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순간 총알이 유리창을 뚫는 소리가 마당 상공에 울려 퍼졌고 곧이어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바닥에 쓰러진 강서연은 의식이 점점 흐려졌지만 마지막 힘을 내어 밖으로 기어나갔다.“여보, 살려줘요...”그런데 커다란 손이 그녀의 머리채를 확 잡아당겼다. 두피가 뜯겨나가는 듯한 고통에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의식을 완전히 잃기 전에 차가운 칼날이 피부를 스쳤고 이어 구현수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도련님, 절 놓아주면 이 여자를 넘길게요. 어때요? 괜찮은 거래인 것 같은데. 이대로 그냥 보내준다면 다시는 두 사람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요. 도련님 와이프는 앞으로 도련님 한 사람의 것이에요!”최연준이 소리를 지르자 몇몇 경호원들이 구현수를 물샐틈없이 포위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함부로 덤비지 못했다.구현수가 비수로 강서연의 목을 겨누고 있었고 시뻘건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싸늘하게 웃던 구현수가 문 쪽으로 물러서더니 강서연을 최연준의 품에 확 던져버렸다.경호원들이 그를 쫓아갔지만 구현수가 한발 먼저 검은색 세단에 올라탄 바람에 잡지 못했다. 번호판도 없는 그 차는 길가에서 오래 기다린 듯했다.구현수도 놓치고 운전자의 얼굴도 확인 못 한 경호원들은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당장 병원으로 가!”병원으로 가는 길 내내 최연준은 강서연을 꼭 끌어안았다. 몸과 손이 그녀의 피로 물들었다.머릿속이 하얘진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러 방법으로 지혈하려 애를 썼지만 피가 멈추지 않았다.“서연아, 강서연!”최연준은 그녀를 미친 듯이 불렀다.“눈 뜨고 나 좀 봐봐!”강서연은 아무 반응이 없었고 얼굴과 입술에 핏기가 전혀 없었다. 최연준은 절망에 빠진 얼굴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죽음과 이 정도로 가까이 마주한 건 그야말로 처음이었다....번호판이 없는 검은색 세단은 미친 듯이 질주하여 인적이 드문 교외까지 달려왔다.강가의 바람이 시내보다 훨씬 더 셌다. 구현수가 유리창을 닫으려던 그때 백미러로 그를 섬뜩하게 쳐다보는 눈빛과 딱
“아까 당신이 실패했을 때 이미 그 사실을 어르신께 알려드렸어요.”남자가 고개를 돌렸다.“이 돈은 어르신이 주신 거예요. 당신을 살려두면 앞으로도 쓸모가 있을 거라고 하셨어요.”남자는 갑자기 손을 뻗어 구현수의 얼굴을 덥석 잡았다. 그가 사악하게 웃으며 말했다.“어르신의 계획대로 움직이는 게 좋을 거예요... 이대로 죽으면 얼마나 아까워요.”구현수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감옥살이를 오래 하고 육경섭 같은 깡패를 만나도 눈앞의 이 청년처럼 두려움에 떤 적이 없었다.“그만 가봐요.”차가 길가에 멈춰 섰고 싸늘한 목소리가 구현수의 귓가에 들려왔다.“앞으로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있을 거예요.”돈뭉치를 챙긴 구현수는 차 문을 열고 황급히 도망쳤다. 모자를 눌러쓰던 남자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최연준은 응급실 문 앞에서 애타게 기다렸다. 손에 묻은 피가 검붉게 변해버렸다. 그는 떨리는 두 손을 맞잡은 채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최연준의 뒤에 서 있는 경호원들의 표정도 어두웠다. 그때 맨 앞에 선 경호원이 다가와 나지막이 말했다.“도련님, CCTV를 돌려봤는데 교외 방향으로 도망친 걸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운전자가 아주 교활하더군요. 게다가 강주에 번호판이 없는 차량이 많고 특별한 차종도 아니라서 조사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최연준은 아무 말 없이 싸늘한 기운만 내뿜었다.임우정은 초조한 마음에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손톱을 계속 물어뜯었다. 응급실 위쪽의 빨간 불이 마치 뜨거운 불꽃처럼 그녀의 마음을 태우는 것 같았다.육경섭은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최연준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에게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라고 얘기할 참이었는데 임우정이 먼저 눈살을 찌푸리고 차갑게 물었다.“저 사람이 진짜 최연준이야?”육경섭은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듯 그녀를 보며 입술을 적셨다.강서연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걸 알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적어도 스무 번은 물어봤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육경섭은 인내심 있게 설명했다.“그래, 최연준
육경섭은 제자리에 가만히 선 채 복잡한 눈빛으로 임우정을 쳐다보았다.“제발 진정 좀 해. 연준 씨도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겠지...”“모르긴 뭘 몰라?”임우정이 목청을 높였다.“오성에서 재벌의 삶이 하도 지루해서 범죄자의 신분으로 사기 결혼하러 온 거겠지.”“무슨 얘기를 그렇게 해? 넌 상황을 잘 몰라. 그때 연준 씨가 남의 음모로 중상을 입은 바람에 강주에서 이름을 숨기고 지냈던 거야.”임우정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육경섭을 싸늘하게 훑어보았다.“너 이 사람에 대해 많이 아네?”육경섭은 아무 말이 없었다.“육경섭!”육경섭은 자신의 따귀를 내려치고 싶은 심정이었다.“최연준 씨.”임우정은 너무도 화가 나 목소리마저 떨렸다.“치료하겠으면 조용히 치료나 할 것이지, 왜 가만히 있는 서연이를 건드렸어요? 자기가 무슨 황태자라도 되는 줄 알아요? 중상을 입은 와중에도 여자를 꼬시다니. 당신네 형제들이 아주 부러워하겠어요? 그나저나 서연이는 어떡해요? 진짜 서연이랑 결혼할 거예요?”“우정아!”육경섭의 표정이 무척이나 진지했다.“그만해!”임우정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터져 나오는 울음을 애써 참았다.병원 복도가 갑자기 진공 속에 빠진 듯 조용해졌다. 잠시 후, 응급실 불이 꺼지자 최연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신석훈이 응급실에서 걸어 나오며 홀가분하게 한숨을 돌렸다.“다행히 상처가 깊지 않았고 동맥도 건드리지 않았어요. 다른 상처는 그냥 찰과상이라 천천히 치료하면 돼요.”최연준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최연준을 마주한 신석훈은 마음이 복잡했다. 그때 자신이 구한 사람이 이런 엄청난 사람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도... 도련님.”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간호사가 안에서 마지막으로 상처를 처리하고 있어요. 한동안 관찰하다가 아무 이상이 없으면 일반 병실로 옮길 거예요.”최연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목소리로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아 참.”신
강서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최연준은 그녀를 쓰다듬으려고 손을 내밀었다가 다시 거두어들였다.“내가 널 속였어.”그가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리고 네가 이렇게 된 것도 다 나 때문이야.”강서연의 두 눈에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그녀는 그제야 모든 게 이해되었다. 왜 그에게서 일반인에게는 볼 수 없는 아우라가 있는지, 왜 매번 그녀에게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마다 쉽게 해결했는지, 왜 돈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지, 왜 이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었는지...이 세상을 발아래에 둔 최씨 가문의 도련님이니 두려울 리가 있었겠는가?강서연이 씁쓸하게 웃었다. 전에는 그에게 바보라고 했었지만 그의 손에 놀아난 자신이야말로 바보라는 생각이 들었다.“서연아...”“그만 나가요.”강서연이 이불을 뒤집어쓴 채 가녀린 목소리로 말했다. 헝클어진 머리가 이불 밖으로 나왔고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최연준은 그녀의 등을 토닥이고 싶었고 예전처럼 품에 안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그는 묵묵히 병실을 나와 복도 의자에 한참 동안 앉아있었다....며칠 후 강서연은 퇴원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집 문 앞에 멈춰 선 채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린 임우정이 나지막이 물었다.“우리 집에서 며칠 지낼래?”강서연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가뜩이나 요 며칠 신세를 많이 졌는데 더 민폐를 끼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고비는 그녀 스스로 넘어야만 했다.강서연은 키를 꺼내 문을 열었다. 허리를 숙이고 슬리퍼로 갈아신던 그때 신발장 안에 있는 최연준의 가죽 신발이 눈에 띄었다. 그 순간 그녀는 마음이 움찔했다.집안의 모든 것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베란다에 그가 훈련할 때 쓰는 샌드백과 복싱 글러브가 있었고 화장실의 빨래 바구니에는 그가 갈아입은 셔츠가 있었으며 소파에는 그가 평소에 있던 잠옷이 널브러져 있었다.그리고 세면대 옆에는 두 사람의 칫솔이 예전처럼 서로 맞대어있었다.강서연은 순간
‘최연준은 뭐가 저리 겁나서 자기 집에 오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을 불러 모은 거야?’“서연아, 눈 좀 붙이고 있어. 나 밑에 마트 가서 마실 거 좀 사 올게.”임우정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고 강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임우정은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1층 현관문 앞 두 사람에게 다가간 그녀는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더니 입을 열었다.“구현...”임우정은 입술을 깨물더니 이름을 고쳐 불렀다.“최연준 씨, 서연이 이제 막 잠들었어요. 지금 올라가려는 거면 조용히 들어가요. 몸은 조금씩 회복되고 있지만, 마음의 상처는 아마 시간이 꽤 걸릴 거예요.”최연준은 숙연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답했다.“고마워요.”“아니에요.”임우정은 그런 최연준을 바라보며 덧붙였다.“사실 서연이가 연준 씨를 마음에서 놓은 건 아닐 거예요. 그저 일시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힘들어서 그래요. 천천히 풀어줘요. 그러다 보면 서연이도 마음이 수그러들지 않겠어요?”“네.”“하지만, 명심해요! 다시 한번 또 서연이를 속이고 마음 상하게 하면, 내 손에 먼저 죽을 줄 알아요. 강서연 대신해서 내가 가만 안 둘 거니까!”“흠흠!”육경섭이 한 발 나서서 급하게 상황을 진정시켰다.“우정아, 그럴 것까지야. 그 정도 심각한 거 아니야...”“심각한 게 아니라고? 서연이 이번에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어!”육경섭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는 입도 뻥긋 못했다. 이어 최연준에게 눈치를 주었다.최연준은 곧장 계단으로 향했고, 조심히 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임우정은 잠시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고개를 들어 집을 올려다보았고, 별다른 기척 없이 조용한 모습을 보고서야 마음이 놓이는지 발길을 떼려 했다. 그러던 차에 육경섭이 그녀의 길을 가로막았다.“뭐 하는 거야?”임우정은 커다래진 눈으로 육경섭을 쳐다보았다. 오늘따라 눈앞의 육경섭은 이상하리만치 달라 보였다. 평소 그녀를 만나면 늘 웃는 얼굴이던 그가 유난히도 근엄한 모습
“...”임우정은 어이가 없었다. 곧 동네 구경꾼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누군가는 부러운 눈길을 보냈고, 누군가는 드라마 보듯 엄마 미소를 짓고 있었으며 또 누군가는 동영상을 찍으며 작은 소리로 웃었다.“키보드에 무릎 꿇는다는 말은 우스갯소리로 많이 듣긴 했는데 이렇게 실물로 영접할 줄이야! 진짜 저렇게 사과하는 사람이 있구나!”“하하하...”임우정은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고, 볼이 다 빨개졌다.“육경섭! 너, 대낮에 뭐 하는 짓이야! 정신 나갔니? 얼른 일어나! 그만 일어나라고!”임우정은 육경섭을 잡아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육경섭은 그만둘 줄 모르고 더 고래고래 다 들으라고 소리쳤다.“하지 마! 오늘 누구라도 내가 마누라한테 사과하는 걸 방해 할 시, 이 육경섭의 원수가 될 줄 알아. 내가 이 바닥 경력 다 살려서 원수 같은 놈들 다 가만두지 않... 아야!”육경섭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우정한테 귀가 잡혔다. 육경섭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임우정을 훔쳐보는 눈빛에는 달콤함이 한껏 넘쳤다. 뒤에 서 있던 부하들은 그 모습에 빵 터졌고, 결국 참지 못해 입을 가리고 몸을 돌려 웃었다.“그만해, 언제까지 쪽 팔리게 할 거야?”“알았어, 알았어...”“알았으면 그만 집에 가지!”“그래, 그래, 그래. 집에 가자! 우정아, 살살... 해.”육경섭은 일어서서 임우정을 뒤따랐고, 그 와중에도 키보드는 잊지 않고 챙겨갔다.“하하. 마누라, 반지는 얼마나 큰 거면 좋을까? 십 캐럿이면 충분한가?”...그리고 며칠 동안, 강서연은 최연준과 마주치지는 못했다. 하지만 쭉 본인 곁을 지켜주고 있음은 잘 알고 있었다.최연준은 밤에는 소파에서 자고, 그녀가 깨어나기 전에 아침을 차려 놓고 집을 나서기를 반복했다. 사실 멀리 가지도 않고 아파트 밑에서 배회했다. 강서연은 창가에 서서 서성이는 최연준의 외로운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쓰라렸다. 시간은 하루하루 흘러갔고 오성 쪽에서 여러 번의 소식을 전해 왔다. 모두 다
“아니면, 강서연 씨를 아예 오성으로 데리고 가는 건 어때? 집안에 그래도 나랑 네 아버지가 있잖아. 적어도 강서연 씨가 화는 입지 않게 할 수 있어.”최연준은 마지못해 웃어 보이며 말했다.“생각해 줘서 고마워요, 은 대표님. 그런데 그리하면 서연이가 저를 더 싫어할걸요.”“구현수는 잡았어?”최연준은 나직이 답했다.“아니요. 구현수를 데리고 간 사람이 꽤 술책도 좋고, 강주 일대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요. 특히 근교 강변 길목을 속속히 잘 알고 있어서, CCTV 가 있는 곳에서는 얼굴 싹 가리고, 번호판도 없는 차라서 조사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네요.”“내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지 얘기해.”은미연의 위로에 최연준은 고개를 끄덕였고, 고마움을 눈맞춤으로 대신했다.“연희랑 언제 같이 돌아갈 생각이에요?”“조만간. 연희도 마음 다잡고 대학입시 준비를 해야 할 시기라서.”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최연희가 활기차게 옷자락을 펄럭이며 뛰어 들어왔다. 최연준을 본 그녀는 다급히 강서연의 상태를 물었고, 최연준은 최연희 뒤를 따라 들어 온 사람을 주시했다.“연준 도련님, 안녕하세요.”최연준은 그 남자를 찬찬히 훑어보았다.“당신은...”“저 인지석이라고 합니다. 연준 도련님은 저를 아마 모르실 거예요.”‘이 사람이 인지석이라고.’최연준은 못내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소년은 얼굴만 봐서는 그저 스무 살 정도로밖에 안 돼 보이지만, 나이답지 않은 성숙하고 듬직한 느낌을 물씬 풍겼다. 깔끔하고 잘생긴 얼굴이지만, 눈빛은 어딘가 모르게 심상치 않은 음흉함이 묻어났다...인지석은 최연준의 컵이 빈 것을 보고 재빠르게 차를 따라줬다. 인지석이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 차를 따르는 순간, 머릿속에 전광석화같이 앞서 조사했던 CCTV 화면들이 뇌리를 스쳤다. 화면 속 운전자는 얼굴이 다 비치지는 않았지만, 캡모자 아래로 드러난 얼굴 일부분이 지금 모습같이 야위고 창백했다...최연준은 갑자기 가슴이 덜컹했다!“인지석?”인지석은 전혀 내색하는 기색 없이 겸손한
최연준이 집에 도착했을 때 집안은 조용했고 욕실에서 물 흐르는 소리만 들렸다. 그는 조심스러웠고, 움직임 소리를 내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에 그 자리 그대로 조용히 서 있었다.최연준은 강서연의 이런 평소와는 다른 행동들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했던 신석훈의 말이 떠올랐다. 신석훈은 의사로서의 의견을 줬다.“서연 씨 정도면 가벼운 증상이에요. 병원 심리 상담을 통해 풀어내는 게 제일 좋기는 한데... 결자해지라고, 서연 씨 문제의 원인이 최연준 씨한테 있는 거라면 당신이 최적의 심리상담사일 거로 생각해요.”최연준은 숨을 깊게 들이켰다. 그 역시도 그녀의 심리 상담을 자처하고 싶었지만, 강서연은 그한테 전혀 어떤 기회도 주지 않았다. 곁에 다가가지도 못하니 말이다.그때, 욕실 문이 열렸고, 목욕 타월을 두른 강서연이 걸어 나왔다. 문득 최연준과 눈이 마주친 그녀는 화들짝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서연아...”최연준이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강서연은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침실로 몸을 숨겼고 문까지 잠가 버렸다. 그 문은 마치 둘을 서로 다른 세계로 갈라놓는 장치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서연은 문을 살짝 열어 문틈으로 최연준을 몰래 보았다. 최연준은 크지 않은 거실에서 거둔 빨래를 정갈하게 개어 놓고 있었다. 예전의 최연준은 빨래 개는 법을 몰랐는데, 지금은 아주 손에 익은 모습이었다.사실 최연준은 강서연을 위해 자신을 바꿀 수도, 모든 걸 내던질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강서연은 갑자기 목이 메어왔고 눈시울이 붉어져서는 입술을 깨물었다.이럴 때일수록 강서연은 더욱 엄마와 같이 있고 싶었다. 며칠 뒤에 그녀는 윤문희 거처로 몸을 옮기기로 했다. 윤문희는 퇴원하고 난 뒤 쭉 약을 복용하면서 정신이 많이 맑아졌고, 일상생활을 이어 나갈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좋아졌다.모처럼 정신이 맑아진 그때, 윤문희는 딸의 상황을 전해 듣고는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딸 곁을 지키면서 그녀를 돌봤다. 가끔 악몽을 꾸기는 하지만, 엄마 옆에서 강서연은 그나마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