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준은 정신을 차리고 나서 먼저 강서연을 회사로 돌려보내라고 방한서에게 말했다.여주 별장으로 돌아온 후 그는 영국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영국은 지금쯤 새벽 시간이다. 전화 속에서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는데 틀림없이 김자옥은 이미 하루를 바쁘게 시작했을 것이다.“어머니.”최연준은 예의 갖춰 말했다.“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나 지금 공항이야. 10시간 후 오성에 도착하니 공항에 마중 나오는 사람 보내줘.”“네?”그는 깜짝 놀랐다.“왜, 내가 가면 안 돼?”“당연히 아니죠.”최연준은 바로 마음을 진정시켰다.부모님이 이혼한 뒤로는 어머니가 오성에 오는 일은 드물었다. 어릴 적부터 살던 곳이 아니고 전남편 집에 대한 안 좋은 기억도 갖고 있다. 자식이 여기 있더라도 김자옥의 성격으로는 아들 때문에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그래서 어릴 때부터 최연준이 영국에 가는 횟수가 더 많았다.지금 김자옥이 갑자기 오성에 온 것은 아마도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최연준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 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어머니께서 이번에 저 때문에 오려고 하는 거예요?”“너도 알고 있네.”김자옥이 웃었다.“최진혁이 내가 지금 안 오면 바로 손주 보게 된다고 얘기하더라.” 최연준이 냉소했다.“삼촌이 어머니 앞에서 헛소리 지껄이는 거예요.”“어머니도 삼촌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아시잖아요! 삼촌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돼요.”“여자 있는 건 사실이지?”김자옥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했다.최연준의 손가락은 전화기를 너무 꽉 쥐고 있어 핏줄이 튀어나왔다. “이 일을 숨길 생각은 없었어요. 저는 그 사람을 많이 사랑해요. 얼마 전에 우리 사이에 오해가 좀 있어서... 이제 오해가 풀렸으니 날 잡아서 영국에 데려가 보여드리려고 했어요. 그런데 삼촌의 입이 가벼워서 뒤에서 먼저 알려드릴 줄은 몰랐어요.”“연준아.”김자옥은 잠시 말이 없었다.“비록 나는 최씨 집안 사람들과 엮이기 싫고 더 이상 최씨 집안의 며느리도 아니지만,
임우정은 쑥스러워하면서 가볍게 웃었다.“이렇게 갑작스럽게 결혼한다고요?”최연준은 둘을 보며 말했다. “경섭 씨, 오성에 정착한 지 얼마 안 돼서 더 바빠질 수도 있어요. 이때 결혼식을 올리는 건 너무 성급하지 않나요?”“안 돼요, 못 기다려요!”육경섭이 더 큰소리로 웃었다. “더 기다리다가는 아기 100 일상까지 같이 차리겠어요!”“네?”강서연과 최연준은 어리둥절했다.임우정이 교통 정리에 나섰다.“저 임신했어요. 이제 막 두 달이에요.”강서연은 너무 놀란 나머지 그녀를 둘러싸고 몇 바퀴를 돌았다.그녀의 몸매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키가 크고 날씬한데 뱃속에 벌써 애기가 있다니 믿기지 않는다!“언니,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요!”“처음 석 달은 불안정해서 떠벌리고 다니면 안 된다고 했어! 이제 알아도 안 늦었어. 어차피 넌 내 아기의 작은 엄마야, 도망갈 수 없어!”“누가 도망간대요? 아들한테 줄 선물을 준비해야지!”“아들인지 어떻게 알아? 난 딸이 더 좋은데!”두 여자는 하하 호호 하면서 아기의 미래 모습을 상상했다.최연준은 잠시 표정이 어두워졌다. 술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 맥주 한 캔을 땄다.“이봐요.”갑자기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왜 그래요? 아들 생겼는데 기분이 안 좋아요?”그는 뒤돌아서서 육경섭을 봤다. 그는 술에 취해 바보처럼 웃고 있었다.“당연히 기쁘죠.”최연준은 중저음으로 말했다.“경섭 형님, 축하드려요! 드디어 우정 씨랑 여기까지 왔네요.”육경섭도 맥주 한 캔을 따서 그와 짠하고 한꺼번에 반병이나 마셨다.“오성에서 저와 가까이 지내는 것은 최지한과 대립하는 것과 같아요. 혼자서도 특히 조심하세요. 곧 아빠가 될 사람인데 가족을 지켜야죠.”“저도 알아요. 최지한은 수단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저도 그 수단들 아래서 살아남은 사람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육경섭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뭐든지 말해 주세요.”“글쎄... 있긴 있는데!”육경섭은 미간
최연준은 그를 한 번 째려보고 냉랭하게 말했다.“말 못 하면 입을 다물어 주세요!”육경섭은 박장대소했다.왠지 모르게 최연준과 나석진이 대립 관계 같아보이는데... 사실 이렇게 말할 수도 없다. 최연준은 그냥 강서연에게 접근하는 모든 남자를 다 싫어할 뿐이다.“됐어요!”육경섭이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서연 씨가 인터뷰만 한 번 했을 뿐이잖아요. 업무적으로 만난 사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신경 안 써요.”그는 인정하지 않고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얼굴에 다 쓰여 있는데, 신경 안 쓴다고요?”육경섭은 그를 비웃었다.“이렇게 합시다. 저를 도와서 나석진을 초대해 주세요. 그럼, 제가 나석진이 행사에서 망신당하게 만들어 줄게요!”그제야 최연준의 안색이 조금이나마 좋아졌다. 두 남자는 서로를 마주 보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제가 이런 쪼잔한 놈으로 보이세요?”이 말을 남기고 최연준은 돌아서서 핸드폰을 꺼내 하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방법을 생각해서 나석진을 육 대표 행사에 초대시켜. 잘 설명해 드리고!”육경섭은 가만히 듣기만 했다.“어쨌든 최우수 연기상을 받은 사람이니 남들 앞에서 망신당하지 않도록 하세요.”최연준은 덤덤하게 말했다.“이 기회에 나석진과 잘 이야기해 보고 되도록 계약하세요.”“계약하고 나서 나중에 천천히 괴롭히려고요?”최연준은 그를 힐끗 봤다.“저는 나석진과 아무 원한도 없는데 왜 사람을 괴롭히겠어요? 그냥 경섭 씨 생각해서 하는 소리예요. 나중에 나석진이 열심히 목숨 걸고 돈을 벌면 회사도 같이 발전할 수 있잖아요!”육경섭은 그 말에 어이없이 웃었다.‘목숨 걸고 돈을 벌라고? 그럼 인터뷰할 시간이 있겠어? 스케줄이 꽉 찼으니, 강서연도 나석진을 만나지 못할걸.’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셋째 도련님이 한 수 위지!...정섭 엔터테인먼트의 행사는 성대했다. 그날, 반 이상의 연예계가 참석했을 뿐만 아니라 상업계 정치계의 유명 인사도 많이 참석했다.그리고 나석진의 출석만으로도 분위기가 더 뜨거워졌다.
강서연은 편한 소파를 찾아 기대어 쉬려고 했는데 멀지 않은 옆 테이블에 한 사람이 앉아서 카드에 몰두하고 있는 것을 봤다.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그 사람을 봤는데...‘나석진? 나석진 씨가 왜 여기 있지?’그녀가 어리둥절해하는 틈을 타서 나석진도 그녀를 발견했다. 그는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그녀 옆에 앉았다.“안녕하세요.”강서연은 서둘러 몸을 곧게 펴고 앉았다.나석진 몸에는 좋은 향기가 감돌았고 그의 뚜렷한 이목구비와 어우러져 더욱더 분위를 돋보이게 한다.“안녕하세요.”그는 웃으면서 인사했다.“여기서 뵐 줄은 몰랐네요. 오늘도 인터뷰하러 오셨나요?”“네.”강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대화가 끊겼고 나석진은 계속해서 카드에 집중해 테이블에서 놀기 시작했다.강서연은 그 카드 뒷면의 무늬를 보고 멈칫했다.“석진 씨도... 이거 할 줄 아세요?”나석진이 그녀를 봤다.“서연 씨도 할 수 있어요?”“이 카드는 트럼프 카드라고 하죠?”“저는 할 줄 몰라요. 하지만 저희 어머니가 할 수 있어요!”나석진은 안색이 변하더니 잠시 멈췄다.“어머니가 이런 카드를 정말 잘하세요. 누구도 어머니 상대가 되지 않아요! 하지만 다른 사람과 같이 노는 것은 봤는데...”“트럼프 카드는 여러 사람이 할 수도 있고 혼자 할 수도 있어요.”나석진이 흥분했다.“서연 씨 어머니께서 이런 카드를 할 줄 아시다니, 어디 사람인지 여쭤봐도 돼요?”강서연은 답을 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어머니 고향이 어디인지 물어본 적이 없다.나석진은 그녀의 침묵을 다른 뜻으로 오해했다. 그는 급히 사과했다.“미안해요. 일부러 서연 씨 프라이버시를 캐물을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궁금해서...트럼프 카드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이런 카드는 남양 쪽에서 온 것이고, 저는 성남 사람이에요. 성남이 남양과 거리가 가깝고 문화도 남양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저는 어릴 때부터 놀았어요.”강서연은 말은 듣고 히죽 웃었다.“석진 씨가 저보다 똑똑하
최연준은 여러 배우가 지켜보는 속에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그 몇 명의 배우들은 원래 여기서 잠깐 쉬고 있을 뿐이었는데, 나석진이 여자랑 같이 카드놀이를 하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최연준이 등장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문 앞에서 속삭거렸다. 그가 나타나자, 이곳은 강한 저기압에 휩싸인 듯 사람들은 답답함에 숨을 쉴 수 없었다.최연준의 곁에는 찬 공기가 맴돌았다.“서연아, 이 카드 아니야.”그는 낮은 목소리를 내고 강서연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손에 있는 다른 카드를 뽑아내면서 말했다.“이걸 내놔야 해!”강서연은 그가 온 것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최연준은 그녀의 머리를 주물렀다.다른 사람들은 이 다정한 장면을 보고 이들의 관계를 짐작하기 시작했다.나석진은 표정이 안 좋았고 문 앞에 있던 배우들도 서로를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육경섭이 달려와 이 상황을 보는 순간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셋째 도련님 오셨어요.”그는 최연준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시끌벅적한 자리를 싫어한다면 룸을 따로 준비하겠습니다. 나 배우님, 제가 배우님을 애타게 찾았어요. 밖에 자리를 오래 비우면 안 좋아요. 저랑 구체적인 계약에 관해 얘기해야죠.”말이 끝나자마자 육경섭은 최연준을 밖으로 끌고 나가고 싶었다.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든 간에, 절대로 이 질투심 많은 사람을 나석진이랑 같은 공간에 있게 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 같았다...그런데 그가 행동하기도 전에 일이 터졌다.“나 배우가 카드도 잘 치고 선생님 노릇도 잘하는 것 같은데... 저 역시 이 카드를 할 줄 알거든요. 저와 한 판 하실래요?”이건 거절할 수 없는 말투다.“이봐, 최연준 씨!”육경섭은 눈을 찌푸리며 필사적으로 눈치를 줬다.오늘은 정섭 엔터테인먼트의 좋은 날인데, 이 질투쟁이가 망치려고 하는가...“나는 단지 나 배우와 한번 겨루고 싶을 뿐인데, 육 대표가 왜 긴장해요?”최연준은 그를 곁눈질했다.“...”육경섭은 넥타이를 잡아당겼고 이 어처구니가
하지만 나석진이 위험한 수를 쓸 줄은 몰랐다.“나 배우님.”최연준은 고개를 들어 그를 봤다.“지금 아주 위험한 행동이니 신중하길 바랍니다.”“괜찮아요.”나석진은 웃으며 대답했다.“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으면 위험을 무릅써야죠. 배역을 따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감수할 수 있어요.”“맞는 말이긴 한데 모든 사람이 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나석진은 자신이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최연준이 내민 카드를 보고 어리둥절했다...곧이어 두 장, 한 장.최연준의 패는 다 나갔고 점수에서도 완승했다.나석진은 좌절했다.“나 배우는 재주가 많으시네요.”최연준은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단지 재주를 잘못된 곳에 쓰이면 시한폭탄이 되는데, 어느 날 갑자기 폭발하면 너무 아쉽잖아요!”“무슨 뜻이에요?”나석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최연준은 테이블 위의 모든 카드를 그의 앞으로 밀었다. 트럼프 카드는 거대한 부채처럼 쫙 퍼졌다.최연준의 강렬한 카리스마 때문에 모두 그 앞에서 경거망동하지 못하고 서 있었다.그는 강서연을 껴안고 비꼬는 듯한 눈빛으로 나석진을 바라봤다.“가면 안 되는 위험한 수는 가지 말고,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은 건드리지 마세요. 당신이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은 더더욱 그렇고요.”나석진은 눈빛이 어두워지며 말을 하고 싶었는데 최연준은 기회를 주지 않고 강서연을 데리고 떠나버렸다.육경섭도 같이 따라갔고 직원한테 이곳을 정리하라고 시켰다.한참이 지나서야 몇몇 배우들이 입을 열었다.“셋째 도련님의 카리스마가 장난 아니야... 나 방금 움직이지도 못했어!”“맞아, 그런데 그 기자 정체가 뭐야?”“셋째 도련님이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을 보니 틀림없이 도련님 여자겠지.”“그럼, 조금 전에 자기 여자한테 손대지 말라고 나 배우한테 경고한 거야?”나석진은 한숨을 내쉬고 최연준과 강서연이 떠나는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며 한참을 제자리에서 굳어 있었다....최연준은 호텔을 빠져나서는 순간부터 말이 없었다.그는 계속 그
“하고 싶은 거 없어?”그는 따뜻한 입술을 그녀의 귓가에 대고 낮게 깔린 목소리로 유혹하듯 말했다.강서연은 심장이 터져 나올 것처럼 쿵쾅거렸고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쑥스럽게 그에게 기댔다.“지금 가장 하고 싶은 건... 이렇게 당신을 안고 있는 거예요.”최연준은 잠깐 멈칫하는가 싶더니 이내 입이 귀에 걸렸다. 강서연이 쑥스러움을 많이 타기에 이런 일은 천천히 해야 했다. 하여 그는 단계적으로 하나씩 가르쳤다.“안은 후에는 뭘 하고 싶어?”“네?”강서연의 커다란 눈망울에 막연함이 담겨있었다.“예전에 어떻게 했었든지 생각해 봐.”그는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가볍게 웃었다.“우리 집에서... 어디서 날 안았지?”강서연은 그의 꼬임에 넘어가지 않고 일부러 말했다.“아, 예전에는 베란다에서 자주 안았었죠. 당신을 안은 채로 함께 별을 감상했잖아요.”최연준은 말문이 막혀버렸다.“아참, 연준 씨.”그녀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나 지금 별 보고 싶은데 같이 볼래요?”최연준은 썩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그래. 보자.”그의 목소리에 사랑이 가득 담겨있었다. 강서연은 몰래 교활한 웃음을 지었다.그런데 오늘 날씨가 별로 좋지 않았다. 안개가 자욱했고 추우면서도 습했다. 아무래도 별을 구경하는 건 그른 것 같다.강서연이 실망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며 억지로 웃었다.“지난번 당신이 오성에 있고 내가 강주에 있을 때 나한테 영상을 보냈었잖아요. 그때 보니까 여기 밤하늘이 아주 예쁘더라고요.”“걱정하지 마.”그의 눈빛이 다정하기 그지없었다.“오늘 밤하늘은 아주 예쁠 거야.”“하지만...”“나 따라와.”최연준이 강서연의 손을 잡았다.“꼭 별을 보게 해줄게.”그는 화들짝 놀란 강서연을 차에 태우고는 바닷가 길을 따라 동쪽으로 달리다가 최씨 가문의 개인 해역에 도착했다.그와 함께 차에서 내린 강서연은 푹신푹신한 모래사장을 거닐었다. 짠 냄새가 섞인 바닷바람이 코끝을 스쳤고 가끔 갈매기 소리도 들리곤 했
강서연은 그의 말대로 눈을 감았다.최연준이 그녀의 손바닥이 위로 향하게 뒤집더니 뭔가 쥐여주는 것 같았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 손에 목걸이 하나가 있었다.별과 달 모양으로 조각한 귀한 카슈미르 사파이어가 달린 백금 목걸이였다.“서연아.”그의 중저음은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너한테 주려고 별과 달을 땄어. 나랑 결혼해 줄래? 우리 평생 헤어지지 말자, 응?”입술을 앙다문 강서연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최연준은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지금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돼.”그가 다정하게 말했다.“시간 줄 테니까 천천히 생각해. 난 항상 여기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 기억하면 돼.”강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가슴팍에 기대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연준 씨.”“응?”“사실 지금 바로 대답할 수 있어요...”최연준은 순간 움찔한 마음을 진정하며 그녀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시간이 필요하긴 해요. 혼수를 준비해야 하니까.”그녀는 고개를 들고 진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그리고 이 세상을 더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해요. 당신한테 시집갈 때 당신이랑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러니까... 당신은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요. 절대 움직여선 안 돼요, 알겠죠? 언젠가는 내가 다가갈 거예요.”“응, 알았어!”그는 그녀의 눈을 보며 진지하게 대답했다.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밤하늘에 떠 있는 드론이 알록달록한 빛을 내며 모래사장을 밝게 비추었다.전방에 안개가 자욱해도 그는 별과 달을 그녀에게 따주었다. 그녀는 자신만 바라봐 주는 이런 남자가 곁에 있어 너무도 행복했다....김자옥이 오성에 도착하자마자 박경수는 그녀를 여주 별장에 데려다주었다.이번에 돌아와 보니 왠지 만감이 교차했다. 그녀는 최상 빌라에 들어오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여주 별장이 본가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언제 최문혁과 은미연을 마주칠지 모르니 말이다. 서로 마주쳐봤자 어색할 게 뻔하니,
경찰서 밖에서 최지용은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한참을 걷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젊은 경찰관이 안에서 뛰어나오고 있었다. 최지용은 급히 다가가며 말했다.“정호야!”정호라는 젊은 경찰관은 최지용을 보자 반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 녀석!”최지용은 정호에게 다가가 가볍게 주먹을 툭 날리며 말했다.“도대체 무슨 일이야? 왜 사전에 알려주지 않은 거야?”정호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방금 최씨 집안에서 백인서를 데려간 사람 중에 정호도 있었다. 최지용도 놀라웠지만, 영미 역시 경찰이 직접 찾아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떠나기 전, 정호가 살짝 눈짓을 보냈고 최지용은 그의 의도를 알아채 경찰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지용이 형.”정호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형수님께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잘 구분하고 계시니 문제없을 겁니다!”“도대체 누구 지시로 백인서를 여기로 데려온 거지?”“소아 아가씨예요!”정호는 어깨를 으쓱했다.“소아 아가씨가 갑자기 지시한 거라 사전에 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최지용은 살짝 놀랐다. 강소아의 지시라니.“형수님께서도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으니까요. 그 아이가 실종되기 전에 형수님께서 만난 적이 있거든요. 경찰이 형수님을 데려가서 조사하는 건 당연한 절차입니다.”최지용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피식 웃음을 지었다.강소아가 이런 ‘당연한 절차’를 이용해 백인서를 경찰서로 보낸 이유는 경찰서야말로 가장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또 누군가가 음모를 꾸며 백인서에게 덮어씌우려 한다 해도 경찰서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경찰서 안에는 일을 봐주는 사람들도 있으니 백인서가 여기서 며칠 지내는 동안 힘든 일 없이 외부의 소란도 피할 수 있는 셈이었다.최지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강소아는 정말 자매를 위한 배려가 남달랐다. 이렇게까지 배려심 깊은 방안을 생각해 내다니!“지용이 형.”정호가 계속해서 말했다.“도련님께서
영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소아 언니, 저를 믿지 않으세요?”“난 오직 사실만을 믿어.”“권씨 가문의 딸이 실종된 사건에 백인서 씨의 양아버지와 남동생이 관련되었어요, 그게 바로 사실이에요!”강소아는 순간 멍하니 있다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려 했다.세상에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다 있나 싶었다.호텔 뒷뜰에 있는 그 CCTV가 정말 완전히 고장 났다고 생각하는 걸까? 육씨 가문과 최씨 가문이 힘을 합쳐 그 고장 난 CCTV 하나도 못 고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최군형은 강소아의 어깨를 가볍게 눌러 안심시키며 슬며시 휴대전화를 건넸다.강소아는 화면을 확인했다. 최군형의 부하가 보낸 메시지였다.“도련님, CCTV 데이터를 복구 중입니다. 곧 진실이 밝혀질 겁니다!”강소아는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영미가 이렇게까지 백인서를 몰아세우는 걸 보니 마음 한구석에 무언가 꺼림칙한 게 남아 있는 것 같았다.어차피 꼬리가 저절로 드러날 것이었기에 그저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다.바로 그때, 집사가 다소 당황한 얼굴로 방에 들어섰다. 집사의 뒤에는 몇 명의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신분을 밝힌 후 방 안을 둘러보며 엄숙한 목소리로 물었다.“여기 백인서 씨가 계십니까?”표아정은 등을 꼿꼿이 펴고 대답했다.“경찰관님께서 여긴 무슨 일로 오셨나요?”“당신이 백인서 씨인가요?”“저는...”“백인서 씨가 납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신고를 접수했습니다!”“뭐라고요?”백인서는 얼굴이 창백해졌다.“백인서 씨, 조사에 협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희와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권온유가 납치된 지 하루가 지났다.그동안 정대명은 단 한 번 음식을 가져왔는데, 그것도 차갑게 식은 죽 한 그릇과 딱딱한 빵 한 조각뿐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귀하게 자란 권온유에게 이런 음식은 처음이었다. 울고 싶었지만, 감히 울지 못하고 그저 눈물을 참으며 빵을 조금씩 뜯어 먹고 있었다.정승우는 그런 온유의 모습을 보고
“아줌마,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그럼, 제가 알아낸 사실을 전부 말씀드릴게요!”영미는 입가에 교만한 미소를 띠며 백인서를 차갑게 한 번 쳐다보았다.“백인서 씨의 친어머니인 백홍은 인신매매범이었다는 사실, 모두 아셨나요? 백인서 씨의 어머니는 백인서를 정대명의 집에 맡겼고... 흥! 정대명의 아내도 백홍이 납치해 왔다는 소문이 있어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잖아요. 제 생각엔... 인신매매범의 딸이라면 그런 일쯤은 익숙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은 권온유의 실종이 정말로 백인서 씨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시나요?”“영미!”강소아가 나서며 분노를 가득 담아 소리쳤다.“허위 사실을 퍼뜨리지 마!”“소유 아가씨, 억울하네요!”영미는 강소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제가 이렇게까지 조사한 건 다 아가씨를 위한 거예요! 딸도 있는 사람이 백인서를 곁에 두고도 마음이 놓이세요?”“그만해!”최지용이 크게 소리쳤다.백인서는 몸을 떨며 믿기지 않는 눈으로 최지용을 쳐다보았다.그러나 최지용의 얼굴에는 의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최지용은 굳건한 눈빛으로 뒤에 있는 백인서를 지키고 있었다.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처럼 백인서를 아끼고 있었다.백인서는 코끝이 찡해지며 본능적으로 최지용의 손을 꼭 붙잡았다. 최지용의 따스한 손은 백인서에게 큰 용기를 주었고 그 온기가 어둠의 두려움을 잊게 해주었다.최지용은 백인서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고 다시 영미를 바라볼 때는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영미야.”최지용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두 집안의 관계를 생각해서 그저 넘어가는 거야. 더 이상 선을 넘지 마.”최군형도 나서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요, 백인서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모르겠어요? 영미 아가씨, 우리 최씨 가문 사람들을 바보로 생각하는 건 아니죠?”영미는 순간 긴장했다. 최군형의 말 속엔 어딘가 숨은 뜻이 있는 듯했다.최군형의 깊고 복잡한 눈빛을 파악하기 어려웠다.표아정은 천천히 일어나 어깨에 걸친 숄을
백인서는 복잡한 눈빛으로 최지용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그때 최지용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표아정이었고 다급한 목소리로 서둘러 돌아오라고 재촉했다.최지용은 결국 어머니의 말에 따라 백인서를 데리고 최씨 집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넓은 거실에는 최군형과 강소아도 나와 있었고 모두 엄숙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백인서가 들어서자, 표아정이 백인서를 올려다보며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다.강소아는 백인서와 눈을 마주치며 단호하게 미소 지었다.백인서가 의아해하던 찰나, 영미가 천천히 밖에서 걸어 들어왔다.“아줌마, 지용 오빠. 제가 권온유의 행방을 알아냈어요.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뭐라고?”최지용이 놀라서 물었다.“네가 어떻게 아는데?”영미는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지용 오빠, 특수부대 출신이라고 정보가 우리보다 더 빠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최씨 가문은 만능이 아니에요, 최씨 가문도 모르는 정보가 있다고요.”표아정은 가볍게 기침하며 차분히 상황을 지켜보았다.최군형과 강소아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떤 일이 일어날지 주목하고 있었다.최지용의 이마에는 점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미의 눈에는 한 줄기 교만한 빛이 번졌다.영미는 오는 길에 이미 모든 계획을 짰다. 정대명의 말이 맞았다. 누구를 훔치든 상관없었다. 인신매매범의 딸인 백인서가 아이들을 해치러 다닌다는 누명을 씌우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하면 백인서는 모두의 신뢰를 잃게 될 터였다.영미는 이제 한 아이의 엄마가 된 강소아가 인신매매범을 곁에 둘 리 없다고 믿었고, 최지용 역시 이 사실을 알면 더는 백인서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래서 영미는 정대명을 배신하기로 마음먹었다.영미는 권온유를 넘기고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한패가 되어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주장할 계획이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백인서는 변명의 여지도 없이 궁지에 몰릴 것이었다!“지용 오빠.”영미는 고개를 돌려 최지용을 바라보며 한 글자씩 천천히 말했다.“권온유는 정승
“그... 괜찮아!”정승우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권온유에게 말했다. 정승우는 이곳에서 권온유를 반드시 데리고 나가겠다고 결심했다.그런데 이때, 공장 문이 “쾅” 하고 열리더니 곧바로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정승우는 재빨리 권온유에게 눈짓했고 권온유도 알아채고는 즉시 땅바닥에 쓰러져 의식이 없는 척했다.정승우는 벽에 기대어 눈을 반쯤 감았다.“이 아이인가요?”영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맞아.”정대명은 영미를 흘깃 노려보며 묵묵히 대답했다.영미는 두 걸음 앞으로 다가서서 희미한 빛 속에 있는 아이를 살펴보더니, 곧 얼굴빛이 확 변했다.“이 아이... 혹시 권씨 집안의 막내딸 아니에요?”정대명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애초에 아이를 훔쳐 올 때 이 아이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 리가 없었다.“정대명 씨.”영미가 차갑게 웃으며 돌아보았다.“제가 최씨 가문 집안 아이를 훔쳐 오라고 했지, 권씨 집안 아이를 훔치라고 했나요? 이러고도 저를 속이지 않았다고요?”“그게...”정대명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영미 아가씨, 어차피 목적은 백인서를 곤경에 빠뜨리는 거잖아? 그러니 누구를 훔쳐 오든 상관없지 않아? 아이를 훔치기만 하면 유괴범이 되는 거니까.”이 말은 영미에게만 충격을 준 게 아니었다. 정승우의 귀에도 또렷이 들어왔다.“좋아요.”영미는 깊은숨을 들이마신 뒤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이 아이는 잘 지키고 있어요, 제가 다시 연락할 테니까.”...한편, 권씨 집안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권욱은 조순영을 탓하며 아이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했고, 조순영은 오열하며 남편을 원망했다. 조순영은 권욱이 바깥에서 여자와 부적절하게 얽히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라고 했다.“헛소리하지 마! 사람들이 나한테 어떤 소문을 퍼뜨렸는지 잘 알잖아. 결혼 생활 내내 너한테 부끄러운 일 한 적 없어.”“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정말 떳떳하게 행동했다면 왜 사람들이 당신만 가만두지 않는 건데?”며칠 전까지만
권온유의 질문에 정승우는 당황했다.권온유는 커다란 눈망울로 정승우를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했던 슈퍼맨 같은 오빠가, 이제는 먹을 것 하나 구하지 못하는 모습이 되어버린 것이다.정승우는 어색하게 입가를 씰룩이며 권온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이야기를 이어갔다.“너, 정말 배고파?”“네!”권온유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 작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원래는 엄마랑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 했어요. 엄마가 특별히 고등어조림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하셨거든요... 엉엉... 엉엉...”“울지 마, 울지 마! 그냥 생선 하나 가지고...”“나 배고파!”정승우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아이와 대화하는 건 그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겨우 권온유를 달래고 나서 정승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팔을 걷어붙이며 권온유에게 내밀었다.“너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 배고프면, 여기 한번 물어볼래?”권온유는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정승우를 바라보았다.“우리 집은 가난해서 늘 먹을 게 부족했거든. 그래서 어릴 때 너무 배가 고프면 이렇게 배고픔을 달랠 만한 걸 물곤 했어.”권온유는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배고픔을 달랠 만한 것'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정승우는 웃으며 계속 설명했다.“예를 들어 쌀통 같은 거야. 한때 쌀이 들어 있던 쌀통은 비어 있어도 쌀 냄새가 남아 있거든. 그래서 쌀통 가장자리를 살짝 물면서 하얀 쌀밥을 먹는 상상하는 거야. 그러면 배가 덜 고파져.”“그리고 이웃집에서 밥하는 냄새를 맡으며 그 밥을 먹는 상상을 하는 거야. 그러면 그렇게 배고프지 않더라고.”권온유는 정승우의 이야기에 넋을 잃고 입을 벌린 채 있었다. 정승우는 웃음을 터뜨렸다.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한때 정대명이 도박과 술에 빠져 정승우를 굶겼던 시절은 그야말로 비참한 순간들이었다.잠시 후, 권온유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고 정승우는 속으로 ‘큰일이다'라고 생
영미는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최지용을 지켜보았다.최지용은 다소 초조한 기색으로 구석에 앉아 휴대전화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 전화를 걸기도 했다.영미는 바로 뒤를 따라갔고 최지용의 낮고 다급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찾았습니까?”“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세요... 만약 납치범의 목적이 돈이었다면 분명 전화를 걸어올 겁니다!”영미의 가슴이 철렁하며 내려앉았다.납치범이라니? 대체 뭘 찾는다는 거지?백인서와 통화한 걸까?그때, 최군성이 큰 소리로 외쳤다.“지용이 형, 여기서 뭐 해요?”영미는 얼른 몸을 숨겼고 최군성은 최지용에게 다가가 최지용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우리 형이 찾고 있었는데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거예요? 어서 와서 먹고 즐기자고요!”최지용은 최군성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영미와 눈이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잠시 멈칫했다.영미는 급히 시선을 피하며 억지 미소로 인사했다.“지용 오빠...”“어, 영미?”최군성도 배윤아처럼 물었다.“여기 웬일이야? 형님이 널 초대한 것 같지 않은데?”“그게...”영미는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최군성은 영미의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최지용을 끌고 가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최지용은 점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영미가 도대체 여기 왜 있는 거지? 평소에는 볼 수 없던 사람이, 왜 하필 오늘 온유가 사라진 날에 나타난 걸까?그때, 최군형과 강소아가 가원이를 품에 안고 나타났다.강소아는 아이를 보행기에 앉혔고 아이는 보행기 가장자리를 잡고 작은 발을 내디뎠다. 이 모습에 방 안의 모든 사람이 환호성을 질렀다.영미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자리를 떠 교외의 버려진 공장으로 향했다.그 시각, 정대명은 영미의 지시에 따라 승합차를 몰고 공장에 도착해 있었고 영미가 도착했을 때 그는 공장 문 앞에서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영미는 핸드백을 휘둘러 정대명에게 던졌다.“정대명 씨, 감히 날 속여
“너 따위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정대명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결국엔 자기 아들이었기에 정승우에게 감출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때리고 꾸짖어도 떠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정대명은 서랍에서 가위를 꺼내 들고는 권온유의 양 갈래머리를 단칼에 잘라냈다. 머리카락이 천천히 바닥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있다가 막아서려는 순간, 자신과 정대명 사이에 힘의 격차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작정 나섰다가는 역부족일 터였다.정승우는 이를 악물고 정대명에게 다가가 물었다.“아빠, 정말 이 아이를 팔 생각이에요?”“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영미라는 그 여자가 원하는 거야!”정대명은 불만스레 대꾸하며 정승우에게 옷장에 있는 헌 옷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정승우가 옷을 가져오자, 정대명은 손을 뻗어 권온유의 예쁜 드레스를 찢으려 했다. 정승우는 급히 소리쳤다.“뭐 하는 거예요!”“이 자식이!”정대명은 정승우를 노려보며 소리쳤다.“조용히 해! 죽고 싶어?”“아빠, 이건...”“이 애한테 옷을 갈아입히려는 거야! 이렇게 좋은 옷을 입고 있으면 바로 눈에 띄잖아.”정승우는 다가가 정대명을 옆으로 밀치며 말했다.“제가 갈아입힐게요!”“이놈이...”정대명은 하려던 말을 멈추고 피식 웃었다. 그는 정승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아하, 아빠를 도와주고 싶구나? 역시 아들은 아들밖에 없지! 그래, 네가 손이 빠르니까 빨리 옷을 갈아입혀. 둘이 함께 가자고!”정승우는 속으로 혐오감이 치밀었지만, 지금은 그저 상황을 지켜보며 대응하는 수밖에 없었다.정승우는 권온유의 드레스를 벗기지 않고, 정대명의 헌 옷을 위에 입혀 단단히 감쌌다. 그런 다음 모자를 씌워 얼핏 보면 남자아이처럼 보이게 했다.“좋아, 이 정도면 되겠어!”정대명은 정승우에게 눈짓을 보내며 말했다.“뒷문에 승합차가 준비돼 있대. 어서 출발하자!”“아빠, 이 소녀는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예요?”“교외지!”정대명은 귀찮다는 듯 말했다.“빨리 움직
권온유는 깜짝 놀라며 정대명을 멍하니 쳐다보았다.“아저씨가 맛있는 걸 가지고 왔단다. 배고프지 않니?”권온유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달아나려 했다. 정대명은 급히 권온유 앞을 가로막았다.“아니, 가지 마!”정대명은 두 손으로 권온유를 꼭 붙들며 말했다.“그게... 네 엄마가 나한테 너를 데려오라고 부탁했어!”엄마라는 말을 듣고 권온유는 잠시 멈칫했다.“정말이야, 네 엄마가 부탁한 거라니까!”정대명은 거짓말을 이어갔다.“방금 네 엄마가 갑자기 어디론가 가버렸지? 너 보고 기다리라고 했잖아?”“네... 맞아요.”“그래!”정대명은 웃으며 말했다.“그런데 네가 여기저기 막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엄마는 내가 여기 있는 걸 알 거예요. 저는 여기서 조금 놀다가 다시 휴게실로 돌아갈 거예요!”“오... 그렇구나.”정대명은 잠시 생각을 굴렸다.“아저씨가 휴게실이 어딘지 아니까, 내가 데려다줄게!”권온유는 경계하며 정대명에게서 몸을 빼내고 두 걸음 물러났다.“얘가! 난 정말로 네 엄마 친구라니까. 네가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걱정하지 않겠어? 맞지?”“자, 자! 아저씨가 데려다줄게. 착하지!”정대명은 권온유를 갑자기 붙들어 어깨에 둘러맸다. 권온유는 본능적으로 소리치려 했지만, 정대명의 손이 입을 단단히 막고 있어 소리를 낼 수 없었다.어린 소녀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른 남자를 이길 수는 없었다. 정대명은 권온유의 머리 뒤쪽을 세게 내리쳐 기절시켰고, 온유가 들고 있던 인형은 땅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익숙하게 호텔로 와서 지난번 일을 핑계로 다시 정대명에게 돈을 뜯어낼 생각이었는데, 방 안에 기절한 어린 소녀가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어른 일에 참견하지 말고 신경 꺼!”정대명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방금 정대명은 온유를 데려오며 보안과 호텔 직원의 눈을 피하고자 아이를 어깨에 메고 가지 않고, 자신의 아이인 것처럼 속여서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