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갑자기 생각났어요.”강서연은 웃으며 말했다.“최연희, 최지한 성도 같고 오성 출신이니까 혹시나 아는 사이인가 싶어서 물어봤어요.”“맞아요.”최연희는 조용하게 말했다.“제 큰 오빠예요. 작은 삼촌의 아들이자 가문의 장손이죠. 언니! 그 인간 성격도 안 좋고 정말 별로인 사람이니까 절대 가까이하지 마요!”강서연은 흠칫 놀라더니 가볍게 웃었다.솔직히 남편 이외의 남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언니.”최연희는 그녀를 바라봤다.“실은... 저한테 친오빠가 있어요.”“그래요?”강서연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친오빠라고요!”최연희는 입술을 깨물더니 웃으며 말했다.“이름은 최연준. 어때요?”“최연준?”강서연은 그녀의 행동에 반응해 줬다.“이름 이쁘네요. 최연희보다 훨씬 듣기 좋은데요?”“정말요?”“네, 맞아요.”최연희는 몰래 핸드폰을 꺼내 녹음 버튼을 눌렀다.“언니, 다시 한번 말해 줘요!”“뭘요?”“최연준이라는 이름이 최연희보다 듣기 좋다고요!”열여덟 살이나 됐음에도 아이처럼 행동하는 모습에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볼을 꼬집었다.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던 강서연은 또박또박 한 글자를 내뱉었다.“최연준은 이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이름이고, 최연희보다 백만 배 좋아요!”최연희는 기대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고 강서연은 뇌세포를 총동원해서 말을 이어갔다.“음... 이름만 들었을 땐 뭔가 정의롭고 똑 부러지는 사람일 것 같아요!”“언니.”최연희는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몇 번만 더 얘기해주면 안 돼요?”타지에 있는 오빠가 그리워서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웃으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알겠어요. 그럼 백 번 말할게요! 연준, 연준, 이 세상에서 제일 듣기 좋은 이름 최연준!”...그 시각 오성의 최상 가문.최연준은 밖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있었고 창밖은 아득한 어둠으로 채워졌다. 그의 싸늘한 얼굴에서는 왠지 모를 따뜻한 미소가 떠올랐다.핸드폰에서는 이따금 다정한 여
“도련님...”방한서가 말하려다가 멈추었다. 최연준은 그런 그를 보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할 말이 있으면 해.”방한서가 입술을 적셨다.“도련님이 강서연 씨를 생각해서 그런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법적으로 볼 때 강서연 씨는 구현수의 아내예요. 만약 도련님이 회사까지 포함해서 그 많은 재산을 서연 씨한테 전부 준다면 구현수한테 절반 주는 거랑 마찬가지예요.”최연준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실 이 문제가 마음에 걸려 유찬혁에게 법적으로 어떻게 되는지 알아보라고 부탁했었다.아무리 부부라도 경제적인 면에서는 독립적이었다. 하여 최연준에 있어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성명서를 작성하여 재산은 강서연의 소유이고 다른 사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면 된다고 했다.“그건 걱정하지 마.”최연준이 방한서를 보며 말했다.“구현수는 나한테서 일전 한 푼도 가져가지 못해. 그리고 이번에 강주로 돌아가면 서연이한테 모든 걸 설명할 거야.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서연이는 나랑 함께 헤쳐 나갈 거라고 믿어!”방한서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불안했다. 하지만 자신만만해하는 최연준 앞에서 더는 뭐라 할 수 없어 그저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네, 서연 씨는 다른 여자들이랑 달라서 도련님을 꼭 이해하실 거예요.”최연준이 우쭐거리며 어깨를 들썩였다. 그 모습에 방한서는 피식 웃으려다가 마른기침했다.“본가 쪽에서 연락이 왔는데 회장님께서 지금 서재에서 도련님을 기다리고 계신답니다.”최연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본가로 향했다. 가는 길에 강서연에게 전화를 여러 통 걸었지만 웬일인지 받지 않았다. 순간 가슴이 움찔한 최연준이 시간을 확인했다.‘이 시간이면 진작 커피숍 문을 닫고 집으로 갔을 텐데 왜 안 받지?’방한서에게 물어보자 방한서는 부하가 계속 지키고 있으니 강서연은 안전하다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최연준이 자세하게 물어보려던 그때 집사가 서재에서 걸
최재원은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아무 말 없이 홍차를 타서 찻잔에 따랐다. 최연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걸어가더니 할아버지를 등지고 느긋하게 말했다.“무슨 일로 전화했어?”“별일은 아니고 그냥...”최지한은 얘기하다 말고 일부러 멈췄다. 휴대 전화 너머로 그의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중요한 일이 아니면 다음 날 다시 얘기해.”최연준이 피식 웃었다.“지금 할아버지께서 옆에 계시는데 형이랑만 얘기할 순 없잖아.”“그래. 그럼 계속 할아버지 옆에서 알랑거려. 그나저나 연준아, 알랑거리는 건 네 여자도 한가락 하던데? 하하...”“뭐라고?”최연준의 표정이 확 어두워지더니 차가운 기운이 등을 타고 뿜어져 나왔다. 최지한이 흉악스럽게 웃으며 또박또박 말했다.“네 여자 말이야, 예쁘고 몸매도 좋더라고. 아주 나이스해!”“최지한!”“연준아, 그렇게 괜찮은 서연 씨를 왜 인제야 소개해줬어? 하하...”전화가 끊기자마자 그의 휴대 전화가 진동하면서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사진이 어둡고 흐릿했지만 커다란 원형 침대에 윗몸을 홀딱 벗은 여자가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누워있었다.순간 최연준은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고 휴대 전화를 너무 꽉 쥔 나머지 피가 다 통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지금 머릿속에는 최지한을 죽여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그가 밖으로 뛰쳐나가려던 그때 뒤에서 최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디 가?”“할아버지...”“형한테 가려고?”최재원은 무슨 일인지는 자세하게 알지 못해도 대충은 알고 있었다. 최지한이 강주에서 강서연이라는 여자를 데려온다는 얘기를 듣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진작 예상했다.“연준아, 그냥 여자일 뿐이야.”최재원이 드래곤 지팡이를 잡고 바닥을 툭툭 쳤다.“형이 좋아한다면 양보해야지. 여자 하나 갖고 둘이서 싸워서야 하겠어?”“할아버지!”최연준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할아버지는 이미 최상 그룹을 너에게 물려주기로 했어.”노련하고 주도면밀한 최재원이 가볍게 웃었다.“지금 너한테
최지한과 최연준 모두 그의 친손자이다. 비록 최연준을 조금 더 편애하긴 했지만, 최지한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것도 원치 않았다.최재원이 지팡이로 바닥을 힘껏 내리쳤다.“최지한 이 자식은 일에 성공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망쳐 먹기 일쑤야. 아주 제대로 혼나봐야 정신을 차리지.”그가 노발대발했다.“진혁이더러 오라고 해. 아들 좀 잘 가르치라고 한마디 해야겠어! 지한이가 잡아 온 그 여자가 진짜 강서연이야?”“회장님...”박경수가 머뭇거리며 말했다.“강주에서 온 강씨 성을 가진 아가씨인 것 맞는데 강씨 가문에 딸이 둘이라 강서연 씨가 옳은지는 잘 모르겠어요...”최재원의 두 눈에 교활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만약 강서연이라면 가장 좋을 것이다. 이참에 최연준과 그 여자를 갈라놓을 수 있으니까.그는 누구보다 자기 손자를 잘 알았다. 최연준은 소유욕이 강해서 자기 여자가 몹쓸 일을 당하면 그 순간은 화가 나겠지만 나중에 마음을 가라앉힌 후에는 점점 그 여자와 멀어지게 되리라 생각했다.최재원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나서야 답답하던 가슴이 편해졌다.“경수야, 연준이한테 사람 붙여서 잘 지켜봐. 절대 일을 크게 만들게 해서는 안 돼!”...최연준은 마치 성난 사자처럼 뛰쳐나가며 허리춤에 차고 있던 총을 꺼냈다.본가에서 해원 별장으로 가는 길에 도우미들은 저마다 겁에 질린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최연준의 두 눈이 시뻘건 게 당장이라도 살인을 저지를 기세였다.“이제부터 우린 부부예요.”“당신이랑 결혼했으니 평생 당신 곁에만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아요. 당신이 돈을 못 벌어도 내가 먹여 살리면 돼요!”“여보, 내가 언니 대신 당신이랑 결혼한 것 말고 다른 건 숨긴 게 없어요. 앞으로 당신도 나한테 숨기는 게 있어서는 안 돼요. 알겠죠?”최연준의 귓가에 온통 강서연의 달콤한 목소리로 가득했고 머릿속에도 강서연의 웃음뿐이었다.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그의 심장을 움켜쥔 듯 마음이 욱신거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강서연의 곁을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최연준!”그가 가려 하자 오히려 최지한이 두 눈을 부릅떴다.“형.”최연준이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리더니 웃을 듯 말 듯 한 얼굴로 말했다.“할아버지가 큰일 하려면 여자 하나 때문에 형이랑 싸우지 말라고 했어. 할아버지 말씀이 옳은 것 같아. 그러니까...”최지한을 돌아보는 그의 눈빛이 차갑기 그지없었다.“재미있게 놀아!”그의 말에 최지한은 순간 멍해졌다.‘뭐야? 아까는 죽일 듯이 달려들더니 그냥 이렇게 간다고?’최지한이 사냥총을 덥석 잡았다. 그가 총알을 장전하려는데 최연준이 한발 먼저 총을 그의 머리에 겨누었다.“형.”최연준이 싸늘하게 웃었다.“내 뒤에서 다른 수작을 부리지 말라고 진작 형이랑 작은삼촌한테 경고했었잖아, 안 그러면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고. 설마 다 잊었어?”최지한의 낯빛이 사색이 되더니 사냥총을 버리고 넋이 나간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최연준이 경멸 섞인 눈빛으로 그를 힐끗 보고 나가려는데 뒤에서 비명이 들려왔다.“구현수!”최연준에게 냅다 달려가던 강유빈은 침대 시트를 밟은 바람에 그만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아픈 것도 신경 쓸 겨를이 없이 바로 일어나 최연준 옆에 바짝 붙었다.“구현수 씨, 나 좀 살려줘요!”최연준은 짜증 섞인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현수 씨!”강유빈이 목청 터지게 외쳤지만 최연준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최연준의 뒷모습이 복도 끝에서 점차 사라지는 걸 보며 절망에 빠졌다.최지한이 사냥총을 다루는 소리가 조용한 방 전체에 울려 퍼져 선명하게 들렸다. 강유빈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린 채 벽에 붙어 부들부들 떨었다.“쟤는 구현수가 아니라 우리 최씨 가문의 셋째 도련님 최연준이야.”최지한이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너 진짜 엄청난 사람을 만났어.”강유빈은 충격에 빠진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최지한은 그녀 앞에 웅크리고 앉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저 자식 안면을 아주 확 바꾸던데? 자기 와이프를 그냥 이렇게 나한테 준다고? 설마...
방한서는 순간 멈칫했다.‘오늘 이사회에 참석하여 그룹의 개혁 방안을 상의해야 하는데 강주로 돌아간다고?’“도련님, 강서연 씨가 걱정돼서 그러는 겁니까?”방한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사람을 보내서 계속 지켜보고 있으니까 서연 씨는 안전해요.”“그런데 왜 전화를 안 받아?”최연준이 참다못해 버럭 화를 냈고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질문에 방한서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사실 전화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아주 많았다. 휴대 전화 배터리가 없다거나, 듣지 못했다거나, 신호가 없다거나...‘한밤중에 전화해서 전화를 받으라고 강요하는 게 어디 있어? 서연 씨도 자고 있겠는데. 도련님도 참...’최연준은 다짜고짜 차 키를 꺼내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때 휴대 전화 벨 소리가 갑자기 울렸다. 화면을 보고 잠깐 멈칫하던 그가 손가락을 떨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여보...”“여보, 미안해요!”강서연이 자다 깬 듯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어젯밤에 연희 양이 같이 밥 먹자고 해서 맥주 좀 마셨어요... 현수 씨도 내 주량 알죠? 조금만 마셔도 취하는 거. 그래서 연희 양이랑 집에 오자마자 쿨쿨 자느라 현수 씨 전화도 못 들었어요. 연희 양은 아직도 자고 있다니까요.”최연준이 벽에 기대섰다. 긴장했던 마음을 드디어 쓸어내릴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킨 후 한참이 지나서야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그랬구나...”어리둥절한 강서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여보, 혹시 화났어요?”최연준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가슴이 먹먹했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히죽 웃었다. 그녀에 대한 걱정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그런 웃음이었다.옆에 있던 방한서는 그제야 배경원이 왜 자꾸 최연준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정말 배경원의 말대로 제정신이 아니었다...“여보? 여보!”강서연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설마 진짜 화난 거야?’“여보, 진짜
최연희가 침대에서 기지개를 켜며 천천히 일어나더니 비몽사몽한 얼굴로 문에 기댔다. 주방에서 풍겨오는 맛있는 냄새에 정신이 번쩍 든 그녀는 냅다 밖으로 뛰어나갔다.역시나 식탁 위에 놓은 음식들은 그녀를 실망하게 하지 않았다.“와, 언니는 우렁각시예요?”최연희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아침부터 뭘 이렇게 많이 했어요?”강서연이 방긋 웃으며 야채죽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이로써 아침 준비가 모두 끝났다.“얼른 먹어요.”그녀는 최연희에게 수저를 건넸다.“연희 양이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한식이랑 양식 이것저것 해봤어요. 입맛에 안 맞아도 많이 먹어요.”“안 맞을 리가 없죠!”최연희는 빵부터 하나 집어 흐뭇한 얼굴로 맛있게 먹었다.강서연은 요리도 참 잘했다. 평범한 식자재들로 이렇게 맛있게 만들다니, 그녀 집의 요리사보다도 훨씬 솜씨가 뛰어난 것 같았다.‘이러니 오빠가 언니한테 푹 빠져서 집에 안 오지.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역시 입맛부터 사로잡아야 해.’그 생각에 최연희는 저도 모르게 히죽 웃었다.“왜 그래요?”강서연이 이상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무슨 기분 좋은 일 있어요?”“아니에요. 그냥 언니랑 함께 사는 형부가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지금 언니가 해준 아침을 먹으니까 저도 너무 행복해요.”강서연의 두 볼이 발그스름해졌다. 최연준도 그녀에게 같은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이 두 사람은 맨날 행복하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사네...’그녀는 피식 웃고는 최연희에게 반찬을 집어주었다.“연희 양, 지금 제인 호텔에 묵고 있죠? 이따가 데려다줄게요.”“괜찮아요.”최연희가 활짝 웃었다.“데리러 오는 사람이 있어요.”“누군데요?”최연희는 아무 말 없이 히죽 웃기만 했다. 두 볼이 발그스름해진 걸 보니 아무래도 남자인 모양이다.잠시 후, 역시 강서연의 예상대로였다. 집 밑에서 최연희가 그녀에게 소개해주었다.“여긴 저의... 친구 인지석이에요.”‘남자친구겠지?’강서연은 대놓고 얘기하진 않았다. 어쨌거나 1
나중에 겨우 위험한 고비를 넘기긴 했지만 더는 과로해서도 안 되고 충격을 받아서도 안 된다고 했다. 하여 최연준이 최재원 대신 최상 그룹을 잠시 맡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강주로 돌아가는 일정이 점점 미뤄졌다.강서연은 별다른 불만 없이 그저 그에게 마음 편히 일에만 몰두하라고 했다. 하지만 최연준은 한시도 그녀 걱정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하루라도 못 보면 계속 불안했다.“지금 할아버지 뵈러 가도 돼?”“경수 아저씨가 그러시는데 지금 둘째 어르신이 돌보고 있다고 합니다.”최연준이 멈칫하는가 싶더니 이내 코웃음을 쳤다.이틀 전에 은미연이 전화로 최문혁과 싸우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은미연은 최재원의 건강이 좋지 않으니 최문혁에게 당장 가서 병간호하라고 일렀다. 하지만 매사에 굼뜬 최문혁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은미연은 분통이 터져 욕설을 퍼부었다.“지금 잘 보이지 않으면 또 동생한테 기회를 주려고 그래? 당신은 왜 이리 겁쟁이야? 어떻게 모든 걸 다 최진혁한테 뺏겨?”‘역시 은 대표님의 말이 옳았어.’최연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비서가 노크하고 들어와 서류 한 무더기를 내려놓았다.“도련님, 이건 그룹의 개혁 시행 방안입니다. 회장님께서 도련님더러 오늘 연관 부분과 회의하여 대체적인 결과를 알려달라고 하십니다.”최연준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할아버지는 날 예뻐하셔서 절대 하루에 이 많은 일을 시키지 않는데 오늘은 왜 이러시지?’평소와 다른 상황에 최재원의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알았어.”최연준은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그럼 회의는 오후 4시에 하는 걸로 해. 그 전에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으니까 일단 할아버지 좀 뵙고 올게.”비서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도련님, 그건...”“왜?”최연준이 살벌한 분위기를 내뿜었다.“할아버지가 편찮으셔서 뵈러 가겠다는데도 말리려고?”방한서가 재빨리 비서 앞을 막아섰다. 비서는 꼼짝도 못 했고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