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강서연이 솔직하게 대답했다.“저희 엄마가 평소 좋아하는 게 별로 없는데 이건 마음에 들어 하셔서 최대한 소원을 이뤄드리고 싶거든요. 여사님께서 사셨으니 어쩔 수 없죠.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걸 빼앗을 수는 없으니까요.”김자옥이 흐뭇하게 웃었다.‘교양 있는 아이네. 지금 젊은 여자애 중에 이토록 점잖고 차분한 애가 거의 없는데.’그녀는 문득 임나연이 떠올랐다.임나연을 예비 며느리로 점 찍은 건 두 집안이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인 형편이 엇비슷하고 최연준이 임나연과 결혼하면 김씨 가문에도 좋은 점을 있을 거로 생각하여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임나연의 얼굴도 괜찮아서 최연준과 함께 서 있으면 나름 어울리기도 했다.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임나연은 재벌 집 규수의 교양과 점잖음이라곤 눈곱만치도 없었고 그룹을 관리할 만한 능력도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일 년에 영국으로 여러 차례 와서는 그녀에게 아부나 하며 미친 듯이 쇼핑하는 게 전부였다. 그 바람에 임나연에 대한 인상이 점점 나빠졌다.김자옥이 얼굴만 예쁘고 머리가 텅 빈 여자를 가장 싫어했다. 게다가 임나연의 얼굴도 연예인 뺨치게 예쁜 정도는 아니었다...“여사님?”강서연은 히죽 웃으며 생각에 잠긴 그녀를 끄집어냈다.“사진 찍어도 되나요?”“그럼요. 마음껏 찍어요.”정신을 차린 김자옥이 가볍게 웃었다.“고맙습니다.”“아참.”김자옥은 자꾸만 강서연과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저 그림 속에 그려진 게 뭔지 알아요?”“반딧불이잖아요.”강서연이 술술 대답하다가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하지만...”반딧불의 모양이 어딘가 이상하게 생겼다. 날개가 아래위로 두 층이었다.“하지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어요.”그녀가 웃으며 말했다.“아마도 이런 게 바로 예술가의 창의력이겠죠.”“예술가가 아무 근거 없이 상상만으로 그린 게 아니에요.”김자옥이 그녀를 보며 말을 이었다.“날개가 두 층인 이 반딧불은 남양 사바 지역의 숲에 살고 있는데 아주 드물어요.”“네?”강서연이 놀라움을 감추
강서연은 윤문희의 앞에 나서고는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김자옥을 쳐다보며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여사님, 저희 엄마가 몸이 안 좋으셔서 그러는데 이런 식으로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김자옥의 두 눈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어디가 안 좋아요?”“그것까지 얘기하긴 좀 곤란하네요.”강서연은 벌벌 떠는 윤문희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엄마 모시고 집으로 돌아가야겠어요.”“잠깐만...”김자옥은 두 사람을 말리지 못했다. 강서연은 윤문희와 함께 중세 전시장을 황급히 빠져나왔다.“대표님.”비서가 나지막이 물었다.“한번 조사해 볼까요?”“조사할 게 뭐가 있어.”김자옥이 그를 힐끗 째려보았다.“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데 내가 쟤를 모르겠어?”비서는 더는 아무 말 없이 슬쩍 물러났다.김자옥은 멀어져가는 강서연과 윤문희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 급히 가는 바람에 윤문희가 금방 산 스카프를 바닥에 떨구고 말았다.스카프를 주운 그녀의 입가가 살짝 실룩거렸다.“저 나이를 먹어도 취향은 여전하네. 어휴, 아직도 자기가 무슨 공주인 줄 아나. 그나저나... 공주는 별로지만 딸 하나만큼은 잘 낳은 것 같네!”...윤문희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 강서연은 긴장한 얼굴로 약상자를 이리저리 뒤졌다. 그녀가 뭘 찾고 있는지 알고 있었던 윤문희는 손을 흔들며 웃었다.“서연아, 그만 찾아. 나 약 안 먹어도 돼.”강서연이 걱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지금 괜찮아졌어. 약 먹지 않아도 돼.”윤문희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냥 조금 피곤할 뿐이야, 잠깐 눈 붙이면 괜찮아져. 가서 네 원고 써, 얼른 일 마쳐야지!”“정말 괜찮아요?”“응.”“그럼... 옆에서 쓸게요.”강서연이 컴퓨터를 갖고 왔다.“저는 제 원고 쓸 테니까 엄마는 쉬고 있어요.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조치를 취할 수 있잖아요.”“그래.”윤문희는 상냥하게 웃으며 강서연의 머리를 어루만졌다.요 몇
최연준은 여주 별장으로 돌아온 후 김자옥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옷을 갈아입고 난 다음 인사드리러 위층으로 올라갔다.“엄마, 방은 마음에 들어요?”“응, 마음에 들어.”김자옥이 마침 커피를 내려 방안이 옅은 커피 향으로 가득했다.그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이 아주 널찍하고 환했고 커다란 통유리 맞은 편에는 높은 산이 보였다. 방 안의 인테리어도 아주 분위기가 있었고 작은 장식품마저 고급스러움이 흘러넘쳤다.김자옥은 푹신푹신한 양가죽 소파에 앉았다. 이곳이 좋긴 좋았지만, 왠지 모르게 어색하고 소외감이 들었다.그녀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문희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을까? 다정하고 효심이 가득한 딸이 있으니 걔 방은 이것보다 훨씬 더 따스하겠지...’“엄마.”이상함을 감지한 최연준이 물었다.“왜 그래요?”김자옥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를 쳐다보는 눈빛에도 실망감이 어려있었다. 그녀가 살짝 떨고 있는 걸 발견한 최연준이 물었다.“추워요?”“응.”김자옥이 숄을 걸쳤다.“영국에서 오래 지내다 보니까 여기 날씨가 적응이 잘 안되네.”“그건 괜찮아요. 방 안의 온도를 수시로 조절하라고 할게요.”이 말이 평소에는 아무 문제 없는 말이었지만 하필 오늘 사이가 좋은 모녀를 본 바람에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엄마, 오늘 옷 너무 적게 입었어요. 이거 입어요.”김자옥의 귓가에 그때 그 다정하고 청아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문득 그녀는 최연준에게도 시험해 보고 싶은 생각이 스쳤다. 하여 마른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연준아, 나 옷 너무 적게 입은 것 같아...”“옷을 적게 입었다고요?”최연준은 그녀의 커다란 캐리어 다섯 개를 보면서 어안이 벙벙했다.“적게 입었으면 많이 입으면 되죠.”그의 대답은 아주 직설적이었다.“옷은 충분하게 챙겨왔죠? 부족하면 가서 사 오라고 할게요.”이번에도 다른 사람에게 맡기려고 했다. 김자옥의 낯빛이 어두워지기 시작했
최연준의 표정이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김자옥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가 대체 왜 강서연에게 이렇게나 편견을 가졌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 여자를 지켜야겠다는 마음 하나는 변함이 없었다.“이 일은 그냥 이렇게 하기로 해.”김자옥이 쌀쌀맞게 말했다.“비록 너랑 임나연이 혼약을 맺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두 집안에서 너희 둘을 결혼시키려 했잖아. 그래서 정리하자면 조금 시끄러울 거야. 그런데 걱정하지 마. 임씨 집안은 내가 나서서 해결할 테니까.”김자옥은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다독였다.“넌 그냥 엄마 말대로 따르면 돼. 내가 얘기한 그 여자애랑 친해지려고 노력해봐.”“싫어요.”최연준이 퉁명스럽게 세 글자를 내뱉었다.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다 못해 주변의 공기마저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김자옥이 엄숙하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째려보았다.“엄마.”최연준이 또박또박 말했다.“계속 그렇게 몰아붙이신다면 어진 엔터테인먼트의 제 지분을 전부 뺄 겁니다!”“뭐라고?”김자옥이 화들짝 놀랐다.“오성의 룰이 맨체스터랑 다르다는 거 아시죠?”그의 목소리는 덤덤했지만 한 자 한 자 힘 있고 날카로웠다.“만약 이 회사에 제 지분이 없다면 외부자금이 들어오지 못할 것이고 엄마가 먼저 투자했던 돈도 아무런 이익을 얻지 못할 겁니다. 물론 엄마가 그 돈이 부족한 건 아니죠.”그가 냉정하게 말했다.“하지만 실패하는 그 느낌을 싫어하시잖아요. 만약 이 일이 외할아버지와 이사회, 심지어 삼촌의 귀에 들어간다면 엄마는 김중 재단의 웃음거리가 될 겁니다. 그래도 계속 절 몰아붙이실 건가요?”김자옥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아무튼 저는 엄마가 얘기한 그 여자랑 만나지 않을 겁니다.”최연준은 문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그러니까 포기하세요!”...강서연은 원고를 제출한 후 집에서 윤문희를 보살피려고 신문사에 휴가 냈다.윤문희가 한사코 괜찮다고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마음이 놓이질 않
“너 이 녀석...”김자옥은 강서연이 보면 볼수록 더 마음에 들었다.강서연은 몸을 옆으로 돌리며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김자옥을 본 순간 윤문희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엄마, 아주머니가 엄마를 보러 오셨대요.”윤문희는 잠깐 침묵하다가 강서연이 아직 옆에 서 있는 걸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가서 장 봐. 엄마는 아주머니랑 얘기 좀 나누고 있을게.”강서연은 입술만 잘근잘근 씹을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걱정할 거 없어.”윤문희가 손을 흔들었다.“이 아주머니는 엄마랑 가장 친한 친구야!”강서연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가기 전에 윤문희에게 휴대 전화를 꼭 쥐고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전화하라고 당부했다.강서연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김자옥의 눈빛이 복잡미묘했다.“부럽지?”윤문희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일어나서 차를 내리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그날 서화전에서도 알아봤어. 내가 딸 낳은 거 엄청 부러워하더라?”김자옥이 두 눈을 부릅떴다.‘예나 지금이나 계속 내 머리 꼭대기에 앉으려고 해 아주. 됐어, 나도 딱히 변한 건 없으니까 이번 한 번만 봐줄게.’“그래. 딸이 있어서 얼마나 좋아.”김자옥이 가볍게 웃었다.“하지만 딸 잘 지켜봐. 혹시라도 또 너처럼 쓰레기 같은 남자를 따라가면 어떡해!”“김자옥! 너...”‘역시 넌 한마디도 지지 않아!’서로 얼굴을 쳐다보는 두 사람의 표정이 참으로 다양했다.출신이 고귀한 그녀들도 그동안 파란만장한 삶을 보냈다. 하지만 다시 돌아왔을 땐 여전히 서로의 곁을 지키던 그때의 그 어린 소녀였다.두 사람은 동시에 활짝 웃었다. 그동안 아무 연락도 주고받지 않다가 오랜만에 만나도 여전히 할 얘기가 끝도 없었다.고작 20분이면 마트에 다녀올 수 있었지만, 윤문희는 강서연에게 전화를 걸어 조금 늦게 들어오라고 했다. 하여 그녀는 카트를 끌며 마트를 하도 돌아다닌 바람에 가격을 전부 다 외울 기세였다.윤문희는 그동안 겪었던 일을 김자옥에게 간단하게 들려주었다.김자옥은 그녀의 손을
윤문희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잠시 후 김자옥이 먼저 눈치채고 물었다.“설마 그 약의 레시피?”그녀는 윤씨 가문의 조상이 과거 왕실 귀족의 어의였고 대대로 이어져 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중에 남양의 독특한 약초와 결합하여 레시피를 만들었는데 그게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었다.윤문희는 만감이 교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김자옥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그 레시피는 원래 네 것이야. 윤정재가 너한테 준 건 원래 주인한테 돌려주는 건데 그걸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레시피는 내 것이 아니야.”윤문희가 나지막이 말했다.“윤씨 가문의 과거 레시피는 진작 이리저리 흩어졌어. 나중에 우리 할아버지가 한 의대생을 지원해 줬는데 그분이 바로 정재 씨의 친아버지셨어. 그분이 계속 우리를 도와주었고 레시피도... 정재 씨의 아버지가 개발하신 거야. 그 약이 그때 아주 불티나게 팔렸대. 하지만... 내가 윤씨 가문을 나온 후로 윤제 제약공장에서 생산한 약들이 전부 레시피를 바꾸었대.”김자옥이 화들짝 놀랐다.“레시피가 네 손에 있어서? 그게... 말이 안 되는데. 윤정재가 그 레시피를 진작 외웠을 거 아니야.”분위기가 삽시간에 조용해졌고 물이 부글부글 끓는 소리만 들려왔다.“그러니까 윤정재가 너한테 주는 마지막 마음이라는 건가?”김자옥의 목소리가 거의 기어들어 갔다.“그런데 왜 그걸 너한테 줬대?”윤문희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천천히 말했다.“난 정재 씨의 아버지를 뵌 적이 없어. 어릴 때는 정재 오빠라고 부르다가 나중에야 윤씨 가문의 양자인 걸 알았어. 그러다가...”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고 윤정재는 그녀를 끔찍이도 아꼈다.하지만 그때 두 사람의 사랑을 응원하는 사람이 없었다. 부모님뿐만 아니라 가족 친척들도 반대했고 그녀의 절친이었던 김자옥마저도 격렬하게 반대했었다.결국 윤문희는 홧김에 집을 나왔다. 원래는 사랑하는 남자와 행복하게 지내고 싶었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윤씨 가문의 주인이 바뀔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윤정재는 그녀를 포함한 모든
“야, 문희야.”김자옥은 문뜩 생각이 들었다.“이 레시피들을 가져다가 팔면 값어치를 계산할 수 없겠지? 그러고 보니 윤정재 이 인간이 인성을 전부 잃은 건 아니네. 그래도 너의 살길을 남겨 두었어!”김자옥은 빠르게 머릿속에서 계산을 해봤는데 제약업계의 이익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예상이 됐다.“문희야, 네가 손에 들고 있는 것들이 김중 재단보다 더 값어치가 있을 줄은 몰랐어!”“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윤문희는 다과를 꺼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안 팔 거야!”“너 진짜...”김자옥은 그녀를 흘겨봤다.“너는 참 머리가 안 돌아가! 내 며느리가 너를 따라다니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르겠다...”“무슨 며느리?”윤문희가 멈칫했다.“너 설마 잊은 거야?”김자옥은 진지하게 말했다.“전에 약속했었잖아. 네가 딸을 낳고 내가 아들을 낳으면 우리가 사돈을 맺자고!”“안 돼! 내 딸은 임자 있어!”김자옥은 잠시 침묵하다가 눈에 실망의 빛이 스쳤다.“네 딸... 결혼했어?”“아직은 아니지만 곧 할 거야!”“결혼하지 않았다면 무효야!”또 시작이다.윤문희는 이상한 사람을 보는 듯 위아래로 그녀를 훑어봤다.“지금 뭐 하려고... 남의 인연을 망치고 싶어? 내가 장담하는데 난 내 사위가 마음에 들어! 절대로 서연이랑 헤어지게 두지 않을 거야!”“네가 내 아들을 만나면 틀림없이 더 맘에 들 거야!”“그런 건 나중에 얘기하자.”윤문희는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나에 대해서 절대로 말하고 다니면 안 돼. 서연이도 내가 어떤 신분인지 모르니까... 나도 더 이상 남들이 알게 하고 싶지 않아.”김자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겠어.”윤씨 가문 사람들은 윤문희가 죽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오랜 세월 동안 윤정재가 윤제 그룹을 잘 다스려 왔다.만약 윤문희가 다시 나타난다면 오히려 파장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가문 중 다른 속셈이 있는 사람에게 이용당하면 그땐 득보다 실이 클 수 있다.“내가 잔소리 좀
강서연은 점심시간이 다되어서 그가 안 바쁠 것으로 생각했다. 전화 너머 회의실에서 폭풍이 쏟아질 것 같은 분위기의 회의가 막 끝났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최연준은 이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를 듣자, 마음이 녹아내렸고 화가 난 성질도 구름처럼 흩어졌다.그는 살짝 웃었는데 눈빛에는 강서연에 대한 사랑이 듬뿍 담겨있었다.강서연은 핸드폰에서 한참 소리가 나지 않자 물었다.“지금... 바빠요? 내가 방해한 거 아니죠?”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야.”“뭐 하고 있어요?”“사실을 듣고 싶어?”“당연하죠!”“너의 생각 중.”낮고 굵은 한 마디는 강서연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작은 손은 핸드폰을 쥐고 손가락은 안절부절하고 있다.“너는 뭐 해?”“나도 당신 생각하고 있어요.”최연준은 인상을 펴고 활짝 웃었고 조금 전의 얼굴의 먹구름은 싹 걷혀나갔다.회의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대낮에 귀신을 본 듯한 눈빛으로 방한서를 바라보았다. 방한서는 그들에게 눈빛을 보내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점심 먹었어요?”강서연이 물었다.“안 먹었으면 우리 집으로 오세요. 제가 랍스터를 사 왔는데 볶음밥 만들어 줄게요.”최연준의 영혼은 이미 고개를 끄덕여 승낙했고, 온 회의실 사람들을 두고 강서연의 집으로 날아가 밥을 기다리고 있다.하지만 현실은...최상 그룹의 일이 전부 얼기설기 뒤얽혀 있어 그는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그는 방한서를 바라봤다. 방한서는 마음이 초조한 나머지 손발을 모두 동원해서 그에게 알렸다. 오후에는 담판이 있고 회의가 있으며, 고객이 방문하고 봐야 하는 서류도 산더미라고...그런데 최연준은 핸드폰에 대고 담담하게 말했다. “지금 어디야?”“우리 집 근처에 있는 마트 입구에 서 있어요.”강소연은 가볍게 웃었다.“잠깐만 거기서 기다려. 내가 금방 갈게.”그가 전화를 끊자, 방한서가 눈을 부릅떴다. “도련님, 이...”“무슨 문제라도 있어?”그가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난 이제 점심시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