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연은 겁이 났지만 금세 진정하고 잠시 생각하더니 뒤돌아서서 옷장에서 자신의 옷을 꺼냈다.최연준은 그녀가 뭘 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좋은 생각이 있어요.”강서연이 속삭이듯 말했다.“현수 씨, 이걸로 갈아입혀요. 여자로 둔갑시켜서 데리고 나가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거예요!”최연준은 육경섭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여장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강서연이 침실에서 나오자 안에 있던 사람들은 재빨리 일을 처리했다. 다시 문을 열었을 때 육경섭은 이미 강서연의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육경섭이 비록 체구가 크긴 하지만 다행히 강서연의 옷이 널찍한 치마이기에 괜찮아 보였다. 강서연은 잠시 그를 바라보더니 가방에서 예쁜 머리핀을 꺼내서 그의 머리에 끼워주었다.“머리를 조금 앞으로 해서 얼굴을 가려요!”이제 그럴듯해 보였다.최연준이 희철이한테 육경섭을 부축하라고 하자 두 사람은 비틀거리며 나갔는데 자세히 보지 않으면 열애 중의 커플 같았다.“두 사람은 호텔 뒷문으로 나가요. 그쪽은 사람도 적고 감시 카메라도 없으니 안전할 거예요.”최연준이 말하면서 간단하게 그린 지도와 명함을 건넸다.“나가면 여기 병원으로 가요. 나도 금방 따라갈 거예요!”강서연이 의아해하며 최연준을 바라보았다.이 호텔은 그도 몇 번 와본 적 없을 텐데 어디에 사람이 적고 어디에 감시 카메라가 없는 건 어떻게 아는 거지?게다가 평면도까지 그려주다니, 어떻게 마치 자기 집인 것처럼 익숙할 수가 있지?“여보, 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에요.”강서연이 대답했다.“다행히 여분의 옷을 가져왔어. 당신도 빨리 갈아입어, 우리도 체크아웃하고 나가자.”“그런데 이 방에...”그녀는 찢어진 이불과 핏자국을 보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최연준은 잠시 멈칫하더니 책상 서랍에서 빨간 잉크를 꺼내 흘렸다.강서연이 의아해했다.“현수 씨, 서랍에 빨간 잉크가 있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보통 이런 스위트룸에는 다 있어. 빨강, 검정, 파란색 잉크는
“복부를 찌른 칼이 간을 찌를 뻔했습니다. 상처가 깊기는 했지만 봉합 수술을 했습니다.”강서연은 그의 말을 들으며 가슴이 떨려서 무의식중에 최연준의 손을 꼭 잡았다.“생명에 지장 없으니 이제 걱정 안 해도 됩니다. 환자는 관찰실로 옮길 건데 돌봐줄 사람이 있어야 됩니다. 만약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 제가 2차로 응급처리를 할 겁니다.”“수고했어요.”최연준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사실 육경섭을 신석훈한테 데려오기가 미안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일반 병원으로 가면 육경섭의 신분이 폭로되기 마련이고 또 일반 개인 병원으로 가기에는 거기 의사들 의술을 믿을 수가 없었다.이때 간호사가 육경섭을 병실로 데려왔다.평소 건방지고 제멋대로이던 남자가 지금은 침대 시트만큼이나 창백한 얼굴로 수많은 붕대를 온몸에 감고 조용히 누워 있었다.생명의 연약함은 한순간에 드러나는 법이다.강서연은 유리창 너머로 그를 바라보며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언제 깨어날 수 있을까요?”최연준은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팔로 감쌌다.그는 호텔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그 긴박한 상황에서 다른 여자였다면 피투성이가 된 폭력배를 안고 있는 남편을 보면 겁을 먹었을 건데 이 여인은 영리하고 침착하고 재빠르게 반응했을 뿐만 아니라 육경섭을 내보내기 위해 여자 옷을 갈아입히는 방법까지 생각해냈다.그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고 눈빛은 온화한 기쁨으로 가득했다.그런데... 바로 그녀가 너무 총명해서, 붉은 잉크로 문제를 발견했다.최연준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지면서 그녀에게 자신의 정체를 고백할 때가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현수 씨?”그녀가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물었다.“왜 그렇게 멍해 있어요?”“아무것도 아니야.”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신 의사님이 말씀하기를 누군가 여기서 돌봐줘야 한다는데... 지금 상황에서 육경섭 씨가 눈을 뜨자마자 제일 보고 싶은 사람이 우리 둘은 아닐 것 같은데요?”강서연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나도 남자라 지금 경섭 씨가 어
“왜 그래요?”최연준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이 귀한 몸이 직접 얼굴을 닦아주는데 이 죽을 표정은 뭐지?’“아무것도 아니에요.”육경섭은 입꼬리를 간신히 잡아당겼다.“상처가 꽤 깊어요. 한동안 잘 치료해야 돼요. 상처가 다시 벌어질 수 있으니 움직이지 말고요.”“여기는 어디예요?”“신석훈 씨의 병원이요.”“뭐라고요?”육경섭은 흥분한 나머지 벌떡 일어나려다가 상처를 다쳐 고통스러움에 얼굴을 찡그렸다.최연준은 그를 힐끗 보며 말했다.“다른 데로 보낼 수 없어서 그랬어요. 신석훈 씨는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요. 경섭 씨 목숨은 석훈 씨가 살려준 거예요. 고마워해야 해요.”육경섭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기억이 맞는다면...”그는 최연준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며 말했다.“최연준 씨 목숨도 그 사람이 구해준 거죠?”최연준의 얼굴이 갑자기 변하더니 눈빛이 얼음처럼 차가워지고 미간이 찌푸려졌다.“뭐라고요?”병실 안의 분위기는 영하로 떨어진 기온처럼 심하게 얼어붙었다.두 사람은 레슬링을 앞둔 두 사자처럼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았다.오랜 침묵이 흐른 뒤 육경섭이 먼저 말을 꺼냈다.“사실 저의 목숨은 최연준 씨가 살려준 거죠. 옥상에서 저를 발견하고 모른 체하지 않았잖아요. 저는 조폭이라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인간이에요. 저는 오래전에 당신이 누구인지 알았어요.”육경섭은 그의 눈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당신은 최씨 가문의 셋째 최연준이죠!”최연준은 차가운 눈길로 육경섭을 바라보며 주먹을 쥐었다.한꺼번에 많은 말을 한 육경섭은 부상 때문에 많이 피곤해 보였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계속 말을 했다.“최지한이 구현수를 찾았어요. 언제든지 최연준 씨를 죽이고 구현수로 당신을 대체하려고 할 거예요. 빨리 준비하는 게 좋을 거예요.”최연준의 눈썹이 일그러지고 눈 밑에 차가운 빛이 흘렀다.“그럼 경섭 씨도 최지한의 사람인가요?”육경섭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자기 밑에서 일해 달라고 했어
“육경섭!”최연준의 눈빛은 그늘져 있었고 몸에서는 살벌하고 위협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죽고 싶어요?”“어, 겁먹었네요?”최연준이 갑자기 손을 들어 멱살을 잡았다!육경섭은 깜짝 놀랐다. 목을 누르는 힘이 점점 커지더니 숨을 쉬기 힘들었다.“당신...”최연준의 가늘게 뜬 눈빛과 일거수일투족 사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잔인함은 육경섭이 봤던 조폭들과 다를 바 없었다.육경섭은 힘겹게 손을 들어 그의 손목을 잡으려 했다.그때 문이 열리면서 강서연이 그 광경을 보게 되였다.“현수 씨!”그녀는 깜짝 놀라며 달려와서 그의 팔을 잡았다.“뭐 하는 거예요?”최연준은 정신을 차리고 손을 풀었다.육경섭은 격렬하게 기침을 했는데 상처가 터질까 봐 제대로 크게 하지 못하면서도 최연준을 노려보았다.강서연은 병상에 누워 있는 부상당한 육경섭은 완전히 무시한 채 오로지 최연준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현수 씨, 괜찮아요?”“어머 서연 씨, 들어오면서 못 봤어요. 서연 씨 남편이 저의 목을 조였어요.”육경섭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만해요. 내 남편은 내가 알아요. 경섭 씨가 건드리지 않았다면 왜 경섭 씨 목을 조였겠어요?”강서연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방금 무슨 말로 자극했는데요? 당신 같은 사람은 구해주는 게 아니었어요.”강서연은 콧방귀를 뀌며 도시락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최연준을 위로했다.“현수 씨, 이런 사람과 화내지 말아요. 지금 다쳤으니까 한번 봐줘요.”최연준의 얼굴이 조금 풀리더니 그녀의 작은 손을 잡았다.강서연이 웃으며 계속 말했다.“현수 씨, 이 사람이 상처가 나으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어요. 우리 그때 복수해요.”“알았어. 당신 말대로 해.”최연준은 겨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강서연은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만지며 웃었다.두 사람은 칼을 맞고 병상에 누워있는 남자를 완전히 무시했다.육경섭은 어이가 없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이런... 이 정도로 감싸다니! 미친 짓이야!’“콕콕!”그는 두 번 크게 기침을 했다.최
강서연은 어이가 없었다.그녀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할 때 최연준이 침울한 얼굴로 나섰다.“제가 돌봐줄게요.”육경섭은 안색이 변하며 말했다.“아니요, 당신을 얘기한 거 아니에요...”“여기 우리 서연 씨 빼면 나밖에 더 있어요?”“이봐요, 희철이를 불러줘요.”육경섭이 말했다.“그 친구도 다쳐서 붕대 감고 있어요. 그냥 쉬게 해요.”육경섭이 말을 잇지 못했다.“괜찮아요. 제가 할게요.”최연준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강서연이 입을 가리고 킥킥거리자 육경섭은 얼굴을 찡그렸다.그녀는 도시락을 최연준에게 건네며 말했다.“현수 씨, 나 이제 가게로 돌아갈게요. 저녁밥도 가져올 거니까, 경섭 씨 잘 돌봐줘요.”최연준이 강서연과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육경섭은 처음으로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부부는 닮는다는 말이 진리라는 것을 깨달았다.강서연이 병실을 나가서 문을 닫으려고 할 때 안에서 두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아니에요. 먹여주지 않아도 돼요.”“우리 서연 씨 요리 실력을 오래전부터 궁금해했잖아요. 오늘 만족시켜 줄게요.”“나 혼자 밥 먹을 수 있어요! 이봐요, 이봐요, 아... 데어 죽일 거예요?”...육경섭은 몸 상태가 워낙 좋아서 회복이 빨랐고, 일주일 만에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최연준은 아직 육경섭을 완전히 친구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제 더 이상 적은 아니었다.육경섭이 자신의 정체를 알면서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는 적이 아니라고 확신했다.최연준은 휠체어를 밀고 육경섭을 데리고 햇볕을 쬐러 밖으로 나갔다.최연준은 햇볕을 쬐며 칼륨을 보충하라는 의사의 지시가 있었다며 육경섭을 데리고 나와서 한여름 햇볕에 땀을 뻘뻘 흘리게 했다.이것은 고의적인 것이 분명했다.육경섭은 햇빛에 눈을 뜨지 못한 채 물었다.“이봐요, 이제 돌아가죠?”최연준은 천천히 손을 들어 시계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아직 시간이 안 됐어요.”“당신...”“육경섭 씨, 만족해요. 내가 직접 데리고 나
훤칠한 비율의 소유자가 그의 눈에 들어오자, 육경섭은 저도 모르게 휠체어 손잡이를 세게 잡았다.“임우정은 왜 데리고 왔어요?”최연준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방금까지 오해가 있으면 담아두지 말고 해결해야 한다면서요.”“그건 당신한테 하는 말이었고!”육경섭이 노려보며 말했고 최연준은 쓴웃음을 짓고서는 강서연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면서 손짓했다.임우정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터벅터벅 그에게 다가왔다.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지난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안색이 어두워진 육경섭이 바로 등을 돌리려 했고, 휠체어를 움직이다가 엉겁결에 목걸이가 환자복 위로 드러났다.임우정은 뜨끔했다. 그녀의 목에 똑같은 목걸이가 걸려있었기 때문이었다.자세히 말해 목걸이가 아니라 그냥 목걸이 줄에 반지를 걸어놓은 것이었다. 반지도 비싸 보이지 않았고 목걸이 줄도 색이 다 바래져 검게 변했다.임우정은 본인이 우격다짐으로 육경섭한테 선물했던 목걸이라 기억에 남았다.16살이 되던 해, 학교 앞 편의점에서 3일 동안이나 굶어가며 모은 돈으로 반지 한 쌍을 골랐다. 설렘이란 감정을 알기 시작한 임우정에 비해 그는 너무나 숙맥이었다. 그녀를 좋아하면서도 표현 방법이 서툴러 괴롭히기 일쑤였다.임우정이 화가나 울기 직전이었어도 꿋꿋이 반지를 그의 손에 쥐어 줬었다. “이게 뭐야?”그가 얼굴이 빨개지며 물었다.“그게... 이제는 괴롭히지 말고 나한테 잘하라고!”“쳇, 이게 무슨 반지야, 은도 아니고 그냥 쇠고리네!”“육경섭, 갖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안 가진다고는 안 했어, 없기보다는 낫지! 그... 임우정!”속으로 좋아서 날뛸 것 같아도 말은 달랐다.“네가 산 반지 너무 별로라 내가 이제 큰돈 벌게 되면, 다이아몬드가 박힌 진짜 반지 사줄게!”... 임우정은 천천히 쇄골 쪽을 만지며 바지를 손에 꼭 쥐었다. 그의 부와 명예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많아졌지만, 그때의 약속을 잊은 것은 아닐까?육경섭은 두 손을 꼭 잡은 채 그녀를 등지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육경
냉담한 척하는 그의 태도, 그녀에게 솔직하지 않은 모습, 사랑을 표현하는 여러 가지 방법 중에서 그가 선택한 가장 바보 같은 방식은 그녀에게 증오로 다가왔다!육경섭은 순간 움찔하며 상처가 욱신거렸다. 땡볕 아래 오래 머물렀던 터라 기운이 빠져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최연준은 금세 다가가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무래도 상처가 덧난 탓에 상처를 감싸고 있던 붕대가 빨갛게 피로 물들여졌다. 강서연은 서둘러 간호사를 찾아 나섰다. 임우정은 당황해하며 그의 앞에 웅크려 앉아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경섭아... 왜 그래? 너... 더 심각해진 거야?”솔직히 육경섭은 이보다 더한 총상도 여러 차례 입어 본 경험이 있었기에 이 정도의 상처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임우정이 그에게 한 말과 그를 바라보는 눈빛이 육경섭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그는 어떤 말을 해야만 그녀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을지 몰랐고 용서했다 한들 그녀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다는 확신도 없었다. “경섭아!”육경섭이 대답이 없자 심각성을 느낀 임우정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강서연이 불러온 몇몇 간호사들은 서둘러 육경섭을 병실로 옮겼고 즉시 상처를 확인한 후 처치해 주었다. 처치가 진행되는 동안 임우정은 그의 손을 꼭 잡은 채 시선은 그를 향해 있었고 한시도 그의 옆을 떠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최연준과 강서연은 서로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현수 씨.”강서연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아무래도 우정 언니는 오늘 병원에 머물 것 같으니 내가 가서 생필품이랑 먹거리를 챙겨올게요. 그리고 함께 집으로 가요.”최연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서연이 나간 후 간호사가 임우정한테 물었다. “환자 보호자 되십니까?”어리둥절해하던 임우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침대에 누워있던 육경섭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간호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무더운 날씨에 환자를 땡볕에 놔두면 어떡합
강서연은 필요한 물품을 사 들고 바로 돌아왔다. 육경섭을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임우정을 보고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강서연은 임우정에게 몇 마디 당부를 전하고는 최연준을 데리고 병실을 나갔다. 마음의 짐을 덜어낸 그녀는 집으로 가는 내내 수다가 끊이질 않았다. 비록 임우정과 신석훈이 인연이 닿기를 바랐던 그녀지만 임우정이 어떤 선택을 하든 무조건 응원할 것이다!“현수 씨.”강서연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앞으로 경섭 씨와 자주 마주칠 것 같은데 지나간 일은 덮어두고 잘 지내기를 바라요!”“그래.”사실 그 둘 사이에는 아무 일이 없었다. 최연준은 복잡미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발걸음을 멈췄다.지금의 그녀는 기분이 몹시 좋아 보여서 그가 어떤 얘기를 털어놓든 다 들어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얘기를 꺼내야 할까?최연준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그녀의 맑은 눈을 바라보았다. “현수 씨, 왜 그래요?”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 당신한테 할 얘기가 있어.”강서연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맞잡고 말했다.“마침 저도 할 얘기가 있던 참이었는데!”“응? 뭔데?”그의 눈빛이 흔들렸다.“제가 신 의사님한테 가서 검사했는데...”최연준은 깜짝 놀랐다.“왜? 어디 불편해?”강서연은 부끄러워하며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저... 이번 달 안 왔어요.”최연준은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자기 귀를 의심했다. 그저 입술만 머뭇거릴 뿐 그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뭐? 뭐라고?”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당신 말은... 임신이라는 거야?!”“확실한 건 아니에요.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아서요!”강서연은 미소를 짓고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최연준은 순간 머릿속이 하얘져 자신이 할 얘기가 있다는 것도 잊은 채 파도와 같은 기쁨이 몰려와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현수 씨, 이제 내려줘요!”강서연도 너무나 기뻤으나 사람이 오가는 길거리라 민망했다. 최연준은 바보
“아줌마,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그럼, 제가 알아낸 사실을 전부 말씀드릴게요!”영미는 입가에 교만한 미소를 띠며 백인서를 차갑게 한 번 쳐다보았다.“백인서 씨의 친어머니인 백홍은 인신매매범이었다는 사실, 모두 아셨나요? 백인서 씨의 어머니는 백인서를 정대명의 집에 맡겼고... 흥! 정대명의 아내도 백홍이 납치해 왔다는 소문이 있어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잖아요. 제 생각엔... 인신매매범의 딸이라면 그런 일쯤은 익숙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은 권온유의 실종이 정말로 백인서 씨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시나요?”“영미!”강소아가 나서며 분노를 가득 담아 소리쳤다.“허위 사실을 퍼뜨리지 마!”“소유 아가씨, 억울하네요!”영미는 강소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제가 이렇게까지 조사한 건 다 아가씨를 위한 거예요! 딸도 있는 사람이 백인서를 곁에 두고도 마음이 놓이세요?”“그만해!”최지용이 크게 소리쳤다.백인서는 몸을 떨며 믿기지 않는 눈으로 최지용을 쳐다보았다.그러나 최지용의 얼굴에는 의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최지용은 굳건한 눈빛으로 뒤에 있는 백인서를 지키고 있었다.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처럼 백인서를 아끼고 있었다.백인서는 코끝이 찡해지며 본능적으로 최지용의 손을 꼭 붙잡았다. 최지용의 따스한 손은 백인서에게 큰 용기를 주었고 그 온기가 어둠의 두려움을 잊게 해주었다.최지용은 백인서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고 다시 영미를 바라볼 때는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영미야.”최지용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두 집안의 관계를 생각해서 그저 넘어가는 거야. 더 이상 선을 넘지 마.”최군형도 나서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요, 백인서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모르겠어요? 영미 아가씨, 우리 최씨 가문 사람들을 바보로 생각하는 건 아니죠?”영미는 순간 긴장했다. 최군형의 말 속엔 어딘가 숨은 뜻이 있는 듯했다.최군형의 깊고 복잡한 눈빛을 파악하기 어려웠다.표아정은 천천히 일어나 어깨에 걸친 숄을
백인서는 복잡한 눈빛으로 최지용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그때 최지용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표아정이었고 다급한 목소리로 서둘러 돌아오라고 재촉했다.최지용은 결국 어머니의 말에 따라 백인서를 데리고 최씨 집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넓은 거실에는 최군형과 강소아도 나와 있었고 모두 엄숙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백인서가 들어서자, 표아정이 백인서를 올려다보며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다.강소아는 백인서와 눈을 마주치며 단호하게 미소 지었다.백인서가 의아해하던 찰나, 영미가 천천히 밖에서 걸어 들어왔다.“아줌마, 지용 오빠. 제가 권온유의 행방을 알아냈어요.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뭐라고?”최지용이 놀라서 물었다.“네가 어떻게 아는데?”영미는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지용 오빠, 특수부대 출신이라고 정보가 우리보다 더 빠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최씨 가문은 만능이 아니에요, 최씨 가문도 모르는 정보가 있다고요.”표아정은 가볍게 기침하며 차분히 상황을 지켜보았다.최군형과 강소아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떤 일이 일어날지 주목하고 있었다.최지용의 이마에는 점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미의 눈에는 한 줄기 교만한 빛이 번졌다.영미는 오는 길에 이미 모든 계획을 짰다. 정대명의 말이 맞았다. 누구를 훔치든 상관없었다. 인신매매범의 딸인 백인서가 아이들을 해치러 다닌다는 누명을 씌우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하면 백인서는 모두의 신뢰를 잃게 될 터였다.영미는 이제 한 아이의 엄마가 된 강소아가 인신매매범을 곁에 둘 리 없다고 믿었고, 최지용 역시 이 사실을 알면 더는 백인서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래서 영미는 정대명을 배신하기로 마음먹었다.영미는 권온유를 넘기고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한패가 되어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주장할 계획이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백인서는 변명의 여지도 없이 궁지에 몰릴 것이었다!“지용 오빠.”영미는 고개를 돌려 최지용을 바라보며 한 글자씩 천천히 말했다.“권온유는 정승
“그... 괜찮아!”정승우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권온유에게 말했다. 정승우는 이곳에서 권온유를 반드시 데리고 나가겠다고 결심했다.그런데 이때, 공장 문이 “쾅” 하고 열리더니 곧바로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정승우는 재빨리 권온유에게 눈짓했고 권온유도 알아채고는 즉시 땅바닥에 쓰러져 의식이 없는 척했다.정승우는 벽에 기대어 눈을 반쯤 감았다.“이 아이인가요?”영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맞아.”정대명은 영미를 흘깃 노려보며 묵묵히 대답했다.영미는 두 걸음 앞으로 다가서서 희미한 빛 속에 있는 아이를 살펴보더니, 곧 얼굴빛이 확 변했다.“이 아이... 혹시 권씨 집안의 막내딸 아니에요?”정대명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애초에 아이를 훔쳐 올 때 이 아이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 리가 없었다.“정대명 씨.”영미가 차갑게 웃으며 돌아보았다.“제가 최씨 가문 집안 아이를 훔쳐 오라고 했지, 권씨 집안 아이를 훔치라고 했나요? 이러고도 저를 속이지 않았다고요?”“그게...”정대명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영미 아가씨, 어차피 목적은 백인서를 곤경에 빠뜨리는 거잖아? 그러니 누구를 훔쳐 오든 상관없지 않아? 아이를 훔치기만 하면 유괴범이 되는 거니까.”이 말은 영미에게만 충격을 준 게 아니었다. 정승우의 귀에도 또렷이 들어왔다.“좋아요.”영미는 깊은숨을 들이마신 뒤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이 아이는 잘 지키고 있어요, 제가 다시 연락할 테니까.”...한편, 권씨 집안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권욱은 조순영을 탓하며 아이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했고, 조순영은 오열하며 남편을 원망했다. 조순영은 권욱이 바깥에서 여자와 부적절하게 얽히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라고 했다.“헛소리하지 마! 사람들이 나한테 어떤 소문을 퍼뜨렸는지 잘 알잖아. 결혼 생활 내내 너한테 부끄러운 일 한 적 없어.”“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정말 떳떳하게 행동했다면 왜 사람들이 당신만 가만두지 않는 건데?”며칠 전까지만
권온유의 질문에 정승우는 당황했다.권온유는 커다란 눈망울로 정승우를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했던 슈퍼맨 같은 오빠가, 이제는 먹을 것 하나 구하지 못하는 모습이 되어버린 것이다.정승우는 어색하게 입가를 씰룩이며 권온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이야기를 이어갔다.“너, 정말 배고파?”“네!”권온유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 작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원래는 엄마랑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 했어요. 엄마가 특별히 고등어조림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하셨거든요... 엉엉... 엉엉...”“울지 마, 울지 마! 그냥 생선 하나 가지고...”“나 배고파!”정승우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아이와 대화하는 건 그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겨우 권온유를 달래고 나서 정승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팔을 걷어붙이며 권온유에게 내밀었다.“너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 배고프면, 여기 한번 물어볼래?”권온유는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정승우를 바라보았다.“우리 집은 가난해서 늘 먹을 게 부족했거든. 그래서 어릴 때 너무 배가 고프면 이렇게 배고픔을 달랠 만한 걸 물곤 했어.”권온유는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배고픔을 달랠 만한 것'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정승우는 웃으며 계속 설명했다.“예를 들어 쌀통 같은 거야. 한때 쌀이 들어 있던 쌀통은 비어 있어도 쌀 냄새가 남아 있거든. 그래서 쌀통 가장자리를 살짝 물면서 하얀 쌀밥을 먹는 상상하는 거야. 그러면 배가 덜 고파져.”“그리고 이웃집에서 밥하는 냄새를 맡으며 그 밥을 먹는 상상을 하는 거야. 그러면 그렇게 배고프지 않더라고.”권온유는 정승우의 이야기에 넋을 잃고 입을 벌린 채 있었다. 정승우는 웃음을 터뜨렸다.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한때 정대명이 도박과 술에 빠져 정승우를 굶겼던 시절은 그야말로 비참한 순간들이었다.잠시 후, 권온유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고 정승우는 속으로 ‘큰일이다'라고 생
영미는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최지용을 지켜보았다.최지용은 다소 초조한 기색으로 구석에 앉아 휴대전화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 전화를 걸기도 했다.영미는 바로 뒤를 따라갔고 최지용의 낮고 다급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찾았습니까?”“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세요... 만약 납치범의 목적이 돈이었다면 분명 전화를 걸어올 겁니다!”영미의 가슴이 철렁하며 내려앉았다.납치범이라니? 대체 뭘 찾는다는 거지?백인서와 통화한 걸까?그때, 최군성이 큰 소리로 외쳤다.“지용이 형, 여기서 뭐 해요?”영미는 얼른 몸을 숨겼고 최군성은 최지용에게 다가가 최지용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우리 형이 찾고 있었는데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거예요? 어서 와서 먹고 즐기자고요!”최지용은 최군성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영미와 눈이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잠시 멈칫했다.영미는 급히 시선을 피하며 억지 미소로 인사했다.“지용 오빠...”“어, 영미?”최군성도 배윤아처럼 물었다.“여기 웬일이야? 형님이 널 초대한 것 같지 않은데?”“그게...”영미는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최군성은 영미의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최지용을 끌고 가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최지용은 점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영미가 도대체 여기 왜 있는 거지? 평소에는 볼 수 없던 사람이, 왜 하필 오늘 온유가 사라진 날에 나타난 걸까?그때, 최군형과 강소아가 가원이를 품에 안고 나타났다.강소아는 아이를 보행기에 앉혔고 아이는 보행기 가장자리를 잡고 작은 발을 내디뎠다. 이 모습에 방 안의 모든 사람이 환호성을 질렀다.영미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자리를 떠 교외의 버려진 공장으로 향했다.그 시각, 정대명은 영미의 지시에 따라 승합차를 몰고 공장에 도착해 있었고 영미가 도착했을 때 그는 공장 문 앞에서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영미는 핸드백을 휘둘러 정대명에게 던졌다.“정대명 씨, 감히 날 속여
“너 따위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정대명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결국엔 자기 아들이었기에 정승우에게 감출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때리고 꾸짖어도 떠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정대명은 서랍에서 가위를 꺼내 들고는 권온유의 양 갈래머리를 단칼에 잘라냈다. 머리카락이 천천히 바닥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있다가 막아서려는 순간, 자신과 정대명 사이에 힘의 격차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작정 나섰다가는 역부족일 터였다.정승우는 이를 악물고 정대명에게 다가가 물었다.“아빠, 정말 이 아이를 팔 생각이에요?”“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영미라는 그 여자가 원하는 거야!”정대명은 불만스레 대꾸하며 정승우에게 옷장에 있는 헌 옷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정승우가 옷을 가져오자, 정대명은 손을 뻗어 권온유의 예쁜 드레스를 찢으려 했다. 정승우는 급히 소리쳤다.“뭐 하는 거예요!”“이 자식이!”정대명은 정승우를 노려보며 소리쳤다.“조용히 해! 죽고 싶어?”“아빠, 이건...”“이 애한테 옷을 갈아입히려는 거야! 이렇게 좋은 옷을 입고 있으면 바로 눈에 띄잖아.”정승우는 다가가 정대명을 옆으로 밀치며 말했다.“제가 갈아입힐게요!”“이놈이...”정대명은 하려던 말을 멈추고 피식 웃었다. 그는 정승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아하, 아빠를 도와주고 싶구나? 역시 아들은 아들밖에 없지! 그래, 네가 손이 빠르니까 빨리 옷을 갈아입혀. 둘이 함께 가자고!”정승우는 속으로 혐오감이 치밀었지만, 지금은 그저 상황을 지켜보며 대응하는 수밖에 없었다.정승우는 권온유의 드레스를 벗기지 않고, 정대명의 헌 옷을 위에 입혀 단단히 감쌌다. 그런 다음 모자를 씌워 얼핏 보면 남자아이처럼 보이게 했다.“좋아, 이 정도면 되겠어!”정대명은 정승우에게 눈짓을 보내며 말했다.“뒷문에 승합차가 준비돼 있대. 어서 출발하자!”“아빠, 이 소녀는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예요?”“교외지!”정대명은 귀찮다는 듯 말했다.“빨리 움직
권온유는 깜짝 놀라며 정대명을 멍하니 쳐다보았다.“아저씨가 맛있는 걸 가지고 왔단다. 배고프지 않니?”권온유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달아나려 했다. 정대명은 급히 권온유 앞을 가로막았다.“아니, 가지 마!”정대명은 두 손으로 권온유를 꼭 붙들며 말했다.“그게... 네 엄마가 나한테 너를 데려오라고 부탁했어!”엄마라는 말을 듣고 권온유는 잠시 멈칫했다.“정말이야, 네 엄마가 부탁한 거라니까!”정대명은 거짓말을 이어갔다.“방금 네 엄마가 갑자기 어디론가 가버렸지? 너 보고 기다리라고 했잖아?”“네... 맞아요.”“그래!”정대명은 웃으며 말했다.“그런데 네가 여기저기 막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엄마는 내가 여기 있는 걸 알 거예요. 저는 여기서 조금 놀다가 다시 휴게실로 돌아갈 거예요!”“오... 그렇구나.”정대명은 잠시 생각을 굴렸다.“아저씨가 휴게실이 어딘지 아니까, 내가 데려다줄게!”권온유는 경계하며 정대명에게서 몸을 빼내고 두 걸음 물러났다.“얘가! 난 정말로 네 엄마 친구라니까. 네가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걱정하지 않겠어? 맞지?”“자, 자! 아저씨가 데려다줄게. 착하지!”정대명은 권온유를 갑자기 붙들어 어깨에 둘러맸다. 권온유는 본능적으로 소리치려 했지만, 정대명의 손이 입을 단단히 막고 있어 소리를 낼 수 없었다.어린 소녀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른 남자를 이길 수는 없었다. 정대명은 권온유의 머리 뒤쪽을 세게 내리쳐 기절시켰고, 온유가 들고 있던 인형은 땅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익숙하게 호텔로 와서 지난번 일을 핑계로 다시 정대명에게 돈을 뜯어낼 생각이었는데, 방 안에 기절한 어린 소녀가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어른 일에 참견하지 말고 신경 꺼!”정대명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방금 정대명은 온유를 데려오며 보안과 호텔 직원의 눈을 피하고자 아이를 어깨에 메고 가지 않고, 자신의 아이인 것처럼 속여서 안
“엄마, 우리 오늘도 여기서 밥 먹어요?”“그래. 네가 제일 좋아하는 게 고등어조림 요리잖아.”“그런데...”권온유는 입을 꾹 다물고 말을 삼켰다. 사실 권온유는 집에서 밥을 먹고 싶었다.어린 권온유도 느낄 만큼 엄마는 요즘 기분이 좋지 않았다.방금 대답조차 어딘가 건성으로 들렸다.권온유는 어른들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는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는 걸까? 누군가 아빠와 다른 여자가 함께 찍힌 사진을 보내기만 하면, 엄마는 이렇게 변해버렸다.“엄마...”권온유는 엄마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당겼다. 그러나 조순영은 갑자기 권온유의 손을 놓고는 시선이 어느 한 곳에 고정되더니 초조한 표정으로 그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권온유는 깜짝 놀라 인형을 떨어뜨렸다.“엄마!”“온유야, 여기서 움직이지 말고 있어!”조순영은 급히 돌아보며 외쳤다.“엄마 금방 올게!”권온유는 엄마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홀로 서 있었다. 시야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엄마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엄마는 아빠가 다른 여자가 친밀하게 지내는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엄마는 통제력을 잃고 온유를 혼자 내버려두곤 했다. 그러고 한참 후에야 멍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오곤 했다.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던 정대명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요 며칠 동안 몇 번이나 이 모녀를 본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이 여자는 자주 아이와 함께 식사하러 왔는데 가끔 혼자 올 때도 있었다...남편의 외도를 잡으려는 걸까?맞아, 틀림없이 그런 거다!정대명은 매일 호텔에 살면서 듣는 소문도 적지 않았다. 한 회장이라는 사람은 아내와 자식이 있음에도 바람이 잦았다고 하는데 그 회장은 차기 시장의 사위가 될 인물이라는 말도 있었다.정대명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이런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차피 남자가 바깥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건 흔한 일이니까.정대명은 다시 어린 소녀를 주시했다. 소녀
정대명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얼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며칠을 기다린 결과가 고작 최가원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었다.그럼에도 영미는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왔다.“정대명 씨, 대체 뭐 하고 있는 겁니까? 대단한 것도 아니고 아이 하나 훔쳐 오는 게 그렇게 어렵나요?”젠장! 정대명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차라리 보석을 훔치는 게 더 쉬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하하... 영미 아가씨.”마음속으로는 욕하고 있었지만, 얼굴엔 여전히 웃음이 서려 있었다.“이게, 그렇게 쉽지 않네요! 제가 며칠 동안 지켜본 결과, 그 경호원들이 전부 총을 들고 있더라고요. 제가 무턱대고 나서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정말 쓸모없네요.”영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내가 사람들까지 매수해 놨는데, 일을 이따위로 하다니!”정대명은 억눌린 분노를 꾹 참고 입을 다물었다.“말해 두겠는데요!”영미는 한발 더 나아가 말했다.“이 일 못 해내면, 화려한 호텔 스위트룸도 더 이상 못 쓰게 될 테고 돈 한 푼도 못 받는 줄 아세요! 다시 그 작은 산골 마을로 돌아가서 평생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 하세요!”정대명은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호사에 길든 사람이 다시 가난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려운 법이다. 최근 정대명은 오성에서 살아가며 화려한 삶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이 잘 먹고 살게 도와줬고 돈까지도 넉넉히 주니 점점 체면이 생기기 시작했다.호텔에서 정대명이 매일 스위트룸에서 지내는 것을 본 사람들은 그를 대단한 부자로 착각했고 그에게 예의를 갖추며 인사했다.이런 삶은 초라했던 지난날에선 꿈도 꾸지 못한 것이었다.고작 아이 하나 때문에 이 모든 걸 잃기엔 너무 아까웠다.정대명은 급히 전화기를 붙잡고 외쳤다.“영미 아가씨, 너무 흥분하지 마!”영미는 냉소적인 웃음을 흘렸다.“내가...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정대명은 어영부영 답했다.“겨우 아이 하나 가지고, 뭐 대단한 일도 아니지!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