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연은 병원에 혼자 있는 임우정이 마음에 걸려 문병 갔더니 마침 육경섭에게 밥을 떠먹여 주는 임우정을 보았다.매사에 덤벙대던 임우정인데, 국물 한 숟가락 떠먹여 주는데도 육경섭이 데일까 여러 번 불어서 식혀서 주었다.하지만 병실 침대에서 아무것도 못하는 남자가 두 날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재활치료를 받았다고 누가 믿겠는가?강서연은 갑자기 그 사람이 떠올라 웃었다.모르는 사람한테는 어두운 안색으로 ‘오지 마!’ 하는 표정을 하던 사람이었다.하지만 만났다 하면 그녀한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왔어요?”이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서연이 뒤돌아보자, 신석훈이 다가오고 있었다. 신석훈이 병실 쪽을 보고 정색하다 금세 밝은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했다.“경섭 씨가 회복이 빠르네요. 조만간 완쾌하시겠어요.”“신 의사님, 고맙습니다.”강서연이 어색해하며 말했다.처음에는 임우정과 엮어주려 했건만...“고마워 할 필요 없어요. 아픈 사람 치료해 주는 게 의사의 천직인데요.”신석훈은 웃으며 답했다.“석훈 씨는 참 좋은 의사예요.”그녀가 보기에도 이 말은 빈말 같았다.하지만 그러지 않으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손수 라이벌을 치료한 것도 모자라 좋아하는 사람한테 보냈었다. 그는 골치 아플 정도로 좋은 사람이라 항상 남을 치료만 했지, 정작 자신의 상처는 봐주는 사람이 없었다.“사실... 나도 우정 씨가 좋아하는 사람 곁에 있는 걸 원해요.”그가 웃으며 병실을 쳐다보았지만, 눈에는 미련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우정 씨가 경섭 씨 곁에 있을 때만 더없이 환하게 웃는 것 같아요.”신석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석훈 씨...”강서연의 마음은 복잡미묘했다.“석훈 씨가 좋은 사람인데 꼭 좋은 일이 생길 거예요.”“허, 나한테는 원래 좋은 일만 있었어요!”신석훈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저는 어릴 적부터 부모님이 제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줬어요. 집이 그렇게 부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부족함 없이 컸고 덕분에 의
강서연은 더욱 의구심이 들었다.“혼인 증명서로 뭐하게요?”최연준은 순간 입술이 마르고 목이 메어 무슨 변명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는 강서연이 집에 없는 틈을 타 혼인 증명서를 찾아냈다. 아니나 다를까 위의 이름은 구현수였다... 강서연이 강유빈 대신 시집을 갈 때, 강씨 집안에서는 인맥을 이용해서 구현수의 민증을 사용했었다.애초에 강서연한테 이렇게 빠질 줄 알았더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직접 혼인신고 하러 갔을 최연준이었다. 이름 고치려면 좀 힘들겠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고 유찬혁이 그에게 알려줬었다.하지만 최연준이 혼인 증명서를 챙겨 가려 할 때 마침 강서연한테 들켜 버렸다.“현수 씨, 왜 그래요?”그가 넋을 놓고 있자 내심 걱정되었다.“현수 씨... 혼인 증명서 찾자고 집을 이렇게 어지럽혔다고요? 뭐하게요?”최연준은 억지로 입을 삐죽거리며 한참 동안 뜸 들이다 입을 열었다.“그냥... 찾아보느라.”“뭐 볼 거 있다고요?”눈이 휘둥그레진 강서연은 어떠한 표정도 지을 수 없었다. 그러고는 그의 손에서 혼인 증명서를 가져와 서랍에 넣었다.최연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마치 잘못이라도 저지른 아이처럼 멍하니 그녀 앞에 서 있는 최연준이다. 큰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그녀 앞에서 그가 고개를 숙이고 말을 아낄 때마다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강서연은 어이없는 듯 웃어 보이며 작은 두 손으로 그의 볼을 감싸고는 맑은 눈으로 그를 그윽하게 쳐다보았다. “현수 씨, 오늘 좀 이상한데. 요즘 힘든 일 있었어요?”
“혹시 모르잖아요! 진짜 아기가 생긴다면 아이를 위해서도 생각해 봐야죠. 그렇지만 이 보험은 내가 현수 씨한테 들어주고 싶은 거예요.”그녀는 아랫배를 어루만지며 그를 향해 따뜻하게 웃어 보였고 그의 손을 잡으며 부드러움이 섞인 확고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세상은 온통 눈앞의 남자였다. “현수 씨... 나, 임신은 처음이라 긴장이 되긴 해서 며칠 맘카페 같은 데서 정보를 많이 찾아봤어요. 진짜 게시글처럼 만에 하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난...”최연준은 안색이 어두워서는 진지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서연아,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그럴 일 없을 거야!”강서연은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그게 아니라, 내 말은 만약에, 만약에 급한 상황이 생기면 이 돈을 꺼내라는 거죠.”“만약은 없어! 그럴 일도 없을 거고!”최연준은 중저음으로 그녀를 혼내듯 말했고, 그의 화난 표정에 강서연도 꽤 놀란 눈치였다. 그녀는 멍하니 그를 보았고 심장이 쿵쾅 뛰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깔끔하게 보험 서류를 갈기갈기 찢어버렸고 순간 공기는 싸해졌다. 최연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서운 분위기에 강서연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을 쳤다.“현수 씨...”최연준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고 본인이 놀라게 했다는 생각에 그녀를 품에 와락 안고는 미안해하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당신한테 화를 낸 게 아니야. 단지 그럴 일 없을 것이라는 걸 말해 주고 싶었을 뿐이야. 당신한테 일이 생겨도 난... 아이보단 당신이 먼저야.”최연준은 강단 있는 눈빛을 하고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토해냈다. 강서연은 마음 한편이 뭉클했고 코끝이 시큰거렸다.“현수 씨 바보,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아요! 우리 둘의 결실인데, 어찌 그래요.”“아니!”최연준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했고 강서연은 피식 웃어 보였다. 그녀는 얇은 손으로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큰 눈망울은 별빛처럼 빛이 뿜어졌다. 그의 표정과 모습은 꽤 엄숙하고 진지해서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겁을 먹었을 건데, 강서연은 그가 긴장
“서연 씨, 워낙 몸이 약하고 해서 보기 드문 케이스긴 한데, 상상임신이에요. 하지만큰 문제는 없어요. 몸조리 잘하고 준비하면 언제든 아이를 가질 수 있어요.”“그리고 내가 확인한 또 다른 사실이...”신석훈은 또 다른 검사 결과 하나를 꺼내 보였다. 그 위에는 강명원이란 이름이 적혀있었다.“이 일은 내가 서연 씨한테 사과부터 할게요. 강명원 회장도 여기서 건강검진을 받았었어요. 저의 병원 인턴들이 실습 과정에서 일부 혈액 샘플을 갖고 본인들 실험 과제로 빼돌려서 감정을 했더라고요. 그중에 서연 씨 그리고 강 회장님 혈액 샘플이 포함되어 있었어요. 사실 이건 병원 규정을 위반한 행동이라 관련 인턴들도 병원 처벌을 받았고요.”“그런데 오늘 내가 그 감정 보고를 보게 되었고, 혈액결과상... 두 분이 혈연관계가 전혀 아님을 확인했어요!”충격적인 소식에 강서연은 머리가 텅 빈 것 같았고 귀가 멍해졌다....최연준은 병원에서 오가는 사람 중에 그녀의 모습을 애타게 찾으며 병원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그러다 눈을 돌려보니 신석훈이 사무실에서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보았다.“서연이는요?”“간호사한테 부탁해서 휴게실로 보냈어요.”“도대체 무슨 일이에요?”최연준은 마음이 조급했고 급히 달려왔던 터라 코끝까지 땀이 찼다. 신석훈은 전후 앞뒤사정을 간단하게 설명해 줬고 최연준도 듣고 너무 놀라 한참 정신을 못 차렸다..“잘못된 것 아니고요?”“저도 처음엔 샘플도 많고 해서 인턴들이 진행할 때 잘못해서 샘플이 섞이거나 했을 수 있어서 일부러 제가 다시 감정을 했어요. 직접 했고요. 같은 결과예요.”신석훈은 침착하게 답을 했다.최연준의 미간이 심히 찌푸려졌다.“혈액 샘플의 라벨이 잘못...”“혈액 샘플은 피를 뽑고 바로 라벨이 붙여지고, 또 전담자가 책임지고 보관해요.”그렇다는 의미는 혈액 샘플이 잘못될 경우는 없다는 것이고, 또 감정을 신석훈이 직접했으니, 결과 역시 오류일 수 없었다.“그래서... 서연이가 강명원의 친딸 아닌 거예요?”신석훈은 고
‘이런 사실을 강 회장이 정말로 모를까? 예전에 양연 아줌마가 주워온 자식이라고 욕하고 모질게 굴었던 게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말 안 가리고 한 게 아니라, 근거가 있고 뭐를 알고 얘기했다는 건가? 그러면 윤찬이랑 나의 아버지는 누구라는 건가?’강서연은 수많은 생각에 머릿속이 어지럽고 가슴은 뭐가 막힌 것 마냥 답답하고 숨쉬기조차 가빴다. 최연준은 그녀 앞에 꿇어앉아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어루만졌다.그는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여보, 이제 집에 가자.”“난...”“다 이해해. 당신 지금 기분이 이상한 것도 심경이 복잡한 것도 알지만, 이런 일은 시간이 필요해. 우리 같이 천천히 알아보자고.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옆에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응?”강서연은 최연준의 눈을 바라보았고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그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아줬고 그녀는 뭔가 든든했다. 집에 돌아온 강서연의 시야에 든 건 식탁 위에 널려 있는 육아 잡지와 맘 카페 글이 켜져 있는 컴퓨터였다.모두 최연준이 최근 밤새 익히던 육아 정보였다.그는 보기만 한 게 아니라 임산부 주의 사항까지 꼼꼼하게 메모했다. 거기에는 초보 아빠가 뭘 해야 하는지, 산후 우울증을 어떻게 해소하고 도울 건지 등등도 같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작은 침실에는 아이 용품과 임산부 용품이 쌓여 있었다.강서연은 코끝이 시큰거렸고 눈가가 저절로 촉촉해져서 고개를 떨구고 아무 말도 없었다. 최연준은 그녀를 가볍게 껴안고 묵묵히 감정에 휩싸인 그녀를 토닥였다.한참 있다가 강서연이 겨우 한마디를 뱉어냈다.“현수 씨, 이럴 줄 알았으면 너무 일찍 기뻐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정확하게 확인하고나서 현수 씨한테 알려줘야 했는데. 미안해요, 헛물켜게해서...”최연준이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거 아니야. 괜찮아, 이 물건들은 놔두면 나중에 다 쓸 거야.”“신 의사님이 내가 워낙 몸이 약해서 임신 할 수는 있지만 확율이 보통보다 낮다고 그랬어요.”최연준은 진지하게
강서연이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최연희가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언니, 오랜만이에요. 저 안 보고 싶었어요?”강서연이 웃으며 그녀의 코끝을 톡 쳤다.“당연히 보고 싶었죠. 옆에서 재잘거리는 연희 양의 없으니까 얼마나 지루한지 몰라요.”최연희가 눈웃음을 지었다.강서연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그녀 뒤에 서 있는 중년 여인에게로 향했다. 관리를 잘한 듯해 보였으나 웨이브 단발머리에 명품으로 도배된 옷차림과 에르메스 한정판 가방을 들고 있어 그런지... 왠지 조금 우스꽝스럽기도 했다.“콜록콜록!”중년 여인이 마른기침을 두어 번 하자 최연희는 재빨리 그녀를 강서연에게 소개했다.“언니, 이분은 저희 엄마예요. 절 보러 특별히 강주로 오셨어요!”강서연이 화들짝 놀랐다.‘이분이 바로 최씨 가문 사모님이시구나. 최씨 가문이 재벌이긴 하지만 명품으로 도배할 만큼 허세를 부리길 좋아하는 가문 같지는 않던데...’강서연은 혹시라도 예의 없어 보일까 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엄마.”최연희가 혀를 날름 내밀었다.“여긴 강서연 언니예요. 강주에서 저랑 가장 친한 친구예요!”은미연이 선글라스를 벗고 그녀를 아래위로 자세히 살폈다.‘얘가 바로 강서연이구나. 연준이 혼을 쏙 빼놓고 강주에서 신분을 숨긴 채 좋은 남편으로 살게 만든 그 강서연.’은미연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특별한 건 없어 보이는데? 피부가 하얗고 여리여리한 게 나름 순진해 보여. 이목구비도 이 정도면 꽤 괜찮고. 그런데 예전에 연준이 옆에 있던 여자들이랑은 완전히 다르네. 연준이가 이런 애한테 빠질 줄은 몰랐어!’“엄마!”최연희가 팔로 그녀를 툭툭 치며 눈치를 줬다.“사람을 너무 빤히 쳐다보지 말아요.”“아... 알았어!”은미연도 그제야 정신을 가다듬고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정말 예쁘네요, 서연 씨. 이 가게도 너무 아기자기하게 잘 꾸몄어요. 딱 봐도 서연 씨는 참 능력 있는 여자 같아요!”강서연은 민망한 듯 웃어 보이고는 은미연에게 자리를 안내했다.그들은 마
“그래, 알았어.”최연준이 무덤덤하게 대답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최연희는 은미연과 눈빛을 주고받고는 강서연에게 말했다.“언니,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강서연이 멈칫한 사이 은미연은 그녀를 잡고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커피도 만들 수 없게 되었으니 그녀도 차라리 마당에 앉아 은미연과 함께 웃으며 얘기를 나누었다.최연희는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쩍 벌어진 어깨로 카운터 뒤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최연준을 발견했다. 그녀가 살며시 다가가자 최연준이 갑자기 고개를 홱 돌리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가슴이 움찔한 최연희는 웃을 듯 말 듯 한 얼굴로 말했다.“오빠...”“은 대표님을 모셔온 목적이 뭐야?”최연준의 낯빛이 말이 아니게 어두웠다. 그 모습에 화들짝 놀란 최연희가 손사래 쳤다.“목적이라니, 아무 이유 없어. 오빠는 오히려 우리 엄마한테 고마워해야 해. 엄마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오늘 여기 온 사람은 임나연이었을 거야.”“뭐?”눈썹을 치켜올린 최연준의 표정이 더욱 싸늘해졌다.“나연 씨도 다 알아?”“오빠가 여기 있는 건 모를 거야. 그런데 내가 계속 강주에 있으니까 자꾸 오겠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엄마를 오라고 했어.”최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찌푸려졌던 미간도 그제야 살짝 풀렸다.“걱정하지 마, 오빠. 엄마가 평소에는 입이 가볍지만 어떤 얘기는 하면 안 된다는 거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최연희가 가슴팍을 툭툭 치며 장담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최연준도 딱히 걱정되진 않았다. 어쨌거나 어릴 적부터 은미연은 그에게 잘해줬으니까. 하지만 강주에 온 사람이 너무 많아 그게 늘 불안했다.“할 게 없으면 빨리 돌아가.”그의 표정이 그나마 누그러졌다.“작은삼촌은 내가 계속 맨체스터에 있는 줄 아는데 다른 사람들이 자꾸 강주로 오면 의심할 거란 말이야.”“작은삼촌은 아직도 오빠가 맨체스터에 있는 줄 알아.”최연희가 피식 웃었다.“우리 엄마가 컴퓨터 고수인 거 잊었어? 작은삼촌이 갖고 있는 동영상들 있잖아, 오빠
“여보!”강서연은 최연준에게 고개를 흔들며 눈짓하고는 최연희를 위로했다.사실 최연희는 놀란 게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오빠 때문에 하도 많이 놀라 이젠 그가 화를 내도 별로 개의치 않아 했지만 오히려 강서연이 연신 사과하며 깨진 조각들을 치웠다.최연준이 도와주려 하자 강서연은 그를 말리며 다정하게 웃었다.“여긴 내가 정리할게요. 현수 씨는 이런 거 잘하지 못하니까 손 다칠 수 있어요.”그녀는 아주 능숙한 손놀림으로 바닥을 깨끗하게 정리했다. 그때 손님이 가게로 들어와 손님을 맞이하러 마당으로 달려 나갔다.은미연은 옆에서 그녀를 지켜보며 최연준의 눈치도 살피다가 몰래 그에게 다가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주 제대로 된 와이프를 찾았구나!”움찔한 최연준을 뒤로 한 채 은미연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내가 비록 너의 친엄마는 아니지만 그래도 거의 내가 키우다시피 했어. 네가 서연 씨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최연준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차가운 얼굴에는 여전히 그 어떤 표정도 없었다.은미연은 그의 생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가끔 최씨 가문의 아이들이 안쓰럽기도 했다.겉으로 보기에는 부귀영화를 누리고 남 부러울 것 없어 보이지만 결혼 문제에 있어서는 선택권이 없었다. 늘 자유를 즐기고 자기 생각대로 하길 원하는 그녀는 이런 걸 딱 질색했다. 하여 그녀는 최연준과 강서연을 도울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서 도울 생각이었다.“연준아, 서연 씨를 언제 가족들한테 소개할래?”최연준이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대답했다.“이 일은 경거망동해서는 안 돼요. 최씨 가문 사람의 결혼이 많은 이익과 연결되어 있어서 잘못했다가는...”“서연 씨한테 불리할까 봐?”은미연이 싸늘하게 웃었다.“흥! 누가 그런 생각을 한다면 내가 가장 먼저 가만 안 둘 거야!”“할아버지도... 가만 안 둘 거예요?”조금 전까지 두 손을 허리에 올리고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던 은미연이 순식간에 겁에 질려 입가를 파르르 떨었다.
“아줌마,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그럼, 제가 알아낸 사실을 전부 말씀드릴게요!”영미는 입가에 교만한 미소를 띠며 백인서를 차갑게 한 번 쳐다보았다.“백인서 씨의 친어머니인 백홍은 인신매매범이었다는 사실, 모두 아셨나요? 백인서 씨의 어머니는 백인서를 정대명의 집에 맡겼고... 흥! 정대명의 아내도 백홍이 납치해 왔다는 소문이 있어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잖아요. 제 생각엔... 인신매매범의 딸이라면 그런 일쯤은 익숙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은 권온유의 실종이 정말로 백인서 씨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시나요?”“영미!”강소아가 나서며 분노를 가득 담아 소리쳤다.“허위 사실을 퍼뜨리지 마!”“소유 아가씨, 억울하네요!”영미는 강소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제가 이렇게까지 조사한 건 다 아가씨를 위한 거예요! 딸도 있는 사람이 백인서를 곁에 두고도 마음이 놓이세요?”“그만해!”최지용이 크게 소리쳤다.백인서는 몸을 떨며 믿기지 않는 눈으로 최지용을 쳐다보았다.그러나 최지용의 얼굴에는 의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최지용은 굳건한 눈빛으로 뒤에 있는 백인서를 지키고 있었다.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처럼 백인서를 아끼고 있었다.백인서는 코끝이 찡해지며 본능적으로 최지용의 손을 꼭 붙잡았다. 최지용의 따스한 손은 백인서에게 큰 용기를 주었고 그 온기가 어둠의 두려움을 잊게 해주었다.최지용은 백인서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고 다시 영미를 바라볼 때는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영미야.”최지용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두 집안의 관계를 생각해서 그저 넘어가는 거야. 더 이상 선을 넘지 마.”최군형도 나서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요, 백인서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모르겠어요? 영미 아가씨, 우리 최씨 가문 사람들을 바보로 생각하는 건 아니죠?”영미는 순간 긴장했다. 최군형의 말 속엔 어딘가 숨은 뜻이 있는 듯했다.최군형의 깊고 복잡한 눈빛을 파악하기 어려웠다.표아정은 천천히 일어나 어깨에 걸친 숄을
백인서는 복잡한 눈빛으로 최지용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그때 최지용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표아정이었고 다급한 목소리로 서둘러 돌아오라고 재촉했다.최지용은 결국 어머니의 말에 따라 백인서를 데리고 최씨 집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넓은 거실에는 최군형과 강소아도 나와 있었고 모두 엄숙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백인서가 들어서자, 표아정이 백인서를 올려다보며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다.강소아는 백인서와 눈을 마주치며 단호하게 미소 지었다.백인서가 의아해하던 찰나, 영미가 천천히 밖에서 걸어 들어왔다.“아줌마, 지용 오빠. 제가 권온유의 행방을 알아냈어요.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뭐라고?”최지용이 놀라서 물었다.“네가 어떻게 아는데?”영미는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지용 오빠, 특수부대 출신이라고 정보가 우리보다 더 빠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최씨 가문은 만능이 아니에요, 최씨 가문도 모르는 정보가 있다고요.”표아정은 가볍게 기침하며 차분히 상황을 지켜보았다.최군형과 강소아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떤 일이 일어날지 주목하고 있었다.최지용의 이마에는 점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미의 눈에는 한 줄기 교만한 빛이 번졌다.영미는 오는 길에 이미 모든 계획을 짰다. 정대명의 말이 맞았다. 누구를 훔치든 상관없었다. 인신매매범의 딸인 백인서가 아이들을 해치러 다닌다는 누명을 씌우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하면 백인서는 모두의 신뢰를 잃게 될 터였다.영미는 이제 한 아이의 엄마가 된 강소아가 인신매매범을 곁에 둘 리 없다고 믿었고, 최지용 역시 이 사실을 알면 더는 백인서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래서 영미는 정대명을 배신하기로 마음먹었다.영미는 권온유를 넘기고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한패가 되어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주장할 계획이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백인서는 변명의 여지도 없이 궁지에 몰릴 것이었다!“지용 오빠.”영미는 고개를 돌려 최지용을 바라보며 한 글자씩 천천히 말했다.“권온유는 정승
“그... 괜찮아!”정승우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권온유에게 말했다. 정승우는 이곳에서 권온유를 반드시 데리고 나가겠다고 결심했다.그런데 이때, 공장 문이 “쾅” 하고 열리더니 곧바로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정승우는 재빨리 권온유에게 눈짓했고 권온유도 알아채고는 즉시 땅바닥에 쓰러져 의식이 없는 척했다.정승우는 벽에 기대어 눈을 반쯤 감았다.“이 아이인가요?”영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맞아.”정대명은 영미를 흘깃 노려보며 묵묵히 대답했다.영미는 두 걸음 앞으로 다가서서 희미한 빛 속에 있는 아이를 살펴보더니, 곧 얼굴빛이 확 변했다.“이 아이... 혹시 권씨 집안의 막내딸 아니에요?”정대명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애초에 아이를 훔쳐 올 때 이 아이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 리가 없었다.“정대명 씨.”영미가 차갑게 웃으며 돌아보았다.“제가 최씨 가문 집안 아이를 훔쳐 오라고 했지, 권씨 집안 아이를 훔치라고 했나요? 이러고도 저를 속이지 않았다고요?”“그게...”정대명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영미 아가씨, 어차피 목적은 백인서를 곤경에 빠뜨리는 거잖아? 그러니 누구를 훔쳐 오든 상관없지 않아? 아이를 훔치기만 하면 유괴범이 되는 거니까.”이 말은 영미에게만 충격을 준 게 아니었다. 정승우의 귀에도 또렷이 들어왔다.“좋아요.”영미는 깊은숨을 들이마신 뒤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이 아이는 잘 지키고 있어요, 제가 다시 연락할 테니까.”...한편, 권씨 집안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권욱은 조순영을 탓하며 아이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했고, 조순영은 오열하며 남편을 원망했다. 조순영은 권욱이 바깥에서 여자와 부적절하게 얽히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라고 했다.“헛소리하지 마! 사람들이 나한테 어떤 소문을 퍼뜨렸는지 잘 알잖아. 결혼 생활 내내 너한테 부끄러운 일 한 적 없어.”“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정말 떳떳하게 행동했다면 왜 사람들이 당신만 가만두지 않는 건데?”며칠 전까지만
권온유의 질문에 정승우는 당황했다.권온유는 커다란 눈망울로 정승우를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했던 슈퍼맨 같은 오빠가, 이제는 먹을 것 하나 구하지 못하는 모습이 되어버린 것이다.정승우는 어색하게 입가를 씰룩이며 권온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이야기를 이어갔다.“너, 정말 배고파?”“네!”권온유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 작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원래는 엄마랑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 했어요. 엄마가 특별히 고등어조림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하셨거든요... 엉엉... 엉엉...”“울지 마, 울지 마! 그냥 생선 하나 가지고...”“나 배고파!”정승우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아이와 대화하는 건 그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겨우 권온유를 달래고 나서 정승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팔을 걷어붙이며 권온유에게 내밀었다.“너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 배고프면, 여기 한번 물어볼래?”권온유는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정승우를 바라보았다.“우리 집은 가난해서 늘 먹을 게 부족했거든. 그래서 어릴 때 너무 배가 고프면 이렇게 배고픔을 달랠 만한 걸 물곤 했어.”권온유는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배고픔을 달랠 만한 것'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정승우는 웃으며 계속 설명했다.“예를 들어 쌀통 같은 거야. 한때 쌀이 들어 있던 쌀통은 비어 있어도 쌀 냄새가 남아 있거든. 그래서 쌀통 가장자리를 살짝 물면서 하얀 쌀밥을 먹는 상상하는 거야. 그러면 배가 덜 고파져.”“그리고 이웃집에서 밥하는 냄새를 맡으며 그 밥을 먹는 상상을 하는 거야. 그러면 그렇게 배고프지 않더라고.”권온유는 정승우의 이야기에 넋을 잃고 입을 벌린 채 있었다. 정승우는 웃음을 터뜨렸다.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한때 정대명이 도박과 술에 빠져 정승우를 굶겼던 시절은 그야말로 비참한 순간들이었다.잠시 후, 권온유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고 정승우는 속으로 ‘큰일이다'라고 생
영미는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최지용을 지켜보았다.최지용은 다소 초조한 기색으로 구석에 앉아 휴대전화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 전화를 걸기도 했다.영미는 바로 뒤를 따라갔고 최지용의 낮고 다급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찾았습니까?”“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세요... 만약 납치범의 목적이 돈이었다면 분명 전화를 걸어올 겁니다!”영미의 가슴이 철렁하며 내려앉았다.납치범이라니? 대체 뭘 찾는다는 거지?백인서와 통화한 걸까?그때, 최군성이 큰 소리로 외쳤다.“지용이 형, 여기서 뭐 해요?”영미는 얼른 몸을 숨겼고 최군성은 최지용에게 다가가 최지용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우리 형이 찾고 있었는데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거예요? 어서 와서 먹고 즐기자고요!”최지용은 최군성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영미와 눈이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잠시 멈칫했다.영미는 급히 시선을 피하며 억지 미소로 인사했다.“지용 오빠...”“어, 영미?”최군성도 배윤아처럼 물었다.“여기 웬일이야? 형님이 널 초대한 것 같지 않은데?”“그게...”영미는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최군성은 영미의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최지용을 끌고 가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최지용은 점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영미가 도대체 여기 왜 있는 거지? 평소에는 볼 수 없던 사람이, 왜 하필 오늘 온유가 사라진 날에 나타난 걸까?그때, 최군형과 강소아가 가원이를 품에 안고 나타났다.강소아는 아이를 보행기에 앉혔고 아이는 보행기 가장자리를 잡고 작은 발을 내디뎠다. 이 모습에 방 안의 모든 사람이 환호성을 질렀다.영미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자리를 떠 교외의 버려진 공장으로 향했다.그 시각, 정대명은 영미의 지시에 따라 승합차를 몰고 공장에 도착해 있었고 영미가 도착했을 때 그는 공장 문 앞에서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영미는 핸드백을 휘둘러 정대명에게 던졌다.“정대명 씨, 감히 날 속여
“너 따위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정대명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결국엔 자기 아들이었기에 정승우에게 감출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때리고 꾸짖어도 떠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정대명은 서랍에서 가위를 꺼내 들고는 권온유의 양 갈래머리를 단칼에 잘라냈다. 머리카락이 천천히 바닥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있다가 막아서려는 순간, 자신과 정대명 사이에 힘의 격차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작정 나섰다가는 역부족일 터였다.정승우는 이를 악물고 정대명에게 다가가 물었다.“아빠, 정말 이 아이를 팔 생각이에요?”“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영미라는 그 여자가 원하는 거야!”정대명은 불만스레 대꾸하며 정승우에게 옷장에 있는 헌 옷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정승우가 옷을 가져오자, 정대명은 손을 뻗어 권온유의 예쁜 드레스를 찢으려 했다. 정승우는 급히 소리쳤다.“뭐 하는 거예요!”“이 자식이!”정대명은 정승우를 노려보며 소리쳤다.“조용히 해! 죽고 싶어?”“아빠, 이건...”“이 애한테 옷을 갈아입히려는 거야! 이렇게 좋은 옷을 입고 있으면 바로 눈에 띄잖아.”정승우는 다가가 정대명을 옆으로 밀치며 말했다.“제가 갈아입힐게요!”“이놈이...”정대명은 하려던 말을 멈추고 피식 웃었다. 그는 정승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아하, 아빠를 도와주고 싶구나? 역시 아들은 아들밖에 없지! 그래, 네가 손이 빠르니까 빨리 옷을 갈아입혀. 둘이 함께 가자고!”정승우는 속으로 혐오감이 치밀었지만, 지금은 그저 상황을 지켜보며 대응하는 수밖에 없었다.정승우는 권온유의 드레스를 벗기지 않고, 정대명의 헌 옷을 위에 입혀 단단히 감쌌다. 그런 다음 모자를 씌워 얼핏 보면 남자아이처럼 보이게 했다.“좋아, 이 정도면 되겠어!”정대명은 정승우에게 눈짓을 보내며 말했다.“뒷문에 승합차가 준비돼 있대. 어서 출발하자!”“아빠, 이 소녀는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예요?”“교외지!”정대명은 귀찮다는 듯 말했다.“빨리 움직
권온유는 깜짝 놀라며 정대명을 멍하니 쳐다보았다.“아저씨가 맛있는 걸 가지고 왔단다. 배고프지 않니?”권온유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달아나려 했다. 정대명은 급히 권온유 앞을 가로막았다.“아니, 가지 마!”정대명은 두 손으로 권온유를 꼭 붙들며 말했다.“그게... 네 엄마가 나한테 너를 데려오라고 부탁했어!”엄마라는 말을 듣고 권온유는 잠시 멈칫했다.“정말이야, 네 엄마가 부탁한 거라니까!”정대명은 거짓말을 이어갔다.“방금 네 엄마가 갑자기 어디론가 가버렸지? 너 보고 기다리라고 했잖아?”“네... 맞아요.”“그래!”정대명은 웃으며 말했다.“그런데 네가 여기저기 막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엄마는 내가 여기 있는 걸 알 거예요. 저는 여기서 조금 놀다가 다시 휴게실로 돌아갈 거예요!”“오... 그렇구나.”정대명은 잠시 생각을 굴렸다.“아저씨가 휴게실이 어딘지 아니까, 내가 데려다줄게!”권온유는 경계하며 정대명에게서 몸을 빼내고 두 걸음 물러났다.“얘가! 난 정말로 네 엄마 친구라니까. 네가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걱정하지 않겠어? 맞지?”“자, 자! 아저씨가 데려다줄게. 착하지!”정대명은 권온유를 갑자기 붙들어 어깨에 둘러맸다. 권온유는 본능적으로 소리치려 했지만, 정대명의 손이 입을 단단히 막고 있어 소리를 낼 수 없었다.어린 소녀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른 남자를 이길 수는 없었다. 정대명은 권온유의 머리 뒤쪽을 세게 내리쳐 기절시켰고, 온유가 들고 있던 인형은 땅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익숙하게 호텔로 와서 지난번 일을 핑계로 다시 정대명에게 돈을 뜯어낼 생각이었는데, 방 안에 기절한 어린 소녀가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어른 일에 참견하지 말고 신경 꺼!”정대명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방금 정대명은 온유를 데려오며 보안과 호텔 직원의 눈을 피하고자 아이를 어깨에 메고 가지 않고, 자신의 아이인 것처럼 속여서 안
“엄마, 우리 오늘도 여기서 밥 먹어요?”“그래. 네가 제일 좋아하는 게 고등어조림 요리잖아.”“그런데...”권온유는 입을 꾹 다물고 말을 삼켰다. 사실 권온유는 집에서 밥을 먹고 싶었다.어린 권온유도 느낄 만큼 엄마는 요즘 기분이 좋지 않았다.방금 대답조차 어딘가 건성으로 들렸다.권온유는 어른들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는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는 걸까? 누군가 아빠와 다른 여자가 함께 찍힌 사진을 보내기만 하면, 엄마는 이렇게 변해버렸다.“엄마...”권온유는 엄마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당겼다. 그러나 조순영은 갑자기 권온유의 손을 놓고는 시선이 어느 한 곳에 고정되더니 초조한 표정으로 그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권온유는 깜짝 놀라 인형을 떨어뜨렸다.“엄마!”“온유야, 여기서 움직이지 말고 있어!”조순영은 급히 돌아보며 외쳤다.“엄마 금방 올게!”권온유는 엄마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홀로 서 있었다. 시야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엄마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엄마는 아빠가 다른 여자가 친밀하게 지내는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엄마는 통제력을 잃고 온유를 혼자 내버려두곤 했다. 그러고 한참 후에야 멍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오곤 했다.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던 정대명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요 며칠 동안 몇 번이나 이 모녀를 본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이 여자는 자주 아이와 함께 식사하러 왔는데 가끔 혼자 올 때도 있었다...남편의 외도를 잡으려는 걸까?맞아, 틀림없이 그런 거다!정대명은 매일 호텔에 살면서 듣는 소문도 적지 않았다. 한 회장이라는 사람은 아내와 자식이 있음에도 바람이 잦았다고 하는데 그 회장은 차기 시장의 사위가 될 인물이라는 말도 있었다.정대명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이런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차피 남자가 바깥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건 흔한 일이니까.정대명은 다시 어린 소녀를 주시했다. 소녀
정대명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얼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며칠을 기다린 결과가 고작 최가원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었다.그럼에도 영미는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왔다.“정대명 씨, 대체 뭐 하고 있는 겁니까? 대단한 것도 아니고 아이 하나 훔쳐 오는 게 그렇게 어렵나요?”젠장! 정대명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차라리 보석을 훔치는 게 더 쉬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하하... 영미 아가씨.”마음속으로는 욕하고 있었지만, 얼굴엔 여전히 웃음이 서려 있었다.“이게, 그렇게 쉽지 않네요! 제가 며칠 동안 지켜본 결과, 그 경호원들이 전부 총을 들고 있더라고요. 제가 무턱대고 나서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정말 쓸모없네요.”영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내가 사람들까지 매수해 놨는데, 일을 이따위로 하다니!”정대명은 억눌린 분노를 꾹 참고 입을 다물었다.“말해 두겠는데요!”영미는 한발 더 나아가 말했다.“이 일 못 해내면, 화려한 호텔 스위트룸도 더 이상 못 쓰게 될 테고 돈 한 푼도 못 받는 줄 아세요! 다시 그 작은 산골 마을로 돌아가서 평생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 하세요!”정대명은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호사에 길든 사람이 다시 가난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려운 법이다. 최근 정대명은 오성에서 살아가며 화려한 삶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이 잘 먹고 살게 도와줬고 돈까지도 넉넉히 주니 점점 체면이 생기기 시작했다.호텔에서 정대명이 매일 스위트룸에서 지내는 것을 본 사람들은 그를 대단한 부자로 착각했고 그에게 예의를 갖추며 인사했다.이런 삶은 초라했던 지난날에선 꿈도 꾸지 못한 것이었다.고작 아이 하나 때문에 이 모든 걸 잃기엔 너무 아까웠다.정대명은 급히 전화기를 붙잡고 외쳤다.“영미 아가씨, 너무 흥분하지 마!”영미는 냉소적인 웃음을 흘렸다.“내가...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정대명은 어영부영 답했다.“겨우 아이 하나 가지고, 뭐 대단한 일도 아니지!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