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남자가 이구동성으로 소리를 질렀다.“안 돼!”“안 돼요!”물론 그들의 반대는 당연히 무효였다. 어쨌거나 남자와 함께 자는 것보다 와이프를 화나게 하는 결과가 더 심각하니 말이다.늦은 시각, 육경섭은 쇼핑백을 바리바리 들고 풀이 죽은 얼굴로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 방 문을 열고 푹신푹신한 큰 침대를 본 순간 그는 울분이 터질 것만 같았다.그에 비해 최연준은 덤덤하기만 했다. 묵묵히 겉옷을 벗고 술 진열장에서 와인 한 병을 꺼내 얼음을 넣고 천천히 흔들어 마셨다.“연준 씨, 당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반드시 한배를 타야 해요!”육경섭이 이를 꽉 깨물었다.“내일부터 자기 여자는 자기가 알아서 책임져요. 절대 저 둘이 붙어있게 해서는 안 돼요. 들었어요?”육경섭이 씩씩거리며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최연준은 그를 보며 덤덤하게 웃어 보이고는 창밖의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후, 그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남양, 윤제 그룹, 윤정재, 제약 공장...이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최진혁이 그를 해하려는 원인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윤정재는 왜 그를 도우려 했을까? 그깟 1억 불이 넘는 보험금에 흔들렸단 말인가?윤씨 가문의 세력이 최씨 가문보다는 못해도, 돈을 가장 많이 버는 의약과 정보 과학기술 영역의 사업을 하고 있어 절대 돈이 부족할 리가 없었다. 하여 윤정재가 이렇게까지 하는 건 분명 다른 목적이 있을 것이다!...성남에서 돌아간 후, 강서연은 전보다 눈에 띄게 웃음이 많아졌다. 최연준이 조금 시름을 놓던 그때 유찬혁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연준 형, 형이 나한테 쓰라고 했던 성명서 있잖아요. 영감님께서 막으셨어요. 형 아무래도 오성에 한 번 다녀가야겠어요.”“응, 알았어.”최연준은 진작 예상하였다. 유찬혁에게 성명서를 쓰라고 할 때부터 그는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다.전화를 끊은 최연준은 고개를 들어 아직 집 청소를 하는 강서연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강서연은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했다
“서연아.”그가 잠깐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나 내일부터... 합숙 훈련에 들어가.”강서연이 화들짝 놀랐다.“또 경기가 있어요?”“응.”그가 대충 얼버무렸다.“이번에는 합숙 훈련이 꽤 길 것 같아.”강서연의 표정이 우울해졌다. 하지만 최연준이 좋아하는 일이라 그녀는 무조건 응원했다.최연준은 그녀에게 다가가 허리를 감싸 안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향긋한 냄새가 그의 코끝을 스쳤다.“여보, 내가 예전에 가르쳤던 동작 기억나?”강서연이 두 눈을 깜빡이더니 별다른 생각 없이 그의 질문에 답했다.“기억나요.”그러자 최연준이 음흉하게 웃었다.“어느 정도 기억해?”순진한 강서연이 동작을 보여줬다.“만약 누군가 앞에서 날 공격하면 이렇게... 뒤에서 공격하면 이렇게...”그런데 그녀가 그의 손목을 잡았을 때 최연준은 그녀를 더욱더 세게 끌어안았다. 최연준의 힘이 더 세다 보니 그녀가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여보... 으악!”최연준은 그녀를 번쩍 들어 곧장 안방의 큰 침대로 향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강서연은 작은 주먹으로 그의 가슴팍을 두드리며 두 눈을 부릅떴다.“아까 한 동작들은 다 괜찮았어.”최연준이 목소리를 내리깔고 가볍게 웃었다.“그럼 지금...”그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점점 가까이 다가갔다....“도련님, 도착했어요.”방한서가 차를 최상 빌라 밖에 세웠다.최연준이 유리창 밖을 힐끗 보더니 조금 전 정신을 딴 데 팔아 민망한지 마른기침을 두어 번 했다.방한서는 시선을 내리깔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도련님. 강서연 씨 쪽에 사람을 많이 보냈으니까 절대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그래.”최연준이 덤덤하게 대답했다.비행기에 몸을 실은 내내 그녀의 부드럽고 간질간질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고 보호 본능을 자극하듯 그의 가슴팍에 살포시 기대던 모습이 그리웠다...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강서연밖에 없었다.오성에 도
최연준의 눈빛이 어두워졌고 널찍한 등도 굳어버린 것 같았다. 최재원의 질문에도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분위기가 어찌나 싸늘한지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최재원이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더욱 무거운 말투로 다시 한번 물었다.“강서연이 누구냐고!”“저의 와이프 입니다.”최재원이 손을 들어 상을 탁 내려치자 순식간에 깨져 산산이 조각났다.최연준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손등의 핏줄이 다 터질 것만 같았다. 최재원이 성난 목소리로 물었다.“언제 결혼했어? 이 여자는 또 언제 만났고?”“만약 내가 이 발표를 막지 않았더라면 정말 최씨 가문의 절반을 남한테 줄 생각이었어?”집사와 도우미들이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서재 안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감히 숨소리도 내질 못했고 방한서마저도 여간 놀란 게 아니었다.최재원은 일을 처리하면서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사람이라 오늘같이 성을 내는 일은 그야말로 드물었다.오늘 할아버지와 손자는 마치 끝장을 볼 기세로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가까이 다가가기는커녕 소리만 들어도 저도 모르게 오금이 저렸다.“네 명의로 된 재산, 주식, 펀드, 그리고 해외 부동산과 현금까지 전부 그 여자한테 절반 나눠주려고?”최재원이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연준아, 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니!”최연준이 입술을 적시고는 단호하게 말했다.“절반이 아니라... 전부 다 줄 거예요.”“뭐라고?”“성명서에 절반이라고 쓴 건 아직 완전히 제 와이프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나중에 완전히 제 여자가 된다면 그땐 다 그 사람 것이에요.”최재원이 냉기가 감도는 눈빛으로 그를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결혼하지 않았단 말이야?”최연준이 이를 꽉 깨물었다. 그가 아무 말이 없자 최재원은 그제야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는 최연준이 비행기 사고를 당한 후로 줄곧 강주에서 요양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여 강서연과는 그 시기에 만났을 거라고 짐작했다.사람이 몸을 다치게 되면 의지력도 약해지고 그 틈을
“오성이 이렇게나 큰데 걔 하나 발붙일 자리가 없겠어?”최재원이 드래곤 지팡이를 잡았다.“걔가 지낼 집 하나 마련해서 나중에 네가 결혼하면 한 달에 몇 번 정도 보러 가. 걔가 사고를 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네 곁에 둬도 좋다!”최연준이 멈칫하더니 한참 후에 차갑게 웃었다.“서연이더러 제 내연녀를 하란 말씀이셨군요.”“그런 여자는 내연녀 자리도 아까워!”최연준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그건 말도 안 돼요!”그가 목청을 높였다.“절대 서연이가 그런 일을 당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예요!”“그럼 어떡할 건데? 결혼이라도 하려고?”최재원이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너 그 여자한테 아주 홀딱 빠졌구나!”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창문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가슴을 움켜쥐었다.“당장 그 애랑 헤어져! 나연이와 결혼하고 싶지 않다면 다른 3대 가문에서 골라도 되잖아!”“제 평생에 서연이 말고 다른 여자는 없어요!”“다른 여자는 없다고?”최재원이 목청을 높이며 그를 무섭게 째려보았다.“만약 걔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최연준은 순간 머리가 윙 했고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최재원이 계속하여 그를 몰아붙였다.“연준아, 넌 내가 직접 키운 우리 가문의 후계자야. 뭘 하든 넌 항상 최상 그룹부터 생각해야 해. 그리고 할아버지의 책임은 너의 앞길을 막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는 거야... 여자도 포함해서 말이지.”최연준의 눈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가 다시 풀었다. 분위기가 다시 살얼음판이 되었고 그가 아무 말이 없자 최재원의 얼굴에 점점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그런데 그가 손을 내밀어 최연준의 어깨를 다독이려던 순간, 최연준이 갑자기 휙 피했다.최연준은 고개를 들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매섭고 싸늘한 눈빛은 마치 야밤에 산속을 거니는 한 마리 맹수 같았다.“할아버지.”그가 또박또박 말했다.“만약 서연이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할아버지도 직접 키운 후계자를 잃으실 겁니다!”“너..
최연준이 발걸음을 멈췄다. 그의 우람한 뒷모습이 오늘따라 더욱 차가워 보였다. 그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임나연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입꼬리를 씩 올렸다. 차가운 눈빛 속에 비웃음이 담겨있었다.“결혼? 나연 씨, 우리가 언제 혼약을 맺은 적이 있던가요?”최연준이 갑자기 그녀를 멀리하며 존댓말을 쓰기 시작했다.임나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내가 알고 있는 혼약은 두 사람이 서로 원해야만 맺는 거라고 들었어요. 하지만 아쉽게도 우린 그 조건에 부합되지 않아요!”“최연준 너...”“앞으로는 연준 씨라고 불러요. 그리고 존댓말도 하고요.”최연준이 싸늘하게 말했다.“나연 씨, 우리가 아직 친구처럼 이름을 막 부를 정도로 친하진 않은 것 같은데!”최연준은 자기 할 말만 하고 홱 돌아섰다. 홀로 남겨진 임나연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뒷모습이 그녀의 시야에서 점점 사라졌다.임나연이 이를 깨물면서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마음속에 마치 돌덩이가 앉은 듯 답답하기만 했다.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쉬면서 마음을 가라앉힌 후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최재원의 표정도 말이 아니게 어두웠다.서재로 들어간 임나연은 깨져 난장판이 된 찻그릇과 바닥에 놓인 드래곤 지팡이를 본 순간 방금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임나연도 이런 상황에 끼어들 수 없어 인사치레로 몇 마디 위로를 건넨 뒤 떠나려는데 티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휴대 전화가 갑자기 진동했다.“할아버지, 이건...”최재원이 그녀를 힐끗 보며 말했다.“연준이가 까먹고 놓고 갔나 봐. 나연아, 네가 가져다줘.”생각지도 못한 기회에 임나연은 바로 웃으며 알겠다고 했다.“연준이 만나면 설득 좀 해줘.”최재원이 덤덤하게 말했다.“나연아, 난 네가 마음이 넓은 애라는 거 알아. 이 일 때문에 연준이를 탓하진 않을 거지?”임나연이 화들짝 놀랐다. 아까 문 앞에서 내연녀고 어쩌고 어렴풋이 듣긴 들었다.‘나중에 내가 연준이랑 결혼하게 되면 연준이가 밖
휴대 전화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강서연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나도 사랑해요.”강서연은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고 두 볼도 빨갛게 달아올랐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린 그녀는 휴대 전화를 한참 동안 멍하니 들여다보다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결혼한 지 이렇게나 오래되었는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강서연은 여유롭게 기지개를 켰다. 기분이 날아갈 듯이 기뻤고 오늘 밤에 또 최연준의 꿈을 꿀 것만 같았다.전화를 끊은 최연준이 방한서에게 차를 가져오라고 전화하려던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강서연 씨야?”그는 움찔한 마음을 뒤로한 채 돌아서서 그녀를 싸늘하게 쳐다보았다.“아직도 여기 있었어요?”“연준아...”임나연이 멈칫하다가 말을 바꾸었다.“도련님, 강서연 씨랑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말이 안 되지 않나요?”최연준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우리 두 사람 일은 당신이랑 상관없어요!”“하지만 최씨 가문 전체와 연관되잖아요.”“당신은 최씨 가문 사람도 아닌데 그걸 신경 써서 뭐 해요?”임나연은 화가 나서 몸이 다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다.질투의 불꽃이 마음속에서 활활 타오르면서 그녀의 이성을 점점 삼켜버렸다.조금 전 최연준과 최재원이 서재에서 싸울 때 그녀도 대충 들었다. 하지만 처음 보는 최연준의 다정함에 늘 차갑기만 하던 최씨 가문 셋째 도련님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최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혼약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거의 기정사실이 되었었다. 하여 그녀도 자신이 장차 최씨 가문의 손주며느리가 될 거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왜... 왜 갑자기 강서연이라는 여자가 나타난 걸까!임나연이 숨을 깊게 들이쉬며 주먹을 불끈 쥐더니 최대한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려고 애를 썼다.“도련님, 난 최씨 가문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당신을 위해서 이러는 거예요. 강서연 씨가 아직 도련님의 정체를 모른다면서요? 하지만 나중에 언젠가는 밝혀질 텐데 강서연 씨가
“아가씨, 왜 그래요?”임씨 가문의 도우미가 황급히 달려왔다. 임나연의 표정이 말이 아니게 어두운 걸 보고 도우미도 어느 정도 눈치챘다. 도우미는 외투를 그녀에게 걸쳐주며 위로를 건넸다.“아가씨, 걱정하지 말아요. 최씨 가문 회장님께서 아무 말씀이 없는 한 연준 도련님은 절대 그 여자를 데려오지 못해요...”“그럼 난 뭔데!”“그 여자는 아무런 배경도 없을 것 같은데 사람을 시켜서 몰래 알아볼까요?”조금 전 최연준의 성난 모습이 떠오른 임나연은 저도 모르게 머뭇거렸다.“아가씨, 도련님께서 찾아가지 말라고 했지, 조사하지 말라고는 안 하셨잖아요.”임나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하긴, 그 여자의 약점을 알아내야만 방법을 찾아낼 수가 있지!’...강주.어머니를 집으로 모셔간 강서연은 주방에서 바삐 움직였다.윤찬은 빠른 손놀림으로 물건들을 척척 정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지낼 안방이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그런데 구석에 놓인 상자를 본 순간 그의 호기심이 또 발동하고 말았다.어릴 적부터 이 상자는 거의 금지구역이나 다름없었다. 어머니의 병이 가장 심각할 때도 상자를 절대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안에 든 게 대체 뭘까?’윤찬이 한창 넋을 놓고 있던 그때 강서연이 들어와 웃으며 물었다.“다 정리했어?”“응, 다했어!”“밥도 다 됐어. 얼른 나와서 먹어!”윤찬이 대답하고는 윤문희를 부축하여 주방으로 걸어갔다. 윤문희는 낯선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엄마, 우리 이사한 거 몰랐죠?”윤찬이 신난 얼굴로 말했다.“전에 강유빈이 찾아와서 난리를 피우면서 우리를 내쫓겠다고 했을 때 형부가 우릴 도와줬어요.”“형부?”윤문희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얼떨떨한 얼굴로 강서연을 쳐다보았다.“너... 결혼했어?”강서연은 씩 웃으며 밥그릇을 그녀 앞에 내려놓았다.“네, 엄마. 형부 사람이 엄청 좋아요. 뭐든 다 누나 말대로 하고 저한테도 잘해줘요.”윤문희의 창백한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딸이 결혼했는데도 그녀는 혼수도
강서연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다가 그녀의 말대로 문을 닫았다. 의자에 앉아 창가 쪽 어딘가를 초점 잃은 두 눈으로 쳐다보는 그녀의 표정이 침울하고 근심이 어려있었다.“엄마...”강서연이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서연아.”윤문희는 한참이 지나서야 구석 쪽 상자로 시선을 옮겼다.“가서 저것 좀 가져와.”강서연은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면서 불안한 예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래도 윤문희의 말대로 상자를 가져왔다. 상자가 무겁지 않아 한 손으로도 쉽게 들 수 있었다. 상자 위에 정교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는데 아주 특별해 보였다.강서연도 어렸을 땐 이 상자가 무척 궁금했었다. 하지만 윤문희가 건드리지도 못하게 한 바람에 호기심을 참고 견뎠다. 오늘 이 정도로 상자와 가까이한 건 그야말로 처음이었다.상자는 구리 자물쇠로 잠가져 있었다. 지금은 이런 자물쇠를 구하고 싶어도 구하지 못할 하도 오래된 자물쇠였다.“서연아.”윤문희의 표정이 서글퍼 보였다.“난 정말 좋은 엄마가 아니야. 너한테 줄곧 짐만 되고... 네가 결혼하는 것도 보지 못했어. 이 상자는 네가 가져가. 엄마가 주는 혼수야. 하지만...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열어보지 마. 무슨 말인지 알겠어?”강서연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대체 이 상자 안에 무슨 비밀이 있는 거지?’구리 자물쇠도 무척이나 단단해 보였고 쉽게 열리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윤문희는 키에 관한 얘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 상자를 주면서 키도 주지 않았고 상자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도 얘기하지 않았다...대체 무슨 뜻일까?강서연은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윤문희는 피곤한지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그만 나가봐.”그녀가 강서연을 등지고 말했다.“엄마는 좀 더 쉴게.”강서연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의사가 어머니의 병은 충격을 절대 받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이 상자 안의 물건이 그녀를 자극할만한 물건일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하여 그녀는 지금, 이 순간 궁금증을 애써 누르며 안방을 나섰다.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