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연을 데리고 너의 어머니를 만나봤어?”최재원이 물었다.“만나봤어요. 어머니가 서연이를 너무 좋아해요.”최연준이 대답했다.“흠!”최진혁이 좋은 뜻을 품지 않고 웃었다.“연준아. 그 아가씨 대단한 분이네! 무슨 방법을 썼기에 김 대표처럼 까다로운 사람도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일까?”최연준은 얼굴이 어두워졌다.‘작은삼촌이 일부러 이렇게 말하면 할아버지께서는 서연이가 수단이 있는 사람이라고 오해할 수 있잖아요.’이미 강서연의 출신에 불만이 많았던 최재원이 수단이 있다는 딱지까지 붙이면 영감님의 인정을 받기는 더욱 어려워진다.최연준은 심호흡하고 설명했다.“서연이가 어머니랑 잘 지내는 건 사실이에요. 이 부분에 있어서는 작은삼촌보다 훨씬 나아요!”“너 지금 뭐라고 했어?”최진혁은 인상을 구겼다.“네가 말하면 말했지, 어째서 나랑 엮이게 만들어!”“저는 그냥 사실을 말하는 거예요.”최연준은 느긋하게 펜을 돌리면서 말했다.“작은삼촌도 우리 어머니랑 몇 년을 알고 지냈는데 아직도 어떤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 저의 어머니는 좀 까다롭게 굴지만 사람 보는 눈은 있어요. 작은삼촌은 여기서 이간질하기보다 서연이한테 잘 배워서 어머니랑 어떻게 잘 지낼 수 있는지 생각해 보세요. 그게 앞으로 발전하는 데도 유리하지 않겠어요?”최연준의 말은 칼같이 가슴을 찔렀다.“너, 이 버릇없는 자식!”최진혁은 테이블을 세게 치고 너무 급해서 속마음에 있던 욕까지 내뱉었다.“어른한테 지금 이게 할 소리야?”최재원은 그를 한 번 훑어봤다.최진혁은 그제야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매우 불만이었다.“내가 왜 네 엄마랑 친하게 지내야 하지? 내가 엮이는 일도 없는데!”“그래요? 그러면 삼촌 장부의 이백억 원은 어떻게 채운 거죠? 김중 재단의 돈을 건들지 않았다고 맹세할 수 있어요?”“최연준! 네가 감히 내 장부를 뒤져?”“후계자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사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최상 그룹에서 당신은 저의 작
최진혁은 도무지 믿을 수 없어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계열사를 회수하든 파직시키든 너한테는 아무런 소용이 없구나!”최재원이 그를 싸늘하게 쳐다보았다.“앞으로는 회사에 나올 필요 없어! 지금 네가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도 애들한테 넘겨. 그리고 연준아, 이 일은 네가 알아서 잘 안배해. 인계받은 사람은 반드시 품행이 단정해야 해. 다시는 착오가 일어나지 않도록 말이야!”“네, 알겠습니다.”최연준이 가볍게 웃어 보였다. 이미 마음속에 그만의 계획이 다 있었다. 가족 중에 같은 또래가 많았는데 몇몇 사촌 형과 사촌 누나들이 행실이 점잖고 듬직하여 믿고 맡길만했다.“그리고 서교 땅은...”최재원이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연준이 네가 알아서 책임져. 그 어떤 실수도 있어선 안 돼.”“네.”최연준의 얼굴에 덤덤한 미소가 지어졌다. 지난번에는 단 두어 마디 말로 이사회에서 최진혁을 파면했고 이번에도 단 몇 마디 말로 최진혁을 프로젝트에서 내쫓았다.최진혁이라는 걸림돌이 하나 제거되긴 했지만, 아직 임씨 가문이 남아있었다.“할아버지.”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이 더는 참여하지 않는다면 임씨 가문은...”“임씨 가문은 우리한테 가장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파트너야.”최재원의 시선이 최연준에게 향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최재원이 그를 그윽하게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내가 너한테 나연이랑 결혼하라고 몰아붙이진 않았잖아. 그렇다고 해서 너도 강서연 하나만 원해서는 안 되지!”“할아버지...”“됐어. 나 피곤해.”최재원이 손을 내젓더니 지팡이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이 일은 더는 얘기하고 싶지 않아. 아무튼 일할 땐 나연이랑 호흡 잘 맞춰.”문 앞으로 다가간 최재원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강서연 그 여자가 너랑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될지도 몰라.”...주말, 강서연과 최연준은 두 어머니를 모시고 바람 쐬러 나갔다.마침 천고마비의 계절이라 하늘이 짙푸른 색을 띠었고 커다란 솜사탕 같은 구름이 둥실둥실 떠다
분위기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강서연은 고개만 푹 숙인 채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김자옥과 윤문희는 서로 눈짓을 주고받다가 가볍게 웃어 보이고는 눈치 있게 빠져주었다. 지금은 아무래도 둘만의 시간이 필요했다.“한서야, 우리한테 다른 데 좀 구경시켜 줘.”김자옥의 뜻을 단번에 이해한 방한서는 재빨리 나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하지만 배경원은 여전히 눈치 없이 제자리에 선 채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형, 형수님.”그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두 사람은 아무것도 준비할 필요 없어요. 제가 다 꾸며놓았으니까 언제든지 이사 오시면 돼요.”고개를 든 강서연은 최연준의 그윽한 눈빛과 마주쳤다. 최연준은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당신이 싫다면 나도 강요하지 않을게.”강서연은 잠깐 멈칫하다가 속으로 몰래 피식 웃었다.최연준의 진짜 신분을 알고 난 후로 최연준은 강요하지 않겠다는 말을 거의 입에 달고 살았다. 하지만 사실 그녀는 그가 가끔 강요하길 바랄 때도 있었다.예전에 최연준이 그녀에게 매달리던 때가 생각났다. 그땐 강요하지 않겠다는 말 따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녀가 반항할 때면 한 손으로 그녀를 제압하고 다른 한 손으로 옷의 단추를 벗겨버리곤 했다...한 사람을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는 몸이 가장 솔직한 답변을 해준다고 한다.강서연은 심장이 터져 나올 듯이 쿵쾅거렸고 마치 열이 나는 것처럼 얼굴이 빨개졌다.그녀의 생각을 알 리 없었던 최연준은 그녀가 거절하는 줄 알고 저도 모르게 실망한 기색을 드러냈다.‘이번에도 또 글렀네.’“괜찮아.”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마지못해 한마디 했다.“기다릴게.”‘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최연준의 얼굴에 쓸쓸함이 아주 잠깐 스쳤지만, 강서연은 그걸 단번에 캐치했다.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커다란 두 눈을 깜빡이면서 애교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뭘 기다리겠다는 거예요?”그가 어두운 목소리로 대답했다.“당신이 원할 때까지 기다릴게.”“내가 언제 싫다고 했어요?”최연준
“셋째 도련님의 아내가 되는 게 확실히 쉬운 일은 아니에요.”강서연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높은 곳에 있으면 외롭기 마련이다. 지위가 높은 그는 부귀영화를 누리는 동시에 그를 적대시하는 사람도 자연스레 많아진다. 최씨 가문 사람들은 그를 감히 건드리지 못하기에 그의 주변 사람들에게로 타깃을 돌렸다.“나 자신을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어요.”그녀는 그의 두 눈을 빤히 보며 말했다.“그리고 당신이 나 때문에 신경 쓰게 해서는 더더욱 안 되고요. 내가 강해져야만 자신을 지킬 수 있고 당신의 발목을 잡지 않아요. 난 당신의 가장 안정적인 마지막 방어선이 될 거예요.”“서연아...”최연준은 만감이 교차했다. 역시 그의 여자는 나약하고 쉽게 괴롭힘당하는 성격이 아니라 똑 부러지고 강했다.훌륭한 최연준과 전혀 뒤처지지 않는 강서연은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두 사람이 가장 잘 지내는 방법이었다. 서로 대등한 것이야말로 사랑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다.“저기 있잖아요...”배경원이 바짝 다가가 물었다.“그래서 여기 살겠다는 거예요, 말겠다는 거예요? 됐어요, 그만 질질 끌고 제가 대신 정해줄게요. 오늘 밤엔 그냥 여기 묵어요. 안 그러면 제가 정성스레 준비한 게 무용지물이 되잖아요.”“네?”강서연이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정성스레 준비했다고요?”배경원은 마른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머리를 긁적였다.“아니면... 저랑 같이 들어가 볼래요?”두 사람은 배경원과 함께 별장을 구경했다.양복 차림의 배경원이 서류까지 들고 어찌나 열정적으로 소개하는지 마치 부동산의 우수한 직원 같았다.그 모습에 최연준이 피식 웃었다.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면서 이토록 진지한 배경원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이 집은 저의 첫 계약 건이에요!”배경원이 자랑스럽게 넥타이를 당겼다.“그러니 만족할 만한 서비스를 제공해 드려야죠. 여길 보세요...”그가 가리키는 방향대로 고개를 돌린 강서연은 화들짝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이게 다 뭐
최연준이 마침 팔목에 끼고 있어 강서연은 두 팔찌를 서로 비교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완전히 똑같았고 방울의 디자인과 꽃무늬도 똑같았다.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연준은 강서연의 손을 잡고 바로 에덴을 나섰다.그들은 차를 타고 온천 리조트 근처에 도착했다. 옆에 바다가 있어 짭조름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차에서 내린 그들은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걷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아가씨 팔자가 괜찮네요. 음... 그런데 부부의 인연이 좀 부족해요. 두 사람 언젠가는 헤어질 거예요!”마음이 움찔한 강서연의 발걸음이 빨라졌다.할머니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다른 여행객들에게 손금을 봐주고 있었고 웃을 듯 말 듯 모든 걸 꿰뚫어 보고 있는 표정이었다.할머니의 목소리가 계속하여 들려왔다.“하지만 언젠가는 행복해질 거예요!”‘그때 우리한테도 똑같은 얘기를 해주셨는데?’“이 팔찌를 줄게요.”할머니는 방울이 달린 빨간 팔찌 두 개를 꺼냈다.“만약 나중에 헤어진다면 이 팔찌로 두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될 겁니다...”최연준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하, 그냥 누구한테나 다 똑같은 얘기를 하는구나!’그는 할머니의 말을 믿은 자신을 비웃었다. 그냥 가려던 그때 화가 난 강서연이 할머니에게 따지려 했다.“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지금 우리를 놀린 거잖아요.”“그만해, 됐어.”최연준이 피식 웃었다.“할머니도 먹고살아야 하니까 그러신 거겠지. 아니면 저 연세에 여기서 점이나 봐주겠어?”“하지만...”강서연이 입을 삐죽거렸다.“할머니 그 말 때문에 엄청 오래 걱정했단 말이에요!”최연준은 마음이 따뜻해졌다.사실 그도 걱정한 건 마찬가지였다. 가끔 밤에 자다 깨서 두 사람이 언젠가는 헤어질 거란 말만 떠올리면 다시 편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이제야 그 진실이 드러났다. 할머니는 점을 볼 줄 몰랐고 그냥 그들을 속인 사기꾼이었다.그는 할머니에게 속았다는 분노보다 마음속의 돌덩이가 사라진 것 같아 오
강서연과 최연준은 보금자리를 에덴으로 옮겼다.배경원이 전부 준비해 놓긴 했지만, 강서연은 그래도 직접 꾸며야 자기 집에 더 애착이 간다고 생각했다. 하여 신문사 일을 인수인계하고 어진 엔터테인먼트로 출근하기 전 오성 시내를 둘러보며 또 이것저것 사다 놓았다.물론 전부 최연준의 카드를 긁었다. 최연준이 회의를 하는 동안에도 거래 내역 문자를 끊임없이 받았다.최연준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지만, 얼굴에는 사랑 가득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뭘 이렇게나 많이 사? 예전에는 구매욕이 별로 없는 줄 알았는데... 이대로 계속 샀다간 이번 달 용돈이 줄어드는 거 아니야? 경섭 씨처럼 담배 살 돈도 없으면 어떡해?’최연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한창 보고를 올리던 총괄 담당자는 무심결에, 수심에 찬 그의 얼굴을 보고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도... 도련님?”총괄 담당자는 입꼬리를 파르르 떨며 억지로 미소를 쥐어짰다.“도련님, 제가 혹시 잘못 보고한 거라도 있나요?”하지만 최연준은 그의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머릿속에 온통 담뱃값 생각뿐이었다...‘안 돼!’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빠른 속도로 회의실을 박차고 나갔다. 회의실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져 방한서에게 시선을 돌렸다.“도련님 왜 저래요?”“회사에 무슨 큰일이라도 났나요?”“설마 회장님의 건강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겠죠?”“퉤퉤퉤...”방한서는 이마를 짚으며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그는 최연준의 휴대 전화 화면에 뜬 거래 내역과 강서연이 보낸 웃는 이모티콘을 정확히 보았다.「자기야, 이제 침대 시트만 사면 돼요.」자기야... 강서연이 요즘 그를 부를 때 쓰는 새로운 애칭이다. 방한서는 저도 모르게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최연준은 강서연이 사준 자동차를 운전하여 쇼핑몰로 향했다.이 쇼핑몰은 DL처럼 그리 눈부시게 화려하지 않았고 오성에서도 2등급 수준이었다. 비록 최상 그룹에 속해있긴 하지만 쇼핑몰 담당자는 그룹의 회의마저 참석
최연준이 고개를 숙였다.강서연이 그래도 여자의 표준 키였지만 최연준 앞에서는 발꿈치를 들어도 겨우 그의 어깨 정도 닿았다. 최연준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에게만 보여주는 따스한 눈빛을 보냈다.“내가 안 오면 이번 달 용돈이 없을 것 같던데?”그가 피식 웃었다.“그럴 리가요. 당신 용돈은 다 남겨뒀어요.”“정말?”“그럼요... 내가 계산해 보니까 당신 점심은 회사에서 챙겨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돈이 따로 필요 없고 옷도 내가 사주잖아요. 그리고 우리 지금 에덴에 살아서 집세 낼 필요도 없어요. 강주에서 살 때보다 훨씬 여유로워졌어요. 의식주와 교통 중에 그냥 교통비만 필요하겠더라고요.”강서연이 손가락을 접으며 계산했다.“지금 타고 다니는 저 차는 소배기량이라서 기름도 엄청나게 아껴요. 계산해 보니까 한 달에 10만 원이면 충분할 거예요! 그래서...”그녀는 활짝 웃으며 5만 원짜리 두 장을 꺼내 그의 셔츠 주머니에 넣었다.“이번 달 용돈이에요. 아껴 써요.”최연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역시 그의 예상대로 담뱃값은 없었다. 그는 속으로 슬피 울부짖었지만, 강서연의 귀여운 눈빛을 마주한 순간 억지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왜 그래요?”강서연은 우쭐거리며 그를 쳐다보았다.“액수가 마음에 들지 않아요?”“아니, 아니.”최연준이 입을 삐죽거렸다.“그... 침대 시트 아직 못 샀다며?”강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신난 발걸음으로 침대 시트를 보러 갔다.최연준은 셔츠 주머니 속 5만 원짜리 두 장을 움켜쥐었다.‘이번 달은 차를 적게 운전해야겠어. 그냥 경수 아저씨한테 차랑 운전기사를 보내달라고 할까? 이 10만 원은 내 비상금으로 몰래 숨겨야 해!’...“경섭 씨, 물어볼 게 있어요.”이튿날 최연준은 육경섭을 사무실로 불렀다.그런데 육경섭의 상태도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그는 사무실로 들어오자마자 소파에 털썩 주저앉더니 멍하니 천장만 올려다보았다. 최연
“나석진이랑 계약하는 거 말이에요. 설마 잊은 거 아니죠?”육경섭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그가 자존심까지 버려가며 립스틱 300개와 바꿔온 것이다.“잊지 않았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최연준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육경섭은 그를 보며 머뭇거렸다.“정말이에요? 그런데 어진 엔터테인먼트라는 회사도 나석진이랑 계약하려고 한다고 들었어요. 사적으로 여러 번이나 연락했다던데요?”최연준이 화들짝 놀랐다.‘엄마 회사잖아? 엄마도 나석진 씨한테 관심이 있었어?’만약 두 회사가 정말로 경쟁한다면 그의 입장이 곤란해진다.“그냥 소문일 수도 있잖아요.”최연준이 덤덤하게 말했다.“내가 한번 알아볼게요.”“네, 고마워요.”육경섭이 크게 웃었다.립스틱 300개인데 낭비해서는 절대 안 되었다....에덴으로 돌아온 최연준이 안방으로 들어갔을 때 강서연은 한창 침대 시트를 펴고 있었다. 작은 체구의 그녀가 허리를 비틀거리며 침대를 정리하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유혹적이었다. 그는 제 자리에 넋을 놓고 서 있었다...최연준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인기척을 들은 강서연이 고개를 돌리자, 최연준의 그윽한 두 눈과 딱 마주쳤다.“왔어요?”그녀가 순진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방금 새 시트 폈어요. 어때요?”지금 최연준의 눈에는 시트고 뭐고,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그녀와 이 침대 위에서 뜨거운 시간을 보내는 상상뿐이었다.“응, 괜찮네.”그는 시트를 대충 흘겨보았다.“무늬는 어때요?”“예쁘네.”그녀를 쳐다보는 최연준의 두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연준 씨, 우리...”“여러 개 더 사면 좋겠다.”그는 갈라진 목소리로 한마디 하고는 그녀를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강서연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의 심장박동이 점점 빨라졌고 그녀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여러 개 사서... 뭐 하려고요?”“두고두고 쓰는 거지.”최연준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낮게 깔린 목소리가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하나 더 사긴 했어요..
병원 응급실 밖.배경원은 의자에 주저앉아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충혈된 눈으로 응급실 문을 응시하며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한때 당당했던 그의 어깨는 지금 축 처져 있었다. 뒷모습만으로도 절망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배경원은 주먹을 단단히 쥐었지만, 온몸은 떨리고 있었다.적막이 흐르는 복도는 불길한 정적마저 감돌았다.결국, 억눌렀던 감정이 터져 나와 눈물이 조용히 뺨을 적셨다.“경원아!”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배경원이 고개를 들자, 최연준과 강서연이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질 뻔한 배경원을 최연준이 재빨리 부축했다.강서연은 응급실 문을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치료는 연희 씨와 신석훈 씨의 제자들이 맡고 있어요. 모두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이에요. 수정 씨는 평소 건강을 잘 관리하셨으니 금방 회복될 겁니다.”“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최연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갑자기 병세가 심각해진 거야? 그리고 윤아는...”배경원은 떨리는 손으로 최연준의 팔을 붙잡으며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셋째 형님, 제발 윤아를 찾아주세요. 딸은 사라지고 아내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어요. 둘 다 잃으면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그런 바보 같은 말 하지 마세요. 둘 다 무사할 겁니다.”강서연이 단호히 말했다.“윤아는 우리 집안의 며느리예요. 누가 윤아를 해치려 한다면 최씨 가문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어요. 그 결과가 어떤 건지 모를 리도 없고요. 그리고...”강서연은 순간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을 이어가려다 복도 끝에서 배현진이 소피아와 함께 급히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는 말을 삼키고 배현진을 노려보았다.“연준 아저씨, 서연 이모...”배현진은 어딘가 죄책감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배현진은 배경원에게 다가가 팔을 살며시 부축하며 조심스레 말했다.“아버지...”그 순간, 배경원이 배현진의 뺨을 내려쳤다.배경원은 분노로 가득 찬 눈빛으로 배현진을 노려보며
임수정은 갑작스러운 기침을 하며 침대 옆 경보 벨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소피아에 의해 단호히 막혔다.“사모님, 제 말을 듣는 게 좋으실 겁니다.”소피아는 부드럽지만 섬뜩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제가 만든 음식이 그렇게 형편없지도 않고 독을 넣을 만큼 제가 어리석지도 않아요. 안심하세요. 이 모든 재료는 사모님의 건강을 생각하며 준비한 겁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온 이유는 진심으로 사모님을 돌보고 싶어서예요.”임수정은 가슴을 움켜쥔 채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임수정의 눈엔 불신과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요즘 배경원은 외출이 잦아졌고 이유를 묻자, 회사 일 때문이라며 안심하라는 대답뿐이었다.그럼에도 임수정의 마음속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점점 커져만 갔다.깊게 숨을 들이마신 임수정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겉으론 소피아의 말을 따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사모님, 잘 생각하셨어요.”소피아는 임수정에게 쿠션을 건네며 은은하게 웃었다.“우리 결국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될 사이잖아요. 지금부터 제 존재에 익숙해지시는 게 좋을 겁니다.”“흥! 내 아들이 눈이 먼 게 분명해.”임수정은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떻게 너 같은 사람에게 속을 수 있는지...”“저를 깔보지 마세요. 저는 이혼하고 아이도 데리고 있지만, 현진 씨를 향한 제 진심은 변하지 않아요. 저는 현진 씨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누구와는 달리 겉으론 순수한 척하면서 남자를 유혹하는 짓은 안 한다는 건 알아주셨으면 해요.”“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임수정은 언성을 높이며 노려보았다.소피아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더욱 날카롭게 말했다.“사모님, 제가 말하는 사람은 바로 사모님의 그 옛날 며느리가 될 뻔했던 그 사람이에요.”“헛소리하지 마!”임수정은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그 일은 우리 배씨 가문이 송윤지에게 잘못한 일이야. 그 애의 명예를 더럽히지 마.”“사모님,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없는 법이에요.”소피아는 태연한
“너와 상관없다고?”임우정은 다급하게 외쳤다.“네 형부가 이미 윤아의 통화 기록을 조사했어. 윤아가 실종되기 전에 조 회장이랑 통화했던 게 드러났다고! 지강아, 너와 조 회장이 어떤 관계인지 나한테도 숨길 작정이었어?”임지강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사건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머릿속에서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그래요. 저와 조 회장이 가까운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와 배윤아 사이엔 원한이라곤 없잖아요... 누나, 왜 저를 의심하는 거예요?”“지강아!”임우정의 목소리가 더욱 절박해졌다.“너, 송윤지 일 때문에 배현진을 미워하는 건 알아. 하지만... 네 말대로라면 윤아한테까지 증오를 전가하면 안 되잖아!”“누나, 정신 좀 차리세요!”임지강의 목소리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어둠이 깃든 그의 얼굴은 단호함을 더했다.“무슨 근거로 저를 의심하시는 건데요?”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임지강의 강경한 태도에 임우정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한참 후, 임우정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렇다면... 배씨 가문을 좀 도와줄 순 없겠니?”임지강은 코웃음을 치며 전화를 끊었다.수화기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리자 맑고 투명한 송윤지의 눈빛과 마주쳤다.“배씨 가문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요양원 병실 문 앞.소피아의 하이힐 소리가 텅 빈 복도를 울리며 퍼져 나갔다. 소피아의 손엔 보온 도시락이 들려 있었고 문 앞을 지키는 경호원들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제가 사모님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안으로 들여보내 주세요.”경호원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말없이 서 있었다.“이건 도련님께서 지시하신 거예요.”소피아는 휴대전화를 꺼내 그들에게 일부러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실래요? 아시다시피 사모님 건강이 좋지 않으세요. 세 끼 제대로 챙겨 드시지 못하면 여러분들이 책임지실 겁니까?”경호원들은 난처한 얼굴로 머뭇거리다 결국 길을 내주었다.“이제야 말이 통하네.”소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앞으로
송윤지는 겨우 한 모금을 마시고 사레가 들어 술을 뱉을 뻔했다. 마신 술이 얼굴에 스며든 듯 송윤지의 뽀얀 볼은 어느새 매혹적인 와인빛으로 물들었다.임지강은 그런 송윤지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임지강은 송윤지에게 다가가 가볍게 등을 두드리며 입가에 묻은 술자국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임 대표님...”송윤지는 조심스럽게 임지강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 애썼다.하지만 임지강은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아 통유리창 앞까지 데려갔다.송윤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 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깊고 짙은 밤하늘에 수많은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잘게 부서진 불빛들이 반짝거렸다.불꽃은 색과 모양을 끊임없이 바꾸며 꿈같은 광경을 만들어냈다.송윤지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마음에 들어요?”임지강의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송윤지의 귀에 스며들었다.“잠깐 눈 좀 감아 봐요.”“네?”임지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제가 별을 따다 줄게요.”마지막 불꽃이 빛의 궤적을 남기며 밤하늘로 사라지고 다시 평온한 고요가 찾아왔다.송윤지는 미소를 지으며 임지강의 말을 따라 눈을 감았다. 그러자 따뜻하면서도 약간 서늘한 남자의 손길이 송윤지의 손을 잡더니 손바닥 위에 무언가가 놓이는 느낌이 들었다.송윤지는 깜짝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손에는 정말로 ‘별’이 있었다.“이건...”그것은 목걸이였다. 펜던트는 별 모양으로 깎아낸 다이아몬드로, 완벽하게 다듬어져 찬란한 빛이 퍼지고 있었다.“제가 해줄게요.”임지강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이건 너무 비싼 거라서 제가...”“받아줘요.”임지강의 눈빛은 따스하고도 단호했다.“그리고...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송윤지는 고개를 숙였다. 귀 끝까지 붉어진 송윤지의 얼굴은 마치 열이 오른 듯했다.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의 귓가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살짝 정리해 주었다.“사실,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저 윤지 씨 좋아
소피아는 약속한 시간에 카페에 도착하자마자 창가에 앉아 있는 낚시 모자를 쓴 중년 여성을 발견했다.소피아는 조용히 걸어가 밝게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안녕하세요. 혹시... 허운주 선생님이신가요?”허운주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초췌한 기색이 역력했다.소피아는 직원에게 뜨거운 우유 한 잔을 주문하고 허운주 앞에 놓인 진한 커피를 치우며 부드럽게 말했다.“허 선생님, 이 나이에 이렇게 진한 커피는 드시면 안 돼요. 건강을 꼭 챙기셔야죠.”“고맙습니다...”허운주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절 찾아오신 이유가 뭘까요?”허운주는 천천히 눈을 들어 소피아를 바라봤다.소문에 따르면, 소피아는 현재 배현진의 연인이며 이혼 후에 아이를 키우면서도 배현진의 마음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사람이었다.허운주는 소피아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직감했고 소피아가 도움을 준다면 송윤지 같은 사람을 무너뜨리는 건 쉬운 일이라고 확신했다.“제가...”허운주는 입술을 핥으며 머뭇거렸다.“어떻게 말씀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네요.”소피아는 잠시 멈칫하더니 곧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허 선생님은 현진 씨의 선생님이시잖아요. 그 특별한 인연은 현진 씨도 평생 기억할 거고 저 또한 마찬가지예요. 저희는 모두 선생님을 존경하고 있어요. 그러니 무슨 일이든 편하게 말씀하세요.”“저는 국제 유치원에서 어쩔 수 없이 사직하게 됐어요.”허운주는 이마를 짚으며 미간을 깊이 찡그렸다.소피아는 놀란 듯했지만, 최근 일어난 상황을 대략 알고는 있었다. 우수 교사 선발에서 허운주가 송윤지에게 패했다는 소식은 소피아에게도 전해졌다. 자존심 강한 허운주로서는 그 일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소피라는 눈을 굴리며 허운주를 어떻게 이용할지 계획하고 있었다.“허 선생님,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소피아는 부드럽게 허운주의 손등을 토닥이며 말했다.“저를 딸이라고 생각하시고 속상한 일 있으면 다 털어놓으세요. 제가 도울 수 있
회의실은 단숨에 고요 속에 잠겼다. 강렬한 존재감의 인물이 문턱을 넘어서자, 방 안은 서늘하면서도 압도적인 기운으로 가득 찼다.원장은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 단숨에 그의 곁으로 다가가 어깨를 툭 치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왜 이제야 온 거야?”임지강의 눈가에는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그러나 그의 시선이 허운주에게 닿는 순간, 그 미소는 천천히 사라지고 대신 날카롭고 차가운 눈빛이 자리 잡았다.“으흠!”원장은 자세를 가다듬으며 목소리를 높였다.“오늘 이 자리에서는 투표 결과를 발표하는 것뿐만 아니라 매우 중요한 소식을 전하려고 합니다.”원장은 한 장의 서류를 꺼내 들었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유치원의 공식 도장과 함께 임지강의 힘찬 서명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임 대표님께서 우리 유치원에 10억을 투자해 주셨고 국제 유치원의 최대 주주가 되셨습니다. 유아 교육을 위해 아낌없이 지원해 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희도 초심을 잃지 않고 임 대표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이내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송윤지는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얼굴에 붉은 기운이 번지자 뜨거운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입가에 번진 미소는 감추기 어려웠다.임지강은 잔잔한 미소를 띤 채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제가 이 유치원의 주주가 된 이상, 앞으로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우리 국제 유치원의 이익을 위해서일 것입니다.”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허운주를 똑바로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래서 오늘, 교사 팀을 정비하려고 합니다.”허운주는 본능적으로 두 걸음 물러나며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이곳에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임지강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자신의 가치관조차 바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아이들을 올바르게 이끌 수 있겠습니까?”허운주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저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가요?”“여기 있는 사람 중
원장의 표정이 단단히 굳어졌다.“허 선생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오늘 표 집계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투명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조작이라니, 그 말은 제가 개입했다는 뜻인가요?”“원장님, 제가 어떻게 감히 원장님을 의심하겠습니까?”허운주는 억지 미소를 띠며 비꼬듯 말했다.“하지만 표 차이가 이렇게 크게 나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설령 원장님께서 관여하지 않으셨더라도, 누군가 뒤에서 무슨 일을 꾸몄을 가능성은 충분하지 않겠습니까?”“허 선생님...”원장은 화나 치밀어 올라 말을 잇지 못했다. 막무가내인 사람들과 대화하는데 익숙하지 않았다.“허 선생님, 하신 말씀에 대해 책임지셔야 합니다.”송윤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송윤지는 허운주를 담담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저는 단 한 번도 허 선생님께 폐를 끼친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우수 교사 선발 역시 모든 과정이 투명하고 공정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제가 정말 무슨 일을 꾸몄다면, 이렇게 공개적으로 표를 집계했겠습니까?”허운주는 송윤지를 노려보며 속으로 분노를 억눌렀다.평소 조용하고 소극적인 송윤지를 쉽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의 송윤지는 논리 정연한 주장으로 상대의 도발에도 굴하지 않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송윤지를 새롭게 보게 되었고 문밖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임지강의 입가에는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임지강은 회의실 밖에서 모든 상황을 눈여겨보고 있었다.특히 송윤지의 표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임지강은 마치 자신이 상을 받은 것처럼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곁에 있던 부하 직원조차 그의 변화를 놀라워하며 말했다.“송 선생님은 정말 대단하시네요.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었다. 송윤지는 변하지 않았다. 그저 예전에 자신과 함께 있을 때는 너무 조심스러워 본래의 자신을 숨겼을 뿐이었다.“임 대표님, 허 선생님에 대해서는 어떻게 처리할까요?
“지난번에 내가 해외 시장을 축소하라고 했지만, 당신 아들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임수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결국 문제는 그 여자가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거야... 그 여자는 현진이를 부추겨 또 다른 일을 꾸밀 거고 현진이는 분명히 그 여자의 말을 들을 거야.”“그러니까 그들이 더 큰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임수정은 딸을 바라보며 말했다.“윤아야, 네가 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회사들을 꽉 잡고 있어야 해! 너 혼자 힘들면 군성이랑 의논해도 되고 군형이나 소유의 도움을 받아도 돼. 네가 동의하지 않는 한, 네 오빠는 너한테서 단 한 푼도 가져갈 수 없어. 이해했지?”“윤아야.”임수정은 딸의 손을 꼭 잡았다.“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이 모든 재산은 우리 조상들이 쌓아온 거야. 절대 우리 세대에서 무너져선 안 된다!”“네, 저 이해했어요.”배윤아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말했다.“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오빠가 하루빨리 제정신을 차려서 우리가 예전처럼 가족으로 지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임수정은 힘없이 눈을 감았다. 기침하며 숨을 고르는 임수정의 모습이 안쓰럽기만 했다.그러나 그 순간, 문밖에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소피아가 복도 모퉁이에 숨어 임수정의 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벽을 짚고 있던 소피아는 주먹을 꽉 쥐었고 마치 벽을 뚫을 듯 힘을 주고 있었다.방 안에서 나눈 대화는 모두 소피아의 귀에 생생히 들렸다.오늘 소피아가 임수정을 찾아온 건, 회사 본사에서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을지 알아보려는 목적이었다. 만약 가능하다면 은행 대출을 받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상상도 못 한 일이 벌어졌다.지금 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재산 전부가 이 어린 소녀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여보세요, 소피아!”그때, 배현진이 전화를 걸어왔다.“지금 엄마 집에 있어? 나 일이 아직 안 끝나서 조금 있다가 가려고. 엄마한테 전해줘.”“그럴 필요 없어.”소피아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임수정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배경원은 막 씻은 딸기를 가져왔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딸기의 끝부분을 잘라 임수정의 입에 넣어주었다.결혼한 지 이렇게 오래되었는데도, 두 사람의 애정과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는 여전히 처음과 같았다. 그들의 관계는 많은 사람의 부러움을 사고 있었다.배윤아는 방으로 들어오기 전에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엄마를 위해 영양제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새로 그린 그림도 품에 안고 있었다.“엄마, 아빠, 저랑 군성이가 이번에 현실적인 내용을 담은 만화를 하나 출간하려고 해요. 내용은 한 부부가 젊었을 때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다룬 거예요... 사실 주인공 부부가 바로 엄마, 아빠예요! 보세요, 이렇게 그렸는데 괜찮죠?”임수정과 배경원은 딸이 그린 그림을 보며 얼굴에 자부심이 가득했다.부부는 원래 대부분의 기대를 아들에게 걸고 있었다. 이는 남녀 차별 때문이 아니라 배윤아의 성격이 어릴 적부터 세상일에 무심하고 경쟁을 피하는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가문의 계승자로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딸이 오히려 아들보다 더 믿음직스럽다.“윤아야.”임수정은 딸의 손을 잡으며 눈빛에 깊은 의미를 담아 말했다.“엄마가 너에게 꼭 전해주고 싶은 게 있어.”“뭔데요?”배윤아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임수정은 베개 밑에서 갈색 서류봉투를 꺼냈다. 그 안에는 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핵심 자료들이 들어 있었다.“이것뿐만 아니라, 본사의 도장도 있어.”배경원은 도장까지 꺼내 배윤아에게 건넸다. 배윤아는 깜짝 놀라 귀중한 물건들을 손에 들고 어찌할 줄 몰라 하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아빠, 엄마, 이건 도대체...”“우리도 이제 나이가 들었고 몸 상태도 좋지 않아. 요양원에 머무는 동안은 회사로 돌아가 직접 관리할 수도 없을 거야.”배경원은 평소 장난스러웠던 모습을 거두고 진지한 얼굴로 배윤아를 바라보았다.“윤아야, 엄마, 아빠는 이 모든 것을 너에게 맡기기로 했다. 네가 책임을 져야 해.”배윤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