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위기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강서연은 고개만 푹 숙인 채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김자옥과 윤문희는 서로 눈짓을 주고받다가 가볍게 웃어 보이고는 눈치 있게 빠져주었다. 지금은 아무래도 둘만의 시간이 필요했다.“한서야, 우리한테 다른 데 좀 구경시켜 줘.”김자옥의 뜻을 단번에 이해한 방한서는 재빨리 나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하지만 배경원은 여전히 눈치 없이 제자리에 선 채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형, 형수님.”그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두 사람은 아무것도 준비할 필요 없어요. 제가 다 꾸며놓았으니까 언제든지 이사 오시면 돼요.”고개를 든 강서연은 최연준의 그윽한 눈빛과 마주쳤다. 최연준은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당신이 싫다면 나도 강요하지 않을게.”강서연은 잠깐 멈칫하다가 속으로 몰래 피식 웃었다.최연준의 진짜 신분을 알고 난 후로 최연준은 강요하지 않겠다는 말을 거의 입에 달고 살았다. 하지만 사실 그녀는 그가 가끔 강요하길 바랄 때도 있었다.예전에 최연준이 그녀에게 매달리던 때가 생각났다. 그땐 강요하지 않겠다는 말 따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녀가 반항할 때면 한 손으로 그녀를 제압하고 다른 한 손으로 옷의 단추를 벗겨버리곤 했다...한 사람을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는 몸이 가장 솔직한 답변을 해준다고 한다.강서연은 심장이 터져 나올 듯이 쿵쾅거렸고 마치 열이 나는 것처럼 얼굴이 빨개졌다.그녀의 생각을 알 리 없었던 최연준은 그녀가 거절하는 줄 알고 저도 모르게 실망한 기색을 드러냈다.‘이번에도 또 글렀네.’“괜찮아.”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마지못해 한마디 했다.“기다릴게.”‘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최연준의 얼굴에 쓸쓸함이 아주 잠깐 스쳤지만, 강서연은 그걸 단번에 캐치했다.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커다란 두 눈을 깜빡이면서 애교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뭘 기다리겠다는 거예요?”그가 어두운 목소리로 대답했다.“당신이 원할 때까지 기다릴게.”“내가 언제 싫다고 했어요?”최연준
“셋째 도련님의 아내가 되는 게 확실히 쉬운 일은 아니에요.”강서연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높은 곳에 있으면 외롭기 마련이다. 지위가 높은 그는 부귀영화를 누리는 동시에 그를 적대시하는 사람도 자연스레 많아진다. 최씨 가문 사람들은 그를 감히 건드리지 못하기에 그의 주변 사람들에게로 타깃을 돌렸다.“나 자신을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어요.”그녀는 그의 두 눈을 빤히 보며 말했다.“그리고 당신이 나 때문에 신경 쓰게 해서는 더더욱 안 되고요. 내가 강해져야만 자신을 지킬 수 있고 당신의 발목을 잡지 않아요. 난 당신의 가장 안정적인 마지막 방어선이 될 거예요.”“서연아...”최연준은 만감이 교차했다. 역시 그의 여자는 나약하고 쉽게 괴롭힘당하는 성격이 아니라 똑 부러지고 강했다.훌륭한 최연준과 전혀 뒤처지지 않는 강서연은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두 사람이 가장 잘 지내는 방법이었다. 서로 대등한 것이야말로 사랑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다.“저기 있잖아요...”배경원이 바짝 다가가 물었다.“그래서 여기 살겠다는 거예요, 말겠다는 거예요? 됐어요, 그만 질질 끌고 제가 대신 정해줄게요. 오늘 밤엔 그냥 여기 묵어요. 안 그러면 제가 정성스레 준비한 게 무용지물이 되잖아요.”“네?”강서연이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정성스레 준비했다고요?”배경원은 마른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머리를 긁적였다.“아니면... 저랑 같이 들어가 볼래요?”두 사람은 배경원과 함께 별장을 구경했다.양복 차림의 배경원이 서류까지 들고 어찌나 열정적으로 소개하는지 마치 부동산의 우수한 직원 같았다.그 모습에 최연준이 피식 웃었다.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면서 이토록 진지한 배경원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이 집은 저의 첫 계약 건이에요!”배경원이 자랑스럽게 넥타이를 당겼다.“그러니 만족할 만한 서비스를 제공해 드려야죠. 여길 보세요...”그가 가리키는 방향대로 고개를 돌린 강서연은 화들짝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이게 다 뭐
최연준이 마침 팔목에 끼고 있어 강서연은 두 팔찌를 서로 비교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완전히 똑같았고 방울의 디자인과 꽃무늬도 똑같았다.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연준은 강서연의 손을 잡고 바로 에덴을 나섰다.그들은 차를 타고 온천 리조트 근처에 도착했다. 옆에 바다가 있어 짭조름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차에서 내린 그들은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걷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아가씨 팔자가 괜찮네요. 음... 그런데 부부의 인연이 좀 부족해요. 두 사람 언젠가는 헤어질 거예요!”마음이 움찔한 강서연의 발걸음이 빨라졌다.할머니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다른 여행객들에게 손금을 봐주고 있었고 웃을 듯 말 듯 모든 걸 꿰뚫어 보고 있는 표정이었다.할머니의 목소리가 계속하여 들려왔다.“하지만 언젠가는 행복해질 거예요!”‘그때 우리한테도 똑같은 얘기를 해주셨는데?’“이 팔찌를 줄게요.”할머니는 방울이 달린 빨간 팔찌 두 개를 꺼냈다.“만약 나중에 헤어진다면 이 팔찌로 두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될 겁니다...”최연준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하, 그냥 누구한테나 다 똑같은 얘기를 하는구나!’그는 할머니의 말을 믿은 자신을 비웃었다. 그냥 가려던 그때 화가 난 강서연이 할머니에게 따지려 했다.“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지금 우리를 놀린 거잖아요.”“그만해, 됐어.”최연준이 피식 웃었다.“할머니도 먹고살아야 하니까 그러신 거겠지. 아니면 저 연세에 여기서 점이나 봐주겠어?”“하지만...”강서연이 입을 삐죽거렸다.“할머니 그 말 때문에 엄청 오래 걱정했단 말이에요!”최연준은 마음이 따뜻해졌다.사실 그도 걱정한 건 마찬가지였다. 가끔 밤에 자다 깨서 두 사람이 언젠가는 헤어질 거란 말만 떠올리면 다시 편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이제야 그 진실이 드러났다. 할머니는 점을 볼 줄 몰랐고 그냥 그들을 속인 사기꾼이었다.그는 할머니에게 속았다는 분노보다 마음속의 돌덩이가 사라진 것 같아 오
강서연과 최연준은 보금자리를 에덴으로 옮겼다.배경원이 전부 준비해 놓긴 했지만, 강서연은 그래도 직접 꾸며야 자기 집에 더 애착이 간다고 생각했다. 하여 신문사 일을 인수인계하고 어진 엔터테인먼트로 출근하기 전 오성 시내를 둘러보며 또 이것저것 사다 놓았다.물론 전부 최연준의 카드를 긁었다. 최연준이 회의를 하는 동안에도 거래 내역 문자를 끊임없이 받았다.최연준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지만, 얼굴에는 사랑 가득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뭘 이렇게나 많이 사? 예전에는 구매욕이 별로 없는 줄 알았는데... 이대로 계속 샀다간 이번 달 용돈이 줄어드는 거 아니야? 경섭 씨처럼 담배 살 돈도 없으면 어떡해?’최연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한창 보고를 올리던 총괄 담당자는 무심결에, 수심에 찬 그의 얼굴을 보고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도... 도련님?”총괄 담당자는 입꼬리를 파르르 떨며 억지로 미소를 쥐어짰다.“도련님, 제가 혹시 잘못 보고한 거라도 있나요?”하지만 최연준은 그의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머릿속에 온통 담뱃값 생각뿐이었다...‘안 돼!’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빠른 속도로 회의실을 박차고 나갔다. 회의실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져 방한서에게 시선을 돌렸다.“도련님 왜 저래요?”“회사에 무슨 큰일이라도 났나요?”“설마 회장님의 건강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겠죠?”“퉤퉤퉤...”방한서는 이마를 짚으며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그는 최연준의 휴대 전화 화면에 뜬 거래 내역과 강서연이 보낸 웃는 이모티콘을 정확히 보았다.「자기야, 이제 침대 시트만 사면 돼요.」자기야... 강서연이 요즘 그를 부를 때 쓰는 새로운 애칭이다. 방한서는 저도 모르게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최연준은 강서연이 사준 자동차를 운전하여 쇼핑몰로 향했다.이 쇼핑몰은 DL처럼 그리 눈부시게 화려하지 않았고 오성에서도 2등급 수준이었다. 비록 최상 그룹에 속해있긴 하지만 쇼핑몰 담당자는 그룹의 회의마저 참석
최연준이 고개를 숙였다.강서연이 그래도 여자의 표준 키였지만 최연준 앞에서는 발꿈치를 들어도 겨우 그의 어깨 정도 닿았다. 최연준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에게만 보여주는 따스한 눈빛을 보냈다.“내가 안 오면 이번 달 용돈이 없을 것 같던데?”그가 피식 웃었다.“그럴 리가요. 당신 용돈은 다 남겨뒀어요.”“정말?”“그럼요... 내가 계산해 보니까 당신 점심은 회사에서 챙겨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돈이 따로 필요 없고 옷도 내가 사주잖아요. 그리고 우리 지금 에덴에 살아서 집세 낼 필요도 없어요. 강주에서 살 때보다 훨씬 여유로워졌어요. 의식주와 교통 중에 그냥 교통비만 필요하겠더라고요.”강서연이 손가락을 접으며 계산했다.“지금 타고 다니는 저 차는 소배기량이라서 기름도 엄청나게 아껴요. 계산해 보니까 한 달에 10만 원이면 충분할 거예요! 그래서...”그녀는 활짝 웃으며 5만 원짜리 두 장을 꺼내 그의 셔츠 주머니에 넣었다.“이번 달 용돈이에요. 아껴 써요.”최연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역시 그의 예상대로 담뱃값은 없었다. 그는 속으로 슬피 울부짖었지만, 강서연의 귀여운 눈빛을 마주한 순간 억지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왜 그래요?”강서연은 우쭐거리며 그를 쳐다보았다.“액수가 마음에 들지 않아요?”“아니, 아니.”최연준이 입을 삐죽거렸다.“그... 침대 시트 아직 못 샀다며?”강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신난 발걸음으로 침대 시트를 보러 갔다.최연준은 셔츠 주머니 속 5만 원짜리 두 장을 움켜쥐었다.‘이번 달은 차를 적게 운전해야겠어. 그냥 경수 아저씨한테 차랑 운전기사를 보내달라고 할까? 이 10만 원은 내 비상금으로 몰래 숨겨야 해!’...“경섭 씨, 물어볼 게 있어요.”이튿날 최연준은 육경섭을 사무실로 불렀다.그런데 육경섭의 상태도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그는 사무실로 들어오자마자 소파에 털썩 주저앉더니 멍하니 천장만 올려다보았다. 최연
“나석진이랑 계약하는 거 말이에요. 설마 잊은 거 아니죠?”육경섭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그가 자존심까지 버려가며 립스틱 300개와 바꿔온 것이다.“잊지 않았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최연준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육경섭은 그를 보며 머뭇거렸다.“정말이에요? 그런데 어진 엔터테인먼트라는 회사도 나석진이랑 계약하려고 한다고 들었어요. 사적으로 여러 번이나 연락했다던데요?”최연준이 화들짝 놀랐다.‘엄마 회사잖아? 엄마도 나석진 씨한테 관심이 있었어?’만약 두 회사가 정말로 경쟁한다면 그의 입장이 곤란해진다.“그냥 소문일 수도 있잖아요.”최연준이 덤덤하게 말했다.“내가 한번 알아볼게요.”“네, 고마워요.”육경섭이 크게 웃었다.립스틱 300개인데 낭비해서는 절대 안 되었다....에덴으로 돌아온 최연준이 안방으로 들어갔을 때 강서연은 한창 침대 시트를 펴고 있었다. 작은 체구의 그녀가 허리를 비틀거리며 침대를 정리하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유혹적이었다. 그는 제 자리에 넋을 놓고 서 있었다...최연준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인기척을 들은 강서연이 고개를 돌리자, 최연준의 그윽한 두 눈과 딱 마주쳤다.“왔어요?”그녀가 순진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방금 새 시트 폈어요. 어때요?”지금 최연준의 눈에는 시트고 뭐고,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그녀와 이 침대 위에서 뜨거운 시간을 보내는 상상뿐이었다.“응, 괜찮네.”그는 시트를 대충 흘겨보았다.“무늬는 어때요?”“예쁘네.”그녀를 쳐다보는 최연준의 두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연준 씨, 우리...”“여러 개 더 사면 좋겠다.”그는 갈라진 목소리로 한마디 하고는 그녀를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강서연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의 심장박동이 점점 빨라졌고 그녀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여러 개 사서... 뭐 하려고요?”“두고두고 쓰는 거지.”최연준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낮게 깔린 목소리가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하나 더 사긴 했어요..
최연준이 놀란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헝클어진 머리와 비몽사몽한 모습이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만약 회사에 별다른 일이 없었더라면 아마 계속했을 것이다...“진짜 도시락을 가져다줄 거야?”그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강서연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최연준은 입꼬리를 씩 올리며 음흉하게 웃었다.“알았어.”그가 나지막이 말했다.“점심에 기다릴게.”점심에 밥을 먼저 먹을지, 그녀를 먼저 먹을지...최연준이 집을 나서자, 강서연은 주방에서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한창 청소하던 박경실은 갑자기 풍겨오는 맛있는 냄새에 저도 모르게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강서연은 아주 능숙하게 반찬과 찌개를 만들고 도시락통에 담을 준비를 했다.“서연 씨, 무슨 요리를 했어요?”박경실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냄새만 맡아도 입맛이 당기는데 먹으면 엄청 맛있을 것 같아요.”강서연이 환하게 웃더니 갈비찜 한 점을 접시에 담아 그녀에게 건넸다. 박경실은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하도 먹어보라고 하여 한입 맛보았다. 간도 딱 맞았고 전혀 느끼하지도 않았다.박경실은 웃으며 감탄했다.“전 이 나이를 먹어도 요리 솜씨는 서연 씨보다 한참 못해요.”“그럼, 앞으로는 맛있는 거 많이 해줄게요.”“그건 안 되죠!”박경실이 화들짝 놀랐다.“절 받아주신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 데 밥까지 해달라는 건 너무 염치없어요. 밥은 제가 해서 두 분께 대접해야죠...”“아주머니.”강서연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를 볼 때면 자꾸만 어머니가 떠올랐다. 학대를 받은 적이 있고 의지할 데도 없이 쓸쓸하게 살아온 것만으로 충분히 가여운데 말년까지 비참하게 보내게 해서는 안 되었다.“저한테는 이러시지 않으셔도 돼요. 우리가 남입니까?”강서연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우리 집에는 그런 규칙이 없어요. 게다가 아주머니는 어른이시고 경수 아저씨도 연준 씨 어릴 적부터 봐 온 분이시잖아요. 저희가 두 분을 존중해야 하는 건 당연한 거예요.”“서연 씨...”박경실은 울컥하여 목이 멨
강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바로 집을 나섰다.최연준은 그녀에게 특별한 출입 카드를 주었다. 프런트에 가서 예약하지 않아도 이 카드만 있으면 건물의 그 어느 층도 다 갈 수 있었다.그녀는 그 카드로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맨 꼭대기 층에 도착했다. 그의 사무실에 들어가려던 그때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구체적인 내용은 이러합니다. 이 보고서도 한번 보세요.”강서연이 잠깐 멈칫했다.‘목소리가 익숙한 게 누구더라... 그 도도한 임나연 씨? 임나연 씨가 연준 씨 사무실에 있어? 어쩐지 오는 길에 문자를 몇 통이나 보내도 답장이 없더라니.’“연준 씨.”임나연의 목소리가 가늘어졌다.“이번 주에 프랑스 쪽이랑 계약하는 거 있잖아요. 내가 다 준비 마쳤어요.”최연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이 모든 게 다 연준 씨를 위한 거예요.”임나연이 속상한 얼굴로 말했다.“지금 같이 일할 이 기회를 아주 소중히 생각하고 있어요. 연준 씨, 내가 내 마음을 꺼내 보여야 믿겠어요? 좋아요, 연준 씨만 고개를 끄덕인다면 지금 당장 꺼내서 보여줄게요.”‘역겨워!’강서연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물론 그녀는 최연준을 누구보다 더 믿었다. 하지만 최연준이 다른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고 해서 다른 여자들이 매달리지 않는다는 법은 없었다.강서연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도시락통을 어찌나 꽉 쥐었는지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였다.최연준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문을 사이에 두고 강서연은 임나연이 얼마나 약한 척하며 여우짓을 하고 있을지 눈에 훤했다. 그 생각만 하면 가슴에 가시가 찔린 듯 아팠다.“방금 뭐라고 했어요?”잠깐의 침묵 끝에 갑자기 최연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 그게...”임나연이 다급하게 말했다.“서교 땅 프로젝트가 시작되었고 몇몇 담당자들이 기획안과 예산 보고서를 제출했다고요...”“그 얘기 말고요.”최연준은 펜을 내려놓고 팔짱을 낀 채 웃을 듯 말 듯 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그의 그윽한 두 눈을 마주한 임나연은 가슴이 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