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세요, 아들!”휴대 전화 너머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연준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엄마, 이 시간에 웬일로 전화하셨어요?”런던은 지금 오전이라 어머니가 한창 회사에서 바쁠 시간이었다. 하여 절대 수다나 떨자고 전화한 건 아닐 것이다.“가짜 아들을 나한테 보내겠다며? 나더러 그 사람을 잡아놓으라고 하더니 며칠이 지났는데도 왜 아무 소식이 없어? 그 사람은 어디 있는 거야?”최연준이 눈살을 찌푸렸다. 예상대로라면 최진혁과 최지한이 이미 움직였어야 하는데.전화를 끊은 최연준은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한서야.”최연준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작은삼촌 요즘 뭐 하고 있어?”“계속 회장님 곁에서 회장님을 보살펴드리고 계세요.”“지한이 형은?”방한서의 대답을 듣기 전에 최연준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마치 마음 한구석이 찢겨나간 듯한 그런 고통이었다.그는 본능적으로 강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강서연은 또 전화를 받지 않았다.최연준이 잔뜩 굳은 얼굴로 결정을 내렸다.“지금 당장 티켓 끊어. 강주로 돌아간다!”“하지만 도련님...”“내 말 못 알아들어?”최연준은 초조해하며 넥타이를 힘껏 잡아당겼고 심장이 터져 나올 듯이 쿵쾅거렸다....저녁 무렵, 강서연이 커피숍 문을 닫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마당에서 갑자기 인기척이 들려왔다.그녀가 고개를 돌려보니 훤칠한 키의 누군가가 마당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오고 있었다. 강서연은 기쁜 마음에 활짝 웃으며 목청껏 불렀다.“여보!”남자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는 없었지만 눈빛이 어딘가 음흉해 보였다. 그나저나 최연준의 얼굴과 너무나도 닮은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여보! 일주일 후에 온다고 하지 않았어요? 나한테 서프라이즈 해주려고 갑자기 돌아온 거예요?”강서연은 폴짝폴짝 뛰어나가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 그런데 그의 품에 안긴 순간 이상한 기분이 밀려왔다.그녀는
구현수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옷소매에 숨겨둔 비수를 몰래 움켜쥐었다.이곳에 오기 전에 최진혁은 상대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말을 아끼고 깔끔하게 해결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생각보다 만만한 여자는 아닌 듯싶다.게다가 강서연을 죽이려면 사람이 없는 곳에 데리고 가야 했다. 드나드는 사람이 많은 커피숍에서 처리한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구현수는 저도 모르게 자꾸만 그녀를 힐끗거렸다.‘이 여자가 바로 강서연이구나. 나 대신 최연준이 결혼한 여자!’그가 손가락이 잘린 채로 길거리를 헤매고 있을 때 최연준이 그를 도와 인생의 일대사인 결혼을 해결해줬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그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이 예쁜 여자를 바로 죽이기엔 좀 아까운데? 내가 먼저 즐기다가 죽여야겠어.’구현수가 입꼬리를 씩 올렸고 두 눈에 사악함이 스쳐 지나갔다.그는 헛기침으로 자신의 속내를 숨기려 했다. 강서연은 재빨리 그에게 물 한잔을 따라주며 앉아서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고는 능숙하게 앞치마를 입고 음식을 준비했다.그녀는 곁눈질로 의자에 앉아 안절부절못하는 남자를 지켜보았다. 자꾸만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표정도 이상했으며 커피 한잔도 평소답지 않게 아주 천천히 마셨다. 그녀가 알고 있는 구현수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움직임을 잠깐 멈춘 강서연의 눈에 펜넬이 들어왔다. 그녀는 몰래 펜넬을 한 줌 집어서 방금 만든 비빔밥에 넣었다.“여보, 다 됐어요.”그녀가 가볍게 웃으며 음식을 내왔다. 구현수는 당황한 나머지 하마터면 컵을 깨뜨릴 뻔했다. 그가 손을 내밀어 컵을 잡던 그때 강서연은 그의 왼쪽 손가락에 끼고 있던 골무를 발견했다.“여보.”그녀가 놀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물었다.“손 왜 이래요? 다쳤어요?”구현수는 고개를 번쩍 들고 그녀를 째려보았다. 그 모습에 강서연은 마음이 움찔했다. 이렇게나 날카롭고 흉악한 눈빛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여보...”“난 괜찮아.”구현수는 고개를 숙이고는 평소처럼 왼손으로 숟가락을 들고 허겁지겁 먹기
“하지만 그 전에...”...최연준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계속 강서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받질 않았다. 불안한 예감이 마치 수만 마리의 벌레처럼 그의 가슴을 후벼파고 있었다.그는 재빨리 집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집 밑에 도착하자마자 방한서가 보낸 부하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저마다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도련님, 가게에 가신 거 아니었어요?”“뭐?”최연준은 마음이 움찔했다.“가게라니?”“가게 쪽을 지키던 애들이 그러던데요? 도련님이 커피숍에 들어갔다고. 전에 한서 형님이 도련님이랑 서연 씨가 함께 있을 땐 방해하지 말라고 해서 도련님이 가게에 들어가시는 걸 보고 다 철수했거든요.”“젠장!”최연준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바로 알아챘다. 가게에 들어간 건 구현수이고 지금 이 순간... 강서연 혼자서 구현수를 상대하고 있었다.“지금 당장 가게로 간다!”몇몇 경호원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바로 차에 올라타 커피숍으로 최대한 빨리 달려갔다....강서연은 구현수에게 따귀를 몇 대 맞은 바람에 입가가 퉁퉁 부었고 의식도 점점 흐릿해지기 시작했다.그녀는 힘을 쥐어 짜내며 벗어나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구현수가 비수를 목에 겨누고 있어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고 목에서도 시뻘건 피가 천천히 흘러내렸다.그때 구현수가 갑자기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옷을 확 찢어버렸다.훤히 드러난 속살에 구현수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두 눈이 반짝였다. 그는 다시 한번 강서연의 머리채를 확 잡아당겨 바닥에 두 번 내리쳤다. 강서연이 더는 반항할 힘이 남아있지 않다는 걸 확인하고는 음흉하게 웃으며 옷을 벗었다.“잠깐!”강서연은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며 힘겹게 말했다.“구현수... 여기서는 싫어...”“뭐라고?”강서연은 터져 나오는 눈물을 가까스로 참으며 마음을 진정하려 노력했다.“여기 바닥이 너무 차...”“거참 따지는 것도 많네!”“죽을 때가 돼서 그래...”강서연은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구현수, 내가 이미 여기 갇혔는데 도망갈 수
그 순간 총알이 유리창을 뚫는 소리가 마당 상공에 울려 퍼졌고 곧이어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바닥에 쓰러진 강서연은 의식이 점점 흐려졌지만 마지막 힘을 내어 밖으로 기어나갔다.“여보, 살려줘요...”그런데 커다란 손이 그녀의 머리채를 확 잡아당겼다. 두피가 뜯겨나가는 듯한 고통에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의식을 완전히 잃기 전에 차가운 칼날이 피부를 스쳤고 이어 구현수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도련님, 절 놓아주면 이 여자를 넘길게요. 어때요? 괜찮은 거래인 것 같은데. 이대로 그냥 보내준다면 다시는 두 사람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요. 도련님 와이프는 앞으로 도련님 한 사람의 것이에요!”최연준이 소리를 지르자 몇몇 경호원들이 구현수를 물샐틈없이 포위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함부로 덤비지 못했다.구현수가 비수로 강서연의 목을 겨누고 있었고 시뻘건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싸늘하게 웃던 구현수가 문 쪽으로 물러서더니 강서연을 최연준의 품에 확 던져버렸다.경호원들이 그를 쫓아갔지만 구현수가 한발 먼저 검은색 세단에 올라탄 바람에 잡지 못했다. 번호판도 없는 그 차는 길가에서 오래 기다린 듯했다.구현수도 놓치고 운전자의 얼굴도 확인 못 한 경호원들은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당장 병원으로 가!”병원으로 가는 길 내내 최연준은 강서연을 꼭 끌어안았다. 몸과 손이 그녀의 피로 물들었다.머릿속이 하얘진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러 방법으로 지혈하려 애를 썼지만 피가 멈추지 않았다.“서연아, 강서연!”최연준은 그녀를 미친 듯이 불렀다.“눈 뜨고 나 좀 봐봐!”강서연은 아무 반응이 없었고 얼굴과 입술에 핏기가 전혀 없었다. 최연준은 절망에 빠진 얼굴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죽음과 이 정도로 가까이 마주한 건 그야말로 처음이었다....번호판이 없는 검은색 세단은 미친 듯이 질주하여 인적이 드문 교외까지 달려왔다.강가의 바람이 시내보다 훨씬 더 셌다. 구현수가 유리창을 닫으려던 그때 백미러로 그를 섬뜩하게 쳐다보는 눈빛과 딱
“아까 당신이 실패했을 때 이미 그 사실을 어르신께 알려드렸어요.”남자가 고개를 돌렸다.“이 돈은 어르신이 주신 거예요. 당신을 살려두면 앞으로도 쓸모가 있을 거라고 하셨어요.”남자는 갑자기 손을 뻗어 구현수의 얼굴을 덥석 잡았다. 그가 사악하게 웃으며 말했다.“어르신의 계획대로 움직이는 게 좋을 거예요... 이대로 죽으면 얼마나 아까워요.”구현수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감옥살이를 오래 하고 육경섭 같은 깡패를 만나도 눈앞의 이 청년처럼 두려움에 떤 적이 없었다.“그만 가봐요.”차가 길가에 멈춰 섰고 싸늘한 목소리가 구현수의 귓가에 들려왔다.“앞으로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있을 거예요.”돈뭉치를 챙긴 구현수는 차 문을 열고 황급히 도망쳤다. 모자를 눌러쓰던 남자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최연준은 응급실 문 앞에서 애타게 기다렸다. 손에 묻은 피가 검붉게 변해버렸다. 그는 떨리는 두 손을 맞잡은 채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최연준의 뒤에 서 있는 경호원들의 표정도 어두웠다. 그때 맨 앞에 선 경호원이 다가와 나지막이 말했다.“도련님, CCTV를 돌려봤는데 교외 방향으로 도망친 걸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운전자가 아주 교활하더군요. 게다가 강주에 번호판이 없는 차량이 많고 특별한 차종도 아니라서 조사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최연준은 아무 말 없이 싸늘한 기운만 내뿜었다.임우정은 초조한 마음에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손톱을 계속 물어뜯었다. 응급실 위쪽의 빨간 불이 마치 뜨거운 불꽃처럼 그녀의 마음을 태우는 것 같았다.육경섭은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최연준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에게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라고 얘기할 참이었는데 임우정이 먼저 눈살을 찌푸리고 차갑게 물었다.“저 사람이 진짜 최연준이야?”육경섭은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듯 그녀를 보며 입술을 적셨다.강서연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걸 알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적어도 스무 번은 물어봤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육경섭은 인내심 있게 설명했다.“그래, 최연준
육경섭은 제자리에 가만히 선 채 복잡한 눈빛으로 임우정을 쳐다보았다.“제발 진정 좀 해. 연준 씨도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겠지...”“모르긴 뭘 몰라?”임우정이 목청을 높였다.“오성에서 재벌의 삶이 하도 지루해서 범죄자의 신분으로 사기 결혼하러 온 거겠지.”“무슨 얘기를 그렇게 해? 넌 상황을 잘 몰라. 그때 연준 씨가 남의 음모로 중상을 입은 바람에 강주에서 이름을 숨기고 지냈던 거야.”임우정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육경섭을 싸늘하게 훑어보았다.“너 이 사람에 대해 많이 아네?”육경섭은 아무 말이 없었다.“육경섭!”육경섭은 자신의 따귀를 내려치고 싶은 심정이었다.“최연준 씨.”임우정은 너무도 화가 나 목소리마저 떨렸다.“치료하겠으면 조용히 치료나 할 것이지, 왜 가만히 있는 서연이를 건드렸어요? 자기가 무슨 황태자라도 되는 줄 알아요? 중상을 입은 와중에도 여자를 꼬시다니. 당신네 형제들이 아주 부러워하겠어요? 그나저나 서연이는 어떡해요? 진짜 서연이랑 결혼할 거예요?”“우정아!”육경섭의 표정이 무척이나 진지했다.“그만해!”임우정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터져 나오는 울음을 애써 참았다.병원 복도가 갑자기 진공 속에 빠진 듯 조용해졌다. 잠시 후, 응급실 불이 꺼지자 최연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신석훈이 응급실에서 걸어 나오며 홀가분하게 한숨을 돌렸다.“다행히 상처가 깊지 않았고 동맥도 건드리지 않았어요. 다른 상처는 그냥 찰과상이라 천천히 치료하면 돼요.”최연준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최연준을 마주한 신석훈은 마음이 복잡했다. 그때 자신이 구한 사람이 이런 엄청난 사람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도... 도련님.”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간호사가 안에서 마지막으로 상처를 처리하고 있어요. 한동안 관찰하다가 아무 이상이 없으면 일반 병실로 옮길 거예요.”최연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목소리로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아 참.”신
강서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최연준은 그녀를 쓰다듬으려고 손을 내밀었다가 다시 거두어들였다.“내가 널 속였어.”그가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리고 네가 이렇게 된 것도 다 나 때문이야.”강서연의 두 눈에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그녀는 그제야 모든 게 이해되었다. 왜 그에게서 일반인에게는 볼 수 없는 아우라가 있는지, 왜 매번 그녀에게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마다 쉽게 해결했는지, 왜 돈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지, 왜 이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었는지...이 세상을 발아래에 둔 최씨 가문의 도련님이니 두려울 리가 있었겠는가?강서연이 씁쓸하게 웃었다. 전에는 그에게 바보라고 했었지만 그의 손에 놀아난 자신이야말로 바보라는 생각이 들었다.“서연아...”“그만 나가요.”강서연이 이불을 뒤집어쓴 채 가녀린 목소리로 말했다. 헝클어진 머리가 이불 밖으로 나왔고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최연준은 그녀의 등을 토닥이고 싶었고 예전처럼 품에 안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그는 묵묵히 병실을 나와 복도 의자에 한참 동안 앉아있었다....며칠 후 강서연은 퇴원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집 문 앞에 멈춰 선 채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린 임우정이 나지막이 물었다.“우리 집에서 며칠 지낼래?”강서연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가뜩이나 요 며칠 신세를 많이 졌는데 더 민폐를 끼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고비는 그녀 스스로 넘어야만 했다.강서연은 키를 꺼내 문을 열었다. 허리를 숙이고 슬리퍼로 갈아신던 그때 신발장 안에 있는 최연준의 가죽 신발이 눈에 띄었다. 그 순간 그녀는 마음이 움찔했다.집안의 모든 것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베란다에 그가 훈련할 때 쓰는 샌드백과 복싱 글러브가 있었고 화장실의 빨래 바구니에는 그가 갈아입은 셔츠가 있었으며 소파에는 그가 평소에 있던 잠옷이 널브러져 있었다.그리고 세면대 옆에는 두 사람의 칫솔이 예전처럼 서로 맞대어있었다.강서연은 순간
‘최연준은 뭐가 저리 겁나서 자기 집에 오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을 불러 모은 거야?’“서연아, 눈 좀 붙이고 있어. 나 밑에 마트 가서 마실 거 좀 사 올게.”임우정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고 강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임우정은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1층 현관문 앞 두 사람에게 다가간 그녀는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더니 입을 열었다.“구현...”임우정은 입술을 깨물더니 이름을 고쳐 불렀다.“최연준 씨, 서연이 이제 막 잠들었어요. 지금 올라가려는 거면 조용히 들어가요. 몸은 조금씩 회복되고 있지만, 마음의 상처는 아마 시간이 꽤 걸릴 거예요.”최연준은 숙연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답했다.“고마워요.”“아니에요.”임우정은 그런 최연준을 바라보며 덧붙였다.“사실 서연이가 연준 씨를 마음에서 놓은 건 아닐 거예요. 그저 일시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힘들어서 그래요. 천천히 풀어줘요. 그러다 보면 서연이도 마음이 수그러들지 않겠어요?”“네.”“하지만, 명심해요! 다시 한번 또 서연이를 속이고 마음 상하게 하면, 내 손에 먼저 죽을 줄 알아요. 강서연 대신해서 내가 가만 안 둘 거니까!”“흠흠!”육경섭이 한 발 나서서 급하게 상황을 진정시켰다.“우정아, 그럴 것까지야. 그 정도 심각한 거 아니야...”“심각한 게 아니라고? 서연이 이번에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어!”육경섭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는 입도 뻥긋 못했다. 이어 최연준에게 눈치를 주었다.최연준은 곧장 계단으로 향했고, 조심히 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임우정은 잠시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고개를 들어 집을 올려다보았고, 별다른 기척 없이 조용한 모습을 보고서야 마음이 놓이는지 발길을 떼려 했다. 그러던 차에 육경섭이 그녀의 길을 가로막았다.“뭐 하는 거야?”임우정은 커다래진 눈으로 육경섭을 쳐다보았다. 오늘따라 눈앞의 육경섭은 이상하리만치 달라 보였다. 평소 그녀를 만나면 늘 웃는 얼굴이던 그가 유난히도 근엄한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