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준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부드럽게 말했다.“지금 문밖에 경찰이 있어서 안전해. 여기 꼼짝 말고 있어, 잠깐 나갔다가 금방 올게.”방금 그는 복도에서 경찰뿐만 아니라 그가 방한서한테 시켜서 강서연을 보호하기 위해 보낸 사람들도 봤었다.강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최연준한테 조심하라고 말했고 그가 나간 후에는 문 자물쇠를 다시 확인하고 안전 체인을 문에 다시 걸었다.호텔 구조에 익숙한 최연준은 인파를 쉽게 피하고 어두컴컴한 통로를 통해 꼭대기 층까지 올라갔다.그의 예상대로 희미한 불빛 사이로 계단의 핏자국이 보였다.최연준은 안색이 변하며 뛰어 올라갔다. 핏자국이 간간이 없어지자 그는 걸음을 늦추고 사방을 경계하며 허리춤에 있는 작은 권총을 만졌다.바로 그때 도움을 요청하는 낮은 소리가 들려왔다.“누구야?”최연준은 멀지 않은 곳에서 실루엣이 움직이는 것을 확인했다. 쫓아가 보니 육경섭이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었다.육경섭의 옆에는 가벼운 부상을 입은 부하가 있었는데 최연준을 보자마자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는 자세를 취했다.최연준은 그의 손목을 붙잡고 비수를 빼앗아 버렸다!“희철아, 이리 와!”육경섭이 낮게 소리쳤다.최연준은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옆에 웅크린 채 차갑고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무슨 일이에요?”육경섭의 상처에서 피가 멈추지 않았다.최연준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병원에 데려다줄게요.”“안 돼요!”희철이라는 부하가 말했다.“호텔에는 경찰들이 깔려있고 또 그놈들도 분명히 아직 호텔 밖에 잠복하고 있을 거예요. 지금 나가면 우리는 죽어요!”“그놈들?”최연준이 의아해했다.“원래 조직의 보스가 형님을 죽이려고 해요. 그 사람들이 어젯밤에 형님한테 오늘 여기서 협상하자고 했는데 약속을 지키지 않고 덫을 놓은 거예요. 비열한 놈들!”육경섭은 피를 많이 흘려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며 바닥에 쓰러져 죽어가고 있었다.최연준은 심호흡을 했다. 비록 이 녀석과 좋은 사이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육경섭이
강서연은 겁이 났지만 금세 진정하고 잠시 생각하더니 뒤돌아서서 옷장에서 자신의 옷을 꺼냈다.최연준은 그녀가 뭘 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좋은 생각이 있어요.”강서연이 속삭이듯 말했다.“현수 씨, 이걸로 갈아입혀요. 여자로 둔갑시켜서 데리고 나가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거예요!”최연준은 육경섭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여장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강서연이 침실에서 나오자 안에 있던 사람들은 재빨리 일을 처리했다. 다시 문을 열었을 때 육경섭은 이미 강서연의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육경섭이 비록 체구가 크긴 하지만 다행히 강서연의 옷이 널찍한 치마이기에 괜찮아 보였다. 강서연은 잠시 그를 바라보더니 가방에서 예쁜 머리핀을 꺼내서 그의 머리에 끼워주었다.“머리를 조금 앞으로 해서 얼굴을 가려요!”이제 그럴듯해 보였다.최연준이 희철이한테 육경섭을 부축하라고 하자 두 사람은 비틀거리며 나갔는데 자세히 보지 않으면 열애 중의 커플 같았다.“두 사람은 호텔 뒷문으로 나가요. 그쪽은 사람도 적고 감시 카메라도 없으니 안전할 거예요.”최연준이 말하면서 간단하게 그린 지도와 명함을 건넸다.“나가면 여기 병원으로 가요. 나도 금방 따라갈 거예요!”강서연이 의아해하며 최연준을 바라보았다.이 호텔은 그도 몇 번 와본 적 없을 텐데 어디에 사람이 적고 어디에 감시 카메라가 없는 건 어떻게 아는 거지?게다가 평면도까지 그려주다니, 어떻게 마치 자기 집인 것처럼 익숙할 수가 있지?“여보, 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에요.”강서연이 대답했다.“다행히 여분의 옷을 가져왔어. 당신도 빨리 갈아입어, 우리도 체크아웃하고 나가자.”“그런데 이 방에...”그녀는 찢어진 이불과 핏자국을 보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최연준은 잠시 멈칫하더니 책상 서랍에서 빨간 잉크를 꺼내 흘렸다.강서연이 의아해했다.“현수 씨, 서랍에 빨간 잉크가 있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보통 이런 스위트룸에는 다 있어. 빨강, 검정, 파란색 잉크는
“복부를 찌른 칼이 간을 찌를 뻔했습니다. 상처가 깊기는 했지만 봉합 수술을 했습니다.”강서연은 그의 말을 들으며 가슴이 떨려서 무의식중에 최연준의 손을 꼭 잡았다.“생명에 지장 없으니 이제 걱정 안 해도 됩니다. 환자는 관찰실로 옮길 건데 돌봐줄 사람이 있어야 됩니다. 만약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 제가 2차로 응급처리를 할 겁니다.”“수고했어요.”최연준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사실 육경섭을 신석훈한테 데려오기가 미안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일반 병원으로 가면 육경섭의 신분이 폭로되기 마련이고 또 일반 개인 병원으로 가기에는 거기 의사들 의술을 믿을 수가 없었다.이때 간호사가 육경섭을 병실로 데려왔다.평소 건방지고 제멋대로이던 남자가 지금은 침대 시트만큼이나 창백한 얼굴로 수많은 붕대를 온몸에 감고 조용히 누워 있었다.생명의 연약함은 한순간에 드러나는 법이다.강서연은 유리창 너머로 그를 바라보며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언제 깨어날 수 있을까요?”최연준은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팔로 감쌌다.그는 호텔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그 긴박한 상황에서 다른 여자였다면 피투성이가 된 폭력배를 안고 있는 남편을 보면 겁을 먹었을 건데 이 여인은 영리하고 침착하고 재빠르게 반응했을 뿐만 아니라 육경섭을 내보내기 위해 여자 옷을 갈아입히는 방법까지 생각해냈다.그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고 눈빛은 온화한 기쁨으로 가득했다.그런데... 바로 그녀가 너무 총명해서, 붉은 잉크로 문제를 발견했다.최연준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지면서 그녀에게 자신의 정체를 고백할 때가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현수 씨?”그녀가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물었다.“왜 그렇게 멍해 있어요?”“아무것도 아니야.”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신 의사님이 말씀하기를 누군가 여기서 돌봐줘야 한다는데... 지금 상황에서 육경섭 씨가 눈을 뜨자마자 제일 보고 싶은 사람이 우리 둘은 아닐 것 같은데요?”강서연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나도 남자라 지금 경섭 씨가 어
“왜 그래요?”최연준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이 귀한 몸이 직접 얼굴을 닦아주는데 이 죽을 표정은 뭐지?’“아무것도 아니에요.”육경섭은 입꼬리를 간신히 잡아당겼다.“상처가 꽤 깊어요. 한동안 잘 치료해야 돼요. 상처가 다시 벌어질 수 있으니 움직이지 말고요.”“여기는 어디예요?”“신석훈 씨의 병원이요.”“뭐라고요?”육경섭은 흥분한 나머지 벌떡 일어나려다가 상처를 다쳐 고통스러움에 얼굴을 찡그렸다.최연준은 그를 힐끗 보며 말했다.“다른 데로 보낼 수 없어서 그랬어요. 신석훈 씨는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요. 경섭 씨 목숨은 석훈 씨가 살려준 거예요. 고마워해야 해요.”육경섭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기억이 맞는다면...”그는 최연준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며 말했다.“최연준 씨 목숨도 그 사람이 구해준 거죠?”최연준의 얼굴이 갑자기 변하더니 눈빛이 얼음처럼 차가워지고 미간이 찌푸려졌다.“뭐라고요?”병실 안의 분위기는 영하로 떨어진 기온처럼 심하게 얼어붙었다.두 사람은 레슬링을 앞둔 두 사자처럼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았다.오랜 침묵이 흐른 뒤 육경섭이 먼저 말을 꺼냈다.“사실 저의 목숨은 최연준 씨가 살려준 거죠. 옥상에서 저를 발견하고 모른 체하지 않았잖아요. 저는 조폭이라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인간이에요. 저는 오래전에 당신이 누구인지 알았어요.”육경섭은 그의 눈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당신은 최씨 가문의 셋째 최연준이죠!”최연준은 차가운 눈길로 육경섭을 바라보며 주먹을 쥐었다.한꺼번에 많은 말을 한 육경섭은 부상 때문에 많이 피곤해 보였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계속 말을 했다.“최지한이 구현수를 찾았어요. 언제든지 최연준 씨를 죽이고 구현수로 당신을 대체하려고 할 거예요. 빨리 준비하는 게 좋을 거예요.”최연준의 눈썹이 일그러지고 눈 밑에 차가운 빛이 흘렀다.“그럼 경섭 씨도 최지한의 사람인가요?”육경섭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자기 밑에서 일해 달라고 했어
“육경섭!”최연준의 눈빛은 그늘져 있었고 몸에서는 살벌하고 위협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죽고 싶어요?”“어, 겁먹었네요?”최연준이 갑자기 손을 들어 멱살을 잡았다!육경섭은 깜짝 놀랐다. 목을 누르는 힘이 점점 커지더니 숨을 쉬기 힘들었다.“당신...”최연준의 가늘게 뜬 눈빛과 일거수일투족 사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잔인함은 육경섭이 봤던 조폭들과 다를 바 없었다.육경섭은 힘겹게 손을 들어 그의 손목을 잡으려 했다.그때 문이 열리면서 강서연이 그 광경을 보게 되였다.“현수 씨!”그녀는 깜짝 놀라며 달려와서 그의 팔을 잡았다.“뭐 하는 거예요?”최연준은 정신을 차리고 손을 풀었다.육경섭은 격렬하게 기침을 했는데 상처가 터질까 봐 제대로 크게 하지 못하면서도 최연준을 노려보았다.강서연은 병상에 누워 있는 부상당한 육경섭은 완전히 무시한 채 오로지 최연준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현수 씨, 괜찮아요?”“어머 서연 씨, 들어오면서 못 봤어요. 서연 씨 남편이 저의 목을 조였어요.”육경섭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만해요. 내 남편은 내가 알아요. 경섭 씨가 건드리지 않았다면 왜 경섭 씨 목을 조였겠어요?”강서연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방금 무슨 말로 자극했는데요? 당신 같은 사람은 구해주는 게 아니었어요.”강서연은 콧방귀를 뀌며 도시락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최연준을 위로했다.“현수 씨, 이런 사람과 화내지 말아요. 지금 다쳤으니까 한번 봐줘요.”최연준의 얼굴이 조금 풀리더니 그녀의 작은 손을 잡았다.강서연이 웃으며 계속 말했다.“현수 씨, 이 사람이 상처가 나으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어요. 우리 그때 복수해요.”“알았어. 당신 말대로 해.”최연준은 겨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강서연은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만지며 웃었다.두 사람은 칼을 맞고 병상에 누워있는 남자를 완전히 무시했다.육경섭은 어이가 없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이런... 이 정도로 감싸다니! 미친 짓이야!’“콕콕!”그는 두 번 크게 기침을 했다.최
강서연은 어이가 없었다.그녀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할 때 최연준이 침울한 얼굴로 나섰다.“제가 돌봐줄게요.”육경섭은 안색이 변하며 말했다.“아니요, 당신을 얘기한 거 아니에요...”“여기 우리 서연 씨 빼면 나밖에 더 있어요?”“이봐요, 희철이를 불러줘요.”육경섭이 말했다.“그 친구도 다쳐서 붕대 감고 있어요. 그냥 쉬게 해요.”육경섭이 말을 잇지 못했다.“괜찮아요. 제가 할게요.”최연준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강서연이 입을 가리고 킥킥거리자 육경섭은 얼굴을 찡그렸다.그녀는 도시락을 최연준에게 건네며 말했다.“현수 씨, 나 이제 가게로 돌아갈게요. 저녁밥도 가져올 거니까, 경섭 씨 잘 돌봐줘요.”최연준이 강서연과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육경섭은 처음으로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부부는 닮는다는 말이 진리라는 것을 깨달았다.강서연이 병실을 나가서 문을 닫으려고 할 때 안에서 두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아니에요. 먹여주지 않아도 돼요.”“우리 서연 씨 요리 실력을 오래전부터 궁금해했잖아요. 오늘 만족시켜 줄게요.”“나 혼자 밥 먹을 수 있어요! 이봐요, 이봐요, 아... 데어 죽일 거예요?”...육경섭은 몸 상태가 워낙 좋아서 회복이 빨랐고, 일주일 만에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최연준은 아직 육경섭을 완전히 친구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제 더 이상 적은 아니었다.육경섭이 자신의 정체를 알면서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는 적이 아니라고 확신했다.최연준은 휠체어를 밀고 육경섭을 데리고 햇볕을 쬐러 밖으로 나갔다.최연준은 햇볕을 쬐며 칼륨을 보충하라는 의사의 지시가 있었다며 육경섭을 데리고 나와서 한여름 햇볕에 땀을 뻘뻘 흘리게 했다.이것은 고의적인 것이 분명했다.육경섭은 햇빛에 눈을 뜨지 못한 채 물었다.“이봐요, 이제 돌아가죠?”최연준은 천천히 손을 들어 시계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아직 시간이 안 됐어요.”“당신...”“육경섭 씨, 만족해요. 내가 직접 데리고 나
훤칠한 비율의 소유자가 그의 눈에 들어오자, 육경섭은 저도 모르게 휠체어 손잡이를 세게 잡았다.“임우정은 왜 데리고 왔어요?”최연준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방금까지 오해가 있으면 담아두지 말고 해결해야 한다면서요.”“그건 당신한테 하는 말이었고!”육경섭이 노려보며 말했고 최연준은 쓴웃음을 짓고서는 강서연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면서 손짓했다.임우정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터벅터벅 그에게 다가왔다.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지난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안색이 어두워진 육경섭이 바로 등을 돌리려 했고, 휠체어를 움직이다가 엉겁결에 목걸이가 환자복 위로 드러났다.임우정은 뜨끔했다. 그녀의 목에 똑같은 목걸이가 걸려있었기 때문이었다.자세히 말해 목걸이가 아니라 그냥 목걸이 줄에 반지를 걸어놓은 것이었다. 반지도 비싸 보이지 않았고 목걸이 줄도 색이 다 바래져 검게 변했다.임우정은 본인이 우격다짐으로 육경섭한테 선물했던 목걸이라 기억에 남았다.16살이 되던 해, 학교 앞 편의점에서 3일 동안이나 굶어가며 모은 돈으로 반지 한 쌍을 골랐다. 설렘이란 감정을 알기 시작한 임우정에 비해 그는 너무나 숙맥이었다. 그녀를 좋아하면서도 표현 방법이 서툴러 괴롭히기 일쑤였다.임우정이 화가나 울기 직전이었어도 꿋꿋이 반지를 그의 손에 쥐어 줬었다. “이게 뭐야?”그가 얼굴이 빨개지며 물었다.“그게... 이제는 괴롭히지 말고 나한테 잘하라고!”“쳇, 이게 무슨 반지야, 은도 아니고 그냥 쇠고리네!”“육경섭, 갖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안 가진다고는 안 했어, 없기보다는 낫지! 그... 임우정!”속으로 좋아서 날뛸 것 같아도 말은 달랐다.“네가 산 반지 너무 별로라 내가 이제 큰돈 벌게 되면, 다이아몬드가 박힌 진짜 반지 사줄게!”... 임우정은 천천히 쇄골 쪽을 만지며 바지를 손에 꼭 쥐었다. 그의 부와 명예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많아졌지만, 그때의 약속을 잊은 것은 아닐까?육경섭은 두 손을 꼭 잡은 채 그녀를 등지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육경
냉담한 척하는 그의 태도, 그녀에게 솔직하지 않은 모습, 사랑을 표현하는 여러 가지 방법 중에서 그가 선택한 가장 바보 같은 방식은 그녀에게 증오로 다가왔다!육경섭은 순간 움찔하며 상처가 욱신거렸다. 땡볕 아래 오래 머물렀던 터라 기운이 빠져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최연준은 금세 다가가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무래도 상처가 덧난 탓에 상처를 감싸고 있던 붕대가 빨갛게 피로 물들여졌다. 강서연은 서둘러 간호사를 찾아 나섰다. 임우정은 당황해하며 그의 앞에 웅크려 앉아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경섭아... 왜 그래? 너... 더 심각해진 거야?”솔직히 육경섭은 이보다 더한 총상도 여러 차례 입어 본 경험이 있었기에 이 정도의 상처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임우정이 그에게 한 말과 그를 바라보는 눈빛이 육경섭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그는 어떤 말을 해야만 그녀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을지 몰랐고 용서했다 한들 그녀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다는 확신도 없었다. “경섭아!”육경섭이 대답이 없자 심각성을 느낀 임우정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강서연이 불러온 몇몇 간호사들은 서둘러 육경섭을 병실로 옮겼고 즉시 상처를 확인한 후 처치해 주었다. 처치가 진행되는 동안 임우정은 그의 손을 꼭 잡은 채 시선은 그를 향해 있었고 한시도 그의 옆을 떠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최연준과 강서연은 서로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현수 씨.”강서연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아무래도 우정 언니는 오늘 병원에 머물 것 같으니 내가 가서 생필품이랑 먹거리를 챙겨올게요. 그리고 함께 집으로 가요.”최연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서연이 나간 후 간호사가 임우정한테 물었다. “환자 보호자 되십니까?”어리둥절해하던 임우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침대에 누워있던 육경섭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간호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무더운 날씨에 환자를 땡볕에 놔두면 어떡합
“며칠 후면 생긴다고요?”송윤지는 놀란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송윤지는 이 아이가 어쩌면 이혼 가정에서 자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의 엄마가 말한 ‘며칠 후'란, 새아버지가 생긴다는 뜻으로 들렸다.송윤지는 마음이 조금 짠해졌다. 아이가 문득 왜 이렇게 조용하고 소심한지 알 것도 같았다. 입구에서부터 지금까지 말 한마디 없이 조용히 있는 모습이 왠지 더 안쓰럽게 느껴졌다.친아버지의 보호가 없는 환경 때문이겠지.이 생각에 송윤지는 아이를 향해 따뜻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그러나 그 순간, 아이는 고개를 들어 송윤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아름다운 황금빛 눈동자는 깊고 맑았지만, 그 안에는 서늘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송윤지는 본능적으로 서늘한 기운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이런 눈빛이 어린아이에게서 나왔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송 선생님?”여자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우리 아들, 정말 귀엽죠?”“아... 네.”송윤지는 정신을 차리고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정말 잘생겼고 귀여운 아이네요.”“제임스, 앞으로는 송 선생님 말씀 잘 들어야 해!”아이는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송윤지는 자신의 착각인지 몰라도 아이의 입가에서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싸늘한 미소가 살짝 번졌던 것을 본 것 같았다.“사모님.”송윤지는 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혹시 연락처를 남겨주실 수 있을까요? 제임스에게 긴급 상황이 생기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물론이죠.”여자는 자신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송윤지가 그녀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묻자, 여자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제 미래 남편의 성이 배 씨예요. 그러니 저를... 배 사모님이라고 부르시면 돼요.”“배 사모님?”송윤지는 순간 멍해졌다.뭔가 이상했다. 가슴 한가운데에 커다란 바위가 얹힌 듯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그러나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오성에만 수천만 명이 살고 있다. 배 씨 성을 가진 사람이 어찌 한 명뿐이겠는가?그냥 우연의 일치겠지
“됐어, 그만해.”배현진은 얼굴을 찌푸렸다.하지만 여자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여전히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그 여자는 키가 크고 몸매가 뛰어났으며 한겨울임에도 검은 스타킹에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짙은 화장과 물결치는 웨이브 헤어스타일은 마치 교활한 여우처럼 요염하고 도발적으로 보이게 했다.그리고 그녀가 배현진에게 몸을 기대자, 더욱 소녀 같은 매혹적인 분위기가 더해졌다.아마도 사랑받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듯, 그녀는 더욱 대담해졌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배현진을 끌어안고 키스하려 했다.배현진은 그녀를 살짝 밀어냈다. 그의 표정은 다소 난처해 보였다.“곧 기회를 만들어서 집안에 솔직하게 이야기할게.”“당신 가족이 날 받아줄까?”“걱정하지 마, 내가 있잖아. 분명히 받아들일 거야.”여자는 미소를 지으며 차 키를 흔들어 보이고 차에 올라타더니 화려하게 떠났다.임지강은 멀리서 그 광경을 응시하며 눈빛이 서늘하게 얼어붙었다.틀림없이, 분명 그 차는 배씨 가문 소유의 차량이었다.배현진은 결혼 비용조차 나누려던 사람이 아닌가?그런 그가 자신의 차를 이렇게까지 내줄 수 있단 말인가?임지강은 계속 배현진을 지켜봤다. 배현진은 집으로 올라가지 않고 몇 통의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얼마 후 또 다른 차가 와서 배현진을 태워 갔다.임지강은 차가운 목소리로 휴대전화를 꺼내 지시를 내렸다.“배씨 가문의 도련님의 최근 소비 내역을 조사해 봐.”부하가 잠시 망설이며 물었다.“사장님, 그게...”“최근 석 달만 확인하면 돼.”임지강은 전화를 끊고는 급히 집으로 올라갔다.집에 도착한 임지강은 정성껏 연고를 송윤지의 화상 부위에 발라주었다. 그리고 흉터가 남을까 봐 걱정하며 병원에 가보는 게 좋겠다고 권했다.송윤지는 웃으며 말했다.“이 정도 상처는 괜찮아요. 제가 직접 요리를 할 때도 종종 데이거든요. 제 경험으로 봤을 때, 이틀이나 삼일이면 나아요.”임지강의 가슴이 아려왔다.과거가 떠올랐다. 송윤지가 매일 집에서
송윤지는 잠시 망설이다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송윤지의 마음속에서 임지강은 이미 남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그리고 그를 향한 송윤지의 감정은 이미 친구 이상의 것으로 발전하고 있었다.임지강에게 느끼는 친숙함과 의존감은 마치 전생에서부터 이어져 온 듯한 기분이었다.“저를 친구로 생각한다면, 친구 사이에 서로 돕는 건 당연한 일이니, 부담 갖지 마세요.”임지강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만약 그래도 미안하다면... 다음에 저한테 밥 한 끼 사세요. 그러면 조금은 마음이 편하지 않겠어요?”...송윤지가 임지강을 집으로 초대한 날은 마침 입동이었다.송윤지는 샤브샤브를 준비했다. 이른 아침부터 생선, 새우, 소고기, 양고기와 신선한 채소, 버섯 등을 준비해 테이블을 진수성찬으로 채웠다.임지강은 와인 한 병을 들고 왔고 두 사람은 음식을 나누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뜨거운 샤브샤브에서 피어오르는 김처럼, 두 사람 사이에는 한겨울에도 따뜻하고 편안한 온기가 감돌았다.임지강이 송윤지에게 결혼 준비가 잘 되고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송윤지는 잠시 멈칫하더니,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지 않았다.“왜요?”임지강은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분 사이에 의견이 맞지 않나요?”송윤지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조용히 말했다.“그 사람이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어떤 걸요?”그러나 송윤지는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송윤지가 샤브샤브에 육수를 더하려고 주전자를 들다 냄비 가장자리에 손이 닿아 하얀 손등에 금세 물집이 생겼다.임지강은 깜짝 놀라 송윤지의 손을 잡고 즉시 부엌으로 데려갔다. 찬물로 손을 헹군 후,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내 손수건에 싸서 화상 부위에 대주었다.“어때요? 많이 아파요?”임지강은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로 다급했다.송윤지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런 섬세한 배려와 따스함은 약혼자가 아닌, 단지 몇 달 전 알게 된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었다.가끔 송윤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정말로 그와 알게 된 지 몇 달밖에
송윤지는 휴대전화를 꽉 쥔 채, 머릿속이 하얘졌다. 전화를 받을까 생각했지만, 막상 손가락이 수신 버튼 위에 닿자 망설이고 말았다.여자의 직감이 속삭였다. 소피아라는 사람과 배현진의 관계는 결코 평범하지 않을 거라고....그렇게 시간이 흘러 예전과 같은 일상으로 돌아왔다.송윤지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했다. 때로는 길가의 꽃집에서 꽃 한 다발을 사 들고 오기도 했고 어쩌다 마음이 내키면 퇴근 후에 먹거리 골목에서 실컷 먹거나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마음에 드는 소소한 물건을 사기도 했다.배현진은 여전히 바빴다. 너무 바빠서 송윤지를 만날 시간조차 없었고 만나더라도 겨우 얼굴만 보고 몇 마디 나누는 정도였다.게다가, 송윤지는 최근 그와 만날 때마다 전화가 울리는 일이 부쩍 잦아졌음을 느꼈다.마치 상대방이 그 시간에 맞춰 일부러 전화를 거는 것처럼 보였다. 배현진은 전화를 받을 때마다 송윤지를 피해 숨어서 받았고, 누구냐고 물으면 어물쩍 넘어가며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다.이 모든 게 송윤지에게 그날 전화 화면에 뜬 소피아와 관련이 있을 거라는 직감을 주었다.임지강은 가끔 유치원 앞에 나타나 최가원을 데리러 왔다며 송윤지와 짧은 대화를 나눴다.임지강은 자신을 억누르려 애썼지만, 오히려 그 억제는 더 드러나는 법이었다.그 사진은 여전히 임지강의 주머니에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송윤지에게 보여줘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임지강은 그저 송윤지가 행복하길 바랐다. 그런데, 자신이 송윤지에게 행복을 줄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그날, 유치원이 하교 후, 송윤지는 먼저 임지강에게 다가가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임지강은 최가원을 차에 태운 뒤, 부드러운 미소로 물었다.“무슨 일 있나요?”“네.”송윤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전화를 가리켰다.임지강이 휴대전화를 꺼내 확인하니 송윤지가 그에게 돈을 송금한 내역이 보였다.“이건...”“이번 달 월세예요.”송윤지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벌써 한 달 동안 살았잖아요. 이 정도면 충분한
“잠깐!”임지강이 마리를 붙잡았다.“말은 함부로 하지 마라!”마리는 곧 상황을 눈치채고 히죽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송윤지가 탈의실에서 걸어 나오는 순간, 마치 세상의 모든 빛이 그녀를 비추는 듯했다. 그 웨딩드레스는 눈부시게 빛났고 송윤지는 밤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우아하고 고혹적인 아름다움을 뽐냈다.이 긴소매 웨딩드레스는 전통적인 디자인을 기반으로 하여 단순하면서도 품격 있었다. 특히 가슴 부분의 약간 비치는 레이스는 절묘하게 포인트를 주어 신부의 순수함과 더불어 은은한 매력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지강이 형님, 어때요?”마리는 자신의 작품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 드레스는 얼마 전에 제가 막 디자인한 건데, 유럽의 몇몇 왕실에서도 이미 구매 문의를 한 드레스예요. 하지만 저는 말이죠, 모든 것이 인연이라고 생각해요. 웨딩드레스의 주인이라고 생각된다면, 저는 돈 한 푼 안 받고도 줄 수 있습니다. 이것 보세요.”마리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이 웨딩드레스는 스타일이 다소 보수적이긴 하지만, 송 아가씨의 기질에는 이런 은근하고 고요한 느낌이 딱 어울린다고 생각해요.”그러나 임지강은 송윤지에게 완전히 사로잡혀 마리의 말을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송윤지는 얼굴이 약간 붉어진 채 천천히 거울 앞으로 걸어가 부끄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이봐요, 지강이 형님!”마리는 손을 들어 임지강의 눈앞에서 흔들며 말했다.“평가를 좀 해보시죠!”“뭐?”임지강은 정신을 차리고 얼버무리듯 대답했다.“아, 예뻐. 정말 예뻐...”마리는 입을 삐죽 내밀며 어이없어했다. 하지만 곧 활짝 웃으며 송윤지에게 다가가 드레스의 치맛자락과 메이크업을 정돈해 주었다.임지강은 멍하니 송윤지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눈가가 뜨거워졌다.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그는 오래전 한 소녀를 떠올렸다.그 소녀는 임지강의 손을 잡고 웨딩드레스 매장 앞을 지나며 유리창 너머의 드레스를 부러운 듯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소녀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녀는 착한
임지강은 처음에는 거절하려 했지만, 입이 머리보다 빨랐다. 임지강은 바로 승낙해 버리고 말았다.“가원아,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러 가는 곳이 어디야?”“음...”최가원은 한참 고민하다가 대답했다.“남성이라는 곳이에요. 이름이 뭐더라... 아, 스튜디오였던 것 같아요!”임지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집으로 돌아온 뒤, 최가원이 어설프게 짜맞춘 주소를 토대로 검색해 본 끝에 정확한 위치를 찾아냈다. 그곳은 개인 고급 웨딩드레스 브랜드로 디자이너는 오성에서 최고로 손꼽히며 국제적으로도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인물이었다.임지강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냉소적인 생각에 잠겼다. 이런 곳을 배현진이 직접 찾았을 리 없었다. 아마도 배윤아의 뜻에 따라 이곳으로 예약한 게 틀림없었다.생활비조차 반반 나누는 남자가 이런 고급스러운 장소에 돈을 쓸 리는 없어 보였다....주말에 남성에서.배현진과 송윤지는 약속한 시간에 맞춰 웨딩드레스 매장에 도착했다. 최가원은 화려한 드레스를 처음 본 터라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꼭 궁전에서 뛰노는 작은 토끼 같았다.수석 디자이너인 마리가 두 사람을 직접 맞이했다.“두 분, 오래 기다리셨죠?”화려한 꽃무늬 두건을 두르고 긴 머리를 늘어뜨린 독특한 스타일의 디자이너가 나타나자, 송윤지는 깜짝 놀라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에헴! 저는 Mary... 아니, 마리입니다!”“제 이름의 ‘리’는 날카롭다는 뜻이지, 아름답다는 뜻이 아니에요!”송윤지는 고개를 숙이고 겨우 웃음을 참았다. 배현진이 간단히 인사를 마친 뒤, 송윤지도 한 발짝 나서서 인사를 건넸다.마리는 송윤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이분은 정말 제가 본 신부 중 가장 아름다운 신부예요! 좋아요, 우선 신부 화장을 먼저 시험해 봅시다. 신랑분은 서두르지 마시고 잠시 밖에서 대기해 주세요.”배현진은 이 모든 일이 자기와는 무관하다는 듯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그 모습을 본 송윤지는 웨딩드레스를 입으러 올 때만 해도 설렜던 마음이 한순간에
“원래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잖아.”임우정이 웃으며 강소아를 끌어당겼다.“지강아, 잘 왔어. 오늘 점심은 집에서 먹고 가. 군형이랑 소아한테 기쁜 소식이 있거든!”“뭔데요?”“나, 곧 또 외할머니가 된다니까!”임지강은 순간 멍해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강소아는 얼굴이 붉어져서 최군형의 어깨에 기대어 다정한 모습으로 안겨 있었다.“소아가 또 임신했어요.”최군형은 환한 얼굴로 말했다.“지금 딱 석 달 됐어요. 상태도 안정적이고 특별히 힘든 것도 없어서 모든 게 좋아요!”“아, 축하해.”임지강은 축하의 말을 입에 올리면서도 속으로는 생각했다.정말이지...방금 매형과 누나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나온 것도 모자라, 이번엔 이 두 사람까지. 이 집안 사람들은 도대체 언제까지 이 외로운 싱글을 괴롭히려는 건가?“와! 할아버지다!”땀에 흠뻑 젖은 최가원이 신나게 마당에서 달려 들어왔다.손에는 장난감 총을 들고는 임지강을 향해 두 번 쏘는 척했다.임지강은 맞은 척하며 소파 위로 쓰러졌고 최가원과 장난을 주고받으며 한바탕 웃음소리를 터뜨렸다.“할아버지, 우리 마당에서 놀아요!”가원이는 임지강이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손을 잡아끌어 마당으로 데려갔다.임지강은 거실의 온갖 다정함이 가득한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오히려 기뻤다.마당에서 최가원은 깡충깡충 신나게 뛰어다녔다. 하지만 뒤따르던 임지강의 표정에는 어딘가 무거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최가원이 임지강의 손을 잡아당기며 얼굴을 들어 물었다.“할아버지, 왜 저랑 안 놀아줘요?”“가원아, 우리 잠깐 앉아 있을까? 응?”“네!”최가원은 얌전히 임지강의 무릎 위에 앉았다.그리고 작은 손으로 그의 이마를 살짝 쓸어내렸다.임지강은 최가원의 행동에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너희 엄마 뱃속에 작은 아기가 있는 거 알고 있어?”“알아요!”“그럼 동생이 남자아이였으면 좋겠어, 아니면 여자아이였으면 좋겠어?”“음... 남자아이가 좋겠어요!”“왜?”“남자아이는 내가 때려도 되잖아
다음 날, 송윤지는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임지강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연결되자 송윤지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임지강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그녀를 긴장하게 했다.“송윤지 씨?”임지강은 속에서 밀려오는 기쁨을 간신히 억누르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왜 전화하셨어요?”“저... 언니 일에 대해서 들었어요.”송윤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임 대표님이 도와준 거 알아요. 정말 감사드립니다.”“아, 별거 아니에요.”임지강은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조 회장이 예전에 우리 형부랑 좀 인연이 있었거든요. 이번에 형부 대신 옛정을 나눈 셈이죠.”“임 대표님, 제가 식사 대접해도 될까요?”송윤지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지난번처럼요. 집으로 오세요. 제가 요리를 준비할게요.”임지강은 심장이 터질 듯했다.너무 기뻐서 당장이라도 아무도 없는 곳으로 달려가 소리치고 싶었다. 송윤지의 초대에 바로 좋다고 대답하고 싶었고 그 말이 혀끝까지 올라왔지만, 그는 간신히 감정을 억누르고 마음을 진정시켰다.임지강은 감정을 숨기며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괜찮아요.”송윤지는 살짝 실망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말했다.“사실... 우리 언니가 초대하고 싶어 했어요. 임 대표님이 도와준 일에 정말 고마워하고 있어요. 빚 문제뿐만 아니라 이혼까지 도와주셨잖아요...”“정말 괜찮다니까요.”임지강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제겐 별거 아닌 일이었어요. 너무 신경 쓰지 마요.”“임 대표님...”“미안하지만, 제가 지금 일이 좀 있어서, 이만 끊을게요.”전화가 끊기며 화면이 꺼지자, 송윤지의 눈빛도 함께 어두워졌다.임지강은 소파에 앉아 한참 동안 멍하니 있었다. 부하가 다가와 흔들어 깨우기 전까지 그는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 듯했다.“이 서류, 서명하실 건가요?”“아...”임지강은 정신을 차리고 서류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았다. 서명하려고 펜을 들었다. 그리고 서류의 엉뚱한 곳에 서명할 뻔했다.부하는 임지강
“윤지야.”배현진이 송윤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내 말 이해했어?”송윤지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송윤지는 배현진의 말을 이해했다.결혼 후에도 서로 독립적으로 생활하며, 각자의 삶에 간섭하지 않고 생활비도 나눠 부담하겠다는 의미였다. 또한, 가정에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도와주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돕지 않는다고 해서 잘못은 아니다.물론, 배씨 가문은 명문 가문으로 문제가 생길 일은 없을 것이다.반면, 송윤지처럼 소박한 가정에서는 골치 아픈 일이 끊이지 않는다.“현진 씨.”송윤지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결혼 전에 계약서도 작성하자는 건 아니겠지?”“어떻게 알았어?”배현진의 눈이 반짝이며 웃음을 지었다.“송윤지, 네가 드디어 내 말을 이해하기 시작했구나! 정말 너무 기뻐.”“그래... 그렇구나.”송윤지는 멍해졌다. 그저 배현진의 의도를 떠보려고 한 말이었는데 예상치 못하게 긍정적인 대답을 듣게 되었다.“결혼 전 계약서는 반드시 작성해야 해.”배현진은 단호하게 말했다.“요즘 외국에서는 젊은 부부들이 거의 다 이렇게 한다고. 나는 해외에서 오래 살면서 이런 관념에 익숙해서 결혼 전 계약서 작성하는 건 좋은 거라고 생각해. 결혼 전에 모든 걸 명확히 해두면, 나중에 이혼하게 되더라도 불필요한 갈등이나 시간 낭비를 줄일 수 있잖아. 그게 양쪽 모두에게 좋은 일이야.”“너...”송윤지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이혼까지 생각하고 결혼하는 거야?”배현진은 가볍게 웃었다.“그냥 대비하는 거야. 물론 아무도 이혼하려고 결혼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미리 준비해 두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해.”배현진이 덧붙였다.“나는 항상 미리 준비해 두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거든.”송윤지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이런 관계를 맺는 방식은 논리적으로는 틀릴 게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독립적이어야 하고 결혼한 후에도 경제적으로 각자의 경계를 명확히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하지만...만약 두 사람이 서로에게 기대지 못하고 함께 고난을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