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준은 나석진의 배경에는 관심이 없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손에 들고 있던 주걱을 테이블 위에 털썩 내던지고 두 손으로 가슴을 감싸 안은 채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까만 눈동자에는 알 수 없는 분위기가 감돌았다.육경섭은 계속해서 말했다.“듣기로는 성남 사람인데 그쪽 가문과 남양의 군사 세력이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해요. 그 사람의 성과는 개인의 노력과 떼어놓을 수 없지만 그 뒤의 세력이 없었다면 이렇게 빨리 성공할 수 없었을 거예요!”최연준은 그를 힐끗 보고 침묵하다가 한마디 했다.“이게 무슨 배경이라고...”육경섭은 멀리서도 질투의 감정을 느꼈다.“단지 알려줬을 뿐이에요.”육경섭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적을 알아야 승산이 있어요! 만약 그 사람을 상대하고 싶다면 그 사람의 배경을 먼저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내가 그 사람의 배경을 알아서 뭐 하게요?”최연준은 냉소했다.“오성에서는 내가 왕이에요!”“왕이라고요? 그럼, 도련님께서 담배 한 갑을 사 올 수 있어요?”“...”“소소한 요구를 만족시켜 줄 수 있습니까?”“육경섭!”최연준은 얼굴빛이 굳어졌고 이를 갈며 큰소리쳤다.육경섭은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그에게 손사래를 치고 계속해서 감자채 썰기에 바빴다.‘담배 한 갑도 아까워한 게 누군데? 담배 살 돈도 없다고 비웃은 게 누군데? 다 이유가 있는 법이야!’“육경섭 씨, 칼에 손 조심하세요!”...보름 후.검은 롤스로이스가 명황세가의 문 앞에 멈췄다.오늘 밤 이곳에는 유명 인사들이 총출동했고 전부 지위가 있는 분들이다. 강서연은 유리창 너머로 한 번 보기만 해도 이런 고급 연회의 포스와 위압감을 느낄 수 있었다.그녀는 최연준과 손깍지를 끼고 있었는데, 갑자기 좀 불안해졌다.남자는 그녀의 약간 차가운 손끝을 느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자리가 처음 참석하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은 대표님도 전에 본 적이 있잖아. 그분은 아주 친절한 사람이야.”“알아요.”강서연은 심호흡을 한번 했다.“그래
강서연은 목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강유빈이 골든 드레스를 입고 사람들 사이를 활보하는 것을 봤다.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는 임나연이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이런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최씨 가문의 큰 사모님이면 어때서? 그래봤자 졸부일 뿐이잖아! 오성에서 은씨 집안이 돼지 사료 파는 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하하하...”은미연은 이쪽의 소리를 듣고 얼굴빛이 금세 바뀌었다. 적지 않은 하객들도 이런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다른 여러 대가족에 비해 은씨 집안은 그리 깊은 가족역사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은씨 집안은 돈이 많아서 농산업 외에도 땅을 사서 건물을 짓는 것은 일도 아니다.상류사회에서는 감히 은씨 집안을 무시하는 사람이 없고, 졸부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강서연은 그쪽을 바라봤는데 강유빈의 의기양양한 표정은 마치 호구 같았다.그녀는 강유빈이 또 남에게 이용당했다고 단정했다.강서연은 그녀의 행동에 대해 창피했다. 강유빈과 혈연관계는 없지만 20년 넘게 강씨 집안과 같이 지내왔다.“은 대표님...”강서연은 미안해했다.“듣지 마세요. 이 사람은...”“이 사람이 서연 씨 언니죠?”은미연은 태연자약했다.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강유빈이 다가와 과장된 몸짓으로 강서연에게 손을 흔들었다.“어이구, 내 동생! 너도 여기 있었구나?”강서연은 어쩔 수 없이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주위에는 작은 소리로 수군거렸다.“이 두 자매가 무슨 수단을 썼는지 모르겠지만, 최씨 가문의 두 도련님을 다 꼬시다니!”“최씨 가문에 시집갈 수 있을지는 또 별개의 문제죠.”“큰 사모님께서 방금 그 강씨 아가씨를 대하는 태도가 심상치 않은 건 셋째 도련님의 체면을 봐서 그런 거고... 이제 저 여자와 이 강씨 아가씨의 관계를 알게 되었으니 아무래도 불만이 있지 않을까요?”강서연은 마음이 조급해서 은미연의 손에서 손을 빼내려 했지만, 은미연은 그녀의 손을 더 꽉 쥐었다.은미연은 그녀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고, 눈빛에는
주변이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다. 하지만 사람들도 그저 구경하려는 것일 뿐 강유빈 때문에 최씨 가문 큰 사모님의 심기를 건드릴 정도로 어리석진 않았다. 게다가 강유빈은 자기가 뿌린 씨를 자기가 거두고 있을 뿐이었다.“강유빈 씨 화가 많이 났네요?”은미연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이 술로 화 좀 가라앉혀요!”강유빈이 날카롭게 소리 지르며 얼굴을 쓱 닦자, 화장이 전부 번지고 말았다.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옆에 있던 케이크를 집었다. 그런데 던지기도 전에 마침 도착한 경호원에게 잡히고 말았다.은미연은 천천히 그녀 앞으로 다가가 웃음기를 싹 거두고 날카롭게 째려보았다.“앞으로 또 한 번 뒤에서 수군거리다가 내 귀에 들리기라도 한다면 술 한 잔 뿌리는 걸로 끝나지 않을 거예요. 그 혀를 확 뽑아버릴 수도 있으니까 명심해요!”...은미연은 강서연과 함께 메이크업을 수정하러 대기실로 갔다.“저 여자를 언제부터 혼쭐 내주고 싶었어요!”은미연이 레드 립스틱을 바르자 더욱 생기가 돌았다.“최지한은 어디 가서 저런 여자를 찾았대요? 최씨 가문 자제들은 정말 점점 형편없어지는 것 같아요. 저 강유빈도 문제예요. 최지한의 마음에 들었으면 해원 별장에 얌전히 있기나 할 것이지, 괜히 나와서 내 심기를 건드려서는...”그러더니 문득 뭔가 생각났는지 강서연을 쳐다보았다.“서연 씨, 내가 이렇게 말해도 괜찮죠?”강서연은 순간 멈칫했다가 이내 방긋 웃었다.“그럼요!”“내가 괜한 생각 했네요.”은미연도 따라 웃었다.“서연 씨가 감정을 중요시한다는 거 알아요. 그래서 아까 강유빈한테 함부로 해서 마음이 아파할까 봐 걱정했어요.”“감정을 중요시하는 것도 상대를 봐가면서 해야죠.”강서연이 덤덤하게 말했다.“저한테 잘해주는 사람이라면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보답할 거예요. 하지만 해하려는 사람이라면 제가 마음 아파할 이유가 없죠.”“좋아요, 그런 마인드라면 됐어요!”은미연이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그녀도 김자옥처럼 좋고 싫음이 분명한
화들짝 놀란 임나연이 고개를 돌렸다.“아, 매니저님.”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큰 사모님께서 액세서리를 놓고 왔다면서 저더러 가져다 달라고 해서요. 그런데 저한테 카드 키가 없어요.”“괜찮아요. 저한테 카드 키가 있어요.”호텔 매니저는 다정하게 웃으며 카드 키를 꺼내 방문을 열어주었다.강서연이 박경실에게 눈짓하며 잠깐 옷장 안에 숨어있으라고 하자 박경실이 냉큼 움직였다.비록 나이가 있지만 움직임이 민첩하고 체구도 아담하여 큰 옷장에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그녀가 옷장 속에 숨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임나연이 들어왔다.주변을 살피던 임나연은 강서연이 혼자 서 있는 걸 보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임나연 씨.”강서연이 웃으며 먼저 말을 건넸다.“나연 씨도 쉬러 왔어요?”임나연이 덤덤하게 대답했다.“네.”“하지만 여긴 은 대표님의 전용 룸이에요.”강서연은 겁먹지도 비굴하지도 않았다.“여기서 쉬려면 대표님께 먼저 얘기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그러자 임나연이 주먹을 불끈 쥐고 강서연을 노려보았다.조금 전 강유빈은 ‘졸부’라는 단어로 은미연에게 치욕을 안겨주려 했었다. 하지만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되레 호텔에서 쫓겨나고 말았다.‘못난 것 같으니라고!’그 바람에 스스로 자기 따귀를 때리는 계획을 강유빈이 할 수 없게 되었다. 사람들 앞에서 강서연이 망신당하는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자 임나연은 기분이 언짢아졌다.“은 대표님의 전용 룸?”임나연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마치 자기 방인 듯 물 한 잔을 따랐다.“서연 씨도 여기 있잖아요.”“우린 들어온 방식이 다르잖아요.”강서연이 부드럽게 말했다.“저는 대표님이랑 함께 들어온 거고 나연 씨는...”강서연은 그녀가 들고 있는 여분의 카드 키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임나연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아직 화를 낼 때가 아니야.’방안에 CCTV도 없고 또 은미연의 전용 룸이라 조금이라도 시끄럽게 군다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달려올 게 뻔했다.임나연은 입꼬리를 씩 올리며
하지만 임나연은 그녀를 꽉 잡고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조급해진 강서연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밀어버리려 했다.두 사람이 한창 실랑이를 벌이고 있던 그때 임나연의 두 눈에 싸늘함이 스쳐 지나갔다.그녀는 이를 꽉 깨물고 강서연을 놓아주더니 갑자기 자기 뺨을 마구 후려갈기기 시작했다.임나연이 이렇게까지 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강서연은 순간 멍해졌다. 임나연의 두 볼이 벌겋게 부어올랐고 또 미친 듯이 문 앞으로 다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밖에 누구 없어요? 살려주세요! 강서연이 절 죽이려 해요!”그녀는 소리치며 달려 나가 비상벨을 눌렀다. 그러자 호텔 매니저와 종업원, 그리고 경비원까지 삽시간에 우르르 몰려들었다.연회장에 있던 사람들도 벨 소리를 듣고 위층으로 달려왔다.임나연은 일부러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당황한 연기를 하며 문 앞에 서 있었다. 최연준도 인파 속에 있는 걸 확인한 그녀는 냅다 울음을 터뜨리며 그에게 달려갔다.“연준 씨... 아까 난 그저 서연 씨랑 얘기를 나누고 싶었을 뿐인데... 갑자기 다짜고짜 날 때리더라고요!”최연준은 무뚝뚝한 얼굴로 그녀를 확 밀쳤다. 그녀를 향한 그의 눈빛에는 싸늘함 뿐이었다.임나연의 얼굴에 손자국이 선명했고 두 볼이 벌겋게 부어있었다.손님들은 그녀의 초라한 모습에 저마다 이러쿵저러쿵 수군거리면서 시선을 강서연에게 옮겼다.지금, 이 순간 최연준은 강서연이 가장 걱정되었다. 그는 인파를 뚫고 강서연의 곁으로 다가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감싸 안았다.강서연은 그를 보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히죽 웃었다.“당신이 때리지 않았다는 거 알아.”최연준이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하지만 일이... 조금 복잡하게 됐어.”순간 멈칫한 강서연이 고개를 들어보니 몇몇 어르신들이 임나연을 위로하고 있었다. 딱 봐도 임씨 가문의 사람인 것 같았다.그들은 오만한 기세로 진지하게 최연준을 쳐다보았다.“연준아.”그중 한 어르신이 입을 열었다.“지금 옆에 있는 저 아가씨랑 무슨 관계인
모든 이의 시선이 강서연에게 쏠렸다.최연준은 걱정스럽게 그녀를 쳐다보다가 몰래 방한서에게 준비하라고 했다.“임씨 가문 사람들만 남기고 원하는 게 뭔지 물어봐. 이 일 크게 번지게 해서는 안 돼. 최소한 할아버지 앞에서 쓸데없는 소리 하지 않게 해야 해.”“하지만 도련님.”방한서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은 딱 봐도 임나연 씨가 서연 씨를 모함하려는 거잖아요.”최연준이 이를 꽉 깨물었다.“일이 이미 터졌으니 일단 잠재우고... 나중에 다시 해결해야지!”“알겠습니다.”방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어르신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는 조롱 섞인 얼굴로 강서연을 쳐다보았다.“그럼, 서연 씨는 어떻게 알아서 할 건데요?”“먼저 아저씨한테 물어볼 게 있어요.”강서연이 덤덤하게 웃었다.“만약 제가 때린 게 아니라면 임씨 가문에서는 저한테 어떻게 하실 건가요?”“사실이 눈앞에 떡하니 놓여있는데도 발뺌하려고요?”임정수가 버럭 화를 냈다.그는 임씨 가문의 실세나 다름없었다. 수년간 사업을 해왔고 그의 형인 임건마저도 그의 눈치를 보며 고분고분 따라야 했다.임정수는 지금까지 그 누구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 그런데 눈앞의 이 젊은 여자는 남다른 분위기를 풍겼고 그의 앞에서도 전혀 겁먹은 기색이라곤 없었다.임정수는 실눈을 뜨고 그녀를 쳐다보았다.‘나연이는 이 여자의 상대가 아니야.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이 여자를 연준이 옆에서 쫓아내야겠네!’임정수는 이 일이 임나연이 스스로 벌인 자작극이라는 걸 대충 짐작했다. 하지만 임씨 가문의 이익을 위하여 일을 크게 벌이는 수밖에 없었다.이 일이 최재원의 귀에 들어가 최재원이 직접 나서서 강서연을 내쫓는다면 두 가문의 혼약을 진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하하, 뭘 어떻게 해요?”임정수가 싸늘하게 웃었다.“당신처럼 목적을 이루려고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는 여자는 참 많이 봤어요. 당신이 연준 도련님한테 빌붙어서 우리 나연이를 눈엣가시로 여겼으니 당연히 전력을 기울여서 나연이를 괴롭
지금, 이 순간 그는 마치 쥐덫에 걸린 쥐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강서연은 몰래 옷장을 힐끗거렸다. 옷장 문이 비스듬히 열려있었고 박경실은 아직도 옷장 안에서 꿈쩍도 하질 않았다.그 모습에 강서연은 피식 웃었다.원래는 박경실더러 나오라고 할 생각이었지만 인제 보니 그녀가 직접 나설 필요까진 없어 보였다.강서연이 신고 번호를 누르고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그때 임정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깐만요!”주변의 분위기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임정수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앞으로 두어 걸음 걸어 나와 최연준과 강서연을 쳐다보았다.“이 일로... 경찰까지 부를 필요는 없는 것 같아. 어쨌거나 우리 임씨 가문이랑 최씨 가문과 연관된 일이잖아.”“그 말은 옳지 않은 것 같은데요, 아저씨.”최연준의 눈빛이 싸늘해졌다.“두 가문의 체면과 직결된 일이니까 더더욱 대충 넘어가서는 안 되죠!”“그러니까 말이에요.”강서연이 웃으며 말했다.“아까 신고하겠다고 난리를 친 것도 아저씨고, 이젠 신고하지 말라는 것도 아저씨예요. 대체 아저씨가 무슨 생각인 건지 정말 모르겠네요.”임정수는 그녀를 노려보며 매섭게 말했다.“이 일은 회장님께 얘기만 하면 돼요. 그럼 회장님께서 알아서 하실 거예요.”“할아버지는 경찰도 아니고 연세도 많으신데 뭘 알아서 하신다는 거죠?”최연준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혹시 뭔가 켕기는 게 있어서 신고하지 말라는 거예요?”“최연준 너...”임정수는 최연준의 성격이 만만치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의 앞에서조차 이토록 시건방을 떨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그때 임나연이 눈알을 굴리더니 갑자기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두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으로 쓱쓱 닦았다. 그러면 지문이 쉽게 나오지 않을 테니까...“아빠, 엄마, 그만 해요!”임나연이 훌쩍이며 말했다.“원래는 좋은 마음으로 큰 사모님 생신을 축하드리러 왔는데 이런 모함이나 당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여기서 그만 망신당하고
“아주머니...”감동한 강서연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박경실은 그런 그녀를 보며 히죽 웃었다.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할머니라 두려울 것도 없었다. 설령 권력 앞에서도, 명망이 높은 임씨 가문 앞에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이라곤 전혀 없었고 강서연을 위해 끝까지 싸우려 했다.강서연과 최연준이 없었더라면 어찌 지금처럼 편히 살 수 있었겠는가?인간은 은혜를 갚을 줄 알아야 한다.“하하, 웃기고 있네!”임씨 가문 사모님은 지금까지 이런 굴욕을 당해본 적이 없었다. 임씨 가문과 최씨 가문의 세력이 대등하지만 최씨 가문 하인에게조차 꼼짝하지 못하는 이 상황이 어이없기만 했다.“다친 건 우리 나연이고 망신을 당한 것도 우리 임씨 가문이야. 그런데도 지금 공갈 협박하는 거야? 뭐가 녹화됐는지도 모르는 동영상 가지고 술수를 부리지 마. 우리가 그리 쉽게 속을 것 같아? 자신 있으면 틀어서 사람들한테 보여줘 봐!”뇌를 거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내뱉고야 마는 임씨 가문 사모님이었다. 임정수는 그런 그녀를 말릴 틈도 없었다.주변 사람들도 대체 무엇을 촬영했는지 궁금한 듯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박경실은 씩 웃고는 마른기침을 두어 번 했다.“동영상은 당연히 보여줄 겁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이 증인이 되어주세요. 만약 서연 씨가 결백하다면 임씨 가문은 제대로 된 설명을 해야 할 겁니다. 이 정도 요구는 너무한 거 아니죠?”“네, 당연히 그래야죠!”인파 속에서 강서연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최연준은 가볍게 웃으며 박경실의 이 방법이 아주 대단하다고 몰래 감탄했다. 그가 동영상을 틀자 화면에 임나연의 모습이 나타났다.그녀는 먼저 강서연의 앞길을 가로막더니 다짜고짜 자신의 양쪽 뺨을 후려갈겼다. 따귀 소리가 어찌나 찰진지 영상으로만 봐도 세게 때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그렇게 모든 진실이 드러났다.손님들은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고 어떤 이는 휴대 전화까지 꺼내 임나연이 자기 뺨을 후려갈기는 영상을 촬영했다. 자기 뺨을 때리는 사람을 본 적
경찰서 밖에서 최지용은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한참을 걷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젊은 경찰관이 안에서 뛰어나오고 있었다. 최지용은 급히 다가가며 말했다.“정호야!”정호라는 젊은 경찰관은 최지용을 보자 반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 녀석!”최지용은 정호에게 다가가 가볍게 주먹을 툭 날리며 말했다.“도대체 무슨 일이야? 왜 사전에 알려주지 않은 거야?”정호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방금 최씨 집안에서 백인서를 데려간 사람 중에 정호도 있었다. 최지용도 놀라웠지만, 영미 역시 경찰이 직접 찾아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떠나기 전, 정호가 살짝 눈짓을 보냈고 최지용은 그의 의도를 알아채 경찰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지용이 형.”정호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형수님께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잘 구분하고 계시니 문제없을 겁니다!”“도대체 누구 지시로 백인서를 여기로 데려온 거지?”“소아 아가씨예요!”정호는 어깨를 으쓱했다.“소아 아가씨가 갑자기 지시한 거라 사전에 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최지용은 살짝 놀랐다. 강소아의 지시라니.“형수님께서도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으니까요. 그 아이가 실종되기 전에 형수님께서 만난 적이 있거든요. 경찰이 형수님을 데려가서 조사하는 건 당연한 절차입니다.”최지용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피식 웃음을 지었다.강소아가 이런 ‘당연한 절차’를 이용해 백인서를 경찰서로 보낸 이유는 경찰서야말로 가장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또 누군가가 음모를 꾸며 백인서에게 덮어씌우려 한다 해도 경찰서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경찰서 안에는 일을 봐주는 사람들도 있으니 백인서가 여기서 며칠 지내는 동안 힘든 일 없이 외부의 소란도 피할 수 있는 셈이었다.최지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강소아는 정말 자매를 위한 배려가 남달랐다. 이렇게까지 배려심 깊은 방안을 생각해 내다니!“지용이 형.”정호가 계속해서 말했다.“도련님께서
영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소아 언니, 저를 믿지 않으세요?”“난 오직 사실만을 믿어.”“권씨 가문의 딸이 실종된 사건에 백인서 씨의 양아버지와 남동생이 관련되었어요, 그게 바로 사실이에요!”강소아는 순간 멍하니 있다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려 했다.세상에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다 있나 싶었다.호텔 뒷뜰에 있는 그 CCTV가 정말 완전히 고장 났다고 생각하는 걸까? 육씨 가문과 최씨 가문이 힘을 합쳐 그 고장 난 CCTV 하나도 못 고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최군형은 강소아의 어깨를 가볍게 눌러 안심시키며 슬며시 휴대전화를 건넸다.강소아는 화면을 확인했다. 최군형의 부하가 보낸 메시지였다.“도련님, CCTV 데이터를 복구 중입니다. 곧 진실이 밝혀질 겁니다!”강소아는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영미가 이렇게까지 백인서를 몰아세우는 걸 보니 마음 한구석에 무언가 꺼림칙한 게 남아 있는 것 같았다.어차피 꼬리가 저절로 드러날 것이었기에 그저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다.바로 그때, 집사가 다소 당황한 얼굴로 방에 들어섰다. 집사의 뒤에는 몇 명의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신분을 밝힌 후 방 안을 둘러보며 엄숙한 목소리로 물었다.“여기 백인서 씨가 계십니까?”표아정은 등을 꼿꼿이 펴고 대답했다.“경찰관님께서 여긴 무슨 일로 오셨나요?”“당신이 백인서 씨인가요?”“저는...”“백인서 씨가 납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신고를 접수했습니다!”“뭐라고요?”백인서는 얼굴이 창백해졌다.“백인서 씨, 조사에 협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희와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권온유가 납치된 지 하루가 지났다.그동안 정대명은 단 한 번 음식을 가져왔는데, 그것도 차갑게 식은 죽 한 그릇과 딱딱한 빵 한 조각뿐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귀하게 자란 권온유에게 이런 음식은 처음이었다. 울고 싶었지만, 감히 울지 못하고 그저 눈물을 참으며 빵을 조금씩 뜯어 먹고 있었다.정승우는 그런 온유의 모습을 보고
“아줌마,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그럼, 제가 알아낸 사실을 전부 말씀드릴게요!”영미는 입가에 교만한 미소를 띠며 백인서를 차갑게 한 번 쳐다보았다.“백인서 씨의 친어머니인 백홍은 인신매매범이었다는 사실, 모두 아셨나요? 백인서 씨의 어머니는 백인서를 정대명의 집에 맡겼고... 흥! 정대명의 아내도 백홍이 납치해 왔다는 소문이 있어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잖아요. 제 생각엔... 인신매매범의 딸이라면 그런 일쯤은 익숙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은 권온유의 실종이 정말로 백인서 씨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시나요?”“영미!”강소아가 나서며 분노를 가득 담아 소리쳤다.“허위 사실을 퍼뜨리지 마!”“소유 아가씨, 억울하네요!”영미는 강소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제가 이렇게까지 조사한 건 다 아가씨를 위한 거예요! 딸도 있는 사람이 백인서를 곁에 두고도 마음이 놓이세요?”“그만해!”최지용이 크게 소리쳤다.백인서는 몸을 떨며 믿기지 않는 눈으로 최지용을 쳐다보았다.그러나 최지용의 얼굴에는 의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최지용은 굳건한 눈빛으로 뒤에 있는 백인서를 지키고 있었다.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처럼 백인서를 아끼고 있었다.백인서는 코끝이 찡해지며 본능적으로 최지용의 손을 꼭 붙잡았다. 최지용의 따스한 손은 백인서에게 큰 용기를 주었고 그 온기가 어둠의 두려움을 잊게 해주었다.최지용은 백인서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고 다시 영미를 바라볼 때는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영미야.”최지용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두 집안의 관계를 생각해서 그저 넘어가는 거야. 더 이상 선을 넘지 마.”최군형도 나서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요, 백인서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모르겠어요? 영미 아가씨, 우리 최씨 가문 사람들을 바보로 생각하는 건 아니죠?”영미는 순간 긴장했다. 최군형의 말 속엔 어딘가 숨은 뜻이 있는 듯했다.최군형의 깊고 복잡한 눈빛을 파악하기 어려웠다.표아정은 천천히 일어나 어깨에 걸친 숄을
백인서는 복잡한 눈빛으로 최지용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그때 최지용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표아정이었고 다급한 목소리로 서둘러 돌아오라고 재촉했다.최지용은 결국 어머니의 말에 따라 백인서를 데리고 최씨 집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넓은 거실에는 최군형과 강소아도 나와 있었고 모두 엄숙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백인서가 들어서자, 표아정이 백인서를 올려다보며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다.강소아는 백인서와 눈을 마주치며 단호하게 미소 지었다.백인서가 의아해하던 찰나, 영미가 천천히 밖에서 걸어 들어왔다.“아줌마, 지용 오빠. 제가 권온유의 행방을 알아냈어요.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뭐라고?”최지용이 놀라서 물었다.“네가 어떻게 아는데?”영미는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지용 오빠, 특수부대 출신이라고 정보가 우리보다 더 빠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최씨 가문은 만능이 아니에요, 최씨 가문도 모르는 정보가 있다고요.”표아정은 가볍게 기침하며 차분히 상황을 지켜보았다.최군형과 강소아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떤 일이 일어날지 주목하고 있었다.최지용의 이마에는 점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미의 눈에는 한 줄기 교만한 빛이 번졌다.영미는 오는 길에 이미 모든 계획을 짰다. 정대명의 말이 맞았다. 누구를 훔치든 상관없었다. 인신매매범의 딸인 백인서가 아이들을 해치러 다닌다는 누명을 씌우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하면 백인서는 모두의 신뢰를 잃게 될 터였다.영미는 이제 한 아이의 엄마가 된 강소아가 인신매매범을 곁에 둘 리 없다고 믿었고, 최지용 역시 이 사실을 알면 더는 백인서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래서 영미는 정대명을 배신하기로 마음먹었다.영미는 권온유를 넘기고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한패가 되어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주장할 계획이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백인서는 변명의 여지도 없이 궁지에 몰릴 것이었다!“지용 오빠.”영미는 고개를 돌려 최지용을 바라보며 한 글자씩 천천히 말했다.“권온유는 정승
“그... 괜찮아!”정승우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권온유에게 말했다. 정승우는 이곳에서 권온유를 반드시 데리고 나가겠다고 결심했다.그런데 이때, 공장 문이 “쾅” 하고 열리더니 곧바로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정승우는 재빨리 권온유에게 눈짓했고 권온유도 알아채고는 즉시 땅바닥에 쓰러져 의식이 없는 척했다.정승우는 벽에 기대어 눈을 반쯤 감았다.“이 아이인가요?”영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맞아.”정대명은 영미를 흘깃 노려보며 묵묵히 대답했다.영미는 두 걸음 앞으로 다가서서 희미한 빛 속에 있는 아이를 살펴보더니, 곧 얼굴빛이 확 변했다.“이 아이... 혹시 권씨 집안의 막내딸 아니에요?”정대명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애초에 아이를 훔쳐 올 때 이 아이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 리가 없었다.“정대명 씨.”영미가 차갑게 웃으며 돌아보았다.“제가 최씨 가문 집안 아이를 훔쳐 오라고 했지, 권씨 집안 아이를 훔치라고 했나요? 이러고도 저를 속이지 않았다고요?”“그게...”정대명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영미 아가씨, 어차피 목적은 백인서를 곤경에 빠뜨리는 거잖아? 그러니 누구를 훔쳐 오든 상관없지 않아? 아이를 훔치기만 하면 유괴범이 되는 거니까.”이 말은 영미에게만 충격을 준 게 아니었다. 정승우의 귀에도 또렷이 들어왔다.“좋아요.”영미는 깊은숨을 들이마신 뒤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이 아이는 잘 지키고 있어요, 제가 다시 연락할 테니까.”...한편, 권씨 집안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권욱은 조순영을 탓하며 아이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했고, 조순영은 오열하며 남편을 원망했다. 조순영은 권욱이 바깥에서 여자와 부적절하게 얽히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라고 했다.“헛소리하지 마! 사람들이 나한테 어떤 소문을 퍼뜨렸는지 잘 알잖아. 결혼 생활 내내 너한테 부끄러운 일 한 적 없어.”“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정말 떳떳하게 행동했다면 왜 사람들이 당신만 가만두지 않는 건데?”며칠 전까지만
권온유의 질문에 정승우는 당황했다.권온유는 커다란 눈망울로 정승우를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했던 슈퍼맨 같은 오빠가, 이제는 먹을 것 하나 구하지 못하는 모습이 되어버린 것이다.정승우는 어색하게 입가를 씰룩이며 권온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이야기를 이어갔다.“너, 정말 배고파?”“네!”권온유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 작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원래는 엄마랑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 했어요. 엄마가 특별히 고등어조림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하셨거든요... 엉엉... 엉엉...”“울지 마, 울지 마! 그냥 생선 하나 가지고...”“나 배고파!”정승우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아이와 대화하는 건 그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겨우 권온유를 달래고 나서 정승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팔을 걷어붙이며 권온유에게 내밀었다.“너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 배고프면, 여기 한번 물어볼래?”권온유는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정승우를 바라보았다.“우리 집은 가난해서 늘 먹을 게 부족했거든. 그래서 어릴 때 너무 배가 고프면 이렇게 배고픔을 달랠 만한 걸 물곤 했어.”권온유는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배고픔을 달랠 만한 것'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정승우는 웃으며 계속 설명했다.“예를 들어 쌀통 같은 거야. 한때 쌀이 들어 있던 쌀통은 비어 있어도 쌀 냄새가 남아 있거든. 그래서 쌀통 가장자리를 살짝 물면서 하얀 쌀밥을 먹는 상상하는 거야. 그러면 배가 덜 고파져.”“그리고 이웃집에서 밥하는 냄새를 맡으며 그 밥을 먹는 상상을 하는 거야. 그러면 그렇게 배고프지 않더라고.”권온유는 정승우의 이야기에 넋을 잃고 입을 벌린 채 있었다. 정승우는 웃음을 터뜨렸다.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한때 정대명이 도박과 술에 빠져 정승우를 굶겼던 시절은 그야말로 비참한 순간들이었다.잠시 후, 권온유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고 정승우는 속으로 ‘큰일이다'라고 생
영미는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최지용을 지켜보았다.최지용은 다소 초조한 기색으로 구석에 앉아 휴대전화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 전화를 걸기도 했다.영미는 바로 뒤를 따라갔고 최지용의 낮고 다급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찾았습니까?”“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세요... 만약 납치범의 목적이 돈이었다면 분명 전화를 걸어올 겁니다!”영미의 가슴이 철렁하며 내려앉았다.납치범이라니? 대체 뭘 찾는다는 거지?백인서와 통화한 걸까?그때, 최군성이 큰 소리로 외쳤다.“지용이 형, 여기서 뭐 해요?”영미는 얼른 몸을 숨겼고 최군성은 최지용에게 다가가 최지용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우리 형이 찾고 있었는데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거예요? 어서 와서 먹고 즐기자고요!”최지용은 최군성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영미와 눈이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잠시 멈칫했다.영미는 급히 시선을 피하며 억지 미소로 인사했다.“지용 오빠...”“어, 영미?”최군성도 배윤아처럼 물었다.“여기 웬일이야? 형님이 널 초대한 것 같지 않은데?”“그게...”영미는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최군성은 영미의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최지용을 끌고 가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최지용은 점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영미가 도대체 여기 왜 있는 거지? 평소에는 볼 수 없던 사람이, 왜 하필 오늘 온유가 사라진 날에 나타난 걸까?그때, 최군형과 강소아가 가원이를 품에 안고 나타났다.강소아는 아이를 보행기에 앉혔고 아이는 보행기 가장자리를 잡고 작은 발을 내디뎠다. 이 모습에 방 안의 모든 사람이 환호성을 질렀다.영미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자리를 떠 교외의 버려진 공장으로 향했다.그 시각, 정대명은 영미의 지시에 따라 승합차를 몰고 공장에 도착해 있었고 영미가 도착했을 때 그는 공장 문 앞에서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영미는 핸드백을 휘둘러 정대명에게 던졌다.“정대명 씨, 감히 날 속여
“너 따위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정대명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결국엔 자기 아들이었기에 정승우에게 감출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때리고 꾸짖어도 떠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정대명은 서랍에서 가위를 꺼내 들고는 권온유의 양 갈래머리를 단칼에 잘라냈다. 머리카락이 천천히 바닥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있다가 막아서려는 순간, 자신과 정대명 사이에 힘의 격차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작정 나섰다가는 역부족일 터였다.정승우는 이를 악물고 정대명에게 다가가 물었다.“아빠, 정말 이 아이를 팔 생각이에요?”“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영미라는 그 여자가 원하는 거야!”정대명은 불만스레 대꾸하며 정승우에게 옷장에 있는 헌 옷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정승우가 옷을 가져오자, 정대명은 손을 뻗어 권온유의 예쁜 드레스를 찢으려 했다. 정승우는 급히 소리쳤다.“뭐 하는 거예요!”“이 자식이!”정대명은 정승우를 노려보며 소리쳤다.“조용히 해! 죽고 싶어?”“아빠, 이건...”“이 애한테 옷을 갈아입히려는 거야! 이렇게 좋은 옷을 입고 있으면 바로 눈에 띄잖아.”정승우는 다가가 정대명을 옆으로 밀치며 말했다.“제가 갈아입힐게요!”“이놈이...”정대명은 하려던 말을 멈추고 피식 웃었다. 그는 정승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아하, 아빠를 도와주고 싶구나? 역시 아들은 아들밖에 없지! 그래, 네가 손이 빠르니까 빨리 옷을 갈아입혀. 둘이 함께 가자고!”정승우는 속으로 혐오감이 치밀었지만, 지금은 그저 상황을 지켜보며 대응하는 수밖에 없었다.정승우는 권온유의 드레스를 벗기지 않고, 정대명의 헌 옷을 위에 입혀 단단히 감쌌다. 그런 다음 모자를 씌워 얼핏 보면 남자아이처럼 보이게 했다.“좋아, 이 정도면 되겠어!”정대명은 정승우에게 눈짓을 보내며 말했다.“뒷문에 승합차가 준비돼 있대. 어서 출발하자!”“아빠, 이 소녀는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예요?”“교외지!”정대명은 귀찮다는 듯 말했다.“빨리 움직
권온유는 깜짝 놀라며 정대명을 멍하니 쳐다보았다.“아저씨가 맛있는 걸 가지고 왔단다. 배고프지 않니?”권온유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달아나려 했다. 정대명은 급히 권온유 앞을 가로막았다.“아니, 가지 마!”정대명은 두 손으로 권온유를 꼭 붙들며 말했다.“그게... 네 엄마가 나한테 너를 데려오라고 부탁했어!”엄마라는 말을 듣고 권온유는 잠시 멈칫했다.“정말이야, 네 엄마가 부탁한 거라니까!”정대명은 거짓말을 이어갔다.“방금 네 엄마가 갑자기 어디론가 가버렸지? 너 보고 기다리라고 했잖아?”“네... 맞아요.”“그래!”정대명은 웃으며 말했다.“그런데 네가 여기저기 막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엄마는 내가 여기 있는 걸 알 거예요. 저는 여기서 조금 놀다가 다시 휴게실로 돌아갈 거예요!”“오... 그렇구나.”정대명은 잠시 생각을 굴렸다.“아저씨가 휴게실이 어딘지 아니까, 내가 데려다줄게!”권온유는 경계하며 정대명에게서 몸을 빼내고 두 걸음 물러났다.“얘가! 난 정말로 네 엄마 친구라니까. 네가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걱정하지 않겠어? 맞지?”“자, 자! 아저씨가 데려다줄게. 착하지!”정대명은 권온유를 갑자기 붙들어 어깨에 둘러맸다. 권온유는 본능적으로 소리치려 했지만, 정대명의 손이 입을 단단히 막고 있어 소리를 낼 수 없었다.어린 소녀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른 남자를 이길 수는 없었다. 정대명은 권온유의 머리 뒤쪽을 세게 내리쳐 기절시켰고, 온유가 들고 있던 인형은 땅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익숙하게 호텔로 와서 지난번 일을 핑계로 다시 정대명에게 돈을 뜯어낼 생각이었는데, 방 안에 기절한 어린 소녀가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어른 일에 참견하지 말고 신경 꺼!”정대명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방금 정대명은 온유를 데려오며 보안과 호텔 직원의 눈을 피하고자 아이를 어깨에 메고 가지 않고, 자신의 아이인 것처럼 속여서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