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안방에 한 사람이 더 있다는 말인데...그는 살금살금 걸어가 안방 문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임우정과 강서연이 안에서 자고 있었다.최연준은 실소를 터뜨렸다.‘혼자 있는 게 무서워서 우정 씨를 불렀나 보네. 경섭 씨는 당연히 우정 씨가 걱정돼서 뻔뻔함을 무릅쓰고 따라왔을 테고.’그는 짐을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강서연에게로 다가갔다.강서연은 임우정을 등진 채 자고 있었다. 침대가 커서 두 사람 사이에 꽤 큰 공간이 남았다. 강서연이 베개 하나를 안고 있었는데 최연준이 평소에 쓰던 베개였다.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그때 옆에 누워있던 임우정이 뒤척이면서 눈을 비볐다. 희미한 빛 사이로 강서연의 옆에 누군가가 서 있는 걸 발견했다.“으악!”임우정은 집이 떠나갈세라 비명을 질렀고 순식간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녀는 강서연을 깨우고는 최연준을 향해 달려갔다.“도둑이야, 도둑! 경섭아, 얼른 와!”최연준이 반응하기도 전에 임우정은 베개를 그에게 던지고는 강서연을 뒤로 잡아당겼다.그때 육경섭이 소리를 듣고 안방으로 뛰어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침대 머리맡 쪽에 있는 남자를 발로 걷어찼다...최연준이 앓는 소리를 냈다. 육경섭의 킥은 마침 그의 허리춤을 가격했다.“육경섭 씨, 저예요!”“네?”육경섭이 두 번째 킥을 날리려는데 그의 한마디에 그대로 굳어버렸다.두 여자는 넋이 나간 얼굴로 눈앞의 상황을 지켜보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강서연이 먼저 정신을 차렸다.“여보?”그녀는 침대에서 펄쩍 뛰어내려 등을 켰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그녀는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허리가 욱신거린 최연준은 육경섭을 매섭게 째려보았다.“제 허리를 걷어찼죠?”최연준이 이를 앙다물었다.“다쳤으면 어쩔 뻔했어요!”육경섭이 배꼽 빠지라 웃었다.“하하, 현수 씨였군요!”긴장했던 임우정도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그건 우리 섭이 탓이 아니에요. 누가, 이 어두운 밤에 거기 서서 꿈쩍도 하지 말래요?”육경섭은 임우정의
하얗게 질려버린 강서연은 그의 티셔츠를 얼른 들어 올려 상처를 확인했고 예상대로 허리부위에 상처가 선명하게 보였다.“상처가 빨개졌어요!”그녀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상처를 어루만져 주며 임우정을 돌아보았다.“우정 언니, 이것 좀 봐요! 경섭 씨가 현수 씨를 발로 차서 이렇게 빨개졌어요!”방금까지 다정다감했던 임우정이 한순간에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육경섭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그러게,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육경섭은 억울한 표정이었다. “우정아, 네가 나한테...”“너한테 뭐?”임우정은 강서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우리 서연이가 기분이 안 좋다는데! 얼른 가서 현수 씨 줄 약이나 사 와!”육경섭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임우정을 바라보며 말했다.‘방금까지 우리 섭이라더니, 지금은 우리 서연이? 그 말은 사랑보다 우정이 먼저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한동안 넋 놓고 서 있던 육경섭이 머리를 쳐들자 우쭐해하는 최연준과 눈이 마주쳤다.“그럼 수고스러운 대로 경섭 씨가 약 좀 사다 주겠어요?”...아침 6시, 육경섭이 약을 사 오면서 아침밥도 함께 챙겨왔다.그는 능숙하게 수저를 놓고는 베란다 문을 열어 최연준의 손에 약을 쥐여주며 쓴웃음을 지었다.“하, 살짝 찬 거로 엄살은! 일부러 그랬죠?”“과찬이에요, 그저 배운 대로 써먹어 봤어요.”최연준이 웃으며 말하자, 육경섭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최연준은 이 정도 작은 상처에는 약이 필요하지 않아 연고를 한쪽에 놓아두었다.강서연과 임우정은 사 온 음식을 맛있게 먹으면서 베란다에 기대있는 두 남자를 보고는 똑같은 미소를 지었다.“하, 진지한 얘기 좀 해보죠.”육경섭이 엄숙한 표정을 짓자, 멍해 있던 최연준이 물었다.“무슨 일이에요?”“그보다 먼저 담배 한 대만.”육경섭이 빨리 달라고 손짓했다.최연준은 피식 웃고는 마지못해 주머니에서 얼마 남지 않아 아껴뒀던 담배 반 갑을 꺼냈다.그가 육경섭에게 한 대를 뽑아 주자, 두 여자가 보이지 않는 베란다 구석에 숨어
그녀가 예상했던 대로 강명원은 지분반환 서류에 사인하지 않은 채 한쪽에 놓았다. 그러고는 아주 복잡미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고 강서연은 그가 어떻게 나올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긴 침묵이 흘렀다. 그제야 강명원이 머리를 들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이렇게 당장 연을 끊어야겠어?”강서연은 입술만 실쭉였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머니는 퇴원했어? 이것들을 어머니가 알려준 거야?”강명원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아니요,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은 우연히 발견한 거였어요. 그래서 오늘 이걸 돌려드리려는 거고요...”손에 땀을 쥐고 있던 그녀는 강명원의 눈치를 살폈다.강명원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었다.“이러는 이유가 뭐야?”“제가 강씨 집안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이 물건도 제 것이 아니에요.”“서연아, 오랜 세월 너한테 아버지로 살아온 나로서는 진작에 너를 친딸로 생각했어.”‘하, 정말?’강서연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그녀가 강유빈한테 괴롭힘당했을 때도, 양연한테 구박을 받았을 때도, 다른 친구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그녀만 애처롭게도...‘아버지가 필요할 때마다 어디에 있었죠?’강서연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담담하게 말했다.“어머니는 어릴 적부터 내 것이 아닌 건 욕심 내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 회사 지분이 수많은 이익과 연관이 있을 텐데, 강진에 폐 끼칠 생각은 없어요.”“이 지분은 내가 주는 거야.”강명원이 이어서 말했다.“서연아, 이 회사의 주인은 나야, 회사 지분을 누구한테 줄지는 내가 결정해!”“누구를 주든 상관없어요, 저는 안 받아요.”“서연아!”강명원의 목소리가 엄숙해졌다.강서연의 몸이 움찔함과 동시에 의구심도 더해갔다.‘억지로 돈을 주겠다는 사람이 어디 있어?’유일하게 말이 되는 해석은 그녀가 이 지분보다 더 큰 무언가를 강명원에게 가져다준다는 것이다!강서연은 심박수가 빨라지고 호흡이 가빠졌다. 강명원은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그녀가 걱정스러웠다.
뒤에서 쿵 하는 문소리가 강서연의 신경을 강타했다. 훅 고개를 들던 차, 강명원의 음산한 눈빛을 보았고 그에 더해 입가에 웃는 듯 아닌 듯한 미소를 훔친 모습을 보게 되었다.강서연은 사무실 밖으로 나왔고 로비를 나서기도 전에, 강유빈한테 뒤에서 목덜미를 잡혔다.“거기 서!”강서연이 뒤돌아서던 차에 강유빈의 손바닥이 그녀의 정면으로 날아왔다!강유빈에 대한 경계심을 놓지 않고 있던 강서연은 민첩하게 강유빈의 따귀를 피했고, 한번 허탕을 친 강유빈은 바로 반대쪽 손으로 다시 따귀를 후려치려고 시도했다. 강서연은 그녀의 손목을 힘껏 잡아 쥐었다!강유빈은 매서운 눈빛으로 강서연을 째려보았고, 강서연도 양보 없이 그녀를 밀쳐냈다. 그 바람에 주식 반환 서류가 바닥에 떨어지며 흩뿌려졌고 그중 강명원의 사인이 없는 빈자리가 너무 눈에 띄었다. 유난히 강유빈을 비꼬는 듯한 이 아이러니한 상황에 그녀는 미친 듯이 소리쳤다.그 순간 강서연의 마음은 참으로 복잡했다. 입장 바꾸어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되기도 했다. 같은 상황에서, 그녀와 윤찬이가 이복형제였다면, 어릴 때부터 윤찬이가 눈엣가시여서, 여태 놀리고 애먹이고 다 했는데, 결국 윤찬이가 남매도 아닌 남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거기다 엄마가 재산을 윤찬이한테 억지로 넘겨준다고 했으면... 그녀 역시도 아마 강유빈처럼 화가 치밀었을 것 같았다. 지금은 강진 사람이 아닌 그녀가 강유빈이 가질 재산을 빼앗은 꼴이니 정말 황당한 해프닝이 아닐 수 없었다. 강서연은 심호흡하고 강유빈한테 회사에서 이렇게 소란을 피우지 말라고 말리려고 그녀에게 한발 다가섰다. 강유빈은 갑자기 몸을 일으켜 프런트 데스크에 놓인 선인장 화분을 들더니 바로 강서연 쪽으로 내던졌다.“아!”강서연은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머리부터 감싸 안았고, 바로 그때 큰 덩치의 그림자가 달려와서 그녀를 와락 품에 안고 옆으로 몸을 돌려 선인장을 피했다. 선인장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고, 그 큰 로비에는 한순간 쥐 죽은 듯한 정적이 찾아왔다. 그 광경
“됐어요, 그만 장난쳐요.”강서연은 가볍게 거절하며 손으로 그를 껴안았다. 최연준은 웃으며 그녀의 목에 입맞춤하면서 몸에서 끓어오르는 열기를 가라앉혔다.그는 그녀가 보수적인 여자여서 안방 침대가 아닌 곳에서 잠자리하는 걸 꺼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보아하니 앞으로 많이 가르쳐야겠다...’“현수 씨, 무슨 생각 해요?”최연준은 잠깐 사색에 잠겼다 다시 정신이 돌아왔다. 그는 혀끝으로 마른 입술을 적시며 그녀를 향해 가볍게 웃었다.“지금 마음이 좀 편해졌어?”“네!”최연준은 가볍게 말을 꺼냈다.“여보. 주식 문제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강서연은 입술을 깨물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했고 최연준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깟 주식 얼마 되지 않아. 가져도 좋고 그게 싫으면 안 가져도 좋아. 너무 부담 갖지 마.”“그깟 주식?”강서연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어버렸다.“그 말, 당신 돈이 엄청 많은 사람처럼 보이잖아요. ‘그깟 주식’ 도 눈에 차지 않으니!”최연준은 웃고는 말을 하지 않았다.강서연은 그의 품에 기대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사실 나도 주식을 위해서가 아니에요... 주식을 돌려준다는 명의로 강 회장님 시험해 보려 했던 거예요.”“시험?”“아버지 태도가 이상하지 않아요?”그녀는 20년 동안 아버지라고 불러서 그런지 갑자기 호칭을 고치기가 힘들었다.“분명히 내가 자기 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나한테 기어코 주식을 주려고 하는 건, 왜일까요? 그리고 되돌아보면 우리 남매한테 애정을 주지는 않았지만, 공부하고 생활에 쓰는 비용은 그렇게 아끼지 않았어요.”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현수 씨. 남자 입장에서 보면, 자기랑 혈연도 없는 자식한테 그렇게 대해줄 것 같아요?”최연준은 잠깐 생각에 빠지더니 바로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내가 그 아이 엄마를 너무 사랑하면 그럴 수도 있을 거 같아.”“흠.”강서연은 코웃음을 쳤다.“그 사람이 우리 엄마한테 감정이 있다고요? 그건 절대 아닌 것
“그전의 적금과 재테크의 수익까지 더하면...”그녀의 눈가에서 흥분한 기색이 흘러나왔다.“현수 씨, 우리가 얼마 모았는지 맞혀봐요.”최연준은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강서연은 작은 목소리로 금액을 말한 후 흘러나오는 웃음 때문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현수 씨, 저 드디어 자동차를 선물해 줄 수 있게 됐어요.”“뭐?”최연준은 수저를 내려놓고 의아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차를 사는 거예요!”강서연은 다시 말했다.“내가 전에 평소 타고 다닐 자동차를 사주겠다고 했잖아요, 다만 그때는 돈이 부족했었어요.”최연준은 마음이 따뜻해 났다.보아하니 그녀가 전에 회사에 있을 때 영업팀 매니저로 승진하면서 월급도 배로 받았었다. 그리고 그녀가 대출을 내서 큰 집도 사고 그가 밖에 다니기 편하게 차도 사주겠다고 했었다.그녀는 그한테 쓰는 돈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최연준은 그녀의 작은 손을 잡고 지그시 바라보았다.“나에게 사줄 필요 없어, 그 돈은 어머님과 윤찬에게 써.”“두 사람 생활비는 따로 있어요.”강서연은 웃으며 말했다.“비록 어머니와 동생을 돌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수 씨도 챙겨야죠. 차를 사주겠다고 말했는데 약속은 꼭 지켜야죠.”“그럼... 전에 말했던 것처럼 나를 평생 먹여 살릴 거야?”최연준의 목소리는 조금 흔들렸다.강서연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었다.평생이라고 말했기에 하루, 한 시간, 일 분, 일 초라도 적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현수 씨, 그럼 이렇게 결정하기로 해요.”그녀는 고기를 집어 주며 말을 이었다.“주말에 우리 차 보러 가요. 아, 맞다. 우정 언니도 함께 가요. 언니가 자동차 세일 아르바이트를 해봐서 차에 대해 잘 알아요.”최연준은 그녀가 고집해 주말에 함께 차를 보러 가기로 했다.임우정이 육경섭과 함께 올 줄은 몰랐다.자동차 서비스 센터의 매니저가 육경섭을 보자 놀라서 경직되었다. 방금까지 기고만장한 모습에서 바로 알랑거리는 모습으로 변했다. 입꼬리가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형님! 허...
아주 평범한 소형 승용차였다. 배기량이 작은 덕분에 휘발유도 절약할 수 있고 크기도 적당하여 가격은 2천만 원 정도다.최상 가문 집사들조차 거들떠보지 않는 평범한 차였지만 최연준은 매우 좋아했다.차를 본 순간 두 눈이 반짝이는 강서연의 모습에 그 역시도 기분이 좋았다.“현수 씨, 어떻게 생각해요?”강서연은 다정하게 그의 팔짱을 꼈고 최연준은 웃으며 답했다.“당신이 좋아하면 됐어.”“난 엄청 괜찮은데 이건 선물이니까 현수 씨가 마음에 들어야죠!”강서연은 남자들이 차에 대해 특별한 애착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무조건 마음에 드는 거로 선물하고 싶었다.“우정 언니랑 다른 것도 많이 봤는데 이 차가 여러모로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현수 씨, 한번 시승해 볼래요?”“괜찮아.”최연준은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나도 마음에 들어. 이걸로 하자.”그의 반응에 강서연은 빙그레 웃더니 곧이어 어떤 색의 차를 선택할지 고민했다.솔직히 검은색이 멋졌지만, 평소에도 과묵한 사람이 검은색의 차를 운전하는 건 어딘가 무섭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는 흰색을 원했다.말을 이어가던 강서연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고 재잘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은 마치 한 마리의 새가 지저귀는 것 같았다.묵묵히 바라보던 최연준은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지며 미간을 찌푸렸고, 그윽한 눈빛은 한시도 그녀를 떠나지 못했다.이때 육경섭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수억에 달하는 차들이 차고에 가득할 텐데 고작 저런 2천만 원짜리가 눈에 들어와요?”최연준은 침묵을 지켰다.“신분 때문에 놀랄까 봐 이런 행동하는 거면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육경섭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을 이었다.“서연 씨는 용감하고 시야가 넓은 여장부 같은 스타일의 사람이라 고작 이런 일로 놀라지는 않을 거예요.”그는 육경섭을 힐끗 쳐다봤다.“알아요.”놀라는 건 딱히 걱정되지 않았지만, 강서연처럼 독립심이 강한 사람은 서로의 차이가 큰 결혼을 받아들이지 않을 게
“전 올 생각이 없었는데 경원이가 오자고 했어요!”유찬혁은 재빨리 거리를 두었고 최연준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배경원을 바라봤다.“형, 그게 아니라...”“새로 뽑은 차로 드라이브 가고 싶다고 했잖아!”“야!”말문이 막힌 배경원의 모습에 최연준은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쓸데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지? 서연이가 보면 어떡해!”“전...”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배경원과 달리 유찬혁은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했다.“됐어요, 형. 얘는 어릴 때부터 많이 둔했잖아요. 신경 쓰지 마요!”배경원은 할 말을 잃었다.“아참, 새로 뽑은 차 너무 이쁘네!”유찬혁은 여우처럼 교활하게 웃었다.“서연 씨 안목인 거죠?”그제야 최연준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돌았다.“서연 씨는 참 안목이 뛰어난 것 같아요. 형이 전에 운전하던 차들은 솔직히 실용성이 떨어졌는데 이건 성능이랑 스타일까지 완벽하게 형이랑 너무 잘 어울리네요!”배경원은 순간 경멸의 표정을 지었다.기분이 한결 좋아진 최연준은 드라이브 가자며 제안했고, 목적 달성한 유찬혁은 그제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실은... 할 말 있어서 찾아왔는데 조용한 곳으로 가요.”최연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 키를 가지기 위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어디 나가려고요?”최연준은 웃으며 답했다.“응... 친구들이랑 바람 좀 쐬려고.”가게에는 최연희도 있었는데 고양이처럼 구석에서 오븐을 지키고 있었고, 최연준의 말을 듣자마자 그 두 사람이 찾아왔을 거라고 확신했다.강서연은 차 키를 건네주며 물었다.“친구 누구요?”“그게...”최연준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감옥 동기!”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최연희는 하마터면 커피를 뿜을 뻔했다.“감옥 동기요?”강서연은 어리둥절했다.“저번에 돈 빌려달라고 연락 온 사람 맞아요?”“응...”“현수 씨, 그 사람들이랑 연락 끊기로 저랑 약속했잖아요?”최연희는 그가 어떻게 변명할지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역시나 남달랐다.“다들 이제 반성하고 새사람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