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준이 고개를 숙였다.강서연이 그래도 여자의 표준 키였지만 최연준 앞에서는 발꿈치를 들어도 겨우 그의 어깨 정도 닿았다. 최연준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에게만 보여주는 따스한 눈빛을 보냈다.“내가 안 오면 이번 달 용돈이 없을 것 같던데?”그가 피식 웃었다.“그럴 리가요. 당신 용돈은 다 남겨뒀어요.”“정말?”“그럼요... 내가 계산해 보니까 당신 점심은 회사에서 챙겨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돈이 따로 필요 없고 옷도 내가 사주잖아요. 그리고 우리 지금 에덴에 살아서 집세 낼 필요도 없어요. 강주에서 살 때보다 훨씬 여유로워졌어요. 의식주와 교통 중에 그냥 교통비만 필요하겠더라고요.”강서연이 손가락을 접으며 계산했다.“지금 타고 다니는 저 차는 소배기량이라서 기름도 엄청나게 아껴요. 계산해 보니까 한 달에 10만 원이면 충분할 거예요! 그래서...”그녀는 활짝 웃으며 5만 원짜리 두 장을 꺼내 그의 셔츠 주머니에 넣었다.“이번 달 용돈이에요. 아껴 써요.”최연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역시 그의 예상대로 담뱃값은 없었다. 그는 속으로 슬피 울부짖었지만, 강서연의 귀여운 눈빛을 마주한 순간 억지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왜 그래요?”강서연은 우쭐거리며 그를 쳐다보았다.“액수가 마음에 들지 않아요?”“아니, 아니.”최연준이 입을 삐죽거렸다.“그... 침대 시트 아직 못 샀다며?”강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신난 발걸음으로 침대 시트를 보러 갔다.최연준은 셔츠 주머니 속 5만 원짜리 두 장을 움켜쥐었다.‘이번 달은 차를 적게 운전해야겠어. 그냥 경수 아저씨한테 차랑 운전기사를 보내달라고 할까? 이 10만 원은 내 비상금으로 몰래 숨겨야 해!’...“경섭 씨, 물어볼 게 있어요.”이튿날 최연준은 육경섭을 사무실로 불렀다.그런데 육경섭의 상태도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그는 사무실로 들어오자마자 소파에 털썩 주저앉더니 멍하니 천장만 올려다보았다. 최연
“나석진이랑 계약하는 거 말이에요. 설마 잊은 거 아니죠?”육경섭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그가 자존심까지 버려가며 립스틱 300개와 바꿔온 것이다.“잊지 않았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최연준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육경섭은 그를 보며 머뭇거렸다.“정말이에요? 그런데 어진 엔터테인먼트라는 회사도 나석진이랑 계약하려고 한다고 들었어요. 사적으로 여러 번이나 연락했다던데요?”최연준이 화들짝 놀랐다.‘엄마 회사잖아? 엄마도 나석진 씨한테 관심이 있었어?’만약 두 회사가 정말로 경쟁한다면 그의 입장이 곤란해진다.“그냥 소문일 수도 있잖아요.”최연준이 덤덤하게 말했다.“내가 한번 알아볼게요.”“네, 고마워요.”육경섭이 크게 웃었다.립스틱 300개인데 낭비해서는 절대 안 되었다....에덴으로 돌아온 최연준이 안방으로 들어갔을 때 강서연은 한창 침대 시트를 펴고 있었다. 작은 체구의 그녀가 허리를 비틀거리며 침대를 정리하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유혹적이었다. 그는 제 자리에 넋을 놓고 서 있었다...최연준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인기척을 들은 강서연이 고개를 돌리자, 최연준의 그윽한 두 눈과 딱 마주쳤다.“왔어요?”그녀가 순진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방금 새 시트 폈어요. 어때요?”지금 최연준의 눈에는 시트고 뭐고,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그녀와 이 침대 위에서 뜨거운 시간을 보내는 상상뿐이었다.“응, 괜찮네.”그는 시트를 대충 흘겨보았다.“무늬는 어때요?”“예쁘네.”그녀를 쳐다보는 최연준의 두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연준 씨, 우리...”“여러 개 더 사면 좋겠다.”그는 갈라진 목소리로 한마디 하고는 그녀를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강서연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의 심장박동이 점점 빨라졌고 그녀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여러 개 사서... 뭐 하려고요?”“두고두고 쓰는 거지.”최연준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낮게 깔린 목소리가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하나 더 사긴 했어요..
최연준이 놀란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헝클어진 머리와 비몽사몽한 모습이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만약 회사에 별다른 일이 없었더라면 아마 계속했을 것이다...“진짜 도시락을 가져다줄 거야?”그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강서연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최연준은 입꼬리를 씩 올리며 음흉하게 웃었다.“알았어.”그가 나지막이 말했다.“점심에 기다릴게.”점심에 밥을 먼저 먹을지, 그녀를 먼저 먹을지...최연준이 집을 나서자, 강서연은 주방에서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한창 청소하던 박경실은 갑자기 풍겨오는 맛있는 냄새에 저도 모르게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강서연은 아주 능숙하게 반찬과 찌개를 만들고 도시락통에 담을 준비를 했다.“서연 씨, 무슨 요리를 했어요?”박경실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냄새만 맡아도 입맛이 당기는데 먹으면 엄청 맛있을 것 같아요.”강서연이 환하게 웃더니 갈비찜 한 점을 접시에 담아 그녀에게 건넸다. 박경실은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하도 먹어보라고 하여 한입 맛보았다. 간도 딱 맞았고 전혀 느끼하지도 않았다.박경실은 웃으며 감탄했다.“전 이 나이를 먹어도 요리 솜씨는 서연 씨보다 한참 못해요.”“그럼, 앞으로는 맛있는 거 많이 해줄게요.”“그건 안 되죠!”박경실이 화들짝 놀랐다.“절 받아주신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 데 밥까지 해달라는 건 너무 염치없어요. 밥은 제가 해서 두 분께 대접해야죠...”“아주머니.”강서연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를 볼 때면 자꾸만 어머니가 떠올랐다. 학대를 받은 적이 있고 의지할 데도 없이 쓸쓸하게 살아온 것만으로 충분히 가여운데 말년까지 비참하게 보내게 해서는 안 되었다.“저한테는 이러시지 않으셔도 돼요. 우리가 남입니까?”강서연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우리 집에는 그런 규칙이 없어요. 게다가 아주머니는 어른이시고 경수 아저씨도 연준 씨 어릴 적부터 봐 온 분이시잖아요. 저희가 두 분을 존중해야 하는 건 당연한 거예요.”“서연 씨...”박경실은 울컥하여 목이 멨
강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바로 집을 나섰다.최연준은 그녀에게 특별한 출입 카드를 주었다. 프런트에 가서 예약하지 않아도 이 카드만 있으면 건물의 그 어느 층도 다 갈 수 있었다.그녀는 그 카드로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맨 꼭대기 층에 도착했다. 그의 사무실에 들어가려던 그때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구체적인 내용은 이러합니다. 이 보고서도 한번 보세요.”강서연이 잠깐 멈칫했다.‘목소리가 익숙한 게 누구더라... 그 도도한 임나연 씨? 임나연 씨가 연준 씨 사무실에 있어? 어쩐지 오는 길에 문자를 몇 통이나 보내도 답장이 없더라니.’“연준 씨.”임나연의 목소리가 가늘어졌다.“이번 주에 프랑스 쪽이랑 계약하는 거 있잖아요. 내가 다 준비 마쳤어요.”최연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이 모든 게 다 연준 씨를 위한 거예요.”임나연이 속상한 얼굴로 말했다.“지금 같이 일할 이 기회를 아주 소중히 생각하고 있어요. 연준 씨, 내가 내 마음을 꺼내 보여야 믿겠어요? 좋아요, 연준 씨만 고개를 끄덕인다면 지금 당장 꺼내서 보여줄게요.”‘역겨워!’강서연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물론 그녀는 최연준을 누구보다 더 믿었다. 하지만 최연준이 다른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고 해서 다른 여자들이 매달리지 않는다는 법은 없었다.강서연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도시락통을 어찌나 꽉 쥐었는지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였다.최연준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문을 사이에 두고 강서연은 임나연이 얼마나 약한 척하며 여우짓을 하고 있을지 눈에 훤했다. 그 생각만 하면 가슴에 가시가 찔린 듯 아팠다.“방금 뭐라고 했어요?”잠깐의 침묵 끝에 갑자기 최연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 그게...”임나연이 다급하게 말했다.“서교 땅 프로젝트가 시작되었고 몇몇 담당자들이 기획안과 예산 보고서를 제출했다고요...”“그 얘기 말고요.”최연준은 펜을 내려놓고 팔짱을 낀 채 웃을 듯 말 듯 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그의 그윽한 두 눈을 마주한 임나연은 가슴이 두
이젠 임나연도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왜 그래요?”최연준은 그녀를 싸늘하게 쳐다보았다.“아까 마음을 꺼내서 보여주겠다면서요?”“연준 씨...”임나연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내가 대신 꺼내줄까요?”“아니, 내 말은 연준 씨를 위해 모든 걸 바칠 수 있다는 말이죠.”임나연의 목소리가 한껏 낮아졌다.“마음을 꺼내서 보여주겠다는 건... 그냥 비유를 그렇게 한 거죠...”임나연이 횡설수설했다.“연준 씨, 그 말도 못 알아들어요?”“정말 미안하네요.”최연준이 가볍게 웃었다.“나는 항상 문자적 의미로 이해하거든요. 아까 그렇게 얘기하니까 진짜 마음을 꺼내서 보여주려는가 했잖아요.”“하.”임나연이 멋쩍게 말했다.“지금 농담하는 거죠?”“가깝지 않은 사람과는 절대 농담 안 해요.”최연준은 싸늘한 표정으로 살벌한 분위기를 내뿜었다. 임나연은 입술을 깨물고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그를 째려보았다.“아직도... 나랑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고 생각해요?”그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할아버지께서 우리 결혼을 밀어붙이시겠다고 하셨어요.”최연준이 눈살을 찌푸린 그때 강서연이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 최연준은 그녀를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는가 싶더니 이내 시간을 확인했다.‘온 오전 바삐 일하느라 점심시간인 것도 몰랐네. 어떡하지!’“서연아...”그는 입술을 적시며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임나연이 그의 사무실에 있는 걸 그녀가 보고 말았다.“배고프죠? 오늘 연준 씨가 좋아하는 반찬으로 싸 왔는데, 얼른 와서 먹어요.”강서연이 화를 내지 않자, 그의 불안했던 마음도 조금은 진정되었다.그는 강서연을 보며 다정하게 웃었다. 마치 이 세상에 그녀만 존재하는 것 같았고 임나연은 진작 없는 사람 취급당했다.강서연은 도시락통에 담아온 반찬을 하나하나 꺼낸 후 깨끗한 수저를 최연준에게 건넸다. 최연준은 고분고분 소파에 앉아 갈비찜 하나를 집어 그녀에게 먼저 먹여주었다.그녀는 웃으며 갈비찜을 받아먹고는 찌개 한 숟가락을 떠서 그
강서연은 고개를 들고 난감한 기색을 드러냈다.“다음 주는 안 될 것 같은데요... 내일부터 어진 엔터테인먼트에 출근해요.”“벌써?”“네.”그녀가 웃으며 대답했다.신문사의 일을 인수인계한 후 김자옥은 하루에 전화를 세 통씩 하며 빨리 출근하라고 했다. 그녀는 며칠 더 쉬고 싶었지만 일이 먼저였다. 어쨌거나 그녀도 김자옥처럼 성공한 여성이 되고 싶었으니 말이다.“그건... 큰 문제 아니야.”최연준이 생각하다가 말했다.“엄마한테 말해서 하루 휴가 주라고 하면 돼.”강서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그래도 돼요?”“왜 안 돼?”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아주 중요한 연회라서 당신이 반드시 참석해야 해.”강서연은 중요하다는 그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그녀는 자신이 서교 땅의 진짜 주인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최연준이 중요하다고 한 건 임나연도 참석하기에 임나연과 함께 사람들 앞에 나서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생각했다.강서연의 얼굴에 행복이 담긴 보조개가 나타났다....며칠 후, 어진 엔터테인먼트 대표 사무실.김자옥은 팔짱을 끼고 매서운 눈빛으로 눈앞의 남자를 째려보았다. 남자의 차갑고 잘생긴 얼굴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엄마...”김자옥은 더는 그를 거들떠보지 않고 컴퓨터만 들여다보았다.최연준은 평생 두 여자에게만 고개를 숙였다. 한 사람은 아내였고 다른 한 사람은 어머니였다.“엄마, 제 요구가 과한 것도 아닌데 왜 허락하지 않으세요?”“안 된다면 안 되는 거야!”김자옥이 강하게 밀어붙였다.“계약 행사 때 진짜 서연이랑 가고 싶단 말이에요.”“하지만 우리 회사에 서연이가 해야 할 일이 산더미야!”김자옥이 목청을 높였지만, 최연준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딱 반나절만 데리고 있을게요.”“30분도 안 돼!”“엄마, 너무 억지 부리시는 거 아니에요?”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김자옥은 그를 내쫓으려 했다.하지만 최연준의 키가 하도 커서 태권도 챔피언인 그녀마저도 밀기에는 힘에 부쳤다.
“오늘 스케줄이 어떻게 돼?”“오후 1시에 두 예능 스타와 면담이 있고 2시 반에는 회사 내부 회의가 있어요. 그리고 3시 10분에서 5시까지 몇몇 중요한 언론사와 미팅이 있는데 협상을 타결해야 합니다. 저녁 7시에는 연예인 매니저와 저녁 식사 약속이 있어요. 장소는 멘하 센터의 회전 레스토랑입니다.”강서연이 조리 정연하게 보고했다. 비록 출근한 지 며칠밖에 되지 않았지만 세심하고 꼼꼼하며 무슨 일이 생겨도 당황하지 않고 냉정하게 처리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모든 일을 깔끔하게 안배했고 방안도 아주 잘 써서 업무 능력을 인정받았다.김자옥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봐도 사람을 참 잘 뽑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바쁘게 움직이는 강서연을 보고 있자니 최연준은 마음이 아팠다.아침에는 밥 먹을 시간도 없이 급히 나갔고 늦은 밤까지 계획서를 작성하느라 다크서클이 선명한 채로 일어나는 일도 자주 있었다.강서연은 어마어마한 양의 업무량도 전부 감당했지만 그걸 바라보는 최연준은 받아들이지 못했다.“엄마.”그가 마른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서연이 지금 많이 힘들잖아요. 계약 행사에 함께 가려는 건 쉬게 하려는 거예요. 잠깐 쉬고 나면 정신도 맑아지고 업무 효율도 높아질 거예요.”최연준과 눈이 마주친 강서연은 히죽 웃다가 이내 다시 시선을 늘어뜨렸다. 하지만 김자옥의 귀에는 강서연이 지금 많이 힘들다는 말밖에 들리지 않았다.“서연아.”그녀가 부드럽게 물었다.“요 며칠 일하는 게 힘들었어?”“아니요.”강서연이 웃으며 말했다.“매일 충실하게 보내서 너무 좋았어요.”김자옥은 그녀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말했다.“난 항상 일하는 속도가 빠르고 자기중심적이라 가끔 다른 사람을 헤아리지 못해... 속상한 게 있다면 절대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나한테 말해, 알았지?”강서연은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여기 업무 환경도 좋고 대표님 옆에서 많은 걸 배울 수 있어서 좋아요.”최연준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늘 부하를 사정없이
계약 행사의 규모가 그리 크진 않았지만, 참석한 사람들 모두 최연준이 사업할 때 왕래하는 신분이 귀한 사람들이었다.서교 땅 프로젝트는 여러 면의 이익과 직결되어 있었고 이번 계약은 주로 몇몇 건축 회사와 디자인 회사와의 계약이었다. 그리고 이 계약서에 강서연이 사인해야만 그 효력이 발생한다.강서연은 한창 대기실에서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의 메이크업 담당자는 글로벌 화장품 브랜드의 수석 메이크업 아티스트였고 비서가 밀고 온 옷걸이에는 눈이 부시게 빛나는 고급 드레스가 걸려있었다. 전부 그녀를 위해 맞춤 제작한 것이라 단 한 벌 뿐이었다.스타일리스트들은 메이크업에 어울리는 옷을 고르고 있었고 강서연은 펜을 움직이며 서류 몇 장에 사인했다.그때 최연준이 노크하고 들어왔다. 무척이나 진지한 강서연의 모습을 바라보는 최연준의 두 눈에 사랑이 가득 담겨있었다. 그는 그녀 옆에 앉아 스타일리스트들에게 손을 흔들며 그만 나가보라고 했다.방 안에는 최연준과 강서연 단둘만 남게 되었다.“다 사인했어요.”강서연은 계약서를 그에게 건넸다.“그래.”최연준은 계약서를 잘 챙긴 후 그녀를 쳐다보며 다정하게 말했다.“이게 다 뭔지 알아?”“그럼요. 조항 하나하나 다 꼼꼼하게 확인했어요. 아무 문제 없어요!”최연준이 피식 웃었다.사실 그는 계약서를 꼼꼼하게 확인한 후에 그녀에게 사인하라고 했다. 그런데 세심한 성격의 그녀는 또 한 번 빠르게 확인했다. 역시 그녀는 그가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머리가 좋았다.“이해가 안 가는 게 있는데...”강서연이 눈살을 찌푸렸다.“이건 연준 씨네 회사 프로젝트 아닌가요? 그런데 왜 나한테 사인하라고 하는 거예요?”“왜냐하면...”그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프로젝트마다 이익과 리스크가 공존하잖아. 당신한테 사인하라고 한 건 수익을 나누기 위해서고 또... 리스크가 생기면 내 편에 서서 나랑 함께 이겨내 주길 바라서 그랬어.”“그건 당연하죠.”강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팔짱을 꼈다. 눈망울이 어찌나 맑고 순수한지 마
병원 응급실 밖.배경원은 의자에 주저앉아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충혈된 눈으로 응급실 문을 응시하며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한때 당당했던 그의 어깨는 지금 축 처져 있었다. 뒷모습만으로도 절망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배경원은 주먹을 단단히 쥐었지만, 온몸은 떨리고 있었다.적막이 흐르는 복도는 불길한 정적마저 감돌았다.결국, 억눌렀던 감정이 터져 나와 눈물이 조용히 뺨을 적셨다.“경원아!”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배경원이 고개를 들자, 최연준과 강서연이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질 뻔한 배경원을 최연준이 재빨리 부축했다.강서연은 응급실 문을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치료는 연희 씨와 신석훈 씨의 제자들이 맡고 있어요. 모두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이에요. 수정 씨는 평소 건강을 잘 관리하셨으니 금방 회복될 겁니다.”“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최연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갑자기 병세가 심각해진 거야? 그리고 윤아는...”배경원은 떨리는 손으로 최연준의 팔을 붙잡으며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셋째 형님, 제발 윤아를 찾아주세요. 딸은 사라지고 아내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어요. 둘 다 잃으면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그런 바보 같은 말 하지 마세요. 둘 다 무사할 겁니다.”강서연이 단호히 말했다.“윤아는 우리 집안의 며느리예요. 누가 윤아를 해치려 한다면 최씨 가문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어요. 그 결과가 어떤 건지 모를 리도 없고요. 그리고...”강서연은 순간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을 이어가려다 복도 끝에서 배현진이 소피아와 함께 급히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는 말을 삼키고 배현진을 노려보았다.“연준 아저씨, 서연 이모...”배현진은 어딘가 죄책감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배현진은 배경원에게 다가가 팔을 살며시 부축하며 조심스레 말했다.“아버지...”그 순간, 배경원이 배현진의 뺨을 내려쳤다.배경원은 분노로 가득 찬 눈빛으로 배현진을 노려보며
임수정은 갑작스러운 기침을 하며 침대 옆 경보 벨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소피아에 의해 단호히 막혔다.“사모님, 제 말을 듣는 게 좋으실 겁니다.”소피아는 부드럽지만 섬뜩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제가 만든 음식이 그렇게 형편없지도 않고 독을 넣을 만큼 제가 어리석지도 않아요. 안심하세요. 이 모든 재료는 사모님의 건강을 생각하며 준비한 겁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온 이유는 진심으로 사모님을 돌보고 싶어서예요.”임수정은 가슴을 움켜쥔 채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임수정의 눈엔 불신과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요즘 배경원은 외출이 잦아졌고 이유를 묻자, 회사 일 때문이라며 안심하라는 대답뿐이었다.그럼에도 임수정의 마음속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점점 커져만 갔다.깊게 숨을 들이마신 임수정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겉으론 소피아의 말을 따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사모님, 잘 생각하셨어요.”소피아는 임수정에게 쿠션을 건네며 은은하게 웃었다.“우리 결국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될 사이잖아요. 지금부터 제 존재에 익숙해지시는 게 좋을 겁니다.”“흥! 내 아들이 눈이 먼 게 분명해.”임수정은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떻게 너 같은 사람에게 속을 수 있는지...”“저를 깔보지 마세요. 저는 이혼하고 아이도 데리고 있지만, 현진 씨를 향한 제 진심은 변하지 않아요. 저는 현진 씨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누구와는 달리 겉으론 순수한 척하면서 남자를 유혹하는 짓은 안 한다는 건 알아주셨으면 해요.”“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임수정은 언성을 높이며 노려보았다.소피아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더욱 날카롭게 말했다.“사모님, 제가 말하는 사람은 바로 사모님의 그 옛날 며느리가 될 뻔했던 그 사람이에요.”“헛소리하지 마!”임수정은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그 일은 우리 배씨 가문이 송윤지에게 잘못한 일이야. 그 애의 명예를 더럽히지 마.”“사모님,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없는 법이에요.”소피아는 태연한
“너와 상관없다고?”임우정은 다급하게 외쳤다.“네 형부가 이미 윤아의 통화 기록을 조사했어. 윤아가 실종되기 전에 조 회장이랑 통화했던 게 드러났다고! 지강아, 너와 조 회장이 어떤 관계인지 나한테도 숨길 작정이었어?”임지강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사건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머릿속에서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그래요. 저와 조 회장이 가까운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와 배윤아 사이엔 원한이라곤 없잖아요... 누나, 왜 저를 의심하는 거예요?”“지강아!”임우정의 목소리가 더욱 절박해졌다.“너, 송윤지 일 때문에 배현진을 미워하는 건 알아. 하지만... 네 말대로라면 윤아한테까지 증오를 전가하면 안 되잖아!”“누나, 정신 좀 차리세요!”임지강의 목소리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어둠이 깃든 그의 얼굴은 단호함을 더했다.“무슨 근거로 저를 의심하시는 건데요?”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임지강의 강경한 태도에 임우정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한참 후, 임우정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렇다면... 배씨 가문을 좀 도와줄 순 없겠니?”임지강은 코웃음을 치며 전화를 끊었다.수화기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리자 맑고 투명한 송윤지의 눈빛과 마주쳤다.“배씨 가문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요양원 병실 문 앞.소피아의 하이힐 소리가 텅 빈 복도를 울리며 퍼져 나갔다. 소피아의 손엔 보온 도시락이 들려 있었고 문 앞을 지키는 경호원들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제가 사모님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안으로 들여보내 주세요.”경호원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말없이 서 있었다.“이건 도련님께서 지시하신 거예요.”소피아는 휴대전화를 꺼내 그들에게 일부러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실래요? 아시다시피 사모님 건강이 좋지 않으세요. 세 끼 제대로 챙겨 드시지 못하면 여러분들이 책임지실 겁니까?”경호원들은 난처한 얼굴로 머뭇거리다 결국 길을 내주었다.“이제야 말이 통하네.”소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앞으로
송윤지는 겨우 한 모금을 마시고 사레가 들어 술을 뱉을 뻔했다. 마신 술이 얼굴에 스며든 듯 송윤지의 뽀얀 볼은 어느새 매혹적인 와인빛으로 물들었다.임지강은 그런 송윤지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임지강은 송윤지에게 다가가 가볍게 등을 두드리며 입가에 묻은 술자국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임 대표님...”송윤지는 조심스럽게 임지강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 애썼다.하지만 임지강은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아 통유리창 앞까지 데려갔다.송윤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 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깊고 짙은 밤하늘에 수많은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잘게 부서진 불빛들이 반짝거렸다.불꽃은 색과 모양을 끊임없이 바꾸며 꿈같은 광경을 만들어냈다.송윤지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마음에 들어요?”임지강의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송윤지의 귀에 스며들었다.“잠깐 눈 좀 감아 봐요.”“네?”임지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제가 별을 따다 줄게요.”마지막 불꽃이 빛의 궤적을 남기며 밤하늘로 사라지고 다시 평온한 고요가 찾아왔다.송윤지는 미소를 지으며 임지강의 말을 따라 눈을 감았다. 그러자 따뜻하면서도 약간 서늘한 남자의 손길이 송윤지의 손을 잡더니 손바닥 위에 무언가가 놓이는 느낌이 들었다.송윤지는 깜짝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손에는 정말로 ‘별’이 있었다.“이건...”그것은 목걸이였다. 펜던트는 별 모양으로 깎아낸 다이아몬드로, 완벽하게 다듬어져 찬란한 빛이 퍼지고 있었다.“제가 해줄게요.”임지강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이건 너무 비싼 거라서 제가...”“받아줘요.”임지강의 눈빛은 따스하고도 단호했다.“그리고...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송윤지는 고개를 숙였다. 귀 끝까지 붉어진 송윤지의 얼굴은 마치 열이 오른 듯했다.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의 귓가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살짝 정리해 주었다.“사실,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저 윤지 씨 좋아
소피아는 약속한 시간에 카페에 도착하자마자 창가에 앉아 있는 낚시 모자를 쓴 중년 여성을 발견했다.소피아는 조용히 걸어가 밝게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안녕하세요. 혹시... 허운주 선생님이신가요?”허운주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초췌한 기색이 역력했다.소피아는 직원에게 뜨거운 우유 한 잔을 주문하고 허운주 앞에 놓인 진한 커피를 치우며 부드럽게 말했다.“허 선생님, 이 나이에 이렇게 진한 커피는 드시면 안 돼요. 건강을 꼭 챙기셔야죠.”“고맙습니다...”허운주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절 찾아오신 이유가 뭘까요?”허운주는 천천히 눈을 들어 소피아를 바라봤다.소문에 따르면, 소피아는 현재 배현진의 연인이며 이혼 후에 아이를 키우면서도 배현진의 마음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사람이었다.허운주는 소피아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직감했고 소피아가 도움을 준다면 송윤지 같은 사람을 무너뜨리는 건 쉬운 일이라고 확신했다.“제가...”허운주는 입술을 핥으며 머뭇거렸다.“어떻게 말씀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네요.”소피아는 잠시 멈칫하더니 곧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허 선생님은 현진 씨의 선생님이시잖아요. 그 특별한 인연은 현진 씨도 평생 기억할 거고 저 또한 마찬가지예요. 저희는 모두 선생님을 존경하고 있어요. 그러니 무슨 일이든 편하게 말씀하세요.”“저는 국제 유치원에서 어쩔 수 없이 사직하게 됐어요.”허운주는 이마를 짚으며 미간을 깊이 찡그렸다.소피아는 놀란 듯했지만, 최근 일어난 상황을 대략 알고는 있었다. 우수 교사 선발에서 허운주가 송윤지에게 패했다는 소식은 소피아에게도 전해졌다. 자존심 강한 허운주로서는 그 일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소피라는 눈을 굴리며 허운주를 어떻게 이용할지 계획하고 있었다.“허 선생님,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소피아는 부드럽게 허운주의 손등을 토닥이며 말했다.“저를 딸이라고 생각하시고 속상한 일 있으면 다 털어놓으세요. 제가 도울 수 있
회의실은 단숨에 고요 속에 잠겼다. 강렬한 존재감의 인물이 문턱을 넘어서자, 방 안은 서늘하면서도 압도적인 기운으로 가득 찼다.원장은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 단숨에 그의 곁으로 다가가 어깨를 툭 치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왜 이제야 온 거야?”임지강의 눈가에는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그러나 그의 시선이 허운주에게 닿는 순간, 그 미소는 천천히 사라지고 대신 날카롭고 차가운 눈빛이 자리 잡았다.“으흠!”원장은 자세를 가다듬으며 목소리를 높였다.“오늘 이 자리에서는 투표 결과를 발표하는 것뿐만 아니라 매우 중요한 소식을 전하려고 합니다.”원장은 한 장의 서류를 꺼내 들었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유치원의 공식 도장과 함께 임지강의 힘찬 서명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임 대표님께서 우리 유치원에 10억을 투자해 주셨고 국제 유치원의 최대 주주가 되셨습니다. 유아 교육을 위해 아낌없이 지원해 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희도 초심을 잃지 않고 임 대표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이내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송윤지는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얼굴에 붉은 기운이 번지자 뜨거운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입가에 번진 미소는 감추기 어려웠다.임지강은 잔잔한 미소를 띤 채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제가 이 유치원의 주주가 된 이상, 앞으로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우리 국제 유치원의 이익을 위해서일 것입니다.”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허운주를 똑바로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래서 오늘, 교사 팀을 정비하려고 합니다.”허운주는 본능적으로 두 걸음 물러나며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이곳에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임지강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자신의 가치관조차 바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아이들을 올바르게 이끌 수 있겠습니까?”허운주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저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가요?”“여기 있는 사람 중
원장의 표정이 단단히 굳어졌다.“허 선생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오늘 표 집계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투명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조작이라니, 그 말은 제가 개입했다는 뜻인가요?”“원장님, 제가 어떻게 감히 원장님을 의심하겠습니까?”허운주는 억지 미소를 띠며 비꼬듯 말했다.“하지만 표 차이가 이렇게 크게 나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설령 원장님께서 관여하지 않으셨더라도, 누군가 뒤에서 무슨 일을 꾸몄을 가능성은 충분하지 않겠습니까?”“허 선생님...”원장은 화나 치밀어 올라 말을 잇지 못했다. 막무가내인 사람들과 대화하는데 익숙하지 않았다.“허 선생님, 하신 말씀에 대해 책임지셔야 합니다.”송윤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송윤지는 허운주를 담담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저는 단 한 번도 허 선생님께 폐를 끼친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우수 교사 선발 역시 모든 과정이 투명하고 공정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제가 정말 무슨 일을 꾸몄다면, 이렇게 공개적으로 표를 집계했겠습니까?”허운주는 송윤지를 노려보며 속으로 분노를 억눌렀다.평소 조용하고 소극적인 송윤지를 쉽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의 송윤지는 논리 정연한 주장으로 상대의 도발에도 굴하지 않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송윤지를 새롭게 보게 되었고 문밖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임지강의 입가에는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임지강은 회의실 밖에서 모든 상황을 눈여겨보고 있었다.특히 송윤지의 표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임지강은 마치 자신이 상을 받은 것처럼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곁에 있던 부하 직원조차 그의 변화를 놀라워하며 말했다.“송 선생님은 정말 대단하시네요.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었다. 송윤지는 변하지 않았다. 그저 예전에 자신과 함께 있을 때는 너무 조심스러워 본래의 자신을 숨겼을 뿐이었다.“임 대표님, 허 선생님에 대해서는 어떻게 처리할까요?
“지난번에 내가 해외 시장을 축소하라고 했지만, 당신 아들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임수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결국 문제는 그 여자가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거야... 그 여자는 현진이를 부추겨 또 다른 일을 꾸밀 거고 현진이는 분명히 그 여자의 말을 들을 거야.”“그러니까 그들이 더 큰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임수정은 딸을 바라보며 말했다.“윤아야, 네가 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회사들을 꽉 잡고 있어야 해! 너 혼자 힘들면 군성이랑 의논해도 되고 군형이나 소유의 도움을 받아도 돼. 네가 동의하지 않는 한, 네 오빠는 너한테서 단 한 푼도 가져갈 수 없어. 이해했지?”“윤아야.”임수정은 딸의 손을 꼭 잡았다.“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이 모든 재산은 우리 조상들이 쌓아온 거야. 절대 우리 세대에서 무너져선 안 된다!”“네, 저 이해했어요.”배윤아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말했다.“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오빠가 하루빨리 제정신을 차려서 우리가 예전처럼 가족으로 지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임수정은 힘없이 눈을 감았다. 기침하며 숨을 고르는 임수정의 모습이 안쓰럽기만 했다.그러나 그 순간, 문밖에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소피아가 복도 모퉁이에 숨어 임수정의 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벽을 짚고 있던 소피아는 주먹을 꽉 쥐었고 마치 벽을 뚫을 듯 힘을 주고 있었다.방 안에서 나눈 대화는 모두 소피아의 귀에 생생히 들렸다.오늘 소피아가 임수정을 찾아온 건, 회사 본사에서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을지 알아보려는 목적이었다. 만약 가능하다면 은행 대출을 받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상상도 못 한 일이 벌어졌다.지금 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재산 전부가 이 어린 소녀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여보세요, 소피아!”그때, 배현진이 전화를 걸어왔다.“지금 엄마 집에 있어? 나 일이 아직 안 끝나서 조금 있다가 가려고. 엄마한테 전해줘.”“그럴 필요 없어.”소피아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임수정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배경원은 막 씻은 딸기를 가져왔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딸기의 끝부분을 잘라 임수정의 입에 넣어주었다.결혼한 지 이렇게 오래되었는데도, 두 사람의 애정과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는 여전히 처음과 같았다. 그들의 관계는 많은 사람의 부러움을 사고 있었다.배윤아는 방으로 들어오기 전에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엄마를 위해 영양제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새로 그린 그림도 품에 안고 있었다.“엄마, 아빠, 저랑 군성이가 이번에 현실적인 내용을 담은 만화를 하나 출간하려고 해요. 내용은 한 부부가 젊었을 때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다룬 거예요... 사실 주인공 부부가 바로 엄마, 아빠예요! 보세요, 이렇게 그렸는데 괜찮죠?”임수정과 배경원은 딸이 그린 그림을 보며 얼굴에 자부심이 가득했다.부부는 원래 대부분의 기대를 아들에게 걸고 있었다. 이는 남녀 차별 때문이 아니라 배윤아의 성격이 어릴 적부터 세상일에 무심하고 경쟁을 피하는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가문의 계승자로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딸이 오히려 아들보다 더 믿음직스럽다.“윤아야.”임수정은 딸의 손을 잡으며 눈빛에 깊은 의미를 담아 말했다.“엄마가 너에게 꼭 전해주고 싶은 게 있어.”“뭔데요?”배윤아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임수정은 베개 밑에서 갈색 서류봉투를 꺼냈다. 그 안에는 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핵심 자료들이 들어 있었다.“이것뿐만 아니라, 본사의 도장도 있어.”배경원은 도장까지 꺼내 배윤아에게 건넸다. 배윤아는 깜짝 놀라 귀중한 물건들을 손에 들고 어찌할 줄 몰라 하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아빠, 엄마, 이건 도대체...”“우리도 이제 나이가 들었고 몸 상태도 좋지 않아. 요양원에 머무는 동안은 회사로 돌아가 직접 관리할 수도 없을 거야.”배경원은 평소 장난스러웠던 모습을 거두고 진지한 얼굴로 배윤아를 바라보았다.“윤아야, 엄마, 아빠는 이 모든 것을 너에게 맡기기로 했다. 네가 책임을 져야 해.”배윤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