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연은 병원에 혼자 있는 임우정이 마음에 걸려 문병 갔더니 마침 육경섭에게 밥을 떠먹여 주는 임우정을 보았다.매사에 덤벙대던 임우정인데, 국물 한 숟가락 떠먹여 주는데도 육경섭이 데일까 여러 번 불어서 식혀서 주었다.하지만 병실 침대에서 아무것도 못하는 남자가 두 날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재활치료를 받았다고 누가 믿겠는가?강서연은 갑자기 그 사람이 떠올라 웃었다.모르는 사람한테는 어두운 안색으로 ‘오지 마!’ 하는 표정을 하던 사람이었다.하지만 만났다 하면 그녀한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왔어요?”이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서연이 뒤돌아보자, 신석훈이 다가오고 있었다. 신석훈이 병실 쪽을 보고 정색하다 금세 밝은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했다.“경섭 씨가 회복이 빠르네요. 조만간 완쾌하시겠어요.”“신 의사님, 고맙습니다.”강서연이 어색해하며 말했다.처음에는 임우정과 엮어주려 했건만...“고마워 할 필요 없어요. 아픈 사람 치료해 주는 게 의사의 천직인데요.”신석훈은 웃으며 답했다.“석훈 씨는 참 좋은 의사예요.”그녀가 보기에도 이 말은 빈말 같았다.하지만 그러지 않으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손수 라이벌을 치료한 것도 모자라 좋아하는 사람한테 보냈었다. 그는 골치 아플 정도로 좋은 사람이라 항상 남을 치료만 했지, 정작 자신의 상처는 봐주는 사람이 없었다.“사실... 나도 우정 씨가 좋아하는 사람 곁에 있는 걸 원해요.”그가 웃으며 병실을 쳐다보았지만, 눈에는 미련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우정 씨가 경섭 씨 곁에 있을 때만 더없이 환하게 웃는 것 같아요.”신석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석훈 씨...”강서연의 마음은 복잡미묘했다.“석훈 씨가 좋은 사람인데 꼭 좋은 일이 생길 거예요.”“허, 나한테는 원래 좋은 일만 있었어요!”신석훈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저는 어릴 적부터 부모님이 제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줬어요. 집이 그렇게 부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부족함 없이 컸고 덕분에 의
강서연은 더욱 의구심이 들었다.“혼인 증명서로 뭐하게요?”최연준은 순간 입술이 마르고 목이 메어 무슨 변명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는 강서연이 집에 없는 틈을 타 혼인 증명서를 찾아냈다. 아니나 다를까 위의 이름은 구현수였다... 강서연이 강유빈 대신 시집을 갈 때, 강씨 집안에서는 인맥을 이용해서 구현수의 민증을 사용했었다.애초에 강서연한테 이렇게 빠질 줄 알았더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직접 혼인신고 하러 갔을 최연준이었다. 이름 고치려면 좀 힘들겠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고 유찬혁이 그에게 알려줬었다.하지만 최연준이 혼인 증명서를 챙겨 가려 할 때 마침 강서연한테 들켜 버렸다.“현수 씨, 왜 그래요?”그가 넋을 놓고 있자 내심 걱정되었다.“현수 씨... 혼인 증명서 찾자고 집을 이렇게 어지럽혔다고요? 뭐하게요?”최연준은 억지로 입을 삐죽거리며 한참 동안 뜸 들이다 입을 열었다.“그냥... 찾아보느라.”“뭐 볼 거 있다고요?”눈이 휘둥그레진 강서연은 어떠한 표정도 지을 수 없었다. 그러고는 그의 손에서 혼인 증명서를 가져와 서랍에 넣었다.최연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마치 잘못이라도 저지른 아이처럼 멍하니 그녀 앞에 서 있는 최연준이다. 큰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그녀 앞에서 그가 고개를 숙이고 말을 아낄 때마다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강서연은 어이없는 듯 웃어 보이며 작은 두 손으로 그의 볼을 감싸고는 맑은 눈으로 그를 그윽하게 쳐다보았다. “현수 씨, 오늘 좀 이상한데. 요즘 힘든 일 있었어요?”
“혹시 모르잖아요! 진짜 아기가 생긴다면 아이를 위해서도 생각해 봐야죠. 그렇지만 이 보험은 내가 현수 씨한테 들어주고 싶은 거예요.”그녀는 아랫배를 어루만지며 그를 향해 따뜻하게 웃어 보였고 그의 손을 잡으며 부드러움이 섞인 확고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세상은 온통 눈앞의 남자였다. “현수 씨... 나, 임신은 처음이라 긴장이 되긴 해서 며칠 맘카페 같은 데서 정보를 많이 찾아봤어요. 진짜 게시글처럼 만에 하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난...”최연준은 안색이 어두워서는 진지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서연아,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그럴 일 없을 거야!”강서연은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그게 아니라, 내 말은 만약에, 만약에 급한 상황이 생기면 이 돈을 꺼내라는 거죠.”“만약은 없어! 그럴 일도 없을 거고!”최연준은 중저음으로 그녀를 혼내듯 말했고, 그의 화난 표정에 강서연도 꽤 놀란 눈치였다. 그녀는 멍하니 그를 보았고 심장이 쿵쾅 뛰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깔끔하게 보험 서류를 갈기갈기 찢어버렸고 순간 공기는 싸해졌다. 최연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서운 분위기에 강서연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을 쳤다.“현수 씨...”최연준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고 본인이 놀라게 했다는 생각에 그녀를 품에 와락 안고는 미안해하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당신한테 화를 낸 게 아니야. 단지 그럴 일 없을 것이라는 걸 말해 주고 싶었을 뿐이야. 당신한테 일이 생겨도 난... 아이보단 당신이 먼저야.”최연준은 강단 있는 눈빛을 하고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토해냈다. 강서연은 마음 한편이 뭉클했고 코끝이 시큰거렸다.“현수 씨 바보,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아요! 우리 둘의 결실인데, 어찌 그래요.”“아니!”최연준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했고 강서연은 피식 웃어 보였다. 그녀는 얇은 손으로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큰 눈망울은 별빛처럼 빛이 뿜어졌다. 그의 표정과 모습은 꽤 엄숙하고 진지해서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겁을 먹었을 건데, 강서연은 그가 긴장
“서연 씨, 워낙 몸이 약하고 해서 보기 드문 케이스긴 한데, 상상임신이에요. 하지만큰 문제는 없어요. 몸조리 잘하고 준비하면 언제든 아이를 가질 수 있어요.”“그리고 내가 확인한 또 다른 사실이...”신석훈은 또 다른 검사 결과 하나를 꺼내 보였다. 그 위에는 강명원이란 이름이 적혀있었다.“이 일은 내가 서연 씨한테 사과부터 할게요. 강명원 회장도 여기서 건강검진을 받았었어요. 저의 병원 인턴들이 실습 과정에서 일부 혈액 샘플을 갖고 본인들 실험 과제로 빼돌려서 감정을 했더라고요. 그중에 서연 씨 그리고 강 회장님 혈액 샘플이 포함되어 있었어요. 사실 이건 병원 규정을 위반한 행동이라 관련 인턴들도 병원 처벌을 받았고요.”“그런데 오늘 내가 그 감정 보고를 보게 되었고, 혈액결과상... 두 분이 혈연관계가 전혀 아님을 확인했어요!”충격적인 소식에 강서연은 머리가 텅 빈 것 같았고 귀가 멍해졌다....최연준은 병원에서 오가는 사람 중에 그녀의 모습을 애타게 찾으며 병원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그러다 눈을 돌려보니 신석훈이 사무실에서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보았다.“서연이는요?”“간호사한테 부탁해서 휴게실로 보냈어요.”“도대체 무슨 일이에요?”최연준은 마음이 조급했고 급히 달려왔던 터라 코끝까지 땀이 찼다. 신석훈은 전후 앞뒤사정을 간단하게 설명해 줬고 최연준도 듣고 너무 놀라 한참 정신을 못 차렸다..“잘못된 것 아니고요?”“저도 처음엔 샘플도 많고 해서 인턴들이 진행할 때 잘못해서 샘플이 섞이거나 했을 수 있어서 일부러 제가 다시 감정을 했어요. 직접 했고요. 같은 결과예요.”신석훈은 침착하게 답을 했다.최연준의 미간이 심히 찌푸려졌다.“혈액 샘플의 라벨이 잘못...”“혈액 샘플은 피를 뽑고 바로 라벨이 붙여지고, 또 전담자가 책임지고 보관해요.”그렇다는 의미는 혈액 샘플이 잘못될 경우는 없다는 것이고, 또 감정을 신석훈이 직접했으니, 결과 역시 오류일 수 없었다.“그래서... 서연이가 강명원의 친딸 아닌 거예요?”신석훈은 고
‘이런 사실을 강 회장이 정말로 모를까? 예전에 양연 아줌마가 주워온 자식이라고 욕하고 모질게 굴었던 게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말 안 가리고 한 게 아니라, 근거가 있고 뭐를 알고 얘기했다는 건가? 그러면 윤찬이랑 나의 아버지는 누구라는 건가?’강서연은 수많은 생각에 머릿속이 어지럽고 가슴은 뭐가 막힌 것 마냥 답답하고 숨쉬기조차 가빴다. 최연준은 그녀 앞에 꿇어앉아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어루만졌다.그는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여보, 이제 집에 가자.”“난...”“다 이해해. 당신 지금 기분이 이상한 것도 심경이 복잡한 것도 알지만, 이런 일은 시간이 필요해. 우리 같이 천천히 알아보자고.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옆에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응?”강서연은 최연준의 눈을 바라보았고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그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아줬고 그녀는 뭔가 든든했다. 집에 돌아온 강서연의 시야에 든 건 식탁 위에 널려 있는 육아 잡지와 맘 카페 글이 켜져 있는 컴퓨터였다.모두 최연준이 최근 밤새 익히던 육아 정보였다.그는 보기만 한 게 아니라 임산부 주의 사항까지 꼼꼼하게 메모했다. 거기에는 초보 아빠가 뭘 해야 하는지, 산후 우울증을 어떻게 해소하고 도울 건지 등등도 같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작은 침실에는 아이 용품과 임산부 용품이 쌓여 있었다.강서연은 코끝이 시큰거렸고 눈가가 저절로 촉촉해져서 고개를 떨구고 아무 말도 없었다. 최연준은 그녀를 가볍게 껴안고 묵묵히 감정에 휩싸인 그녀를 토닥였다.한참 있다가 강서연이 겨우 한마디를 뱉어냈다.“현수 씨, 이럴 줄 알았으면 너무 일찍 기뻐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정확하게 확인하고나서 현수 씨한테 알려줘야 했는데. 미안해요, 헛물켜게해서...”최연준이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거 아니야. 괜찮아, 이 물건들은 놔두면 나중에 다 쓸 거야.”“신 의사님이 내가 워낙 몸이 약해서 임신 할 수는 있지만 확율이 보통보다 낮다고 그랬어요.”최연준은 진지하게
강서연이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최연희가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언니, 오랜만이에요. 저 안 보고 싶었어요?”강서연이 웃으며 그녀의 코끝을 톡 쳤다.“당연히 보고 싶었죠. 옆에서 재잘거리는 연희 양의 없으니까 얼마나 지루한지 몰라요.”최연희가 눈웃음을 지었다.강서연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그녀 뒤에 서 있는 중년 여인에게로 향했다. 관리를 잘한 듯해 보였으나 웨이브 단발머리에 명품으로 도배된 옷차림과 에르메스 한정판 가방을 들고 있어 그런지... 왠지 조금 우스꽝스럽기도 했다.“콜록콜록!”중년 여인이 마른기침을 두어 번 하자 최연희는 재빨리 그녀를 강서연에게 소개했다.“언니, 이분은 저희 엄마예요. 절 보러 특별히 강주로 오셨어요!”강서연이 화들짝 놀랐다.‘이분이 바로 최씨 가문 사모님이시구나. 최씨 가문이 재벌이긴 하지만 명품으로 도배할 만큼 허세를 부리길 좋아하는 가문 같지는 않던데...’강서연은 혹시라도 예의 없어 보일까 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엄마.”최연희가 혀를 날름 내밀었다.“여긴 강서연 언니예요. 강주에서 저랑 가장 친한 친구예요!”은미연이 선글라스를 벗고 그녀를 아래위로 자세히 살폈다.‘얘가 바로 강서연이구나. 연준이 혼을 쏙 빼놓고 강주에서 신분을 숨긴 채 좋은 남편으로 살게 만든 그 강서연.’은미연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특별한 건 없어 보이는데? 피부가 하얗고 여리여리한 게 나름 순진해 보여. 이목구비도 이 정도면 꽤 괜찮고. 그런데 예전에 연준이 옆에 있던 여자들이랑은 완전히 다르네. 연준이가 이런 애한테 빠질 줄은 몰랐어!’“엄마!”최연희가 팔로 그녀를 툭툭 치며 눈치를 줬다.“사람을 너무 빤히 쳐다보지 말아요.”“아... 알았어!”은미연도 그제야 정신을 가다듬고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정말 예쁘네요, 서연 씨. 이 가게도 너무 아기자기하게 잘 꾸몄어요. 딱 봐도 서연 씨는 참 능력 있는 여자 같아요!”강서연은 민망한 듯 웃어 보이고는 은미연에게 자리를 안내했다.그들은 마
“그래, 알았어.”최연준이 무덤덤하게 대답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최연희는 은미연과 눈빛을 주고받고는 강서연에게 말했다.“언니,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강서연이 멈칫한 사이 은미연은 그녀를 잡고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커피도 만들 수 없게 되었으니 그녀도 차라리 마당에 앉아 은미연과 함께 웃으며 얘기를 나누었다.최연희는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쩍 벌어진 어깨로 카운터 뒤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최연준을 발견했다. 그녀가 살며시 다가가자 최연준이 갑자기 고개를 홱 돌리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가슴이 움찔한 최연희는 웃을 듯 말 듯 한 얼굴로 말했다.“오빠...”“은 대표님을 모셔온 목적이 뭐야?”최연준의 낯빛이 말이 아니게 어두웠다. 그 모습에 화들짝 놀란 최연희가 손사래 쳤다.“목적이라니, 아무 이유 없어. 오빠는 오히려 우리 엄마한테 고마워해야 해. 엄마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오늘 여기 온 사람은 임나연이었을 거야.”“뭐?”눈썹을 치켜올린 최연준의 표정이 더욱 싸늘해졌다.“나연 씨도 다 알아?”“오빠가 여기 있는 건 모를 거야. 그런데 내가 계속 강주에 있으니까 자꾸 오겠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엄마를 오라고 했어.”최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찌푸려졌던 미간도 그제야 살짝 풀렸다.“걱정하지 마, 오빠. 엄마가 평소에는 입이 가볍지만 어떤 얘기는 하면 안 된다는 거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최연희가 가슴팍을 툭툭 치며 장담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최연준도 딱히 걱정되진 않았다. 어쨌거나 어릴 적부터 은미연은 그에게 잘해줬으니까. 하지만 강주에 온 사람이 너무 많아 그게 늘 불안했다.“할 게 없으면 빨리 돌아가.”그의 표정이 그나마 누그러졌다.“작은삼촌은 내가 계속 맨체스터에 있는 줄 아는데 다른 사람들이 자꾸 강주로 오면 의심할 거란 말이야.”“작은삼촌은 아직도 오빠가 맨체스터에 있는 줄 알아.”최연희가 피식 웃었다.“우리 엄마가 컴퓨터 고수인 거 잊었어? 작은삼촌이 갖고 있는 동영상들 있잖아, 오빠
“여보!”강서연은 최연준에게 고개를 흔들며 눈짓하고는 최연희를 위로했다.사실 최연희는 놀란 게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오빠 때문에 하도 많이 놀라 이젠 그가 화를 내도 별로 개의치 않아 했지만 오히려 강서연이 연신 사과하며 깨진 조각들을 치웠다.최연준이 도와주려 하자 강서연은 그를 말리며 다정하게 웃었다.“여긴 내가 정리할게요. 현수 씨는 이런 거 잘하지 못하니까 손 다칠 수 있어요.”그녀는 아주 능숙한 손놀림으로 바닥을 깨끗하게 정리했다. 그때 손님이 가게로 들어와 손님을 맞이하러 마당으로 달려 나갔다.은미연은 옆에서 그녀를 지켜보며 최연준의 눈치도 살피다가 몰래 그에게 다가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주 제대로 된 와이프를 찾았구나!”움찔한 최연준을 뒤로 한 채 은미연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내가 비록 너의 친엄마는 아니지만 그래도 거의 내가 키우다시피 했어. 네가 서연 씨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최연준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차가운 얼굴에는 여전히 그 어떤 표정도 없었다.은미연은 그의 생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가끔 최씨 가문의 아이들이 안쓰럽기도 했다.겉으로 보기에는 부귀영화를 누리고 남 부러울 것 없어 보이지만 결혼 문제에 있어서는 선택권이 없었다. 늘 자유를 즐기고 자기 생각대로 하길 원하는 그녀는 이런 걸 딱 질색했다. 하여 그녀는 최연준과 강서연을 도울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서 도울 생각이었다.“연준아, 서연 씨를 언제 가족들한테 소개할래?”최연준이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대답했다.“이 일은 경거망동해서는 안 돼요. 최씨 가문 사람의 결혼이 많은 이익과 연결되어 있어서 잘못했다가는...”“서연 씨한테 불리할까 봐?”은미연이 싸늘하게 웃었다.“흥! 누가 그런 생각을 한다면 내가 가장 먼저 가만 안 둘 거야!”“할아버지도... 가만 안 둘 거예요?”조금 전까지 두 손을 허리에 올리고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던 은미연이 순식간에 겁에 질려 입가를 파르르 떨었다.
“소유야, 난...”배현진은 난처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됐어!”최군형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억눌린 분노를 터뜨렸다.“배현진, 우린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어. 비록 형제처럼 친하진 않았지만, 난 너를 친구로 여겼어. 그런데 네가 이런 사람이었다니 정말 실망이야.”“맞아!”강소아도 매서운 눈빛으로 배현진을 노려보며 말했다.“이미 마음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애초에 왜 송윤지를 건드린 거야? 송윤지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그만들 해!”배현진이 낮고 거친 목소리로 소리쳤다.“오늘 여기 온 건 아이들 문제를 해결하려고 온 거지 내 사생활을 따지러 온 게 아니야.”“너...”최군형이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배현진은 원장과 학부모들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원장님, 그리고 학부모님들.”배현진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서서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제 아들이 잘못한 부분에 대해, 아버지로서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법적으로나 도의적으로 마땅히 해야 할 보상은 변호사를 통해 진행할 겁니다. 하지만 제 아들이 맞은 일에 대해서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뭐라고?”늘 침착하던 최군형도 이 말을 듣고 분노를 참지 못했다.“배현진, 너 제정신이야?”“최군형!”배현진은 강한 어조로 말을 끊으며 최군형을 똑바로 바라봤다.“내 아들이 유치원에서 장난치고 말썽을 피운 건 사실이야. 하지만 네 딸이 내 아들을 때려서 얼굴에 멍이 들고 코피까지 흘리게 한 것도 사실이잖아. 아이끼리 싸우는 건 내가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어른들까지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면 문제가 더 커질 거야. 내 책임은 내가 지겠지만, 너희 쪽 책임도 똑같이 져야 한다고 생각해.”“너...”최군형의 가슴속은 커다란 바위가 내려앉은 듯 답답했다.이게 정말 배현진이란 말인가? 배씨 가문의 아들이자 배윤아의 오빠라는 사람이 맞나?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임지강이 갑자기 책상을 세게 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몇 걸음 만에 배현진 앞까지 다
“삼촌.”최군형이 강소아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가볍게 웃었다.“우린 딸 문제를 해결하려 온 것도 맞지만 또 한편으론... 저랑 소유 둘 다 궁금했거든요. 이 제임스라는 아이의 아버지가 대체 어떤 사람인지.”“흥! 뭐 좋은 사람이겠어요?”이때 누군가 끼어들었다. 최군형의 사업 파트너 부인이자 평소 최군형 집안과 친하게 지내던 여성이었다.“보세요, 그 애 엄마를 보면 알아요. 부부 둘 다 똑같은 부류라서 그런 문제아를 키운 거예요!”강소아는 부인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미소 지었다.“최 사모님, 사모님은 늘 온화하고 대범한 분이시지만 오늘만큼은 저를 말리지 마세요!”여자는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그 문제아가 우리 아들을 괴롭혔어요. 오늘 이 자리에서 제 체면 다 내려놓더라도 우리 아들을 위해 한마디 해야겠어요!”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회의실 문이 열렸다. 하이힐 소리를 내며 당당하게 소피아가 걸어들어왔다. 뒤에는 제임스가 따라왔는데 찌푸린 표정으로 모든 사람을 원망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소피아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제임스를 안심시켰다.“원장님, 그리고 여러분.”소피아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 미소에는 조소가 서려 있었다.“제 아들이 유치원에서 폭행당했어요. 이 문제는 반드시 끝까지 따질 겁니다! 송 선생님은 어디 계시죠?”소피아는 주위를 둘러보며 오늘의 ‘주인공’을 찾다가 보이지 않자, 눈살을 찌푸렸다.“담임이라면, 이런 문제에 나서야 하지 않나요?”소피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낮고 깊은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송 선생님이 없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나요?”소피아는 깜짝 놀라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거기에는 라이터를 돌리며 앉아 있던 임지강이 있었다. 임지강의 여유로운 태도에는 냉혹한 기운이 묻어 있었다. 눈을 번쩍 들어 올리자, 임지강의 차가운 시선은 마치 두 개의 날카로운 검처럼 느껴져 모두를 긴장하게 했다.임지강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송 선생님이 없더라도 원장님이 계시잖아요.
“하지만...”송윤지가 머뭇거리며 말했다.“임 대표님, 이건 제 문제예요. 그 반 아이들은 제가 책임지고 있습니다. 학부모님들이 불만이 있거나 문제가 생기면 제가 나서서 해결해야 맞는 거잖아요...”“가지 말라고 했잖아요.”임지강의 목소리는 단호해졌다. 임지강의 눈빛은 깊은 연못처럼 어둡고 알 수 없는 강렬한 힘이 담겨 있었다.송윤지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이상하게도 임지강의 엄격한 표정과 냉혹함에도 송윤지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임지강의 어떤 모습이어도 두려운 사람이 아니었다.“임 대표님...”“윤지 씨.”임지강은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송윤지의 어깨를 단단히 잡으며 말했다.“모든 걸 저에게 맡겨요.”그 순간, 송윤지는 혹시 임지강이 뭔가 알고 있는 게 아닐지 생각했다.송윤지의 가슴이 마구 뛰었고 눈은 임지강을 곧게 응시하고 있었다.“임 대표님, 혹시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세요?”임지강은 잠시 입술을 깨물며 침묵하더니 천천히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더 이상 숨기지 않을게요. 사실, 윤지 씨 약혼자를 조사했어요.”“뭐라고요?”임지강이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송윤지의 머릿속이 순간 새하얗게 변했다.“그 제임스의 어머니, 소피아라는 여자는 배현진의 연인이에요.”임지강은 담담하게 말했다.“처음엔 배현진이 단순히 이 여자와 재미로 만나는 줄 알았어요. 솔직히 말해서, 그 여자는 조건이 뛰어난 편도 아니니까... 하지만 조사를 더 해보니, 배현진은 이 여자와 진지했어요. 배현진이 소유했던 몇 채의 부동산이 이미 그 여자 명의로 넘어간 걸 확인했거든요.”송윤지는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며 무릎에 힘이 풀렸다. 송윤지는 따뜻하고 단단한 품속으로 쓰러졌다.임지강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송윤지를 바라보며 넓은 손으로 송윤지의 등을 조심스럽게 토닥였다.“오늘 소피아가 유치원에 찾아와 소란을 피운 건 윤지 씨를 일부러 곤란하게 하려는 의도였던 것 같아요.”송윤지의 눈가가 붉어졌다. 울고 싶은데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무
배현진은 고개를 살짝 돌리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너 요즘 너무 피곤한 거 아니야? 오늘은 늦었으니, 일단 푹 쉬고 다른 날 얘기하자.”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배현진은 등을 돌려 떠나버렸다.송윤지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그의 모호한 말과 행동을 떠올리며 벽에 머리를 기대고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송윤지는 알 수 있었다. 이 관계는 이제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그날 밤, 송윤지는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 못 들었다. 머릿속은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처럼 어지러웠다. 그러다 우연히 머리맡에 놓인 딸기 곰 인형을 발견했다. 송윤지는 그 인형을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송윤지는 잠이 들었다.눈 부신 빛이 그녀를 감싸며 시야를 덮었다. 빛이 사라지고 송윤지는 어딘가 낯선 작은 별장 앞에 서 있었다.마당은 화려한 팔레놉시스로 가득했다. 그 눈부신 자태에 이끌려 송윤지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집 안은 고풍스러운 유럽풍 가구로 꾸며져 있었다. 소박하면서도 우아함이 물씬 풍겼다. 그녀는 숨을 고르며 멈춰 섰다. 낯선 공간의 기운에 몸이 얼어붙은 순간, 소파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천천히 일어섰다.그는 몸을 돌렸다.임지강이었다.송윤지는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임지강이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잡았다.“윤지야, 돌아왔구나.”임지강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온화하고 어딘가 몽환적이었다.송윤지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갑자기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위층을 쳐다보며 웃었다.“아기가 울고 있네. 엄마를 찾는 모양이야.”“뭐라고요?”송윤지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송윤지는 황급히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울음소리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방 안에는 작은 요람이 있었지만, 그 안엔 아이가 아닌 베개만 놓여 있었다.그녀는 작게 비명을 내질렀다. 뒤돌아보니 임지강이 문가에 서 있었다.이번엔 그의 미소가 차갑게 변해 있었다. 눈빛은 공허했고 섬뜩한 기운마저 감돌았다.“이게
송윤지는 멍하니 고개를 저으며 겨우 미소를 지어 보였다.“송 선생님, 요즘 많이 힘드신 것 같아요. 잠깐 휴식을 취하시는 게 어떨까요?”원장은 송윤지를 배려하며 말했다.“며칠 푹 쉬시고요, 학부모가 다시 찾아오면 제가 나서서 해결할게요. 걱정하지 마세요.”“원장님, 그건...”“괜찮아요!”원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사실, 지금쯤 쉬어가실 때도 됐잖아요. 이렇게 하죠. 반에서 맡은 일들은 이 선생님께 넘기고 몇 날 며칠 푹 쉬면서 다시 에너지를 채우고 돌아오세요. 그때 우리가 힘을 합쳐 그 까다로운 학부모를 상대하면 되죠.”송윤지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고 빠르게 업무를 인수인계했다.그러나 송윤지는 집에서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입학 신청서에 적힌 “소피아”라는 이름이 마치 한 획 한 획 송윤지를 비웃고 도발하는 것 같았다. 눈을 감으면, 가슴을 꽉 조이는 듯한 불안감과 함께 그 여자가 두 팔을 교차하며 서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송윤지는 휴대전화를 들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배현진의 번호를 눌렀다.둘은 저녁에 만나기로 했다.약속 시간이 되었을 때, 송윤지는 맞은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서둘러 문을 열었다. 마침, 배현진이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송... 송윤지.”배현진의 표정은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옷 좀 갈아입고 널 만나러 가려고 했는데...”송윤지는 그런 배현진을 한참 바라보았다.여전히 깔끔하고 우아한 외모에 많은 여성이 흠모할 법한 품위와 분위기를 풍겼다.하지만 배현진의 눈빛에는 지울 수 없는 피로가 묻어 있었다.송윤지를 마주하고 배현진은 의도적으로 눈을 피하는 듯 보였다.“현진 씨.”송윤지는 조용히 배현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잖아. 현진 씨는 나한테 할 말 없어?”“음...”배현진은 머리를 긁적이며 망설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송윤지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돌려 말하지 않을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그래, 물어봐.”“소피아... 누구
설령 이 여자가 약간의 배경이 있다고 해도 이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의 가문을 모두 상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게다가, 그녀의 아들이 괴롭힌 아이 중에는 최씨 가문의 작은 공주님도 있었다.원장은 사리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번 일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이 문제를 어물쩍 넘어가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다.송윤지도 현장에 있었다. 여자의 무리한 태도 앞에서도 송윤지는 차분하고 느긋하게 말했다.“배 사모님, 제임스가 먼저 다른 아이들을 괴롭힌 것이 사실입니다.”“하지만 내 아들이 맞은 것도 사실 아닌가요?”송윤지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배 사모님 말씀대로라면, 그저 아이들 간의 장난 아니겠습니까?”“선생님...”여자는 분노로 떨며 말했다.“선생님이란 사람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죠?”“제임스가 문제를 일으켰을 때, 사모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저도 사모님의 논리가 그런 줄 알았습니다. 사모님의 아들이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는 건 단순한 장난이고 다른 아이들에게 맞은 게 잘못된 거라면, 그건 너무 이중잣대 아닌가요, 배 사모님?”여자는 눈을 부릅뜨고 숨을 헐떡였다. 한동안 송윤지를 노려보다가 갑자기 입가에 묘한 냉소를 띄웠다.“송 선생님, 제임스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시는 것 같은데요?”송윤지는 미간을 찌푸렸다.“그 아이 아버지가 누군지는 제 알 바가 아닙니다. 오늘은 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거잖아요, 가족 이야기를 하러 오신 게 아니라.”“정말로 선생님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확신하나요?”여자는 한발 다가서며 도전적인 자세를 취했다.송윤지는 의아한 기색을 보이며 무슨 말을 하려던 순간, 원장이 냉랭하게 끼어들었다.“제임스의 아빠가 누구인지 우리가 알 바 아닙니다. 하지만 사모님이 원한다면, 제임스가 괴롭혔던 아이들의 아빠가 누구인지 하나하나 소개해 드릴 수도 있어요.”“지금...”여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분노에 차서 외쳤다.“여기 다니는 아이들은 모두 대단한 가문이다 이거죠? 그래서
송윤지는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것은 거칠고 날 선 목소리였다.“송 선생님, 애들을 이렇게 가르치는 겁니까? 아이들이 싸우는 걸 그냥 방치하기나 하고. 대체 어떻게 교사의 본보기를 보이는 거예요?”송윤지는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에 화를 꾹 참으며 차분히 설명했다.“사모님, 제임스 문제에 대해선 제가 이미 여러 번 말씀드렸잖아요...”“그만하세요. 그런 변명은 듣고 싶지 않아요!”여자는 당당한 태도로 몰아붙였다.“우리 아이가 당신 반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어요. 이건 반드시 책임을 물을 겁니다. 두고 보세요!”그렇게 말한 뒤, 여자는 전화를 끊어버렸다.송윤지는 답답한 마음에 고개를 숙이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유치원에서 일하는 것은 송윤지에게 늘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일이었다. 송윤지는 아이들을 좋아했고 유치원의 환경도 너무나 좋았다. 심지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기까지 했다.하지만 이런 고약하고 말이 안 통하는 학부모를 만난 건 처음이었다.임지강은 송윤지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문제가 생긴 건가요? 제가 도와줄 일이 있다면...”“아니에요.”송윤지는 미소를 지으며 거절했다.“어떻게 또 귀찮게 할 수 없어요. 제가 직접 해결해야 할 문제예요. 학부모와의 갈등을 조율하는 것도 교사의 역할 중 하나니까요. 그러니 신경 쓰지 마세요.”“알겠어요.”“임 대표님, 오늘 너무 피곤해서요. 이만 들어가서 쉬고 싶어요. 대표님도 빨리 들어가세요.”임지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송윤지가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송윤지에게 전화를 건 여자가 누구인지, 임지강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그의 부하가 전화를 걸어왔다.“대표님, 대표님 예상대로였습니다. 배씨 가문의 도련님이 남의 아이를 키우고 있더군요.”“뭐라고?”임지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배 도련님이 외국에서 만난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그녀는 이혼 후 어린 아들을 데리고 있었습니다. 배 도련님은 그녀와 그 아
“외할아버지요!”최가원은 자랑스럽게 외치며 외할아버지를 찾으려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외할아버지는 이미 소파 뒤에 몸을 숨긴 상태였다.임우정의 얼굴은 순간 붉어지더니 이내 창백해졌다.“네 외할아버지가 또 뭘 가르쳤는데?”최가원은 조그만 입을 빠르게 움직이며 말했다.“외할아버지가 그랬어요. 사람이 배고프면 먹어야 하고, 졸리면 자야 하고, 화가 나면 욕해야 한대요!”“외할아버지가 또 이런 말도 했어요. 이런 서양 귀신 같은 애들은 절대 봐주지 말라고요! 때려눕히랬어요!”“아, 그리고 외할아버지가 말했는데, 외할머니도 젊었을 때 싸움을 정말 잘했다고 하셨어요!”“풉!”송윤지는 억지로 웃음을 참으려 했지만 결국 못 참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민망한 듯 손으로 입을 가리고 고개를 돌렸다.최가원은 마치 자신이 대단히 자랑스러운 일을 한 것처럼 얼굴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당당하게 고개를 들었다.임우정은 순간 숨이 멎을 뻔했다. 오래 참다가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육경섭!”소파 뒤에 숨어 있던 육경섭은 결국 아내에게 붙잡혀 귀를 잡힌 채 끌려 나왔다.“육경섭! 당신 애한테 대체 뭘 가르친 거야? 어떻게 이렇게 멀쩡한 여자아이를 만들 수 있냐고! 내가 최씨 가문에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겠어? 서연이를 무슨 면목으로 봐!”“아이고, 이 할멈아...”육경섭은 얼굴이 빨개지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뭐 어쨌다고 그래! 내가 뭘 잘못 가르쳤다고! 여자아이도 강하게 키워야지! 그래야 나중에 나쁜 사람 만나거나 누가 괴롭히더라도 당하지 않지.”“그걸 변명이라고 해?”“그럼 어쩌라고! 여자아이 성격은 조금 불같아야 해! 만약 가원이를 송 선생님처럼 가르쳐서 나중에 당신 동생 같은 사람을 만나면 어쩔 건데...”“육경섭!”임우정은 이를 악물며 분노했다.“당신 입 다물면 죽기라도 해?”“아이고, 아이고...”육경섭은 자신이 실언했음을 깨닫고 서둘러 얼버무렸다.임지강의 얼굴은 이미 굳어 있었고 송윤지는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몰라
“이건...”송윤지는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아직 어린아이들이지만 선악을 구별할 줄 알았다.그런데 자신이 선생님으로서 아이들만도 못한 모습을 보인다면, 과연 가르칠 자격이 있을까?송윤지는 입술을 깨물며 제임스의 상처를 살펴보고는 우선 그를 보건실로 데려갔다. 그리고 돌아와 최가원의 손을 잡고 함께 교무실로 갔다.송윤지는 최가원을 교무실 의자에 앉히고, 자신은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가원아, 선생님이 너를 혼내려고 했던 게 아니야.”송윤지는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최가원의 귀에 속삭였다.“여자아이가 남자아이와 싸우는 건, 체력적으로 불리하잖아.”작은 공주의 눈이 반짝였다. 놀람과 기쁨, 그리고 감동이 섞인 감정이 얼굴에 스쳐 갔다.그리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괜찮아요! 괜찮아요!”최가원은 작고 통통한 손으로 열심히 선생님을 달래며 말했다.“저는 안 다쳤어요! 저 싸움 잘해요! 송 선생님, 저 걱정하지 마세요!”“그래.”송윤지는 최가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이제 선생님께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말해 줄래?”최가원은 활기를 되찾은 듯 밝은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제임스가 어떻게 친구들을 괴롭혔는지, 어떻게 여자아이들의 치마를 들추고 어떻게 자신을 화나게 했는지를 하나하나 신나게 설명했다.마지막으로 최가원은 자랑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송 선생님, 걱정하지 마세요. 이런 작은 일은 강호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에요!”송윤지는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최가원이 평소 외할아버지와 가까이 지낸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 외할아버지가 바로 유명한 육경섭이었다. 경섭 형님이 키운 아이이니, 어떻게 키웠을지는 뻔했다.“그래서, 싸움 말고 다른 방법으로도 친구들을 위해 복수한 적 있어?”송윤지가 물었다.“당연하죠!”최가원은 솔직하게 대답했다.“친구들 모두 제임스를 무시하게 했어요!”“그러니까... 그 애를 고립시켰다고?”작은 최가원은 입술을 삐죽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