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빈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김자옥 앞에 서 있는 그녀는 넋이 나간 얼굴로 막연하게 고개만 끄덕일 뿐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잘 알지 못했다.“저... 강씨인 건 맞아요. 저...”“허, 그래?”김자옥이 싸늘하게 웃었다.“아가씨도 참 대단하네. 한쪽으로는 내 아들을 홀리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지한이랑 시시덕거려?”“뭐라고요?”최지한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피식 웃었다.“숙모, 뭐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니에요? 이 년은 계속 나랑만 붙어있었어요. 숙모네 아들은 꿈도 꾸지 못하죠!”“그 입 닥쳐!”김자옥이 노발대발하며 골프채를 들고 최지한을 때리려 했다.그녀가 진짜로 때릴 줄을 몰랐던 최지한은 미처 피하지 못한 바람에 종아리를 맞고 고통스러움에 몸부림쳤다.“X발! 감히 날 때려? 으악!”곧이어 골프채가 또 날아왔다.젊었을 적 태권도 고수였던 김자옥은 나이가 들어도 최지한을 상대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조금 전 최연준을 괴롭히겠다는 두 사람의 얘기만 떠올리면 화가 치밀어 올랐다. 최지한만 때리는 게 아니라 강유빈도 가만둘 수 없었다. 얼이 빠진 강유빈은 그녀가 휘두르는 골프채에 어깨를 맞고 말았다. 그 순간 너무 아픈 나머지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고통스러워했다.“빌어먹을 연놈들! 감히 뒤에서 내 아들을 해치려고 해? 내가 누군지 몰라?”김자옥이 살벌한 기운을 내뿜으며 골프채를 마구 휘둘렀다.평소 경호원들은 최지한에게 불만이 많았다. 마침 김자옥이 이곳에서 행패를 부리니 감히 말리지 못한다는 핑계로 보고도 못 본 척, 들려도 들리지 않는 척 문 앞에 나란히 서 있기만 했다.거실에서 최지한의 욕설과 강유빈의 울음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귀한 장식품들이 마구 깨지는 소리도 들려왔다.경호원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다가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 문 앞을 지키기만 했다.그렇게 김자옥이 폭행을 멈추고 나서야 경호원들은 안으로 뛰어 들어가 말리는 시늉이라도 하면서 예의 바르게 그녀를 밖으로 모셔나온 후 가방과 외투를 건넸다.김자옥은 옷매무시를
“김 대표님.”박경수가 예의 바르게 말했다.“지금 여주 별장으로 돌아가실 건가요?”“그래요, 가요.”“사모님과 연희 아가씨도 계세요...”김자옥은 눈살을 찌푸리다가 이내 다시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세월이 오래 지났으니 내려놓을 건 내려놓아야 했다.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박경수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냉큼 차에 올라탔다.여주 별장에 돌아온 후 거실로 들어가자마자 소파에 앉아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최연희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풀이 죽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김자옥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시선을 은미연에게 옮겼다. 은미연은 찻잔을 내려놓고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했다.“자옥 언니, 오랜만이에요.”“오랜만이야.”김자옥은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지난번에 만났을 때가 나랑 최문혁이 이혼하던 그때지?”은미연의 얼굴에 드리워졌던 미소가 굳어지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언니, 그때 일은... 사실 제가 문혁 씨를 만나고 있을 때 문혁 씨가 언니랑 이혼을 준비하고 있는 줄은 정말 몰랐어요. 제가 성격이 솔직해서 무슨 얘기든 다 하거든요.”은미연이 마른기침을 두어 번 했다.“만약 그때 이혼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더라면 절대 만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문혁 씨는 저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 바람에 오랜 시간 동안 제가 오해를 받았죠!”“그래.”김자옥이 이를 깨물고 나지막이 말했다.“그러니까 최문혁 그 겁쟁이랑 결혼하면 그냥 재수 털리는 거야.”“언니.”은미연이 살짝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점은 저도 공감이에요!”최연희는 어색하게 웃으며 어머니에게 눈짓을 보냈다.“아참...”은미연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오늘은 해야 할 얘기가 있어서 찾아왔어요. 그... 연준이가 마음에 둔 여자 말이에요...”“성이 강씨인 그 아가씨를 말하는 거지?”김자옥이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이미 만났어!”“네?”은미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정말 파렴치하기 짝이 없는 여자
명황세가 맨 꼭대기 층의 룸에 있던 최연준도 그녀의 얘기를 듣고 어안이 벙벙했다. 그는 캐비어를 내려놓고 미간을 찌푸린 채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두 사람 아직 만나게 한 적 없는데요?”“그럼, 대체 어떻게 된 거야?”최연준은 잠깐 침묵하다가 수심에 찬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옆에 있던 배경원과 유찬혁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묵묵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유찬혁이 다급하게 말했다.“형, 어머님이 서연 씨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절대 싫어하진 않을 거예요. 무슨 오해가 있는 게 분명해요.”배경원의 두 눈은 테이블 위의 맛있는 음식에서 떠나질 않았다.“경원아, 네 생각은 어때?”“응?”배경원이 화들짝 놀랐다.“그게... 제 생각엔 어머님이 형수님을 만나지도 않고 일부러 형이랑 형수님을 갈라놓으려고 이러는 것 같아요.”최연준이 고개를 내저었다.“우리 엄마 그런 분이 아니야.”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 앞에 누군가의 모습이 나타났다. 강서연이 천천히 다가오자, 최연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방금 한 얘기를 다 들은 건 아니겠지?’“서연아.”최연준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고 웃었다.“점심에도 근무해야 한다며?”“네, 원래는 근무해야 하는데 과장님이 조금 늦게 제출해도 된다고 해서 왔죠.”유찬혁이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아직 식사 안 했죠? 그... 형이랑 식사하세요. 저랑 경원이는 먼저 일어날게요.”“싫어!”배경원이 항의했다.“나 아직 배고프단 말이야!”유찬혁이 배경원을 힐끗 째려보았다. 강서연은 입술을 깨물고 최연준에게 물었다.“연준 씨 어머님이 오셨다면서요? 왜 나한테는 얘기하지 않았어요?”“적당한 기회를 봐서 두 사람 만나게 하려고 했지.”“그래요, 그래요!”배경원은 배가 이성을 잃은 나머지 말도 헛나왔다.“형수님, 긴장해 하지 말아요. 못난 며느리도 언젠가는 시부모님을 뵈어야 하니까요!”유찬혁은 그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강서연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서화전의 명성과 위세가 아주 드높았다.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 모두 대물급 작가들의 작품이었고 그림 하나당 그 가치가 수억 원에 달했다.김자옥은 여유롭게 전시장을 거닐었다. 어릴 적부터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교육을 받은 덕에 서화에도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게 되었다.남양 작가들의 작품 몇 점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선이 우아하고 색감도 대담한 게 아주 개성이 넘치는 작품이었다.작품이 마음에 든 김자옥이 옆에 있는 비서에게 분부했다.“여기 담당자한테 연락해. 이 작품 내가 사야겠어!”비서는 알겠다고 대답한 후 바로 담당자를 찾으러 갔다.그 시각, 강서연이 윤문희와 함께 전시장에 들어왔다.“엄마, 여기 사람이 많진 않지만 공간이 커서 절대 아무 데나 가시면 안 돼요.”윤문희는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기색을 드러냈다.“전시장에 와서도 다니지 못하게 하면 어떻게 구경해.”강서연이 피식 웃었다.“엄마가 집에서 심심해할까 봐 모시고 나온 거잖아요. 게다가 전 일하러 온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협조 좀 부탁해요. 제가 사진 몇 장 찍고 여기 직원한테 구체적인 상황 좀 물어본 다음에 가면 돼요.”윤문희가 화들짝 놀랐다.“그리 빨리 간다고?”윤문희는 서화전을 좋아했다. 예전에 집에 있을 때도 자주 보러 다녔었다. 하지만 집을 나간 이후로 이렇게 예쁜 전시장을 와 본 적이 없었다...“네.”강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일이 끝나면 얼른 돌아가서 원고 써야 해요.”“어휴.”윤문희가 입을 삐죽거렸다.“한 달에 며칠 쉬지도 못하는데 맨날 야근까지 하고. 누가 봤으면 돈 엄청나게 많이 버는 줄 알겠다.”“엄마.”강서연이 웃으며 장난쳤다.“엄마 이젠 입만 열면 돈 얘기네요?”“예전에는 내가 아무것도 몰라서 강명원 그놈한테 당했지! 강명원의 돈을 마음껏 썼어야 했는데. 그러면 너랑 찬이도 나랑 같이 고생하지 않았을 거 아니야...”“됐어요, 그만 해요.”강서연이 엄마의 어깨를 다독였다. 과거 일 때문에 그녀의 병이 다시 재발할까 걱정되었다.“다
문득 정체도 불분명한 여자를 데려온 아들 생각에 그녀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마음 같아선 다시 배 속에 집어넣고 싶은 심정이었다....“서연아, 저 그림 봐봐.”강서연이 윤문희의 시선에 따라 고개를 돌렸다.사이즈가 커서 벽면을 꽤 많이 차지한 유채화였다. 뭔가 추상적이면서도 몽환적인 게 숲을 연상케 했다. 그리고 커다란 반딧불이 날개를 휘젓는 모습이 아주 생동감 있게 그려졌다.강서연이 낙관을 확인해 보니 남양의 아주 유명한 화가였다.“엄마, 저 그림 좋아해요?”윤문희는 대답하지 않고 사색에 잠겼다. 그녀의 얼굴에 복잡한 기색이 드러났다.“서연아...”한참 후 윤문희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저기가 어딘지 알아?”강서연은 막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곳은 남양의 개인 원림이었는데 그녀의 어머니가 어릴 적에 자란 곳이었다. 그리고 낙관에 적힌 이 화가가 예전에 그녀를 위해 초상화를 그려준 적도 있었다.그 그림을 쳐다보던 윤문희는 마치 아무 걱정 없던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녀가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강서연에게 말했다.“저 그림 살 수 있을까?”강서연은 잠깐 멈칫하다가 자세히 살펴보았다.‘이 그림을 사려면 엄청 비싸겠지?’하지만 윤문희가 무언가를 이렇게 좋아하는 경우가 아주 드물었다. 하여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담당 직원에게 물으려 했다. 그런데 그때 옆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그림 제가 이미 샀어요. 제가 먼저 왔거든요.”화들짝 놀란 강서연이 고개를 돌렸다. 김자옥과 눈이 마주친 순간 저도 모르게 마음이 움찔했다.눈앞의 아주머니는 중년 정도 돼 보였지만 관리를 잘하여 기품이 아주 흘러넘쳤다.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웃을 듯 말 듯 하다가 선글라스를 벗으니,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가 뿜어져 나왔다.“아가씨.”담당 직원이 말했다.“김 대표님께서 저희한테 먼저 연락한 거 맞아요. 그리고 괜찮은 가격을 부르셨고요.”“네...”강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실례가 많았습니다. 죄송해요.”“아가씨도
“네.”강서연이 솔직하게 대답했다.“저희 엄마가 평소 좋아하는 게 별로 없는데 이건 마음에 들어 하셔서 최대한 소원을 이뤄드리고 싶거든요. 여사님께서 사셨으니 어쩔 수 없죠.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걸 빼앗을 수는 없으니까요.”김자옥이 흐뭇하게 웃었다.‘교양 있는 아이네. 지금 젊은 여자애 중에 이토록 점잖고 차분한 애가 거의 없는데.’그녀는 문득 임나연이 떠올랐다.임나연을 예비 며느리로 점 찍은 건 두 집안이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인 형편이 엇비슷하고 최연준이 임나연과 결혼하면 김씨 가문에도 좋은 점을 있을 거로 생각하여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임나연의 얼굴도 괜찮아서 최연준과 함께 서 있으면 나름 어울리기도 했다.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임나연은 재벌 집 규수의 교양과 점잖음이라곤 눈곱만치도 없었고 그룹을 관리할 만한 능력도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일 년에 영국으로 여러 차례 와서는 그녀에게 아부나 하며 미친 듯이 쇼핑하는 게 전부였다. 그 바람에 임나연에 대한 인상이 점점 나빠졌다.김자옥이 얼굴만 예쁘고 머리가 텅 빈 여자를 가장 싫어했다. 게다가 임나연의 얼굴도 연예인 뺨치게 예쁜 정도는 아니었다...“여사님?”강서연은 히죽 웃으며 생각에 잠긴 그녀를 끄집어냈다.“사진 찍어도 되나요?”“그럼요. 마음껏 찍어요.”정신을 차린 김자옥이 가볍게 웃었다.“고맙습니다.”“아참.”김자옥은 자꾸만 강서연과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저 그림 속에 그려진 게 뭔지 알아요?”“반딧불이잖아요.”강서연이 술술 대답하다가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하지만...”반딧불의 모양이 어딘가 이상하게 생겼다. 날개가 아래위로 두 층이었다.“하지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어요.”그녀가 웃으며 말했다.“아마도 이런 게 바로 예술가의 창의력이겠죠.”“예술가가 아무 근거 없이 상상만으로 그린 게 아니에요.”김자옥이 그녀를 보며 말을 이었다.“날개가 두 층인 이 반딧불은 남양 사바 지역의 숲에 살고 있는데 아주 드물어요.”“네?”강서연이 놀라움을 감추
강서연은 윤문희의 앞에 나서고는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김자옥을 쳐다보며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여사님, 저희 엄마가 몸이 안 좋으셔서 그러는데 이런 식으로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김자옥의 두 눈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어디가 안 좋아요?”“그것까지 얘기하긴 좀 곤란하네요.”강서연은 벌벌 떠는 윤문희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엄마 모시고 집으로 돌아가야겠어요.”“잠깐만...”김자옥은 두 사람을 말리지 못했다. 강서연은 윤문희와 함께 중세 전시장을 황급히 빠져나왔다.“대표님.”비서가 나지막이 물었다.“한번 조사해 볼까요?”“조사할 게 뭐가 있어.”김자옥이 그를 힐끗 째려보았다.“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데 내가 쟤를 모르겠어?”비서는 더는 아무 말 없이 슬쩍 물러났다.김자옥은 멀어져가는 강서연과 윤문희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 급히 가는 바람에 윤문희가 금방 산 스카프를 바닥에 떨구고 말았다.스카프를 주운 그녀의 입가가 살짝 실룩거렸다.“저 나이를 먹어도 취향은 여전하네. 어휴, 아직도 자기가 무슨 공주인 줄 아나. 그나저나... 공주는 별로지만 딸 하나만큼은 잘 낳은 것 같네!”...윤문희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 강서연은 긴장한 얼굴로 약상자를 이리저리 뒤졌다. 그녀가 뭘 찾고 있는지 알고 있었던 윤문희는 손을 흔들며 웃었다.“서연아, 그만 찾아. 나 약 안 먹어도 돼.”강서연이 걱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지금 괜찮아졌어. 약 먹지 않아도 돼.”윤문희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냥 조금 피곤할 뿐이야, 잠깐 눈 붙이면 괜찮아져. 가서 네 원고 써, 얼른 일 마쳐야지!”“정말 괜찮아요?”“응.”“그럼... 옆에서 쓸게요.”강서연이 컴퓨터를 갖고 왔다.“저는 제 원고 쓸 테니까 엄마는 쉬고 있어요.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조치를 취할 수 있잖아요.”“그래.”윤문희는 상냥하게 웃으며 강서연의 머리를 어루만졌다.요 몇
최연준은 여주 별장으로 돌아온 후 김자옥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옷을 갈아입고 난 다음 인사드리러 위층으로 올라갔다.“엄마, 방은 마음에 들어요?”“응, 마음에 들어.”김자옥이 마침 커피를 내려 방안이 옅은 커피 향으로 가득했다.그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이 아주 널찍하고 환했고 커다란 통유리 맞은 편에는 높은 산이 보였다. 방 안의 인테리어도 아주 분위기가 있었고 작은 장식품마저 고급스러움이 흘러넘쳤다.김자옥은 푹신푹신한 양가죽 소파에 앉았다. 이곳이 좋긴 좋았지만, 왠지 모르게 어색하고 소외감이 들었다.그녀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문희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을까? 다정하고 효심이 가득한 딸이 있으니 걔 방은 이것보다 훨씬 더 따스하겠지...’“엄마.”이상함을 감지한 최연준이 물었다.“왜 그래요?”김자옥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를 쳐다보는 눈빛에도 실망감이 어려있었다. 그녀가 살짝 떨고 있는 걸 발견한 최연준이 물었다.“추워요?”“응.”김자옥이 숄을 걸쳤다.“영국에서 오래 지내다 보니까 여기 날씨가 적응이 잘 안되네.”“그건 괜찮아요. 방 안의 온도를 수시로 조절하라고 할게요.”이 말이 평소에는 아무 문제 없는 말이었지만 하필 오늘 사이가 좋은 모녀를 본 바람에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엄마, 오늘 옷 너무 적게 입었어요. 이거 입어요.”김자옥의 귓가에 그때 그 다정하고 청아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문득 그녀는 최연준에게도 시험해 보고 싶은 생각이 스쳤다. 하여 마른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연준아, 나 옷 너무 적게 입은 것 같아...”“옷을 적게 입었다고요?”최연준은 그녀의 커다란 캐리어 다섯 개를 보면서 어안이 벙벙했다.“적게 입었으면 많이 입으면 되죠.”그의 대답은 아주 직설적이었다.“옷은 충분하게 챙겨왔죠? 부족하면 가서 사 오라고 할게요.”이번에도 다른 사람에게 맡기려고 했다. 김자옥의 낯빛이 어두워지기 시작했
경찰서 밖에서 최지용은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한참을 걷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젊은 경찰관이 안에서 뛰어나오고 있었다. 최지용은 급히 다가가며 말했다.“정호야!”정호라는 젊은 경찰관은 최지용을 보자 반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 녀석!”최지용은 정호에게 다가가 가볍게 주먹을 툭 날리며 말했다.“도대체 무슨 일이야? 왜 사전에 알려주지 않은 거야?”정호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방금 최씨 집안에서 백인서를 데려간 사람 중에 정호도 있었다. 최지용도 놀라웠지만, 영미 역시 경찰이 직접 찾아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떠나기 전, 정호가 살짝 눈짓을 보냈고 최지용은 그의 의도를 알아채 경찰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지용이 형.”정호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형수님께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잘 구분하고 계시니 문제없을 겁니다!”“도대체 누구 지시로 백인서를 여기로 데려온 거지?”“소아 아가씨예요!”정호는 어깨를 으쓱했다.“소아 아가씨가 갑자기 지시한 거라 사전에 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최지용은 살짝 놀랐다. 강소아의 지시라니.“형수님께서도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으니까요. 그 아이가 실종되기 전에 형수님께서 만난 적이 있거든요. 경찰이 형수님을 데려가서 조사하는 건 당연한 절차입니다.”최지용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피식 웃음을 지었다.강소아가 이런 ‘당연한 절차’를 이용해 백인서를 경찰서로 보낸 이유는 경찰서야말로 가장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또 누군가가 음모를 꾸며 백인서에게 덮어씌우려 한다 해도 경찰서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경찰서 안에는 일을 봐주는 사람들도 있으니 백인서가 여기서 며칠 지내는 동안 힘든 일 없이 외부의 소란도 피할 수 있는 셈이었다.최지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강소아는 정말 자매를 위한 배려가 남달랐다. 이렇게까지 배려심 깊은 방안을 생각해 내다니!“지용이 형.”정호가 계속해서 말했다.“도련님께서
영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소아 언니, 저를 믿지 않으세요?”“난 오직 사실만을 믿어.”“권씨 가문의 딸이 실종된 사건에 백인서 씨의 양아버지와 남동생이 관련되었어요, 그게 바로 사실이에요!”강소아는 순간 멍하니 있다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려 했다.세상에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다 있나 싶었다.호텔 뒷뜰에 있는 그 CCTV가 정말 완전히 고장 났다고 생각하는 걸까? 육씨 가문과 최씨 가문이 힘을 합쳐 그 고장 난 CCTV 하나도 못 고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최군형은 강소아의 어깨를 가볍게 눌러 안심시키며 슬며시 휴대전화를 건넸다.강소아는 화면을 확인했다. 최군형의 부하가 보낸 메시지였다.“도련님, CCTV 데이터를 복구 중입니다. 곧 진실이 밝혀질 겁니다!”강소아는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영미가 이렇게까지 백인서를 몰아세우는 걸 보니 마음 한구석에 무언가 꺼림칙한 게 남아 있는 것 같았다.어차피 꼬리가 저절로 드러날 것이었기에 그저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다.바로 그때, 집사가 다소 당황한 얼굴로 방에 들어섰다. 집사의 뒤에는 몇 명의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신분을 밝힌 후 방 안을 둘러보며 엄숙한 목소리로 물었다.“여기 백인서 씨가 계십니까?”표아정은 등을 꼿꼿이 펴고 대답했다.“경찰관님께서 여긴 무슨 일로 오셨나요?”“당신이 백인서 씨인가요?”“저는...”“백인서 씨가 납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신고를 접수했습니다!”“뭐라고요?”백인서는 얼굴이 창백해졌다.“백인서 씨, 조사에 협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희와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권온유가 납치된 지 하루가 지났다.그동안 정대명은 단 한 번 음식을 가져왔는데, 그것도 차갑게 식은 죽 한 그릇과 딱딱한 빵 한 조각뿐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귀하게 자란 권온유에게 이런 음식은 처음이었다. 울고 싶었지만, 감히 울지 못하고 그저 눈물을 참으며 빵을 조금씩 뜯어 먹고 있었다.정승우는 그런 온유의 모습을 보고
“아줌마,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그럼, 제가 알아낸 사실을 전부 말씀드릴게요!”영미는 입가에 교만한 미소를 띠며 백인서를 차갑게 한 번 쳐다보았다.“백인서 씨의 친어머니인 백홍은 인신매매범이었다는 사실, 모두 아셨나요? 백인서 씨의 어머니는 백인서를 정대명의 집에 맡겼고... 흥! 정대명의 아내도 백홍이 납치해 왔다는 소문이 있어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잖아요. 제 생각엔... 인신매매범의 딸이라면 그런 일쯤은 익숙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은 권온유의 실종이 정말로 백인서 씨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시나요?”“영미!”강소아가 나서며 분노를 가득 담아 소리쳤다.“허위 사실을 퍼뜨리지 마!”“소유 아가씨, 억울하네요!”영미는 강소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제가 이렇게까지 조사한 건 다 아가씨를 위한 거예요! 딸도 있는 사람이 백인서를 곁에 두고도 마음이 놓이세요?”“그만해!”최지용이 크게 소리쳤다.백인서는 몸을 떨며 믿기지 않는 눈으로 최지용을 쳐다보았다.그러나 최지용의 얼굴에는 의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최지용은 굳건한 눈빛으로 뒤에 있는 백인서를 지키고 있었다.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처럼 백인서를 아끼고 있었다.백인서는 코끝이 찡해지며 본능적으로 최지용의 손을 꼭 붙잡았다. 최지용의 따스한 손은 백인서에게 큰 용기를 주었고 그 온기가 어둠의 두려움을 잊게 해주었다.최지용은 백인서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고 다시 영미를 바라볼 때는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영미야.”최지용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두 집안의 관계를 생각해서 그저 넘어가는 거야. 더 이상 선을 넘지 마.”최군형도 나서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요, 백인서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모르겠어요? 영미 아가씨, 우리 최씨 가문 사람들을 바보로 생각하는 건 아니죠?”영미는 순간 긴장했다. 최군형의 말 속엔 어딘가 숨은 뜻이 있는 듯했다.최군형의 깊고 복잡한 눈빛을 파악하기 어려웠다.표아정은 천천히 일어나 어깨에 걸친 숄을
백인서는 복잡한 눈빛으로 최지용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그때 최지용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표아정이었고 다급한 목소리로 서둘러 돌아오라고 재촉했다.최지용은 결국 어머니의 말에 따라 백인서를 데리고 최씨 집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넓은 거실에는 최군형과 강소아도 나와 있었고 모두 엄숙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백인서가 들어서자, 표아정이 백인서를 올려다보며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다.강소아는 백인서와 눈을 마주치며 단호하게 미소 지었다.백인서가 의아해하던 찰나, 영미가 천천히 밖에서 걸어 들어왔다.“아줌마, 지용 오빠. 제가 권온유의 행방을 알아냈어요.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뭐라고?”최지용이 놀라서 물었다.“네가 어떻게 아는데?”영미는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지용 오빠, 특수부대 출신이라고 정보가 우리보다 더 빠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최씨 가문은 만능이 아니에요, 최씨 가문도 모르는 정보가 있다고요.”표아정은 가볍게 기침하며 차분히 상황을 지켜보았다.최군형과 강소아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떤 일이 일어날지 주목하고 있었다.최지용의 이마에는 점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미의 눈에는 한 줄기 교만한 빛이 번졌다.영미는 오는 길에 이미 모든 계획을 짰다. 정대명의 말이 맞았다. 누구를 훔치든 상관없었다. 인신매매범의 딸인 백인서가 아이들을 해치러 다닌다는 누명을 씌우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하면 백인서는 모두의 신뢰를 잃게 될 터였다.영미는 이제 한 아이의 엄마가 된 강소아가 인신매매범을 곁에 둘 리 없다고 믿었고, 최지용 역시 이 사실을 알면 더는 백인서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래서 영미는 정대명을 배신하기로 마음먹었다.영미는 권온유를 넘기고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한패가 되어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주장할 계획이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백인서는 변명의 여지도 없이 궁지에 몰릴 것이었다!“지용 오빠.”영미는 고개를 돌려 최지용을 바라보며 한 글자씩 천천히 말했다.“권온유는 정승
“그... 괜찮아!”정승우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권온유에게 말했다. 정승우는 이곳에서 권온유를 반드시 데리고 나가겠다고 결심했다.그런데 이때, 공장 문이 “쾅” 하고 열리더니 곧바로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정승우는 재빨리 권온유에게 눈짓했고 권온유도 알아채고는 즉시 땅바닥에 쓰러져 의식이 없는 척했다.정승우는 벽에 기대어 눈을 반쯤 감았다.“이 아이인가요?”영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맞아.”정대명은 영미를 흘깃 노려보며 묵묵히 대답했다.영미는 두 걸음 앞으로 다가서서 희미한 빛 속에 있는 아이를 살펴보더니, 곧 얼굴빛이 확 변했다.“이 아이... 혹시 권씨 집안의 막내딸 아니에요?”정대명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애초에 아이를 훔쳐 올 때 이 아이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 리가 없었다.“정대명 씨.”영미가 차갑게 웃으며 돌아보았다.“제가 최씨 가문 집안 아이를 훔쳐 오라고 했지, 권씨 집안 아이를 훔치라고 했나요? 이러고도 저를 속이지 않았다고요?”“그게...”정대명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영미 아가씨, 어차피 목적은 백인서를 곤경에 빠뜨리는 거잖아? 그러니 누구를 훔쳐 오든 상관없지 않아? 아이를 훔치기만 하면 유괴범이 되는 거니까.”이 말은 영미에게만 충격을 준 게 아니었다. 정승우의 귀에도 또렷이 들어왔다.“좋아요.”영미는 깊은숨을 들이마신 뒤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이 아이는 잘 지키고 있어요, 제가 다시 연락할 테니까.”...한편, 권씨 집안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권욱은 조순영을 탓하며 아이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했고, 조순영은 오열하며 남편을 원망했다. 조순영은 권욱이 바깥에서 여자와 부적절하게 얽히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라고 했다.“헛소리하지 마! 사람들이 나한테 어떤 소문을 퍼뜨렸는지 잘 알잖아. 결혼 생활 내내 너한테 부끄러운 일 한 적 없어.”“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정말 떳떳하게 행동했다면 왜 사람들이 당신만 가만두지 않는 건데?”며칠 전까지만
권온유의 질문에 정승우는 당황했다.권온유는 커다란 눈망울로 정승우를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했던 슈퍼맨 같은 오빠가, 이제는 먹을 것 하나 구하지 못하는 모습이 되어버린 것이다.정승우는 어색하게 입가를 씰룩이며 권온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이야기를 이어갔다.“너, 정말 배고파?”“네!”권온유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 작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원래는 엄마랑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 했어요. 엄마가 특별히 고등어조림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하셨거든요... 엉엉... 엉엉...”“울지 마, 울지 마! 그냥 생선 하나 가지고...”“나 배고파!”정승우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아이와 대화하는 건 그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겨우 권온유를 달래고 나서 정승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팔을 걷어붙이며 권온유에게 내밀었다.“너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 배고프면, 여기 한번 물어볼래?”권온유는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정승우를 바라보았다.“우리 집은 가난해서 늘 먹을 게 부족했거든. 그래서 어릴 때 너무 배가 고프면 이렇게 배고픔을 달랠 만한 걸 물곤 했어.”권온유는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배고픔을 달랠 만한 것'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정승우는 웃으며 계속 설명했다.“예를 들어 쌀통 같은 거야. 한때 쌀이 들어 있던 쌀통은 비어 있어도 쌀 냄새가 남아 있거든. 그래서 쌀통 가장자리를 살짝 물면서 하얀 쌀밥을 먹는 상상하는 거야. 그러면 배가 덜 고파져.”“그리고 이웃집에서 밥하는 냄새를 맡으며 그 밥을 먹는 상상을 하는 거야. 그러면 그렇게 배고프지 않더라고.”권온유는 정승우의 이야기에 넋을 잃고 입을 벌린 채 있었다. 정승우는 웃음을 터뜨렸다.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한때 정대명이 도박과 술에 빠져 정승우를 굶겼던 시절은 그야말로 비참한 순간들이었다.잠시 후, 권온유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고 정승우는 속으로 ‘큰일이다'라고 생
영미는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최지용을 지켜보았다.최지용은 다소 초조한 기색으로 구석에 앉아 휴대전화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 전화를 걸기도 했다.영미는 바로 뒤를 따라갔고 최지용의 낮고 다급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찾았습니까?”“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세요... 만약 납치범의 목적이 돈이었다면 분명 전화를 걸어올 겁니다!”영미의 가슴이 철렁하며 내려앉았다.납치범이라니? 대체 뭘 찾는다는 거지?백인서와 통화한 걸까?그때, 최군성이 큰 소리로 외쳤다.“지용이 형, 여기서 뭐 해요?”영미는 얼른 몸을 숨겼고 최군성은 최지용에게 다가가 최지용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우리 형이 찾고 있었는데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거예요? 어서 와서 먹고 즐기자고요!”최지용은 최군성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영미와 눈이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잠시 멈칫했다.영미는 급히 시선을 피하며 억지 미소로 인사했다.“지용 오빠...”“어, 영미?”최군성도 배윤아처럼 물었다.“여기 웬일이야? 형님이 널 초대한 것 같지 않은데?”“그게...”영미는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최군성은 영미의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최지용을 끌고 가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최지용은 점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영미가 도대체 여기 왜 있는 거지? 평소에는 볼 수 없던 사람이, 왜 하필 오늘 온유가 사라진 날에 나타난 걸까?그때, 최군형과 강소아가 가원이를 품에 안고 나타났다.강소아는 아이를 보행기에 앉혔고 아이는 보행기 가장자리를 잡고 작은 발을 내디뎠다. 이 모습에 방 안의 모든 사람이 환호성을 질렀다.영미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자리를 떠 교외의 버려진 공장으로 향했다.그 시각, 정대명은 영미의 지시에 따라 승합차를 몰고 공장에 도착해 있었고 영미가 도착했을 때 그는 공장 문 앞에서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영미는 핸드백을 휘둘러 정대명에게 던졌다.“정대명 씨, 감히 날 속여
“너 따위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정대명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결국엔 자기 아들이었기에 정승우에게 감출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때리고 꾸짖어도 떠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정대명은 서랍에서 가위를 꺼내 들고는 권온유의 양 갈래머리를 단칼에 잘라냈다. 머리카락이 천천히 바닥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있다가 막아서려는 순간, 자신과 정대명 사이에 힘의 격차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작정 나섰다가는 역부족일 터였다.정승우는 이를 악물고 정대명에게 다가가 물었다.“아빠, 정말 이 아이를 팔 생각이에요?”“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영미라는 그 여자가 원하는 거야!”정대명은 불만스레 대꾸하며 정승우에게 옷장에 있는 헌 옷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정승우가 옷을 가져오자, 정대명은 손을 뻗어 권온유의 예쁜 드레스를 찢으려 했다. 정승우는 급히 소리쳤다.“뭐 하는 거예요!”“이 자식이!”정대명은 정승우를 노려보며 소리쳤다.“조용히 해! 죽고 싶어?”“아빠, 이건...”“이 애한테 옷을 갈아입히려는 거야! 이렇게 좋은 옷을 입고 있으면 바로 눈에 띄잖아.”정승우는 다가가 정대명을 옆으로 밀치며 말했다.“제가 갈아입힐게요!”“이놈이...”정대명은 하려던 말을 멈추고 피식 웃었다. 그는 정승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아하, 아빠를 도와주고 싶구나? 역시 아들은 아들밖에 없지! 그래, 네가 손이 빠르니까 빨리 옷을 갈아입혀. 둘이 함께 가자고!”정승우는 속으로 혐오감이 치밀었지만, 지금은 그저 상황을 지켜보며 대응하는 수밖에 없었다.정승우는 권온유의 드레스를 벗기지 않고, 정대명의 헌 옷을 위에 입혀 단단히 감쌌다. 그런 다음 모자를 씌워 얼핏 보면 남자아이처럼 보이게 했다.“좋아, 이 정도면 되겠어!”정대명은 정승우에게 눈짓을 보내며 말했다.“뒷문에 승합차가 준비돼 있대. 어서 출발하자!”“아빠, 이 소녀는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예요?”“교외지!”정대명은 귀찮다는 듯 말했다.“빨리 움직
권온유는 깜짝 놀라며 정대명을 멍하니 쳐다보았다.“아저씨가 맛있는 걸 가지고 왔단다. 배고프지 않니?”권온유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달아나려 했다. 정대명은 급히 권온유 앞을 가로막았다.“아니, 가지 마!”정대명은 두 손으로 권온유를 꼭 붙들며 말했다.“그게... 네 엄마가 나한테 너를 데려오라고 부탁했어!”엄마라는 말을 듣고 권온유는 잠시 멈칫했다.“정말이야, 네 엄마가 부탁한 거라니까!”정대명은 거짓말을 이어갔다.“방금 네 엄마가 갑자기 어디론가 가버렸지? 너 보고 기다리라고 했잖아?”“네... 맞아요.”“그래!”정대명은 웃으며 말했다.“그런데 네가 여기저기 막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엄마는 내가 여기 있는 걸 알 거예요. 저는 여기서 조금 놀다가 다시 휴게실로 돌아갈 거예요!”“오... 그렇구나.”정대명은 잠시 생각을 굴렸다.“아저씨가 휴게실이 어딘지 아니까, 내가 데려다줄게!”권온유는 경계하며 정대명에게서 몸을 빼내고 두 걸음 물러났다.“얘가! 난 정말로 네 엄마 친구라니까. 네가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걱정하지 않겠어? 맞지?”“자, 자! 아저씨가 데려다줄게. 착하지!”정대명은 권온유를 갑자기 붙들어 어깨에 둘러맸다. 권온유는 본능적으로 소리치려 했지만, 정대명의 손이 입을 단단히 막고 있어 소리를 낼 수 없었다.어린 소녀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른 남자를 이길 수는 없었다. 정대명은 권온유의 머리 뒤쪽을 세게 내리쳐 기절시켰고, 온유가 들고 있던 인형은 땅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익숙하게 호텔로 와서 지난번 일을 핑계로 다시 정대명에게 돈을 뜯어낼 생각이었는데, 방 안에 기절한 어린 소녀가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어른 일에 참견하지 말고 신경 꺼!”정대명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방금 정대명은 온유를 데려오며 보안과 호텔 직원의 눈을 피하고자 아이를 어깨에 메고 가지 않고, 자신의 아이인 것처럼 속여서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