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세요, 아들!”휴대 전화 너머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연준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엄마, 이 시간에 웬일로 전화하셨어요?”런던은 지금 오전이라 어머니가 한창 회사에서 바쁠 시간이었다. 하여 절대 수다나 떨자고 전화한 건 아닐 것이다.“가짜 아들을 나한테 보내겠다며? 나더러 그 사람을 잡아놓으라고 하더니 며칠이 지났는데도 왜 아무 소식이 없어? 그 사람은 어디 있는 거야?”최연준이 눈살을 찌푸렸다. 예상대로라면 최진혁과 최지한이 이미 움직였어야 하는데.전화를 끊은 최연준은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한서야.”최연준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작은삼촌 요즘 뭐 하고 있어?”“계속 회장님 곁에서 회장님을 보살펴드리고 계세요.”“지한이 형은?”방한서의 대답을 듣기 전에 최연준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마치 마음 한구석이 찢겨나간 듯한 그런 고통이었다.그는 본능적으로 강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강서연은 또 전화를 받지 않았다.최연준이 잔뜩 굳은 얼굴로 결정을 내렸다.“지금 당장 티켓 끊어. 강주로 돌아간다!”“하지만 도련님...”“내 말 못 알아들어?”최연준은 초조해하며 넥타이를 힘껏 잡아당겼고 심장이 터져 나올 듯이 쿵쾅거렸다....저녁 무렵, 강서연이 커피숍 문을 닫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마당에서 갑자기 인기척이 들려왔다.그녀가 고개를 돌려보니 훤칠한 키의 누군가가 마당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오고 있었다. 강서연은 기쁜 마음에 활짝 웃으며 목청껏 불렀다.“여보!”남자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는 없었지만 눈빛이 어딘가 음흉해 보였다. 그나저나 최연준의 얼굴과 너무나도 닮은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여보! 일주일 후에 온다고 하지 않았어요? 나한테 서프라이즈 해주려고 갑자기 돌아온 거예요?”강서연은 폴짝폴짝 뛰어나가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 그런데 그의 품에 안긴 순간 이상한 기분이 밀려왔다.그녀는
구현수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옷소매에 숨겨둔 비수를 몰래 움켜쥐었다.이곳에 오기 전에 최진혁은 상대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말을 아끼고 깔끔하게 해결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생각보다 만만한 여자는 아닌 듯싶다.게다가 강서연을 죽이려면 사람이 없는 곳에 데리고 가야 했다. 드나드는 사람이 많은 커피숍에서 처리한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구현수는 저도 모르게 자꾸만 그녀를 힐끗거렸다.‘이 여자가 바로 강서연이구나. 나 대신 최연준이 결혼한 여자!’그가 손가락이 잘린 채로 길거리를 헤매고 있을 때 최연준이 그를 도와 인생의 일대사인 결혼을 해결해줬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그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이 예쁜 여자를 바로 죽이기엔 좀 아까운데? 내가 먼저 즐기다가 죽여야겠어.’구현수가 입꼬리를 씩 올렸고 두 눈에 사악함이 스쳐 지나갔다.그는 헛기침으로 자신의 속내를 숨기려 했다. 강서연은 재빨리 그에게 물 한잔을 따라주며 앉아서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고는 능숙하게 앞치마를 입고 음식을 준비했다.그녀는 곁눈질로 의자에 앉아 안절부절못하는 남자를 지켜보았다. 자꾸만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표정도 이상했으며 커피 한잔도 평소답지 않게 아주 천천히 마셨다. 그녀가 알고 있는 구현수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움직임을 잠깐 멈춘 강서연의 눈에 펜넬이 들어왔다. 그녀는 몰래 펜넬을 한 줌 집어서 방금 만든 비빔밥에 넣었다.“여보, 다 됐어요.”그녀가 가볍게 웃으며 음식을 내왔다. 구현수는 당황한 나머지 하마터면 컵을 깨뜨릴 뻔했다. 그가 손을 내밀어 컵을 잡던 그때 강서연은 그의 왼쪽 손가락에 끼고 있던 골무를 발견했다.“여보.”그녀가 놀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물었다.“손 왜 이래요? 다쳤어요?”구현수는 고개를 번쩍 들고 그녀를 째려보았다. 그 모습에 강서연은 마음이 움찔했다. 이렇게나 날카롭고 흉악한 눈빛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여보...”“난 괜찮아.”구현수는 고개를 숙이고는 평소처럼 왼손으로 숟가락을 들고 허겁지겁 먹기
“하지만 그 전에...”...최연준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계속 강서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받질 않았다. 불안한 예감이 마치 수만 마리의 벌레처럼 그의 가슴을 후벼파고 있었다.그는 재빨리 집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집 밑에 도착하자마자 방한서가 보낸 부하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저마다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도련님, 가게에 가신 거 아니었어요?”“뭐?”최연준은 마음이 움찔했다.“가게라니?”“가게 쪽을 지키던 애들이 그러던데요? 도련님이 커피숍에 들어갔다고. 전에 한서 형님이 도련님이랑 서연 씨가 함께 있을 땐 방해하지 말라고 해서 도련님이 가게에 들어가시는 걸 보고 다 철수했거든요.”“젠장!”최연준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바로 알아챘다. 가게에 들어간 건 구현수이고 지금 이 순간... 강서연 혼자서 구현수를 상대하고 있었다.“지금 당장 가게로 간다!”몇몇 경호원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바로 차에 올라타 커피숍으로 최대한 빨리 달려갔다....강서연은 구현수에게 따귀를 몇 대 맞은 바람에 입가가 퉁퉁 부었고 의식도 점점 흐릿해지기 시작했다.그녀는 힘을 쥐어 짜내며 벗어나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구현수가 비수를 목에 겨누고 있어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고 목에서도 시뻘건 피가 천천히 흘러내렸다.그때 구현수가 갑자기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옷을 확 찢어버렸다.훤히 드러난 속살에 구현수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두 눈이 반짝였다. 그는 다시 한번 강서연의 머리채를 확 잡아당겨 바닥에 두 번 내리쳤다. 강서연이 더는 반항할 힘이 남아있지 않다는 걸 확인하고는 음흉하게 웃으며 옷을 벗었다.“잠깐!”강서연은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며 힘겹게 말했다.“구현수... 여기서는 싫어...”“뭐라고?”강서연은 터져 나오는 눈물을 가까스로 참으며 마음을 진정하려 노력했다.“여기 바닥이 너무 차...”“거참 따지는 것도 많네!”“죽을 때가 돼서 그래...”강서연은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구현수, 내가 이미 여기 갇혔는데 도망갈 수
그 순간 총알이 유리창을 뚫는 소리가 마당 상공에 울려 퍼졌고 곧이어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바닥에 쓰러진 강서연은 의식이 점점 흐려졌지만 마지막 힘을 내어 밖으로 기어나갔다.“여보, 살려줘요...”그런데 커다란 손이 그녀의 머리채를 확 잡아당겼다. 두피가 뜯겨나가는 듯한 고통에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의식을 완전히 잃기 전에 차가운 칼날이 피부를 스쳤고 이어 구현수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도련님, 절 놓아주면 이 여자를 넘길게요. 어때요? 괜찮은 거래인 것 같은데. 이대로 그냥 보내준다면 다시는 두 사람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요. 도련님 와이프는 앞으로 도련님 한 사람의 것이에요!”최연준이 소리를 지르자 몇몇 경호원들이 구현수를 물샐틈없이 포위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함부로 덤비지 못했다.구현수가 비수로 강서연의 목을 겨누고 있었고 시뻘건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싸늘하게 웃던 구현수가 문 쪽으로 물러서더니 강서연을 최연준의 품에 확 던져버렸다.경호원들이 그를 쫓아갔지만 구현수가 한발 먼저 검은색 세단에 올라탄 바람에 잡지 못했다. 번호판도 없는 그 차는 길가에서 오래 기다린 듯했다.구현수도 놓치고 운전자의 얼굴도 확인 못 한 경호원들은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당장 병원으로 가!”병원으로 가는 길 내내 최연준은 강서연을 꼭 끌어안았다. 몸과 손이 그녀의 피로 물들었다.머릿속이 하얘진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러 방법으로 지혈하려 애를 썼지만 피가 멈추지 않았다.“서연아, 강서연!”최연준은 그녀를 미친 듯이 불렀다.“눈 뜨고 나 좀 봐봐!”강서연은 아무 반응이 없었고 얼굴과 입술에 핏기가 전혀 없었다. 최연준은 절망에 빠진 얼굴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죽음과 이 정도로 가까이 마주한 건 그야말로 처음이었다....번호판이 없는 검은색 세단은 미친 듯이 질주하여 인적이 드문 교외까지 달려왔다.강가의 바람이 시내보다 훨씬 더 셌다. 구현수가 유리창을 닫으려던 그때 백미러로 그를 섬뜩하게 쳐다보는 눈빛과 딱
“아까 당신이 실패했을 때 이미 그 사실을 어르신께 알려드렸어요.”남자가 고개를 돌렸다.“이 돈은 어르신이 주신 거예요. 당신을 살려두면 앞으로도 쓸모가 있을 거라고 하셨어요.”남자는 갑자기 손을 뻗어 구현수의 얼굴을 덥석 잡았다. 그가 사악하게 웃으며 말했다.“어르신의 계획대로 움직이는 게 좋을 거예요... 이대로 죽으면 얼마나 아까워요.”구현수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감옥살이를 오래 하고 육경섭 같은 깡패를 만나도 눈앞의 이 청년처럼 두려움에 떤 적이 없었다.“그만 가봐요.”차가 길가에 멈춰 섰고 싸늘한 목소리가 구현수의 귓가에 들려왔다.“앞으로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있을 거예요.”돈뭉치를 챙긴 구현수는 차 문을 열고 황급히 도망쳤다. 모자를 눌러쓰던 남자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최연준은 응급실 문 앞에서 애타게 기다렸다. 손에 묻은 피가 검붉게 변해버렸다. 그는 떨리는 두 손을 맞잡은 채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최연준의 뒤에 서 있는 경호원들의 표정도 어두웠다. 그때 맨 앞에 선 경호원이 다가와 나지막이 말했다.“도련님, CCTV를 돌려봤는데 교외 방향으로 도망친 걸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운전자가 아주 교활하더군요. 게다가 강주에 번호판이 없는 차량이 많고 특별한 차종도 아니라서 조사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최연준은 아무 말 없이 싸늘한 기운만 내뿜었다.임우정은 초조한 마음에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손톱을 계속 물어뜯었다. 응급실 위쪽의 빨간 불이 마치 뜨거운 불꽃처럼 그녀의 마음을 태우는 것 같았다.육경섭은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최연준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에게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라고 얘기할 참이었는데 임우정이 먼저 눈살을 찌푸리고 차갑게 물었다.“저 사람이 진짜 최연준이야?”육경섭은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듯 그녀를 보며 입술을 적셨다.강서연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걸 알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적어도 스무 번은 물어봤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육경섭은 인내심 있게 설명했다.“그래, 최연준
육경섭은 제자리에 가만히 선 채 복잡한 눈빛으로 임우정을 쳐다보았다.“제발 진정 좀 해. 연준 씨도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겠지...”“모르긴 뭘 몰라?”임우정이 목청을 높였다.“오성에서 재벌의 삶이 하도 지루해서 범죄자의 신분으로 사기 결혼하러 온 거겠지.”“무슨 얘기를 그렇게 해? 넌 상황을 잘 몰라. 그때 연준 씨가 남의 음모로 중상을 입은 바람에 강주에서 이름을 숨기고 지냈던 거야.”임우정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육경섭을 싸늘하게 훑어보았다.“너 이 사람에 대해 많이 아네?”육경섭은 아무 말이 없었다.“육경섭!”육경섭은 자신의 따귀를 내려치고 싶은 심정이었다.“최연준 씨.”임우정은 너무도 화가 나 목소리마저 떨렸다.“치료하겠으면 조용히 치료나 할 것이지, 왜 가만히 있는 서연이를 건드렸어요? 자기가 무슨 황태자라도 되는 줄 알아요? 중상을 입은 와중에도 여자를 꼬시다니. 당신네 형제들이 아주 부러워하겠어요? 그나저나 서연이는 어떡해요? 진짜 서연이랑 결혼할 거예요?”“우정아!”육경섭의 표정이 무척이나 진지했다.“그만해!”임우정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터져 나오는 울음을 애써 참았다.병원 복도가 갑자기 진공 속에 빠진 듯 조용해졌다. 잠시 후, 응급실 불이 꺼지자 최연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신석훈이 응급실에서 걸어 나오며 홀가분하게 한숨을 돌렸다.“다행히 상처가 깊지 않았고 동맥도 건드리지 않았어요. 다른 상처는 그냥 찰과상이라 천천히 치료하면 돼요.”최연준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최연준을 마주한 신석훈은 마음이 복잡했다. 그때 자신이 구한 사람이 이런 엄청난 사람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도... 도련님.”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간호사가 안에서 마지막으로 상처를 처리하고 있어요. 한동안 관찰하다가 아무 이상이 없으면 일반 병실로 옮길 거예요.”최연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목소리로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아 참.”신
강서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최연준은 그녀를 쓰다듬으려고 손을 내밀었다가 다시 거두어들였다.“내가 널 속였어.”그가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리고 네가 이렇게 된 것도 다 나 때문이야.”강서연의 두 눈에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그녀는 그제야 모든 게 이해되었다. 왜 그에게서 일반인에게는 볼 수 없는 아우라가 있는지, 왜 매번 그녀에게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마다 쉽게 해결했는지, 왜 돈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지, 왜 이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었는지...이 세상을 발아래에 둔 최씨 가문의 도련님이니 두려울 리가 있었겠는가?강서연이 씁쓸하게 웃었다. 전에는 그에게 바보라고 했었지만 그의 손에 놀아난 자신이야말로 바보라는 생각이 들었다.“서연아...”“그만 나가요.”강서연이 이불을 뒤집어쓴 채 가녀린 목소리로 말했다. 헝클어진 머리가 이불 밖으로 나왔고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최연준은 그녀의 등을 토닥이고 싶었고 예전처럼 품에 안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그는 묵묵히 병실을 나와 복도 의자에 한참 동안 앉아있었다....며칠 후 강서연은 퇴원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집 문 앞에 멈춰 선 채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린 임우정이 나지막이 물었다.“우리 집에서 며칠 지낼래?”강서연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가뜩이나 요 며칠 신세를 많이 졌는데 더 민폐를 끼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고비는 그녀 스스로 넘어야만 했다.강서연은 키를 꺼내 문을 열었다. 허리를 숙이고 슬리퍼로 갈아신던 그때 신발장 안에 있는 최연준의 가죽 신발이 눈에 띄었다. 그 순간 그녀는 마음이 움찔했다.집안의 모든 것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베란다에 그가 훈련할 때 쓰는 샌드백과 복싱 글러브가 있었고 화장실의 빨래 바구니에는 그가 갈아입은 셔츠가 있었으며 소파에는 그가 평소에 있던 잠옷이 널브러져 있었다.그리고 세면대 옆에는 두 사람의 칫솔이 예전처럼 서로 맞대어있었다.강서연은 순간
‘최연준은 뭐가 저리 겁나서 자기 집에 오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을 불러 모은 거야?’“서연아, 눈 좀 붙이고 있어. 나 밑에 마트 가서 마실 거 좀 사 올게.”임우정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고 강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임우정은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1층 현관문 앞 두 사람에게 다가간 그녀는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더니 입을 열었다.“구현...”임우정은 입술을 깨물더니 이름을 고쳐 불렀다.“최연준 씨, 서연이 이제 막 잠들었어요. 지금 올라가려는 거면 조용히 들어가요. 몸은 조금씩 회복되고 있지만, 마음의 상처는 아마 시간이 꽤 걸릴 거예요.”최연준은 숙연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답했다.“고마워요.”“아니에요.”임우정은 그런 최연준을 바라보며 덧붙였다.“사실 서연이가 연준 씨를 마음에서 놓은 건 아닐 거예요. 그저 일시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힘들어서 그래요. 천천히 풀어줘요. 그러다 보면 서연이도 마음이 수그러들지 않겠어요?”“네.”“하지만, 명심해요! 다시 한번 또 서연이를 속이고 마음 상하게 하면, 내 손에 먼저 죽을 줄 알아요. 강서연 대신해서 내가 가만 안 둘 거니까!”“흠흠!”육경섭이 한 발 나서서 급하게 상황을 진정시켰다.“우정아, 그럴 것까지야. 그 정도 심각한 거 아니야...”“심각한 게 아니라고? 서연이 이번에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어!”육경섭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는 입도 뻥긋 못했다. 이어 최연준에게 눈치를 주었다.최연준은 곧장 계단으로 향했고, 조심히 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임우정은 잠시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고개를 들어 집을 올려다보았고, 별다른 기척 없이 조용한 모습을 보고서야 마음이 놓이는지 발길을 떼려 했다. 그러던 차에 육경섭이 그녀의 길을 가로막았다.“뭐 하는 거야?”임우정은 커다래진 눈으로 육경섭을 쳐다보았다. 오늘따라 눈앞의 육경섭은 이상하리만치 달라 보였다. 평소 그녀를 만나면 늘 웃는 얼굴이던 그가 유난히도 근엄한 모습
“아줌마,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그럼, 제가 알아낸 사실을 전부 말씀드릴게요!”영미는 입가에 교만한 미소를 띠며 백인서를 차갑게 한 번 쳐다보았다.“백인서 씨의 친어머니인 백홍은 인신매매범이었다는 사실, 모두 아셨나요? 백인서 씨의 어머니는 백인서를 정대명의 집에 맡겼고... 흥! 정대명의 아내도 백홍이 납치해 왔다는 소문이 있어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잖아요. 제 생각엔... 인신매매범의 딸이라면 그런 일쯤은 익숙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은 권온유의 실종이 정말로 백인서 씨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시나요?”“영미!”강소아가 나서며 분노를 가득 담아 소리쳤다.“허위 사실을 퍼뜨리지 마!”“소유 아가씨, 억울하네요!”영미는 강소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제가 이렇게까지 조사한 건 다 아가씨를 위한 거예요! 딸도 있는 사람이 백인서를 곁에 두고도 마음이 놓이세요?”“그만해!”최지용이 크게 소리쳤다.백인서는 몸을 떨며 믿기지 않는 눈으로 최지용을 쳐다보았다.그러나 최지용의 얼굴에는 의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최지용은 굳건한 눈빛으로 뒤에 있는 백인서를 지키고 있었다.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처럼 백인서를 아끼고 있었다.백인서는 코끝이 찡해지며 본능적으로 최지용의 손을 꼭 붙잡았다. 최지용의 따스한 손은 백인서에게 큰 용기를 주었고 그 온기가 어둠의 두려움을 잊게 해주었다.최지용은 백인서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고 다시 영미를 바라볼 때는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영미야.”최지용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두 집안의 관계를 생각해서 그저 넘어가는 거야. 더 이상 선을 넘지 마.”최군형도 나서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요, 백인서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모르겠어요? 영미 아가씨, 우리 최씨 가문 사람들을 바보로 생각하는 건 아니죠?”영미는 순간 긴장했다. 최군형의 말 속엔 어딘가 숨은 뜻이 있는 듯했다.최군형의 깊고 복잡한 눈빛을 파악하기 어려웠다.표아정은 천천히 일어나 어깨에 걸친 숄을
백인서는 복잡한 눈빛으로 최지용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그때 최지용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표아정이었고 다급한 목소리로 서둘러 돌아오라고 재촉했다.최지용은 결국 어머니의 말에 따라 백인서를 데리고 최씨 집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넓은 거실에는 최군형과 강소아도 나와 있었고 모두 엄숙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백인서가 들어서자, 표아정이 백인서를 올려다보며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다.강소아는 백인서와 눈을 마주치며 단호하게 미소 지었다.백인서가 의아해하던 찰나, 영미가 천천히 밖에서 걸어 들어왔다.“아줌마, 지용 오빠. 제가 권온유의 행방을 알아냈어요.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뭐라고?”최지용이 놀라서 물었다.“네가 어떻게 아는데?”영미는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지용 오빠, 특수부대 출신이라고 정보가 우리보다 더 빠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최씨 가문은 만능이 아니에요, 최씨 가문도 모르는 정보가 있다고요.”표아정은 가볍게 기침하며 차분히 상황을 지켜보았다.최군형과 강소아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떤 일이 일어날지 주목하고 있었다.최지용의 이마에는 점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미의 눈에는 한 줄기 교만한 빛이 번졌다.영미는 오는 길에 이미 모든 계획을 짰다. 정대명의 말이 맞았다. 누구를 훔치든 상관없었다. 인신매매범의 딸인 백인서가 아이들을 해치러 다닌다는 누명을 씌우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하면 백인서는 모두의 신뢰를 잃게 될 터였다.영미는 이제 한 아이의 엄마가 된 강소아가 인신매매범을 곁에 둘 리 없다고 믿었고, 최지용 역시 이 사실을 알면 더는 백인서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래서 영미는 정대명을 배신하기로 마음먹었다.영미는 권온유를 넘기고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한패가 되어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주장할 계획이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백인서는 변명의 여지도 없이 궁지에 몰릴 것이었다!“지용 오빠.”영미는 고개를 돌려 최지용을 바라보며 한 글자씩 천천히 말했다.“권온유는 정승
“그... 괜찮아!”정승우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권온유에게 말했다. 정승우는 이곳에서 권온유를 반드시 데리고 나가겠다고 결심했다.그런데 이때, 공장 문이 “쾅” 하고 열리더니 곧바로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정승우는 재빨리 권온유에게 눈짓했고 권온유도 알아채고는 즉시 땅바닥에 쓰러져 의식이 없는 척했다.정승우는 벽에 기대어 눈을 반쯤 감았다.“이 아이인가요?”영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맞아.”정대명은 영미를 흘깃 노려보며 묵묵히 대답했다.영미는 두 걸음 앞으로 다가서서 희미한 빛 속에 있는 아이를 살펴보더니, 곧 얼굴빛이 확 변했다.“이 아이... 혹시 권씨 집안의 막내딸 아니에요?”정대명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애초에 아이를 훔쳐 올 때 이 아이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 리가 없었다.“정대명 씨.”영미가 차갑게 웃으며 돌아보았다.“제가 최씨 가문 집안 아이를 훔쳐 오라고 했지, 권씨 집안 아이를 훔치라고 했나요? 이러고도 저를 속이지 않았다고요?”“그게...”정대명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영미 아가씨, 어차피 목적은 백인서를 곤경에 빠뜨리는 거잖아? 그러니 누구를 훔쳐 오든 상관없지 않아? 아이를 훔치기만 하면 유괴범이 되는 거니까.”이 말은 영미에게만 충격을 준 게 아니었다. 정승우의 귀에도 또렷이 들어왔다.“좋아요.”영미는 깊은숨을 들이마신 뒤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이 아이는 잘 지키고 있어요, 제가 다시 연락할 테니까.”...한편, 권씨 집안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권욱은 조순영을 탓하며 아이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했고, 조순영은 오열하며 남편을 원망했다. 조순영은 권욱이 바깥에서 여자와 부적절하게 얽히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라고 했다.“헛소리하지 마! 사람들이 나한테 어떤 소문을 퍼뜨렸는지 잘 알잖아. 결혼 생활 내내 너한테 부끄러운 일 한 적 없어.”“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정말 떳떳하게 행동했다면 왜 사람들이 당신만 가만두지 않는 건데?”며칠 전까지만
권온유의 질문에 정승우는 당황했다.권온유는 커다란 눈망울로 정승우를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했던 슈퍼맨 같은 오빠가, 이제는 먹을 것 하나 구하지 못하는 모습이 되어버린 것이다.정승우는 어색하게 입가를 씰룩이며 권온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이야기를 이어갔다.“너, 정말 배고파?”“네!”권온유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 작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원래는 엄마랑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 했어요. 엄마가 특별히 고등어조림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하셨거든요... 엉엉... 엉엉...”“울지 마, 울지 마! 그냥 생선 하나 가지고...”“나 배고파!”정승우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아이와 대화하는 건 그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겨우 권온유를 달래고 나서 정승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팔을 걷어붙이며 권온유에게 내밀었다.“너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 배고프면, 여기 한번 물어볼래?”권온유는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정승우를 바라보았다.“우리 집은 가난해서 늘 먹을 게 부족했거든. 그래서 어릴 때 너무 배가 고프면 이렇게 배고픔을 달랠 만한 걸 물곤 했어.”권온유는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배고픔을 달랠 만한 것'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정승우는 웃으며 계속 설명했다.“예를 들어 쌀통 같은 거야. 한때 쌀이 들어 있던 쌀통은 비어 있어도 쌀 냄새가 남아 있거든. 그래서 쌀통 가장자리를 살짝 물면서 하얀 쌀밥을 먹는 상상하는 거야. 그러면 배가 덜 고파져.”“그리고 이웃집에서 밥하는 냄새를 맡으며 그 밥을 먹는 상상을 하는 거야. 그러면 그렇게 배고프지 않더라고.”권온유는 정승우의 이야기에 넋을 잃고 입을 벌린 채 있었다. 정승우는 웃음을 터뜨렸다.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한때 정대명이 도박과 술에 빠져 정승우를 굶겼던 시절은 그야말로 비참한 순간들이었다.잠시 후, 권온유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고 정승우는 속으로 ‘큰일이다'라고 생
영미는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최지용을 지켜보았다.최지용은 다소 초조한 기색으로 구석에 앉아 휴대전화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 전화를 걸기도 했다.영미는 바로 뒤를 따라갔고 최지용의 낮고 다급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찾았습니까?”“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세요... 만약 납치범의 목적이 돈이었다면 분명 전화를 걸어올 겁니다!”영미의 가슴이 철렁하며 내려앉았다.납치범이라니? 대체 뭘 찾는다는 거지?백인서와 통화한 걸까?그때, 최군성이 큰 소리로 외쳤다.“지용이 형, 여기서 뭐 해요?”영미는 얼른 몸을 숨겼고 최군성은 최지용에게 다가가 최지용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우리 형이 찾고 있었는데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거예요? 어서 와서 먹고 즐기자고요!”최지용은 최군성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영미와 눈이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잠시 멈칫했다.영미는 급히 시선을 피하며 억지 미소로 인사했다.“지용 오빠...”“어, 영미?”최군성도 배윤아처럼 물었다.“여기 웬일이야? 형님이 널 초대한 것 같지 않은데?”“그게...”영미는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최군성은 영미의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최지용을 끌고 가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최지용은 점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영미가 도대체 여기 왜 있는 거지? 평소에는 볼 수 없던 사람이, 왜 하필 오늘 온유가 사라진 날에 나타난 걸까?그때, 최군형과 강소아가 가원이를 품에 안고 나타났다.강소아는 아이를 보행기에 앉혔고 아이는 보행기 가장자리를 잡고 작은 발을 내디뎠다. 이 모습에 방 안의 모든 사람이 환호성을 질렀다.영미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자리를 떠 교외의 버려진 공장으로 향했다.그 시각, 정대명은 영미의 지시에 따라 승합차를 몰고 공장에 도착해 있었고 영미가 도착했을 때 그는 공장 문 앞에서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영미는 핸드백을 휘둘러 정대명에게 던졌다.“정대명 씨, 감히 날 속여
“너 따위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정대명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결국엔 자기 아들이었기에 정승우에게 감출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때리고 꾸짖어도 떠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정대명은 서랍에서 가위를 꺼내 들고는 권온유의 양 갈래머리를 단칼에 잘라냈다. 머리카락이 천천히 바닥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있다가 막아서려는 순간, 자신과 정대명 사이에 힘의 격차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작정 나섰다가는 역부족일 터였다.정승우는 이를 악물고 정대명에게 다가가 물었다.“아빠, 정말 이 아이를 팔 생각이에요?”“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영미라는 그 여자가 원하는 거야!”정대명은 불만스레 대꾸하며 정승우에게 옷장에 있는 헌 옷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정승우가 옷을 가져오자, 정대명은 손을 뻗어 권온유의 예쁜 드레스를 찢으려 했다. 정승우는 급히 소리쳤다.“뭐 하는 거예요!”“이 자식이!”정대명은 정승우를 노려보며 소리쳤다.“조용히 해! 죽고 싶어?”“아빠, 이건...”“이 애한테 옷을 갈아입히려는 거야! 이렇게 좋은 옷을 입고 있으면 바로 눈에 띄잖아.”정승우는 다가가 정대명을 옆으로 밀치며 말했다.“제가 갈아입힐게요!”“이놈이...”정대명은 하려던 말을 멈추고 피식 웃었다. 그는 정승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아하, 아빠를 도와주고 싶구나? 역시 아들은 아들밖에 없지! 그래, 네가 손이 빠르니까 빨리 옷을 갈아입혀. 둘이 함께 가자고!”정승우는 속으로 혐오감이 치밀었지만, 지금은 그저 상황을 지켜보며 대응하는 수밖에 없었다.정승우는 권온유의 드레스를 벗기지 않고, 정대명의 헌 옷을 위에 입혀 단단히 감쌌다. 그런 다음 모자를 씌워 얼핏 보면 남자아이처럼 보이게 했다.“좋아, 이 정도면 되겠어!”정대명은 정승우에게 눈짓을 보내며 말했다.“뒷문에 승합차가 준비돼 있대. 어서 출발하자!”“아빠, 이 소녀는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예요?”“교외지!”정대명은 귀찮다는 듯 말했다.“빨리 움직
권온유는 깜짝 놀라며 정대명을 멍하니 쳐다보았다.“아저씨가 맛있는 걸 가지고 왔단다. 배고프지 않니?”권온유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달아나려 했다. 정대명은 급히 권온유 앞을 가로막았다.“아니, 가지 마!”정대명은 두 손으로 권온유를 꼭 붙들며 말했다.“그게... 네 엄마가 나한테 너를 데려오라고 부탁했어!”엄마라는 말을 듣고 권온유는 잠시 멈칫했다.“정말이야, 네 엄마가 부탁한 거라니까!”정대명은 거짓말을 이어갔다.“방금 네 엄마가 갑자기 어디론가 가버렸지? 너 보고 기다리라고 했잖아?”“네... 맞아요.”“그래!”정대명은 웃으며 말했다.“그런데 네가 여기저기 막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엄마는 내가 여기 있는 걸 알 거예요. 저는 여기서 조금 놀다가 다시 휴게실로 돌아갈 거예요!”“오... 그렇구나.”정대명은 잠시 생각을 굴렸다.“아저씨가 휴게실이 어딘지 아니까, 내가 데려다줄게!”권온유는 경계하며 정대명에게서 몸을 빼내고 두 걸음 물러났다.“얘가! 난 정말로 네 엄마 친구라니까. 네가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걱정하지 않겠어? 맞지?”“자, 자! 아저씨가 데려다줄게. 착하지!”정대명은 권온유를 갑자기 붙들어 어깨에 둘러맸다. 권온유는 본능적으로 소리치려 했지만, 정대명의 손이 입을 단단히 막고 있어 소리를 낼 수 없었다.어린 소녀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른 남자를 이길 수는 없었다. 정대명은 권온유의 머리 뒤쪽을 세게 내리쳐 기절시켰고, 온유가 들고 있던 인형은 땅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익숙하게 호텔로 와서 지난번 일을 핑계로 다시 정대명에게 돈을 뜯어낼 생각이었는데, 방 안에 기절한 어린 소녀가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어른 일에 참견하지 말고 신경 꺼!”정대명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방금 정대명은 온유를 데려오며 보안과 호텔 직원의 눈을 피하고자 아이를 어깨에 메고 가지 않고, 자신의 아이인 것처럼 속여서 안
“엄마, 우리 오늘도 여기서 밥 먹어요?”“그래. 네가 제일 좋아하는 게 고등어조림 요리잖아.”“그런데...”권온유는 입을 꾹 다물고 말을 삼켰다. 사실 권온유는 집에서 밥을 먹고 싶었다.어린 권온유도 느낄 만큼 엄마는 요즘 기분이 좋지 않았다.방금 대답조차 어딘가 건성으로 들렸다.권온유는 어른들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는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는 걸까? 누군가 아빠와 다른 여자가 함께 찍힌 사진을 보내기만 하면, 엄마는 이렇게 변해버렸다.“엄마...”권온유는 엄마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당겼다. 그러나 조순영은 갑자기 권온유의 손을 놓고는 시선이 어느 한 곳에 고정되더니 초조한 표정으로 그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권온유는 깜짝 놀라 인형을 떨어뜨렸다.“엄마!”“온유야, 여기서 움직이지 말고 있어!”조순영은 급히 돌아보며 외쳤다.“엄마 금방 올게!”권온유는 엄마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홀로 서 있었다. 시야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엄마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엄마는 아빠가 다른 여자가 친밀하게 지내는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엄마는 통제력을 잃고 온유를 혼자 내버려두곤 했다. 그러고 한참 후에야 멍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오곤 했다.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던 정대명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요 며칠 동안 몇 번이나 이 모녀를 본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이 여자는 자주 아이와 함께 식사하러 왔는데 가끔 혼자 올 때도 있었다...남편의 외도를 잡으려는 걸까?맞아, 틀림없이 그런 거다!정대명은 매일 호텔에 살면서 듣는 소문도 적지 않았다. 한 회장이라는 사람은 아내와 자식이 있음에도 바람이 잦았다고 하는데 그 회장은 차기 시장의 사위가 될 인물이라는 말도 있었다.정대명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이런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차피 남자가 바깥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건 흔한 일이니까.정대명은 다시 어린 소녀를 주시했다. 소녀
정대명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얼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며칠을 기다린 결과가 고작 최가원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었다.그럼에도 영미는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왔다.“정대명 씨, 대체 뭐 하고 있는 겁니까? 대단한 것도 아니고 아이 하나 훔쳐 오는 게 그렇게 어렵나요?”젠장! 정대명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차라리 보석을 훔치는 게 더 쉬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하하... 영미 아가씨.”마음속으로는 욕하고 있었지만, 얼굴엔 여전히 웃음이 서려 있었다.“이게, 그렇게 쉽지 않네요! 제가 며칠 동안 지켜본 결과, 그 경호원들이 전부 총을 들고 있더라고요. 제가 무턱대고 나서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정말 쓸모없네요.”영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내가 사람들까지 매수해 놨는데, 일을 이따위로 하다니!”정대명은 억눌린 분노를 꾹 참고 입을 다물었다.“말해 두겠는데요!”영미는 한발 더 나아가 말했다.“이 일 못 해내면, 화려한 호텔 스위트룸도 더 이상 못 쓰게 될 테고 돈 한 푼도 못 받는 줄 아세요! 다시 그 작은 산골 마을로 돌아가서 평생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 하세요!”정대명은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호사에 길든 사람이 다시 가난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려운 법이다. 최근 정대명은 오성에서 살아가며 화려한 삶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이 잘 먹고 살게 도와줬고 돈까지도 넉넉히 주니 점점 체면이 생기기 시작했다.호텔에서 정대명이 매일 스위트룸에서 지내는 것을 본 사람들은 그를 대단한 부자로 착각했고 그에게 예의를 갖추며 인사했다.이런 삶은 초라했던 지난날에선 꿈도 꾸지 못한 것이었다.고작 아이 하나 때문에 이 모든 걸 잃기엔 너무 아까웠다.정대명은 급히 전화기를 붙잡고 외쳤다.“영미 아가씨, 너무 흥분하지 마!”영미는 냉소적인 웃음을 흘렸다.“내가...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정대명은 어영부영 답했다.“겨우 아이 하나 가지고, 뭐 대단한 일도 아니지!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