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겨우 위험한 고비를 넘기긴 했지만 더는 과로해서도 안 되고 충격을 받아서도 안 된다고 했다. 하여 최연준이 최재원 대신 최상 그룹을 잠시 맡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강주로 돌아가는 일정이 점점 미뤄졌다.강서연은 별다른 불만 없이 그저 그에게 마음 편히 일에만 몰두하라고 했다. 하지만 최연준은 한시도 그녀 걱정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하루라도 못 보면 계속 불안했다.“지금 할아버지 뵈러 가도 돼?”“경수 아저씨가 그러시는데 지금 둘째 어르신이 돌보고 있다고 합니다.”최연준이 멈칫하는가 싶더니 이내 코웃음을 쳤다.이틀 전에 은미연이 전화로 최문혁과 싸우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은미연은 최재원의 건강이 좋지 않으니 최문혁에게 당장 가서 병간호하라고 일렀다. 하지만 매사에 굼뜬 최문혁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은미연은 분통이 터져 욕설을 퍼부었다.“지금 잘 보이지 않으면 또 동생한테 기회를 주려고 그래? 당신은 왜 이리 겁쟁이야? 어떻게 모든 걸 다 최진혁한테 뺏겨?”‘역시 은 대표님의 말이 옳았어.’최연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비서가 노크하고 들어와 서류 한 무더기를 내려놓았다.“도련님, 이건 그룹의 개혁 시행 방안입니다. 회장님께서 도련님더러 오늘 연관 부분과 회의하여 대체적인 결과를 알려달라고 하십니다.”최연준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할아버지는 날 예뻐하셔서 절대 하루에 이 많은 일을 시키지 않는데 오늘은 왜 이러시지?’평소와 다른 상황에 최재원의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알았어.”최연준은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그럼 회의는 오후 4시에 하는 걸로 해. 그 전에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으니까 일단 할아버지 좀 뵙고 올게.”비서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도련님, 그건...”“왜?”최연준이 살벌한 분위기를 내뿜었다.“할아버지가 편찮으셔서 뵈러 가겠다는데도 말리려고?”방한서가 재빨리 비서 앞을 막아섰다. 비서는 꼼짝도 못 했고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빤히
웬일인지 약속이나 한 듯이 최진혁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구현수를 잡은 후에 계속 비밀리에 훈련하긴 했지만 구현수는 최연준과 완전히 비교도 안 되었다. 뼛속부터 타고난 게 다르다 보니 아무리 훈련해도 최연준을 따라잡기란 불가능했다.구현수에게 최연준을 사칭하여 영국에 가서 사인하고 돈을 뜯어내라는 것도 말이 안 되었다. 영국에 최연준의 친어머니가 있는데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만약 일이 크게 번지면 결국 내동댕이쳐지는 건 최진혁일 뿐이다.“구현수라는 사람 정말 연준이랑 비슷하게 생겼어?”무심한 척 묻는 최재원의 질문에 최진혁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네... 게다가 강씨 가문과 혼약을 맺은 사람이 바로 구현수라고 해요. 그런데 어찌어찌하여 연준이가 그 마을에 가서 요양하게 되면서...”최진혁은 말을 하려다 멈췄다. 더 얘기했다간 최연준이 비행기 추락 사고를 당했다는 것까지 말할 뻔했다.“아무튼... 대충 그런 상황이에요.”최진혁이 웃으며 말했다.“아버지, 원래부터 오해였어요. 연준이가 아마 평범한 여자를 만나보지 못해서 신기해서 마음이 갔을 거예요. 강서연을 없애면 연준이는 계속 우리 최씨 가문에서 가장 훌륭한 후계자일 겁니다. 하하...”이 웃음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웃음이었다. 강서연을 제거하는 건 최연준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과 다를 게 없으니 말이다.이 방법은 그 어떤 방법보다도 효과가 있을 것이고 남을 이용하여 눈엣가시를 제거하는 것이니 자기 손에 피를 묻힐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최재원도 마침 그 여자를 탐탁지 않아 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을 것이다.‘내가 머리 하나는 참 좋다니까.’“아버지.”최진혁이 잇몸을 드러내며 웃었다.“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강서연의 거처도 알아냈고 또 연준이랑 강주에서 작은 커피숍을 차렸더라고요. 지금 당장 구현수를 보낼 테니까 아버지는 연준이만 잡아두시면 돼요.”최재원은 고개를 들어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래, 이 일은 너한테 맡길게. 깔끔하게 처리해!”“나중에 연준이가
“여보세요, 아들!”휴대 전화 너머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연준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엄마, 이 시간에 웬일로 전화하셨어요?”런던은 지금 오전이라 어머니가 한창 회사에서 바쁠 시간이었다. 하여 절대 수다나 떨자고 전화한 건 아닐 것이다.“가짜 아들을 나한테 보내겠다며? 나더러 그 사람을 잡아놓으라고 하더니 며칠이 지났는데도 왜 아무 소식이 없어? 그 사람은 어디 있는 거야?”최연준이 눈살을 찌푸렸다. 예상대로라면 최진혁과 최지한이 이미 움직였어야 하는데.전화를 끊은 최연준은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한서야.”최연준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작은삼촌 요즘 뭐 하고 있어?”“계속 회장님 곁에서 회장님을 보살펴드리고 계세요.”“지한이 형은?”방한서의 대답을 듣기 전에 최연준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마치 마음 한구석이 찢겨나간 듯한 그런 고통이었다.그는 본능적으로 강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강서연은 또 전화를 받지 않았다.최연준이 잔뜩 굳은 얼굴로 결정을 내렸다.“지금 당장 티켓 끊어. 강주로 돌아간다!”“하지만 도련님...”“내 말 못 알아들어?”최연준은 초조해하며 넥타이를 힘껏 잡아당겼고 심장이 터져 나올 듯이 쿵쾅거렸다....저녁 무렵, 강서연이 커피숍 문을 닫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마당에서 갑자기 인기척이 들려왔다.그녀가 고개를 돌려보니 훤칠한 키의 누군가가 마당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오고 있었다. 강서연은 기쁜 마음에 활짝 웃으며 목청껏 불렀다.“여보!”남자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는 없었지만 눈빛이 어딘가 음흉해 보였다. 그나저나 최연준의 얼굴과 너무나도 닮은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여보! 일주일 후에 온다고 하지 않았어요? 나한테 서프라이즈 해주려고 갑자기 돌아온 거예요?”강서연은 폴짝폴짝 뛰어나가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 그런데 그의 품에 안긴 순간 이상한 기분이 밀려왔다.그녀는
구현수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옷소매에 숨겨둔 비수를 몰래 움켜쥐었다.이곳에 오기 전에 최진혁은 상대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말을 아끼고 깔끔하게 해결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생각보다 만만한 여자는 아닌 듯싶다.게다가 강서연을 죽이려면 사람이 없는 곳에 데리고 가야 했다. 드나드는 사람이 많은 커피숍에서 처리한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구현수는 저도 모르게 자꾸만 그녀를 힐끗거렸다.‘이 여자가 바로 강서연이구나. 나 대신 최연준이 결혼한 여자!’그가 손가락이 잘린 채로 길거리를 헤매고 있을 때 최연준이 그를 도와 인생의 일대사인 결혼을 해결해줬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그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이 예쁜 여자를 바로 죽이기엔 좀 아까운데? 내가 먼저 즐기다가 죽여야겠어.’구현수가 입꼬리를 씩 올렸고 두 눈에 사악함이 스쳐 지나갔다.그는 헛기침으로 자신의 속내를 숨기려 했다. 강서연은 재빨리 그에게 물 한잔을 따라주며 앉아서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고는 능숙하게 앞치마를 입고 음식을 준비했다.그녀는 곁눈질로 의자에 앉아 안절부절못하는 남자를 지켜보았다. 자꾸만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표정도 이상했으며 커피 한잔도 평소답지 않게 아주 천천히 마셨다. 그녀가 알고 있는 구현수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움직임을 잠깐 멈춘 강서연의 눈에 펜넬이 들어왔다. 그녀는 몰래 펜넬을 한 줌 집어서 방금 만든 비빔밥에 넣었다.“여보, 다 됐어요.”그녀가 가볍게 웃으며 음식을 내왔다. 구현수는 당황한 나머지 하마터면 컵을 깨뜨릴 뻔했다. 그가 손을 내밀어 컵을 잡던 그때 강서연은 그의 왼쪽 손가락에 끼고 있던 골무를 발견했다.“여보.”그녀가 놀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물었다.“손 왜 이래요? 다쳤어요?”구현수는 고개를 번쩍 들고 그녀를 째려보았다. 그 모습에 강서연은 마음이 움찔했다. 이렇게나 날카롭고 흉악한 눈빛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여보...”“난 괜찮아.”구현수는 고개를 숙이고는 평소처럼 왼손으로 숟가락을 들고 허겁지겁 먹기
“하지만 그 전에...”...최연준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계속 강서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받질 않았다. 불안한 예감이 마치 수만 마리의 벌레처럼 그의 가슴을 후벼파고 있었다.그는 재빨리 집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집 밑에 도착하자마자 방한서가 보낸 부하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저마다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도련님, 가게에 가신 거 아니었어요?”“뭐?”최연준은 마음이 움찔했다.“가게라니?”“가게 쪽을 지키던 애들이 그러던데요? 도련님이 커피숍에 들어갔다고. 전에 한서 형님이 도련님이랑 서연 씨가 함께 있을 땐 방해하지 말라고 해서 도련님이 가게에 들어가시는 걸 보고 다 철수했거든요.”“젠장!”최연준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바로 알아챘다. 가게에 들어간 건 구현수이고 지금 이 순간... 강서연 혼자서 구현수를 상대하고 있었다.“지금 당장 가게로 간다!”몇몇 경호원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바로 차에 올라타 커피숍으로 최대한 빨리 달려갔다....강서연은 구현수에게 따귀를 몇 대 맞은 바람에 입가가 퉁퉁 부었고 의식도 점점 흐릿해지기 시작했다.그녀는 힘을 쥐어 짜내며 벗어나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구현수가 비수를 목에 겨누고 있어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고 목에서도 시뻘건 피가 천천히 흘러내렸다.그때 구현수가 갑자기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옷을 확 찢어버렸다.훤히 드러난 속살에 구현수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두 눈이 반짝였다. 그는 다시 한번 강서연의 머리채를 확 잡아당겨 바닥에 두 번 내리쳤다. 강서연이 더는 반항할 힘이 남아있지 않다는 걸 확인하고는 음흉하게 웃으며 옷을 벗었다.“잠깐!”강서연은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며 힘겹게 말했다.“구현수... 여기서는 싫어...”“뭐라고?”강서연은 터져 나오는 눈물을 가까스로 참으며 마음을 진정하려 노력했다.“여기 바닥이 너무 차...”“거참 따지는 것도 많네!”“죽을 때가 돼서 그래...”강서연은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구현수, 내가 이미 여기 갇혔는데 도망갈 수
그 순간 총알이 유리창을 뚫는 소리가 마당 상공에 울려 퍼졌고 곧이어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바닥에 쓰러진 강서연은 의식이 점점 흐려졌지만 마지막 힘을 내어 밖으로 기어나갔다.“여보, 살려줘요...”그런데 커다란 손이 그녀의 머리채를 확 잡아당겼다. 두피가 뜯겨나가는 듯한 고통에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의식을 완전히 잃기 전에 차가운 칼날이 피부를 스쳤고 이어 구현수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도련님, 절 놓아주면 이 여자를 넘길게요. 어때요? 괜찮은 거래인 것 같은데. 이대로 그냥 보내준다면 다시는 두 사람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요. 도련님 와이프는 앞으로 도련님 한 사람의 것이에요!”최연준이 소리를 지르자 몇몇 경호원들이 구현수를 물샐틈없이 포위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함부로 덤비지 못했다.구현수가 비수로 강서연의 목을 겨누고 있었고 시뻘건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싸늘하게 웃던 구현수가 문 쪽으로 물러서더니 강서연을 최연준의 품에 확 던져버렸다.경호원들이 그를 쫓아갔지만 구현수가 한발 먼저 검은색 세단에 올라탄 바람에 잡지 못했다. 번호판도 없는 그 차는 길가에서 오래 기다린 듯했다.구현수도 놓치고 운전자의 얼굴도 확인 못 한 경호원들은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당장 병원으로 가!”병원으로 가는 길 내내 최연준은 강서연을 꼭 끌어안았다. 몸과 손이 그녀의 피로 물들었다.머릿속이 하얘진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러 방법으로 지혈하려 애를 썼지만 피가 멈추지 않았다.“서연아, 강서연!”최연준은 그녀를 미친 듯이 불렀다.“눈 뜨고 나 좀 봐봐!”강서연은 아무 반응이 없었고 얼굴과 입술에 핏기가 전혀 없었다. 최연준은 절망에 빠진 얼굴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죽음과 이 정도로 가까이 마주한 건 그야말로 처음이었다....번호판이 없는 검은색 세단은 미친 듯이 질주하여 인적이 드문 교외까지 달려왔다.강가의 바람이 시내보다 훨씬 더 셌다. 구현수가 유리창을 닫으려던 그때 백미러로 그를 섬뜩하게 쳐다보는 눈빛과 딱
“아까 당신이 실패했을 때 이미 그 사실을 어르신께 알려드렸어요.”남자가 고개를 돌렸다.“이 돈은 어르신이 주신 거예요. 당신을 살려두면 앞으로도 쓸모가 있을 거라고 하셨어요.”남자는 갑자기 손을 뻗어 구현수의 얼굴을 덥석 잡았다. 그가 사악하게 웃으며 말했다.“어르신의 계획대로 움직이는 게 좋을 거예요... 이대로 죽으면 얼마나 아까워요.”구현수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감옥살이를 오래 하고 육경섭 같은 깡패를 만나도 눈앞의 이 청년처럼 두려움에 떤 적이 없었다.“그만 가봐요.”차가 길가에 멈춰 섰고 싸늘한 목소리가 구현수의 귓가에 들려왔다.“앞으로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있을 거예요.”돈뭉치를 챙긴 구현수는 차 문을 열고 황급히 도망쳤다. 모자를 눌러쓰던 남자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최연준은 응급실 문 앞에서 애타게 기다렸다. 손에 묻은 피가 검붉게 변해버렸다. 그는 떨리는 두 손을 맞잡은 채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최연준의 뒤에 서 있는 경호원들의 표정도 어두웠다. 그때 맨 앞에 선 경호원이 다가와 나지막이 말했다.“도련님, CCTV를 돌려봤는데 교외 방향으로 도망친 걸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운전자가 아주 교활하더군요. 게다가 강주에 번호판이 없는 차량이 많고 특별한 차종도 아니라서 조사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최연준은 아무 말 없이 싸늘한 기운만 내뿜었다.임우정은 초조한 마음에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손톱을 계속 물어뜯었다. 응급실 위쪽의 빨간 불이 마치 뜨거운 불꽃처럼 그녀의 마음을 태우는 것 같았다.육경섭은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최연준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에게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라고 얘기할 참이었는데 임우정이 먼저 눈살을 찌푸리고 차갑게 물었다.“저 사람이 진짜 최연준이야?”육경섭은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듯 그녀를 보며 입술을 적셨다.강서연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걸 알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적어도 스무 번은 물어봤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육경섭은 인내심 있게 설명했다.“그래, 최연준
육경섭은 제자리에 가만히 선 채 복잡한 눈빛으로 임우정을 쳐다보았다.“제발 진정 좀 해. 연준 씨도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겠지...”“모르긴 뭘 몰라?”임우정이 목청을 높였다.“오성에서 재벌의 삶이 하도 지루해서 범죄자의 신분으로 사기 결혼하러 온 거겠지.”“무슨 얘기를 그렇게 해? 넌 상황을 잘 몰라. 그때 연준 씨가 남의 음모로 중상을 입은 바람에 강주에서 이름을 숨기고 지냈던 거야.”임우정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육경섭을 싸늘하게 훑어보았다.“너 이 사람에 대해 많이 아네?”육경섭은 아무 말이 없었다.“육경섭!”육경섭은 자신의 따귀를 내려치고 싶은 심정이었다.“최연준 씨.”임우정은 너무도 화가 나 목소리마저 떨렸다.“치료하겠으면 조용히 치료나 할 것이지, 왜 가만히 있는 서연이를 건드렸어요? 자기가 무슨 황태자라도 되는 줄 알아요? 중상을 입은 와중에도 여자를 꼬시다니. 당신네 형제들이 아주 부러워하겠어요? 그나저나 서연이는 어떡해요? 진짜 서연이랑 결혼할 거예요?”“우정아!”육경섭의 표정이 무척이나 진지했다.“그만해!”임우정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터져 나오는 울음을 애써 참았다.병원 복도가 갑자기 진공 속에 빠진 듯 조용해졌다. 잠시 후, 응급실 불이 꺼지자 최연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신석훈이 응급실에서 걸어 나오며 홀가분하게 한숨을 돌렸다.“다행히 상처가 깊지 않았고 동맥도 건드리지 않았어요. 다른 상처는 그냥 찰과상이라 천천히 치료하면 돼요.”최연준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최연준을 마주한 신석훈은 마음이 복잡했다. 그때 자신이 구한 사람이 이런 엄청난 사람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도... 도련님.”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간호사가 안에서 마지막으로 상처를 처리하고 있어요. 한동안 관찰하다가 아무 이상이 없으면 일반 병실로 옮길 거예요.”최연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목소리로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아 참.”신
회의실은 단숨에 고요 속에 잠겼다. 강렬한 존재감의 인물이 문턱을 넘어서자, 방 안은 서늘하면서도 압도적인 기운으로 가득 찼다.원장은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 단숨에 그의 곁으로 다가가 어깨를 툭 치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왜 이제야 온 거야?”임지강의 눈가에는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그러나 그의 시선이 허운주에게 닿는 순간, 그 미소는 천천히 사라지고 대신 날카롭고 차가운 눈빛이 자리 잡았다.“으흠!”원장은 자세를 가다듬으며 목소리를 높였다.“오늘 이 자리에서는 투표 결과를 발표하는 것뿐만 아니라 매우 중요한 소식을 전하려고 합니다.”원장은 한 장의 서류를 꺼내 들었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유치원의 공식 도장과 함께 임지강의 힘찬 서명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임 대표님께서 우리 유치원에 10억을 투자해 주셨고 국제 유치원의 최대 주주가 되셨습니다. 유아 교육을 위해 아낌없이 지원해 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희도 초심을 잃지 않고 임 대표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이내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송윤지는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얼굴에 붉은 기운이 번지자 뜨거운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입가에 번진 미소는 감추기 어려웠다.임지강은 잔잔한 미소를 띤 채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제가 이 유치원의 주주가 된 이상, 앞으로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우리 국제 유치원의 이익을 위해서일 것입니다.”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허운주를 똑바로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래서 오늘, 교사 팀을 정비하려고 합니다.”허운주는 본능적으로 두 걸음 물러나며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이곳에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임지강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자신의 가치관조차 바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아이들을 올바르게 이끌 수 있겠습니까?”허운주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저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가요?”“여기 있는 사람 중
원장의 표정이 단단히 굳어졌다.“허 선생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오늘 표 집계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투명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조작이라니, 그 말은 제가 개입했다는 뜻인가요?”“원장님, 제가 어떻게 감히 원장님을 의심하겠습니까?”허운주는 억지 미소를 띠며 비꼬듯 말했다.“하지만 표 차이가 이렇게 크게 나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설령 원장님께서 관여하지 않으셨더라도, 누군가 뒤에서 무슨 일을 꾸몄을 가능성은 충분하지 않겠습니까?”“허 선생님...”원장은 화나 치밀어 올라 말을 잇지 못했다. 막무가내인 사람들과 대화하는데 익숙하지 않았다.“허 선생님, 하신 말씀에 대해 책임지셔야 합니다.”송윤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송윤지는 허운주를 담담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저는 단 한 번도 허 선생님께 폐를 끼친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우수 교사 선발 역시 모든 과정이 투명하고 공정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제가 정말 무슨 일을 꾸몄다면, 이렇게 공개적으로 표를 집계했겠습니까?”허운주는 송윤지를 노려보며 속으로 분노를 억눌렀다.평소 조용하고 소극적인 송윤지를 쉽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의 송윤지는 논리 정연한 주장으로 상대의 도발에도 굴하지 않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송윤지를 새롭게 보게 되었고 문밖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임지강의 입가에는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임지강은 회의실 밖에서 모든 상황을 눈여겨보고 있었다.특히 송윤지의 표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임지강은 마치 자신이 상을 받은 것처럼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곁에 있던 부하 직원조차 그의 변화를 놀라워하며 말했다.“송 선생님은 정말 대단하시네요.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었다. 송윤지는 변하지 않았다. 그저 예전에 자신과 함께 있을 때는 너무 조심스러워 본래의 자신을 숨겼을 뿐이었다.“임 대표님, 허 선생님에 대해서는 어떻게 처리할까요?
“지난번에 내가 해외 시장을 축소하라고 했지만, 당신 아들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임수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결국 문제는 그 여자가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거야... 그 여자는 현진이를 부추겨 또 다른 일을 꾸밀 거고 현진이는 분명히 그 여자의 말을 들을 거야.”“그러니까 그들이 더 큰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임수정은 딸을 바라보며 말했다.“윤아야, 네가 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회사들을 꽉 잡고 있어야 해! 너 혼자 힘들면 군성이랑 의논해도 되고 군형이나 소유의 도움을 받아도 돼. 네가 동의하지 않는 한, 네 오빠는 너한테서 단 한 푼도 가져갈 수 없어. 이해했지?”“윤아야.”임수정은 딸의 손을 꼭 잡았다.“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이 모든 재산은 우리 조상들이 쌓아온 거야. 절대 우리 세대에서 무너져선 안 된다!”“네, 저 이해했어요.”배윤아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말했다.“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오빠가 하루빨리 제정신을 차려서 우리가 예전처럼 가족으로 지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임수정은 힘없이 눈을 감았다. 기침하며 숨을 고르는 임수정의 모습이 안쓰럽기만 했다.그러나 그 순간, 문밖에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소피아가 복도 모퉁이에 숨어 임수정의 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벽을 짚고 있던 소피아는 주먹을 꽉 쥐었고 마치 벽을 뚫을 듯 힘을 주고 있었다.방 안에서 나눈 대화는 모두 소피아의 귀에 생생히 들렸다.오늘 소피아가 임수정을 찾아온 건, 회사 본사에서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을지 알아보려는 목적이었다. 만약 가능하다면 은행 대출을 받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상상도 못 한 일이 벌어졌다.지금 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재산 전부가 이 어린 소녀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여보세요, 소피아!”그때, 배현진이 전화를 걸어왔다.“지금 엄마 집에 있어? 나 일이 아직 안 끝나서 조금 있다가 가려고. 엄마한테 전해줘.”“그럴 필요 없어.”소피아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임수정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배경원은 막 씻은 딸기를 가져왔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딸기의 끝부분을 잘라 임수정의 입에 넣어주었다.결혼한 지 이렇게 오래되었는데도, 두 사람의 애정과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는 여전히 처음과 같았다. 그들의 관계는 많은 사람의 부러움을 사고 있었다.배윤아는 방으로 들어오기 전에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엄마를 위해 영양제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새로 그린 그림도 품에 안고 있었다.“엄마, 아빠, 저랑 군성이가 이번에 현실적인 내용을 담은 만화를 하나 출간하려고 해요. 내용은 한 부부가 젊었을 때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다룬 거예요... 사실 주인공 부부가 바로 엄마, 아빠예요! 보세요, 이렇게 그렸는데 괜찮죠?”임수정과 배경원은 딸이 그린 그림을 보며 얼굴에 자부심이 가득했다.부부는 원래 대부분의 기대를 아들에게 걸고 있었다. 이는 남녀 차별 때문이 아니라 배윤아의 성격이 어릴 적부터 세상일에 무심하고 경쟁을 피하는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가문의 계승자로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딸이 오히려 아들보다 더 믿음직스럽다.“윤아야.”임수정은 딸의 손을 잡으며 눈빛에 깊은 의미를 담아 말했다.“엄마가 너에게 꼭 전해주고 싶은 게 있어.”“뭔데요?”배윤아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임수정은 베개 밑에서 갈색 서류봉투를 꺼냈다. 그 안에는 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핵심 자료들이 들어 있었다.“이것뿐만 아니라, 본사의 도장도 있어.”배경원은 도장까지 꺼내 배윤아에게 건넸다. 배윤아는 깜짝 놀라 귀중한 물건들을 손에 들고 어찌할 줄 몰라 하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아빠, 엄마, 이건 도대체...”“우리도 이제 나이가 들었고 몸 상태도 좋지 않아. 요양원에 머무는 동안은 회사로 돌아가 직접 관리할 수도 없을 거야.”배경원은 평소 장난스러웠던 모습을 거두고 진지한 얼굴로 배윤아를 바라보았다.“윤아야, 엄마, 아빠는 이 모든 것을 너에게 맡기기로 했다. 네가 책임을 져야 해.”배윤아의
배현진은 업무 능력이 뛰어났지만, 인간관계나 처세술은 부족했다.예를 들어, 송윤지가 그의 약혼녀였던 시절에도, 배현진은 한 번도 진심으로 송윤지를 존중한 적이 없었다.송윤지와의 결혼을 결정한 이유도 그녀의 친정에 배경이 없어서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나중에 자신이 바람을 피우더라도, 송윤지가 아무런 반발도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그렇다면 배현진은 전형적인 고지능, 저감성의 사례일까?사람들은 흔히 아이들의 첫 번째 선생님이 그들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배현진의 첫 선생님은 그저 성적을 잘 받는 법만 가르쳤을 뿐, 학업과 일 외에도 중요한 삶이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알려주지 않았다.이 생각이 하자, 송윤지는 갑자기 모든 게 명확해졌다. 송윤지는 배현진을 떠올리며 안타까움을 느꼈고 어딘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송윤지의 미소는 허운주의 눈에 더 거슬리게 보였다.“뭐 하는 거죠?”허운주는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뭐가 그렇게 웃긴 데요?”“아무것도 아닙니다.”송윤지는 미소를 거두고 냉정한 눈빛으로 말했다.“다만 허 선생님의 교육 철학은 이제 바뀌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더 많은 아이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말이에요.”“뭐라고요?”“저는 아이들과 놀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송윤지는 차분히 말했다.“저는 아이들이 자연 속에서 세상을 느끼고 책에만 얽매이지 않도록 돕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저 아이들이 잊을 수 없는 행복한 어린 시절을 가지길 바랐습니다. 결국, 아이들의 성장 시기는 단 한 번뿐이니까요. 제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었던 건, 인생은 멋진 여정이고 그것을 온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성적에만 집착한다면, 아이들의 앞길은 점점 좁아질 수밖에 없습니다.”허운주는 숨을 헐떡이며 입술을 떨었다.허운주는 20년 넘게 이 일을 해온 베테랑 교사로 수많은 명문가의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런 허운주가 이제 한 젊은 교사에게 권위를 도전받고 있었다.자존심이 상해서 도저히 견
송윤지가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날 선 목소리가 송윤지의 귓가를 스쳤다.“우수 교사라니? 참, 그런 상 따위는 다 가짜야. 아무 의미도 없는걸.”잠시 걸음을 멈춘 송윤지는 그 말에 반응하지 않고 곧장 자신의 책상으로 걸어갔다.허운주의 자리는 송윤지의 자리와 가까웠다. 송윤지는 허운주의 눈빛에서 질투와 증오가 서린 눈길을 느꼈다.며칠 전, 원장이 송윤지를 오성시 우수 교사 후보로 추천하겠다고 발표한 이후로 허운주는 완전히 송윤지를 적대하기 시작했다.겉으로는 그런 상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원장을 찾아가 분노를 터뜨렸다.“송윤지는 경력도 짧고 교직 생활을 한 지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왜 우수 교사 후보로 추천되는 겁니까? 저는 이렇게 오랫동안 가르쳤는데, 이번에는 제 차례여야 하지 않나요?”그날, 원장실 밖에서는 여러 교사가 웅성거리며 허운주의 불만을 엿들었다.이후로 사무실의 분위기는 눈에 띄게 바뀌었다.건강을 회복하고 복귀한 송윤지는 동료들의 태도가 예전과는 전혀 달라졌음을 느꼈다.과거에는 송윤지가 배씨 가문의 도련님과 약혼한 사실만으로도 모두가 존중하고 떠받들었다. 하지만 이제 송윤지는 배씨 가문의 도련님에게 버림받은 여자가 되어 있었고 아이가 있는 이혼녀와의 경쟁에서도 패배했다는 소문까지 퍼지며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를 받게 되었다.이런 변화가 언젠가는 찾아올 거라 예상했지만, 이렇게 빨리, 그리고 이렇게 노골적인 태도로 찾아올 줄은 몰랐다.“그러게요, 정말 불공평한 것 같아요.”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맞장구를 쳤다.“허 선생님이 훨씬 자격이 있는데 경력도 없는 신입이 후보라니, 말이 안 되죠.”송윤지는 아무 말 없이 컴퓨터를 켜고 수업 준비를 시작했다.그때, 문 앞에 원장이 나타나 환한 미소를 지으며 휴대전화를 흔들었다.“송 선생님! 송 선생님! 보세요, 선생님께서 이미 최종 라운드에 진출했어요!”사무실 안은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송윤지도 당황한 듯 잠시 멈칫했다. 유독 허운주의 표정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원장은 가볍
배현진은 잠시 멍해졌다. 배현진의 입술이 떨렸다.1조?배현진이 운영하는 자회사는 지금 당장 천억의 유동 자금조차 마련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1조가 필요하다면 반드시 본사에 지원을 요청해야 하고, 이는 이사회에서 논의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이사들은 모두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의 보수적인 사람들이었다. 이 금액을 승인해 줄 리가 없었다.“배 도련님?”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듯 말했다.“배씨 가문의 대단한 도련님도 이런 돈 때문에 고민하시네요?”소피아는 급히 팔꿈치로 배현진을 찔러 눈짓을 보냈다. 그리고 조 회장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럴 리가 있겠어요! 조 회장님께서 이미 최저 가격을 제시하셨으니 우리 현진 씨가 반드시 잘 처리할 겁니다.”“그렇습니까?”조 회장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제가 최저 가격을 제시한 건 제 진심의 표현인데 두 분의 진심은 아직 보이지 않네요.”“조 회장님...”소피아가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배현진이 그녀를 제지했다.배현진은 깊은숨을 내쉬며 최악의 상황까지 대비하고 입을 열었다.“조 회장님, 저도 진심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다만 제가 운영하는 자회사의 상황이 좋지 않아서... 1조는 저의 아버지를 놀라게 할 금액입니다. 그분이 아시면...”“아, 그게 걱정이었군요?”조 회장은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배 도련님, 솔직히 이야기해 봅시다. 지금 그 돈이 없으신 거죠?”배현진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이 일을 아버님께 들키고 싶지 않은 거고요?”“네.”“그렇다면 간단합니다!”조 회장은 담배를 입에서 뗀 뒤, 부하가 건넨 명함을 내밀었다.배현진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이게... 뭔가요?”“돈이 없으시면 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면 되죠.”조 회장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이 사람은 저와 친한 사이이고 은행에서 꽤 영향력이 있습니다. 이 사람을 찾아가면 당신의 자금 문제를 해결해 줄 겁니다.”소피아는 크게 기뻐하며 연신 감사 인사를 했다. 하지만
임지강은 약간 실망했지만, 여전히 미소를 띠고 송윤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송윤지는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임지강의 눈을 보는 순간, 송윤지는 심장이 마구 뛰는 기분이 들었다. 송윤지는 급히 고개를 숙여 밀크티를 마시며 마음속의 동요를 숨기려 했다.“임 대표님, 제 뜻을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고마워할 필요 없어요.”임지강은 부드럽게 말했다.“윤지 씨를 좋아하는 건 제 마음이에요, 윤지 씨가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저도 부탁이 있어요...”“무슨 부탁이죠?”“그동안은 절 거절하지 마세요.”임지강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제가 윤지 씨에게 잘할 기회는 좀 줘야죠.”송윤지는 부끄러워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공기 중에 묘한 설렘이 감돌았다.하지만, 이 남자가 자꾸 송윤지의 꿈에 나타나는 건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임 대표님.”송윤지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가... 예전에 만난 적 있나요?”임지강은 잠시 멈칫했다.송윤지는 머리를 긁적이며 약간 어색하게 말했다.“임 대표님이 참 익숙하게 느껴져요... 사실 저는 예전에 큰 병을 앓은 적이 있는데 병이 나은 후로 모든 걸 잊어버렸거든요. 만약 임 대표님이 저를 알고 있었다면, 솔직히 말해 주세요. 우리 가족은 왜 그러는지 제 과거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아요...”임지강은 마음이 조여드는 듯했다.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렸다오랜 침묵 이후, 임지강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는 모르는 사이에요.”송윤지는 멍하니 임지강을 바라보았다.“윤지 씨가 저를 익숙하게 느끼는 건, 아마 사람들 사이의 특별한 인연 때문일 거예요.”임지강은 가볍게 쉰 목소리로 말했다.“가족이 과거를 말하지 않는 건, 정말로 특별히 말할 게 없어서일 수도 있어요. 과거는 이미 지나간 일이에요. 다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수 있어요. 그렇죠?”“윤지 씨.”임지강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윤지 씨와 함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어요. 제가
“하지만...”배현진은 잠시 망설였다. 소피아가 말한 두 광산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었고 조건도 매우 훌륭했다. 소문에 따르면 가격도 상당히 매력적이었다.하지만 배현진은 벤처 투자의 세계에서 오랜 경험을 통해 배운 것이 있었다. 매력적인 가격 뒤에는 언제나 큰 함정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자기야, 당신 나 못 믿는 거야?”소피아는 배현진의 팔을 흔들며 물었다.“미국에 있을 때 내가 당신 일을 얼마나 많이 도왔는지 알잖아. 내 능력, 못 믿어?”“그럴 리가.”배현진은 소피아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소피아는 그가 가장 신뢰하는 조력자였고 배현진이 소피아에게 매료된 것도 그녀의 업무 능력 때문이었다.“그냥... 이번 일은 금액이 너무 크기도 하고, 게다가 조 회장이라는 사람과는 거의 모르는 사이잖아.”“한 번 보면 모르는 사람이지만 두 번 보면 아는 사이가 되는 거지!”소피아는 눈을 반짝이며 미래를 그리기 시작했다.“이번에 우리가 큰 돈을 벌게 되면, 당신 부모님도 우릴 좋게 생각해 주실 거야.”배현진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소피아는 배현진의 옆에 더 가까이 다가가 그의 셔츠 단추를 장난스럽게 만지작거리며 말했다.“현진 씨, 당신은 나와 평생 함께하고 싶지 않아? 우리가 성과를 내야 당신 부모님도 우리를 인정하실 거고 우리에 대한 반대도 사라질 거야. 난 진심으로 당신과 함께하고 싶어서 이렇게 노력하는 거야. 당신 부모님의 인정을 받고 싶어서.”배현진의 마음이 움직였다. 배현진은 소피아를 안고는 부드럽게 소피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그는 소피아와 영원히 함께하고 싶었다. 소피아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의 마음은 그녀에게 있었다.소피아가 아름답고 매력적인 것은 물론, 직장에서 보여주는 강단 있고 당당한 모습이 배현진을 매료시켰다. 그것은 송윤지가 가지고 있지 않은 모습이었다.배현진은 송윤지처럼 순진하고 조용한 ‘작은 토끼’ 같은 여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배현진은 도전적인 여자를 좋아했고 소피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