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그녀가 조금만 더 감정적으로 대응했더라면 최문혁과 이혼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최연준이 숨을 깊게 들이쉬던 그때 밖에서 강서연과 최연희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두 사람은 햇살 가득한 마당에 앉아있었다. 주변에는 온통 활짝 핀 아이리스꽃이었고 베리 쿠키와 마키아또의 향긋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있는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 평생 간직하고 싶을 정도였다.“걱정하지 마.”은미연이 웃으며 말했다.“네 동생이 서연 씨를 저렇게 좋아하는 걸 봐서라도 내가 최선을 다할게! 사실 최씨 가문에서 다른 사람은 다 괜찮아. 하지만 그 영감쟁이 최진혁이랑 최지한 그 녀석이...”은미연은 잘만 얘기하다가 또다시 막말을 퍼붓기 시작했다.최연준은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최진혁이 뒤에서 그를 뭐라 욕하든 은미연이 이미 대신 다 갚아줬다....자신의 출신에 대해 알게 된 후로 강서연은 한동안 겉으로는 미소를 잃진 않았지만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는 걸 최연준은 알고 있었다.가게에 손님이 많을 때는 분주히 움직여야 하니까 오히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가게가 조용할 때면 그녀는 홀로 마당의 계단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그 모습은 참으로 쓸쓸하고 서글퍼 보였다.그녀를 기쁘게 하고 싶었던 최연준은 염치 불구하고 임우정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임우정은 마침 육경섭과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고 여행지는 성남이었다.“그럼 우리랑 같이 가요!”임우정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저랑 서연이 대학교 때부터 돈 모아서 성남에 가자고 했었거든요. 지금 마침 기회도 생겼고, 서연이 무조건 좋아할 거예요.”육경섭이 어두워진 표정으로 다급하게 임우정을 잡아당기자 임우정이 그를 째려보았다.“왜? 싫어?”육경섭이 멋쩍게 웃으며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니... 사람이 많으면 북적북적하고 좋지, 뭐. 문제는 현수 씨가 우리랑 같이 가려나 모르겠네. 우정아, 어쩌면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할지도 모르잖아... 그렇죠?
최연준이 그를 힐끗 보았다. 사실 그도 그 의문이 든 지 오래였다.하지만 더욱 이상한 건 남자 중에서도 체력이 좋은 편인 두 사람이 두 여인을 따라가지 못하고 거의 녹초가 되었다는 것이다.오늘 밤 아무래도 제대로 ‘벌’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저기요, 뭘 그렇게 웃어요?”육경섭이 그의 눈앞에서 손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제야 생각에서 빠져나온 최연준은 미소를 거두어들이고 다시 차가운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섭 씨.”그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다시 바른길로 돌아갈 생각은 안 해봤어요?”육경섭이 멈칫하는가 싶더니 이내 표정이 복잡해졌다.“비록 우정 씨랑 다시 잘됐고 우정 씨도 경섭 씨를 받아들였지만 지금 삶이 살얼음판인 건 사실이잖아요. 어느 정도 권력을 얻긴 했지만 그만큼 원수도 많아졌죠. 지난번에는 제가 마침 그 호텔에 있었기에 망정이지...”최연준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만약 그런 일이 또 일어난다면 지난번 같은 우연이 다시 있을까요? 혹시라도 당신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우정 씨의 행복은 어떡해요?”육경섭이 어두워진 얼굴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사실 그도 진작 생각은 했었다. 그때 최지한이 그에게 일을 시킬 때도 신분 세탁을 해주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최지한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서 함부로 믿어선 안 되었다.육경섭은 최연준을 빤히 쳐다보며 뭔가 얘기하려다가 결국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제가 도와줄게요.”최연준이 나지막이 말했다.“하지만 그 과정이 쉽진 않을 거고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이 훨씬 더 오래 걸릴 수도 있어요. 그리고 포기해야 하는 것도 있어요.”“괜찮아요.”육경섭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즉각 답했다.“우정이랑 함께할 수만 있다면 모든 걸 다 포기해도 좋아요.”최연준은 그를 한참 동안 빤히 쳐다보다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웃었다.그때 강서연과 임우정이 마침 그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는 알 수 없으나 꽤 잘 지내는 것 같았다.임우정이 손을 흔들
“그렇게 얘기하면 어떡해.”육경섭이 맞장구를 쳤다.“겨우 장가갔는데 와이프를 잘 지켜야지...”“긁혀서 상처가 나도 괜찮아요.”그때 옆에서 갑자기 장사꾼의 소리가 들려왔다.“저한테 특효약이 있는데 절대 흉터 안 져요!”장사꾼의 말에 육경섭과 임우정이 배꼽 빠져라 웃어댔다.강서연은 정교한 약병에 끌렸는지 약병을 들고 살폈다. 옛날 느낌이 물씬 나는 포장에 가볍고 작아서 한 손에 잡기에도 딱이었다. 약을 공예품처럼 만드는 건 또 처음 봤다.장사꾼이 그녀에게 활짝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한 병 살래요? 이건 재희 제약에서 만든 건데 제가 십 년 넘게 팔았어요. 상도의를 지키면서 장사하는 사람입니다, 저!”“재희 제약?”“네! 윤제 그룹의 제약 공장 말이에요.”최연준이 살짝 멈칫하더니 눈살을 찌푸렸다.‘성남과 남양이 가깝긴 하다만... 설마 저 사람이 말한 윤제 그룹이 바로 남양의 윤씨 가문인가?’그들은 한참 동안 걷다가 사람이 비교적 드문 곳에 왔다. 임우정은 강서연과 함께 길거리 음식을 먹으러 갔고 두 남자는 여전히 그녀들 뒤를 따랐다.최연준의 안색이 이상함을 눈치챈 육경섭이 물었다.“무슨 일 있어요?”“아니에요.”덤덤하게 대답하던 최연준이 잠깐 생각하다가 물었다.“아까 약 장사꾼이 윤제 그룹이고 뭐고 하던데, 들어본 적이 있어요?”“당연하죠. 남양에서 아주 유명해요.”육경섭이 조직 보스와 여러 지역을 돌아다녀 이런 일에 대해 들은 바가 많았다.“윤제 그룹은 남양 일대에서 그래도 꽤 세력이 있어요. 예전에 의사 집안이어서 지금까지 제약 공장을 남겨두고 있대요.”“그런데 그 약들이 왜 야시장에서 팔리고 있죠?”“재희 제약의 약값이 저렴한 데다가 약효까지 좋아서 인기가 아주 좋아요. 그리고 다른 큰 제약 공장처럼 거드름 부리지 않아서 곳곳에서 재희 제약의 약을 볼 수 있거든요. 게다가 가격이 너무 저렴해서 일반인들도 다 구매할 수 있으니까 모조품을 만드는 사람도 없어요.”최연준이 실눈을 떴다.“그럼 아주 양심적인 기업이
두 남자가 이구동성으로 소리를 질렀다.“안 돼!”“안 돼요!”물론 그들의 반대는 당연히 무효였다. 어쨌거나 남자와 함께 자는 것보다 와이프를 화나게 하는 결과가 더 심각하니 말이다.늦은 시각, 육경섭은 쇼핑백을 바리바리 들고 풀이 죽은 얼굴로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 방 문을 열고 푹신푹신한 큰 침대를 본 순간 그는 울분이 터질 것만 같았다.그에 비해 최연준은 덤덤하기만 했다. 묵묵히 겉옷을 벗고 술 진열장에서 와인 한 병을 꺼내 얼음을 넣고 천천히 흔들어 마셨다.“연준 씨, 당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반드시 한배를 타야 해요!”육경섭이 이를 꽉 깨물었다.“내일부터 자기 여자는 자기가 알아서 책임져요. 절대 저 둘이 붙어있게 해서는 안 돼요. 들었어요?”육경섭이 씩씩거리며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최연준은 그를 보며 덤덤하게 웃어 보이고는 창밖의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후, 그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남양, 윤제 그룹, 윤정재, 제약 공장...이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최진혁이 그를 해하려는 원인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윤정재는 왜 그를 도우려 했을까? 그깟 1억 불이 넘는 보험금에 흔들렸단 말인가?윤씨 가문의 세력이 최씨 가문보다는 못해도, 돈을 가장 많이 버는 의약과 정보 과학기술 영역의 사업을 하고 있어 절대 돈이 부족할 리가 없었다. 하여 윤정재가 이렇게까지 하는 건 분명 다른 목적이 있을 것이다!...성남에서 돌아간 후, 강서연은 전보다 눈에 띄게 웃음이 많아졌다. 최연준이 조금 시름을 놓던 그때 유찬혁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연준 형, 형이 나한테 쓰라고 했던 성명서 있잖아요. 영감님께서 막으셨어요. 형 아무래도 오성에 한 번 다녀가야겠어요.”“응, 알았어.”최연준은 진작 예상하였다. 유찬혁에게 성명서를 쓰라고 할 때부터 그는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다.전화를 끊은 최연준은 고개를 들어 아직 집 청소를 하는 강서연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강서연은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했다
“서연아.”그가 잠깐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나 내일부터... 합숙 훈련에 들어가.”강서연이 화들짝 놀랐다.“또 경기가 있어요?”“응.”그가 대충 얼버무렸다.“이번에는 합숙 훈련이 꽤 길 것 같아.”강서연의 표정이 우울해졌다. 하지만 최연준이 좋아하는 일이라 그녀는 무조건 응원했다.최연준은 그녀에게 다가가 허리를 감싸 안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향긋한 냄새가 그의 코끝을 스쳤다.“여보, 내가 예전에 가르쳤던 동작 기억나?”강서연이 두 눈을 깜빡이더니 별다른 생각 없이 그의 질문에 답했다.“기억나요.”그러자 최연준이 음흉하게 웃었다.“어느 정도 기억해?”순진한 강서연이 동작을 보여줬다.“만약 누군가 앞에서 날 공격하면 이렇게... 뒤에서 공격하면 이렇게...”그런데 그녀가 그의 손목을 잡았을 때 최연준은 그녀를 더욱더 세게 끌어안았다. 최연준의 힘이 더 세다 보니 그녀가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여보... 으악!”최연준은 그녀를 번쩍 들어 곧장 안방의 큰 침대로 향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강서연은 작은 주먹으로 그의 가슴팍을 두드리며 두 눈을 부릅떴다.“아까 한 동작들은 다 괜찮았어.”최연준이 목소리를 내리깔고 가볍게 웃었다.“그럼 지금...”그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점점 가까이 다가갔다....“도련님, 도착했어요.”방한서가 차를 최상 빌라 밖에 세웠다.최연준이 유리창 밖을 힐끗 보더니 조금 전 정신을 딴 데 팔아 민망한지 마른기침을 두어 번 했다.방한서는 시선을 내리깔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도련님. 강서연 씨 쪽에 사람을 많이 보냈으니까 절대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그래.”최연준이 덤덤하게 대답했다.비행기에 몸을 실은 내내 그녀의 부드럽고 간질간질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고 보호 본능을 자극하듯 그의 가슴팍에 살포시 기대던 모습이 그리웠다...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강서연밖에 없었다.오성에 도
최연준의 눈빛이 어두워졌고 널찍한 등도 굳어버린 것 같았다. 최재원의 질문에도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분위기가 어찌나 싸늘한지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최재원이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더욱 무거운 말투로 다시 한번 물었다.“강서연이 누구냐고!”“저의 와이프 입니다.”최재원이 손을 들어 상을 탁 내려치자 순식간에 깨져 산산이 조각났다.최연준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손등의 핏줄이 다 터질 것만 같았다. 최재원이 성난 목소리로 물었다.“언제 결혼했어? 이 여자는 또 언제 만났고?”“만약 내가 이 발표를 막지 않았더라면 정말 최씨 가문의 절반을 남한테 줄 생각이었어?”집사와 도우미들이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서재 안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감히 숨소리도 내질 못했고 방한서마저도 여간 놀란 게 아니었다.최재원은 일을 처리하면서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사람이라 오늘같이 성을 내는 일은 그야말로 드물었다.오늘 할아버지와 손자는 마치 끝장을 볼 기세로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가까이 다가가기는커녕 소리만 들어도 저도 모르게 오금이 저렸다.“네 명의로 된 재산, 주식, 펀드, 그리고 해외 부동산과 현금까지 전부 그 여자한테 절반 나눠주려고?”최재원이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연준아, 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니!”최연준이 입술을 적시고는 단호하게 말했다.“절반이 아니라... 전부 다 줄 거예요.”“뭐라고?”“성명서에 절반이라고 쓴 건 아직 완전히 제 와이프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나중에 완전히 제 여자가 된다면 그땐 다 그 사람 것이에요.”최재원이 냉기가 감도는 눈빛으로 그를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결혼하지 않았단 말이야?”최연준이 이를 꽉 깨물었다. 그가 아무 말이 없자 최재원은 그제야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는 최연준이 비행기 사고를 당한 후로 줄곧 강주에서 요양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여 강서연과는 그 시기에 만났을 거라고 짐작했다.사람이 몸을 다치게 되면 의지력도 약해지고 그 틈을
“오성이 이렇게나 큰데 걔 하나 발붙일 자리가 없겠어?”최재원이 드래곤 지팡이를 잡았다.“걔가 지낼 집 하나 마련해서 나중에 네가 결혼하면 한 달에 몇 번 정도 보러 가. 걔가 사고를 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네 곁에 둬도 좋다!”최연준이 멈칫하더니 한참 후에 차갑게 웃었다.“서연이더러 제 내연녀를 하란 말씀이셨군요.”“그런 여자는 내연녀 자리도 아까워!”최연준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그건 말도 안 돼요!”그가 목청을 높였다.“절대 서연이가 그런 일을 당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예요!”“그럼 어떡할 건데? 결혼이라도 하려고?”최재원이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너 그 여자한테 아주 홀딱 빠졌구나!”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창문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가슴을 움켜쥐었다.“당장 그 애랑 헤어져! 나연이와 결혼하고 싶지 않다면 다른 3대 가문에서 골라도 되잖아!”“제 평생에 서연이 말고 다른 여자는 없어요!”“다른 여자는 없다고?”최재원이 목청을 높이며 그를 무섭게 째려보았다.“만약 걔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최연준은 순간 머리가 윙 했고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최재원이 계속하여 그를 몰아붙였다.“연준아, 넌 내가 직접 키운 우리 가문의 후계자야. 뭘 하든 넌 항상 최상 그룹부터 생각해야 해. 그리고 할아버지의 책임은 너의 앞길을 막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는 거야... 여자도 포함해서 말이지.”최연준의 눈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가 다시 풀었다. 분위기가 다시 살얼음판이 되었고 그가 아무 말이 없자 최재원의 얼굴에 점점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그런데 그가 손을 내밀어 최연준의 어깨를 다독이려던 순간, 최연준이 갑자기 휙 피했다.최연준은 고개를 들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매섭고 싸늘한 눈빛은 마치 야밤에 산속을 거니는 한 마리 맹수 같았다.“할아버지.”그가 또박또박 말했다.“만약 서연이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할아버지도 직접 키운 후계자를 잃으실 겁니다!”“너..
최연준이 발걸음을 멈췄다. 그의 우람한 뒷모습이 오늘따라 더욱 차가워 보였다. 그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임나연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입꼬리를 씩 올렸다. 차가운 눈빛 속에 비웃음이 담겨있었다.“결혼? 나연 씨, 우리가 언제 혼약을 맺은 적이 있던가요?”최연준이 갑자기 그녀를 멀리하며 존댓말을 쓰기 시작했다.임나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내가 알고 있는 혼약은 두 사람이 서로 원해야만 맺는 거라고 들었어요. 하지만 아쉽게도 우린 그 조건에 부합되지 않아요!”“최연준 너...”“앞으로는 연준 씨라고 불러요. 그리고 존댓말도 하고요.”최연준이 싸늘하게 말했다.“나연 씨, 우리가 아직 친구처럼 이름을 막 부를 정도로 친하진 않은 것 같은데!”최연준은 자기 할 말만 하고 홱 돌아섰다. 홀로 남겨진 임나연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뒷모습이 그녀의 시야에서 점점 사라졌다.임나연이 이를 깨물면서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마음속에 마치 돌덩이가 앉은 듯 답답하기만 했다.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쉬면서 마음을 가라앉힌 후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최재원의 표정도 말이 아니게 어두웠다.서재로 들어간 임나연은 깨져 난장판이 된 찻그릇과 바닥에 놓인 드래곤 지팡이를 본 순간 방금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임나연도 이런 상황에 끼어들 수 없어 인사치레로 몇 마디 위로를 건넨 뒤 떠나려는데 티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휴대 전화가 갑자기 진동했다.“할아버지, 이건...”최재원이 그녀를 힐끗 보며 말했다.“연준이가 까먹고 놓고 갔나 봐. 나연아, 네가 가져다줘.”생각지도 못한 기회에 임나연은 바로 웃으며 알겠다고 했다.“연준이 만나면 설득 좀 해줘.”최재원이 덤덤하게 말했다.“나연아, 난 네가 마음이 넓은 애라는 거 알아. 이 일 때문에 연준이를 탓하진 않을 거지?”임나연이 화들짝 놀랐다. 아까 문 앞에서 내연녀고 어쩌고 어렴풋이 듣긴 들었다.‘나중에 내가 연준이랑 결혼하게 되면 연준이가 밖