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입만 열면 ‘아가씨’ 라고 불렀다.‘이 집안에 아가씨는 나 강유빈 한 명뿐이라고!’장남이든 셋째 도련님이든 최상 가문에 시집갈 수만 있다면 강주와 오성 지역 전체에서 큰소리 떵떵 치며 살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강유빈은 음흉하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아줌마!”“네...”주씨 아줌마는 심장을 조이며 재빨리 달려왔고 기분이 좋아 보이는 강유빈의 모습에 안도했다.“시키실 일이라도?”“다시 전화해요.”강유빈은 턱을 치켜세우며 말을 이었다.“시간 많으니까 디자이너는 언제든지 보내도 된다고 얘기해요. 그리고 강서연한테도 전화해요!”그녀의 미소는 사악했다.“디자이너가 스타일링 해주는 날, 최상 가문에서 날 데려가는 걸 그 여우 같은 년한테 똑똑히 보여줄 거예요.”...강서연은 예정대로 강씨 가문 저택 앞에 도착했다.애당초 자신의 소유가 아닌 이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때마침 주씨 아줌마가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둘째 아가씨, 오셨네요!”“아줌마!”강서연은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자 전과 다른 색다른 분위기였다.“아줌마, 저한테 온 편지가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아줌마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위층을 바라보더니 머뭇거렸다.“일단은... 위로 올라가시죠.”그녀의 반응이 의심스러워도 말없이 따라갔는데 강유빈의 방으로 데려갈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어디선가 들려온 ‘서연아’ 소리에 깜짝 놀랐다.“우리 동생 왔네! 빨리 와, 나 어때?”강서연은 어리둥절했다.그녀는 섹시하고 여성스러운 드레스를 입은 채 몸매를 뽐내고 있었고 중요 부위가 보일 듯 말 듯 한 디자인은 시선을 사로잡았다. 얼굴에 있는 정교한 메이크업은 한눈에 봐도 공을 들인 티가 났다. “여기 스타일리스트 앤디.”강유빈은 자랑하듯 말했다.“IV와 CiCi 브랜드의 총괄 디자이너기도 해.”강서연은
강유빈은 문뜩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봤다.“믿든 안 믿든 난 최지한이 누군지도 몰라.”강서연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그 사람이 누군지 나랑 아무 상관 없고 어떤 세력을 가졌는지 궁금하지도 않아. 난 남편이 있고 그 사람을 너무 사랑하고 있어. 부잣집에 시집가고 싶어 하는 언니랑은 인생의 목표 자체가 다르거든!“명예와 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것들인데 그걸 거절하는 강서연의 말에 의심이 들어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녀의 차분하고 확고한 눈빛을 보자 갑자기 소심해졌다.“착각하지 마! 어차피 넌 가질 수 없는 것들이니까 욕심조차 생기지 않겠지!”브랜드를 모른다며 소귀에 경 읽기 하는 것 같다고 비아냥거릴 땐 몰랐는데 아마 지금 그녀가 느끼는 기분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사람마다 행복에 대한 정의도 다르고 견해도 천차만별이니 아예 생각이 안 맞는 사람과 대화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언니가 어떻게 생각하든 난 상관없어.”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시크하게 자리를 떴다.분명히 강서연한테 자극 주고 싶어 이런 자리를 마련했고, 화를 내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상황이 오면 불난 집에 부채질 할 작전까지 세웠는데 모든 게 무용지물 되는 바람에 발만 동동 굴렀다.아무 타격 없는 강서연의 모습은 마치 허공에 대고 펀치를 날린 느낌이었다.양연은 재빨리 그녀를 위로했다.“됐어, 화내지 마! 저런 인간은 겉과 속이 다르니까 신경 쓰지 마!”강유빈이 입을 열려던 찰나 최상 가문의 사람들이 다가와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마중 나온 차는 롤스로이스였고 탈 비행기는 오직 그녀 한 명만을 위해 서비스하는 개인 전용 비행기였다.“딸.”양연은 웃음꽃이 활짝 핀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도련님이 널 많이 신경 쓰는 것 같으니까 이런 좋은 기회 놓치지 말고 쟁취해!”“걱정마요, 엄마!”“네가 최상 가문에 시집간다면 엄마는 남은 인생 마음 편히 살 수 있을 것 같아!”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이 모든 게 강서연을 위해서 준비했다는 생각에 강유빈은 불쾌한 느낌을 숨길
“그냥 갑자기 생각났어요.”강서연은 웃으며 말했다.“최연희, 최지한 성도 같고 오성 출신이니까 혹시나 아는 사이인가 싶어서 물어봤어요.”“맞아요.”최연희는 조용하게 말했다.“제 큰 오빠예요. 작은 삼촌의 아들이자 가문의 장손이죠. 언니! 그 인간 성격도 안 좋고 정말 별로인 사람이니까 절대 가까이하지 마요!”강서연은 흠칫 놀라더니 가볍게 웃었다.솔직히 남편 이외의 남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언니.”최연희는 그녀를 바라봤다.“실은... 저한테 친오빠가 있어요.”“그래요?”강서연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친오빠라고요!”최연희는 입술을 깨물더니 웃으며 말했다.“이름은 최연준. 어때요?”“최연준?”강서연은 그녀의 행동에 반응해 줬다.“이름 이쁘네요. 최연희보다 훨씬 듣기 좋은데요?”“정말요?”“네, 맞아요.”최연희는 몰래 핸드폰을 꺼내 녹음 버튼을 눌렀다.“언니, 다시 한번 말해 줘요!”“뭘요?”“최연준이라는 이름이 최연희보다 듣기 좋다고요!”열여덟 살이나 됐음에도 아이처럼 행동하는 모습에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볼을 꼬집었다.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던 강서연은 또박또박 한 글자를 내뱉었다.“최연준은 이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이름이고, 최연희보다 백만 배 좋아요!”최연희는 기대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고 강서연은 뇌세포를 총동원해서 말을 이어갔다.“음... 이름만 들었을 땐 뭔가 정의롭고 똑 부러지는 사람일 것 같아요!”“언니.”최연희는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몇 번만 더 얘기해주면 안 돼요?”타지에 있는 오빠가 그리워서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웃으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알겠어요. 그럼 백 번 말할게요! 연준, 연준, 이 세상에서 제일 듣기 좋은 이름 최연준!”...그 시각 오성의 최상 가문.최연준은 밖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있었고 창밖은 아득한 어둠으로 채워졌다. 그의 싸늘한 얼굴에서는 왠지 모를 따뜻한 미소가 떠올랐다.핸드폰에서는 이따금 다정한 여
“도련님...”방한서가 말하려다가 멈추었다. 최연준은 그런 그를 보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할 말이 있으면 해.”방한서가 입술을 적셨다.“도련님이 강서연 씨를 생각해서 그런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법적으로 볼 때 강서연 씨는 구현수의 아내예요. 만약 도련님이 회사까지 포함해서 그 많은 재산을 서연 씨한테 전부 준다면 구현수한테 절반 주는 거랑 마찬가지예요.”최연준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실 이 문제가 마음에 걸려 유찬혁에게 법적으로 어떻게 되는지 알아보라고 부탁했었다.아무리 부부라도 경제적인 면에서는 독립적이었다. 하여 최연준에 있어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성명서를 작성하여 재산은 강서연의 소유이고 다른 사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면 된다고 했다.“그건 걱정하지 마.”최연준이 방한서를 보며 말했다.“구현수는 나한테서 일전 한 푼도 가져가지 못해. 그리고 이번에 강주로 돌아가면 서연이한테 모든 걸 설명할 거야.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서연이는 나랑 함께 헤쳐 나갈 거라고 믿어!”방한서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불안했다. 하지만 자신만만해하는 최연준 앞에서 더는 뭐라 할 수 없어 그저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네, 서연 씨는 다른 여자들이랑 달라서 도련님을 꼭 이해하실 거예요.”최연준이 우쭐거리며 어깨를 들썩였다. 그 모습에 방한서는 피식 웃으려다가 마른기침했다.“본가 쪽에서 연락이 왔는데 회장님께서 지금 서재에서 도련님을 기다리고 계신답니다.”최연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본가로 향했다. 가는 길에 강서연에게 전화를 여러 통 걸었지만 웬일인지 받지 않았다. 순간 가슴이 움찔한 최연준이 시간을 확인했다.‘이 시간이면 진작 커피숍 문을 닫고 집으로 갔을 텐데 왜 안 받지?’방한서에게 물어보자 방한서는 부하가 계속 지키고 있으니 강서연은 안전하다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최연준이 자세하게 물어보려던 그때 집사가 서재에서 걸
최재원은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아무 말 없이 홍차를 타서 찻잔에 따랐다. 최연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걸어가더니 할아버지를 등지고 느긋하게 말했다.“무슨 일로 전화했어?”“별일은 아니고 그냥...”최지한은 얘기하다 말고 일부러 멈췄다. 휴대 전화 너머로 그의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중요한 일이 아니면 다음 날 다시 얘기해.”최연준이 피식 웃었다.“지금 할아버지께서 옆에 계시는데 형이랑만 얘기할 순 없잖아.”“그래. 그럼 계속 할아버지 옆에서 알랑거려. 그나저나 연준아, 알랑거리는 건 네 여자도 한가락 하던데? 하하...”“뭐라고?”최연준의 표정이 확 어두워지더니 차가운 기운이 등을 타고 뿜어져 나왔다. 최지한이 흉악스럽게 웃으며 또박또박 말했다.“네 여자 말이야, 예쁘고 몸매도 좋더라고. 아주 나이스해!”“최지한!”“연준아, 그렇게 괜찮은 서연 씨를 왜 인제야 소개해줬어? 하하...”전화가 끊기자마자 그의 휴대 전화가 진동하면서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사진이 어둡고 흐릿했지만 커다란 원형 침대에 윗몸을 홀딱 벗은 여자가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누워있었다.순간 최연준은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고 휴대 전화를 너무 꽉 쥔 나머지 피가 다 통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지금 머릿속에는 최지한을 죽여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그가 밖으로 뛰쳐나가려던 그때 뒤에서 최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디 가?”“할아버지...”“형한테 가려고?”최재원은 무슨 일인지는 자세하게 알지 못해도 대충은 알고 있었다. 최지한이 강주에서 강서연이라는 여자를 데려온다는 얘기를 듣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진작 예상했다.“연준아, 그냥 여자일 뿐이야.”최재원이 드래곤 지팡이를 잡고 바닥을 툭툭 쳤다.“형이 좋아한다면 양보해야지. 여자 하나 갖고 둘이서 싸워서야 하겠어?”“할아버지!”최연준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할아버지는 이미 최상 그룹을 너에게 물려주기로 했어.”노련하고 주도면밀한 최재원이 가볍게 웃었다.“지금 너한테
최지한과 최연준 모두 그의 친손자이다. 비록 최연준을 조금 더 편애하긴 했지만, 최지한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것도 원치 않았다.최재원이 지팡이로 바닥을 힘껏 내리쳤다.“최지한 이 자식은 일에 성공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망쳐 먹기 일쑤야. 아주 제대로 혼나봐야 정신을 차리지.”그가 노발대발했다.“진혁이더러 오라고 해. 아들 좀 잘 가르치라고 한마디 해야겠어! 지한이가 잡아 온 그 여자가 진짜 강서연이야?”“회장님...”박경수가 머뭇거리며 말했다.“강주에서 온 강씨 성을 가진 아가씨인 것 맞는데 강씨 가문에 딸이 둘이라 강서연 씨가 옳은지는 잘 모르겠어요...”최재원의 두 눈에 교활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만약 강서연이라면 가장 좋을 것이다. 이참에 최연준과 그 여자를 갈라놓을 수 있으니까.그는 누구보다 자기 손자를 잘 알았다. 최연준은 소유욕이 강해서 자기 여자가 몹쓸 일을 당하면 그 순간은 화가 나겠지만 나중에 마음을 가라앉힌 후에는 점점 그 여자와 멀어지게 되리라 생각했다.최재원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나서야 답답하던 가슴이 편해졌다.“경수야, 연준이한테 사람 붙여서 잘 지켜봐. 절대 일을 크게 만들게 해서는 안 돼!”...최연준은 마치 성난 사자처럼 뛰쳐나가며 허리춤에 차고 있던 총을 꺼냈다.본가에서 해원 별장으로 가는 길에 도우미들은 저마다 겁에 질린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최연준의 두 눈이 시뻘건 게 당장이라도 살인을 저지를 기세였다.“이제부터 우린 부부예요.”“당신이랑 결혼했으니 평생 당신 곁에만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아요. 당신이 돈을 못 벌어도 내가 먹여 살리면 돼요!”“여보, 내가 언니 대신 당신이랑 결혼한 것 말고 다른 건 숨긴 게 없어요. 앞으로 당신도 나한테 숨기는 게 있어서는 안 돼요. 알겠죠?”최연준의 귓가에 온통 강서연의 달콤한 목소리로 가득했고 머릿속에도 강서연의 웃음뿐이었다.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그의 심장을 움켜쥔 듯 마음이 욱신거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강서연의 곁을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최연준!”그가 가려 하자 오히려 최지한이 두 눈을 부릅떴다.“형.”최연준이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리더니 웃을 듯 말 듯 한 얼굴로 말했다.“할아버지가 큰일 하려면 여자 하나 때문에 형이랑 싸우지 말라고 했어. 할아버지 말씀이 옳은 것 같아. 그러니까...”최지한을 돌아보는 그의 눈빛이 차갑기 그지없었다.“재미있게 놀아!”그의 말에 최지한은 순간 멍해졌다.‘뭐야? 아까는 죽일 듯이 달려들더니 그냥 이렇게 간다고?’최지한이 사냥총을 덥석 잡았다. 그가 총알을 장전하려는데 최연준이 한발 먼저 총을 그의 머리에 겨누었다.“형.”최연준이 싸늘하게 웃었다.“내 뒤에서 다른 수작을 부리지 말라고 진작 형이랑 작은삼촌한테 경고했었잖아, 안 그러면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고. 설마 다 잊었어?”최지한의 낯빛이 사색이 되더니 사냥총을 버리고 넋이 나간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최연준이 경멸 섞인 눈빛으로 그를 힐끗 보고 나가려는데 뒤에서 비명이 들려왔다.“구현수!”최연준에게 냅다 달려가던 강유빈은 침대 시트를 밟은 바람에 그만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아픈 것도 신경 쓸 겨를이 없이 바로 일어나 최연준 옆에 바짝 붙었다.“구현수 씨, 나 좀 살려줘요!”최연준은 짜증 섞인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현수 씨!”강유빈이 목청 터지게 외쳤지만 최연준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최연준의 뒷모습이 복도 끝에서 점차 사라지는 걸 보며 절망에 빠졌다.최지한이 사냥총을 다루는 소리가 조용한 방 전체에 울려 퍼져 선명하게 들렸다. 강유빈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린 채 벽에 붙어 부들부들 떨었다.“쟤는 구현수가 아니라 우리 최씨 가문의 셋째 도련님 최연준이야.”최지한이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너 진짜 엄청난 사람을 만났어.”강유빈은 충격에 빠진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최지한은 그녀 앞에 웅크리고 앉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저 자식 안면을 아주 확 바꾸던데? 자기 와이프를 그냥 이렇게 나한테 준다고? 설마...
방한서는 순간 멈칫했다.‘오늘 이사회에 참석하여 그룹의 개혁 방안을 상의해야 하는데 강주로 돌아간다고?’“도련님, 강서연 씨가 걱정돼서 그러는 겁니까?”방한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사람을 보내서 계속 지켜보고 있으니까 서연 씨는 안전해요.”“그런데 왜 전화를 안 받아?”최연준이 참다못해 버럭 화를 냈고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질문에 방한서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사실 전화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아주 많았다. 휴대 전화 배터리가 없다거나, 듣지 못했다거나, 신호가 없다거나...‘한밤중에 전화해서 전화를 받으라고 강요하는 게 어디 있어? 서연 씨도 자고 있겠는데. 도련님도 참...’최연준은 다짜고짜 차 키를 꺼내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때 휴대 전화 벨 소리가 갑자기 울렸다. 화면을 보고 잠깐 멈칫하던 그가 손가락을 떨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여보...”“여보, 미안해요!”강서연이 자다 깬 듯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어젯밤에 연희 양이 같이 밥 먹자고 해서 맥주 좀 마셨어요... 현수 씨도 내 주량 알죠? 조금만 마셔도 취하는 거. 그래서 연희 양이랑 집에 오자마자 쿨쿨 자느라 현수 씨 전화도 못 들었어요. 연희 양은 아직도 자고 있다니까요.”최연준이 벽에 기대섰다. 긴장했던 마음을 드디어 쓸어내릴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킨 후 한참이 지나서야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그랬구나...”어리둥절한 강서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여보, 혹시 화났어요?”최연준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가슴이 먹먹했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히죽 웃었다. 그녀에 대한 걱정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그런 웃음이었다.옆에 있던 방한서는 그제야 배경원이 왜 자꾸 최연준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정말 배경원의 말대로 제정신이 아니었다...“여보? 여보!”강서연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설마 진짜 화난 거야?’“여보, 진짜
“아줌마,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그럼, 제가 알아낸 사실을 전부 말씀드릴게요!”영미는 입가에 교만한 미소를 띠며 백인서를 차갑게 한 번 쳐다보았다.“백인서 씨의 친어머니인 백홍은 인신매매범이었다는 사실, 모두 아셨나요? 백인서 씨의 어머니는 백인서를 정대명의 집에 맡겼고... 흥! 정대명의 아내도 백홍이 납치해 왔다는 소문이 있어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잖아요. 제 생각엔... 인신매매범의 딸이라면 그런 일쯤은 익숙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은 권온유의 실종이 정말로 백인서 씨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시나요?”“영미!”강소아가 나서며 분노를 가득 담아 소리쳤다.“허위 사실을 퍼뜨리지 마!”“소유 아가씨, 억울하네요!”영미는 강소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제가 이렇게까지 조사한 건 다 아가씨를 위한 거예요! 딸도 있는 사람이 백인서를 곁에 두고도 마음이 놓이세요?”“그만해!”최지용이 크게 소리쳤다.백인서는 몸을 떨며 믿기지 않는 눈으로 최지용을 쳐다보았다.그러나 최지용의 얼굴에는 의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최지용은 굳건한 눈빛으로 뒤에 있는 백인서를 지키고 있었다.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처럼 백인서를 아끼고 있었다.백인서는 코끝이 찡해지며 본능적으로 최지용의 손을 꼭 붙잡았다. 최지용의 따스한 손은 백인서에게 큰 용기를 주었고 그 온기가 어둠의 두려움을 잊게 해주었다.최지용은 백인서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고 다시 영미를 바라볼 때는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영미야.”최지용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두 집안의 관계를 생각해서 그저 넘어가는 거야. 더 이상 선을 넘지 마.”최군형도 나서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요, 백인서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모르겠어요? 영미 아가씨, 우리 최씨 가문 사람들을 바보로 생각하는 건 아니죠?”영미는 순간 긴장했다. 최군형의 말 속엔 어딘가 숨은 뜻이 있는 듯했다.최군형의 깊고 복잡한 눈빛을 파악하기 어려웠다.표아정은 천천히 일어나 어깨에 걸친 숄을
백인서는 복잡한 눈빛으로 최지용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그때 최지용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표아정이었고 다급한 목소리로 서둘러 돌아오라고 재촉했다.최지용은 결국 어머니의 말에 따라 백인서를 데리고 최씨 집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넓은 거실에는 최군형과 강소아도 나와 있었고 모두 엄숙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백인서가 들어서자, 표아정이 백인서를 올려다보며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다.강소아는 백인서와 눈을 마주치며 단호하게 미소 지었다.백인서가 의아해하던 찰나, 영미가 천천히 밖에서 걸어 들어왔다.“아줌마, 지용 오빠. 제가 권온유의 행방을 알아냈어요.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뭐라고?”최지용이 놀라서 물었다.“네가 어떻게 아는데?”영미는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지용 오빠, 특수부대 출신이라고 정보가 우리보다 더 빠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최씨 가문은 만능이 아니에요, 최씨 가문도 모르는 정보가 있다고요.”표아정은 가볍게 기침하며 차분히 상황을 지켜보았다.최군형과 강소아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떤 일이 일어날지 주목하고 있었다.최지용의 이마에는 점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미의 눈에는 한 줄기 교만한 빛이 번졌다.영미는 오는 길에 이미 모든 계획을 짰다. 정대명의 말이 맞았다. 누구를 훔치든 상관없었다. 인신매매범의 딸인 백인서가 아이들을 해치러 다닌다는 누명을 씌우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하면 백인서는 모두의 신뢰를 잃게 될 터였다.영미는 이제 한 아이의 엄마가 된 강소아가 인신매매범을 곁에 둘 리 없다고 믿었고, 최지용 역시 이 사실을 알면 더는 백인서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래서 영미는 정대명을 배신하기로 마음먹었다.영미는 권온유를 넘기고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한패가 되어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주장할 계획이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백인서는 변명의 여지도 없이 궁지에 몰릴 것이었다!“지용 오빠.”영미는 고개를 돌려 최지용을 바라보며 한 글자씩 천천히 말했다.“권온유는 정승
“그... 괜찮아!”정승우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권온유에게 말했다. 정승우는 이곳에서 권온유를 반드시 데리고 나가겠다고 결심했다.그런데 이때, 공장 문이 “쾅” 하고 열리더니 곧바로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정승우는 재빨리 권온유에게 눈짓했고 권온유도 알아채고는 즉시 땅바닥에 쓰러져 의식이 없는 척했다.정승우는 벽에 기대어 눈을 반쯤 감았다.“이 아이인가요?”영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맞아.”정대명은 영미를 흘깃 노려보며 묵묵히 대답했다.영미는 두 걸음 앞으로 다가서서 희미한 빛 속에 있는 아이를 살펴보더니, 곧 얼굴빛이 확 변했다.“이 아이... 혹시 권씨 집안의 막내딸 아니에요?”정대명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애초에 아이를 훔쳐 올 때 이 아이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 리가 없었다.“정대명 씨.”영미가 차갑게 웃으며 돌아보았다.“제가 최씨 가문 집안 아이를 훔쳐 오라고 했지, 권씨 집안 아이를 훔치라고 했나요? 이러고도 저를 속이지 않았다고요?”“그게...”정대명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영미 아가씨, 어차피 목적은 백인서를 곤경에 빠뜨리는 거잖아? 그러니 누구를 훔쳐 오든 상관없지 않아? 아이를 훔치기만 하면 유괴범이 되는 거니까.”이 말은 영미에게만 충격을 준 게 아니었다. 정승우의 귀에도 또렷이 들어왔다.“좋아요.”영미는 깊은숨을 들이마신 뒤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이 아이는 잘 지키고 있어요, 제가 다시 연락할 테니까.”...한편, 권씨 집안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권욱은 조순영을 탓하며 아이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했고, 조순영은 오열하며 남편을 원망했다. 조순영은 권욱이 바깥에서 여자와 부적절하게 얽히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라고 했다.“헛소리하지 마! 사람들이 나한테 어떤 소문을 퍼뜨렸는지 잘 알잖아. 결혼 생활 내내 너한테 부끄러운 일 한 적 없어.”“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정말 떳떳하게 행동했다면 왜 사람들이 당신만 가만두지 않는 건데?”며칠 전까지만
권온유의 질문에 정승우는 당황했다.권온유는 커다란 눈망울로 정승우를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했던 슈퍼맨 같은 오빠가, 이제는 먹을 것 하나 구하지 못하는 모습이 되어버린 것이다.정승우는 어색하게 입가를 씰룩이며 권온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이야기를 이어갔다.“너, 정말 배고파?”“네!”권온유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 작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원래는 엄마랑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 했어요. 엄마가 특별히 고등어조림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하셨거든요... 엉엉... 엉엉...”“울지 마, 울지 마! 그냥 생선 하나 가지고...”“나 배고파!”정승우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아이와 대화하는 건 그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겨우 권온유를 달래고 나서 정승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팔을 걷어붙이며 권온유에게 내밀었다.“너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 배고프면, 여기 한번 물어볼래?”권온유는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정승우를 바라보았다.“우리 집은 가난해서 늘 먹을 게 부족했거든. 그래서 어릴 때 너무 배가 고프면 이렇게 배고픔을 달랠 만한 걸 물곤 했어.”권온유는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배고픔을 달랠 만한 것'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정승우는 웃으며 계속 설명했다.“예를 들어 쌀통 같은 거야. 한때 쌀이 들어 있던 쌀통은 비어 있어도 쌀 냄새가 남아 있거든. 그래서 쌀통 가장자리를 살짝 물면서 하얀 쌀밥을 먹는 상상하는 거야. 그러면 배가 덜 고파져.”“그리고 이웃집에서 밥하는 냄새를 맡으며 그 밥을 먹는 상상을 하는 거야. 그러면 그렇게 배고프지 않더라고.”권온유는 정승우의 이야기에 넋을 잃고 입을 벌린 채 있었다. 정승우는 웃음을 터뜨렸다.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한때 정대명이 도박과 술에 빠져 정승우를 굶겼던 시절은 그야말로 비참한 순간들이었다.잠시 후, 권온유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고 정승우는 속으로 ‘큰일이다'라고 생
영미는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최지용을 지켜보았다.최지용은 다소 초조한 기색으로 구석에 앉아 휴대전화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 전화를 걸기도 했다.영미는 바로 뒤를 따라갔고 최지용의 낮고 다급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찾았습니까?”“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세요... 만약 납치범의 목적이 돈이었다면 분명 전화를 걸어올 겁니다!”영미의 가슴이 철렁하며 내려앉았다.납치범이라니? 대체 뭘 찾는다는 거지?백인서와 통화한 걸까?그때, 최군성이 큰 소리로 외쳤다.“지용이 형, 여기서 뭐 해요?”영미는 얼른 몸을 숨겼고 최군성은 최지용에게 다가가 최지용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우리 형이 찾고 있었는데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거예요? 어서 와서 먹고 즐기자고요!”최지용은 최군성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영미와 눈이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잠시 멈칫했다.영미는 급히 시선을 피하며 억지 미소로 인사했다.“지용 오빠...”“어, 영미?”최군성도 배윤아처럼 물었다.“여기 웬일이야? 형님이 널 초대한 것 같지 않은데?”“그게...”영미는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최군성은 영미의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최지용을 끌고 가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최지용은 점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영미가 도대체 여기 왜 있는 거지? 평소에는 볼 수 없던 사람이, 왜 하필 오늘 온유가 사라진 날에 나타난 걸까?그때, 최군형과 강소아가 가원이를 품에 안고 나타났다.강소아는 아이를 보행기에 앉혔고 아이는 보행기 가장자리를 잡고 작은 발을 내디뎠다. 이 모습에 방 안의 모든 사람이 환호성을 질렀다.영미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자리를 떠 교외의 버려진 공장으로 향했다.그 시각, 정대명은 영미의 지시에 따라 승합차를 몰고 공장에 도착해 있었고 영미가 도착했을 때 그는 공장 문 앞에서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영미는 핸드백을 휘둘러 정대명에게 던졌다.“정대명 씨, 감히 날 속여
“너 따위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정대명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결국엔 자기 아들이었기에 정승우에게 감출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때리고 꾸짖어도 떠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정대명은 서랍에서 가위를 꺼내 들고는 권온유의 양 갈래머리를 단칼에 잘라냈다. 머리카락이 천천히 바닥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있다가 막아서려는 순간, 자신과 정대명 사이에 힘의 격차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작정 나섰다가는 역부족일 터였다.정승우는 이를 악물고 정대명에게 다가가 물었다.“아빠, 정말 이 아이를 팔 생각이에요?”“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영미라는 그 여자가 원하는 거야!”정대명은 불만스레 대꾸하며 정승우에게 옷장에 있는 헌 옷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정승우가 옷을 가져오자, 정대명은 손을 뻗어 권온유의 예쁜 드레스를 찢으려 했다. 정승우는 급히 소리쳤다.“뭐 하는 거예요!”“이 자식이!”정대명은 정승우를 노려보며 소리쳤다.“조용히 해! 죽고 싶어?”“아빠, 이건...”“이 애한테 옷을 갈아입히려는 거야! 이렇게 좋은 옷을 입고 있으면 바로 눈에 띄잖아.”정승우는 다가가 정대명을 옆으로 밀치며 말했다.“제가 갈아입힐게요!”“이놈이...”정대명은 하려던 말을 멈추고 피식 웃었다. 그는 정승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아하, 아빠를 도와주고 싶구나? 역시 아들은 아들밖에 없지! 그래, 네가 손이 빠르니까 빨리 옷을 갈아입혀. 둘이 함께 가자고!”정승우는 속으로 혐오감이 치밀었지만, 지금은 그저 상황을 지켜보며 대응하는 수밖에 없었다.정승우는 권온유의 드레스를 벗기지 않고, 정대명의 헌 옷을 위에 입혀 단단히 감쌌다. 그런 다음 모자를 씌워 얼핏 보면 남자아이처럼 보이게 했다.“좋아, 이 정도면 되겠어!”정대명은 정승우에게 눈짓을 보내며 말했다.“뒷문에 승합차가 준비돼 있대. 어서 출발하자!”“아빠, 이 소녀는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예요?”“교외지!”정대명은 귀찮다는 듯 말했다.“빨리 움직
권온유는 깜짝 놀라며 정대명을 멍하니 쳐다보았다.“아저씨가 맛있는 걸 가지고 왔단다. 배고프지 않니?”권온유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달아나려 했다. 정대명은 급히 권온유 앞을 가로막았다.“아니, 가지 마!”정대명은 두 손으로 권온유를 꼭 붙들며 말했다.“그게... 네 엄마가 나한테 너를 데려오라고 부탁했어!”엄마라는 말을 듣고 권온유는 잠시 멈칫했다.“정말이야, 네 엄마가 부탁한 거라니까!”정대명은 거짓말을 이어갔다.“방금 네 엄마가 갑자기 어디론가 가버렸지? 너 보고 기다리라고 했잖아?”“네... 맞아요.”“그래!”정대명은 웃으며 말했다.“그런데 네가 여기저기 막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엄마는 내가 여기 있는 걸 알 거예요. 저는 여기서 조금 놀다가 다시 휴게실로 돌아갈 거예요!”“오... 그렇구나.”정대명은 잠시 생각을 굴렸다.“아저씨가 휴게실이 어딘지 아니까, 내가 데려다줄게!”권온유는 경계하며 정대명에게서 몸을 빼내고 두 걸음 물러났다.“얘가! 난 정말로 네 엄마 친구라니까. 네가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걱정하지 않겠어? 맞지?”“자, 자! 아저씨가 데려다줄게. 착하지!”정대명은 권온유를 갑자기 붙들어 어깨에 둘러맸다. 권온유는 본능적으로 소리치려 했지만, 정대명의 손이 입을 단단히 막고 있어 소리를 낼 수 없었다.어린 소녀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른 남자를 이길 수는 없었다. 정대명은 권온유의 머리 뒤쪽을 세게 내리쳐 기절시켰고, 온유가 들고 있던 인형은 땅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익숙하게 호텔로 와서 지난번 일을 핑계로 다시 정대명에게 돈을 뜯어낼 생각이었는데, 방 안에 기절한 어린 소녀가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어른 일에 참견하지 말고 신경 꺼!”정대명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방금 정대명은 온유를 데려오며 보안과 호텔 직원의 눈을 피하고자 아이를 어깨에 메고 가지 않고, 자신의 아이인 것처럼 속여서 안
“엄마, 우리 오늘도 여기서 밥 먹어요?”“그래. 네가 제일 좋아하는 게 고등어조림 요리잖아.”“그런데...”권온유는 입을 꾹 다물고 말을 삼켰다. 사실 권온유는 집에서 밥을 먹고 싶었다.어린 권온유도 느낄 만큼 엄마는 요즘 기분이 좋지 않았다.방금 대답조차 어딘가 건성으로 들렸다.권온유는 어른들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는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는 걸까? 누군가 아빠와 다른 여자가 함께 찍힌 사진을 보내기만 하면, 엄마는 이렇게 변해버렸다.“엄마...”권온유는 엄마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당겼다. 그러나 조순영은 갑자기 권온유의 손을 놓고는 시선이 어느 한 곳에 고정되더니 초조한 표정으로 그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권온유는 깜짝 놀라 인형을 떨어뜨렸다.“엄마!”“온유야, 여기서 움직이지 말고 있어!”조순영은 급히 돌아보며 외쳤다.“엄마 금방 올게!”권온유는 엄마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홀로 서 있었다. 시야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엄마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엄마는 아빠가 다른 여자가 친밀하게 지내는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엄마는 통제력을 잃고 온유를 혼자 내버려두곤 했다. 그러고 한참 후에야 멍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오곤 했다.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던 정대명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요 며칠 동안 몇 번이나 이 모녀를 본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이 여자는 자주 아이와 함께 식사하러 왔는데 가끔 혼자 올 때도 있었다...남편의 외도를 잡으려는 걸까?맞아, 틀림없이 그런 거다!정대명은 매일 호텔에 살면서 듣는 소문도 적지 않았다. 한 회장이라는 사람은 아내와 자식이 있음에도 바람이 잦았다고 하는데 그 회장은 차기 시장의 사위가 될 인물이라는 말도 있었다.정대명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이런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차피 남자가 바깥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건 흔한 일이니까.정대명은 다시 어린 소녀를 주시했다. 소녀
정대명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얼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며칠을 기다린 결과가 고작 최가원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었다.그럼에도 영미는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왔다.“정대명 씨, 대체 뭐 하고 있는 겁니까? 대단한 것도 아니고 아이 하나 훔쳐 오는 게 그렇게 어렵나요?”젠장! 정대명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차라리 보석을 훔치는 게 더 쉬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하하... 영미 아가씨.”마음속으로는 욕하고 있었지만, 얼굴엔 여전히 웃음이 서려 있었다.“이게, 그렇게 쉽지 않네요! 제가 며칠 동안 지켜본 결과, 그 경호원들이 전부 총을 들고 있더라고요. 제가 무턱대고 나서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정말 쓸모없네요.”영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내가 사람들까지 매수해 놨는데, 일을 이따위로 하다니!”정대명은 억눌린 분노를 꾹 참고 입을 다물었다.“말해 두겠는데요!”영미는 한발 더 나아가 말했다.“이 일 못 해내면, 화려한 호텔 스위트룸도 더 이상 못 쓰게 될 테고 돈 한 푼도 못 받는 줄 아세요! 다시 그 작은 산골 마을로 돌아가서 평생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 하세요!”정대명은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호사에 길든 사람이 다시 가난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려운 법이다. 최근 정대명은 오성에서 살아가며 화려한 삶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이 잘 먹고 살게 도와줬고 돈까지도 넉넉히 주니 점점 체면이 생기기 시작했다.호텔에서 정대명이 매일 스위트룸에서 지내는 것을 본 사람들은 그를 대단한 부자로 착각했고 그에게 예의를 갖추며 인사했다.이런 삶은 초라했던 지난날에선 꿈도 꾸지 못한 것이었다.고작 아이 하나 때문에 이 모든 걸 잃기엔 너무 아까웠다.정대명은 급히 전화기를 붙잡고 외쳤다.“영미 아가씨, 너무 흥분하지 마!”영미는 냉소적인 웃음을 흘렸다.“내가...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정대명은 어영부영 답했다.“겨우 아이 하나 가지고, 뭐 대단한 일도 아니지!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