이세요?”“그만해!”최지용이 크게 소리쳤다.백인서는 몸을 떨며 믿기지 않는 눈으로 최지용을 쳐다보았다.그러나 최지용의 얼굴에는 의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최지용은 굳건한 눈빛으로 뒤에 있는 백인서를 지키고 있었다.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처럼 백인서를 아끼고 있었다.백인서는 코끝이 찡해지며 본능적으로 최지용의 손을 꼭 붙잡았다. 최지용의 따스한 손은 백인서에게 큰 용기를 주었고 그 온기가 어둠의 두려움을 잊게 해주었다.최지용은 백인서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고 다시 영미를 바라볼 때는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영미야.”최지용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두 집안의 관계를 생각해서 그저 넘어가는 거야. 더 이상 선을 넘지 마.”최군형도 나서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요, 백인서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모르겠어요? 영미 아가씨, 우리 최씨 가문 사람들을 바보로 생각하는 건 아니죠?”영미는 순간 긴장했다. 최군형의 말 속엔 어딘가 숨은 뜻이 있는 듯했다.최군형의 깊고 복잡한 눈빛을 파악하기 어려웠다.표아정은 천천히 일어나 어깨에 걸친 숄을
백인서는 복잡한 눈빛으로 최지용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그때 최지용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표아정이었고 다급한 목소리로 서둘러 돌아오라고 재촉했다.최지용은 결국 어머니의 말에 따라 백인서를 데리고 최씨 집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넓은 거실에는 최군형과 강소아도 나와 있었고 모두 엄숙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백인서가 들어서자, 표아정이 백인서를 올려다보며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다.강소아는 백인서와 눈을 마주치며 단호하게 미소 지었다.백인서가 의아해하던 찰나, 영미가 천천히 밖에서 걸어 들어왔다.“아줌마, 지용 오빠. 제가 권온유의 행방을 알아냈어요.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뭐라고?”최지용이 놀라서 물었다.“네가 어떻게 아는데?”영미는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지용 오빠, 특수부대 출신이라고 정보가 우리보다 더 빠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최씨 가문은 만능이 아니에요, 최씨 가문도 모르는 정보가 있다고요.”표아정은 가볍게 기침하며 차분히 상황을 지켜보았다.최군형과 강소아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떤 일이 일어날지 주목하고 있었다.최지용의 이마에는 점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미의 눈에는 한 줄기 교만한 빛이 번졌다.영미는 오는 길에 이미 모든 계획을 짰다. 정대명의 말이 맞았다. 누구를 훔치든 상관없었다. 인신매매범의 딸인 백인서가 아이들을 해치러 다닌다는 누명을 씌우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하면 백인서는 모두의 신뢰를 잃게 될 터였다.영미는 이제 한 아이의 엄마가 된 강소아가 인신매매범을 곁에 둘 리 없다고 믿었고, 최지용 역시 이 사실을 알면 더는 백인서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래서 영미는 정대명을 배신하기로 마음먹었다.영미는 권온유를 넘기고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한패가 되어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주장할 계획이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백인서는 변명의 여지도 없이 궁지에 몰릴 것이었다!“지용 오빠.”영미는 고개를 돌려 최지용을 바라보며 한 글자씩 천천히 말했다.“권온유는 정승
“그... 괜찮아!”정승우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권온유에게 말했다. 정승우는 이곳에서 권온유를 반드시 데리고 나가겠다고 결심했다.그런데 이때, 공장 문이 “쾅” 하고 열리더니 곧바로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정승우는 재빨리 권온유에게 눈짓했고 권온유도 알아채고는 즉시 땅바닥에 쓰러져 의식이 없는 척했다.정승우는 벽에 기대어 눈을 반쯤 감았다.“이 아이인가요?”영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맞아.”정대명은 영미를 흘깃 노려보며 묵묵히 대답했다.영미는 두 걸음 앞으로 다가서서 희미한 빛 속에 있는 아이를 살펴보더니, 곧 얼굴빛이 확 변했다.“이 아이... 혹시 권씨 집안의 막내딸 아니에요?”정대명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애초에 아이를 훔쳐 올 때 이 아이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 리가 없었다.“정대명 씨.”영미가 차갑게 웃으며 돌아보았다.“제가 최씨 가문 집안 아이를 훔쳐 오라고 했지, 권씨 집안 아이를 훔치라고 했나요? 이러고도 저를 속이지 않았다고요?”“그게...”정대명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영미 아가씨, 어차피 목적은 백인서를 곤경에 빠뜨리는 거잖아? 그러니 누구를 훔쳐 오든 상관없지 않아? 아이를 훔치기만 하면 유괴범이 되는 거니까.”이 말은 영미에게만 충격을 준 게 아니었다. 정승우의 귀에도 또렷이 들어왔다.“좋아요.”영미는 깊은숨을 들이마신 뒤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이 아이는 잘 지키고 있어요, 제가 다시 연락할 테니까.”...한편, 권씨 집안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권욱은 조순영을 탓하며 아이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했고, 조순영은 오열하며 남편을 원망했다. 조순영은 권욱이 바깥에서 여자와 부적절하게 얽히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라고 했다.“헛소리하지 마! 사람들이 나한테 어떤 소문을 퍼뜨렸는지 잘 알잖아. 결혼 생활 내내 너한테 부끄러운 일 한 적 없어.”“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정말 떳떳하게 행동했다면 왜 사람들이 당신만 가만두지 않는 건데?”며칠 전까지만
권온유의 질문에 정승우는 당황했다.권온유는 커다란 눈망울로 정승우를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했던 슈퍼맨 같은 오빠가, 이제는 먹을 것 하나 구하지 못하는 모습이 되어버린 것이다.정승우는 어색하게 입가를 씰룩이며 권온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이야기를 이어갔다.“너, 정말 배고파?”“네!”권온유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 작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원래는 엄마랑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 했어요. 엄마가 특별히 고등어조림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하셨거든요... 엉엉... 엉엉...”“울지 마, 울지 마! 그냥 생선 하나 가지고...”“나 배고파!”정승우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아이와 대화하는 건 그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겨우 권온유를 달래고 나서 정승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팔을 걷어붙이며 권온유에게 내밀었다.“너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 배고프면, 여기 한번 물어볼래?”권온유는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정승우를 바라보았다.“우리 집은 가난해서 늘 먹을 게 부족했거든. 그래서 어릴 때 너무 배가 고프면 이렇게 배고픔을 달랠 만한 걸 물곤 했어.”권온유는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배고픔을 달랠 만한 것'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정승우는 웃으며 계속 설명했다.“예를 들어 쌀통 같은 거야. 한때 쌀이 들어 있던 쌀통은 비어 있어도 쌀 냄새가 남아 있거든. 그래서 쌀통 가장자리를 살짝 물면서 하얀 쌀밥을 먹는 상상하는 거야. 그러면 배가 덜 고파져.”“그리고 이웃집에서 밥하는 냄새를 맡으며 그 밥을 먹는 상상을 하는 거야. 그러면 그렇게 배고프지 않더라고.”권온유는 정승우의 이야기에 넋을 잃고 입을 벌린 채 있었다. 정승우는 웃음을 터뜨렸다.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한때 정대명이 도박과 술에 빠져 정승우를 굶겼던 시절은 그야말로 비참한 순간들이었다.잠시 후, 권온유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고 정승우는 속으로 ‘큰일이다'라고 생
영미는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최지용을 지켜보았다.최지용은 다소 초조한 기색으로 구석에 앉아 휴대전화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 전화를 걸기도 했다.영미는 바로 뒤를 따라갔고 최지용의 낮고 다급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찾았습니까?”“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세요... 만약 납치범의 목적이 돈이었다면 분명 전화를 걸어올 겁니다!”영미의 가슴이 철렁하며 내려앉았다.납치범이라니? 대체 뭘 찾는다는 거지?백인서와 통화한 걸까?그때, 최군성이 큰 소리로 외쳤다.“지용이 형, 여기서 뭐 해요?”영미는 얼른 몸을 숨겼고 최군성은 최지용에게 다가가 최지용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우리 형이 찾고 있었는데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거예요? 어서 와서 먹고 즐기자고요!”최지용은 최군성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영미와 눈이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잠시 멈칫했다.영미는 급히 시선을 피하며 억지 미소로 인사했다.“지용 오빠...”“어, 영미?”최군성도 배윤아처럼 물었다.“여기 웬일이야? 형님이 널 초대한 것 같지 않은데?”“그게...”영미는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최군성은 영미의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최지용을 끌고 가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최지용은 점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영미가 도대체 여기 왜 있는 거지? 평소에는 볼 수 없던 사람이, 왜 하필 오늘 온유가 사라진 날에 나타난 걸까?그때, 최군형과 강소아가 가원이를 품에 안고 나타났다.강소아는 아이를 보행기에 앉혔고 아이는 보행기 가장자리를 잡고 작은 발을 내디뎠다. 이 모습에 방 안의 모든 사람이 환호성을 질렀다.영미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자리를 떠 교외의 버려진 공장으로 향했다.그 시각, 정대명은 영미의 지시에 따라 승합차를 몰고 공장에 도착해 있었고 영미가 도착했을 때 그는 공장 문 앞에서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영미는 핸드백을 휘둘러 정대명에게 던졌다.“정대명 씨, 감히 날 속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