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순간 총알이 유리창을 뚫는 소리가 마당 상공에 울려 퍼졌고 곧이어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바닥에 쓰러진 강서연은 의식이 점점 흐려졌지만 마지막 힘을 내어 밖으로 기어나갔다.“여보, 살려줘요...”그런데 커다란 손이 그녀의 머리채를 확 잡아당겼다. 두피가 뜯겨나가는 듯한 고통에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의식을 완전히 잃기 전에 차가운 칼날이 피부를 스쳤고 이어 구현수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도련님, 절 놓아주면 이 여자를 넘길게요. 어때요? 괜찮은 거래인 것 같은데. 이대로 그냥 보내준다면 다시는 두 사람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요. 도련님 와이프는 앞으로 도련님 한 사람의 것이에요!”최연준이 소리를 지르자 몇몇 경호원들이 구현수를 물샐틈없이 포위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함부로 덤비지 못했다.구현수가 비수로 강서연의 목을 겨누고 있었고 시뻘건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싸늘하게 웃던 구현수가 문 쪽으로 물러서더니 강서연을 최연준의 품에 확 던져버렸다.경호원들이 그를 쫓아갔지만 구현수가 한발 먼저 검은색 세단에 올라탄 바람에 잡지 못했다. 번호판도 없는 그 차는 길가에서 오래 기다린 듯했다.구현수도 놓치고 운전자의 얼굴도 확인 못 한 경호원들은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당장 병원으로 가!”병원으로 가는 길 내내 최연준은 강서연을 꼭 끌어안았다. 몸과 손이 그녀의 피로 물들었다.머릿속이 하얘진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러 방법으로 지혈하려 애를 썼지만 피가 멈추지 않았다.“서연아, 강서연!”최연준은 그녀를 미친 듯이 불렀다.“눈 뜨고 나 좀 봐봐!”강서연은 아무 반응이 없었고 얼굴과 입술에 핏기가 전혀 없었다. 최연준은 절망에 빠진 얼굴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죽음과 이 정도로 가까이 마주한 건 그야말로 처음이었다....번호판이 없는 검은색 세단은 미친 듯이 질주하여 인적이 드문 교외까지 달려왔다.강가의 바람이 시내보다 훨씬 더 셌다. 구현수가 유리창을 닫으려던 그때 백미러로 그를 섬뜩하게 쳐다보는 눈빛과 딱
“아까 당신이 실패했을 때 이미 그 사실을 어르신께 알려드렸어요.”남자가 고개를 돌렸다.“이 돈은 어르신이 주신 거예요. 당신을 살려두면 앞으로도 쓸모가 있을 거라고 하셨어요.”남자는 갑자기 손을 뻗어 구현수의 얼굴을 덥석 잡았다. 그가 사악하게 웃으며 말했다.“어르신의 계획대로 움직이는 게 좋을 거예요... 이대로 죽으면 얼마나 아까워요.”구현수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감옥살이를 오래 하고 육경섭 같은 깡패를 만나도 눈앞의 이 청년처럼 두려움에 떤 적이 없었다.“그만 가봐요.”차가 길가에 멈춰 섰고 싸늘한 목소리가 구현수의 귓가에 들려왔다.“앞으로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있을 거예요.”돈뭉치를 챙긴 구현수는 차 문을 열고 황급히 도망쳤다. 모자를 눌러쓰던 남자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최연준은 응급실 문 앞에서 애타게 기다렸다. 손에 묻은 피가 검붉게 변해버렸다. 그는 떨리는 두 손을 맞잡은 채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최연준의 뒤에 서 있는 경호원들의 표정도 어두웠다. 그때 맨 앞에 선 경호원이 다가와 나지막이 말했다.“도련님, CCTV를 돌려봤는데 교외 방향으로 도망친 걸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운전자가 아주 교활하더군요. 게다가 강주에 번호판이 없는 차량이 많고 특별한 차종도 아니라서 조사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최연준은 아무 말 없이 싸늘한 기운만 내뿜었다.임우정은 초조한 마음에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손톱을 계속 물어뜯었다. 응급실 위쪽의 빨간 불이 마치 뜨거운 불꽃처럼 그녀의 마음을 태우는 것 같았다.육경섭은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최연준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에게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라고 얘기할 참이었는데 임우정이 먼저 눈살을 찌푸리고 차갑게 물었다.“저 사람이 진짜 최연준이야?”육경섭은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듯 그녀를 보며 입술을 적셨다.강서연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걸 알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적어도 스무 번은 물어봤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육경섭은 인내심 있게 설명했다.“그래, 최연준
육경섭은 제자리에 가만히 선 채 복잡한 눈빛으로 임우정을 쳐다보았다.“제발 진정 좀 해. 연준 씨도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겠지...”“모르긴 뭘 몰라?”임우정이 목청을 높였다.“오성에서 재벌의 삶이 하도 지루해서 범죄자의 신분으로 사기 결혼하러 온 거겠지.”“무슨 얘기를 그렇게 해? 넌 상황을 잘 몰라. 그때 연준 씨가 남의 음모로 중상을 입은 바람에 강주에서 이름을 숨기고 지냈던 거야.”임우정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육경섭을 싸늘하게 훑어보았다.“너 이 사람에 대해 많이 아네?”육경섭은 아무 말이 없었다.“육경섭!”육경섭은 자신의 따귀를 내려치고 싶은 심정이었다.“최연준 씨.”임우정은 너무도 화가 나 목소리마저 떨렸다.“치료하겠으면 조용히 치료나 할 것이지, 왜 가만히 있는 서연이를 건드렸어요? 자기가 무슨 황태자라도 되는 줄 알아요? 중상을 입은 와중에도 여자를 꼬시다니. 당신네 형제들이 아주 부러워하겠어요? 그나저나 서연이는 어떡해요? 진짜 서연이랑 결혼할 거예요?”“우정아!”육경섭의 표정이 무척이나 진지했다.“그만해!”임우정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터져 나오는 울음을 애써 참았다.병원 복도가 갑자기 진공 속에 빠진 듯 조용해졌다. 잠시 후, 응급실 불이 꺼지자 최연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신석훈이 응급실에서 걸어 나오며 홀가분하게 한숨을 돌렸다.“다행히 상처가 깊지 않았고 동맥도 건드리지 않았어요. 다른 상처는 그냥 찰과상이라 천천히 치료하면 돼요.”최연준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최연준을 마주한 신석훈은 마음이 복잡했다. 그때 자신이 구한 사람이 이런 엄청난 사람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도... 도련님.”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간호사가 안에서 마지막으로 상처를 처리하고 있어요. 한동안 관찰하다가 아무 이상이 없으면 일반 병실로 옮길 거예요.”최연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목소리로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아 참.”신
강서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최연준은 그녀를 쓰다듬으려고 손을 내밀었다가 다시 거두어들였다.“내가 널 속였어.”그가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리고 네가 이렇게 된 것도 다 나 때문이야.”강서연의 두 눈에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그녀는 그제야 모든 게 이해되었다. 왜 그에게서 일반인에게는 볼 수 없는 아우라가 있는지, 왜 매번 그녀에게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마다 쉽게 해결했는지, 왜 돈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지, 왜 이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었는지...이 세상을 발아래에 둔 최씨 가문의 도련님이니 두려울 리가 있었겠는가?강서연이 씁쓸하게 웃었다. 전에는 그에게 바보라고 했었지만 그의 손에 놀아난 자신이야말로 바보라는 생각이 들었다.“서연아...”“그만 나가요.”강서연이 이불을 뒤집어쓴 채 가녀린 목소리로 말했다. 헝클어진 머리가 이불 밖으로 나왔고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최연준은 그녀의 등을 토닥이고 싶었고 예전처럼 품에 안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그는 묵묵히 병실을 나와 복도 의자에 한참 동안 앉아있었다....며칠 후 강서연은 퇴원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집 문 앞에 멈춰 선 채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린 임우정이 나지막이 물었다.“우리 집에서 며칠 지낼래?”강서연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가뜩이나 요 며칠 신세를 많이 졌는데 더 민폐를 끼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고비는 그녀 스스로 넘어야만 했다.강서연은 키를 꺼내 문을 열었다. 허리를 숙이고 슬리퍼로 갈아신던 그때 신발장 안에 있는 최연준의 가죽 신발이 눈에 띄었다. 그 순간 그녀는 마음이 움찔했다.집안의 모든 것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베란다에 그가 훈련할 때 쓰는 샌드백과 복싱 글러브가 있었고 화장실의 빨래 바구니에는 그가 갈아입은 셔츠가 있었으며 소파에는 그가 평소에 있던 잠옷이 널브러져 있었다.그리고 세면대 옆에는 두 사람의 칫솔이 예전처럼 서로 맞대어있었다.강서연은 순간
‘최연준은 뭐가 저리 겁나서 자기 집에 오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을 불러 모은 거야?’“서연아, 눈 좀 붙이고 있어. 나 밑에 마트 가서 마실 거 좀 사 올게.”임우정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고 강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임우정은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1층 현관문 앞 두 사람에게 다가간 그녀는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더니 입을 열었다.“구현...”임우정은 입술을 깨물더니 이름을 고쳐 불렀다.“최연준 씨, 서연이 이제 막 잠들었어요. 지금 올라가려는 거면 조용히 들어가요. 몸은 조금씩 회복되고 있지만, 마음의 상처는 아마 시간이 꽤 걸릴 거예요.”최연준은 숙연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답했다.“고마워요.”“아니에요.”임우정은 그런 최연준을 바라보며 덧붙였다.“사실 서연이가 연준 씨를 마음에서 놓은 건 아닐 거예요. 그저 일시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힘들어서 그래요. 천천히 풀어줘요. 그러다 보면 서연이도 마음이 수그러들지 않겠어요?”“네.”“하지만, 명심해요! 다시 한번 또 서연이를 속이고 마음 상하게 하면, 내 손에 먼저 죽을 줄 알아요. 강서연 대신해서 내가 가만 안 둘 거니까!”“흠흠!”육경섭이 한 발 나서서 급하게 상황을 진정시켰다.“우정아, 그럴 것까지야. 그 정도 심각한 거 아니야...”“심각한 게 아니라고? 서연이 이번에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어!”육경섭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는 입도 뻥긋 못했다. 이어 최연준에게 눈치를 주었다.최연준은 곧장 계단으로 향했고, 조심히 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임우정은 잠시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고개를 들어 집을 올려다보았고, 별다른 기척 없이 조용한 모습을 보고서야 마음이 놓이는지 발길을 떼려 했다. 그러던 차에 육경섭이 그녀의 길을 가로막았다.“뭐 하는 거야?”임우정은 커다래진 눈으로 육경섭을 쳐다보았다. 오늘따라 눈앞의 육경섭은 이상하리만치 달라 보였다. 평소 그녀를 만나면 늘 웃는 얼굴이던 그가 유난히도 근엄한 모습
“...”임우정은 어이가 없었다. 곧 동네 구경꾼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누군가는 부러운 눈길을 보냈고, 누군가는 드라마 보듯 엄마 미소를 짓고 있었으며 또 누군가는 동영상을 찍으며 작은 소리로 웃었다.“키보드에 무릎 꿇는다는 말은 우스갯소리로 많이 듣긴 했는데 이렇게 실물로 영접할 줄이야! 진짜 저렇게 사과하는 사람이 있구나!”“하하하...”임우정은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고, 볼이 다 빨개졌다.“육경섭! 너, 대낮에 뭐 하는 짓이야! 정신 나갔니? 얼른 일어나! 그만 일어나라고!”임우정은 육경섭을 잡아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육경섭은 그만둘 줄 모르고 더 고래고래 다 들으라고 소리쳤다.“하지 마! 오늘 누구라도 내가 마누라한테 사과하는 걸 방해 할 시, 이 육경섭의 원수가 될 줄 알아. 내가 이 바닥 경력 다 살려서 원수 같은 놈들 다 가만두지 않... 아야!”육경섭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우정한테 귀가 잡혔다. 육경섭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임우정을 훔쳐보는 눈빛에는 달콤함이 한껏 넘쳤다. 뒤에 서 있던 부하들은 그 모습에 빵 터졌고, 결국 참지 못해 입을 가리고 몸을 돌려 웃었다.“그만해, 언제까지 쪽 팔리게 할 거야?”“알았어, 알았어...”“알았으면 그만 집에 가지!”“그래, 그래, 그래. 집에 가자! 우정아, 살살... 해.”육경섭은 일어서서 임우정을 뒤따랐고, 그 와중에도 키보드는 잊지 않고 챙겨갔다.“하하. 마누라, 반지는 얼마나 큰 거면 좋을까? 십 캐럿이면 충분한가?”...그리고 며칠 동안, 강서연은 최연준과 마주치지는 못했다. 하지만 쭉 본인 곁을 지켜주고 있음은 잘 알고 있었다.최연준은 밤에는 소파에서 자고, 그녀가 깨어나기 전에 아침을 차려 놓고 집을 나서기를 반복했다. 사실 멀리 가지도 않고 아파트 밑에서 배회했다. 강서연은 창가에 서서 서성이는 최연준의 외로운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쓰라렸다. 시간은 하루하루 흘러갔고 오성 쪽에서 여러 번의 소식을 전해 왔다. 모두 다
“아니면, 강서연 씨를 아예 오성으로 데리고 가는 건 어때? 집안에 그래도 나랑 네 아버지가 있잖아. 적어도 강서연 씨가 화는 입지 않게 할 수 있어.”최연준은 마지못해 웃어 보이며 말했다.“생각해 줘서 고마워요, 은 대표님. 그런데 그리하면 서연이가 저를 더 싫어할걸요.”“구현수는 잡았어?”최연준은 나직이 답했다.“아니요. 구현수를 데리고 간 사람이 꽤 술책도 좋고, 강주 일대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요. 특히 근교 강변 길목을 속속히 잘 알고 있어서, CCTV 가 있는 곳에서는 얼굴 싹 가리고, 번호판도 없는 차라서 조사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네요.”“내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지 얘기해.”은미연의 위로에 최연준은 고개를 끄덕였고, 고마움을 눈맞춤으로 대신했다.“연희랑 언제 같이 돌아갈 생각이에요?”“조만간. 연희도 마음 다잡고 대학입시 준비를 해야 할 시기라서.”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최연희가 활기차게 옷자락을 펄럭이며 뛰어 들어왔다. 최연준을 본 그녀는 다급히 강서연의 상태를 물었고, 최연준은 최연희 뒤를 따라 들어 온 사람을 주시했다.“연준 도련님, 안녕하세요.”최연준은 그 남자를 찬찬히 훑어보았다.“당신은...”“저 인지석이라고 합니다. 연준 도련님은 저를 아마 모르실 거예요.”‘이 사람이 인지석이라고.’최연준은 못내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소년은 얼굴만 봐서는 그저 스무 살 정도로밖에 안 돼 보이지만, 나이답지 않은 성숙하고 듬직한 느낌을 물씬 풍겼다. 깔끔하고 잘생긴 얼굴이지만, 눈빛은 어딘가 모르게 심상치 않은 음흉함이 묻어났다...인지석은 최연준의 컵이 빈 것을 보고 재빠르게 차를 따라줬다. 인지석이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 차를 따르는 순간, 머릿속에 전광석화같이 앞서 조사했던 CCTV 화면들이 뇌리를 스쳤다. 화면 속 운전자는 얼굴이 다 비치지는 않았지만, 캡모자 아래로 드러난 얼굴 일부분이 지금 모습같이 야위고 창백했다...최연준은 갑자기 가슴이 덜컹했다!“인지석?”인지석은 전혀 내색하는 기색 없이 겸손한
최연준이 집에 도착했을 때 집안은 조용했고 욕실에서 물 흐르는 소리만 들렸다. 그는 조심스러웠고, 움직임 소리를 내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에 그 자리 그대로 조용히 서 있었다.최연준은 강서연의 이런 평소와는 다른 행동들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했던 신석훈의 말이 떠올랐다. 신석훈은 의사로서의 의견을 줬다.“서연 씨 정도면 가벼운 증상이에요. 병원 심리 상담을 통해 풀어내는 게 제일 좋기는 한데... 결자해지라고, 서연 씨 문제의 원인이 최연준 씨한테 있는 거라면 당신이 최적의 심리상담사일 거로 생각해요.”최연준은 숨을 깊게 들이켰다. 그 역시도 그녀의 심리 상담을 자처하고 싶었지만, 강서연은 그한테 전혀 어떤 기회도 주지 않았다. 곁에 다가가지도 못하니 말이다.그때, 욕실 문이 열렸고, 목욕 타월을 두른 강서연이 걸어 나왔다. 문득 최연준과 눈이 마주친 그녀는 화들짝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서연아...”최연준이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강서연은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침실로 몸을 숨겼고 문까지 잠가 버렸다. 그 문은 마치 둘을 서로 다른 세계로 갈라놓는 장치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서연은 문을 살짝 열어 문틈으로 최연준을 몰래 보았다. 최연준은 크지 않은 거실에서 거둔 빨래를 정갈하게 개어 놓고 있었다. 예전의 최연준은 빨래 개는 법을 몰랐는데, 지금은 아주 손에 익은 모습이었다.사실 최연준은 강서연을 위해 자신을 바꿀 수도, 모든 걸 내던질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강서연은 갑자기 목이 메어왔고 눈시울이 붉어져서는 입술을 깨물었다.이럴 때일수록 강서연은 더욱 엄마와 같이 있고 싶었다. 며칠 뒤에 그녀는 윤문희 거처로 몸을 옮기기로 했다. 윤문희는 퇴원하고 난 뒤 쭉 약을 복용하면서 정신이 많이 맑아졌고, 일상생활을 이어 나갈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좋아졌다.모처럼 정신이 맑아진 그때, 윤문희는 딸의 상황을 전해 듣고는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딸 곁을 지키면서 그녀를 돌봤다. 가끔 악몽을 꾸기는 하지만, 엄마 옆에서 강서연은 그나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