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안방에 한 사람이 더 있다는 말인데...그는 살금살금 걸어가 안방 문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임우정과 강서연이 안에서 자고 있었다.최연준은 실소를 터뜨렸다.‘혼자 있는 게 무서워서 우정 씨를 불렀나 보네. 경섭 씨는 당연히 우정 씨가 걱정돼서 뻔뻔함을 무릅쓰고 따라왔을 테고.’그는 짐을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강서연에게로 다가갔다.강서연은 임우정을 등진 채 자고 있었다. 침대가 커서 두 사람 사이에 꽤 큰 공간이 남았다. 강서연이 베개 하나를 안고 있었는데 최연준이 평소에 쓰던 베개였다.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그때 옆에 누워있던 임우정이 뒤척이면서 눈을 비볐다. 희미한 빛 사이로 강서연의 옆에 누군가가 서 있는 걸 발견했다.“으악!”임우정은 집이 떠나갈세라 비명을 질렀고 순식간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녀는 강서연을 깨우고는 최연준을 향해 달려갔다.“도둑이야, 도둑! 경섭아, 얼른 와!”최연준이 반응하기도 전에 임우정은 베개를 그에게 던지고는 강서연을 뒤로 잡아당겼다.그때 육경섭이 소리를 듣고 안방으로 뛰어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침대 머리맡 쪽에 있는 남자를 발로 걷어찼다...최연준이 앓는 소리를 냈다. 육경섭의 킥은 마침 그의 허리춤을 가격했다.“육경섭 씨, 저예요!”“네?”육경섭이 두 번째 킥을 날리려는데 그의 한마디에 그대로 굳어버렸다.두 여자는 넋이 나간 얼굴로 눈앞의 상황을 지켜보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강서연이 먼저 정신을 차렸다.“여보?”그녀는 침대에서 펄쩍 뛰어내려 등을 켰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그녀는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허리가 욱신거린 최연준은 육경섭을 매섭게 째려보았다.“제 허리를 걷어찼죠?”최연준이 이를 앙다물었다.“다쳤으면 어쩔 뻔했어요!”육경섭이 배꼽 빠지라 웃었다.“하하, 현수 씨였군요!”긴장했던 임우정도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그건 우리 섭이 탓이 아니에요. 누가, 이 어두운 밤에 거기 서서 꿈쩍도 하지 말래요?”육경섭은 임우정의
하얗게 질려버린 강서연은 그의 티셔츠를 얼른 들어 올려 상처를 확인했고 예상대로 허리부위에 상처가 선명하게 보였다.“상처가 빨개졌어요!”그녀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상처를 어루만져 주며 임우정을 돌아보았다.“우정 언니, 이것 좀 봐요! 경섭 씨가 현수 씨를 발로 차서 이렇게 빨개졌어요!”방금까지 다정다감했던 임우정이 한순간에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육경섭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그러게,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육경섭은 억울한 표정이었다. “우정아, 네가 나한테...”“너한테 뭐?”임우정은 강서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우리 서연이가 기분이 안 좋다는데! 얼른 가서 현수 씨 줄 약이나 사 와!”육경섭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임우정을 바라보며 말했다.‘방금까지 우리 섭이라더니, 지금은 우리 서연이? 그 말은 사랑보다 우정이 먼저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한동안 넋 놓고 서 있던 육경섭이 머리를 쳐들자 우쭐해하는 최연준과 눈이 마주쳤다.“그럼 수고스러운 대로 경섭 씨가 약 좀 사다 주겠어요?”...아침 6시, 육경섭이 약을 사 오면서 아침밥도 함께 챙겨왔다.그는 능숙하게 수저를 놓고는 베란다 문을 열어 최연준의 손에 약을 쥐여주며 쓴웃음을 지었다.“하, 살짝 찬 거로 엄살은! 일부러 그랬죠?”“과찬이에요, 그저 배운 대로 써먹어 봤어요.”최연준이 웃으며 말하자, 육경섭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최연준은 이 정도 작은 상처에는 약이 필요하지 않아 연고를 한쪽에 놓아두었다.강서연과 임우정은 사 온 음식을 맛있게 먹으면서 베란다에 기대있는 두 남자를 보고는 똑같은 미소를 지었다.“하, 진지한 얘기 좀 해보죠.”육경섭이 엄숙한 표정을 짓자, 멍해 있던 최연준이 물었다.“무슨 일이에요?”“그보다 먼저 담배 한 대만.”육경섭이 빨리 달라고 손짓했다.최연준은 피식 웃고는 마지못해 주머니에서 얼마 남지 않아 아껴뒀던 담배 반 갑을 꺼냈다.그가 육경섭에게 한 대를 뽑아 주자, 두 여자가 보이지 않는 베란다 구석에 숨어
그녀가 예상했던 대로 강명원은 지분반환 서류에 사인하지 않은 채 한쪽에 놓았다. 그러고는 아주 복잡미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고 강서연은 그가 어떻게 나올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긴 침묵이 흘렀다. 그제야 강명원이 머리를 들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이렇게 당장 연을 끊어야겠어?”강서연은 입술만 실쭉였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머니는 퇴원했어? 이것들을 어머니가 알려준 거야?”강명원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아니요,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은 우연히 발견한 거였어요. 그래서 오늘 이걸 돌려드리려는 거고요...”손에 땀을 쥐고 있던 그녀는 강명원의 눈치를 살폈다.강명원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었다.“이러는 이유가 뭐야?”“제가 강씨 집안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이 물건도 제 것이 아니에요.”“서연아, 오랜 세월 너한테 아버지로 살아온 나로서는 진작에 너를 친딸로 생각했어.”‘하, 정말?’강서연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그녀가 강유빈한테 괴롭힘당했을 때도, 양연한테 구박을 받았을 때도, 다른 친구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그녀만 애처롭게도...‘아버지가 필요할 때마다 어디에 있었죠?’강서연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담담하게 말했다.“어머니는 어릴 적부터 내 것이 아닌 건 욕심 내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 회사 지분이 수많은 이익과 연관이 있을 텐데, 강진에 폐 끼칠 생각은 없어요.”“이 지분은 내가 주는 거야.”강명원이 이어서 말했다.“서연아, 이 회사의 주인은 나야, 회사 지분을 누구한테 줄지는 내가 결정해!”“누구를 주든 상관없어요, 저는 안 받아요.”“서연아!”강명원의 목소리가 엄숙해졌다.강서연의 몸이 움찔함과 동시에 의구심도 더해갔다.‘억지로 돈을 주겠다는 사람이 어디 있어?’유일하게 말이 되는 해석은 그녀가 이 지분보다 더 큰 무언가를 강명원에게 가져다준다는 것이다!강서연은 심박수가 빨라지고 호흡이 가빠졌다. 강명원은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그녀가 걱정스러웠다.
뒤에서 쿵 하는 문소리가 강서연의 신경을 강타했다. 훅 고개를 들던 차, 강명원의 음산한 눈빛을 보았고 그에 더해 입가에 웃는 듯 아닌 듯한 미소를 훔친 모습을 보게 되었다.강서연은 사무실 밖으로 나왔고 로비를 나서기도 전에, 강유빈한테 뒤에서 목덜미를 잡혔다.“거기 서!”강서연이 뒤돌아서던 차에 강유빈의 손바닥이 그녀의 정면으로 날아왔다!강유빈에 대한 경계심을 놓지 않고 있던 강서연은 민첩하게 강유빈의 따귀를 피했고, 한번 허탕을 친 강유빈은 바로 반대쪽 손으로 다시 따귀를 후려치려고 시도했다. 강서연은 그녀의 손목을 힘껏 잡아 쥐었다!강유빈은 매서운 눈빛으로 강서연을 째려보았고, 강서연도 양보 없이 그녀를 밀쳐냈다. 그 바람에 주식 반환 서류가 바닥에 떨어지며 흩뿌려졌고 그중 강명원의 사인이 없는 빈자리가 너무 눈에 띄었다. 유난히 강유빈을 비꼬는 듯한 이 아이러니한 상황에 그녀는 미친 듯이 소리쳤다.그 순간 강서연의 마음은 참으로 복잡했다. 입장 바꾸어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되기도 했다. 같은 상황에서, 그녀와 윤찬이가 이복형제였다면, 어릴 때부터 윤찬이가 눈엣가시여서, 여태 놀리고 애먹이고 다 했는데, 결국 윤찬이가 남매도 아닌 남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거기다 엄마가 재산을 윤찬이한테 억지로 넘겨준다고 했으면... 그녀 역시도 아마 강유빈처럼 화가 치밀었을 것 같았다. 지금은 강진 사람이 아닌 그녀가 강유빈이 가질 재산을 빼앗은 꼴이니 정말 황당한 해프닝이 아닐 수 없었다. 강서연은 심호흡하고 강유빈한테 회사에서 이렇게 소란을 피우지 말라고 말리려고 그녀에게 한발 다가섰다. 강유빈은 갑자기 몸을 일으켜 프런트 데스크에 놓인 선인장 화분을 들더니 바로 강서연 쪽으로 내던졌다.“아!”강서연은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머리부터 감싸 안았고, 바로 그때 큰 덩치의 그림자가 달려와서 그녀를 와락 품에 안고 옆으로 몸을 돌려 선인장을 피했다. 선인장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고, 그 큰 로비에는 한순간 쥐 죽은 듯한 정적이 찾아왔다. 그 광경
“됐어요, 그만 장난쳐요.”강서연은 가볍게 거절하며 손으로 그를 껴안았다. 최연준은 웃으며 그녀의 목에 입맞춤하면서 몸에서 끓어오르는 열기를 가라앉혔다.그는 그녀가 보수적인 여자여서 안방 침대가 아닌 곳에서 잠자리하는 걸 꺼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보아하니 앞으로 많이 가르쳐야겠다...’“현수 씨, 무슨 생각 해요?”최연준은 잠깐 사색에 잠겼다 다시 정신이 돌아왔다. 그는 혀끝으로 마른 입술을 적시며 그녀를 향해 가볍게 웃었다.“지금 마음이 좀 편해졌어?”“네!”최연준은 가볍게 말을 꺼냈다.“여보. 주식 문제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강서연은 입술을 깨물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했고 최연준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깟 주식 얼마 되지 않아. 가져도 좋고 그게 싫으면 안 가져도 좋아. 너무 부담 갖지 마.”“그깟 주식?”강서연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어버렸다.“그 말, 당신 돈이 엄청 많은 사람처럼 보이잖아요. ‘그깟 주식’ 도 눈에 차지 않으니!”최연준은 웃고는 말을 하지 않았다.강서연은 그의 품에 기대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사실 나도 주식을 위해서가 아니에요... 주식을 돌려준다는 명의로 강 회장님 시험해 보려 했던 거예요.”“시험?”“아버지 태도가 이상하지 않아요?”그녀는 20년 동안 아버지라고 불러서 그런지 갑자기 호칭을 고치기가 힘들었다.“분명히 내가 자기 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나한테 기어코 주식을 주려고 하는 건, 왜일까요? 그리고 되돌아보면 우리 남매한테 애정을 주지는 않았지만, 공부하고 생활에 쓰는 비용은 그렇게 아끼지 않았어요.”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현수 씨. 남자 입장에서 보면, 자기랑 혈연도 없는 자식한테 그렇게 대해줄 것 같아요?”최연준은 잠깐 생각에 빠지더니 바로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내가 그 아이 엄마를 너무 사랑하면 그럴 수도 있을 거 같아.”“흠.”강서연은 코웃음을 쳤다.“그 사람이 우리 엄마한테 감정이 있다고요? 그건 절대 아닌 것
“그전의 적금과 재테크의 수익까지 더하면...”그녀의 눈가에서 흥분한 기색이 흘러나왔다.“현수 씨, 우리가 얼마 모았는지 맞혀봐요.”최연준은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강서연은 작은 목소리로 금액을 말한 후 흘러나오는 웃음 때문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현수 씨, 저 드디어 자동차를 선물해 줄 수 있게 됐어요.”“뭐?”최연준은 수저를 내려놓고 의아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차를 사는 거예요!”강서연은 다시 말했다.“내가 전에 평소 타고 다닐 자동차를 사주겠다고 했잖아요, 다만 그때는 돈이 부족했었어요.”최연준은 마음이 따뜻해 났다.보아하니 그녀가 전에 회사에 있을 때 영업팀 매니저로 승진하면서 월급도 배로 받았었다. 그리고 그녀가 대출을 내서 큰 집도 사고 그가 밖에 다니기 편하게 차도 사주겠다고 했었다.그녀는 그한테 쓰는 돈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최연준은 그녀의 작은 손을 잡고 지그시 바라보았다.“나에게 사줄 필요 없어, 그 돈은 어머님과 윤찬에게 써.”“두 사람 생활비는 따로 있어요.”강서연은 웃으며 말했다.“비록 어머니와 동생을 돌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수 씨도 챙겨야죠. 차를 사주겠다고 말했는데 약속은 꼭 지켜야죠.”“그럼... 전에 말했던 것처럼 나를 평생 먹여 살릴 거야?”최연준의 목소리는 조금 흔들렸다.강서연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었다.평생이라고 말했기에 하루, 한 시간, 일 분, 일 초라도 적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현수 씨, 그럼 이렇게 결정하기로 해요.”그녀는 고기를 집어 주며 말을 이었다.“주말에 우리 차 보러 가요. 아, 맞다. 우정 언니도 함께 가요. 언니가 자동차 세일 아르바이트를 해봐서 차에 대해 잘 알아요.”최연준은 그녀가 고집해 주말에 함께 차를 보러 가기로 했다.임우정이 육경섭과 함께 올 줄은 몰랐다.자동차 서비스 센터의 매니저가 육경섭을 보자 놀라서 경직되었다. 방금까지 기고만장한 모습에서 바로 알랑거리는 모습으로 변했다. 입꼬리가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형님! 허...
아주 평범한 소형 승용차였다. 배기량이 작은 덕분에 휘발유도 절약할 수 있고 크기도 적당하여 가격은 2천만 원 정도다.최상 가문 집사들조차 거들떠보지 않는 평범한 차였지만 최연준은 매우 좋아했다.차를 본 순간 두 눈이 반짝이는 강서연의 모습에 그 역시도 기분이 좋았다.“현수 씨, 어떻게 생각해요?”강서연은 다정하게 그의 팔짱을 꼈고 최연준은 웃으며 답했다.“당신이 좋아하면 됐어.”“난 엄청 괜찮은데 이건 선물이니까 현수 씨가 마음에 들어야죠!”강서연은 남자들이 차에 대해 특별한 애착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무조건 마음에 드는 거로 선물하고 싶었다.“우정 언니랑 다른 것도 많이 봤는데 이 차가 여러모로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현수 씨, 한번 시승해 볼래요?”“괜찮아.”최연준은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나도 마음에 들어. 이걸로 하자.”그의 반응에 강서연은 빙그레 웃더니 곧이어 어떤 색의 차를 선택할지 고민했다.솔직히 검은색이 멋졌지만, 평소에도 과묵한 사람이 검은색의 차를 운전하는 건 어딘가 무섭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는 흰색을 원했다.말을 이어가던 강서연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고 재잘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은 마치 한 마리의 새가 지저귀는 것 같았다.묵묵히 바라보던 최연준은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지며 미간을 찌푸렸고, 그윽한 눈빛은 한시도 그녀를 떠나지 못했다.이때 육경섭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수억에 달하는 차들이 차고에 가득할 텐데 고작 저런 2천만 원짜리가 눈에 들어와요?”최연준은 침묵을 지켰다.“신분 때문에 놀랄까 봐 이런 행동하는 거면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육경섭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을 이었다.“서연 씨는 용감하고 시야가 넓은 여장부 같은 스타일의 사람이라 고작 이런 일로 놀라지는 않을 거예요.”그는 육경섭을 힐끗 쳐다봤다.“알아요.”놀라는 건 딱히 걱정되지 않았지만, 강서연처럼 독립심이 강한 사람은 서로의 차이가 큰 결혼을 받아들이지 않을 게
“전 올 생각이 없었는데 경원이가 오자고 했어요!”유찬혁은 재빨리 거리를 두었고 최연준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배경원을 바라봤다.“형, 그게 아니라...”“새로 뽑은 차로 드라이브 가고 싶다고 했잖아!”“야!”말문이 막힌 배경원의 모습에 최연준은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쓸데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지? 서연이가 보면 어떡해!”“전...”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배경원과 달리 유찬혁은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했다.“됐어요, 형. 얘는 어릴 때부터 많이 둔했잖아요. 신경 쓰지 마요!”배경원은 할 말을 잃었다.“아참, 새로 뽑은 차 너무 이쁘네!”유찬혁은 여우처럼 교활하게 웃었다.“서연 씨 안목인 거죠?”그제야 최연준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돌았다.“서연 씨는 참 안목이 뛰어난 것 같아요. 형이 전에 운전하던 차들은 솔직히 실용성이 떨어졌는데 이건 성능이랑 스타일까지 완벽하게 형이랑 너무 잘 어울리네요!”배경원은 순간 경멸의 표정을 지었다.기분이 한결 좋아진 최연준은 드라이브 가자며 제안했고, 목적 달성한 유찬혁은 그제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실은... 할 말 있어서 찾아왔는데 조용한 곳으로 가요.”최연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 키를 가지기 위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어디 나가려고요?”최연준은 웃으며 답했다.“응... 친구들이랑 바람 좀 쐬려고.”가게에는 최연희도 있었는데 고양이처럼 구석에서 오븐을 지키고 있었고, 최연준의 말을 듣자마자 그 두 사람이 찾아왔을 거라고 확신했다.강서연은 차 키를 건네주며 물었다.“친구 누구요?”“그게...”최연준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감옥 동기!”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최연희는 하마터면 커피를 뿜을 뻔했다.“감옥 동기요?”강서연은 어리둥절했다.“저번에 돈 빌려달라고 연락 온 사람 맞아요?”“응...”“현수 씨, 그 사람들이랑 연락 끊기로 저랑 약속했잖아요?”최연희는 그가 어떻게 변명할지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역시나 남달랐다.“다들 이제 반성하고 새사람
“아줌마,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그럼, 제가 알아낸 사실을 전부 말씀드릴게요!”영미는 입가에 교만한 미소를 띠며 백인서를 차갑게 한 번 쳐다보았다.“백인서 씨의 친어머니인 백홍은 인신매매범이었다는 사실, 모두 아셨나요? 백인서 씨의 어머니는 백인서를 정대명의 집에 맡겼고... 흥! 정대명의 아내도 백홍이 납치해 왔다는 소문이 있어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잖아요. 제 생각엔... 인신매매범의 딸이라면 그런 일쯤은 익숙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은 권온유의 실종이 정말로 백인서 씨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시나요?”“영미!”강소아가 나서며 분노를 가득 담아 소리쳤다.“허위 사실을 퍼뜨리지 마!”“소유 아가씨, 억울하네요!”영미는 강소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제가 이렇게까지 조사한 건 다 아가씨를 위한 거예요! 딸도 있는 사람이 백인서를 곁에 두고도 마음이 놓이세요?”“그만해!”최지용이 크게 소리쳤다.백인서는 몸을 떨며 믿기지 않는 눈으로 최지용을 쳐다보았다.그러나 최지용의 얼굴에는 의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최지용은 굳건한 눈빛으로 뒤에 있는 백인서를 지키고 있었다.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처럼 백인서를 아끼고 있었다.백인서는 코끝이 찡해지며 본능적으로 최지용의 손을 꼭 붙잡았다. 최지용의 따스한 손은 백인서에게 큰 용기를 주었고 그 온기가 어둠의 두려움을 잊게 해주었다.최지용은 백인서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고 다시 영미를 바라볼 때는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영미야.”최지용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두 집안의 관계를 생각해서 그저 넘어가는 거야. 더 이상 선을 넘지 마.”최군형도 나서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요, 백인서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모르겠어요? 영미 아가씨, 우리 최씨 가문 사람들을 바보로 생각하는 건 아니죠?”영미는 순간 긴장했다. 최군형의 말 속엔 어딘가 숨은 뜻이 있는 듯했다.최군형의 깊고 복잡한 눈빛을 파악하기 어려웠다.표아정은 천천히 일어나 어깨에 걸친 숄을
백인서는 복잡한 눈빛으로 최지용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그때 최지용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표아정이었고 다급한 목소리로 서둘러 돌아오라고 재촉했다.최지용은 결국 어머니의 말에 따라 백인서를 데리고 최씨 집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넓은 거실에는 최군형과 강소아도 나와 있었고 모두 엄숙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백인서가 들어서자, 표아정이 백인서를 올려다보며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다.강소아는 백인서와 눈을 마주치며 단호하게 미소 지었다.백인서가 의아해하던 찰나, 영미가 천천히 밖에서 걸어 들어왔다.“아줌마, 지용 오빠. 제가 권온유의 행방을 알아냈어요.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뭐라고?”최지용이 놀라서 물었다.“네가 어떻게 아는데?”영미는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지용 오빠, 특수부대 출신이라고 정보가 우리보다 더 빠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최씨 가문은 만능이 아니에요, 최씨 가문도 모르는 정보가 있다고요.”표아정은 가볍게 기침하며 차분히 상황을 지켜보았다.최군형과 강소아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떤 일이 일어날지 주목하고 있었다.최지용의 이마에는 점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미의 눈에는 한 줄기 교만한 빛이 번졌다.영미는 오는 길에 이미 모든 계획을 짰다. 정대명의 말이 맞았다. 누구를 훔치든 상관없었다. 인신매매범의 딸인 백인서가 아이들을 해치러 다닌다는 누명을 씌우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하면 백인서는 모두의 신뢰를 잃게 될 터였다.영미는 이제 한 아이의 엄마가 된 강소아가 인신매매범을 곁에 둘 리 없다고 믿었고, 최지용 역시 이 사실을 알면 더는 백인서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래서 영미는 정대명을 배신하기로 마음먹었다.영미는 권온유를 넘기고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한패가 되어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주장할 계획이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백인서는 변명의 여지도 없이 궁지에 몰릴 것이었다!“지용 오빠.”영미는 고개를 돌려 최지용을 바라보며 한 글자씩 천천히 말했다.“권온유는 정승
“그... 괜찮아!”정승우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권온유에게 말했다. 정승우는 이곳에서 권온유를 반드시 데리고 나가겠다고 결심했다.그런데 이때, 공장 문이 “쾅” 하고 열리더니 곧바로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정승우는 재빨리 권온유에게 눈짓했고 권온유도 알아채고는 즉시 땅바닥에 쓰러져 의식이 없는 척했다.정승우는 벽에 기대어 눈을 반쯤 감았다.“이 아이인가요?”영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맞아.”정대명은 영미를 흘깃 노려보며 묵묵히 대답했다.영미는 두 걸음 앞으로 다가서서 희미한 빛 속에 있는 아이를 살펴보더니, 곧 얼굴빛이 확 변했다.“이 아이... 혹시 권씨 집안의 막내딸 아니에요?”정대명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애초에 아이를 훔쳐 올 때 이 아이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 리가 없었다.“정대명 씨.”영미가 차갑게 웃으며 돌아보았다.“제가 최씨 가문 집안 아이를 훔쳐 오라고 했지, 권씨 집안 아이를 훔치라고 했나요? 이러고도 저를 속이지 않았다고요?”“그게...”정대명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영미 아가씨, 어차피 목적은 백인서를 곤경에 빠뜨리는 거잖아? 그러니 누구를 훔쳐 오든 상관없지 않아? 아이를 훔치기만 하면 유괴범이 되는 거니까.”이 말은 영미에게만 충격을 준 게 아니었다. 정승우의 귀에도 또렷이 들어왔다.“좋아요.”영미는 깊은숨을 들이마신 뒤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이 아이는 잘 지키고 있어요, 제가 다시 연락할 테니까.”...한편, 권씨 집안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권욱은 조순영을 탓하며 아이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했고, 조순영은 오열하며 남편을 원망했다. 조순영은 권욱이 바깥에서 여자와 부적절하게 얽히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라고 했다.“헛소리하지 마! 사람들이 나한테 어떤 소문을 퍼뜨렸는지 잘 알잖아. 결혼 생활 내내 너한테 부끄러운 일 한 적 없어.”“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정말 떳떳하게 행동했다면 왜 사람들이 당신만 가만두지 않는 건데?”며칠 전까지만
권온유의 질문에 정승우는 당황했다.권온유는 커다란 눈망울로 정승우를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했던 슈퍼맨 같은 오빠가, 이제는 먹을 것 하나 구하지 못하는 모습이 되어버린 것이다.정승우는 어색하게 입가를 씰룩이며 권온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이야기를 이어갔다.“너, 정말 배고파?”“네!”권온유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 작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원래는 엄마랑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 했어요. 엄마가 특별히 고등어조림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하셨거든요... 엉엉... 엉엉...”“울지 마, 울지 마! 그냥 생선 하나 가지고...”“나 배고파!”정승우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아이와 대화하는 건 그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겨우 권온유를 달래고 나서 정승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팔을 걷어붙이며 권온유에게 내밀었다.“너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 배고프면, 여기 한번 물어볼래?”권온유는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정승우를 바라보았다.“우리 집은 가난해서 늘 먹을 게 부족했거든. 그래서 어릴 때 너무 배가 고프면 이렇게 배고픔을 달랠 만한 걸 물곤 했어.”권온유는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배고픔을 달랠 만한 것'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정승우는 웃으며 계속 설명했다.“예를 들어 쌀통 같은 거야. 한때 쌀이 들어 있던 쌀통은 비어 있어도 쌀 냄새가 남아 있거든. 그래서 쌀통 가장자리를 살짝 물면서 하얀 쌀밥을 먹는 상상하는 거야. 그러면 배가 덜 고파져.”“그리고 이웃집에서 밥하는 냄새를 맡으며 그 밥을 먹는 상상을 하는 거야. 그러면 그렇게 배고프지 않더라고.”권온유는 정승우의 이야기에 넋을 잃고 입을 벌린 채 있었다. 정승우는 웃음을 터뜨렸다.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한때 정대명이 도박과 술에 빠져 정승우를 굶겼던 시절은 그야말로 비참한 순간들이었다.잠시 후, 권온유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고 정승우는 속으로 ‘큰일이다'라고 생
영미는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최지용을 지켜보았다.최지용은 다소 초조한 기색으로 구석에 앉아 휴대전화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 전화를 걸기도 했다.영미는 바로 뒤를 따라갔고 최지용의 낮고 다급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찾았습니까?”“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세요... 만약 납치범의 목적이 돈이었다면 분명 전화를 걸어올 겁니다!”영미의 가슴이 철렁하며 내려앉았다.납치범이라니? 대체 뭘 찾는다는 거지?백인서와 통화한 걸까?그때, 최군성이 큰 소리로 외쳤다.“지용이 형, 여기서 뭐 해요?”영미는 얼른 몸을 숨겼고 최군성은 최지용에게 다가가 최지용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우리 형이 찾고 있었는데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거예요? 어서 와서 먹고 즐기자고요!”최지용은 최군성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영미와 눈이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잠시 멈칫했다.영미는 급히 시선을 피하며 억지 미소로 인사했다.“지용 오빠...”“어, 영미?”최군성도 배윤아처럼 물었다.“여기 웬일이야? 형님이 널 초대한 것 같지 않은데?”“그게...”영미는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최군성은 영미의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최지용을 끌고 가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최지용은 점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영미가 도대체 여기 왜 있는 거지? 평소에는 볼 수 없던 사람이, 왜 하필 오늘 온유가 사라진 날에 나타난 걸까?그때, 최군형과 강소아가 가원이를 품에 안고 나타났다.강소아는 아이를 보행기에 앉혔고 아이는 보행기 가장자리를 잡고 작은 발을 내디뎠다. 이 모습에 방 안의 모든 사람이 환호성을 질렀다.영미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자리를 떠 교외의 버려진 공장으로 향했다.그 시각, 정대명은 영미의 지시에 따라 승합차를 몰고 공장에 도착해 있었고 영미가 도착했을 때 그는 공장 문 앞에서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영미는 핸드백을 휘둘러 정대명에게 던졌다.“정대명 씨, 감히 날 속여
“너 따위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정대명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결국엔 자기 아들이었기에 정승우에게 감출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때리고 꾸짖어도 떠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정대명은 서랍에서 가위를 꺼내 들고는 권온유의 양 갈래머리를 단칼에 잘라냈다. 머리카락이 천천히 바닥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있다가 막아서려는 순간, 자신과 정대명 사이에 힘의 격차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작정 나섰다가는 역부족일 터였다.정승우는 이를 악물고 정대명에게 다가가 물었다.“아빠, 정말 이 아이를 팔 생각이에요?”“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영미라는 그 여자가 원하는 거야!”정대명은 불만스레 대꾸하며 정승우에게 옷장에 있는 헌 옷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정승우가 옷을 가져오자, 정대명은 손을 뻗어 권온유의 예쁜 드레스를 찢으려 했다. 정승우는 급히 소리쳤다.“뭐 하는 거예요!”“이 자식이!”정대명은 정승우를 노려보며 소리쳤다.“조용히 해! 죽고 싶어?”“아빠, 이건...”“이 애한테 옷을 갈아입히려는 거야! 이렇게 좋은 옷을 입고 있으면 바로 눈에 띄잖아.”정승우는 다가가 정대명을 옆으로 밀치며 말했다.“제가 갈아입힐게요!”“이놈이...”정대명은 하려던 말을 멈추고 피식 웃었다. 그는 정승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아하, 아빠를 도와주고 싶구나? 역시 아들은 아들밖에 없지! 그래, 네가 손이 빠르니까 빨리 옷을 갈아입혀. 둘이 함께 가자고!”정승우는 속으로 혐오감이 치밀었지만, 지금은 그저 상황을 지켜보며 대응하는 수밖에 없었다.정승우는 권온유의 드레스를 벗기지 않고, 정대명의 헌 옷을 위에 입혀 단단히 감쌌다. 그런 다음 모자를 씌워 얼핏 보면 남자아이처럼 보이게 했다.“좋아, 이 정도면 되겠어!”정대명은 정승우에게 눈짓을 보내며 말했다.“뒷문에 승합차가 준비돼 있대. 어서 출발하자!”“아빠, 이 소녀는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예요?”“교외지!”정대명은 귀찮다는 듯 말했다.“빨리 움직
권온유는 깜짝 놀라며 정대명을 멍하니 쳐다보았다.“아저씨가 맛있는 걸 가지고 왔단다. 배고프지 않니?”권온유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달아나려 했다. 정대명은 급히 권온유 앞을 가로막았다.“아니, 가지 마!”정대명은 두 손으로 권온유를 꼭 붙들며 말했다.“그게... 네 엄마가 나한테 너를 데려오라고 부탁했어!”엄마라는 말을 듣고 권온유는 잠시 멈칫했다.“정말이야, 네 엄마가 부탁한 거라니까!”정대명은 거짓말을 이어갔다.“방금 네 엄마가 갑자기 어디론가 가버렸지? 너 보고 기다리라고 했잖아?”“네... 맞아요.”“그래!”정대명은 웃으며 말했다.“그런데 네가 여기저기 막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엄마는 내가 여기 있는 걸 알 거예요. 저는 여기서 조금 놀다가 다시 휴게실로 돌아갈 거예요!”“오... 그렇구나.”정대명은 잠시 생각을 굴렸다.“아저씨가 휴게실이 어딘지 아니까, 내가 데려다줄게!”권온유는 경계하며 정대명에게서 몸을 빼내고 두 걸음 물러났다.“얘가! 난 정말로 네 엄마 친구라니까. 네가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걱정하지 않겠어? 맞지?”“자, 자! 아저씨가 데려다줄게. 착하지!”정대명은 권온유를 갑자기 붙들어 어깨에 둘러맸다. 권온유는 본능적으로 소리치려 했지만, 정대명의 손이 입을 단단히 막고 있어 소리를 낼 수 없었다.어린 소녀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른 남자를 이길 수는 없었다. 정대명은 권온유의 머리 뒤쪽을 세게 내리쳐 기절시켰고, 온유가 들고 있던 인형은 땅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익숙하게 호텔로 와서 지난번 일을 핑계로 다시 정대명에게 돈을 뜯어낼 생각이었는데, 방 안에 기절한 어린 소녀가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어른 일에 참견하지 말고 신경 꺼!”정대명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방금 정대명은 온유를 데려오며 보안과 호텔 직원의 눈을 피하고자 아이를 어깨에 메고 가지 않고, 자신의 아이인 것처럼 속여서 안
“엄마, 우리 오늘도 여기서 밥 먹어요?”“그래. 네가 제일 좋아하는 게 고등어조림 요리잖아.”“그런데...”권온유는 입을 꾹 다물고 말을 삼켰다. 사실 권온유는 집에서 밥을 먹고 싶었다.어린 권온유도 느낄 만큼 엄마는 요즘 기분이 좋지 않았다.방금 대답조차 어딘가 건성으로 들렸다.권온유는 어른들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는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는 걸까? 누군가 아빠와 다른 여자가 함께 찍힌 사진을 보내기만 하면, 엄마는 이렇게 변해버렸다.“엄마...”권온유는 엄마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당겼다. 그러나 조순영은 갑자기 권온유의 손을 놓고는 시선이 어느 한 곳에 고정되더니 초조한 표정으로 그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권온유는 깜짝 놀라 인형을 떨어뜨렸다.“엄마!”“온유야, 여기서 움직이지 말고 있어!”조순영은 급히 돌아보며 외쳤다.“엄마 금방 올게!”권온유는 엄마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홀로 서 있었다. 시야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엄마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엄마는 아빠가 다른 여자가 친밀하게 지내는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엄마는 통제력을 잃고 온유를 혼자 내버려두곤 했다. 그러고 한참 후에야 멍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오곤 했다.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던 정대명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요 며칠 동안 몇 번이나 이 모녀를 본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이 여자는 자주 아이와 함께 식사하러 왔는데 가끔 혼자 올 때도 있었다...남편의 외도를 잡으려는 걸까?맞아, 틀림없이 그런 거다!정대명은 매일 호텔에 살면서 듣는 소문도 적지 않았다. 한 회장이라는 사람은 아내와 자식이 있음에도 바람이 잦았다고 하는데 그 회장은 차기 시장의 사위가 될 인물이라는 말도 있었다.정대명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이런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차피 남자가 바깥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건 흔한 일이니까.정대명은 다시 어린 소녀를 주시했다. 소녀
정대명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얼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며칠을 기다린 결과가 고작 최가원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었다.그럼에도 영미는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왔다.“정대명 씨, 대체 뭐 하고 있는 겁니까? 대단한 것도 아니고 아이 하나 훔쳐 오는 게 그렇게 어렵나요?”젠장! 정대명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차라리 보석을 훔치는 게 더 쉬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하하... 영미 아가씨.”마음속으로는 욕하고 있었지만, 얼굴엔 여전히 웃음이 서려 있었다.“이게, 그렇게 쉽지 않네요! 제가 며칠 동안 지켜본 결과, 그 경호원들이 전부 총을 들고 있더라고요. 제가 무턱대고 나서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정말 쓸모없네요.”영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내가 사람들까지 매수해 놨는데, 일을 이따위로 하다니!”정대명은 억눌린 분노를 꾹 참고 입을 다물었다.“말해 두겠는데요!”영미는 한발 더 나아가 말했다.“이 일 못 해내면, 화려한 호텔 스위트룸도 더 이상 못 쓰게 될 테고 돈 한 푼도 못 받는 줄 아세요! 다시 그 작은 산골 마을로 돌아가서 평생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 하세요!”정대명은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호사에 길든 사람이 다시 가난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려운 법이다. 최근 정대명은 오성에서 살아가며 화려한 삶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이 잘 먹고 살게 도와줬고 돈까지도 넉넉히 주니 점점 체면이 생기기 시작했다.호텔에서 정대명이 매일 스위트룸에서 지내는 것을 본 사람들은 그를 대단한 부자로 착각했고 그에게 예의를 갖추며 인사했다.이런 삶은 초라했던 지난날에선 꿈도 꾸지 못한 것이었다.고작 아이 하나 때문에 이 모든 걸 잃기엔 너무 아까웠다.정대명은 급히 전화기를 붙잡고 외쳤다.“영미 아가씨, 너무 흥분하지 마!”영미는 냉소적인 웃음을 흘렸다.“내가...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정대명은 어영부영 답했다.“겨우 아이 하나 가지고, 뭐 대단한 일도 아니지!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